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62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3


로마서62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본문: 롬 6 : 5- 11

6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 가운되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케리그마라는 건 

공적인 사자가 어떤 확정된 소식을 공중 앞에서 외쳐 선포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내용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나온 단어인데요. 그 단어가 기독교 용어로 쓰이게 되면 복음을,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단어가 돼요. 그게 케리그마입니다. 


그 단어는 믿는 자들의 사상에 대해서 교훈을 던지는 디다케와는 완전히 구분이 되는 거예요.

케리그마와 디다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한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가장 선명하고 짧게 기록해 놓은 곳이 고린도전서 15장 3절이하죠? 

이건 뭐 기독교 역사 내내 신학자들이 다 동의한 그런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잘 3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고전 15: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언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여기까지가 케리그마예요. 복음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 그러죠? 

내가 받은 걸 전해준다 그러잖아요? 누구한테 받았어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에게 받았어요.

여러분, 복음은 예수에게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케리그마의 내용이 뭐예요? 

성경대로, 즉 창세전 언약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셨다. 가 완전한 죽음이죠? 장사는 매장이나 화장이나 수장이나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거니까.

장사되셨다가 언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까지가 케리그마예요.


여기에서 '보이셨다'고 번역이 된 헬라어 옵덴은 옵타노마이의 직설적 과거 수동태예요. 

이 단어는 '단순히 보다, 우연히 보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연구를 목적으로 현저한 어떤 목적물, 현저하게 목적화 되어있는 어떤 것을 응시하는 거'예요.

아, 요거? 요게 뭐지? 이렇게. 

그렇게 보이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냥 나타났다 사라진 게 아니라. 이게 뭐지? 이렇게.

주는 교회에게 그렇게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에게만 나타나죠? 

자기를 때려죽인 로마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헤롯에게 나타나서, 나 같으면 그러겠어요. 제일 먼저 거기로 가서 ‘ 나다! 나 살았다?’ 혼비백산하게 만들 텐데 거기는 안가시고요,

제자들, 교회에게만 나타나세요. 그게 응시예요. 

교회에게만 목적물로 자기를 제시하고 깨달아가게 하신단 말에요. 

그래서 옵타노마이가 거기에 쓰인 거예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 

거기까지가 복음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까지만, 

그게 케리그마라면 자칫 관념으로 흐를 수 있죠? 그것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거 어렵지 않죠? 

그래서 기독교를 관념으로 갖고 있을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물로 제시하신 후에 당신만을 응시하게 만드는 것까지가 케리그마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 거죠. 

그건 삶이며 생명이며 실제인 거예요. 관념이 아니라.


그래서 선택된 성도는 유기되기 위해 지어진 세상과 확연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돼요. 

주님께서 옵타노마이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로마서 6장 4절이 

우리 성도의 구원의 목적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함이다, 라는 표현을 해 놓은 거란 말에요.


물론 그 행함은 아담들의 선악체계가 정의하고 합의해 놓은 틀 속에서의 그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결과되어지게 하는 행함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죠? 

성령으로 성도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물로 제시하시고 당신만을 응시하게 하시는 옵타노마이,  그 은혜의 동행이, 나타나셔서 응시하게 하시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타나셔서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 그랬죠?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나타나셔서 끝까지 같이 있는 거란 말에요. 그걸 동행이라고 해요. 그 동행, 

그 동행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게 뭐겠어요?

나타나서 예수님만 요렇게 응시하게 하는 옵타노마이의 목적이 뭐 겠느냐고요? 

질문 속에 답이 있죠? 나만 봐!.나만 봐. 예수만 의지해. 


제가 거의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이제 갓 두 달이 지났어요.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거의 사십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거죠. 초등학교 때 가서 물론 잠깐 잠깐 들어오기는 했었지만 이사 온 게 사십년 만이라고요. 그러니까 얼마나 어색하겠어요. 다른 나라에 온 거죠. 우리 아이들 셋도 큰 아이가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아이들 셋이 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서 미국음식 먹고 그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이예요. 다른 나라 사람이에요. 그러니 이 나라에서 모든 게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겠습니까? 캘리포니아는 한 겨울에도 반팔 입고 반바지 입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안 그래요. 그래서 우리 둘째 아이가 여기서 영하 20도 되는데 반바지 입고 나갔다가 사람들이 저 미친놈이라고 그랬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저한테 묻더라고요. 문화나 음식, 사람들의 보편적 습관, 관습이나 전통, 모든 것들이 낯설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은 제가 제 아내를 데리고 매일매일 낯선 한국살이를 경험하게 해줬어요. 매일매일. 늘 동행하면서 혼자는 어디 못가니까. 동사무소부터 시작해서 운전면허 시험장, 구청, 시청,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 마트 장보기, 식당, 영화관, 대학로 소극장 등등. 한국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려고 제가 애를 쓰죠. 다른 나라에서 옮겨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너무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들 앞에서 실수투성이예요. 운전을 하다가도 욕을 먹기 일쑤고, 미국은 신호등이 바뀌었는데 내가 딴 일을 하다가 안 갔어요. 그렇다고 뒤에서 빵빵 거리지 않아요. 가끔 빵빵 거리는데 돌아보면 한국 사람이에요. 저는 심지어 갔어요. 신호가 바뀌어서 그런데도 빵빵 거려요. 내가 내려서 물어봤어요. 고쳐야 되니까요.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그랬더니 신호가 바뀌었는데 천천히 갔다는 거예요. 아, 천천히 갈수도 있지 그럼 뭐 부릉부릉 하다가 요이 땅 하면 출발하는 자동차 경주처럼 가야 돼요? 차선을 변경하려고 깜빡이를 켜면 멀리서 있던 사람이 일부러 앞으로 와서 못 들어가게 막더구먼요. 그리고는 가면서 꼭 인사를 하고 가요. 난 이게 인사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손가락 하나만 길게 뻗은 인사였는데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가운데 긴 거, 욕지거리를 하고 가더라고요.저도 그런데 제 아내는 여기서 운전을 못해요. 그래서 뒤에다가 초보운전 ‘나도 내가 무서워요’ 써가지고 다녀요. 운전 30년 경력인데. 나도 내가 무서워요.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도 다 챙기지 못하고 그냥 나와요. 저희가 코스트코에 가서 여기도 한국 코스트코가 있더구먼요. 다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미국은 박스에 다 넣어서 심지어 차에까지 갖다 주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는 자기가 장바구니를 가지고 가서 다 이렇게 담아 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버릇이 안 되어 있으니까 몇 개씩 빼먹고 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미국 같은 경우는 앞서가는 사람이 뒤에서 누가 오다 싶으면 문을 잡고 기다리죠. 거의 백프로. 그런데 여긴 그거 기대하고 갔다가 코 찌기 일쑤예요. 확 닫고 가니까.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서류를 발급받는데도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요. 한국말도 어눌한데다가 신청서 약식을 찾는데도 한 삼십분 이상 걸려요.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나도 여기 와서 무슨 거소증 이런 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리고 본적, 이런 것도 다른 말로 바뀌었더만요. 그리고 맞춤법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여러분 짜장면이 자장면으로 표준어가 바뀐 거 아세요? 바뀌었어요. 예전에 연예인들이 티브에 나와서 자장면, 자장면 그랬잖아요. 웃기지 않아요? 누가 일상생활에서 자장면 그럽니까? 그런데 와 보니까 맞춤법도 다 달라지고요 어색해요. 저는 아내와 동행은 하지만 제 아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가만히 보기만 해요. 내가 계속 해주면 안돼요. 그래서 가만히 보기만 해요. 어떨 때는 답답해 죽어요. 아주. 제가 다 해주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니까. 저 없이도 훌륭한 한국 사람으로 잘 살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우리 신랑인 예수께서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달라요. 

저는 제 아내가 저 없이도 이 나라에서 독립적 존재로 잘 성숙되게 하기 위해 동행하는 거예요.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나 없이, 신랑없이 정말 되니? 이거 확인하기 위해 동행하시는 거예요. 목적지가 달라요.

우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와 동행 하시는 건 당신의 약속이었어요.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장가들리라 그랬잖아요

. 영원히 함께. 이혼하지 않으리라, 장가들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생경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 그랬어요. 

옮겨진 성도는, 신랑의 나라로 옮겨진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신랑과 동행을 하면서 천국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는 그 나라를 살라! 그래요. 

그런데 아담들에게는 이 세상살이가 너무 익숙해요.

 그래서 천국살이가 참 낯설고 어색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게 돼요. 

천국살이의 그 매뉴얼이 말씀으로 성경으로 주어져 있는데 잘 안 돼요. 

그렇다고 신랑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아. 

동행을 하시는데 어떤 때는 그 분이 딴 곳으로 가신 것처럼 

신랑의 부재와 침묵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하세요.

 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그 실수와 실패를 신부가 다 경험해야만 해요. 

부끄럽습니다, 창피합니다, 어떤 때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안 도와주세요. 신랑이. 

그러한 역사 속 천국살이를 통해서 신랑이 목적하는 바가 무어일 거 같으세요?  

천국 신부다운 성숙과 자라남일까요? 

신랑 없이도 혼자서도 잘 해요, 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변화입니까? 

그렇게 자라나지 못하면 신랑이 화가 나서 우리를 버리기도 하나요? 

알마니안 주의자들 얘기처럼? 아닙니다. 

우리 신랑은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검둥이 노예 술람미였을 때, 

너 앞으로 선크림 잘 바르고 얼굴 하얘지지 않으면 확 그냥 이혼해 버릴 거야. 이거 아니었단 말에요. 

검둥이 노예 술람미었을 때, 창녀 고멜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신랑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내가 죄인들을 데리러 왔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죄인들, 검둥이 술람미들에게 장가들러 왔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성숙과 자라남, 신부다움이 목적이셨으면 

고멜이나 술람미나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 사라, 라헬, 리브가 이런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마셨어야 돼요. 

그들이 전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빵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받은 이방인 여자는 거들떠보시면 안 되죠? 

내가 개입니다, 라고 했단 말에요. 그 여자는. 개하고 결혼하고 싶은 분 있어요? 

열두 해 부정한 하혈만 하던 그런 여자를 신부로 맞으면 안 돼요. 

남자는 그런 부정한 여자를 만지면 안 되기 때문에. 

신랑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런 여자를 만나기 위해 우물가로 달려가시면 안 됩니다.

 간음하다 걸려서 개망신 당하고 있던 그런 여자 품어주시면 안 되죠.

 일곱 귀신 들렸던 창녀와도 상대하시면 안 돼요. 

죽었던 야이로의 딸, 열두 살이었습니다. 열두 살은 결혼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처음 신랑으로 예수를 맞는 자는 죽어있던 자라는 뜻이 야이로의 딸 이야기예요. 그런 죽은 자를 신부로 맞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신부로 부르셨어요. 그런 자들을 위해 주님은 죽었단 말입니다.


그들을 품고 죽으신 주님이 사흘 만에 그들을 품고 살아나셨어요. 

그리고는 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응시 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과 통섭하세요. 

그 통섭의 목적을 올바로 이해하자는 거예요.

 윌리암 휴얼 ( William Whewell )의 그 Consilience 로서의 통섭이 아니라,

 사귐과 소통의 통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랑이 신부를 통섭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너 나 없이 살 수 있어? 안 돼지? ‘ 인거예요. 


그렇게 동행해줬더니 저희 집사람이 오늘 이제 미국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되거든요. 울더라고요. 지난 주 내내. 남편 없이 못 살겠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어제 하루 종일 설교준비를 완벽하게 해놓고 저녁 때 비 오는데 말이죠. 종로구 5가에 그 닭 한 마리 집 아세요? 지난 주 수요일에 제가 여기 두루치기 집 이야기했더니 가다보니까 사람들 꽉 차 갖고 기다리고 있던데 오늘 종로 5가 닭 한 마리 집에서 다 만납시다. ㅎ아니, 그 허름한 시장에, 그렇게 맛있어요? 세상에. 거기 생선구이 집 쭉 있는데 있잖아요. 그거 먹고 동숭동 가서 연극 한편 보고 비 맞으면서 걷고, 


야, 남편 없이 못 살겠다니까.ㅎ 바로 그게 통섭의 목적이에요. 

신부를 신랑의 통섭 속에서 난 신랑 없으면 무용지물이구나, 먼지에 불과한 존재구나, 적어도 신랑의 나라에서. 이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역사 속 천국살이의 목적이에요. 신랑 없이 독립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통섭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혹자들은 성도의 성숙을 그러한 것으로 이야기한다니까요. 

신랑 없이도 괜찮은 존재로 자라나는 걸 성화라고 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짜 성화는 나는 내 신랑 없으면 먼지구나를 아는 걸 성화라고 해요. 그걸 확실히 깨닫는 걸. 그게 신앙 좋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사십년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 여호와의 사자가 항상 동행하죠? 항상 동행해요. 신랑이 동행하는 거예요

.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항상 이스라엘과 동행해요. 

그리고 그들이 예수와, 여호와의 사자와 동행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초입에도 여호와의 사자가 서 있어요. 

그런데 스데반은 그 사십년 광야살이를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광야교회를 뭐라 그래요? 거룩한 나라, 하나님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 광야 살이는 교회 살이 예요.

 하나님 나라 살이인데 

묵시 속에 완료되어 있는 하나님나라를 역사 속에서 사는 것일 뿐이에요.

 나타나는 양상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광야교회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았어요? 다 죽었어요. 1세대가.

60만 명, 장정 60만 명이 죽었다는 건 1세대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스무 살에서 육십 살까지 무기들 수 있는 남자가 죽었다는 건. 남자는 가정의 대표이고 가정의 대표는 전체의 대표란 뜻이에요.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는 민수기에서 또 다시 세었는데 육십 만 명이 2세대가 똑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은혜로,

 여호수아가 예수라는 이름이에요. 그게. 앞세워서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은혜로. 

그걸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광야교회를 그대로 가나안이 보여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그러죠? 가나안도 실제 본향 아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해요? 죽어야죠? 

그래서 앗수르 바벨론에게 망하는 거예요.

 성전이, 이스라엘이라는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되는 거예요. 

광야에서 장정 육십만의 죽음과 동일한 형국이죠. 

우리가 지난 수요 예배 때 공부한 것처럼 약속의 땅, 즉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짐승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큰 성 바벨론에서 두 증인이 맞아 죽는 것처럼 그렇게 맞아 죽는 거예요.

죽여서, 살리는 거예요. 

저는 신랑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게 뭡니까? 죽음이에요.

 존재의 죽음. 아담의 죽음이라니까요. 

난 선악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될 거예요. 이게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들 측면에서. 

그런데 난 신랑 없으면 존재도 아니에요, 가 뭐예요? 죽음이에요. 죽여서 살리는 거예요. 

그 죽음이 곧 부활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 아들의 나라를 신랑의 통섭 속에서 경험하며 

신랑의 피 뒤로, 십자가 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거예요. 

나라는 애굽 속에서 나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신랑의 희생의 피를 통해서만, 유월절이에요. Passover. 

신랑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인정해 가는 그 과정이 신앙생활이란 말에요.

 그 과정 전체와 그 과정의 결과를 복이라고 하고 바라크. 복이라고 하고. 

그 복의 내용과 그 복을 전하는 일을 케리그마, 복음이라고 해요. Good news.

 따라서 복음, 아름다운 소식, 그 Good news에 합당한 이들은 

십자가 복음에만, 신랑에게만, 복음 자체가 예수니까. 신랑에게만 목을 매게 되는 자리.

 그 자리로 서서히 옮겨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복음, 케리그마의 합당한 자, 복 받은 자들의 그 역사 속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던 거예요.

 마태복음 5장 3절 보세요.

마 5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말을 하시죠? 

그게 1절, 2절에 나와요. 산상수훈에 첫 번째, 두 번째 입을 열어 가라사대. 

그럼 눈을 열어 말을 합니까? 귀를 열어 말을 하나요? 

입을 열어 말을 하는데 왜 굳이 입이라는 말을 쓸까요? 

인간의 입에서는 더럽고 추악한 것만 나온다고 그러죠? 마태복음 15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게 더러워요. 선한 게 하나도 안 나와요.

 예수님의 입에서는 복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바로 고 앞에 산상수훈에서 복이다, 복이다, 복이다 이렇게 시작되잖아요. 

복 있는 자여로 시작되거든요. 산상수훈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예수님 입에서 복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고 복이 쏟아져 나오는 그 입, 

그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래요. 

마태복음 4장에서. 그리고는 그 입이 열리는 거예요. 

누구의 입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이라는 거죠. 

그 복, 바라크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생명력을 복, 바라크라고 해요. 

그래서 복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들을 살리는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거죠.

내가 지금 너희를 살리는 말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마카리오이, 복이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당신의 신부들을 이제 살리는 말씀, 첫 번째 복이 쏟아지는데 

그 신부들을 살리는 신랑의 첫 번째 복의 말이 마음이 가난한 것, 이예요. 그

 어절을 조금 풀어서 번역을 해 보면 이래요.

‘복이다. 신랑에 대해 (이건 제가 넣은 거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예요. 복이다

. 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거기 행간에 뭐가 빠져있어요. 여기서 가난하다고 번역이 된 단어는 ‘푸토커이‘ 인데요. 

그건 절대적 가난을 이야기해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필요가 아니라 이거 없으면 죽는 거요. 이거 없으면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목숨 걸고 붙들게 되는 걸 ’푸토커이’ 라 그래요. 

그 단어를 일부러 하나님이 쓰신단 거예요. 이사야서 61장 1절 보세요.

사 61 : 1- (무엇에 대하여 가난한 것인지 여기에 나와요. 예수님이 이거 인용해다 쓰신 거예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가난한 자 나오죠?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푸토커이 예요. 성령에 의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다, 예요. 돈이 없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그런 뜻 아녜요. 여기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가난한 자는 무엇에 대해 가난한 자겠어요? 아름다운 소식!! Good New! 복음! 말씀, 그거 없으면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자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의해서 전해져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아름다운 소식, 복음. 복음의 말씀을 예수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이렇게도 표현하세요. 요한복음 6장 63절.

요 6 : 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조금아까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랬는데 살리는 것은 영이다. 그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세요. 삼단 논법만 알면 다 이해하는 거니까)

요 6 : 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고 여기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 말이 영이고 생명이다. 그런단 말에요. 그래서 여기에는 ‘푸뉴마‘, 성령이 중성으로 쓰여요. 헬라어에서는 단어들에 이 남성, 여성, 중성형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중성으로 써요. 원래 푸튜마는 남성으로 쓰여야 되는데 중성으로 쓰여요. 왜? 성령을 인격자로 여기선 표현하지 않고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중성단어를 쓰신단 말에요. 그런데 우리 신부들은?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사셨어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말, 말씀, 성령 이건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하는 다른 표현일 뿐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다, 말씀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의 영, 이렇게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이야기하잖아요. 같은 거란 말에요.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가 있다 그러기도 하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 성신이 계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그렇게 복음, 아름다운 소식, 말씀에 가난하다는 건 나는 예수신랑 없으면 죽어요. 라는 말이란 말에요. 그렇게 가난한 자가 복 있는 자고 그가 하나님 나를 사는 거예요. 신랑의 나라에 와서 한 달 살아보니까 신랑 없으면 난 여기서 바보구나 티끌이구나. 이거 깨닫는 거, 이거 잊지 마세요. 그거예요. 그게 역사 속 천국에 사는 자들의 현실인 거예요. 이 역사 속 천국, 약속의 땅, 아직 실체가 오지 않았으니까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을 모형 하는 곳,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그 가나안에서 사는 자들은 자신의 실존 인식을 신랑이 없으면 난 먼지입니다. 신랑과 관계없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 로 갖게 되는 자들이란 말에요.

그건 아담의 죽음이며 아담의 자아상실이죠. 내가 왕이야, 내가 하나님처럼 됐어. 선악과 먹었거든. 여기에서 난 신랑 없으면 먼지네요. 이건 죽음이란 말에요. 아담의 죽음이란 말에요. 선악과 입에 문 아담의 죽음. 이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우리가 하는 게 아녜요. 그걸 십자가 지는 삶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스러져 갈수록 영의 나라에서는 사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죽음과 부활은 동시에 일어나는 거예요. 어디에서? 역사 속 하나님 나라에서. 이 중에 예수 믿고 났는데 왜 이렇게 삶이 이래 아이 죽을 거 같아 많죠? 그런 분들. 대부분 그럴 거예요. 살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케리그마의 내용이 죽음과 부활, 나타나심까지인 거예요. 그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시간적 순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 거예요. 본문 5절 보세요.

롬 6 :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미 뭇 박혀 죽었다, 그래요. 성경이 그러잖아요. 과거 완료로 표시하잖아요. 못 박혀 죽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어요. 쉽게 말해서, 묵시 속에서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역사 속에서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중이잖아요. 지금.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사셨어요. 부활 하셨어요. 그런데 여전히 죽은 자의 행식을 내놓고 있죠? 우리는. 그런데 살아나요. 부활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구원의 현재시제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거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 그런 개념이 등장하는 거예요. 첫 번째 부활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묵시 속에서 창조된 하나님 백성의 실존을 가리키는 거예요. 부활되어 있어요. 살아 있어요. 부활이란 말은 창조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살아남. 이거는 없음에서, 모든 건 없었으니까. 없음에서 살아나는 걸 창조라고 하죠? 죽음에서 살아나는 걸 부활이라고 하잖아요? 창조라는 말이에요.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죄, 죽음, 부활 이런 개념들이 동원되는 거란 말에요. 여러분. 두 번째 부활은 하나님 신부들의 역사 속 부활 과정을 함의한 개념으로써의 부활을 말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는 거예요.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여러분. 실제라는 말이에요. 그렇게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가 결국 종국에 육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죽으면 완전히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죽음으로 가고 있는 그 길을 소망으로 바꿔낼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것으로 기뻐하는 거예요. 성도는요.

그렇게 서서히 죽으면서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는 완전히 죽어서 두 번째 부활로 살아나요. 그 전체 과정을 깨달아 알아가고 살아내는 걸 양육이라 그래요. 그 단어가 뭐라 그랬어요?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남, 이 단어가 양육이에요. 어디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뭐하셨다고 했어요? 자기를 부인하셨단 말에요. 거기로 자라나는 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남이라고 한단 말에요. 예수님 닮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유한이 무한을 닮을 수가 있어요? 생각들을 하시란 말에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그 창조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내며 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산 존재가 되는 것이 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없음의 자리에서 출발을 하는 거예요. 마귀의 자리에서 먼저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이, 역사와 인생이 구축한 옛 하늘과 옛 땅, 옛 흙, 같은 말이거든요. 옛 흙은 뭐예요? 나! 육적 나, 내가 죽는 과정과 동반된다는 말에요.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신비한 장소가 되는 거예요. 죽는 게 사는 거다. 라는 거예요. 신부는 없음의 존재로 신랑의 갈비 뼈 속에 함몰되어 있을 때에 독자적인 독립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오히려 사람인 거예요. 거기서 빠져 나오면서 그 때부터 죄가 생긴다니까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을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러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연합되어 한 몸으로 있을 때 사람이에요. 떨어져서는 사람도 아니에요, 이건요. 상징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신부가, 여자가, 여자는 항상 부정함의 상징이란 말에요. 성경에서. 여자가 신랑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갔을 때 이걸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로 가면 안 돼요, 여러분은요. 혼인 잔치를 연다는 건 천국에서, 혼인 자치는 뭐예요? 연합이란 말에요. 연합, 하나 되는 거예요. 아들이 되는 거예요. 가서. 그래서 우리를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딸이라고 안 그러고. 신랑화 되는 거라니까요. 예수화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걸 모두 하나님이 홀로 이루세요. 본문 5절에서 본받아, 예수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을 본받아, 본받아 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열심히 따라해 보라는 그런 의미가 아녜요. 죽음은 어떻게 한 번 따라 해볼 수 있어요. 부활은 어떻게 본받으실 거예요? 따라할 수 있어요? 유한이 그 무한이 이루어낸 부활을 여러분이 본받아 행할 수 있냐고요? 그럼 그 말은 아닐 거 아녜요? 적어도. 부활도 본받으라고 했으니까. 없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 거란 말이에요. 본받아라. 는 이 단어는 연합의 의미예요. 예수 안에서 연합되어 죽고 살아나는 거.

우리들의 개체의 독립성이 완전히 차압당해 버려요. 부정당해 버려요. 그래서 로마서 5장과 6장에는 딱 두 사람만 등장해요. 거기 여러분의 이름 있어요? 없어요. 두 사람 밖에 없어요. 한 사람 안에서,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 눈에는 두 사람 밖에 없다니까요. 그걸 대표의 원리라고 하는데 한 사람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게 교회라면 그 교회의 독자적인 개체성 자체를 인정 안 하신다는 뜻이죠? 우리들의 독자적 죽음 자체를 인정 안 해요. 성경은요. 한 사람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안에서 살아요. 그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교회의 개별적 자아가 모두 부정되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도 한 사람만 해요.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머지는? 거기에 붙은 자예요. 붙은 자. 여러분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이 거기에 붙여 놓은 거라고요.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라는 건 그 둘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뜻이에요. 첫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있는 없음 들. 그야말로 없음, 즉 흙의 자리에서 영원히 죽은 자 노릇을 하는 거고. 죽은 자, 없음의 자리가 흙이었잖아요. 그래서 그걸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그냥 그 상태로 갇혀 있는 상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저희들 혼자 독자적으로 서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란 말에요. 그게. 

두 번째 한 사람에 들어있는 그 없음 들은 

어린 양이라는 신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의 지체라는 말 자체가 각 지체의 독립성을 파기하는 개념이란 말에요.

 여러분 허락 안 받고 여러분의 손가락이 함부로 외축했다 들어오는 경우 있어요? 없어요. 이 지체의 독립성은 몸에게 차압당한 거란 말에요. 그걸 지체라 그래요. 천국에는 예수라는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안에 신부가 갈비뼈로 함몰되어 들어가야 사람이 돼요. 그래서 교회를 예수의 지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개별적 몸통을 소유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 개별적 자아를 몰수당하고 독립성을 파괴당하는 삶을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가 살게 되는 유일한 길이란 말입니다. 죽어야 사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사는 거예요. 진심에서.

예수님이 내가 길이다. 그랬어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길이 어떻게 됐어요? 예수님이 열심히 성실하게 착하게 잘 살면 열리는 그 길을 열어두고 가셨나요? 아주 아름다운 자태, 이런 것을 잘 가꾸고 꾸미면 열리는 그런 길을 열어두고 가셨나요?

 아뇨, 내가 길이다 그러더니 그 길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니까요. 없어져 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어떤,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열리는 길을 만든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길, 세상, 인간 측에서의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모든 길을 완전히 닫아버린 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라는 길 이외에는 그 어떤 길도 없다는 것을 확증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길이다, 그러더니 그 길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조금 더 제가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오늘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 이야기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가셔야 돼요. 

성경이 신랑과 신부를 한 몸이라고 부르는 건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성도의 연합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상징적으로 에둘러 한 표현이라 그랬어요. 

그렇게 천국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만 찬송하는 존재여야 돼요. 

그러한 연합의 상태, 하나가 되게 하는 상태 그걸 성취해내는 힘을 뭐라 그래요?

 남자와 여자사이에서도 요걸 성취해내는 힘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둘을, 분리되어 있던 둘을, 분리되어 있는 한 쪽은 죽은 건데 

이 둘이 하나가 되어 이게 산 자가 되는 이러한 연합, 이걸 이루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그 힘은,

 능력은 창조주만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 라는 그 말은 

네 안에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 내 놔! 라는 말이라고 했죠? 

사랑하라! 네 안에 계신 그 예수 내 놔! 가 사랑하라 예요. 

그 안에 있는 예수를 내놓으면서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게 예수를 내놓는 거잖아요. 예수 때문에 내가 산 자 된 거니까. 

그 예수 안에서 나도 없음이 되고, 상대방도 없음이 되어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니까, 

이 역사 속에서는 물론 불가능한 거지만. 그걸 사랑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될 수 있거든요. 예수가 아니면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보자고요.

그렇게 하나였던 하나님과 아담이 

아담 측에서의 독립선언으로 말미암아 둘이 되었어요.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의 분리는 곧 사람과 사람의 분리로 나타나죠. 

왜냐하면, 아담의 독립선언은 나를 하나님으로 올려놓으려는 시도이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필연적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아담들 각자가 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분리가 일어나는 거고 가인과 아벨의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아담이 분리가 되자 이웃과의 분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분리의 상태를 이혼이라 하고 간음이라고 한다 했고, 

왜? 남편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다른 걸 사랑하는 거니까, 나를 사랑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분리가 뭐예요? 

사랑, 연합의 반대말이니까. 살인이에요. 죽이는 거예요. 그걸 살인이라 그래요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하나님을 살해한다. 라는 말과 바꿔 쓸 수 있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게 살인이다, 라고 말했는지 아시겠죠? 왜? 

사랑이 살리는 건데 

사랑하지 않는 건 죽음의 상태로 놔두는 거니까 살인이란 말에요. 

이해가 안 가면 여러 번 들으세요.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성경을, 복음을 너무 신파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랑! 애틋한 사랑!’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백 미터 전방에서 전화만 오면 슬라이딩해서 받던 분들이 지금 어떻게 됐어요? 

그런 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의 분리가 살인이라는 열매를 맺는 그림은 괜히 들어가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죽인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유일한 말씀이 뭐겠어요?

하나님과 분리되고 또 수평적으로 이웃과도 분리가 되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그들이 살아날 수 있어요? 

다시 하나 되라! 이게 뭐예요? 사랑해라잖아요. 

그래서 준 게 뭐라고? 율법이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뭐라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하나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하나 된다고요? 

내가 없음이 되어야 하나님과 하나가 된단 말에요.

 신부가 신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는 무슨 말이에요? 

죽어라 라는 뜻이에요. 내가 너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 이 역사 속에서.


이 인간세상 속에서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와 한 생명으로 연합되어 있던 상태에서 

어머니의 물과 피를 타고 밖으로 탈출하여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탄생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창조 메카니즘은 그것과 정 반대예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한 몸으로 있다가 독립적 존재로 밖으로 터져 나오는 걸 죄라 그래요. 그걸 악이라고 해요. 

그래서 율법에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속죄제를 드리게 돼요. 

아니, 애 낳느라고 반 죽다가 살아났는데 가서 또 제사도 지내야 돼요. 

성전에도 못가요. 남자 근처에도 못가요. 밖으로도 못 나가요. 부정한 여자가 돼요. 

여자가 애를 낳으면. 죄를 하나 더 낳아 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죄라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 하나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거. 

여자는 아담의 자손을 낳으면 안 돼요. 예수, 아들을 낳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부정한 여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창조의 메카니즘은 

거꾸로 신랑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를 마시고 

그 뚫린 옆구리를 통과하여 신랑의 심장으로 다시 복귀하는 거, 

갈비뼈 자리로 다시 복귀 하는 것, 그걸 창조라고 해요. 

그렇게 복귀가 되어야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이 세상 모든 독립적, 개별적 자아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 라고 하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게.

 예수 안 믿는 게 죽은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사랑의 상태, 연합의 상태로의 복귀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 게 십계명 이예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을 성문화하여 두 돌 판에 나누어 적어줬어요. 

선악과 따먹고 집 떠난 자들아, 신랑 품 떠난 간음한 창녀들아 신랑에게 돌아와라. 십계명 이예요. 이게. 

사랑하라, 하나님을, 신랑을 사랑하라 돌아와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명령하셨다는 건 

당시 아담들의 세상에 사랑이 없었단 뜻이죠? 

그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에게 보내는 연서이기도 해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와. 

그러나 그건 곧 이 온 세상의 사망증명서 이기도 한 거예요. 율법, 다 죽었단 뜻이에요.

 그래서 사랑해, 돌아와! 살아나야 되잖아!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죽었던 그들이 난 하나님 사랑해요~ 그러고 있었다니까요.

 아니 피로써 맹세해요. 나 사랑한다니까요 그러면서 혈서 쓴 거예요. 가짜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들이 진짜 나를 사랑한다고? 천만에 라는 일갈을 담아서 십계명에 적어주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연서가 그들에게 도착할 즈음에 

그들은 엉뚱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랑해, 사랑해 그러고 있었어요. 사랑해, 사랑해.

인간 측에서는 절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도달할 길을 낼 수 없음이  폭로된 거예요.

 거기에 심판이 일어나죠?

 하나님의 연서가 파괴돼요. 찢어발겨진단 말에요. 거기서 삼천 명이 죽습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애급에서 나온 후 오십일 째 된 때.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게. 유월절 뒤 오십일 째 되는 날이 무슨 날? 오순절 이예요. 

그 때 삼천 명이 율법에 의해 죽는 거예요.

 너희들은 사랑 못하는 사람들이야 이렇게. 사랑 못하면 죽어. 신랑과 연합되지 않으면 죽은 거야 그게. 삼천 명이 죽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인 신약의 오순절, 거기도 산이죠? 

예루살렘이 시온 산 이예요. 

거기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역시 똑같은 말씀이 내려와요. 아까 말은 영이라고 했죠? 성령이 오세요.

 불의 혀 같은 말, 불의 혀처럼 성령이 내려오세요. 

말씀이 내려오시는데 어떻게 돼요? 

그때 율법으로 죽었던 삼천 명이 다시 반석인 베드로의 말에 의해 살아 올라와요. 

십자가가 그래서 사이에 서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살리겠다는 거죠.


나는 이 법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죽여서 살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 구원은 우리가 법을 지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일어나는 거구나, 

우리가 법을 지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가 뭐예요? 율법주의의 죽음이에요. 바리새인들의 죽음이에요. 

그게.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이렇게 거저 주어지는 거구나, 가 부활이란 말에요.

 이게 교회에 동시에 일어나는 거란 말에요. 마찬가지예요. 

구약과 신약, 성경은 우리 성도 안에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말씀을 듣게 되면 처음에는 그 말씀이 법으로 들려요. 

그래서 자기들의 피를 쏟아가며 피를 발라가며 그 법을 지키려고 애쓰게 되죠? 

하나님도 사랑하려고 하고 이웃도 사랑하려고 해요. 거기서 보람도 얻고 행복도 찾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을 종교인이라 그래요. 

모든 자연인이 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그건 모든 자연인이 다 추구하는 거예요.

 사랑을 곡해하는 거죠.

 사랑은 

연합의 언어라고 했어요. 살리는 힘이라고 했어요. 

연합은 한 쪽에서 그를 품어 안아야 연합이 되지 

양 쪽에서 조금씩 내놓아서 연합되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은요. 

그러니까 살려내는 힘이란 말에요. 하나님 측에서 나오는 창조의 능력이 사랑이란 말에요. 

그런데 인간 측에서 내가 그걸 하나님에게 내놓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 인거예요. 그거는요.

 성도만 그 율법에 의해 폭격을 당해서 

난 죽었다 깨어나도 내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내 이웃을 살려낼 수 있는,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못 되는구나 이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내 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걸 폭로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조금씩 무너져가게 되는 거예요. 

그 때, 진짜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이웃의 사랑, 아내의 사랑, 남편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런데 우리는 다 억지로 다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어떻게 근사하게 연극은 되는데 부담스러운 거예요. 이게. 

그래서 애들 대학 가고 독립할 때 쯤 되면? 

오십 대 이혼율이 급상승 하고 있다고 하죠? 그건 왜 그래요?

 여자들 속으로 품은 생각. 너 힘 빠지면 보자.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해서 그래요. 

진짜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예수의 피만 기뻐하시며 거기에만 생명을 부으신다는 게 선명해질수록 나는 죽어가게 돼요. 나는 죽어가요. 

그렇게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어가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렇게 내가 죽어지고 ‘내’ 사랑에서, ‘자기’사랑에서 조금씩 밀려 내려갈 때 

진짜 내 이웃, 내 가족들, 사랑하게 돼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도 감동하여 밥 먹다가 우는 거예요.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다, 이렇게. 누구의 얘기라곤 얘기 안 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 가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나 안으로 연합이 가능해요. 내가 살아있으면 절대 예수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신부들을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여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를 모퉁이 돌로 한 성전으로 지어져간다 하는 거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고도 하는 거예요.

 이미 하나, 사랑하게 만드셨다니까요. 

아니, 사랑이 되게 하셨어요. 우리를. 

그리고 그걸 깨달아가게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13절 보십쇼.

엡 2 : 14 – 22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이게 사랑이란 말에요. 이해가 가시죠? 이제)

-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미 하나고 이미 성전이에요. 

그런데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하고, 역사 속에서, 성전이 되어 가야 돼요. 

무슨 말이에요? 그 현실을 깨달아 아는 그 과정을 겪게 된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오늘 이렇게 한 사람 안에서 한 사람으로 완료가 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한 사람 지키는 과정을 통과하기도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십자가요, 자기 부인이요, 죽음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아픈 거예요. 

그토록 사랑하고 의존하던 나에게서 떠나가는 그 과정이 아프단 말입니다. 쉽지 않아요. 

성경은 그걸 애통이라 그래요. 

성령 안에서 말씀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그 애통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살리는 말이에요. 

그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구약의 산에서 내려온 법이 삼천 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서도 애통이 있었어요.

 누구의 애통이었죠? 모세의 애통이었어요. 

하나님 나를 죽이세요. 예수의 모형 이예요. 부정, 부인 이예요. 

자기부인. 이게 애통 이예요. 나를 죽이세요. 저들을 살리세요. 

그랬더니 심판이 멈췄어요. 용서가 내려왔습니다. 애통에 의해. 

신약의 산에서 그 애통이 말씀으로 내려와요. 

애통하는 자, 복이다! 라고 하더니,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단 말에요. 

거기에서 애통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요 히브리어 페싸흐를 그대로 끌어다가 쓴 단어예요.

 그 단어가 유월절의 유월이란 단어에요, 여러분.

 애통이란 단어 자체가. 그 단어는 고통과 고난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넘어가다, Pass over, 뛰어 넘다, 절룩거리다, 절룩거리게 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그 유월절만이

 우리의 애굽 탈출의 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는 그게 뭐예요? 자기부인이죠?

 내 힘으로 나온 거 아니구나. 이게 자기부인이잖아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은혜로 난 나온 거구나 

그래서 그걸, 내가 부인되는 거니까, 애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그 애통,

그 자가 진짜 복 받은 자다. 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란 말에요. 

그래서 거기에 팬던턴스라는 단어가 쓰인 거예요. 유월절. 

그런데 그 애통이라는 단어는 다리를 절다, 절룩거리다 는 뜻이에요. 

절룩거리다 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 이스라엘, 야곱. 

이스라엘은 누구? 교회.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유월이에요. 패싸흐 란 말에요. 절룩거리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는 하나님까지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십 일 금식기도 해서도 안 들어주면 오십 일까지도 굶어 버릴 거야. 이거. 내가 하나님을 이겨버리겠다는 거죠? 

인간의 욕망에 이 끈질긴,, 그걸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그건요? 못 고쳐요. 그건 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환도 뼈가 대신 가격을 당했어요.

 환도 뼈는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이라는 뜻이에요. 

정확히 번역하면. 남자의 씨, 제라, 여인의 후손, 예수란 이야기. 

예수. 예수가 그를 대신 해 맞아, 가격 당하여, 죽어 그가 살아나는 걸 이스라엘, 승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평생 어떻게 살게 되느냐면 지팡이가 없으면 서지도 못하는 절룩거리는 자. 

신랑만 의지하는 자로 사는 거. 이게 애통, 은혜, 예수,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그림들이란 말에요. 다. 

그게 여러분의 인생에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 신랑이 아니면 나는 먼지구나. 절룩거리면서 가는 인생을 평생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게 쉽겠습니까? 어려워요.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래요. 

거기서 위로라는 단어가 파라클레오 인데요. 파라클레토스가 뭐예요? 보혜사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위로를 받는다는 건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편안하게 해주고, 격려 해주고 이런 의미도 있지만 

성령이 심기게 되다 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심긴 자들을 어떻게 된다? 

애통하게 된다. 신랑만 의지하며 절룩거리며 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걸 복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게 우리를 살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니까요. 

입을 열어 가라사대, 누가? 하나님이.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바로 그 화려한 다윗 왕국의 왕이 되고 싶어 하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 다윗 왕국을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엉뚱한, 이상한 거지같은 게 하나 오더니 ‘여기는 내 나라!’ 이 따위 얘기를 하니까 죽여 버린 거 아닙니까? 

입만 열면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그랬잖아요.

 이스라엘은 지금도 그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서 시온으로 돌아가자 해갖고 이스라엘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 오더니 죽어버렸다니까요. 

인간들이 원하는 그 다윗을 예수가 와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14,14,14대죠? 

14가 무슨 수? 다윗, 데이빗, 달렙 바우 달렙이 4, 6, 4 이기 때문에 14란 말에요.

 데이빗, 다윗. 다윗과 아브라함의 족보라고 해요 

또.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도 아니고. 헬라어 원어로 보면.


 그러니까 다윗, 너희들이 좋아하는 다윗 족보 여기 있다. 

그리고 14, 14, 14. 다윗, 다윗, 다윗, 그러더니 그 족보에서 다윗을 빼버려요.

 솔로몬의 아버지를 우리야로 넣어버린단 말에요. 의도적으로 

가운데를 15대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다윗을 쏙 빼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의 왕 되고 싶어 하는 욕구 이게 마귀예요. 

이걸 죽여 버리고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그 왕을, 다윗 왕 되고 싶어 하는 우리를 품어 안고 죽어 버리고 

아버지 바라기, 아버지만 의지하는 그 위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아담의 삭제. 죄인의 삭제. 우린 이 땅에서 삭제를 배워가는 거예요. 

이렇게 무슨 이름을 남겨요? 

성경 어디에 너희들 이름 남기라고 했어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안 돼요.

 죽어요. 참람한 이름 달고 가면 죽어요.

 예수라는 이름 달고 가야되잖아요. 계시록에 보면. 그거는 네 이름 뺏겠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고지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군사가 되라는 건 무슨 소리냐고요. 도대체가? 네? 

그렇게 고지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리라,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내 지혜, 내 뜻, 내 능력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고지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될 거야. 에덴동산에 네 갈래 갈 흐르죠? 그걸 놔둘까요? 

사대 강 개발이니 뭐니 해갖고 운하 만들고 그러지 않을까요? 거기에다가? 

그거 금방 개발할 거라고요. 자기들이  선악의 주체가 됐기 때문에. 

그게 생수의 강인데. 저는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지금. 그냥 성경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덴동산 밀어서 파워팰리스 지을 거 아니에요? 그걸 놔두겠어요? 그건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살라고 한 곳에서 그 처음자리의 그 존재로 사는 걸 천국이라 그래요. 

그래서 역사의 모든 시도는 결국 기각당하고 불 탈거야.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삭제되어 가는 게 맞아요

. 하나님, 예수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 나라 사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겁니다.

우리는 한 사람 예수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예수 안에서 산 은혜의 신부들이에요. 그 아들만 꼭 붙드세요. 

그래야 여러분은 아들과 혼인하는 것이고 아들로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을 맡겨두고 너희들이 한 번 천국을 건설해봐라, 

너희들의 구미에 맞는 천국을 건설해봐라 하셨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지금 마귀의 세상에 살면서도

 이곳에서 성공과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것이 얼마나 속되고 더럽고 추악한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신랑 더욱 더 굳게 붙들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더욱 더 소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로마서62-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김성수목사) / 온땅교회 한성민목사|작성자 온땅의 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