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 - 6 : 12-14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역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아멘.
맹독을 가진 독사에게 물리게 되면 반드시 그 뱀을 확인해야 한다는 땅꾼들의 철칙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떤 뱀에게 물렸는지를 대충 설명이라도 할 수 있어야 의사가 신속히 치료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모사의 독은 살모사의 독에서 추축한 해독제를 써야 하고요 코브라의 독은 코브라의 독에서 뺀 해독제를 써서 치료를 합니다. 그러니까 뱀독의 해독제는 뱀이 죽어서 남긴 뱀독이라는 말이에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뱀을 보내세요. 불 뱀. 맹독을 가진 독사입니다. 그리고는 해독제를 주시는데 그 해독제를 주시는데 그 해독제가 역시 뱀이었어요. 놋 뱀. 장대에 매달린 놋 뱀.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을 불 뱀에 비유를 하시면서 내가 그렇게 장대에 매달려야 한다. 라고 하셨어요. 그게 불 뱀에 물려서 사망으로 내닫고 있는 역사 속 아담들의 유일한 해독제라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물린 아담들의 해독제는 놋 뱀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밖에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그들을 문 뱀이 누구라는 말이에요? 뱀의 해복제가 뱀이라 그랬는데 해독제가 나다! 그랬단 말에요. 여러분 모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면 딴 데 가서 거두절미하고 또 요 얘기만 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뱀이래. 이렇게 얘기하시면,,
자,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에 애급사람들이 믿던 신은 ‘라’ 라는 신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 신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신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소를 그 신의 형상으로 섬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을 하늘의 것으로 표현할 땐 태양으로 이렇게 표현을 했고. 그 때 당시에 그들이 신앙하던 그 신, ‘라’ 에 대한 신화가 있어요. 항상 신앙에는 신화가 따르기 마련이잖아요. 신화가 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 ‘라’가 땅으로 내려와요. 그런데 그 신이 땅으로 내려올 때는 양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내려옵니다. 그 신이 땅으로 내려올 때, 양의 머리를 가지고 내려오는데 고 때에 그 신을 수호하는 수호신들이 이미 땅에 있었어요. 그중의 대장이 뱀 머리를 가진 신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양의 머리를 한 ‘라’가 그 뱀의 머리를 가진 신에게 능력과 권세를 부어서 늘 하늘에 있는 ‘라’를 대적하는 땅 속에 있는 커다란 뱀을 죽이라 그래요. 옛 뱀, 커다란 뱀. 성경은 그걸 용이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커다란 뱀. 뱀이 커다란 뱀, 용을 죽이러 땅 속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뱀의 머리를 한 신이 커다란 뱀을 세 토막으로 잘라서 죽이고 하늘의 신 ‘라’에게 영광을 돌리죠? 뱀이 큰 뱀을 죽이고 평화가 오는 거예요. 이것이 애급의 신 ‘라’의 신화에요. 애급의 왕들의, 그 파라오의 왕관에 전부 뱀이 새겨져 있죠? 뱀 머리. 그게 내가 ‘라’ 신의 수호신이다. 라는 그런 표식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지혜라고도, 성경에서 뱀을 지혜롭다 그러잖아요? 지혜라고 해서 눈으로 그렸어요. 성경에서도 눈을 지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애급의 어떤 왕관이나 왕들의 묘소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을 보면 눈이 이렇게 그려져 있는 거예요. 피라밋에도 눈. 그리고 저 미국에 있는 달러에도 피라밋 꼭대기에 눈이 이렇게 그려져 있거든요. 프리메이슨 표식이라고 하는데 그런 거에 관심도 갖지 마세요. 그 이야기는 애급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과 같은 이야기였어요. 자기들의 신에 관한 이야기였단 말에요. 그게요.
430년 동안 애급에서 그 이야기를 진리처럼 들어왔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설명하실 때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을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에게 설명을 해야 되는데 뭘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요? 그들이 진리로 알고 있던 익숙한 어떤 것을 사용하여 설명을 하시겠죠? 하나님이 문자를 애급 이후에 주셨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 애급에서 그들이 익숙한 어떤 것으로 설명을 해야 될 거 아녜요? 그래서 예수님을 양이라고 하고, 뱀이 등장하고, 큰 용, 옛 뱀도 등장하고 그러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들이 430년 동안 들었던 신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금방 이해를 할 수 있었단 말에요. 아, 그게 그거야? 이렇게. 하나님은 항상 땅의 것을 모형으로 해서 하늘의 것을 설명한단 말에요. 왜냐하면 그 분은 무한이기 때문에 무한은 유한에게 감지가 안 돼요. 그래서 유한의 것으로 무한을 설명하는데 그게 모형이란 말에요. 히브리서 8장 5절 보세요.
히 8 : 5 -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렇게 땅의 것으로 순서, 차서를 정해서 차례차례 친절하게 하늘을 설명하는 것, 이걸 헬라어로 코스모스라 그래요. 질서, 차례, 차서란 뜻이에요. 코스모스란 뜻은. 우주가 그렇게 차서가 있고 질서 있게 움직인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냥 우주를 코스모스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건 원래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란 말입니다. 그걸 성경이 세상이라고 번역을 하죠? 코스모스를. 그러니까 세상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하나님과 하늘을 설명하고 있는 모형인 거예요. 그게 곡해된 상태, 표피적 상태로 그냥 머무르고 그게 그렇게 인식이 되어 버리면 그게 나쁜 의미의 세상이 되는 건데 그 코스모스가 차례차례 설명을 한 하나님과 묵시를 이해하게 되면 그 코스모스는 곧 진리가 된다는 말에요.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품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에요. 사도 바울이. 그러니까 모형으로써의 세상은 그 자체는 실상이 아니므로 실상이 드러날 때, 종국에는 파괴가 될 것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진리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악한 것이 아니란 말에요.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껍데기, 그릇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악한 게 아니에요. 그걸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이 악한 거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에 대해 난도질을 하신 다음에 그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설명하는 그릇이었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지켜서 구원 받는 거 아냐. 이게 독사의 새끼야, 라고 해 놓고 어느 곳에서는 율법이 악하냐? 또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렇게 차례차례 순서대로 어떤 모형들을 세워 놓고 하늘과 하나님을 설명하던 모형이 바로 율법이요, 성막이요, 성전이요, 성경이에요. 보세요, 그것들을 보면 차례차례 다 순서가 있어요. 차례차례. 뒤 섞이면 안 돼요. 성경도 요 차례로 편집이 된 이유가 있단 말에요. 다 차서가 있어요. 순서가 있다니까요. 그걸 코스모르라 그래요. 그래서 그 코스모스라는 단어 앞에 ‘호’라는 관사가 붙잖아요? 그러면 성경은 그걸 성전으로 해석을 해요. 성전. 물론 옛 성전이요. 그런데 그게 하늘의 성전으로 이해될 때는 하늘 성전이기도 해요.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에서 천과 지를 창조했다는 거예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 자연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성전 안에서 하늘을 볼 수도 있고 이 땅의 것으로만 볼 수도 있고 이렇게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되는 거예요. 옛 성전, 율법, 모형, 가짜, 비 진리, 뱀의 말, 이 모든 건 같은 거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코스모스. 헬라어에서 오미코른 시그마가 뒤에 붙으면 무조건 다 존재를 가리키는 거거든요. 크리스토스, 코스모스, 이렇게. 그러니까 이 코스모스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거란 말에요. 옛 성전, 율법, 모형, 가짜, 비 진리, 뱀의 말, 이런 어떤 것. 그냥 차례, 질서 이런 뜻만이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읽거나 들을 때, 마음속으로 악한 것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리고 대하죠? 비 진리, 가짜, 율법 이런 거. 우리가 배운바 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은 심판의 대상임과 동시에 심판의 근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당신 자신을 헐려야 할 성전, 옛 성전이라 그랬어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라고 했을 때 그 원어를 보면 ‘이 성전’이래요. 옛 성전에서 그 말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그 옛 성전과 자신을 동일 시 시키신 거예요. 내가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부활하리라, 라는 뜻이에요. 일으키다, 라는 게. 그리고는 당신을 또 율법이다, 라고 이야기 했단 말에요. 그리고는 내가 한 말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라고도 하셨어요. 여러분, 지금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난 자가 누구예요? 여러분과 저예요. 여러분이 성령을 담은 성전이라면서요? 그게 세 번째 성전이라니까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세 번째 성전.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었던 그 자리에 이스라엘의 성전이 다시 지어지면 안 돼요. 그러니까 그 엄청난 재력과 화력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고 모스크를 못 뺏는 거예요. 왜 고거 하나 못 뺏을까요? 내가 그 땅 값의 천 배 줄게 그래갖고 뺏을 수도 있잖아요? 그거. 그런데 유대인들이 고거를 못 뺏는다니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예요. 거기에 성전이 지어지면 안 된다니까요. 그건 부서졌다니까요. 없어졌어요.
당신이 하신 말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이 어떤 자들에게는 비 진리로 들리게 하시겠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그걸 그냥 표피적으로 듣고 그냥 멸망으로 가는 거예요. 예수를 옛 성전으로만 인식을 하는 어떤 이들이 있을 거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곡해하여 적용하는 자들에게 심판의 근거로 사용되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니까 차라리 안 듣는 사람들이 더 나아. 엉뚱하게 들어버리면 그 말에 의해 심판 받는다니까요. 안 듣는 사람들은 지 할 것 다 하고 그냥 편안하게라고 살지. 어설프게 들어갖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하기 싫은 건 또 해야 되고. 너무 불쌍한 거예요.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신 자신이 율법을 헐고 완성하실 것이다, 하고도 말씀하셨어요. 산상수훈에서 우리 배웠잖아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냐? 완성하러 왔다. 이랬단 말에요. 그리고는 그 다음에 바로 또 내가 폐하러 왔다, 또 이래요. 원어로 보면. 부셔서 완성할 거야. 이런 말을 하신단 말이에요. 그건 그분이 당신이 지실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거란 말에요. 그 말은 당신이 율법, 나하쉬, 뱀이 되셔서 율법의 표피적 모형을 파괴해 버리시고 그 진리, 내용으로 다시 사시겠다, 라는 말이에요. 그 진리의 말을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뭐로 확인했어요? 영이요 생명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푸뉴마, 성령이 내게 왔다, 라는 건 진리가 나에게 이해되었다는 뜻이란 말에요. 성령이 혼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쑥 들어왔다 쑥 나가고 이렇게 귀신처럼 그런 게 아니란 말에요. 여러분. 귀신이란 단어 자체도 어떤 것이 나에게 이해되어지지 않는 신이 귀예요. 그리고 이해되어지는 신이 신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귀신은 그렇게 빨강 종이로 닦아줄까? 이게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예수님은 파괴되어져야 할 율법이기도 하셨어요. 요한복음 12장 48절 보세요.
요 12: 48 -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은 로고스라는 그릇에 담아서 레마를 설명하시는 분이라고 했죠? 그래서 예수님이 로고스로 오는 거예요.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봐. 그래서 로고스예요. 그 안에 진리, 레마를 담고 왔단 말에요. 그러면서 내가 진리요, 길이다. 라고 말씀 하셨어요. 본인이 직접. 그런데 로고스로만 보니까 사람들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당시는 레마로 못 받고 로고스로만 받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 로고스에 의해 심판 받는다. 라는 말이에요. 말씀이신 예수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 진리로 들리고 보인다. 라는 말이에요. 뱀의 말. 뱀의 말. 죽이는 말. 물어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역사 속 진리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 표피적 예수만을 섬기고 추억하는 자들은 무얼 섬기는 거예요? 구약의 유월절, 그 고기, 그 피만 추억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전히 그것도 나의 우상이에요. 내 밖의 어떤 것이.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리로 돌아갈래? 거기에 재앙이 있는 곳이야. 어떤 재앙? 물이 피가 되는 곳이야. 원래는 물이 진리라고 했단 말에요. 생수라고 했단 말에요. 예수님이. 그 피가 물로 이해되어져야 푸뉴마, 진리란 말에요. 그런데 자꾸 그걸 내 밖의 어떤 것으로 두고 그냥 피, 피 하다 보면 그게 재앙이다, 그래서 첫 번째 재앙이 물로 피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뭐예요? 재앙이면? 그 말씀이 내 양식이 안 되는 거니까. 그 다음부터 우박, 강, 개, 이, 파, 축, 독, 우, 황, 장. 주일학교 좋은 데 나오면 다 외우는 거. 이게 다 뭐예요? 먹을거리를 작살내는 거예요. 메뚜기, 독종 막 이런 거. 그거 양식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게 어둠이다.
마찬가지예요. 돌은 반드시 떡으로 우리에게 먹혀져야 진리가 되는데 여전히 그걸 그 진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키고 섬겨야 할 어떤 분에 대한 걸로 갖고 있으면 그게 걸리는 돌이 되어 나를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서 부정한 자들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그런 거예요. 다시 그리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돌로. 구약의 산돌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거예요. 떡 진리로 가야되는 거라니까요. 피에서는 물과 진리로 가야 되는 거지 절대 뒤로 돌아가면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도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건 원어로 보면 물 포도주란 말에요. 물 포도주.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게 아니라. 물 포도주. 물이다! 라는 거예요. 피는 물이다. 정결케 하는 물. 그래서 포도주 항아리에다가 물을 부으라고 안 하고 물 항아리에다가, 포도주 항아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원래 신랑이 담아 놨던. 그 포도주 항아리가. 구약에 머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이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이예요.
요 3 :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땅의 것으로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못 믿어요, 땅의 것으로, 로고스로, 말로 해줘도 못 믿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당연히 그러니까 로고스로 오셔야죠? 예수님이?)
3 :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 :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 :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 :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 :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 :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 행함, 행함 계속 나오죠? 여러분이 하는 악한 행위들, 드러난 행위들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빛을 못 알아본다는 뜻이에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 :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명쾌하죠? 이걸 제 말로 설명을 하면 오히려 여기에 흠이 가요. 그래서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성경만 읽어 줘도 돼요. 그래도 설명을 해야 되니까. 바울이 그런 거예요. 내가 부득불 한다. 내 안에 있는 걸 꺼내 놓으면 전부 로고스가 돼 버리니까 그거를 말하기가 꺼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억지로 한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진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억지로. 이거 알아들을까? 그래도 하라니까 억지로 해야지. 어제도 그냥 경상북도 그 무슨 공무원들 모이는 데 가서 설교를 하는데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도지사. 군수. 뭐 알아듣겠어요? 그러니까 답답해가지고 에이, 내려갈까? 그런데 왜들 못 나가느냐 하면 요 앞에 상품들이 있었거든요. 이거 끝나고 추첨을 하니까 나가지도 못하고들. 부득불 하는 거죠. 억지로. 부득불.
12절을 보면 인간이성의 제한성이 확실하게 드러나요. 인간들은 땅의 것으로 설명을 해줘도 못 믿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뭐로 봐요? 나하쉬, 비 진리, 뱀으로 밖에 못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뱀에 물린 자를 살리려면 해독제가 뭐다? 뱀. 그래서 그다음 바로 다음절에 내가 놋 뱀으로 달려야 살아, 너희들은. 내가 진리가, 빛으로 왔는데 너희들이 나 못 알아보잖아. 레마로 못 받아들이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너희들은 나한테 물린 거야,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내가 해독제로 달리는 방법 밖에 없다니까. 여러분 그게 복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놋 뱀으로 달리겠다, 라고 말씀 하신 거고. 그 너희가 나의 말을 뱀의 말 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해독제가 되어 너희를 살려야 한다, 라는 의미의 그 말은 너희는 이 진리를, 진리가 말이고 말이 생기고, 그게 호흡이고, 그게 숨이고 그걸 성령이라고 하잖아요? 다 같은 말이죠? 창세기부터 그 똑같은 말들이 반복 되는 거예요.
그럼 그게 없으면? 콧김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냥 네페쉬, 죽은 거잖아요. 그게. 그죠? 죽은 거란 말에요. 그 예수를 로고스로만 보면 그게 죽은 거예요. 왜? 이게 콧김으로 숨으로, 성령으로 내 안에 못 들어간 거니까. 그러니까 에스겔서의 마른 뼈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호흡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이 우주 속에서. 그래서 생기가 밖에서 이렇게 뚫고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잖아요. 생기야, 들어가라. 그래요. 네가 들어가라. 그렇게 해서 아, 나는 그렇게 해서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구나. 이것을 아는 거. 이게 선악의 법에서 해방되는 거란 말에요. 그걸 믿는다. 라고 그래요. 그리고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호흡이 나에게 들어온 거니까 내가 영생을 가졌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가 말씀으로, 영으로 호흡을 하는 산 자가 된 거란 말에요.
꼬리를 몰수당하고 아랫물, 바다에서 낚여 위로 올라온 자. 이제 드디어 호흡을 하는 자가 되었다, 라는 그런 상징적 표현이란 말에요. 그것이. 그래서 그 다음절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진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들을. 내가 지금까지 말한 요것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거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나는 거예요. 너희들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미 뱀에게 물려서 말씀을 진리로 못 받아들이는 호흡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달려서, 아, 요런 방법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라고 이 뱀의 이 십자가의 이 진의를 이해하게 되면 그게 진리를 갖게 되는 거고, 요게 말을 갖게 되는 거고 요게 호흡을 갖게 된다는 뜻이란 말에요. 이게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마음에. 심비에 법을 새긴 자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그걸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으로 이으시죠? 그 구절의 첫 단어가 헬라어 후토스예요. 그것이 ‘이처럼’이예요. 헬라어는 가장 핵심인 단어, 중요한 단어를 가장 앞에 놓거든요. 그러니까 그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이처럼’이예요. 내가 이야기한 그 내용으로, 이처럼 그 내용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 라는 거란 말에요. 하나님께서 위와 같은 내용으로 구원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곡해하는 비 진리가 있어야 되고 뱀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뱀으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 구원이 설명이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을 어떤 것을 가지고 사랑하셨느냐 하면 호 코스모스, 이 세상을 사랑하사가 아니라, 정확히 번역하면 “ 이 세상을 가지고 세상으로, 호 코스모스, 성전으로 그 사랑을 설명했다 ”는 거예요. 어떻게? 이처럼! 너희들을 뱀에게 물리게 하여 그 뱀의 해독제를 제시하므로 말미암아 사랑을 설명하는 그것처럼 하나님이 코스모스, 성전, 율법, 비 진리를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묵시인 하늘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한의 그 뱀 같은 자들에게 뱀 취급을 받으러 먼저 내려오세요. 그래서 내려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더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늘을 호라호 하는 존재가 단 한명도 없다, 라는 거예요.그렇게 하나님은 비 진리로 내려와요. 아니, 본체는 진리이지만 우리가 못 알아보는 진리로 내려온다니까요. 그래서 일단 선악과, 뱀을 먹게 만들고 뱀에게 물리게 만들어요. 그게 선악과를 먹는 거예요. 독을 먹은 거니까. 그게. 그리고는 당신을 뱀 취급하는 그 아담들의 처음자리를 폭로하죠? 거봐, 못 알아보잖아. 말씀, 진리인 나를 못 알아보잖아. 그럼 너희들은 호흡 없는 거네? 이거. 그게 영이고 숨이고 호흡이니까요. 너희들은 호흡 없는 거네? 이거 먼저 폭로하시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빛이 세상에 왔는데 자기백성들이 단 한 사람도 영접 안 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 백성이 단 한 사람도 영접 안 했다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건 곧 죽음이에요. 거기에 호 코스모스, 세상이 도구로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호 코스모스에 의해서 아담들이 뱀에게 물린 자들이라는 것이 폭로 되는데, 선악과 먹은 자들이라는 것이 폭로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죽음에 내어주지 않고 살려낸단 말에요. 어떻게? 내가 죽어 너희가 산 것이다. 너희의 존재는 내 살과 피로 된 거지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생명나무 실과 따 먹어서 된 거 아니야, 요걸 진리라 그래요. 그걸 가르쳐 주는 거란 말에요. 고게 십자가인 거고 그걸 믿는 자가 해독제를 먹고 살아나는 거예요. 아, 그런 거구나, 나는 그렇게 산 자 된 거구나! 그럼 이제 나는 선악의 법에 묶이면 안 되는 거구나. 내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면 안 되는 거구나. 이리로 가는 거예요.
그 모든 내용이 “이처럼”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전을 가지고 당신의 사랑을 설명한 거란 말에요. “ 이처럼” 하나님이 호 코스모스, 율법, 성전, 성경을 갖고 사랑을 하사! 이런 뜻이에요. 그게 무슨 유니버셜리즘, 보편 구원론을 지지하는 절이다, 뭐 아니다. 이런 거 논의할 구절이 아니란 말에요. 이거는요. 봐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 사랑하셨대. 그러니까 모든 이가 다 천국 가는 거야. 이 따위 소리들을 하고 있어요. 이 구절을 갖고. 따라서 옛 성전, 호 코스모스로 오신 하나님은 그들을 그 옛 성전, 율법, 그 표피적인 그런 걸로 미혹하여 그건 곧 죽음이니까, 미혹해서 심판을 하려고 그걸 너희들에게 그렇게 준 게 아니라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고걸 고렇게 준 거야. 뱀은, 선악과는 너희들을 심판 하려고 하나님이 보낸 게 아니라 그거를 통하여 죄가 무어고 너희들의 처음자리가 뭔지를 가르쳐서 의와, 선과 구원의 자리로, 생명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 준 거야, 가 바로 그 다음 절이에요.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러 온 거지 심판하러 온 거 아니야, 라는 것이 그 말이란 말에요. 누구도 심판 안 할 거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존 스타트 같은 사람들도 나중에는 그냥 지옥은 없다, 하고 그러고 간 거 아녜요. 그게 무슨 말이냔 말에요. 그게. 그래서 17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낸 건, 그걸 그냥 율법으로 오해하고 죽으라고 보낸 게 아니라 그 옛 성전 안에 내용으로 담긴 진리를 호라호 하고 살아나라고 보낸 거야, 라는 말이에요. 그게 17절이에요. 이게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의 내용이기도 한 거죠. 율법이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로 해석이 되면 그 율법은 완성이 되는 진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켰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러면 안식일에 막 그런 거 뜯어 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거죠. 그건 어긴 거잖아요. 그래서 겉에서 보면 율법이 폐해지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은 그 율법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므로 아, 율법이 이거 이야기하는 거였어? 그래서 완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법을 심비에 새긴 거라고 표현을 하는 거란 말에요.
법이 내 밖에 존재하면 나는 그 법을 지키기 위해 행위를 내 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 법이 내 밖에 있으면. 그런데 그게, 이게 그런 거였어? 하고 이해를 하게 도면 그게 내 마음에 새기게 되죠?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 밖의 법과 상관없게 되잖아요. 이게 심비에 법을 세우는 거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내 마음이 진리가 되면 더 이상 내 밖의 법을 내 행위로 지키지 않아도 된단 말에요. 그런데 선악과의 독에 중독이 된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그 해독제를 먹지 않은 상태 그대로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바라보겠어요? 자기들의 그 자랑스러운 행위를 악하다고 하는 뱀처럼 보이는 거예요. 자기들보고 뱀 새끼, 독사의 새끼라고 말하는 큰 뱀처럼 보이는 거예요. 아이, 저게 바알세불이라, 바알세불이 보낸 자라 우리보고 이렇게 뱀 새끼, 독사의 새끼라고 이야기 하는구나? 그러잖아요. 바리새인들이. 마귀라고 그래요. 예수님 보고. 큰 뱀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죽이자! 그러는 거예요. 큰 뱀이 뱀에게 도륙되어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할 큰 뱀이 옛 성전, 율법, 뱀으로 오신 주님을 죽여 버리는 형국이 되는 거죠. 19절 20절이 이제 그 이야기예요. 놋 뱀을 믿어야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잖아요. 믿음이 없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내 행위와 나의 성숙만을 의지해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믿음의 대척점에 놓고는 악하다! 뱀의 일이다! 마귀의 행사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하는 예수께 절대 안 나온다는 얘기 예요. 왜 나오겠어요? 내 가치 있는 걸가치 없다, 똥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에게 왜 나가겠느냐고요?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21절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거죠.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자기 것이 아니라, 이걸로 가치를 챙겨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되는 게 아니라 그게 선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 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어떤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 빛이신 주님께 나오는 거예요. 그 빛이라는 건 어둠을 이렇게 드러내기 위해 온 게 빛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원래 그 어둠이었다는 걸아는 이는 빛이 자기를 드러내도 아무 상관없어요. 원래 맞는데 뭐 내가. 그렇게 빛으로 오는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가 호 코스모스의 역할로 주어진 진리 깨달음용 도구라는 것을 알게 돼요. 그리고 자기들에게서 나온 선한 행위 또한 하나님 안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선과악의 구조 속에서 탈출하게 돼요.
다말이 시아버지와 잠자서 애 낳고 그걸 법으로 자기 안에서 이해를 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으면 예수님의 족보에 못 올라가요. 그거 죄잖아요. 율법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그건 죄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기들까지 다 죽였거든요. 하나님이 시켰단 말에요. 여러분 병아리 하나를 진짜 잔인하게 하나 죽여도요 몇 십년간 그 트라우마에 정신병 걸려요. 그런데 자기 손으로 아기들을 죽였어요. 임산부, 노약자 다 죽여 버렸어요. 그걸 법에 의한 죄로 이해하고 끝까지 갖고 있으면 이 사람을 절대 자유롭지 못해요.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족보에, 예수의 족보에 올라갔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것들 안에서 하나님이 설명하고자 하는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것들이 선과 악, 선악과 먹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했던 아담들이 판단한 선과 악이 진리 안에서 하나로 이렇게 받아들여진단 말에요. 그걸 하나만 가진 자. 원래 우리는 뱀의 혀, 두 혀를 가진 자. 두 마음을 가진 자인데 그걸 진리 안에서 하나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만 가진 자, 모노게네스, 독생자.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면서 그 죄의 왕 노릇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밝혀 주죠? 그게 뭐라고 해요? 죄의 종노릇 하는 게? 몸의 사욕을 쫓는 거라고 그러죠. 이건 사사로운 욕심 부리지 말라 이런 말이 아녜요. 죄의 몸이 나를 유혹해서 사망으로 끌고 가려하는 그 사욕, 그걸 쫓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욕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두미아예요. 여러분이 수요일에 배우신 에피뚜미아. 산상수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에서 음욕, 그게 에피두미아란 말에요. 그런데 그 에피는 강조용으로 붙어있는 접두어이고 두미아가 어디에서 나왔다고 했어요? 두메오. 희생제사에서 나온 단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몸의 사욕을 쫓지 말라는 건 너희 몸이 반드시 너희는 습관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율법으로, 희생제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는 그 길로 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몸의 사욕이에요. 에피두미아. 그렇게 몸이 너희를 반드시 미혹할 건데 너희, 그것 쫓으면 안 돼. 그게 죄의 종으로 사는 거야. 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너희 몸이 죄가 쓰는 도구가 된단 말에요. 왜? 사람들은 그걸 보고 저게 의고 저게 선이야 라고 알아먹을 거란 말에요. 그게 죄가 그릇으로, 도구로 쓰는 자의 삶이란 말입니다.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 아녜요. 제발 그렇게 유아적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절대로 율법으로 너희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거예요. 에피두미아, 희생제사 많이 드리고 율법 많이 지켰다고 해서 그걸 많이 한 사람을 선한 걸로 보는 게 음욕을 품는 거고 그가 간음한 자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절대 선악의 두 마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문 14절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보세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여리서 주관하다, 라고 번역이 된 퀴리이오, 많이 듣던 단어죠? 퀴리오스. 아도나이를 번역한 단어예요. 하나님이란 뜻이거든요. 죄가 너희들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아냐. 걱정하지 마. 안 죽어.
하나님이 너희의 왕이란다.
은혜가 너희의 하나님이야. 죄가 네 왕 아니야. 퀴리이오.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너희는 죄의 통치아래에서 여전히 율법의 종으로 사느냐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두렵고 뭐가 그렇게 불안하냐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당연히 들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또 두렵고 또 불안해요. 그렇게 안 된다는 말이 아녜요. 육을 입고 있는 한 그렇게 되는데 이 진리의 말씀이 떨어질 그 때에는 접촉점이 생기잖아요. 그 때에는 여러분이 아, 그래서 우리는 자유구나! 이거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늘 그렇게 살라는 말이,, 어떻게 우리가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납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법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 모든 걸 덮는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니까 자유 해. 그게 진리야. 그게 복음이야. 비록 너희는 뒤돌아서면 또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거야.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단다. 그러니까 그 때마다 진리를 떠올리고 다시 돌아와. 그런 말이에요.
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고 믿고 살아난 자들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죄와 악이, 선악과, 율법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영생으로 가는 필연적 과정이었다는 겁니까? 우리는 반드시 뱀에 물리는 경험을 해야 돼요. 그래서 에덴의 동산에서 하와가 뱀에게 물리는 일이 먼저 발생한 거예요. 나무는 달랑 하나 심어 놓으시고 계속 단수에요. 거기서 나무는. 그러면 열매라고는 선악과 밖에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랬어요. 동산의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어라! 그랬다니까요. 사과 , 배, 도마도 이런 거 각종 실과 다 먹어가 아니라. 동산의 실과를 먹어라. 그랬어요. 나무가 단수란 말에요. 거기서. 그래놓고 열매는 달랑 선악과 열매밖에 없네요. 먹으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그건요. 먹으라는 거예요. 먹고 먹지 말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먹으라는 거예요.
그게 의예요. 여러분 유한인 우리가 하나님이 해라, 하지 말라, 라는 말을 지킬 수 있어요? 진짜? 아담이, 종전 까지 흙이었던 그 존재가 하나님이 어떤 걸 명령해요. 이거 해! 신적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담이 지킬 수가 있냐고요? 그러니까 이 유한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거 해! 저거 해!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라고 말씀을 하신 건 그걸 통하여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과 방불한 진리가 되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그런 신적 존재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인지를 제발 알아먹으라는 얘기지 그거 하나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먹지 마, 그리고 열매는 먹어 그래놓고 거기서 지켜보고 계셨다니까요. 어디 마을 갔다 오신 거 아녜요.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이에요. 옴니 프레젠스,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란 말에요. 그러면 그걸 진짜 먹으면 안 되는 거면 왜 안 말리시고 가만히 보고 계시냐고요? 그걸 따 먹자마자 그냥 오시는 거예요.
그래, 이제 내가 그게 뭔지 설명해줄게 하고 성경이 시작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선악과를 먹고 죄 속에 빠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죄가 뭔지를 알게 됐어요. 그건 우리인간이 절대 죄라고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었어요. 선악과를 먹고 인간들이 한 건 자기들이 판단한 선악에 근거해서 보다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 이런 것들을 만들고 여기까지 발전해 온 거잖아요. 사람답게 살자. 살기 좋은 사회 만들자. 공평한 국가 만들자, 이런 거요.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건 오히려 의로 여겨질 법한 것들이잖아요. 아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닌가? 왜? 교회들에서 다 그렇게 가르치니까요. 우리는 거기에 기여해야 한다, 라고 하고. 건강한 교회 만들기. 이런 거. 그러면 그 교회가 또 우상이 돼요. 나는 그 교회 다녀. 이렇게. 그걸 성경이 무서운 죄라고 계속 반복하여 지적하세요.
그렇게 죄가 뭔지 아는 걸 의라 그러고 그걸 아는 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아, 그게 뭔지 아는 걸 생명나무 실과를 먹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는 그걸 먹고 왜 내가 이걸 먹지 말라고 했는지를 알아야 돼. 그게 생명나무 실과를 동산 각종 나무 실과를 먹는 거야. 이 내용이 거기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건 괜히 왜 따 먹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켜?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여러분이 거기에 있었으면? 당연히 따 먹죠. 그 패션 어브 더 크라이스트 영화 보면서 ‘그 때 내가 있었으면 우리 주님 저런 고통 안 당하게 했을 텐데’ 이게 베드로였잖아요. 주님 내가 목숨 걸로 지킬게요. 하나님이 사단아, 그랬다니까요.
보세요. 자, 그 죄가 뭔지를 알았어요. 죄의 실체가 뭔지를 알았어요. 야, 자칫하면 그거 열심히 하다가 그냥 죽을 뻔했네? 알았어요. 그게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가 또 다시 자기의 손을 뻗어 선악과를 먹으려고 하겠어요? 바로 그걸 의도하신 거예요. 자의로 이제 앞으로는 절대 너희들이 선악과 안 먹게 내가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억지로,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까 먹으면 안 되겠지, 그러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니까 침 질질 흘리면서 꾹 참는 건 내가 당신이 나보다 힘이 세니까 내가 듣는 거지, 저 맛있는 거. 내가 당신 보다 힘이 조금이라도 세면 난 당신 죽이고 먹을 거야 하고 똑 같은 거예요. 율법주의가 바로 그거라니까요. 힘이 없어서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를 이야기하면 아,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억지로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서 제가 그러는 거예요. 그런 거였으면 하지 마, 라고.
그러나 그런 거와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그들은 그거 하면서 또 즐거워요. 그러면 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목숨 걸로 하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왜 언제는 하지마라 그러고 언제는 하라 그러고 왜 그래요? 은혜 아래에서의 자유가 뭔지 안 자들은 다시 선악의 율법으로 안 돌아가요. 절대 안 돌아가요. 선악과 줘도 안 먹어요. 그러기 위해선 그거 먹은 자의 삶이 어떤지를 반드시 먼저 경험을 해야 된다니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 선악과가 진짜 나쁘기만 한 거냐는 말이에요. 선악과로 진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과 의가 뭔지를 깨달았다면 그 선악과가 나쁘기만 한 거냐는 말이에요. 제 말은. 마태복음 12장으로 가보세요.
마 12 : 31 _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 : 32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뭐 성령의 역사, 금가루가 막 쏟아지고 은 이빨을 금이빨로 바꾸고 방언이 뭐 터지고 이거를 부정하는 저를 성령 훼방 죄라고 인터넷에다가 올려놨더라고요. ㅎㅎ 어떤 양반들은 목사가 하는 말 안 들으면 그걸 성령 훼방 죄라고 사기 쳐갖고 그냥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종 부리듯 부리죠? 아주. 그런 말 하는 거 아녜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을 수도 있으나, 가 아니라 사하심을 얻는다, 예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 라고 선언하는 거예요. 지금. 누가? 하나님이. 그럼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이 뭐겠어요? 사람들이 율법으로 규정해 놓은 모든 죄를, 그 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 그건 사하심을 받아. 그러나 푸뉴마, 푸뉴마가 뭐라 그랬어요? 말, 생명, 그거를 훼방, 블라스페미. 이 블라스페미는 말을 깨다. 진리를 깨다. 라는 뜻이에요. 너희들의 행위로 지은 죄. 그런 건 용서 해줘. 십자가만 너희들이 이해하면 그건 다 용서가 돼. 맞아요? 틀려요? 맞죠? 그런데 이것조차도 동의 안 하려고 해요. 제 말이 그 말인데 이것조차도 동의 안 하려고 해요. 저 보고 방종을 조장한다. 그래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잖아요. 이거는요. 십자가를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율법에 근거하여 지은 모든 죄는 사하심을 얻는다. 그래요. 용서 받는다. 그래요.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이 된 안트로포스가 옾타노마이에서 파생된 단어 거든요. 제가 설명해 드렸죠? 옾타노마이. 블렛보. 에이돈. 호라호. 이렇게 ‘보다’라는 단어가 네 개가 있는데, 옾타노마이는 그냥 Optical, 그냥 보는 거. 껍데기만 보는 거. 그런 껍데기로서의 사람이 그냥 껍데기로 율법을 보고 그거 어긴 그 죄들. 그건 사하심을 얻는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그게 뭔지만 알면 그까짓 거는 다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하심을 못 받는 죄, 블라스페미아, 성령을 훼방, 말, 진리의 말, 그걸 훼방, 깨는 자는 비 진리로 깨버리는 자는 여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그 진리를 훼방하고 깨버리는 자는 절대로 용서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왜? 그걸 진리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은혜를 성령을 안 부었다는 증거니까. 이게 성령 훼방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 훼방은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 얻는 자들은 반드시 그 법의 파괴 후에 생명으로 세워지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길 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바로 그 다음 절에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절대로 용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자는 뭐죠? 그 사람의 그 아들.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인자에요? 아니에요. 그리스도 예수. 인자, 예수님이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이 와도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왜? 로고스로 왔으니까요. 못 알아 봐요. 그래서 말로 그 예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거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진리가 왔어요. 진리가 와서 뭐 한다, 그래요? 그가 내 것으로 가르치리라. 그러죠? 예수님이 한 말로 똑같이 가르치는데 그걸 진리로 이해시키는 게 성령이에요. 그가 내 것으로 가르치리라. 내가 가르친 말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해 되게 하리라가 진리가 하는 역할이잖아요. 성령이 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러데 그 성령이 왔는데 여전히 그걸 거역하고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법으로만 이해하면? 성령이 안 온 자니까. 호흡이 없는 자니까 죽은 거라는 뜻이에요. 그들은 심판 받는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이요. 사하심을 못 받는다는 말이.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말씀을 진리로, 레마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절에 이렇게 이어져요. 33절 보세요.
마 12 : 33 -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 실과는 말이에요. 보세요. 그 밑에)
마 12 : 34 - 독사의 자식들아
(나쁜 나무 좋은 나무가 나오고 그들의 열매가 나와요. 그래놓고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욕을 하죠? 그러면 이네들이 좋은 나무겠어요? 나쁜 나무죠? 나쁜 나무에게서 실과, 나쁜 실과가 맺힌다는데 어떤 실과래요? 너희들이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느냐? 그런단 말에요.)
마 12 : 34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이게 소리죠? 말씀인데 악한 말이 나오는 거예요. 나쁜 나무에게서, 뱀들에게서. 그래서 독사의 자실들이에요.
마 12 : 35 -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안에 쌓여 있는, 하나님이 쌓아주신 거예요. 그런 말이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내느니라
마 12 : 36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계속 말이 나오죠? 말, 말, 말, 말. 어떤 말이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금. 어떤 말이냐 말이 어떤 형태로 갖고 있냐, 진리로 갖고 있니? 법으로 갖고 있니? 이거예요.)
마 12 : 37 -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네가 갖고 있는 그 말, 그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지느냐에 따라서 너는 의롭다, 칭함을 받기도 할 것이고 악하다, 넌 지옥 가! 이렇게 꾸지람을 받기도 할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행위로 심판이 일어나요? 말로 일어나요? 여러분이 그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심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말로 심판한다, 그러잖아요. 심판의 근거는 말씀이에요.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되면 하나님이 먼저 심판 받아야 돼요. 살인교사, 매춘조장. 다말한테 가갖고, 말이 되느냐고요 그게 요. 그래놓고 또 의롭다. 그래요? 이거 행위로 심판 받으면 하나님이 먼저 받아야 돼요. 이게 법으로 보이면. 계시록 20장 11절 보세요.
계 20 : 11 -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20 : 12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 : 13 -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죽은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0 : 14 -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쩨 사망 곧 불 못이라
20 : 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진리가 완성이 되면 호 코스모스, 옛 하늘과 옛 땅이 당연히 사라져야죠? 실체가 왔으니까. 실체로 완성이 됐으니까.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이들일수록 이 현상계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그러죠? 그래서 He is changing me. 이거 맞는 거라 그랬어요. 변해요. 율법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변화, 이거 아니라고 하는 거지. 우리는 지향성이라든지 가치관이라든지 세계관이 반드시 변해요. 그 모형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요. 내가 진리가 됐기 때문에 그리고는 심판이 일어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심판하시기 위해 책을 펴시는데 한 쪽에는 책들이고 한 쪽에는 책이에요. 한 쪽에는 복수의 책들이 있고요 한 쪽에는 단수의 책이 있네요. 그런데 그걸 원어로 보면 한 손에 있는 단수인 책은 곧 생명책이니 가 아니라 생명이다. 예요.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단수인 책은 생명이다. 그리고 다른 쪽에 갖고 있는 책들은 거기에 행위들이 많이 적혀있는 책들, 복수의 책들이에요. 그리고는 거기에 쓰여 있는 행위들대로 심판이 일어난대요.
우리가 한 행위를 다 적어 가지고 요건 좋은 일 나쁜 일 계산해서 벌주고 상 준다는 말이 아니라 복수인 책들은 행위의 책들인데 거기에는 심판의 근거가 적혀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로 심판이 일어나요. 그런데 어떤 부류는 책을 생명으로 받아들여 가지고 이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없어진 거예요. 보세요, 성경은 66권이나 되고 그리고 장절 나누면 수천 수만개가 되죠. 그걸 전부 법으로 보게 되면 책들이 돼요. 그러나 성경은 한 문장, 그 문장을 이루고 있는 단어, 그 단어를 이루고 있는 문자, 요걸 파자라고 해요. 한자 한자가 가지고 있는 뜻을 가지고 그걸 해설하는 걸. 그 모든 게 다 같은 이야기만 해요. 그리고 그 내용이 자연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요. 비는 하늘에서만 내리고 꽃이 떨어지면 씨가 생기고 이게 다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예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인정을 안 하느냐고요. 한 문장, 그 문장에 속한 장, 그리고 그 장이 속해있는 책. 그리고 그것이 적혀있는 성경. 모든 게. 그리고 그것들이 갖고 있는 단어들. 단어들이 갖고 있는 파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다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어요. 생명!
그러니까 그걸 생명으로, 진리로 받는 이들에게는 그 책이 그냥 생명이에요. 사랑이라니까요. 아가페예요. 순수한 그거. 그걸 그냥 모르니까 아가페, ‘하’가 붙으면 순결한, 거룩한 그거거든요. 그걸 갖다 기저귀 앞에다가 하기스 라고. 거기에다가 쓰는 말이 아니에요. 그거는요.
아가페! 아, 이게 사랑이구나? 법은 사랑이구나. 하나구나. 알면 그게 생명인 거예요. 내게. 그런데 이게 법이 되면 이게 전부 내가 해야 될 것들이에요. 내가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고요. 그래서 그것대로 해갖고 책에다가 다 썼어요. 요거 했어요, 아, 요건 잠시 실수 했어요. 그랬더니 그걸 떡 들더니 이걸로 심판을 해요. 그런데 그 심판 받을 자들이 어디서 나와요? 바다에서, 바다가 그 때 토해내요. 여전히 아랫물에 있던 호흡 없는 자들이더라, 가 이 말이에요.
바다에 빠져죽은 사람들을 그때 그냥 퉁퉁 불은 채로 이렇게 바다가,,ㅎㅎ.
아니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졌을 때인데 무슨 바다가 또. 여러분 성경을 생명으로,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다른 것들이 다 수월하게 이해 되요. 세대주의?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그러세요. 그런 의미 아니에요. 역사와 인생 사람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거는 다 가짜예요. ‘여러분 이렇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 단수인 생명, 그 책을 생명으로 받지 못하면 그 생명이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고 내 밖의 율법이 되기 때문에 내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심판받는다. 그러지 뭐 어디에 여러분의 이름이 적힌 책이 있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율법을 이렇게 설명해요. 로마서 7장 6절 보세요.
롬 7 : 6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
7 : 7 - 그런즉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도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요 위까지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하면 율법 지켜서 구원받으려 하는 건 전부 죄다, 라고 난도질을 했거든요. 그래놓고 갑자기 율법이 죄냐? 이런단 말에요. 다소 모순되는 듯 한 자기의 진술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듯한 그런 진술을 또 한단 말에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선악과 그거, 모형 호코스모스가 아니었으면 내가 죄가 뭔지 몰랐을 거야,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바울도 선악과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잖아요? 율법이 죄냐? 아니면? 있어야 된다. 라는 거예요.그거는 있었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그걸로 진짜 생명이 뭔지, 진리가 뭔지를 깨달았으므로, 라는 거예요. 바울이 모노게네스, 하나를 가진 자가 된 거예요. 아, 그게 죄 아냐. 이렇게.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이 죄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야. 라고.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본문의 몸의 소욕과 같은 단어에요. 에피투미아. 희생제사. 희생제사 드리는 거. 계속 반복하여 드리는 거. 익숙한 어떤 것을 하는 거. 그게 이피투미아란 말에요. 그게 간음하는 거고, 그게 살인하는 거고, 그게 우상 섬기는 거라 그랬잖아요. 제가 수요일에.
그러니까 고러한,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내던 율법 아닙니까? 그게. 목숨 걸고 지켜내던 율법 아니에요?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아니, 그게 전부 탐내지 마! 라고 했던 그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 들어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 그럼 내가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이 모든 게 다 이피투미아, 탐심이었단 말이야? 알게 됐다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까지 성령이 그 진의를 알게 해주시기까지 그게 선이고 의인줄 알고 죽어라고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고게 죄다! 라고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율법이 나의 죄를, 진짜 죄를, 탐심이, 에피투미아가 뭔지 알게 해 줬으므로 그게 어떻게 악한 거며 그게 어떻게 죄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
구약성경에서 그 탐심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찾아보니까 이사야서에 그 단어가 나와요. 이사야서 57장 17절 보세요.
사 57 : 17 -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여기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인간의 탐심이 나와요. 그런데 그 탐심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는 거래요. 인간의 마음. 선악과 따 먹은 인간들의 마음. 아담의 마음은 항상 두 갈래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갈래 마음. 그 마음을 새 마음인 한 마음으로 바꾸어야 영생이에요. 그런데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두 마음은 늘 자기의 열심을 근거로 자기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율법도 지키고 희생제사도 힘닿는 대로 해보는 거예요. 귀찮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노하신다는 거예요.여기에 쓰인 탐심이라는 단어, 그 히브리어 ‘베짜’가 탐욕스럽게 얻다, 예요. 획득하다. 손을 뻗어 부정하게 획득하다. 라는 의미예요. ‘베찌’가. 탐심이라 그래요. 이거를.
그걸 히브리어구로 옮기면 ‘샤라흐 야드 라카흐’ 예요. 그걸 해석하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손을 뻗어 열매를 취하는 것, 이걸 탐심이라 그래요. 창세기 3장 22절에 나옵니다.
창 3 :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제일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이 뭐예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돼요. 일이 뭐예요? 선악과 따 먹자마자 손을 뻗어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려는 시도를 하더라는 거예요. 선악과 따 먹은 자들의 모든 시도가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내 힘으로 생명, 행복 구원 거기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 모든 시도가 다 그거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그걸 막겠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는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었다고 하는 자들의 그 생명이 바로 사망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손을 뻗어,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가 바로 그 단어에요. ‘사라흐 야드 라카흐’ 예요.
야드, 손을 뻗어. 사라흐, 열매를 획득함, 부정하게. 획득하다, 라카흐. 라는 거예요. 정식으로 생명이 우리에게 오려면 어떻게 와야 돼요? 하나님이 생기를, 성령을, 말씀을 진리를 후 불어 넣어줘야 되는 건데 선악과 먹은 자들은 손을 뻗어 부정하게 획득하려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걸 에피뚜미아, 희생제사 반복하여 드리기. 익숙한 거행하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율법은 그거 하면 안 돼. 선악과는 그거 먹으면 안 돼. 이거 가르쳐 주려고 우리에게 준 거라는 거예요. 그걸 아는 걸 의라고 하고 그걸 율법을 완성했다라고 하는 거지 그거 하나하나 다 지켜내는 거 아니란 말에요. 아니, 율법 중에는 남자는 할 수 없는 것도 있잖아요. 애 낳고 월경하고 이럴 때 부정하니까 또 가서 제사 지내라,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요. 다 지키려면.
바울이 율법의 진의를 알고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모든 율법적 행위들이 전부 탐심이었다는 것을 안거예요. 그 부정하게 취득하다, 그 사라흐를 헬라어로 바꾸면 오레고마이예요. 손을 뻗다. 자기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이거든요. 좋은 말인 거 같죠? 여기서 나온 단어가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올기조에요. 노하다예요. 그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요. 그렇게 열심히, 목숨 걸로 하나님을 섬기던 그에게 너 왜 나를 핍박해? 그래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 야 너 왜 나한테 화 내?’ 이런 말이거든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하여 하나님께 뭘 해드리려고 하는 것 그 시도 자체가 에피투미어 이고 그게 사라흐이고 그걸 오레고마이라고 하고 거기서 나온 게 올기조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고 하나님께 화내는 거란 말에요. 왜?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한다는데 왜 하나님은 자꾸 그냥 은혜로 선물로 받으라고 해요? 이게 노하다‘는 거예요. 이게 올게조라니까요. 이게. 그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는 거예요. 올기조란 말에요.
큰 아들이 자기 형제에게 노했죠? 그 단어도 올기조에요. 똑같이. 나는 이렇게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저 창기와 간음하고 온 저 놈은 왜 저렇게 대우해주세요? 이게 분노잖아요.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겠다는 거 아녜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도저히 구원 받아서는 안 될 자가 구원 받고 왔는데 아니, 착한 내가 더 상을 받아야지 쟤가 왜 구원 받아요?는 십자가를 부정하는 거죠? 이게 노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화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는. 특별히 건강한 교회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께 노하는 자를 히브리어가 그냥 ‘사단’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밖에 있는 어떤 그냥 뭐, 머리에 뿔 달리고 케첩 질질 흘리고 다니는 그런 게 사단이 아니라 진리를 대적하는 것, 그게 사단이에요. 그게 헬라어 에서 그대로 음역을 해갖고 그냥 ‘사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 십자가를 막으려고 하는 베드로에게 그냥 사단이라고 한 거예요. 이 마귀 새끼야! 가 아니라, 너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거야 그거. ‘사단’이라고. 그게 뱀이야~. 그러나 그 소리를 알아듣고 아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군요.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송하는 자로만 살겠습니다. 하면 그게 산 자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는 자들이 막 살겠느냐고요? 생각들을 하세요.
바울이 말해요. 그게 율법의 역할이라면 탐심을 하던 자신이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 율법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율법적 행위가 나쁜 것으로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거예요. 이건 뭐 뻔뻔스럽게, 난 아무잘못 없어.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게 진리 안에서 바라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선악과였다는 것을 안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그걸 뻔뻔스럽게 이건 당연한 거야, 라고 한 게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이렇게 끄집어내더라는 거예요. 자기에게 죄가 뭔지 가르쳐준 율법이 왜 나쁘냐는 거예요. 거기에 영원히 묶여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그걸 통하여 생명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율법도 선한 것이다. 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죄냐? 그런 거예요. 왜?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아무 상관없는 자가 됐어요. 거기에 쓰인 게 형용부사거든요. 형용부사가 쓰이면요, 그게 부정으로 쓰이면 원리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어떤 것으로 뒤집혀지지 않아요. 이제. 원리, 공식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죄와 관계없는 자들이 돼 버렸다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금 이후로 진리를 안 여러분이 살인을 저질러도 그건 원리적으로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악당들이 자기들의 불성실함과 더러움을 복음으로 자꾸 합리와 시키려고 하지 절대로 그 복음, 진리가 올바로 깨달아지기 시작하면은 그런 걸로 자기 행위를 합리와 하려는 저급한 행동 안 해요. 그게 잘 안 되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고통스러워하고 애원하고 부르짖고 하는 거지. 그런 일은 있을망정. 절대로 야, 이젠 만고 땡이네 이리로 안 가요.
다시 유월절 피로 돌아가면, 그게 다 해결해 준 거야? 이리로 돌아가면 물이 피로 되는 재앙 속에 있는 거예요. 떡이 돌이 됨. 그 돌로 실컷 두들겨 맞고 있는 부정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이며 그것이 복음의 현실인 겁니다. 여전히 법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면 그게 바로 몸의 소욕을 쫓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적치유니 뭐니 또 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용서 못하니까. 자리를 용서 못하니까 다른 이를 어떻게 용서해요? 용서가 뭔지를 모르는데. 용서가 뭔지를 알면 자기부터 용서가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내적치유.
아니, 십자가가 뭐가 부족한 거예요? 한 90 % 해결해 놓고 10% 는 내적치유 가서 또 해결 받아야 돼요? 모든 건 다 치유한 거라면서요? 진리만이 여러분을 치유해요. 다른 거 없어요. 그래서 제가 자주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른 거 다 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가세요.
생명은 하나님께서 완성품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불안한 마음에 두려운 마음에 조바심을 내면 뭔가를 자꾸 보태려하면 이게 망가지는 거예요. 그게 죄의 종으로 사는 거고 은혜의 적으로 사는 거예요. ‘사단’ 이에요. 그게 ‘탐심’이며 탐심은 죕니다.
그런 자유의 진리를 알면 알수록 다른 것들이 시시해져요. 내가 관심을 갖는 매력적인 것들이 다 뭡니까? 나에게 지금 허락한 요걸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내 마음의 탐욕을 따라 자꾸 거기에 손을 뻗치는 거죠? 그런데 진리가 점점 나를 충족시켜 가면 그런 것들에게서 마음이 떠나고 나에게 허락된 그 소중한 것들이 진짜 소중해져요. 왜 거기에 사랑이 없으며 왜 거기에 용서가 없고 왜 거기에 온유함이 없겠습니까? 그거. 그러니까 지금까지 장황하게 얘기 했지만 다 기억 못해도 돼요. 그걸 다 적어서 어디 가서 써먹으려고 그런 거 좀 하지마세요.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들이 우리교회 설교를 많이 듣고 지가 써먹을 것만 써먹고 그런데 나는 그거에 다는 동의를 못해. 뭐 이런다는데, 그래, 뭐 써먹으세요. 그거는, 그거는 진리를 아는 것과 아무상관 없는 거예요. 마음대로 써먹으세요.
그러나 그 안에 담아서 제가 얘기하려고 했던 그거, 그거 하나 그냥 갖고 가면 되는 거예요. 어제 그 경북지방 공무원 거기에 그 신우회에 그 경북지역의 우리 서머나 가족들이 오셨어요. 그 중에 90세 된 장로님이 계세요. 그냥 너무 기뻐서 이걸 일상과 함께 듣기는 너무 아까워 산 속에 들어가셔서, C D 오백 개를 갖고 가셔서 그거를 반복하고 반복하여 다 듣고 내려오신 분이에요. 90세에. 그리고 중국에 그걸 갖고 들어가서 그걸 계속 나눠주고 계신 분이에요. 90세에. 그런데 어제 그 장로님이 저한테 그래요. 나이가 많으니까 자꾸 잊어 먹는대요. 제가 속으로 무릎을 탁 쳤어요. 그게 맞는 거예요. 진리라는 소는요. 어차피 진리라는 건 로고스, 소에 담아서 우리에게 오지만 그 심우도 라고 있죠? 심우도. 법당 벽에 소를 찾아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그 내용. 거기서 맨 마지막에 진리를 찾잖아요. 사람이? 그럼 소가 사라져요. 그거예요. 이 호코스모스는 진리를 담아 우리에게 설명하고 그게 역할을 다하면 그 진리만 남고 그거만 남고 사라져야 맞아요. 생각 안 나도 된다니까. 아브라함이 몇 살에 갈대아우르를 떠났는지 몰라도 돼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시리아나 무슨 딴 도시에서 만났는지 그건 몰라도 된다니까요. 그 속에 담겨있는 그거 알면 나머지는 그냥 버리세요. 그러니까 성경 많이 안다고 자랑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진리 안에서는. 그거 버려야 할 거. 그거 갖고 자랑하고 그러니. 그러니까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부러 겸손하세요, 겸손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그 하나 안에 다 들어 있으니. 그거예요. 그거 갖고 가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도저히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 없음으로 밖에 표시할 수 없는 그것. 그래서 성경에 주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그것. 하나님, 그걸 마음에 가진 자, 그들이 무엇을 부러워하며 어떤 것으로 불안해하겠습니까? 더욱 더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욱 더 풍성히 깨달아 이 땅에서 자유로운 우리 성도들 모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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