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6:12~14)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마르틴 루터와 존 캘빈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말씀이 없는 껍데기 기독교였습니다.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했고 설교 말씀도 교황청에서 일괄 작성하여
각 교회로 보내주던 때였습니다.
그걸 라틴어로 줄줄 읽어 주면 회중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성례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일상생활 속에서 ‘내 탓이요’를
외치며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말씀을 알 길이 없으니 행위라도 내어 놓아야 마음이 좀 편 할 거 아닙니까?
당시 교회가 인간들의 행함에 얼마만큼 가치를 부여했는가 하면, 인간들의 행함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질 만큼의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심지어 그것으로 지옥에 가 있는
조상도 빼낼 수 있을 만큼 인간의 행위가 가치 있게 취급이 되었습니다. (면제부)
그런데 루터(성경교사)가 독일어로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 교사였으니까요.
그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의인은 그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캘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성도인 것이지 선행을 행하고 종교행위에 열심을 부린다고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 개혁을 한 사람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오늘날 루터교는 공재설을 따르고 있음)
화채설과 거의 유사.그거는 아니지만...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가 된다는 것
카돌릭에서는 이거 안하면 큰일난다 합니다.
주장하기도 하고 침례 교인들을 핍박했으며(멧돌을 걸어 수장시킴), 장로들이 주일날 순찰을 돌아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감옥에 쳐 넣기도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오백년 동안 기독교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예수를 대신하는 이들이 되었고,
성경을 곡해하고 오도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이
캘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이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보다 기독교 강요가 훨씬 익숙합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열리지만
캘빈의 책들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 그려진 그리스도 예수,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말씀을
비판하고 교리를 수정해 갑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요.
(엡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롬1:17)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분명하지요?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그냥 막연히 이 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예수라는 분이 내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내 마음 속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기면 그게 믿는 건가요?
어떻게 믿어야 해요? 성경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고 부활했다고도 합니다.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믿어야 합니까?
정말 믿어지기는 하세요?
캘빈이 이야기했고 루터가 이야기 했으니 그냥 관념으로라도
그렇게 우기고 있으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주님은 분명히 ‘복 있는 자는 애통(펜데오πενθέω, 유월절)으로
초청된다(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5:4)
애통하는(펜데오πενθέωG3996)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다(감정이나행동),애도하다
- 펜도스πένθοςG3997-슬픔.에서 유래 :파스코G3958πάσχω의 대체어에서
유래된 강세형
-‘파스카πάσχαG3957(유월절)’에서 나온 단어
:그 단어를 아람어로 바꾸면 ‘페싸흐פּּסחH6453(유월절)’이 됩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G3870) 것임이요.
히브리어 ‘ 페싸흐פּּסחH6453 ’를 그대로 끌어다
쓴 단어인데, 그 단어가 ‘유월’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고통과 고난’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넘어가다, 뛰어넘다, 절룩이다, 절게 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주님의 유월절로 초청이 되는 자가 복 받은 자이고 그게 바로 성도의 위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유월절은 우리가 관념으로 믿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가 그 유월절로 초청이 되어 도륙당해 죽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 유월절 희생제사 추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세상 적으로 볼 때 저주이지 복이 아니잖아요?
신약 성경이 ‘복’이라고 번역을 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G3107’는 히브리어 ‘
바라크( בּלקH1110)’를 번역해서 쓰는 말인데, 히브리어의 복 ‘바라크’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명기 28 장에서 ‘내가 축복(그림심산에서 선언)과 저주(에발산)를 너희 앞에 둔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반씩나누어서 이스라엘에게 외치라는 것..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법은 하나입니다.
그게 ‘바라크( בּלקH1110)’입니다. 파자 하면 베잍(ב), 로쉬(ל), 카프(ק)로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복은 복인데 ‘알지 못하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은 알면 복이지만 모르면 저주가 되는 그런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실체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저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앎이며, 생명이며,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악과가 먼저 주어졌던 것입니다. 죽어서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은 이들은 저주의 현실부터 경험하여 복의 현실로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나무가 단수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을 들으시고
외우신다고 해도 그게 여러분의 일이 되어 지지 않을 때
그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건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는, 내 죽음의 인식에서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내 죽음’이 인식이 될 때
‘아,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예수와 내가 하나로 연합이 되는 겁니다.
그걸 ‘살았다’라고 하고, 쉬운 말로 ‘부활’이라고 해요.
‘나’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 사유, 시도, 열정, 등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멸할 것 중의 좋은 것(삼상15:21,대상2:7), 더러운 옷(사64:6, 슥3:3)’
이라는 것이 처절하게 인식이 될 때 ‘나’가 죽는 것이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 때문에 예수님이 ‘나’가 되셔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사실로 와 닿게 되는 것이며, 그 때에 십자가가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고,
그 이해가 곧 살아나는 것이고, 그걸 믿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복이라는 것입니다. ‘
나’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을 진리로 만드는 것이며,
나의 살아남이 예수의 부활을 진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그 사람에게만 유효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이해도 설명도 없이
무조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문구를 외치고 다니거나
자동차 뒤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복음을 오도하게 하는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피적 문구만 보고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 열심히 섬기기만 하는 율법적 종교인이
생겨 난다면 그건 그 사람을 죽여 버린 것이지 전도를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에게 그 말을 한 후에 어떻게 했지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냥 그 말만 하고 훌쩍 떠나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16:31~32)
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성전)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 하더라
그가 믿는 것이며 거기에서 죽습니다
로고스(λόγος)에 담아 레마(ῥημα)를 전하자...
그렇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자 간수가 그 죄수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세례를 받습니다.
어딜 간수가 자기가 지키던 죄수들을 집에 데려다가 씻기고 먹입니까?
그건 이제 자기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간수의 육이 죽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고 예수의 부활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례니까요.
그는 예수를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라는 존재에게서 먼저 경험이 되어져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냥 관념일 뿐입니다. 믿는 거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냥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죽은 한 사람의 목수일 뿐입니다.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불안해서 마냥 섬기기만 하는 겁니다.
뭐라도 갖다 바쳐야 안심이 되고 자기 몸을 혹사 시키기라도 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이 ‘몸의 사욕’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사욕이라는 단어가 ‘에피뚜미아(έπιθυμίαG1939)’입니다.
‘에피뚜미아’가 ‘희생제사’에서 나온 단어라는 건 제가 지난 시간에도 설명을 해 드렸지요?
그런데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듣지) 말고’라는
어구에서의 ‘순종하다’라는 단어 ‘휘파쿠오ὑπακούωG5219’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진리를, 몸이 익숙한 ‘희생제사’라는 율법주의 안(엔εν)에서, 율법으로 듣고 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일단 말씀을 전하면 자기안에 마음 선악으로 받아들여서 해야되 말아야되 이렇게 먼저
생각을 합니다.그게 몸의 사욕을 쫓지 말고의 진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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