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98)
그 사랑 앞에서
(롬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이름으로 부릅니다. 선악과, 율법, 계명, 언약, 모세와 선지자, 경, 성경,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모든 성경이 당신 자신을 기록한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눅24:44~45)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4절을 직역하면 ‘나의 시편, 선지자의 글, 모세의 율법,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완성 되어야 한다.’입니다. 모세 오경이나 선지서나 시가서 중에 예수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어떤 부분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전부 예수의 책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45절에서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곧 성경인 것이고 그 성경은 곧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서 ‘태초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엔’이라는 전치사와 ‘아르케’라는 명사입니다. 그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성경의 맨 처음 단어인 ‘베레시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베레시트를 파자하면 ‘성전+머리(예수 그리스도)+주다+완성=성전에서 그 머리, 그 진리를 완성으로 넘겨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래 세상은 그 머리, 그 진리, 그 그리스도, 그 생명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 이렇게 내가 글을 쓴다, 역사를 연다.’는 것입니다.
‘레'의 로시도 파자하면, 그 성전 안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 그걸 분석하여 완성으로 넘겨주는 것, 그게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첫 마디가 베레시트인 겁니다.
그렇다면 태초의 말씀은 창세기의 그 일곱 말씀(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이 일곱으로 시작해서 일곱(계시록의 일곱 인, 나팔, 대접, 촛대, 영 등)으로 끝나는 것이고 예수의 공생애도 일곱으로 시작해서 일곱의 말(가상칠언)로 끝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이 빛으로 오신 날을 첫 번째 날로 표기를 하고 계속해서 ‘그 이튿날’이라는 말(창세기의 욤을 의식하여 ‘날’을 반복함)로 다음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다가 사흘째 되던 날(3이라는 날), 즉 일곱 번째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빛에서 시작하여 안식의 혼인잔치로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일곱의 말로 그분의 공생애를 끝냅니다.(가상칠언. 주님이 온전히 이루는 그 일곱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다 이루었다’) 그 일곱이 전부 ‘하나님’을 계시하는 언약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태초의 일곱 말을 성취하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므로 ‘태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이므로 ‘그게 하나님이지’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도 ‘빛’에서 시작하여 ‘안식의 혼인잔치’로 완료가 되는 겁니다.
일곱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일곱으로 마칩니다. 그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그 말씀을 ‘하나님’ ‘우리’라고도 합니다. 계시록에서 그 말씀을 ‘우리’라고 합니다.
예수는 그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으로 담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역사에 담길 수 없을 정도로 크신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분이 육신 안에 어떻게 담깁니까? 그분이 역사에 어떻게 포착되고 담깁니까? 그러나 우리의 수준으로 계시해 줄 그 하나님을 진리로 담고 오셨으므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분 안에 담겨 있는 진리를 생명으로 취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그냥 율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가 그냥 율법으로 남아 있다면 죽음, 멸망입니다.
그 일곱(싸바)이라는 단어는 ‘언약하다, 맹세하다. 실컷 먹이다. 일곱 번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 언약을 주어 실컷 먹이는 줄 아세요? 아래의 것, 성전, 눈에 보이는 모형으로 그 진리를 준 이 아래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컷 먹입니다.그리하여 그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 그 언약을 성취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싸바’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눈에 보이는 아래의 것으로 성전을 분석하여 가르치다, 실컷 먹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걸 ‘언약, 일곱‘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 아래의 것들에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담아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 이 우주, 만물, 천기 어느 것 하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반하는 것이 있어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는데 다 그 이야기입니다. 천지만물이 다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래의 것에 생명을 담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율법이요, 성전이요, 성경이요,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예수를 ‘말씀’이라고 칭한 후에 그 예수가 ‘그로 말미암아, 그를 담아’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 하나 그가 담겨 있지 않은 게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이 담겨 있다고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예수가 담고 있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담고 있다면, 그 안에서 그 생명을 끄집어내지 못하면 그 세상, 그 율법에 묶여서 그냥 죽게 됩니다.
(요1:2~5)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말씀은 태초에(베레시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가 ‘베레시트’에 언약된 일곱을 담고 오신 분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만물은 바로 그 말씀을 담은 모형들로 창조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3절입니다.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로(말씀으로) 창조가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만물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그 말씀(만물, 예수, 성경)은 전부 하나님이신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그 하늘 아래의 모형들을 어두움(호쉐크)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깨달아 알면 그 나타난 것을 ‘빛(오르)’이라 부릅니다.
여기의 빛과 어두움을 여러분의 두 마음으로 확 해석해 버리면 안됩니다.
죄를 아래의 것으로 분석하여 주면 그걸 호쉐크,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뭔지를 알아 버리면 그걸 오르, 빛이라고 합니다. ‘오르’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빛의 실체는 이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설명해 주느냐면,
이 아래의 어두운 것들, 어둠에 속한 아래 것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걸 빛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생명을 빛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태초(베레쉬트)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이신 예수가 베레쉬트에 언약된 그 일곱, 그 언약, 실컷 먹이는 그 양식을 담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전부 그를 담은 것으로 창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만물은 껍데기로만 보면 그게 호쉐크, 어두움인 겁니다.(죄를 아래 것으로만 주어 버리면 그걸 어두움이라고 하자 그랬죠?) 그냥 보면 어두움인데 그게 뭔지 알면 그걸 빛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그 하늘 아래의 모형들을 어두움(호쉐크)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나타난 것을 ‘빛(오르אוֹר)’이라 부릅니다.
(참고)-요한복음 말씀중에서...
‘오르’라는 히브리어는 구체적인 발광체나 발광현상을 의미하지만,‘에너지 원,능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창세기 첫째 날의 빛‘오르 하야’는 ‘참 광명이신, 일한 발광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만물을 보살피시며 키우시는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인생들에게 인간이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시며, 역사는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이며,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조명해 줍니다.그런데 어두음에 속한 죄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모두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소경되었던 자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빛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과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육신들에게 육신을 입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성육신)
그 결과 그 빛을 알아본 자들이 생겼고 그들이 바로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입니다.
(고후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추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오신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빛’과‘말씀'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모양의 단어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빛과 어두움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선과 악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곱 언약(말)을 설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문자로 주신 것이 계명, 율법, 레위기,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가장 보기 좋은 동산 중앙(그 산)에 두셨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바로 예수 자신인 것이고요.
당연하지요. 그 성전이 말씀을 모형 한 것이고 그 말씀이 예수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을 성전이라고 하실 수밖에요.
그런데 그 계명, 그 성전을 표피적인 것으로만 받아 버리면 그게 곧 뭐였습니까? 죄,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과 성전을 진리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계명과 성전은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그렇다고 이 역사 속에서 그 빛이 다른 것으로 제시 될 수 있나요? 역시 계명과 성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성도는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볼 뿐입니다. 어두움이었던 성전이 빛이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 속에서 그 성전이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빛도 어두움도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어두움과 빛이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바달’( בּךל)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노미조, 법으로 보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래 어두움을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아, 빛이 그거!’라고 알게 되면 ‘바달’( בּךל)이라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늘 “두 마음, 그게 악이야!”라고 외쳤습니다. 뭐든지 둘로 가르는 걸 ‘바탈’이라 하고, 바탈하면 하나님과 ‘카라트’, 나눠지게 되는데, 그게 이혼증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그걸 알게 되어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어둠도 빛도 없는 그거 하나로 통일이 될 때 ‘바달’( בּךל)이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달’이 되어 (하나로 갖는 것) ‘빛’으로 보여 지는 그것을 하나님이 선(토브)이라 부르십니다.(보시기에 좋았더라)
토브는 ‘뱀의 집, 뱀의 성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의대로 알지 못하면 ‘뱀 소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이라는 말씀(예수, 성경, 율법)은 멸망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은 구원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어두움이요 어떤 이에게는 빛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8:14~15)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그렇지요?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에 이방의 일곱(가나안 일곱 족속)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엉뚱한 일곱으로 완성이 된 자들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 일곱은 열(십계명)이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레위기의 그 수많은 율법은 전부 열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열은 곧 일곱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은 다섯으로 나누어서 주어진다고 했지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어떤 영역을 제시하고 그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부분이 하달이 되고, 신약에서는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이 말씀으로 떨어집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사랑’의 다섯만이 주어지는 이유는 인간 측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깨달아 알라고, 한 마디로 실패하라고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모든 시도는 시날에서의 바벨탑 쌓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아닙니까? 인본주의가 생각하는 하나님 사랑,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특한 생각. 그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다시 동산 중앙에 서 있는 선악과, 즉 이스라엘의 성전에 말씀으로 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인간들 측에서의 하나님 사랑의 시도를 일축해 버리시고 아래의 다섯(이웃 사랑, 내리사랑)을 넷으로 주십니다. 다섯을 굳이 넷으로 주시는 이유는 창세기의 네 번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그 넷을 염두에 두시고, 무엇이 진정한 안식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열)의 아래 다섯을 ‘살인과 간음’의 이야기로 축약을 시켜 버리십니다. 그 살인은 희생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간음은 말씀을 율법으로 갖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생제사와 율법지킴을 하나님 섬김의 모든 것으로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열심과 노력이 전부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명이 말하려 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죠? 하나님의 율법은 희생제사와 율법지킴을 마치 의무처럼 주는 것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주님은 ‘율법의 진의는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라고 뒤집어엎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과 희생제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율법과 희생 제사를 행하고 행하지 않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율법과 희생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열심히 율법만 지키고 희생제사만 드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 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내용으로 보지 못하고 그 진리를 담은 그릇을 그대로 전해 버리면 그게 바로 거짓이잖아요?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둥, 몇 년 몇 월 몇 시에 지구의 종말이 올 거라는 둥,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을 법으로만 설명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그냥 미친 사람들인 것이고요.
그 열을 사랑이라는 하나로 완료하실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예수도 그 사랑으로 결론이 되야 하고,
말씀도 그 사랑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예수님이 담고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셨습니다.
참말, 거짓말이 아닌 참말, 참은 언제나 알렛데이아, 진리입니다. 진리는 언약이고, 언약은 상수리나무. 그래서 상수리나무과에 있는 건 전부 참나무라고 합니다. 모든 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말을 가지고 주님이 오셨는데 아무도 그 참말인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 빛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성전이 서 있던 동산 중앙의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성전이 서 있던 시온산에 있는 언덕입니다.
주님은 그 동산 중앙에 십자가를 지고 서십니다.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가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선악과나무가 스스로 죽습니다. 거기에 저주받은 나무로 박히는 겁니다. 동산 중앙에 나무로 박혀 그 나무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죽여버리고 그것이 내용으로 이해되어졌을 때 그 생명,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인투루전) 심어버리는 겁니다. 오직 은혜로.
그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인간의 육이 전부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이 죽는 게 사는 겁니다.
그 선악과가 되어, 율법이 되어 내가 죽으면 그게 생명입니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선악과가 따로 있고, 생명나무가 따로 있고, 죄가 따로 있고, 의가 따로 있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의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 생명의 진리는 인간 측에서의 무력함이라는 전제를 타고 온전한 은혜로만 택한 백성들의 마음으로 뚫고 들어갑니다. 그 사람은 이제 거짓 증거를 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진리는 이런 것입니다.’하고 제대로 전해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라고 칭찬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측에서의 하나님 사랑, 치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구약을 통해 입증이 되었잖아요? 그들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심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단 말입니다. 신명기 6장의 그 유명한 ‘쉐마’의 처음이 뭡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냔 말입니다. 이런 딜레마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네가 희생제사와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즉 성경과 예수와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것의 진의를 이웃에게 잘 흘려주면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위의 다섯, 즉 하나님 사랑을 완성하는 자가 되는 거야.’
사랑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아하브’입니다. 그 단어는 ‘성전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혹은 ‘성전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참 성전을 진리로 잘 전해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간 이성의 수준에 맞게 말씀해 주신 것이 진리잖아요?
그 진리를 올바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이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고, 그 분을 다른 신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며, 그 분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분을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로 공경하는 것이고요. 그게 바로 안식이잖아요?
그렇게 십계명의 하나님 사랑의 부분은 창세기에서의 그 ‘안식’으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안식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그 창세기의 안식은 넷의 마지막 완성으로 주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신약의 그 산에서 다시 넷으로 그 안식을, 그 완성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게 바로 ‘온전’이라고 확인 도장을 찍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데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여 이웃에게 흘려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롬13:10)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알 수도 없는 존재를 목숨 걸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건 추측이요, 상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계시해 주신 그 만큼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역사와 인생과 육신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그만큼의 분량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된 율법이 나중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 하나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의 윗 계명의 성취니까요.
(갈5:13~14)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렇게 온 율법은 이웃 사랑 하나로 축약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진리의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첨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면 자유가 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로 방종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이웃에게 흘려주기 위해서는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 서에서 ‘제발 성도답게 좀 살자’는 식의 권고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은 성도는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나, 헌신이나, 거룩한 삶의 추구 등이 구원의 과정이나 전제나 수단이 될 때는 그러한 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나 종교행위들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나올 때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행복의 재료들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행이나 착한 삶 등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해 보세요. 불쌍한 이들을 돕는다거나 힘에 부치는 구제와 선행을 할 때에 그냥 힘들기만 한가요?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지 말라고, 너무 외롭지 말라고, 너무 심심해하지 말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자신이 중독되어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는 데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 사랑을 전하는 자의 올바른 태도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전하는 자의 삶의 자세가 어찌 그렇게 가벼울 수가 있어요? 끊으려 노력하세요. 중독이 주는 쾌락은 잠시지만 그것이 주는 절망과 상심은 훨씬 무서운 것임을 본인들도 알잖아요? 끊고서 자기의 의지를 자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선물이라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물며 어떻게 그러한 선물을 자기의 공로로 싸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저 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하고 상급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진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 괜찮습니다. 그땐 성전 안에 들어가서 희생 제사를 드려도 괜찮고 밥 먹을 때마다 정결 예식 행해도 괜찮아요? 그는 그러한 율법적 행위 속에서 진리를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바울도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 행동해 주며 진리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은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진짜 ‘사랑’으로 수렴이 되는 것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근거한 구제와 헌신과 헌금과 봉사와 선교, 열심히들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러면 온 율법이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말씀으로 오신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완성하겠다.’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단어가 ‘일곱’이라는 말이라 했지요? 그래서 그 언약이 일곱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열’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열은 다시 위의 다섯과 아래의 다섯으로 주어집니다. 위의 다섯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이 되고, 아래의 다섯은 이웃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열을 둘로 제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다섯은 다시 넷으로 주어지지요? 그리고 그 넷은 다시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그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치사랑이 아니라 내리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먹이고 섬기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온전한 말씀으로 이웃에게 흘러갈 때 그 이웃이 생명의 생수로 살아납니다. 사랑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하고 위의 다섯 계명을 성취한 자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를 가진 자가 되면 그 사람을 ‘아들(모노게네스)’이라고 부르고 그 아들을 ‘여덟’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일곱을 완성하고 거기에서 나온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여덟의 날에 부활하신 것이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 남은 자의 모형으로 방주에서 나온 자들이 여덟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제물을 바치는 자가 아니라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화목제잖아요? 하나님과 화목 된 이들의 만찬.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여덟의 사람들이 고기(베헤마)를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때부터 육식이 시작되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방주가 되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품고 저주의 비에 맞아 심판의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화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소와 함께 짐승이 식량으로 주어지지요? 그리고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제가 이번 주 수요 예배 산상수훈 강해 때에 금식의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이라는 언약의 말씀이 열이라는 율법으로 주어지고 그 열이 아래의 다섯을 통하여 위의 다섯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설명이 되며 그 아래의 다섯은 넷으로 주어져 그 넷이 사랑이라는 ‘하나’로 완성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일곱 말 중 다섯 번째 말 속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1:20~23)
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 이니라
창세기의 다섯 번째 날은 두 번째 날과 짝입니다. 두 번째 날에는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궁창 아래의 물을 모아서 ‘바다(얌)’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바다’라는 말의 의미가 ‘진리를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래의 물, 즉 바다는 진리를 주기 위한 모형들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궁창(라키아)은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게 하기 위해 ‘타베크’에 만들어진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 단어 자체가 ‘두드려서 펴다, 덮다’라는 뜻이니까요. 물론 그 성전 안에는 진리를 품고 있는 율법이나, 성경이나, 세상이나, 예수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날에서는 아래의 물, 즉 아래의 다섯 속의 그 모형들이 들어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게 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큰 물고기,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 날개 있는 새’가 등장합니다. 그 큰 물고기 ‘타닌’은 요한계시록에서 ‘용’으로 설명이 되는 그것이라 했지요? 그 용은 짐승으로, 공중의 새로, 적그리스도로, 거짓 선지자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고 표피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그게 바로 가짜 하나님, 용, 짐승, 가짜 성전, 유사 그리스도, 거짓말이 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이 아래의 물에 그것을 만들어 담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생물은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 즉 우글거리며 기는 ‘네페쉬 하이’라는 뜻입니다. ‘네페쉬 하이’는 하나님께서 진리로 만들기 위하여, 혹은 멸망시키시기 위하여 육신의 숨을 주어 살려두신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우글거리며 기는)’로 수식이 되고 있지요? 성경에서 우글거리고 기는 존재는 전부 부정한 존재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위로 똑바로 세우면(쿰, 이스테미), 그게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페쉬 하이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 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죄인인 상태의 인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날개 있는 새는 당연히 날개 부조를 한 옛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왜 만드셨다고 하지요? 개역성경에는 ‘종류대로’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레 민’이라는 단어는 ‘분배를 위해, 분류를 위해’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아래의 것들은 죄를 제시하여 양과 염소로 분류해 내기 위한 장치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22절이 ‘바라크(복)’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면(파라 라바 마레) 그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생육이라고 번역이 된 ‘파라’라는 단어는 ‘열매를 맺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지요?
(눅6:43~45)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 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 이니라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가 뭡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생육하라(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글우글 기는 네페쉬 하이들아 바다의 큰 물고기(타닌)와 날개 있는 새로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말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번성이라고 번역이 된 ‘라바’라는 단어는 ‘풍성하다, 성숙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데 그 단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페릿소스’가 됩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 번 보세요.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풍성히’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페릿소스’입니다. 그 단어는 ‘풍성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보다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인 것입니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어절에서 ‘낫다’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페릿슈오’입니다. 차원이 다른 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번성하라는 말씀은 큰 물고기와 날개 있는 새를 차원이 다른 그것으로 깨달아 풍성하고 성숙한 존재가 되라는 그런 의미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을 주시면서 그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시지요?
(겔36:11)
11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기에서 사람과 짐승이 ‘아담’과 ‘베헤마’입니다. 그 ‘베헤마’라는 단어는 ‘자바’라는 단어와 함께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의 제물을 가리키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베헤마’는 율법의 제물을 가리킬 때에는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진짜 제물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때에만 쓰인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가 ‘성전을 진리로 말한다.’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제물과 아담을 생육시키고 번성시켜서 제물은 ‘진리’로, 아담은 ‘하 아담’으로 만드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실 때 그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하시면서 그 제물을 ‘베헤마’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창7:1~3)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3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2절의 정결한 짐승이 ‘베헤마’입니다. 정결한 것은 ‘일곱’으로 취하라고 하지요? 부정한 것은요? 둘씩 취하랍니다. 그 단어가 ‘쉐나임’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둘째 날에서 배운 ‘한 쌍, 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열둘’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부정한 것은 아래와 위, 좌와 우를 한 쌍, 한 짝으로 만들어 취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칼’과 ‘네케바’라는 한 사람,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오프 솨마임)도 당연히 ‘일곱’으로 취해야지요. 제물도 성전도 전부 ‘일곱’이라는 진리의 언약으로 취해야 의인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들이 씨(제라, 진리)를 온 지면(땅, 세상, 성전)에 흘릴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라바(번성)’인 것입니다. 땅의 모형들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받아 그것으로 풍성하게 흘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라바’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레(완성하다, 온전한 것으로 가지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개역 성경이 ‘충만’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세기 1장 22절이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로 끝이 나지요? 그 땅 안에서 ‘새(오프, 성전)’는 다른 차원으로(라바)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다섯(하미쉬)은 하나님께서 아래의 물속으로 던져주신 그 모형들을 가지고 차원이 다른 하늘의 것으로 가지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미쉬’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진리를 죄로 주어 분석한 것으로 주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섯입니다. 그렇게 아래의 물속의 것들로 밤과 낮을 ‘바달’하여 밤과 낮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그런 존재들을 ‘별(코카브)’라 한다고 했지요? 그 ‘코카브’가 어디에 등장합니까? ‘넷’의 날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다섯은 반드시 ‘넷’으로 이웃에게 전해져야 하겠지요? 그들이 바로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하늘의 별들(코카브)’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넷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다섯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죄를 갚을 때 ‘다섯’으로 갚으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아래의 다섯을 ‘세상(호코스모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 말씀, 그 세상으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제대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겠지요?
(요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뱀으로 오셨다는 것이지요? 뱀(나하쉬, 말이 없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전해졌을 때 왜곡되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세상 죄를 짊어지러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으로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리고는 그 놋 뱀, 즉 세상으로서의 그 분을 언약(십자가, 스타우로스)으로 이해를 하는 자(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6절의 세상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셔야 해요. 그래서 그 구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해석을 하면 ‘이처럼(14, 15절의 내용처럼) 하나님이 세상으로 사랑하시기 위해 하나만 가진 아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세상으로 오신 주님을 통해 진리를 가지면 영생을 가진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17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그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진리로 밝히 보여주고 그 세상을 세상으로 보낸 아들처럼 구원해 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세상은 어때요? 세상으로 오신 주님을 진리의 빛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세상은 빛(진리)을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들은 어두움(나타난 형상)만을 사랑해요. 그래서 아래 세상의 것들을 진리로 둔갑시켜 그대로 행해버리면서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만을 챙겨 가집니다. 그런데 20절에 아담들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랍니다.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는 아담들의 세상 속에서는 훌륭하고 멋진 것일지 모르지만 진리의 시각으로 보면 그 실체가 너무 추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세상에서 진리의 세계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온다고 하지요? 그들이 빛으로 나오면 어떤 일이 성취됩니까? 그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 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경에 동원하신 것들이잖아요?
진리를 알게 된 이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모든 것들은 그냥 합력되어 선이 된 재료들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무슨 천사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망이나 생명 같은 것이 의미가 있는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묶여서 오히려 그것들을 추구하느라 진짜 진리를 놓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죠?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김성수 목사 >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00 이삭 같은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0) | 2013.12.21 |
---|---|
로마서 99 완전한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만 이김으로 살아난다는 불편한 진실 롬 8:36-39 (0) | 2013.12.21 |
로마서 97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는가? (롬8:35~39) (0) | 2013.12.21 |
로마서96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서로를 정죄 하는가 롬 8:33-34 (0) | 2013.12.21 |
로마서95-모든 것이 선물인 이유 롬 8 :31-32 (0) | 2013.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