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11-14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종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면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지난 시간에 에피뒤미아(탐심)이 희생제사라는 두메오에서 나온 단어고,
몸의 사욕을 순종하는 게 뭔가 공부했고,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것이 무엇이며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게 뭔지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속옷, 겉옷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병기라는 단어가 에베소서에 나오는 전신갑주와 상통하는 단어라고 했어요. 거기에 ‘파스(전체)’를 접두어로 붙여놓으면 ‘전신갑주’가 됩니다. 따라서 ‘병기’는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이는 사람, 뭐 이런 게 아닙니다. 옷을 입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먼저 주어진 속옷(율법)이 나중에 은혜의 겉옷으로 바꿰게 되는 구원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조금 더 부연설명 해드리겠습니다. 진도 나가는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여러분, 성경을 전체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도 요한계시록 못 보고 죽었습니다. 책이 요한복음 한권만 있다고 해도, 아니 한 장만 있다고 해도 성도는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해요. 설교 한 편으로 확 뒤집어져서 진리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8-10년 들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평생 66권 어떻게 강해를 다 하려고 이렇게 천천히 하느냐는데, 다 안 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알면 그 다음 설교는 안들어도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호지 아니한 세마포 속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호지 아니한 속옷은 반포 속옷이라고 했습니다. 반포 속옷은 이음새가 없이 통으로 짠 옷으로 당시 제사장들 같은 상류층만 입던 옷입니다. 요즘 루이 비똥이나 빅토리아 시크릿보다 백 배 비싼 겁니다. 그렇게 비싼 옷을 예수님이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선 아무도, 바리새인도 시비를 안 걸었어요.
그렇게 그 세마포 옷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화려한 겉치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이었고, 그들의 유적지향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준 거였어요. 호지 않은 세마포 속옷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건 ‘부’였습니다. 그들의 지향성이란 다름아닌 부유함이었어요.
그 부유함이란 단순히 돈이 많거나, 땅이 많거나, 지식이 많은 정도의 유치한 유물적 부유함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는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이 금하는 부, ‘부자는 안 된다’ 자주 말해요. 그래서 부자들이 교회에서 돈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 부자가 아닌데 사람들이 비난할까봐.
성경이 말하는 부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상승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사유와 행동, 그리고 거기에 소용되는 자원과 재력 등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그걸 행하는 자도 부자고, 그걸 행하기 위해 땅의 것을 의존하는 자도 부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부자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와 그들의 축약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다 돈 많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 전체를 부자라고 해요. 그들은 굉장히 금욕적이고 청빈했습니다. 일주일에 2번씩 금식해서 그 돈으로 남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의 기명들이 모두 금으로 덮여 있었던 겁니다. 상징입니다. 성경은 ‘율법주의+맘몬’이라는 공식을 그런 그림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들의 실체는 기실 모두 쓸모없는 조각목들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 조각목을 가지고 성전을 지으라 하세요. 그런데 그러한 것에 겉만 번드르르 하게 금도금을 한 헛것, 이걸 율법주의라고 해요.
물론 그건 역으로 쓸모없는 조각목에 말씀의 금, 말씀의 기름 -금과 기름은 서로 혼용해서 씁니다. 올리브 기름을 짜서 놔두면 노랗게 금처럼 변하거든요. - 기름과 금이 덮여서 참성전이 되는 그 은혜의 복음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율법주의, 그 부자, 성경이 금하는 부자, 즉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남에게 좋은 평판을 얻어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자인 겁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맘몬’이라고 동일시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의 시조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최초의 율법주의자가 됐습니다. ‘선악의 주체가 되어 내가 선악판단을 할거야.’가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아담과 하와, 율법주의라는 그 씨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씨에서 나온 모든 인간이 다 ‘부자’인 겁니다. 여러분이 다 부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할 부자인 겁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 실과를 막아버리면서 뭐라고 하세요?
‘이들이 손을 들어 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까봐.’
‘샬라흐 야드 베라카흐(손을 뻗고 취하다)’ 이게 탐심이란 뜻입니다. 부자 되고 싶은 마음.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이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탐심을 갖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그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남들보다 더 부자로 살아야지, 그런 부가 아닙니다. 무슨 돈에 대한 개념도 없고, 아담과 하와 달랑 둘밖에 없던 때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선악 구조 속에 빠진 자가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바탕으로 자기의 손을 뻗어 생명을, 자기의 생명, 자기의 가치를 쟁취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탐심인 거고, 그러한 탐심으로 자기의 생명을 쌓고 성숙시키고 완성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이 다 부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좇겠다고 찾아온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잘 떠올려 보세요.
그 부자청년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어요. 행위로 접근하는 겁니다. “무엇을 해야, 어떤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선한 분은 하나님이다.”
선문답 같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하나님만 선하셔. 나도 선한 존재가 아니야.’라는 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라, “무엇을 해서, 어떤 선한 일을 해서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게 아니라 선한 존재에 의해 영생은 주어지는 거야.”를 설명하는 겁니다. ‘선한 분은 하나님인데 어떻게 나에게 선한 행위를 물어봐?’ 하시는 겁니다.
그 청년이 뭐라고 해요? 자기는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해요. 그러면서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부터 쭉 이야기 해요. 다 했대요. 그걸 뭐라 한다고 했죠? ‘율법을 지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것’ 바로 ‘부자’! 그래서 부자 청년입니다. 그가 다 지켰어요.
주님이 그 청년에게 말씀하세요. ‘그러면 네가 가진 걸 다 팔아서 남을 줘 봐.’
이건 단순히 네 재산 다 팔아서 다 나눠주고 와. 그러면 내가 인정해 줄게.‘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산 다 팔아서 패가망신한 사람 많아요. 그리고 후회하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그럼 너 부자네. 그러면 네가 가진 그걸 남한테 한 번 줘 봐. 어떻게 되나?” 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줘요. 왜? 율법주의라는 건 내가 그걸 열심히 지켜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내 안에 쌓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내 겁니다. 절대로 못 줘요. 아담들의 본능입니다. 이건 못 줘요. 그래서 그 부자가 자기 것 팔아서 다른 사람 안 줬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다음 시간에 ‘가난과 금식’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릴 텐데, 성경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전적인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네가 부자잖아. 그러면네가 가진 거 한 번 줘 봐.’ 했더니 못 줍니다. 줄 수가 없어요.
율법은 모두 그 아가페의 사랑 하나로 수렴됩니다. 예수님이 ‘율법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와 똑같은 게 이웃 사랑이다.’ 하셨어요. 그 둘은 똑같은 거라고 하셨어요. 십계명의 1~5계명은 6~10계명을 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1~5까지만 설명하고, 6부터는 예수님이 오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제목만 달아놓았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설명하세요. 그러니까 온 율법은 하나입니다. 사랑, 사랑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 진의를 알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하는 자는 사랑을 가진 거죠? 그러면 그 사랑을 흘릴 수 있어요. 그런데 부자 청년은 율법의 진의인 사랑으로 율법을 지킨 게 아니라 엉터리로 그 율법을 세목으로 지켰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건 ‘내 거’거든요. 내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내가 쌓은 것이기 때문에 남을 주면 안 돼요. 그걸 어떻게 줘요? 못 주는 겁니다.
진리라는 건 하나여야 진리입니다. 그리고 변하면 안 돼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 하나는 한 분이신 영원의 하나님, 그분의 아가페, 사랑 밖에 없어요. 그게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진짜 그 진의를 알고 지켰으면 그는 당연히 그걸 흘려주게 되어 있어요. “이게 진리고, 말씀이고. 예수입니다.”라고 흘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율법으로 지키면 어떻게 돼요? 그걸로 내 가치를 상대적으로 상승시켜 남을 구분하고, 구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써요.
‘넌 왜 아직도 성경을 그거밖에 몰라?’
‘넌 왜 자꾸 교회를 빼먹어?’
‘넌 왜 헌금을 그것 밖에 안 해?’
이게 땅의 보좌들의 딜레마입니다. 그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어요. 떠나가는 그를 보면서 제자들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나?’ 걱정할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19:23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 부자청년도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떠나갔고, 제자들도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 제자들은 알았어요. 화장실 갈 때 보니까 예수님이 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있어요. 부자였어요. 제자들은 어때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을 때 아버지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거기에 삯꾼이 있었어요. 고대시대에 삯꾼을 부릴 수 있는 큰 배를 가진 이는 지주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들이 배를 도로 꺼내서 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러는 겁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면 당신도 안 되고, 우리도 안 되는데 그러면 누가 갑니까?” 여기서 바늘귀는 바늘의 귀가 아닙니다. 당시 성전에는 12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그걸 인용해서 쓰는데, 12는 아들의 수입니다. 야곱의 12아들에서 나왔어요.
첫째 르우밴, ‘보라, 이게 아들이다’ 막내 벤야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자, 이게 아들이야. 완성은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면서 열 둘을 쭉 연결하면? 이게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아들이 되는가?
그러니까 이 열 두 문이 성전에 나 있는데 첫째가 제물, 양들이 들어가는 양문입니다. 거기는 뚫려있어요. 제물만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맨 마지막이 느헤미아서에 딱 한 번 나오는 함밉갓문입니다. 그건 심판의 문입니다.[주: 그외 모통이 문 또는 옛문(대하 25:23, 대하 26:9, 느 3:6, 렘 31:38, 슥 14:10), 에브라임문(대하 25:23, 느 12:39), 골짜기문(대하 26:9, 느 3:13), 분문(느 2:13, 느 3:13, 느 3:14), 샘문(느 2:14, 느 3:15), 양문 또는 베냐민문(느 3:1), 어문(느 3:3), 수문(느 3:26), 마문(느 3:28), 동문 등이 있다.]
그런데 12문 중에 바늘귀문이 있어요. 그 바늘귀문은 밤에 살짝 열려있어요. 모든 문은 잠겨 있고 양의 문과 함께 바늘귀 문만 열려 있는데 사람만 한명 들어갈 수 있어요. 밤에 낙타는 못들어가요. 예수님이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문으로 낙타가 들어갈 수 있어? 아무도 못들어 가.
밤의 세상에서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낙타 같은 부자들은 절대 못 들어간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된 신부, 창세기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만- 하나님과 방불한 자가 된 그들만- 하나님이 품어 안아 데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는 낙타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부자는 못 들어가요.
그래서 주님이 ‘사람의 것으로는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갖출 수가 없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의해서만 가능한 거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한 마디로 왜곡된 율법을 완전히 묵사발 내버리신 사건입니다. 그게 부자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부자, 율법주의자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너는 속옷도 못 입고 있는 벌거벗은 자다. 제가 그 속옷을 입고 있다가 벌거벗겨져 도망간 청년의 이야기 해드렸죠? 넌 벌거벗은 자야, 하세요.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이게 의의 병기입니다)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제발 좀 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제발 좀 봐! 이 말씀이 뭔지, 이 율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제발 좀 똑똑히 봐! 하시는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러한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 혹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한 땅의 부자들에게 은혜나 용서 같은 게 받아들여질까요?
은혜나 용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자가 선물로 받는 겁니다. 그들에게만 그게 감사한 일이 돼요. ‘내 것이 있는데 내가 왜 은혜를 받아야 돼? 자존심 상하게.’ 이게 선악과 먹은 아담들의 자존심입니다. 절대로 그들은 그 은혜나 용서 같은 것은 원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건 자기 것이 없는 자들에게나 통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해요. 그 가난은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 가난입니다. 그거 없으면 죽는 자.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복 있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그거 없어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열심과 노력과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걸 부자라고 해요.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는 여기에 가까워요.
그렇게 말씀을 사랑이라는 온전한 하늘의 떡으로 먹는 게 아니라 잘게 부스러진 부스러기로 먹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생명의 책은 단수, 한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행위의 책은 ‘책들’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요. 성경을 사랑, 아가페, 예수, 진리로 못 보는 사람은 (한 권인)그 책을 여러 세목이 적힌 여러 권의 책으로 보게 돼요. 이 책은 이걸 강조하고, 이 책은 이걸 교훈으로 주고 있고... 이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부스러기입니다.
말씀은 하나입니다. 은혜의 떡, 하늘의 떡. 그런데 그것이 행위의 세목이 되면 그때부터 저주와 사망의 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누가 가장 감동적인 반성의 모습을 보였습니까? 다른 말로, 누가 가장 부자였어요? 유다입니다. 제일 멋있어요.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욕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했어요. 다른 제자들과 몰래 감춰둔 배 꺼내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생업에 열중했어요. 반면에 유다는 욕도 안하고, 서슬이 퍼렇던 성전으로 들어가서 제사장들에게 돈을 집어던지면서 ‘저 이는 무죄다!’ 외쳤습니다. 그는 무죄다. 그리고 ‘내가 무죄한 자를 팔았으니 벌 받아 마땅하다.’ 하고는 자기 스스로 벌을 줬어요. 멋지잖아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부자라고 해요.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때,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좀 그렇지만, 그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죠? 그런데 성경이 유다에게 떼어준 건 부스러기라고 해요. 다른 제자들은 떡인데, 유다만 ‘프소미언’ 부스러기입니다. 성경에서 프소미언은 딱 네 번 나오는데, 유다에게만 써요. 유다에게만 ‘부스러기로 줬다’고 해요.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알토스(떡)를 클라오(떼어, 잘라서) 하여 부시키온(조각)으로 줘요.
그렇게 주님이 떼어주신 빵 조각을 먹은 자들은 그들의 뻔뻔스러운 행동에도 생명을 얻는 반면, 주님이 주시는 떡을 부스러기로 먹은 자들은 아무리 멋진 행동을 내어놓아도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더란 겁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말씀을 부스러기로 먹은 자가 훨씬 멋있어 보이고, 떡으로 먹은 자들이 훨씬 못나 보여요. 그러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교는 성경 곳곳에 등장해요. 대표적인 이야기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가 나와요. 지옥 간 부자입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대요. 이게 누구 옷입니까? 제사장 옷입니다. 지금 율법주의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이 두들겨 패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 해요. 이 말은 ‘날마다 잔치만 벌였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모든 날(헤메라)들을 깨끗하고 훌륭하게 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부자는 모든 날들을 깨끗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잔치는 자기 잔치로 아담들의 잔치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율법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세상 아담들의 시선이며 평가이며 실체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잔치를 벌이기를 좋아하고 행복해 해요. 사람들이 평가해주면, 존경해주고 칭찬해 주면 가진 게 개뿔도 없어도 안 먹어도 배불러요. 저도 해봤어요. 성경은 그것도 죄라고 해요.
그러한 부자와 대조가 되는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이건 ‘엘 아자르’라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겁니다. ‘하나님은 돕는 자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니까 어떻게 됐다? 거지가 되더라. 거지, ‘프토코스’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의 그 가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니까 가난한 거지가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면, 하늘의 떡이 없으면 사망이라는 것을 아는 어떤 자의 대표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 나사로가 부자와 대조되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있다.’ 그래요. 그 대문, ‘퓔론’은 요한계시록에 많이 등장하는 성전 문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자의 문 밖에 있다는 건 율법주의의 대문 밖에 있는 거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는 자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때였습니다. 부정한 문둥병자들이나 죄인들이 쫓겨나 있던 곳이 문 밖입니다. 그들은 ‘부정한 자, 개, 돼지’로 불렸어요. 그래서 거기에 그 나사로와 개가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눅16:22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조각, 푸시키온을 받아 먹어요.
부스러기라고 번역해 놨지만 프소미언이 아니라 푸시키온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떼어준 조각.
율법주의자의 대문 밖에서, 옛 성전 밖에서 율법이 떨어지는데, 그걸 떡으로, 조각으로 받아 먹는 어떤 이가 있더란 겁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주의자가 볼 때 거지, 개 취급을 받고 있더라는 겁니다.
“야, 우리처럼 좀 멋지게 한 번 살아 봐! 이렇게 멋지게 재산도 다 기증하고, 착한 일도 좀 하고, 일요일마다 밥 퍼주러 다니면서 우리처럼 좀 멋지게 한 번 살아 봐! 이 개들아.”
율법주의자에게 이런 취급 받아요.
예수님이 딸의 치유를 부탁하는 가나안 여자에게 개라고 하셨습니다. “내 자녀에게 줄 걸 개한테 안 줘.” 그 여자가 뭐라고 해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프시키온)를 먹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그게 믿음이라는 거야.” 그 여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게 믿음의 내용이다’ 하는 뜻입니다.
거기도 프시키온입니다. 조각. 그렇게 거지 나사로와 개들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개 취급을 받는 어떤 자들이 부자, 율법주의, 옛 성전, 그 부자의 상, 제단에서 떨어지는 그걸 조각, 떡으로 받아먹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그냥 부스러기, 프소미언으로 먹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유다의 부스러기를 먹는 이들입니다. 율법으로 보는 것, 법으로 보는 것, 표피적으로 보는 것, 그렇게 모래 같은 광야의 부스러기를 먹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요? 부스러기, 물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프소미언, 부스러기로 받고 나갈 때 성경이 일부러 가룟 유다 앞에다 ‘시몬의 아들’이라고 해요. 한 번도 안 쓰다가 왜 그걸 썼겠어요? ‘시몬’은 ‘물이 없음, 광야, 사막, 모래’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몬의 아들유다가 부스러기를 받고 밖으로 나가더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물, 정결한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는 그가 나간 다음에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떡만 먹고 부스러기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부자가 음부, ‘하데스’에 떨어져요. ‘하’는 부정접두어고 ‘데스’는 ‘말하다’에서 나온 거니까 ‘말이 없는 곳, 진리가 온전치 않게 회자 되는 곳’이 음부, 하데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지옥인 겁니다.
부자가 음부, 하데스에 떨어졌어요. 물이 없는 곳, 말이 없는 곳에서 그가 원하는 게 뭐겠어요? 물! ‘이제 알았어. 내게 필요한 건 물이야.’ 그래서 ‘물 주세요.’ 해요.
눅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러요. 따라서 여기의 아브라함은 창세기 믿음의 조상의 그 아브라함이라기보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어떤 무리의 아버지, 교회의 아버지’란 뜻이고, 하나님을 비유하는 겁니다. 이야기 자체가 실화가 아니라 비유고요.
아브라함, 어떤 무리의 아버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에게 간다.’ 할 때 ‘부모를 떠나’는 ‘부모로 떠나’도 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에는 하나님을 어머니라고도 해요. 부자가 하늘ㅇ릐 아버지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해요.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해요. 말이 없는 메마른 혀. 그래서 성경에 벙어리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겁니다.
벙어리란 병은 없어요. 귀머거리가 벙어리가 되는 겁니다. 벙어리는 소리는 내는데 듣지 못해서 말을 만들지 못하는 겁니다. 그 말이 없는 메마른 혀, 엉뚱한 말로 오그라든 그 혀. 거기에 말씀의 물을 적셔서 그 혀를 살아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그 부스러기 같은 말, 모래 같은 말, 그걸 적실 수 있는 물이 뭔지 먼저 조명을 해보겠습니다.
이 땅의 부자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그런 물. 그게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물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항상 위엣 물과 아래의 물이 등장하는데, 아랫물은 바다로 표기가 표기가 되어 ‘저주의 물’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물은 위의 물의 모형인데 이게 진짜인 줄 알면 이건 ‘저주의 물’이 되는 겁니다. 위의 물, 즉 ‘이슬, 비, 이른 비, 늦은 비...’ 등은 다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지면 큰일나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당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늘과 땅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나 여기에서의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엘로힘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엘로힘에서 알레프가 하나님인데 그거의 복수가 엘로힘입니다. 하나님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어줍잖게 삼위일체란 말을 하는데,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들, 인간이 설명 가능한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것도 실체는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하나님이 ‘엘로힘’입니다. 그래서 복수로 쓰여요. 그런데 어떻게 설명을 해 가시는가 하면, 땅으로 하늘을 설명해 가세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하늘이 존재합니까? 파란 하늘, 뭉게구름 떠 있는 하늘, 노을 빛 물든 누런 하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그 하늘 말고 형이하학적 하늘, 그 하늘이 진짜 있어요? 로케트 타고 열심히 올라가면 거기에 닿을 수 있나요? 하늘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늘이 있는 것처럼 살아요.
하늘을 그려놓고 그냥 하늘이라고 불러요. 죽어라고 올라가 봐야 그건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하늘을 상정을 하고 추론을 하느냐 하면, 바다를 보고 하늘을 그려요.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을 그려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을 설명하는데 땅의 것에서 하늘을 읽어냈을 때 그 땅의 것을 하늘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늘의 진리를 이해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하늘들’이라고 해요. 헬라어 원어로 보면 ‘하늘들’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그 단어는 전부 교회를 가리켜요. 하늘이라고 해요.
‘우라노스(하늘)’는 ‘오로스(산)’에서 왔어요. ‘오로스’에서 ‘오르니스(o[rni", 3733: 새, 수탉, 암탉)’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헬라어에 익숙한 이들은 ‘우라노스, 오로스, 오르니스’ 이런 단어가 나오면 금방 그 연관성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단어들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이게 도대체 뭐야?’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오로스, 산이란 단어 앞에 관사를 붙이면 반드시 ‘성전’이라고 읽었어요. 왜? 예루살렘 성전이 평지 위에 솟아난 산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주:시편 121편이 ‘성전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있다.)
그 산이 성전이고, 그걸 우라노스라고 하고 그 앞에 관사를 붙인 ‘호 우라노스’도 성전으로 금방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옛성전을 가지고 진짜 참 성전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 성전을 가죽으로 덮고 하나님이 거기에 뭘 새기라고 했어요? 새! 이게 다 성전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라고 했을 때 그건 그건 날아가는 새 보라는 게 아니라 성전을 보라는 겁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를 봐라.’ 하면 들은 광야, 광야는 교회. 백합화는 성소 안에 들어 있는 등경의 모양이 백합화입니다. 다 성전을 가리키는 겁니다.
‘성전을 봐!, 아래의 것, 땅의 것을 봐!’
그리고 그걸로 곡해하지 말고 거기서 하늘을 읽어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새의 날개,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어서 건져냈다.’라고도 하고, 또 ‘내가 날개 아래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라고도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땅의 옛 성전은 율법주의의 대명사잖아요. 그 옛 성전은 그게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한 새의 날개가 될 수 있으며, 하늘이 될 수 있는가? 성경은 호 오로스, 오르니스, 호 우라노스를 같이 쓴단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느냔 말에요.
땅의 것에서, 이 모형에서 하늘의 것, 진리를 읽어내면 그걸 곧 하늘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우라노스, 하늘들’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하늘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솨마임’입니다. 그건 ‘쉠(거기)’이란 단어와 ‘마임(물)’이란 단어의 합성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쉐마임’은 ‘거기에 물이 있는 것,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서 생명의 실과를 맺히게 하는 곳’ 그곳이 하늘입니다. 그래서 에덴에도 굳이 네 줄기의 강이 흐르는 겁니다. 나중에 요한 계시록에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수의 강이 흘러요. 전세계에도 4대강 문명, 4대강 개발이란 말이 있어요.
물이 있는 곳,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진리의 물이 있는 곳을 솨마임, 하늘이라고 해요. 그러면 여러분 안에 그 진리의 물, 다른 이에게 생명의 실과를 맺히게 할 수 있는 그 물이 있으면 여러분이 하늘인 겁니다.
여러분이 동화책 속에서 읽었던 그런 개념들은 버리세요. 천사, 선녀가 두레박 타고 내려오는 그런 하늘이 성경에 적혀있는 게 아닙니다. 동화책처럼 성경을 읽으니까 전부 그런 하늘을 기다리고, 천국도 저 우주 저편에 있는 건 줄 알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그 물이 있으면, 진리가 있으면 여러분이 ‘하늘’이 돼요.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수면에’ ‘파님’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나타나는 걸 ‘파님’이라고 해요. 그걸 또 얼굴이라고도 해석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나이다’ 할 때 그건 하나님의 얼굴을 진짜 뵌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님은 말씀으로 나타나니까 말씀이 뭔지 알았다는 뜻입니다. 얼굴을 뵈었다는 것이 파님입니다.
그 물에 파님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나타난 걸, 그 물에 파님, 나타난 걸 하나님의 신, ‘영’이라고 하자. 이런 말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 그러죠?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하세요. 아무튼 그렇게 땅의 부스러기를 먹는 자들, 이 세상의 부자들은 물이 없어서 결국 모래로 죽는 겁니다. 부스러기로 죽는 겁니다.
거기에 반드시 물, 말씀, 호흡, 생기, 루아흐가 부어져야 더스트가 아닙니다. 그때 생령이 되는 겁니다. 하이 네페쉬 하야가 되는데 그게 빠지면 부스러기라니까요. 그들은 그 영, 말, 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전부 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선악과 먹은 자니까.
그래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그 말씀만 하고 있어요. 창세기 1장1절부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진리와 대적하기 위해서 항상 무얼 밟고 서요? 바다, 모래라고 해요. 그리고 구약에서도 바다와 땅의 경계, 바닷가, 이런 것들이 많이 나와요. 그게 모래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멸망의 때에 전부 무너지게 된다, 반석 위에 지으면 든든하게 선다’고 해요.
건축하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사실 모래 위에 지으면 집이 굉장히 견고하다고 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건축기술 가르쳐 주는 게 아닙니다. 반석은 뭡니까? rWx(6697, 추르)라는 단어 자체가 ‘물을 내다’는 뜻입니다. ‘돌’이란 의미보다 ‘물을 내다’는 뜻입니다. 모래 위에 너희들이 성전, 집을 지으면 그게 옛성전이 되는 거고, 물을 내는 그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그게 참 성전이 되는 거다, 라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물이 있어야 돼요. 진리의 말씀인 물, 거기에 물이 있는 겁니다. 하늘, 그 물, 그렇게 이 땅의 부자들은 말씀을 부스러기로 먹고 물이 없어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음부, 하데스의 부자가 제발 물 좀 찍어서 혀에 대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늘 아버지가 뭐라고 해요?
눅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너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여기서 고생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생을 했으니까 여기서 좀 위로 받아야 되지 않겠어?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건 해방신학자들이 하는 말이고. ‘좋은 것’은 ‘아갓도스(선)’고, 고난은 ‘카코스(악)’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악하다는 평가,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너는 세상에서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어. 왜? 날마다 연락했으니까. 열심히 깨끗하게 살아서 행복을 쟁취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 ‘아갓도스’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나사로는 그 율법주의 밖에서 진리만 받아먹고 있었으니 세상은 그를 무가치하다고 평가한단 말입니다.
진리가 밥 먹여 주냐?
진짜 사는 건 그 길 밖에 없는데 세상은 그런다니까요.
진리가 밥 먹여 주냐?
그저 웃지요.
그래서 그 부자는 ‘말이 없는 곳, 그 하데스에서 못 나간다’ 그랬더니 부자가 뭐라 그래요?
“나에게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섯’ 하면 생각나는 게 뭘까요? 왜 예수님이 여섯도, 열도, 일곱도 아니고 다섯이라고 했을까요? 율법 이야기 하는 겁니다. 모세오경, 율법, 율법주의 전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내려가서 그들에게 이야기 좀 전해 주세요. 그러면 그들이 믿을 겁니다. 율법을 부스러기가 아닌 떡으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 좀 해주세요.”
눅16:27
가로되 그러므로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는 누구? 구약입니다. ‘율법, 구약 성경이 있어. 그런데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너와 똑같이 이곳에 와야 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 단 율법을 부스러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속에서 생명의 떡인 예수를 읽어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거기를 모면할 수 있어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제사장, 율법주의 성전에서 떨어지는 율법을 프소미언, 부스러기가 아니라 ‘푸시키온’ 조각으로 받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를 예수, 떡으로 받는 이들이 있어요.
눅24:44-45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모세와 율법을 갖고 예수님이 ‘나’, 예수님 자신을 설명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니까 깨달음이 와요. ‘호라오’ 되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시니까 못 알아보던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를 알아봐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세요. 푸시키온이죠.
괜히 ‘떡이나 하나 먹어라’ 하신 게 아니라 말씀, 진리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늘 아버지가 하데스에 있는 부자에게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율법 속에서 진리이신 예수를 들을 수 있어. 은혜가 가입하면 분명 들을 수 있어. 그랬더니 부자가 뭐라고 해요?
눅19:30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 하리라 하신지라
그렇지 않대요. 모세와 선지자, 즉 율법에서 진리를 못 듣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저희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거래요. 이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가면 그들이 신기해서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났지?’ 이러면서 믿을 겁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았다’는 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거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구약과 상관없이 그들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우리의 아버지가 뭐라 그래요?
“안 돼!”
그들이 말씀 속에서 진리와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 앞에 나타나 그 이야기를 똑같이 해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 네가 있는 곳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데스에서 못 벗어난다.
그러니까 보세요. 십자가 이야기 하고, 부활 이야기 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 아닌 겁니다. 그게 뭔데요? 여러분 그게 진짜로 믿어지세요? 고민을 해보세요. 영원한 생명의 문제니까.
십자가는 뭐고, 부활은 뭐냐고요? 그게 여러분과 진짜 관계가 있어요?
말씀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서 복음을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못 듣고 법으로 듣는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실제로 설교를 많이 하셨는데 그걸 다 진리로 못 받아들였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한 예수님이 말씀하고 설교하셔도 ‘아 그래. 저걸 교훈 삼아서 저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요.
그러니까 그건 예수님이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절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대. 그러니까 저분을 열심히 섬기자.’ 이게 여러분의 영생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런 걸 건강한 신앙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해요. ‘저분이 내 죄를 대속하셨대. 그러니까 잘 섬기자.’ 이게 어떻게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그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고, 그 살아남이 곧 나의 살아남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겁니다.
‘아, 저분은 저렇게 죽어야 되는 거였구나.’ 그리고 거기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향유 옥합 깨서 예수님에게 부은 그 여자가 “빨리 죽으세요. 당신이 죽어야 일곱 귀신 들린 내가 살아요” 하고 부은 겁니다.
성경 말씀을 표피적으로만 해석을 해서 부스러기로, 율법의 조항으로만 보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세상의 자칭 성도들이 다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해요. 축하도 하고, 기념도 하고 금식도 하고, 통곡도 하고 별거 다 합니다. 그럼에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을 그냥 율법으로만 보게 되면 그건 부스러기, 물 없는 빵, 모래가 되어 그를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석 ‘추르’가 ‘생수를 내다’는 단어임에 반해서 ‘부정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라’는 그 돌은 ‘에벤’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 돌, 하나님의 아들로 때려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들에게 진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거 맞고 죽어요. 그래서 바울이 ‘누구에게는 그게 거치는 돌이 된다’고 그러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죽는 이들이 있다는 거고, 그렇게 맞아 죽는 이들이 부자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늘의 모형이라고 해요. 로마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담겨 있다고 해요. 그릇이란 겁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그걸 붙들고 있는 법칙과 현상들까지도 다 하늘의 것을 모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진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가 있고 모형이 있으면, 그 모형을 ‘가짜’라고 합니다. 그리고 참이 있는데 그걸 내용으로 담은 가짜 그릇은 역시 가짜입니다. 그렇다고 가짜와 거짓이 나빠요? 이걸 통해 우리가 그 진리를 알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그게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것으로 하늘을 설명해 주세요.
그런데 땅의 것 중에는 성전도 들어가 있지만, 성경도 들어가 있고, 우리의 육신도 들어가 있어요. 그걸 통해서 하늘을 배우면 그 육신도 하늘이 되는 겁니다. 물론 나중에 바꿔 주겠지만, 그래서 이건 아주 쓸모 없는 게 아닙니다. 사랑해 주세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경에서 예수, 진리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가짜입니다. 그게 거짓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거짓을 그대로 계속 설명하면서 ‘착하게 잘 사세요. 그러면 복 줄 겁니다. 하늘에서 상이 커요. 면류관 줄 겁니다.’ 하면 그걸 거짓말이라고 하고, 그 말 하는 자를 거짓 선지자라고 해요.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세상이 나쁜 게 아니라 이 세상만을 진짜, 참이라 보는 이들이 미련하고 둔한 세대인 겁니다. 껍데기를 참으로, 진리로 곡해해서 그걸 열심히 지키고 추구하려 하는 자들이 바보인 겁니다.
하여튼 인간들의 손만 가면 모든 게 망가져요. 재주들도 좋아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 내요. 하얀 양을 주었는데 얼룩얼룩한 양, 점이 있고 흠이 있는 걸 기필코 만들어 내요. 그 야곱이. 발목을 잡는 자, 넘어트리는 자, 실족시키는 자가.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참 재주도 좋다. 어떻게 기어이 그걸 만들어 내니?”
인간들의 세상을 보세요. 인간들은 기필코 만들어요. 조금 있으면 복제고 뭐고 막 되어 새로운 종이 생길 겁니다. 나중엔 여러분이 다 그냥 인정하며 살게 될 겁니다. 여기는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호 코스모스 속에서, 세상 속에서 진리를 읽어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거짓 속에서 진짜를 봐요.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왕의 꿈을 봅니다. 그 왕도 자기 꿈이 뭔줄 모르는데.
꿈이 뭡니까? 이 세상입니다. 한시적인 것. 꿈은 항상 깨기 때문에 꿈입니다. 안 깨면 꿈이 아니죠. 왕의 꿈, 세상에서 왕 되고 싶은 자들의 꿈을 하나님의 뜻으로 읽어내는 이들이 반드시 있는 겁니다. 그들을 성도라고 해요.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에이돈(보다) 속에서 호라오(깨달음으로 보다) 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껍데기에 묶여서 성경을 무거운 율법책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사랑을 읽어내면서 자유의 함성을 외치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짜 살아계신 예수를 보고서도 율법에 묶여서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처럼 예수를 본 적도 없는데 말씀을 통하여 그 예수를 보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전자에 있어서 예수는 그저 모형이요, 가짜일 뿐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사람으로 왔어요. 진리를 담고 왔어요. 그런데 진리로 못 알아 먹어. 그러면 그 예수는 가짜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담고 왔어요. ‘내가 진리다!’ 하셨어요. 그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으면 그 예수는 이제 필요 없어요. ‘아, 이거였어요?’ 해야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러고 있으면 안된단 말입니다. 진리를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와 십자가는 ‘파님’ 쇼에 불과한 겁니다. 그게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진리가 도리 때, 그게 가치있는 거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땐 그냥 쇼라니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처음 하신 일이 뭡니까? 설교입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셨죠? 그건 예수님이 ‘야, 이제 내가 살아났으니까 안심해.’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또 적기 뭐하니까 성경 기자들이 ‘평강이다, 에이레네 휘민. 너희들은 평강이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다.’ 이렇게 한 마디로 어떤 걸 축약해서 설명한 겁니다.
평강, 에이레네. 소 두 마리가 멍에를 함께 매는 걸 말합니다.
히브리 소는 멍에를 소 두 마리가 함께 매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걸 형상화 시켜서 그려놓은게 에이레네라는 단어입니다. ‘평강을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래서 소입니다.
열왕기상 9장에서 성전 짓기가 완료된 것을 한 단어로 ‘샬롬, 평강’이라고 해요. 진짜 성전이 완성 되었을 때 그걸 평강이다,라고 해요. 누구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을 때 ‘야, 이제 진리가 완성됐구나, 하나님의 뜻, 언약이 완료가 됐구나.’ 할 때 그걸 평강이라고 해요. 그 평강에 의해 존재하는 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해서 오시자마자 ‘너희가 평강이다’ 하세요. 이제 일이 끝난 겁니다. ‘에이레네 휘민’. 설교를 하신 겁니다. 그들이 알아먹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어요. 잠깐 화장실을 갔는지, 어딜 갔는지 하여튼 그것 때문에 ‘의심 많은 도마’로 낙인 찍혔어요. 아니, 나라도 못 믿겠네. 나는 못 봤는데 나머지 제자들은 다 봤다는 겁니다.
‘나한테도 보여줘. 그러면 믿을게.’
당연히 그래야죠. 그 제자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누가 높으냐고 서로 싸웠어요. 그런 제자들을 어떻게 믿어요? 예수님 잡혀가던 그날까지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지 싸우던 그놈들을 어떻게 믿냐고요? 당연히 ‘난 너희들 못 믿어. 나는 보면 믿을거야.’ 그래야죠.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 옆구리에 손 넣어보고 ‘어 진짜네.’ 그랬다면 그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 자체에서 충돌이 일어나요. 저도 예전에 원문을 공부하기 전에는 ‘참 의심 많은 놈이네.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믿어? 어떻게 옆구리에 손까지 넣어봐?’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손을 넣어봤다는 대목은 안 나와요.
그냥 우리가 막연히 추측하는 겁니다. 왜? 나는 그럴 거거든.
성경 어디에 도마가 손을 넣어봤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믿음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게 되면 그게 율법주의가 되는 겁니다.
아닙니다. 거기서 ‘호라오’ 깨달아지는 걸 내가 신앙하는 겁니다. 진리를 신앙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마가 거기에 손을 넣으면 안 되는 겁니다. 원문을 다시 찬찬히 보니까 안 넣었어요. 그리고 ‘평강이다’란 말씀을 듣자마자 도마가 호라오 했다고 해요.
요20:25-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8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니까 일부러 이런 숫자를 여기에 넣은 겁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넣어봤다는 말은 없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금방 도마가 ‘호 퀴리우스, 호 데오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너는 본 고로 믿느냐? 이 믿음 없는 놈! 이렇게 보여요. 그러나 여기에 의문사는 없어요, 완료 직설법 능동태입니다. ‘너는 나를 호라오 하네. 그리고 믿네!’ 이런 뜻입니다. 에이돈(눈으로 보다)이 아닙니다. ‘호라오’가 쓰였어요. ‘너는 나를 호라오 하네. 어떻게 안 만져 보고 내 말을 듣고 나를 호라오 하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호라오 하고 나를 믿네.’ 해요.
‘그렇게 보지(에이돈) 않고, 네 눈으로 보는 걸 믿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호라오 하고 믿는 이들이 복된 거야. 너는 이제부터 그들의 표상이 되는 거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거기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는 진짜 믿음이 뭔지를 도마를 통해 설명해 주는 겁니다. 아니, 보이는 걸 손가락 넣어보고 믿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런 건 조금 있으면 금방 싫증나고 또 금방 의심해요. 그렇게 인식해서 믿은 건.
그런데 내가 진리가 되어 내 마음 안에 그 법을 갖게 되면 그 까짓 거 안 봐도 돼요. 저는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서 ‘한 번 넣어봐’ 그러면 귀찮아 할 것 같아요. 안 넣어 봐도 믿는데 왜 그걸 넣어 봐요?
여러분, 믿음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신비주의자들 한 번 보세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하니까 신비주의자들의 행태가 미친 짓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 그냥 호 코스모스, 세상이라는 걸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예수를 향한 열심을 내놓는 그것도 역시 ‘보고 믿겠다’라는 겁니다.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대로 행하겠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그 안에서 진리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셔서 여러분이 하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너희가 거룩한 나라, 천국이야. 하늘이야’ 그런 겁니다. 그게 내 안에 진리로, 사랑으로 딱 간직되어 있어 보세요. 물론 우리 육이 늘 방해를 하고, 우리를 계속해서 넘어트리지만 뭐 부러운 게 있어요? 뭐 대단하게 부끄러운 게 있냐고요. 이까짓 몸뚱이에 일어난 일을 뭐 그렇게 부끄러워 하고, 상처로 가지고 있고, 또 이까짓 몸뚱이에 두른 금테가 뭐 그렇게 자랑스러워요?
내 안의 그 진리가 진짜인데, 그게 진짜 생명인데 다른 데에 눈 두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뭐 교회에 와서 꼭 무슨 교제를 하고 그래야 돼요? 구역을 만들어 달라는데, 그거 꼭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서 뭘 할려고? 쌈질이나 하지. 그냥 편하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교제하세요.
그런 거 만들면 또 담당하는 목사 고용하고 이래야 되는데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 교인들 관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해서 뭘 잡아놓으려고 해요? 자리도 없는데 이해 안 되는 사람은 빨리빨리 다른 데 가야지.
뭐가 외로워요? 혼자 있어도 행복해요. 그리고 하늘이 된 내가 한없이 사랑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주신 내 주변의 작은 것들, 내 가족들, 다 귀하고 가치있고, 사랑스러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별 다른 게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하늘이라 불러주십니까? 땅의 것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고, 더럽고, 유일하게 하나님을 거슬러 다른 방향으로 가는 나를 어떻게 하늘들이라 부르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 안에 진리를 심으셨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우리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 되는 그날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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