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100 이삭 같은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57

로마서 100 이삭 같은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롬9:1-9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911년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될 때까지 중국의 황제들은 1년에 1번 천제를 올렸습니다.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제사였습니다. 그때 제사장 역할을 했던 사제들이 태산에서 읽었던 축문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옛적 태초에 커다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다. 5개의 원소들은 회전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태양도 달도 빛나지 않았다. 영이시며 전능자이신 당신께서 처음에 순전한 것들에서 거친 부분들을 나누셨다. 전능자께서 하늘을 만드셨다. 땅을 만드셨다. 사람을 만드셨다. 번식하는 일을 가진 모든 것을 각기 자기 모양대로 만드셨다. 전능자이신 태(샹다이)시여, 당신이 명하실 때에 하늘과 땅과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나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분리하시고 인간과 만물을 질서있게 하시고 만상을 하늘에 펴셨나이다.’


이렇게 축문을 읽고 천단이라는 제단 위에 소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신에게 뿌리는 예식을 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했던 속죄제사 의식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 또한 ‘엘 샤다이’와 ‘샹다이’로 비슷합니다. 


중국에는 이미 7세기경 당나라 때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파의 전도로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때 각 도시에 경교의 교회가 하나씩은 있었다고 하니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것 같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와 451년 카르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후에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중국까지 들어가 기독교를 알린 겁니다. 


그때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받은 것은 그가 ‘마리아는 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공의회는 전세계 기독교 회의인데, 그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했다고 하니 전세계 기독교는 마리아를 신으로 믿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올바른 기독교가 이단으로 정죄받음으로써 이방인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재미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경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국제사문이 창세기 1장의 내용으로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전도가 없었더라도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창세기1-11장의 바벨탑 사건까지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1-10장까지의 원복음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 속에 녹아있는 게 맞습니다. 


얼마 전에 지구 멸망의 근거로 제시됐던 마야의 달력도 잘 보면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겁니다. 그 달력의 마지막에는 커다란 용 같은 뱀이 물을 뿜어서 멸망시킨다고 합니다. 그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걸 작년 12월에 다 망한다고 했는데,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성전 제사와 흡사한 속죄제사를 드리고, 창세기를 암송하여 축문으로 낭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샤다이, 샹다이’라고 불렀다고 해도 그들에게 구원이 임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레위기의 그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성경과 흡사한 축문을 외워서 낭독해도 그게 의미하는 바를 진리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 제사와 성경은 바다의 모래와 같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이삭같은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둘로 나눠 줄 거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별은 이삭같은 자입니다. 별이 되어 그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자들.

그러나 바다의 모래는 이삭 같지 않은, 약속으로 탄생하지 않은 엉터리 아들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 같은 자들과 반대로 이삭 같지 않은 아들들도 성경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완성된 아들이어야 하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제사 행위만 하고 있는, 그리고 성경만 암송하는 오늘날의 누군가와 뭐가 다르냔 말입니다. 


8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대주제로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자세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정죄나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게 논지입니다. 


심지어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칼이라는 위험의 증상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진리를 전해주시고자 동원하신 아래의 개념들입니다. 즉, 사망이나 생명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피조물, 이런 것도 진리 앞에서 그 껍질을 벗고 내용을 드러내서 그 내용의 곡해로 일어나는 그런 분리의 재료가 될 수 없다고 8장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9장으로 넘어와서 그가 8장 말미에서 나열했던 그러한 율법의 증상에 푹 젖어있을 뿐 아니라 그 아래의 개념에 여전히 묶여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천사의 존재 유무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싸웠습니다. 그렇게 묶여있었고, 그래서 메시아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민족적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이게 바로 너희 모습이다’라고 지적해 주는 것이 로마서 9-10장인 겁니다.


물론 거기서 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1차적으로 육적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9-10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육적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적 집단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과 똑같은 안타까움으로 바라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 자기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집단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육적 이스라엘이 대표하고 있었던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 세상 아담들을 그저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서 설명한 것입니다. 글자 한 자도 보편적 교회 전체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민족에게만 주어지는 내용이 있으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박살내는 게 되는 겁니다. 은혜는 수혜자의 특별함이나 자격, 조건부터 깨고 들어가는 개념입니다.


말씀에서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다르게 한정짓습니다. 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 민족적, 육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로마서 2장에서도 바울은 이미 자기의 관심대상이 혈통에 의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밝혔습니다.


롬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받았다고 다 유대인이 아니고, 율법 지켰다고 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는 육신에 흠집내는 그 정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갖는 겁니다. 아울러 율법 준수자들에게 떨어지는 칭찬은 사람의 칭찬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의 칭찬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9,10장에서 화자의 상대로 삼고 있는 이들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율법주의에 머물러 있어서 구원에서 먼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구원에 이르러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이면적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그 민족적 이스라엘, 저주받은 자들로 성경에 등장하는 그런 민족적 이스라엘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들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그냥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선과 악의 두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인 겁니다. 성경의 독자는 성도니까 우리 보고 읽으라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바울이 민족적 이스라엘이라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겁니다. 


로마서 9,10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그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이냐, 육적 이스라엘이냐를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분하는가 하면, 이 로마서 9,10장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이라는 엉터리 신학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로 성경을 보면 지금도 저 팔레스타인에서 사고만 치고 있는, 남의 땅 빼앗아서 원래 주인들을 가두어놓고 자기들이 세계의 주인인 양 행세하고 있는 이스라엘, 그 민족적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의해 성경의 내용 전체가 이리저리 곡해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민족적 이스라엘이나 그 울타리 밖의 소위 이방인들이나 똑같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했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내진 사도라고 지칭했을 만큼 구원에 있어서 민족적 이스라엘의 차별적인 선민사상을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10장에서만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혹시 자신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세대주의자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민족적 이스라엘로만 제한해서 이해할까봐 주의하는 겁니다. 


8장에서 그 아들들이 나타나서 이 피조물들의 진의를 진리로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니까 9,10장은 그 아들들의 이야기일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을 이야기 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겁니다. 왜? 야곱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율법이고, 그가 깨지고 환도뼈가 깨져서 그 안에 씨가 드러나면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므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9,10장의 이스라엘의 전신이 옛사람인 ‘발목을 잡는 자, 실족시키는 자, 강도, 도적’입니다. 예수님이 그 강도요 도적을 율법주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야곱의 이름인 겁니다. 그래서 9,10장에 야곱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고, 그와 대조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켜 ‘남은 자, remnant'라고 했습니다.



롬9:27-29

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뭇자손의 수는 숫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은 자는 바로 씨와 관련된 자로, 그 씨가 남겨지면 그걸 남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10장 22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쓴 건데 그 구절을 보면 더 확실합니다.



사10:20-22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여기서 ‘족속’이라고 번역된 ‘바이트’는 ‘성전’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때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엔 그 사람의 집을 하나님이 들어서 성전의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오이코스, 집’ 하면 성전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야곱 족속’ 즉 ‘야곱의 성전’은 ‘율법의 성전’이란 뜻입니다.

강도, 도둑의 성전, 그 성전에서 구출된, ‘페레마’ 피난한 자들은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친 자(나카)’는 살인자라는 뜻입니다. ‘나카’는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출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민 35:17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의 세력을 마귀라고 하시며 ‘너희 아비는 마귀인데 그는 날 때부터 살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비진리가 사람을 생명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8의 날에 노아의 방주에서 여덟이 나오자 그들에게 그 베헤마(제물)를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고기를 먹고 마음으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먹는 때가 있고, 피를 먹는 때가 있는데 그걸 같이 먹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섞이면 안된다는 겁니다. 고기는 피로, 피는 물로, 물은 성령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도 피를 흘린다고 합니다. 

그건 8이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피를 흘린다는 것으로, 진리를 안에 담지 못하고 땅으로 흘러보낸다는 뜻입니다. 그게 혈루병이고 부정한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월경을 해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생명으로 담지 못하면 너도 피를 흘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가 피를 흘리는 자이기 때문에 이미 너는 네 이야기로 다른 사람(아담)의 피를 흘리게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야곱의 성전에서 빠져나온 자는 다시는 자기를 살인하려고 율법으로 친 자들을 의뢰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한다고 합니다. ‘진실히’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아만’ ‘세우다’는 뜻입니다. 똑바로 서서 진리를 알게 된 자들은 그 진리, 여호와를 진리로 의존한다, 믿는다는 말입니다. 


‘남은 자’는 바로 그들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여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야곱의 남은 자는 야곱의 성전, 율법에서 탈출한 자가 ‘탈출하여 남은 자’인 겁니다. 원래 야곱의 성전 안에 들어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빠져나온 자, 그 자들을 남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어디 멀리 갔다가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돌이킬 것이다(슈브)’, 이 단어를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 슈브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그 성전을 올바로 분석하여 안다’는 뜻이므로, 그렇게 알게 되면 그게 회개고, 그렇게 회개하면 그들이 남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10:22-23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백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눈먼 자, 어두운 자’라는 뜻이 나옵니다.

어두웠던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바다의 모래였다는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남은 자, 슈브, 그 율법에서 빠져나와 그걸 돌이켜 진리로 깨닫게 된 자들, 그들(남은 자들)은 돌아온다, 회개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 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완전히 완료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남은 자라고 하는 ‘쉐아르’는 모음을 살짝 바꾸면 쉐오르, 쉐에르가 되는데, ‘누룩 raoc](7603, 셰오르), 고기, 육체, 살, 혈연관계(친족) raev](7607, 셰에르)’를 뜻합니다. ‘누룩, 고기, 육체, 살’ 이게 다 뭡니까? 율법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더니 사람들이 그분을 왕 삼겠다고 막 찾아왔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너희가 표적의 내용을 본 게 아니라 배가 부른 것만 보고 찾아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내린 떡을 먹어야지. 내 살과 피가 바로 너희 먹이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들이 살과 피를 어떻게 먹느냐고 물어보니 ‘육은 살릴 수 없는 거지. 내가 하는 말이 영이고 생명이잖아. 나는 지금 그 말, 그 생명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고기, 살, 육체는 껍데기, 율법입니다. 우리는 그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율법인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바로 그런 누룩, 고기, 살에 불과했던 야곱의 집, 그 성전에 들어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걸 달리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거기서 빠져나온 자, 탈출한 자들을 뜻하는 겁니다. 


바울이 그들을 남은 자, 이스라엘이라 표현하며 그 이스라엘을 설명하고 있는 게 로마서 9,10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남아있었던 자가 아니라 누룩과 고기,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의 보편적 아담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누룩과 고기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진리를 갖게 되는 은혜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민족적·육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겁니다. 


이 내용을 8장과 연결해서 보세요. 8장에서는 피조물들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자기들을 진리로 봐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무엇입니까? 12지파. 12은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로 된 게 이스라엘이므로 그 아들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 아들들, 영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남은 자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11:5 

5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냐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된 것입니다. 남은 자는 은혜로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를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진리로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전체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남은 자의 정의를 마음에 새기고 로마서 11장의 그 ‘온 이스라엘’을 해석해 봅시다.

거기에는 세대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전부 구원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먼저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도대체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의 피가 30%도 흐르지 않는데 그걸 유대인이라고 하는 겁니까? 거기에 살면 유대인입니까? 



롬11:25-26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방인은 중성입니다. ‘이방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 아래 세상의 것들, 이방적인 것들의 충만한 수는 완성입니다.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는 말씀은 ‘이방적인 것이 진리로 완성되기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더러는‘은 이스라엘의 몇 명이 아니라 ’호 메로스‘라는 단어는 ’분깃, 반쪽‘이라는 뜻으로 자칼과 네케바의 반쪽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들, 택하신 백성이 처음에는 반쪽을 무엇으로 갖고 있습니까? ‘완악하게 된 것이라’의 ‘완악하다’는 말은 ‘어두움이다’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율법, 이방적인 것에서 완성되기 위해서 그들의 반쪽의 남편인 어두운 것, 율법으로 갖고 있는 겁니다. 아래의 것은 그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적인 것이 진리로 완성, 완료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어두운 것, 율법을 남편으로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어두운 것을 진리로 이해하게 되어 ‘아 이게 진리라는 남편이었구나.’라고 알게 될 때에 우리가 간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어두운 남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한(파스) 이스라엘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전부 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에서 ‘시온에서’는 ‘시온을 위하여’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말로, 시온은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나라, 그 묵시 속의 그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나오는 ‘야곱’은 도둑, 발목을 잡는 자, 실족시키는 자, 강도, 율법, 성전입니다. 따라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는 슈브, 회개를 의미합니다.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게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전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에서 그 ‘모든 것’과 온 이스라엘의 그 ‘온’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은 창세기 2장 1절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에서 ‘다(콜)’와 통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의 그 내용을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 우리에게 준 모든 것, 그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아래의 모든 것은 다 합력하여 ‘아가도스’ 선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준 것으로, 그 안의 모든 내용이 진리, 말씀입니다.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이해하면 그것이 완성이고 진리인 겁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던 야곱이 바로 그런 식으로 ‘아, 이게 아니구나’라고 위의 것으로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온전한 이스라엘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들은 경건치 못한 야곱에서 돌이킨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보세요.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여기서 구원자는 ‘리오 메노스’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고엘’ 또는 ‘가엘’입니다. 친족이 빚을 너무 많이 졌거나 무를 기업이 있을 때 대신해 줍니다. 그를 구원자라고 합니다. 구원을 받는 자는 고엘 앞에서 아무 능력이 없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구원자가 와서 이렇게 아무 능력 없는 그들, 야곱을 돌이켜 이스라엘로 만들어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생을 말하는 겁니다. 이 구절이 인용된 이사야서 59장을 보세요.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59: 20-21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게 구원이고 회개고 그것이 바로 야곱의 죄과를 떠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인용해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이것을 근거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성령과 말을 야곱에게 주어 그 입에서 나오게 되면 그가 남은 자고 바로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0장에서 바로 이러한 복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도구로 사용된 역사 속 모형들은 그 역할을 다하면 그 진리 속으로 들어가 역사 속에서의 표면적 가치와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것을 육의 죽음이라고 합니다.십자가도 그렇고 육신의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와 예수의 효능과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히스기야가 부숴버린 느후스단과 같습니다. 그 당시 백성은 십자가에 달린 뱀, 놋뱀을 저게 우리 조상을 구원했대”라며 히스기야 때까지 섬겼습니다. 출애굽 그때부터 그것을 안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 병원의 표시도 기둥에 뱀이 묶여 있는 그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낫게 해줄 거야라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깨야 할 느후스단이라는 것을 보여준 게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히스기야 개혁 당시 어리석은 백성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를 깨닫게 해주시려고 예수가 놋뱀으로 달리셨는데, 그 놋뱀이 된 예수, 십자가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나, 세상, 호 코스모스, 율법을 이렇게 사랑하셨다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나를 구원했대라고만 압니다. 그게 느후스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껏 내 밖의 예수를 구원자로 갖고 있으니까 이게 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는 예배당의 예수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들어와서 사라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기둥으로 스타우로스라는 단어 자체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역사 속 십자가와 역사적 예수 안에 대속과 구속의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십자가와 예수 안에만 용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 언약의 십자가와 거기 매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를 그 죄와 어두움과 세상과 무관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깨달음으로 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것은 내 용서가 아니요 대속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그 죄 때문에 너무 불편했어, 하나님 이 보시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내가 얼마나 아등바등 애썼는데 그게 다 헛것이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된 이는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잡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밥 먹을 때 걱정하고 잠잘 때 계획을 세웁니다. 과거에 매여 있고 앞날의 두려움 때문에 걱정하면서 밥을 먹습니다. 게다가 잠잘 때 끊임없이 계획을 세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괜찮은 존재, 칭찬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고민합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와 그 예수는 내 안에 진리의 영, 성령, 말씀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아 그렇지 그것은 어둠과 그 죄와 내가 무관한 자가 된 거구나라고 깨닫고 내용을 담고 있던 껍데기를 벗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예수와 십자가는 나에게 대속의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과 바다와 아래와 땅과 심지어 죄 까지도 하나님은 왕, 우리는 nothing" 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도구였음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는 그 껍데기로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진리를 모르면 그것으로 심판받습니다. 그들에게 환난, 기근, 핍박, 위험, 죽음, 생명, 높음, 깊음, 사탄,피조물 이런 것들이 어찌 두려움의 대상이 되며 어떻게 여전히 내 밖의 것으로 존재하는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러한 율법의 증상과 성경 안의 그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매여서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열심히 육체의 행함만을 내어 놓으며 구원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 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9:4-5

 

오늘날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것이 자기 것이라 고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인 척하는 이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뭔지를 모르면 이게 너희를 죽일 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물이 될 수도 있지만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너희 앞에 내가 복과 저주를 함께 둔다고 하면 서, 복과 저주를 묶어 바라크=이라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복이 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가 됩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생수를 내는 반석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부수는 돌이 됩니다.

 

여기 보면 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씨를 가진 자들, 그들에게 씨를 설명하기 위해 이삭이라는 존재를 또 모델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안에 내가 씨를 줄 건데 했더니 그가 ! 그 씨는 내 이들인가요?"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럼 그 아들로 줘서 설명할게 하고, 이삭이 그 씨를 설명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설명하는 분이 예수로, 그래서 예수, , 이삭 다 같은 거란 말입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은 갑자기 일곱 우물, ‘브엘세바를 깨달아 알고 이게 약속이다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지, 그게 언약이지, 그게 일곱 언약이잖아. 그게 생수가 솟아나는 우물이잖아. 그러면 네 밖의 그 이삭은 필요 없다. 네가 내가 말하는 그 씨가 뭔지 알았고 그걸 마음으로 가졌으니까, 그러니 그 이삭은 이제 없애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도 아무런 가치 없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형으로써 이삭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려고 동원한 게 바로 자기 혈통에 매여 있었던 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9:6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런데 왜 이러한 말은 싹 잊어버리고, 11장 의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만 집착하는 것입니까? 이제 말씀을 현재에 빗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확실 하다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그 진리의 씨를 받지 못 한 사람이 태반입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율법의 야곱에서 벗어나라.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 라고 외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너희를 끄집어내어 온전한 이스라엘 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갱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창35:1-4

 

 

상수리나무 아래에 야곱과 그의 후손은 귀고리를 우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빼서 묻어 버립니다. 상수리나무는 성경에서 언약의 나무. 진리의 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상수리나무 과에 있는 나무를 전부 다 참나무라고 합니다. 숯도 그것으로 만들어야 아주 오래가고 좋습니다.


 벧엘,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제 옛 옷을 진리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자기의 수호신 우상을 귀에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우상이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는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귀에 고리를 다는 것입니다. 그걸 전부 빼서 금송아지라고 하는 금소를 만든 적도 있습니다. 소를 금으로 치장해 놓고 그것을 신으로 삼았던 게 애굽의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아피스의 황소, “우리의 인도자가 사라졌네. 그럼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을까? 그래 우리가 들을 그 인도자를 만들자 하면서 귀고리를 뺀 겁니다. 그것은나는 이제 모세의 말을 이 소의 말로 듣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진노 하십니다.


 잘못 들으면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양식을 못 먹는 거니까 가뭄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기근이라고 하고 그 단어는 헤레브, 칼 입니다. 성경에 심판과 저주의 현장에 칼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헤레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중에 너희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제 내가 성령으로 오게 되면 너희가 진리의 겉옷을 성령의 검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그게 네 검이 되어야지 이런 말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검이 전신갑주의 그 성령의 검이 못되면 남의 귀를 자르는 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 검으로 말고의 귀를 친 것은 성령이 임하기 전에 너희들의 검으로는 남들의 귀를 닫아 버리는 그 기근의 검으로 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붙이셨습니다. 못 들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남의 귀를 자르는, 살인해 버리는 그 검은 너를 망하게 하고 성령의 검이 너와 그 상대방을 살게 할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귀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종이 희년이 되면 나가는데 이 주인이 너무 좋아, 그래서 나는 죽는 날까지 당신의 말만 듣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언약의 기둥에 그 종의 귀를 대고 뚫었어요. 그리고 고리를 달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종은 상속권을 갖게 됩니다. 아들이 된다는 뜻이죠. 이것을 풀면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자유해집니다. 나갈 수 있지만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에 머무릅니다. 그러면 넌 내 것이다 하고 귀를 뚫어줍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아들이 되는 것 입니다. 전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 귀를 다른 귀로 받는 자입니다. 언약의 기둥 아래 이전에 잘못 듣던 율법의 귀를 다 묻어 버리고 새 귀를 부여받는 자, 그게 이스라엘인 것 입니다.

 

로마서 9-10장에서 말하는 그 이스라엘은 그렇게 귀가 뚫려서 율법의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들이 된 약속의 후손인 이삭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이삭 같은 자라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되어야 이삭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명료한 사실인데 온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그 이스라엘이라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야곱이 그 야곱이라는 크로노스의 과정을 잘 밟아서 이스라엘이라는 카이로스의 존재화가 되지 못하면, ‘나는 분명히 구원을 받은 약속의 후손이야라고 굳게 믿으면서 열심히 7의 기간에 자기의 아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것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내라는 것을 깨달아 그 남편이 주는 생명력으로 존재해야 그것이 구원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7 의 기간에 내가 내 아내를 만들어 내겠다고 열심히 일해서 만든 건 점 있고 흠 있는 제물이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 압복강에서 환도 뼈가 깨져야 합니다. 환도 뼈는 씨를 담은 그릇으로 그것이 깨지면 씨가 드러나 비로소 네가 아들이야라는 칭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하심과 같으니라 1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3-16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9장을 시작한 바울은 이스라엘을 이삭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 안에서의 그 남은 자의 개념은 야곱에게서 나온 자, 야곱의 바이트, 성전에서 나온 자, 탈출한 자라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맥락에서 이 야곱 같은 자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 라고 보면 안 됩니다. 이 맥락에서는 야곱도 안 되고 에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야곱에게서 나온 자만 이스라엘 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16절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했던 자(야곱)도 안 되고, 달음박질하는 자(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해서 장자권을 훔쳐낸 것은 그의 열심이자 달음박질 이었습니다. 결국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곧 에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에서인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십니다. 그래서 에서는 야곱의 짝으로 존재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장자가 아님에도 그 장자의 옷을 몰래 입고 장자가 됩니다. 이게 구원 아닙니까? 그 옷은 내 옷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장자의 옷을 내가 그냥 입고, 죄송하지만 감사하게 입고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했을 때 아버지가 그럼 네가 내 장자지 한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원의 원리를 야곱의 야비한 행동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진짜 장자권을 줍니다. 그때부터 야곱의 삶은 행복 끝, 고생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네가 열심히 해서 내가 기뻐하는 제물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준 그 옷을 입어야한다 그러니까 다른 것 말고 내가 너에게 준 내 씨를 갖고 와"라고 하시며 환도뼈, 씨가 들어 있는 그릇을 가격 하십니다. 그래서 깨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그 그릇을 우리라고 합니다. 그릇이 깨지면 내 안의 씨가 보석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자의 간절한 원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의 달음박질로도 되는 게 아니란 것이죠. 결국은 야곱이나 에서나 똑같은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자 야곱이 야곱을 뚫고 나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에 서는 야곱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남자답고 멋진 그는 심지어 동생을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에서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쓰는데 그게 붉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왕이 에돔 사람 헤롯이었습니다.에서의 삶을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머니가 마련해 준 그 형의 옷을 입고 장자 권을 얻으러 갔을 때, 에서는 자신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며 열심히 활 쏘고 다녔습니다. 바로 그 에서가 세상 왕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가 로마서 9-10장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9장과 10장을 보면 세대주의자들은 진리의 복음에 대한 일천한 일례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세상과 역사와 인간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항상 성경의 주제도 세상과 인간이어야 하고 역사의 주인공도 인간 이어야 합니다. 묵시는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별된 어떤 무리에게 주신 책이 아닐뿐더러 거기에는 어떤 무리에게 만 차등 있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 건 다 교회의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말씀도 영화도 사람들이 좋아하는,그 시대가 좋아하는 그런 양념을 섞어서 던져주면 다 히트합니다. 이미 있는 것에 자신의 독창성이나 창의력을 조금 보태서 만들어 내면 전 세계가 열광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진리는 그런 것과 섞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와 인간은 신기루 같은 그냥 껍데기입니다. 세상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는데 자기가 무슨 꿈을 꿨는지도 모르고 내용도 모릅니다. 그때에 다니엘이(,하나님의 사람) 바벨론, 혼합된 그곳에 가서 왕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세상은 꿈입니다. 성경말씀을 그 꿈같은 역사와 인물에 자꾸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왜 자꾸 베리칩이니 666 이니 아마겟돈 전쟁이니 마야의 달력이니 이런 거에 벌벌 떨고 계십니까? 세상은 불꽃같은 강렬한 인상을 이 역사 속에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역사도 그렇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낭만을 꿈꾸지만 그것은 사실 겉멋일뿐입니다. 세상은 불꽃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가는 걸 추구하지만 그것은 헛것입니다.


 《객주》라는 소설에 보면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천리가 되는 십이령을 먹여 살릴 아내와 자식 생각하며 넘고 넘습니다. 이렇게 천국 가는 길 생각 하면서,그리고 그 길에 보이는 그걸, 그 하나님, 그 진리로 여기면서,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이 한 걸음씩 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아등바등 여기서 강렬한 불꽃처럼 살겠다고 밥 먹을 때도 걱정해, 잘 때도 계획 세워.. 이러다가는 금방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에 대해 잘하라고 한 마디도 안 합니다. 세대주의로 성경을 읽는 건 인간들의 그 에피두미아’의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무서운 것인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