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96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서로를 정죄 하는가 롬 8:33-34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55

롬9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정죄하는가






롬8:33-34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난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국학생회에서 매년 한국의 유명 목회자를 한 분씩 초청해서 1주일동안  그분의 목회 노하우를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초청된 목회자는 1주일 내내 낮에는 골프 치다가 저녁 때 잠깐 강의를 했습니다. 소위 큰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자랑스럽게 목회 노하우를 가르쳐 줬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크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내에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잘 조직해서 그들이 빠져나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장로들을 장악해서 목회를 쉽게 할 수 있는가?’


씨줄 날줄로 조직을 딱 맞춰주면 목사가 없어도 그 교회는 움직인다는 합니다. 여러 목회 노하우 중에서 가장 교활한 기술은 교인들의 종교심을 부추겨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숙한 성도상을 만들어서 제시해 주고 거기에 못 미치는 이들이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부끄러워 하면 목회가 쉬워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인들의 종교 행위의 열심에 대한 강조와 질책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성도가 십일조를 떼어 먹을 수 있는가?’

‘어떻게 특별새벽기도 기간에 결석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도의 인내심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는가?’  

‘어떻게 성도라는 사람이 그런 더러운 말을 하는가?’

‘어떻게 성도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는가?’


바로 이런 내용 말입니다. ‘그렇게 살고도 당신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책과 권면을 매주 던집니다. 그리고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며 예를 한 가지만 들어줍니다. 그러면 회중은 강대상에 선 목회자와 자기 사이의 갭을 발견하고 자기들보다 더 성숙하고 정결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설교자의 말에 복종하게 된다는 겁니다. 


또, 장로나 안수집사들에게 그들이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업무를 맡기면, 당연히 완수하지 못한 그들이 그 일을 자기에게 맡겨준 목사에게 미안해서 말을 잘 듣는다는 기술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목사가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분, 교회의 목회자는 하나님입니다. 목사가 목회자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이고, 그 머리에 의해서 지체들이 움직여가는 겁니다. 목사는 교회의 목회라는 것이 주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매주 말씀 속에서 회중에게 대언해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경영노리, 운영의 기술이 웬말입니까?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은 말씀엔 관심이 없고 훌륭한 경영인, CEO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사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그들은 목사를 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사업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속한 조직을 탄탄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지도자를 찾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가 속한 집단을 세상이 칭찬하는 그런 집단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거룩한 지도자를 찾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를 이 세상 속에서 착하고 순결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성인군자를 찾을까?’


사람들은 이런 걸 고민합니다. 행정능력, 경영능력,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붙들어 둘 수 있는 능력이 있는 CEO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학벌 좋고, 인품 좋고, 사람들을 많이 모은 경험이 있고, 경영능력이 탁월한 목회자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마치 흥신소 직원처럼 자신들이 모실 목사들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그런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짧고 간결하게 해주면 좋아해요. 그냥 쉽고 간단하게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미리 사람들이 선호하는 목회자상을 이렇게 경고해 놓은 겁니다.



딤후4:3-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허탄한 이야기를 해주면 회중은 좋아합니다. 바른 교훈,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욕을 채워주고,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허탄한 스승을 두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허탄한 스승들은 무얼 강조합니까? 진리는 ‘인간은 Nothing이며 하나님이 전부다’라고 말하는 반면, 허탄한 스승은 ‘인간이 전부고 하나님은 너희를 도와주는 분이다’라는 거짓말을 말합니다. 


인간 보편의 자존심, ‘인간이라면, 성도라면, 적어도 우리 교회 교인이라면...’ 이런 그럴듯한 목표지점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에 대해서 살짝 흘려주면 사람들은 시원해 합니다. 그게 아담들의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거든요. 그것이 그 마음의 실체, 정체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숙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그런 말씀을 전해준 그 허탄한 설교자를 칭찬합니다. 그 설교자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긁어주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심지어 타종교인까지도 그를 칭찬합니다.



눅6:26 모든 사람이(보편적 인간 군상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해주고 존경하는 목회를 하는 사람, ‘올바른 교회상이다’ ‘올바른 목회자상이다’ 세상까지 칭찬해주는 그런 교회와 사람은 사실 거짓 선지자에 가깝다는 겁니다. 올바른 교회, 진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모두에게 칭찬받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라는 건 어려운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칭찬하는데, 세상도 같이 칭찬하면 그게 ‘모두’입니다. 진짜 설교자는 어떤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한 비수를 던지는 사람일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수십년 동안의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부정해 버리는 못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보편적 아담들이 원하는 것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아담들이 정말 원치 않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만 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자꾸 아니라고, 내려가라고 하면 인간들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겁니다. 심지어 “사회정의나 도덕, 윤리, 이런 사회나 세상의 보편적 가치도 인간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이 같이 칭찬해 줍니까? 어떻게 그러한 이들을 온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해 주겠습니까?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보편적 인간의 지향성과 방향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일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도로써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 그 성숙한 지경이 있다.”라는 식으로.

성도의 자격, 성도의 열심, 성도의 헌신 등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하는 사람들에게 야단과 격려, 채찍과 당근을 교대로 주는 겁니다. 거기에 반드시 따라오는 게 말씀에 나오는 ‘송사와 정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목표지점을 제시받습니다. 그러면 즉시 자기를 송사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친 나 말고, 내가 아는 나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제시된 목표지점이 이 세상이 온통 합의하는 거룩하고 정의롭고 성숙하다고 하는 목표지점일 때에는 그 사람의 정죄와 송사가 더욱 심해지고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행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인가!’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 넌 정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거냐?’

‘넌 구원 못 받은 자일 수도 있겠다.’

‘넌 왜 맨날 제자리야?’

이렇게 자기자신에게 몰입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오는 거지,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를 근거로 주어진 게 아닌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허턴한 율법으로 받게 되면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쓰레기 취급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다시 나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왜 아직도 새벽기도를 이렇게 못 나가!”

“왜 남들은 금식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금식 한 번 못해!”

이렇게 자기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고 자랑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시선은 그 사랑을 향해야지, 자신의 육, 자기의 행위를 향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칭송을 받는 자도 자기의 육을 바라보면 송사와 정죄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은 무엇으로도 자기를 채울 수 없어요. 이게 존재의 결핍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 상태입니다. 소유의 결핍은 얼마든지 채울 수 있어요. 그러나 존재의 결핍은 하나님 이외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죽었다고 하지 전부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도 그 사람에게는 안 죽은 겁니다. 십자가에서 “너 어떻게 사는지 내가 볼거야.” 하십니다.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나를 지켜보시는 겁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로 칭송받고 있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육을 스스로 바라보면 송사와 정죄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존재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자기를 바라보면 늘 부족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성숙한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본 받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하며 그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열심히 헌신을 합니다. 그러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와 무관한 자가 되는 거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내가 이 모양으로 살면 안 되겠죠?’ 하면서 자기 몸을 불태워버리면 그걸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 신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온 겁니다. 아직도 자기의 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 수준에 머문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에 빠져있는 겁니다. 그건 은혜의 신학이 아닙니다. 아닌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무서운 율법주의인 겁니다. 그러한 송사와 정죄의 율법은 절대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롬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죄와 사망의 법은 똑같습니다. 그냥 말씀입니다.

성령, 성경말씀, 예수님 말씀, 말씀이신 예수..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내용으로 깨달아져서 생명의 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가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죄가 웬말이냐고 하는 겁니다. 


이 내용이 나온 2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줬다는 겁니다. 진리의 말씀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율법을 진리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무엇이 우리를 정죄하겠느냐? 

십일조 좀 못한다고 정죄 받아야 되나? 교회 봉사 좀 게을리 한다고, 새벽기도 안한다고, 교회 좀 몇 주 빠졌다고 마귀새끼인 겁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해방된 자들을 도대체 무엇이 다시 구속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걸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판단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세상에 1만 스승은 있지만 아비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아비는 무엇입니까? 아들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아비가 없다는 겁니다. 도덕 강연이나 윤리 강연을 잘 들어보면, 인간 보편의 부족함을 송사하고 정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늘 ‘앞으로 이렇게 살아. 훌륭한 사람이 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말씀은 늘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단호합니다.

‘너희를 의롭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법을 설명하고 도덕을 논하는 인간들이 설정하고 상정해 놓은 의의 기준에 맞춰서 의인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인데, 무엇으로 너희를 정죄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그 사랑을 부어주신 게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의롭게 하셨는데 또다시 너희를 무엇으로 정죄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의롭게 된 성도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선의 재료고 선물인데 도대체 무엇이 정죄의 대상이 되며 송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 이것이 로마서 8장의 맥락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그런즉 의롭게 된 자들을 무엇이 정죄하겠느냐?’를 그냥 다 풀어놓은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겪는 환난이나 고통이 너희를 벌하려고 주신 것이냐?’ 이런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겁니다.


얼마전에 동성애로 고민하는 사람이 제게 이메일을 했는데, 그런 비정상적인 성 정체성을 가진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자기가 밉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상담을 한 거겠죠. 그럼에도 그는 정죄를 받아야 되는 겁니까? 그거 못 고치면 천국 못 갑니까? 여러분은 자기의 단점을 다 고친 다음에 천국 갈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의 내용을 알면 그 그릇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진짜 내용을 알면 그 표면적 모형은 그 즉시 부정되는 겁니다. 피조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을 벗어나 우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악도 그렇습니다. 


사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이게 구원입니다. ‘나는 진리의 띠로 너를 동여서 반드시 내 아들을 만들거야. 네가 나를 몰랐다 해도.’ 네가 나를 알아서 구원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에스겔서에도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서 살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아났더니 하나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만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게 이 역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환난은 ‘라아’라는 단어로 ‘악’이란 뜻입니다. 악을 누가 창조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선도 하나님이, 악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선악과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왜? 그걸로 생명이 뭔지 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동성애라는 건 하나님이 의도하지도 않은 걸 인간이 그냥 만들어 낸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동성애라는 걸 우리 인간에게 모형으로 던져준 걸까요? 

성경에서 남자는 항상 남편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여자는 항상 땅의 존재인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땅의 이름이 전부 여성형입니다.

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그런데 이 땅의 존재들, 여자, 신부가 하나님인 그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 땅의 것들, 심지어 그 하나님, 남자를 이 땅의 존재인 율법, 여자로 받아들여 사랑해 버리면 그걸 동성애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그걸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알면, 그 동성애라는 현상은 우리에게 이제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저분하게 어떻게 같은 성끼리 그럴 수 있어?’

이성끼리의 사랑은 그렇게 거룩하고 순결합니까? 어차피 인간은 자기를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만족스럽지 않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단번에 쳐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가 깨끗합니까? 물론 그게 옳다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그러한 것으로 아파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나를 죽이고 싶어야죠.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이라고 합니다. ‘살인으로 간주할거야’가 아니라 ‘그게 살인이다’입니다. 왜? 이웃에게 생명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것이 사랑,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살려내지 못하면 그를 죽이는 거니까 살인인 겁니다.


 그러면 동성애가 살인보다 더 더러운 죄입니까? 우리는 매일 살인을 하면서 몇 가지 죄를 죄라고 규정해 놓고 이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걸 전부 집어던집니다. 그래야 자신이 깨끗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이라는 건 지독하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걸 죄라고 하고, 동성애도 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자기들이 합의한 더럽고 추악한 죄라고 하는 그것만 안 지으면 그냥 정정당당하게 사랍답게 사는 건 줄 알고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영적 한센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모세를 보낼 때, 왜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걸리게 하고, 그걸 고쳐 줬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그분의 백성을 건져내라는 겁니다. 그 백성이 세상에 살면서 그게 고통인 줄 모르니 그분이 고치겠다고 하는 의미였습니다.


한센병은 무엇입니까? 통점이 사라지는 겁니다. 코가 없어지는데 아프지 않고, 손가락이 떨어지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그 한센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게 뭡니까? 고통, 아픔입니다. 당연히 아파야 할 그 자리를 아파하지 않고, 몇 명의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느라고 자신에게 어떤 고통이 있는 줄 모르는 자들에게 ‘정작 아픈 건 나로구나!’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며,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것을 짓고 살아가는 그가 하나님 앞에 더 성숙한 자입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는 깨끗해’ 하는 우리가 성숙한 자입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다른 이들의 나타난 현상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마세요. 성경이 말하는 건 그겁니다. 말씀은 ‘도대체 무엇으로 너희 자신과 네 이웃을 정죄하고 송사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분이 고쳐주신다는데 무엇이 송사할 거리가 됩니까? 

성도의 육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이 성경에 괜히 쓰여있는 게 아닙니다. 


영, 그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난 자들에게 그 육의 자격이라는 건 하나님의 관심 밖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십니다. 다만 진리를 깨달은 성도에게는 다른 삶이 있는데 그게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그건 자격이나 조건과는 무관한 삶입니다.  


세상과 성도의 차별된 삶은 세상도 충분히 분별해 낼 수 있는, 그들도 흉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차별된 삶이 아닙니다. 묶여있었던 그 세상과 법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 자의 자유와 치유와 성숙인 겁니다. 바울은 말씀에서 아주 엄청난 진술을 합니다. ‘너희가 성도라면 너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조차도 정죄거리가 아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난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섬겨주는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합니다. 


이 구절은 ‘누가 정죄 하겠는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죽인 그리스도 예수가?’ 이렇게 묻는 겁니다. 

‘누가 정죄를 하겠니? 그래, 다른 건 아니라고 치자. 그러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죽였다. 그러면 그분이 너희를 정죄하겠니?’ 자세히 보면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분은 죽으셨다’에서 ‘죽으셨다’는 ‘아포드네스코’입니다. 그리고 드네스코의 명사형은 ‘다나토스’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은 ‘에게이로’로 ‘다시 영으로 살아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은 ‘덱시오스’는 ‘데코마이; 영접하다. 받아들이다’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을 영접한 자, 그분을 받은 자’를 오른(옳은) 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편은 다 오른 편입니다. 오른 편, 우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오른 편에 있는 양이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을 왼편의 염소라고 하는 겁니다. 


오른 편은 ‘right side' 하나님 편,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너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고 하는 건 너희가 하나님 편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가 우편에 계시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에게이로’ 살아나서 무엇을 간구하십니까? 너희도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라고 간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육으로 죽는 너희들의 육이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이 증명되는 그것이 어떻게 정죄거리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은 그렇게 말씀의 완성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피조물에 대한 신의 자기 계시는 ‘신의 죽음’입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이 그렇게 앞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기 계시, 낮아짐, ‘인카네이션’ 죽음 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 주고자 그 하나님이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안으로 오신 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육도 부정합니다. 

‘진짜 산다는 건 바로 하나님 은혜로 사는 거구나’를 아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안의 그리스도가 간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는데, 육이 부정되는데 그게 왜 송사꺼리며 정죄꺼리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냥 그것으로 너희의 육이 장렬히 전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기 싫으니까 그 육을 어떻게든 개발해서 하나님 앞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그게 정죄꺼리가 되는 겁니다.


‘너는 왜 아직도 그 모양이야?’

‘하나님도 육으로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서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남편이 되셨는데, 너희가 뭔데 그 육을 개발해서 하나님 앞에 가겠다고 하는 거야?’ 이런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너희 스스로 송사, 정죄하고 송사하는 거 아니냐? 너희를 의롭다 하신 건 하나님이지, 세상의 시선과과 판단기준이 너희를 의롭게 한 거 아니잖아. 너희가 여전히 그렇게 송사와 정죄 안에 있으면 너희는 진리와 복음을 모르는 자야’라는 겁니다.


여기서 ‘에게이로’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개역성경은 그냥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 단어는 ‘죽어있던 기능이 조합되어 존재가 되다’라는 말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마른뼈들이 골짜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뼈들은 힘줄이 끊어지고 관절이 썩으면 탕탕 튕겨져 다 흩어집니다. 그러면 산 자들의 그 기능은 전부 없어지는 겁니다. 모든 기능이 상실되는 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걸 ‘네크로스’라고 하죠.

 

성경에서 ‘네크로스’라는 건 그냥 죽음, 육의 죽음을 뜻하는데, 살아있는 네페쉬, 살아있는 존재들이 진짜 들어야 할 그 소리를 못 듣고, 진짜 ‘호라오’ 하여 봐야 할 그걸 못 보면 그 존재를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끝까지 그걸 못 보고 못 듣고 먹어야 할 거 못 먹고 그냥 죽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그냥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 때도 죽은 자고, 숨이 멈춘 후에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내가 진짜 들어야 할 건 이게 아니구나. 내가 진짜 봐야 할 건 이게 아니구나’라고 알게 되어 어떤 걸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걸 ‘에게이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기능들이 조합이 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걸 부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데, 이 상태를 ‘다나토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말씀의 완성으로 죽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으면 ‘내가 죽은 자 맞구나’라는 걸 알게 되어 진짜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상태가 된 사람들을 ‘아나스타타시스, 부활’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열심히 종교적인 행위를 하다가 나중에 언젠가 살아나는 걸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산 자의 부활’은 지금 이 땅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가진 사람을 성경은 ‘에게이로, 살았다’고 하고, 그런 사람들을 ‘아나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스는 ‘아나(위로)’와 ‘이스테미(똑바로 서다)’라는 뜻입니다. ‘쿰’이란 말과 같습니다. 위로 똑바로 서면 그걸 부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 나오는 게 이런 내용입니다. 어떠한 이들에게 나오는 현상과 현실이라는 것,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진짜 보고 듣게 되면 그들은 거기서 해방이 되고 풀려나는 겁니다. 더는 그것이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들을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현실들이 감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들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세상 것이 들리고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 기쁨, 수치, 자랑, 겸손, 교만’ 이러한 것들이 그냥 하나로 들리고 보이면 됩니다. ‘그렇지, 그걸 이야기 하는 거지’라고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모든 현상과 사건과 감정, 그 모든 것이 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파스, 모든 것’으로 보이고 들리면 그들에게 죄가 무슨 의미이며, 악이 무슨 의미이며, 의가 무슨 의미이며, 선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게 무슨 의미야? 게다가 생명은 뭐야?’라고까지 합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이 갖고 있고 알고 있는 그 생명으로 진리를 설명해 주려고 ‘생명, 생명’ 했는데, 그걸 안 자에게 생명은 뭐냐? 그걸 안 자에게 그 생명이 그 생명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들에게 좌파는 뭐고 우파는 뭡니까? 진보는 뭐고 보수는 뭡니까?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생명과 관계 없으므로. 세상은 나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들은 내 말을 못 듣습니다. 듣는다는 건 그릇이 된만큼 듣는 겁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능력, 그릇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겁니다. 어떤 소리보다도 큰데 그릇에 담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리는 우리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입니까? 내가 육으로 실패해야 그걸 성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듣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안 들려야 합니다. 


그렇게 ‘에게이로’한 이들을 아래에서 위로 똑바로 선 자들, ‘아나스타시스, 부활’라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걸 들어 그 세상에 묶이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좌우도 없고, 명암과도 무관하게 그냥 똑바로 선 존재들의 상태인 겁니다. 


‘이스테미’에서 ‘스타우로스, 십자가’가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기둥이 그렇게 선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그 어두움의 내용을 볼 줄 아는 ‘에게이로’의 부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산 자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그 죽은 육신을 열심히 채찍질하면서 그 육신의 열매를 근거로 먼 훗날의 부활을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걸 산 자라고 합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자들이구나. 이마와 손에 경문으로 차고 다니면 뭐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그것만 크게 만들면 뭐해?” 이렇게 꾸짖으시는 겁니다.



마22:24-32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 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부활은 그런 식의 시집 장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네 안에 남편으로 받아들여 그 남편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유대인에게는 ‘형사취수제’라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 형수가 그 동생에게 시집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그 동생이 죽고 또 밑에 동생이 죽고, 그렇게 죽어서 일곱 형제가 다 죽고 결국엔 형수도 죽어서 나중에 부활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지금 남편이랑 또 결혼해야 된다면 그 천국 안 가고 싶은 사람 많죠?^^


하나님이 이 땅에 혼인이라는 걸 준 건 하나님이라는 남편과 신부인 교회의 연합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 데려와 봐” 하신 겁니다. 그랬더니 다섯 남편이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서의 그 남편, 곧 율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율법은 아니어야죠. 내 남편이면 안되는 거죠. 율법은 내 밖의 법인데, 어떻게 그 율법이 내 안에 들어옵니까? 어떻게 마음에, 심비에 새겨집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며 그분 자신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남편을 소개하러 왔지만 육으로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남편은 어떤 남편으로 와야 합니까? 죽고 일곱 번째 그리스도의 영으로 여자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칠로 완성된 일곱 번째 남편인 겁니다.


주님이 지금 칠형제 이야기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자에게 그걸 빌어 복음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 진짜 남편이 뭔지를 진리로 설명해 줄게.” 하시면서 ‘여섯번째 남편, 그 예수도 아니야.’ 그 일곱으로, 완성으로 올 그 남편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그때 그를 ‘살았다고 한다’를 말씀해 주는 겁니다. 나중에 너희들이 부활해서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들어 설명하시며 그들을 ‘산 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2천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주님이 그들을 ‘산 자’라고 합니다. 육은 죽었지만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그 생명력으로 살아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삶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하는 겁니다. 그걸 제대로 이해하면 요셉의 삶이 됩니다. 요셉이 섭섭하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삶으로는 뭘 알 수 있어요? 아브람은 위대한 아버지,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위대한 아버지는 뭡니까? ‘위대한 하나님’ 내 밖의, 나의 섬김의 대상인 그 하나님인 겁니다. 그게 열국의 아버지, 모든 이들의 아버지가 될려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걸 설명해 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자체가. 이삭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은 ‘약속’으로 탄생하는 거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그렇게 하여 그 하나님 없이는, 그 은혜와 사랑 없이는 절대 홀로 설 수도 없는 존재, 하나님의 사랑을 지팡이로 짚고, 그것과 한몸이 되어 걸어가야, 그게 ‘존재’라는 걸 설명해주는 게 ‘야곱, 이스라엘’입니다. 그걸 다 알면 ‘살았다’라고 하고, 그들을 ‘산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활을 말하는 거냐? 너희가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그런 자들의 외모나 됨됨이, 자격, 행위 등을 가지고 그들의 아들됨이나 성도됨의 잣대로 사용해서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송사하는 게 어찌 가당한 일이냐?”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진짜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 의미를 주님이 이런 이야기로 설명해 주세요.


마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아쿠오’ ‘듣네’라는 뜻입니다. 자연이 이 사람의 말을 듣네. 

주님이 제자들과 ‘림네, 호수’를 건너가세요. 림네는 불과 유황 불못 등에 쓰는 말입니다. 

실로암 못 같은 데는 ‘콜륌베드라(수영장, 연못)’를 씁니다. 그러니까 림네는 빠지면 죽는 곳입니다. 거기를 건너려면 반드시 예수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네크로스’ 잠들어 있는 상태, 죽어있는 상태로는 못 건넌다는 걸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시는 겁니다. 이게 너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잠은 항상 죽음을 메타포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아퓝노오’라고 써있는데, ‘영적 무감각, 영적 무능력’을 의미합니다. 마태,마가복음에는 ‘카듀도’란 단어로 진짜 잔 것을 의미하고 죽음을 메타포합니다. 


이렇게 조합이 된 게 죽음이고, 바로 이것이 그들의 상태라는 겁니다. 이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 그 내용을 진짜 듣고 봅니다. 그래야 그 림네, 죽음의 림네를 건너간 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히브리, ‘건너간 자’가 되고, 그게 진짜 이스라엘인 겁니다.


제자들이 바다를 무서워했다고 해요. 거기에 ‘아네모스, 광풍’이 불었습니다. 미친 바람, 세상의 풍조를 뜻합니다. ‘풍조, 사조’ 세상 사람들이 합의하여 끌려가는 풍조, 사조를 ‘아네모스’라고 하는 겁니다. 


그 바람이 불면 모든 인간은 두려워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기대에 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에 못 미치면 다 실패자야. 그래서 전부 대기업 들어가고, 판사, 변호사 돼야 해’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전부 찍어내는 벽돌 같은.. 하나님은 그런 벽돌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하나가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어있는 자들은 ‘에게이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을 ‘에게이로’하라고 합니다. ‘일어나세요’ 성경이 일부러 주님에게 그 단어를 쓴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무서워 합니다.


바다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아랫물을 바다라 하고 ‘얌'이라고 씁니다. ‘얌'은 파자하면, 단어 자체가 ’진리를 주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진리를 받으면 됩니다. 그 바다, 그 광풍, 아네모스, 세상의 풍조, 사조, 세상의 기대, 잣대.. 그것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무서움의 상대가 되면 안됩니다. 그게 ’죽었다‘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게이로’ 해야 합니다. 그 기능이 조합이 되어 진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는 그들 앞에 ‘에게이로’ 일어나십니다. 주님이 ‘아포드네스코’ ‘다나토스’로 죽고 ‘에게이로’ 해서 너희 안에 계신데,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는데, 무엇으로 너희가 자신과 이웃을 정죄하고 송사하겠느냐? 이게 오늘 말씀의 중심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이 세상은 풍랑이 일고 무시무시한 곳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걸 ‘육의 세상은 이런 곳이기 때문에 난 여기서 나가야 되는 거지’라고 알게 되면, 그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일지만 나를 밀어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밀어줄 겁니다. 그 바다가 내 말을 듣고 잔잔해지는 겁니다. 


삶 속에 풍랑은 언제나 일지만 그걸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 이것으로 내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지.’라고 깨달으면 그건 이제 내게 풍랑이 아닌 겁니다. 그때 내 안에 있는 내 말로 바다를 밟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똑같은 그 바다를 딛고 걸어오신 겁니다. ‘이게 믿음 있는 자들의 삶이다’라는 겁니다.


20년전쯤 조디 포스터 주연의 ‘넬’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노스캐롤라이나 숲속에서 혼자 막 살아가는데 문명인들에게 발견됐습니다. 그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언어가 발견됐다며 신기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그가 한 말은 영어였습니다. 그가 이상한 말을 한 건 안면마비였던 엄마 때문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안면마비가 된 엄마와 의사소통을 하다보니 그도 그 소리를 배운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계세요?

여러분을 정죄하고 송사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는 말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둥둥 떠있는 일엽편주 같은 인생이지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을 폭로시키고, ‘그런 세상에서 나와 내 땅으로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안 자에게 어찌 그것이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세상, 풍랑 이는 바다가 가라고 상정해놓은 그곳에 닿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성도가 자신을 송사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그 세상과 무관한 자 되게 하시고, 그 세상에서 물러나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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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9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정죄하는가

(상략)

 

 

 

(마8:23-27)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 지라.(카듀도καθεύδωG2518)

카타κατάG2596;아래+heudo(자다)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에게이로)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데일로스G1169δειλός)하느냐

deos(두려움),겁난,믿음없는.

믿음이 작은자들아(올리고피스토스G3640;십사리 믿지 않는,신뢰가 부족한) 하시고

올리고스ὀλίγοςG3641-아주작은,거의 없는

+ 피스티스πίστιςG4102-믿음

곧 일어나사(에게이로) 바람(아네모스ἄνεμοςG417)과

-ἀήρG109어간에서유래

무의적으로 숨쉬다,호흡하다.- 미친바람,세상풍조와사조

바다(달랏사θάλασσαG2281)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칼레네G1055) 되거늘

히)얌(창1:26),바다(아래의 물,세상)

호수(못)-G3041 림네 λίμνη

- (계20:10)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G3041 림네)에 던져지리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 세 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21: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사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G3041 림네)에

던져지리니 이거시 둘째 사망이라

- 저주의 못에 빠지면 죽음.광풍이 이는 바다.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카듀도G2518)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눅8: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압힙노오ἀψυπνόωG879) 매

아포ἀπό G575(분리)+휩노스ὕπνος G5258-영적인‘무감각’죽음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 잠들다.(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카듀도’ καθεύδω;죽음

- 누가복음 ‘압힙노오’ἀψυπνόω ;영적무능력,무감각.

바다(아래의 물),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인 르와크가 아닌 미친바람이 붑니다.

세상에 편승하지 못하고 그 것이 요구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무서워 합니다.

“이 세상에서 풍조와사조,보편적 아담들이 추구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율법)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까?” 라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이 잠을 주무시는 건

이게 영적무감각,죽음이야 네크로스 죽음의 상태고 너희의 상태다.

너희는 스스로를 바람에 의해 정죄하고 송사하고 있는 거야 이게 죽음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죽었다 살아나시며)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말씀을 하시며,주님도 너희도 이렇게 살기를 간구한다.

하시며 진리이신 주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바람과광풍(미친바람)를 진리로 말하자 그 것들이 이 말씀에 복종을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았다 하면서도 그 바람 바다의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성령,그 은혜가 없으면 감당 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바다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바다는 파도가 일고 바람이 불어야 맞습니다.그래야 그 바다가 위험한 바다가 아닙니다.

진짜 위험한 바다는 그 바다에 빠지면 죽는데 그 림네라는 바다에 바람도 없고 파도도

없으면 그 배는 그 바다 가운데서 멈추어 움질일 수 없습니다.

이게 평안이라고 합니까?

여러분이 진리인 성도가 맞다면

이 세상에서 그 바다의 바람 파도는 내게 일으키는 것이 맞습니다.

나를 죽일려고 치는게 아니라 나를 믿어 약속의 땅으로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그 걸 깨달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죄와 송사의 두려움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 밀어라. 나는 간다’그 바다는 나에게 잔잔한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다를 딛고 선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홀로 그 바다 그 림네를 걸어 오신겁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그 바람과파도가 조금만 쳐도 우리는 죽기 싫어서 두려워 합니다.

‘그 바람의 요구,풍조,도덕과윤리가 요구하는 뭐야’ 이러면서 무요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어떻게 듣는 거에 의해

그 말은 평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지고 사망과죄의 법을 삼아 살다가 죽게 되거나,

그 죄와사망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살다가 부활하거나...합니다.

들은 우리는 그 말을 하게 되며 하나님은 그 말에 의해 심판하겠다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들릴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옳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에 보내짐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말을 할텐데... 그리고 그 말이 나를 심판 할 것인데...

그 말을 올바르게 들으신 여러분이 무엇이 정죄하고 송사 하겠습니까

그 말을 올바르게 들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 누구를 정죄하고 송사 하겠습니까

사랑하면서,서로 위해주고 감싸주면서...

이렇게 사는 겁니다.

진리를 아는 이들이 방종할 수 있습니까

아는 만큼,그 삶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전부 손가락질하는 그를 나는 용서할 수 있는 이가 되고

세상이 모두 더럽고 악하다고 하는 것들을 깨끗한 것으로 보아 낼 수 있는

그 런 차별된 삶을 내가 살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