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59 제단과 보좌-롬 5;18-21 (서울 서머나 교회에서의 첫 말씀)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2


로마서 59번 말씀




본문- 롬 5장 18-21 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살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제가 다루려고 했던 내용을 반으로 나누어서 다음 주에 본론을 하고 오늘은 서론만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몽주 선생의 묘는 선죽교가 있는 개성 근처 어디쯤일 거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집 근처 지리를 익히기 위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정몽주 선생의 묘를 발견한 겁니다. 깜짝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까 제가 알고 있는 그 정몽주 선생의 묘가 맞아요. 영광스럽게도 제가 바로 그 묘 옆에 살고 있습니다.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신 사육신 그 정몽주 선생의 시신을 그 후손들이 제가 사는 그 마을로 옮겨 와서 부인과 합장을 했다는 친절한 설명이 그 앞에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한테 들어보니까 제가 사는 그곳이 굉장히 유명한 유배지였다고 하더군요, 귀양 와서 사는 곳, 그래서 그런지 동네에 유명한 분들의 묘가 유난히 많아요.


거기서 하는 말을 듣고 보니까 저도 거기서 귀양살이를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묘했습니다. 세계의 수도인 엘에이에서 결기도 오포읍. 누가 봐도 귀양처럼 보이죠. 전 이사를 해도 꼭 그런 데가 걸려요. 제가 왜 정몽주 선생의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가 하면 어렸을 적부터 그 유명한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를 유난히 좋아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묘가 지척에 있는 곳으로 이사 했으니까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는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가 이러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을 어찌 고치겠느냐? 


제가 왜 이 시를 좋아했는지 아세요? 저는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우리 성도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고백이 바로 이 단심가와 같은 결연한 고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악한 세력이 온갖 미사여구와 먹음직한 당근을 들이밀어서 간곡한 이방언의’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하여가죠? 하여가를 불러댄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고백한, 임 향한 일편단심을 어떻게 바꾸겠느냐, 는 이 일편단심을 고백하는 그러한 용사가 되는 게 신앙인의 본무요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제 안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의 그 단심가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그 하여가가 더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겉으로는 멋지게 일편단심에 나오는 그 단심가를 불러대면서 제 안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그 하여가를 감추기에 급급했었죠. 그게 신앙 좋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치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가 있어도 저 자신은 속일 수가 없잖아요? 저는 그러한 유약한 모습이 저 스스로에게 폭로될 때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고 절망감에 낙담하곤 했어요. 그리고 그걸 더 감추기 위해 더 경건한 척하며 살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에 귀가 열리고 그 은혜의 복음이 이해되면서 저는 참 많이 위로를 받았어요. 자유로워졌습니다.

단심가는 임 향한 그 일편단심의 그 성도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불러주시는 사랑의 노래라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반드시 사랑하고 반드시 구원하고 말 거야, 이 단심가는 예수가 우리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열심이 내 안에서 단심가를 부르면서 나를 이끌고 계시는 그동안에 육적 나, 이 육적 ‘나’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그 하나님의 열심을 방해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솔직해지자고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단심가와 하여가 사이에서 올바른 자아 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 항복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여가‘로 타협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육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게 되는 그런 죽음의 과정과, 그래서 예수님이 홀로 완성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내가 다 이루었다, 그게 십자가잖아요. 그 승리의 현실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구원의 현재성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단심가와 성도의 하여가에 관한 내용인 거예요. 아니, 성경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예요. 사실은. 우리는 구원을 얻는 순간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다 알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실천을 쌓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갓 신앙생활에 입문한 견성, 그 기초, 견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몸에 피가 펄펄 끓어서 십자가라도 질 기세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복음을 점점 이해하게 되고 오도, 그 복음, 진리, 말씀의 깊은 단계인 오도의 길로 들어가게 되면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어린 생각이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게 돼요. 그리고는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방식으로 아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프로젝트를 이해하게 되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을 얻는 순간부터 자기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 그 은혜의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차근차근 배워가는 거예요. 언제까지요? 죽는 날까지요. 여러분의 인생동안에 그게 완성이 안 돼요. 


성도의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데에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왜 하나님 나라, 그 성전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야만 하는지를 마음 깊이 깨달아 알고 가는 게 신앙생활의 올바른 목적지란 말에요.


진짜 개혁주의, 왜곡된 개혁주의 말고 진짜 개혁주의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시면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게 개혁주의지,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복음, 오직 믿음,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다, 를 드러내는 게 개혁주의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왜곡된 개혁주의는 어떻게 되어있어요? 그렇게 믿음을 가진 나, 은혜받은 나, 이걸 자랑하는 걸 개혁주의라고 얘기 한단 말입니다. 저는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지 우리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그렇게 많은 성전척량의 이야기와 성전의 치수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전은 누구? 고린도전서에서. 나! 


척량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지어진 것이 한 군데라도 발견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로 안 들어가세요. 그죠? 에스겔서에도 보면 하나님이 준 치수 그대로, 그 양식 그대로 만들어지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아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성전척량이라는 게 뭐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척량하겠습니까? 이놈들이 은혜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거기에 자기가 뭘 보탰는지 요걸 측량해내는 거예요. 아주 자세하게.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오직 은혜로만 완성된 그곳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Union Christ, 연합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성전척량으로 끝이 나죠. 계시록 21장에. 그러한 하나님의 성전척량이 끝나고 어떤 판정이 내려져야 해요? ‘토드’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보시기에 좋으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려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없음의 상태잖아요. 그죠? 

혼돈은 Structure가 없는 이란 뜻이죠? 공허는 Emptiness예요. 그러면 그릇도 없고, 공허, Emptiness면 뭐예요?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으면? 무! 없음이란 말에요. 그죠? 


거기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아, 있어라! 땅아, 생겨라! ’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그 창조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판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으면 보시기에 안 좋다니까요. 계시록 21장의 성전척량이 바로 그 이야기예요.


그래서 결국, 창세기 1장을 계시록 21장이 완료시키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 성전이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계시록 21장에 그 성전척량에 나오는 숫자들이 뭐예요? 십, 천, 십이, 백 사십사, 이런 거죠? 다. 


제가 지난번 설교 때 십이가 무슨 숫자라고 했어요? 야곱의 열두 아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아들의 숫자입니다. 그죠? 그래서 계시록에 가면은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예루살렘에 열두 사도,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 거룩한 성을 뭐라 그러죠? 신부! 어린 양의 신부라 그러잖아요. 교회잖아요. 그걸 성전이라 그래요. 그게 왜 십이, 백사십 사, 그러니까 십사만 사천을 그냥 숫자로 보는 세대주의는 얼치기인 거예요. 아니에요 여러분.


열둘 그리고 십, 천, 이런 완전수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만 완성된다는 걸 보여주는 게 성전척량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장과 고가 같은 지성소가 되는 것이고 이게 하나님 나라다, 가 성전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치수대로 안 지어진 그것은 가짜 성전이에요. 그래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육인 거예요. 여러분. 육이 무너져야 새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완성된 새 성전이 서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성전으로 완성된 성도는, 이미 여러분은 성전이죠?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다. 없다? 있다, 그럼 성전이죠? 그런데 성전이 뭐 이래요? 오늘 아침에도 마귀 짓 하고 왔잖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그 육이 죽어야 진짜 성전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전인데 자꾸 그렇게 남에게 감추고 싶은 일들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그 예수의 은혜만 붙들게 되는 거예요. 그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하는 거예요. 노력해서 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성전이니까요. 


그러므로 이김, 승리, 이런 건 우리에게 강요된 의무조항이 아니에요. 이김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준 거예요. 승리는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어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나에게 주어졌는지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이 충분히 이겨버리면 안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자꾸 지는 거예요. 그걸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그 아들을 찬송하는 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 보세요.



고전 15 : 54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늘 본문에 사망이 나오는데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바 된대요. 이김에게 삼킨바 된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겨라! 그래요? 우리들한테 이겨라? 이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죠? 이김은 하나님이 우리들한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그걸 여러분이 알아가는 그 과정을 사도가 이겨라, 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이긴 이들에게 이겨라! 왜? 하나님이 이겼으므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가셨잖아요. 그게 이겨라 라는 말이에요. 요한일서 5장 4절 보세요.



요일 5 : 4 - 대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

( 음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까 여러분들의 이김은 믿음이란 말에요. 믿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나


성도의 이김은 뭐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게 성도의 이김 이예요. 그분이 나에게 생명을 창조하셔서 선물하셨다는 것을 믿는 게 성도의 승리라는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하나님의 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우리는 아들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품어 안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걸 믿는 거예요. 그걸 이김이라 그래요. 그걸 승리라 그래요. 


하고 싶은 걸 입 꽉물고 참은 것을 승리라 하지 않아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의 무력함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발각 되어야 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위장하고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는 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던가요?


이렇게 성도의 신앙여정은 나라는 육의 존재가 죽고 부인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승리가 찬송되는 이중적 본질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이중적인, 하여가와 단심가가 동시에 나타난다니까요. 그렇게 이중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 성도의 역사 속 존재 안에서 위대한 하늘 보좌, 승리죠 그건요. 그 하늘 보좌와 죽음의 제단, 내가 죽는 죽음의 제단이 동시에 경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보좌와 제단 1편인 거예요. 여러분의 삶 속에 그 두 가지가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성경은 여러분이 하늘 보좌에 이미 앉아있다 그러죠? 과거 완료로. 앉히셨다. 그러잖아요. 보좌에 앉아있는데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마귀 같은 자신의 실체를 수시로 들키고 있잖아요. 제단에요. 도륙되는 거예요, 그건요. 죽어야 되는 거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은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는 거라는 걸 깨달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생명을 선물해주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쉬운 말로, 딴 건 다 잊어버려도 돼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라, 이거예요. 그게 성도의 본무예요. 유일한. 갈라디아서 6장 14절 보세요.



갈 6 : 14- 그러나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게 성도의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돼는 거예요. 성도는 일평생 자신이 내놓는 어떤 수고와 애씀, 열심을 자랑거리고 상 받을 수 있는 스펙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는 틀림의 자리로 끌려 내려가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자존심 상하시죠? 그럼 난 뭐야? 뭐긴 뭐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된 자예요. 그걸 기독교라 그래요. 안 그러면 절에 가셔도 돼요. 거기도 똑같은 얘기 해주잖아요. 착하게 잘 살자. 마음을 비우자. 청렴결백하자. 교회에서 가르쳐야할 게 이런 거라면 절에 가지 뭐 하러 이런 데 와서 이렇게 더운데 앉아 있어요? 밖엔 추운데 여긴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밥도 주는데 거기는. 여긴 밥이 없어요. 부엌이 없어서. 골로새 1장 16절 보세요.



골1 : 16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이 안에는 마귀도 포함된 거예요, 에베소서에 보면 정사와 권세와 하늘의 악한 영, 요게 마귀들의 계급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들까지도)

-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까지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수단과 도구란 말에요.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목적지예요. 성도의 목적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내가 영광 받는 거 아녜요. 내 구원이 목적지가 아니라니까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자꾸 나로 그리고 교회로, 여기 로컬처치로 주의가 자꾸 집중이 되는 거예요. 요걸 어떻게 하면 키울까? 어떻게 하면 부흥을 시킬까? 요기에. 


오늘 본문을 보면요 죄의 왕 노릇이라는 어구와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어구가 나와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죄의 왕 노릇이 끝나면 은혜의 왕 노릇이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래요? 여러분 지금 은혜 입었죠? 그럼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야, 어떻게 내가 원하는 건 이렇게도 안 하니? 나는. 어떻게 내 안에 있는 다른 법이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데 나는 왜 거기에 끌려 다닐까 라고 고백하잖아요? 그건 하나가 끝나고 하나가 오는 그런 방식으로 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죄가 사망을 도구로 하여, ‘디아’ 예요. 그 앞에. 전치사 ‘디아’ 다음에 소유격이 오면 수단과 방법이라 그랬죠? ‘디아’가 있어요. 사망을 도구로 해서 왕 노릇 한다고 하는데 죄가요. 이 세상에서 사망,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 있나요? 없죠? 다 죽어요. 모든 인간이 다 죽어요. 심지어 창세기 5장의 하나님 라인인 그 사람들도 다 죽었더라,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의 왕 노릇 하에서 종노릇하다가 결국 사망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죽는 거예요. 육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 안에서는 은혜가 왕 노릇 한다. 그래요. 은혜가 왕 노릇을 하면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성도도 이 땅에서 죽어요.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도 죽습니다. 


그러나 다른 게 있어요. 모든 인간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자기 개발, 자아확장에 전념하며 살다가 결국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성도는 이렇게 육이 죽어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해 주시는 진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죽는 게 달라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은혜가 개입을 하면 고난이 함께 따라오는 거예요. 


노아가 은혜를 입자마자, 창세기 6장에 나오죠?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그죠? 은혜를 입자마자 뭐해요? 산에 올라가서 배 만들어야 해요. 인생을 차압당하는 거예요. 뭐 위해? 은혜 위해. 그래서 왕이 예요, 은혜가. 그런데 세상에서는 부인되고 부정되는 거예요. 그 왕이 그렇게 끌고 간다니까요. 그래서 결국 노아가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도달한 지점이 어디예요? 아, 우리는 우리가 맞을 저주의 비를 대신 맞아주는 저 방주 안에, 예수 안에 들어가야 사는 거구나, 깨닫는 거예요. 요게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찾아왔어요. 은혜가 왕 노릇 하자 아브라함이 어디고 끌려가요?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에서 광야로 끌려가요. 결국은 어디서 죽습니까? 무덤 하나 얻어요. 무덤 하나.

얼마나 그 아브라함이 보잘 것 없는 그런 삶을 살았는지만 풍성하게 폭로당하고 무덤에 갇혀요. 


그런데 뭘 알고 갔어요? 아 구원은 내가 언약을 어떻게든 성취하려고 수고와 열심을 부리는데서 내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제물, 어린 양에 의해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 아는 거예요. 은혜가 가입하면. 그래서 그 모리아 산 이후에 아브라함이 야, 이게 진짜 구원이구나, 이제 알았으니까 나는 믿음의 조상답게 살아야지, 이렇게 살지 못하고 그 나이에, 그 연세에 또 후처들을 얻어서 자식들을 또 그렇게 낳은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마엘 낳고 무지하게 혼났죠? 그 일을 모리아 산을 경험하고 또 하더라,를 보여주는 거예요. 은혜가 그걸 드러낸다니까요. 


아브라함이 그럴 거예요. 

"모리아 산으로 그냥 끝나면 되지 하나님은 그 뒤 얘기는 뭐 하러 적어놔 갖고.."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거예요. 은혜는 그걸 폭로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성도는 육을 변화시키고 성숙시켜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 홀로 왕 노릇해서 구원을 성취해낸다는 걸 은혜의 왕 노릇이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왕 노릇 이예요. 은혜가 왕 노릇하여 구원하는 거지 내가 거기에 뭘 보태서 구원 받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배우는 거란 말에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종은 왕에게 종속된 자죠? 왕이 사약 내렸는데 이거 조금 이따 먹을게요. 이러면 돼요? 안 돼요? 반만 줄여주세요. 돼요? 안 돼요? 꿀 좀 타주세요. 돼요? 안 돼요? 주면 먹어야 돼요. 어떻게? 절하고 먹어야 돼요. 이게 죄라는 왕이 사망을 갖고 왕 노릇하는 거예요. 다 죽어야 돼요. 누구든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은혜가 왕 노릇하면? 은혜에 의해 그가 살아나는 거예요. 

왜? 이김이니까. 은혜가 사망을 어떻게 했다고요? 이겼다, 먹었다 그러잖아요.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 사망을 먹어버렸다. 이겨낸 거란 말이에요. 그걸 배우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가 왕 노릇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단 말에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자 로마서 5장 21절 보세요. 은혜가 왕 노릇해서 성도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롬 5 :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가 왕 노릇해서 어디로 끌고 가요? 영생. 

복? 아녜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복. 문제 해결, 질병치유 이런 거 아녜요. 

여러분 눈물 흘리게 해 주는 거?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울면 다 은혜 받았대. 아녜요. 


은혜는 여러분에게 영생을 선물하는 거예요. 

영생이 뭐죠? 오래 사는 거?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거?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아요.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생명, 신적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게 되냐고요? 그 분과 연합이 되어야 되죠? 그래야 돼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야 돼요. 그걸 연합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거, 그러죠? 그 아는 것이 기노스코이고, 히브리어로 바꾸면 ‘야다’거든요. 그 ‘야다’가 어디에 나오는지 아세요? 그 단어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창세기 4장에 있죠, 그죠?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는 걸 안다, 그래요. 그게 히브리사람들의 안다 에 대한 개념 이예요 그게. 그냥 이렇게 너, 나 알아? 그게 아녜요. 연합 이예요. 부부가 동침하여 연합되는 것. 그걸 ‘안다’라 그래요. 그게 연합 이예요. 그걸 영생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이 연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거 조금 내놓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거 조금 내놓고 그래서 합의 하여 연합되나요? 신과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내놓아 섞을 수가 없어요. 피조물이 부인되고 부정되어야 하나님과 연합이 가능해요. 그러면 은혜는 성도를 어디로 끌고 간다는 거예요? 십자가, 부정, 부인의 자리로 끌고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통째로 채우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안을.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말이죠.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렇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인간이 그 본연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를 거부하는 거예요. 자꾸. 뭐 기독교가 그렇게 심플해? 예, 그래서 복음 이예요. 그런데 이 똑똑한 인간들이 그걸 못 받아들여요.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 하나님과 예수 안으로 연합되어 들어가는 것이 영생이라면 은혜는 결국 성도의 육적 자아를 죽이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지면 신앙에 자신감이 드는 게 아니라 소금 친 푸성귀처럼 축 처지게 돼있어요. 힘이 빠지게 돼있다니까요. 심지어 하나님, 제가 진짜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나는 교회 가서 봉사하면서도 역시 제 가치를 챙기고 사람들의 칭찬을 원하는 그런 인간이네요. 이렇게. 


왜? 그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도로 그걸 하는지를 가르쳐주신다니까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어떤 일을 난 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 손들면 무색해지는 거예요. 손이.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못해요.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은 있어요. 우리는 안 된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하나님, 언제든지 하나님이 저 지옥 보내도 전 진짜 아무할 말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구원해주셨다고 합니까? 참 믿겨지지 않네요. 이게 성도의 고백이어야지, 구원의 확신이 나날이 더해지는 건 뭔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물어봐 무슨 헌병이 검문하듯이. 구원 언제 받았냐고. 그럼 그러세요. 당신은 아냐고? 우린 창세전에 구원 받았다며요? 창세전에, 그렇게 대답하세요.


신앙인은 할 말이 점점 많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말이 없어져요. 할 말이 없어져요. 뭐 그렇게 남의 설교를 갖고 찧고 까불고, 요건 뭐가 잘못됐고요, 이건 뭐가 잘못됐고요. 그런 할 말이 없어져요. 이제 갓 입문한 전도사 강도사 애들이 인터넷에 막 댓글 올리는 거 보면 아이고 너희도 언젠가 소금 맞을 날 있을 텐데 안타깝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뭘 그렇게 내가 아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들을 몰라. 오프라인에서 삶을 살라고 했더니 익명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그냥 써놓고 도망가고 써놓고 도망가고. 그런 거 하지 말란 말에요. 가정에서 아내를. 자식을 사랑하고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살면서 또 나의 나 됨을 발견하고 예수의 십자가 붙들고 이렇게 살아야지 뭘 앉아서 손가락으로만 이러고들... 그게 무슨 신앙생활 이예요?


그렇게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로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끌려가는 거예요. 그게 복음 이예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본문 18절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세요.



롬 5장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많은‘ 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형용사 ’파스’는 Many 가 아녜요. Every. 모든 이예요. 모든. 그러니까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고, 의의 한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에, 영생에 이르느니라. 앞의 모든은 모든 인류이고 뒤의 모든은 영생 얻는 모든 이에요. 그래서 영생 이예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영생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무엇에 의해 영생에 이르렀느냐 이걸 밝히면 되는 거예요. 뭐가 그래요? 각자의 행동으로 영생에 이르렀다 그래요? 한 행동으로 영생에 이르렀다 그러잖아요. 오늘 본문이. 한 행동. 누구의 한 행동? 예수의 한 행동. 그걸로 의가, 영생이 우리에게 이르렀다, 이게 초점이라니까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인류가 죄로 떨어지는 이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원죄니 뭐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왜 아담의 죄가 나에게까지 전가되어야 돼요? 이런 거 따질 필요 없어요. 여러분. 


예수라는 한 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존재가 죄인으로 떨어지는 걸 장치로 장착해 놓은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실 자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거예요. 아담은. 근데 자꾸 우리는 아담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여 나의 구원과 나의 복을 챙기려고 하니까 성경이 얼토당토로, 엉터리로 엉키는 거예요. 여러분. 19절을 보시면 그게 더욱 더 확실하게 돼요.



롬 5 : 19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끝. 여러분이 열심히 순종해서 의인 되는 거 아니고 한 분의 순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그가 하나님께 납작 엎드리는 상태. 난 아무것도 아니네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없음의 자리로 가서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를 순종이라 그래요. 순종은 항상 온전해야 해요. 여러분이 99가지 순종하다가 하나 어기면 그거 불순종이라고 해요. 백 개로 통틀어서. 성경이 그러잖아요. 


그럼 완벽한 순종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께 함몰되어 들어가야 돼요. 그 앞에서 없어져 버려야 순종이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선물로 주었다는 건 우리를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었고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뜻이란 말에요. 그걸 순종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로마서 5장의 전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의 십자가만이 영생의 근거라는 그 복음의 핵심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생명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라는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 다른 말로 영생 얻는 모든 피조물 측의 자격과 조건을 부정해 버리는 거, 그래서 대표가 필요한 거잖아요. 한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그런 그 모든 피조물의 자격과 조건을 부정해 버리는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이 창세기 1장부터 등장을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죄, 율법, 아담 요 앞에 전부 ‘디아’라는 전치사가 들어가 있고 그 뒤의 명사들이 다 소유격인 거예요. 하나님이 방법과 수단 도구로 사용하셨다. 사용하신 거예요. 그렇게 이 역사는 영생과 하나님 나라라는 성취물 앞에서의 그 피조물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확증하고 인정케 하는 용도로만 쓰이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역사의 결말을 성경이 뭐라 그러죠? 멸망! 이라고 해요.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죠? 그래서 히스토리 아녜요. His story. 그분이 주관하고 계시면 목적을 갖고 주관하실 거 아녜요?

목적이 뭐냐는 말예요. 역사와 인생의 목적. 인생이 결국 어떻게 돼요? 죽잖아요. 멸망이라니까요. 역사도 멸망이에요. 베드로후서 3장 7절 보세요.



벧후 3 : 7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멸망이에요. 뭔가를 교훈하고 가르치는 그 일이 끝나면 멸망으로 그냥 끝나는 게 이 역사란 말입니다. 역사야, 인생아 너희가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한번 해봐라! 의술도 발전시켜보고, 문명도 발전시켜 보고 인터넷, 휴대전화 뭐 LTE 이런 거 한번 다 해봐. 그리고 그 결과를 한번 나에게 보여줘. 멸망이에요. 


그러면, 너희가 최선을 다해서 한 게 멸망이라면 이제 너희가 의지해야 할 건 뭐겠니? 하나님의 은혜예요. 십자가예요. 그걸 드러내는 게 역사이고 그 작은 역사를 사는 여러분의 인생이라고요. 하나님을 높이는 거, 여러분이 쇠하고 하나님이 흥하는 거. 이게 우리의 인생이에요. 교회는 쇠하고 하나님이 흥하는 거. 그렇게 이 역사와 우주는 멸망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는 건데 그중에서 어떤 이들이 부활 생명을 선물 받는 거,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인간은 지독하게 자기들의 불가능함과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래서 인간을 복제하여 장기를 따로 마련해서 죽을 거 같으면 그것 가져다가 수술 받고, (아이랜드라는 영화에서 보셨죠?) 그런 시도까지 하는 거예요. 영생하고 싶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왜 죽어야 하는지 인간이 몰라요. 아니 알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게 뭐라 그래요? 성경이? 율법이라 그러잖아요. 율법. 본문 20절 보세요.



롬 5 : 20 - 율법이 가입한 건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느니라


여기서 더하게 하다, 는 Increase 가 아니라, Fullness, 가득한 것, 율법은 죄를 더 풍성하게 더 짓게 더 많아지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었다는 게 아니라 죄를 간과하여 보고 있는 너희에게 죄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보게 해주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는 거예요. 율법이.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에게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었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수시로 기도하고 길거리에서 기름 발라가면서 기도하고 제사에 열심을 부린다고 거들먹거리다가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었어요. 이게 다 어떤 항목이에요? 율법에서 요구하는 항목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시더니, 율법의 주인이신 그분이 오시더니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욕을 하더라니까요. 


왜? 그들이 뭔가 잘 못했기 때문에 그렇죠? 율법을 잘 지켰는데 독사의 새끼라고 욕을 먹었다는 건 하나님이 그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그 율법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지적하려고 진짜 죄가 무엇인지 지적하려고 율법을 주셨다고 하는데, 오자마자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에게 이 독사들아! 그랬단 말에요. 마귀들아! 그랬단 말에요. 그럼 하나님이 밝히려고 했던 죄가 뭐예요? “나는 율법 지킬 수 있어요 ” 이걸 죄라고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어렵죠?


왜? ‘건강한 교회‘에서 우리는 그게 올바른 신앙인의 신앙생활인 줄 알았잖아요? 그렇게 배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도덕법은 남아있고, 십자가가 그렇게 조목조목 나누어서, 요건 좀 놔두고 요것만 내가 십자가에서 해결할게, 그런 게 십자가입니까? 그렇게 십자가가 불완전해요? 도덕법 윤리법은 남겨 놓고 해결한 거예요? 율법은? 


도대체 이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끝까지 인간의 자존심은 놓지 않겠다는 악마성이에요. 하나님이 율법의 주인이고 율법이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건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시켜서 하나님 한 분만 거룩하고 하나님만 온전한 분이심을 드러낸다는 뜻이에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 이게 아니라. 그러면 뭐 여자들 월경한 다음에 정결 의식 행하고 하나님이 그런 거 해야 해요? 그게 왜 율법에 나오느냐고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걸 세목화하여 지켜내려고 하는 게 마귀들이었단 말에요. 인간들이었단 말에요. 독사의 새끼들. 


그게 아니라, 너희가 도대체 이 선한 것을 가지고도 어떻게 사는지를 봐라. 어떻게 살았어요? 그걸 지키더니 자기 자랑으로 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을 증명해 보려고 하는 요걸 증명하는 거예요. 요거를.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잘난 거 지켜놓고 반대급부 원하는 거. 그리고 칭찬, 아니면 만족, 요런 거라도 챙기려고 하는 그 인간들의 죄성. 이걸 폭로하는 게 율법이란 말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주일성수해라, 십일조 해라, 선교해라, 구제해라, 선한 일에 힘써라, 봉사해라, 성도들에게 명령이 떨어집니다. 설교를 빙자하여 목사가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죠? 그리고는 또 붙이죠? 거기에다가,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 문제 해결된다, 어둠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되는지 안 되는지 시험해봐라. 요런 게 꼭 붙어요. 그런 반대급부를 노리고 종교행위를 하는 걸 성경이 죄라고 해요. 그걸 죄라고 해요. 그게 바리새인의 죄였잖아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기특한 일을 하면 그걸 전부 하나님께만 영광으로 돌리나요? 저도요 심지어 설교하고, 설교를 하고 내려와서도 꼭 우리 집사람한테 물어봐요. 나 오늘 잘했어? 그럼 꼭 약점만 집어내요. 그럼 화가 나요. 당신이 해보지. 그렇게. 그럼 뭐예요? 설교를 하고도 은근히 칭찬을 기다리는 게 인간이에요. 그럼 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도대체가.


우리가 쏟아 놓는 건 다 죄예요. 그때, 성도는 십자가의 필연성을 또 한 번 붙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럼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마음먹는 사람들은? 왜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동안 몹시 피곤했다는 거죠? 그럼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다는 거예요, 자기 영광을 위해서 했다는 거예요? 자기 영광 위해서 했다는 거죠. 나는 이제 더 이상 손해 보기 싫어! 아니,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랑 내가 똑같다면 내가 왜 손해 봐? 나의 영광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안 하겠다는 거예요? 나 편하자고 안 하겠다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율법을 대면 이렇게 인간은 죄만 쏟아낸다니까요. 죽어라 하면서 자기만족 챙기고,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요렇게 또 자기 영광 챙겨 갖고.


율법이 가입하여 여러분의 죄를 드러낸다는 게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그런 선한 명령 앞에서 여전히 자기만 챙겨 갖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자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닮아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닮아갈 거예요? 남의 장사 집 가서 다 뒤집어엎는 거 이런 거? 안식일 날 남들은 다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예배하는데 밀 이삭 부셔 먹고 이러는 거? 남들 예배하는데 안식일 날 청년들하고 소주 한잔 하는 거? 뭐예요?


신은 우리가 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녜요. 신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지 우리의 롤 모델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시면 그 예수가 나에게 선물해주신 그 삶을 당연히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하늘의 삶으로. 그래서 우리는 먼저 그 은혜 앞에 굴복하자는 거지, 그럼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고요. 


그런 착한 일, 선한 일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행복하라고 선물해 주신 거예요. 해보세요. 행복해요. 내가 뭘 배터지게 먹는 거보다 자식새끼가, 아니면 가난한 어떤 이들이 나의 도움으로 배부르게 먹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배가 고파도 행복하잖아요. 그게 원래 하늘나라의 삶인데 요만큼씩 맛보라고 주는 거지 그거해서 거들먹거리며 내 앞으로 상 받을 스펙 쌓아갖고 가져오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선한 일은 행복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해야죠. 하세요. 왜 안 하십니까? 그거를. 그런데 마치 기독교의 목적지가 그것인 냥 호도를 하니까 제가 화가 나는 거죠.


예수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면서, 십자가 은혜에 대해선 요만큼도 모르는 인간이 열심히 무슨 선한 일을 쌓아서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을 공평하고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하고 앉아 있으니까 이게 답답한 거예요. 거기 예수가 어디에 끼어듭니까?


여러분 안에 진짜 그 예수의 은혜가 있으세요? 그럼 이제 말을 줄이세요. 그리고 가만히 보세요. 자기의 삶에 그 말씀이, 그 십자가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요. 할 말이 없어져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율법이 ‘가입’했다. 그래요. 가입했다는 말은 가만히 숨어들어왔다는 뜻이에요. 율법이 가만히 숨어들어왔어요? 시내산 위에서 아주 난리굿을 치면서 들어왔어요. 그럼 바울은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가만히 숨어서 들어왔대요. 그 말은 율법이 표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하던 그것 말고 숨어 있는 다른 뜻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입했다, 가만히 숨어들어왔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겠어요? 너희는 죄인이다. 열심히 지켜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봐, 이게 표면적인 거라면 숨어있는 의미는, 너희는 죄인이야, 무력한 자야. 이런 숨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거예요. 로마서 5장 13절 보세요.



롬 5 : 13-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느니라


무슨 말이에요? 지금 이게 그 말이거든요. 이걸 무슨 말로 이해하고 계셨어요? 여러분,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죄가 아니었나요? 율법이 BC 1500년 모세 때 주어졌습니다. 그 이전에 BC 1800 년경에 여러분 세계사 시간에 배운 거 있잖아요? 함무라비 법전이 있었잖아요. 바벨론 왕 함무라비가 제정한 법, 그 법이 뭐예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이거예요. 함무라비 법전이. 그걸 한마디로 죽이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예요. 함무라비 법전이요. 바벨론의 법이예요. 율법을 하나로 줄이면 뭐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뭐가 달라요? 함무라비 법전이랑. 그게 먼저 있었다니까요. 그걸 어기면 죽이거나 감옥에 처넣었어요. 뭘 율법이 오기 전에 죄를 죄로 안 여겼어요? 죄로 여겼으니까 감옥에 넣고, 죽였잖아요.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겠느냐고요 여러분. 율법이 밝히려고 하는 죄는 그러한 종류의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무라비 법전이 주어진 그 상태에서 인간이 죄라고 여기는 것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요것만 신경 쓰면서 요것만 안 하면 우리는 의로운 인간이야 요러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어서 죄를 진짜 죄로 보지 못하는 너희의 눈을 뜨게 해서 진짜 죄가 뭔지를 보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인간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더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함무라비 법전이 이야기하는 그 죄만 죄로 여기도 있더라, 는 거예요. 이 뜻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죄가 뭐에요? 인간의 하나님 흉내 내기. 피조물의 하나님 흉내 내기. 그런데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을 흉내 내겠다는 건 뭐냐고요 도대체. 성도는 그러한 율법에 의해 역시 나는 죄인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어있는 거죠? 그러면 그때, 아, 나는 이 선한 것 갖고도 이렇게 죄만 짓는구나, 난 죄인중의 괴수 맞구나. 율법으로 그렇게 내가 죄인 됨을 알게 되는 그 자가 붙들 수 있는 게 뭐죠? 은혜죠.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더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명쾌하죠? 그죠? 사도 바울이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얘기를 하면서 율법도 끌어들이고, 천재죠? 천재. 구원이란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우리의 처음자리가 어디였음을 확실히 깨닫고, 그 없음의 자리에서, 혼돈과 공허의 자리에서 존재로 만들어주시고 거기에 생기까지 불어넣어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는 자가 성도예요. 이게 에베소서잖아요.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야, 찬송이 되게 할 야. 찬송.


그렇게 우리를 쫓아오시면서 열심히 단심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심 에 항복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의 현실과 무섭게 도륙당하는 제단의 현실이 공존하여 나타나는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제가 구약의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면서 구약에 어떻게 그 제단과 보좌가 우리에게 먼저 약속 되어 있는지를 제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걸 성경 신학이라고 하는데 오늘 결론으로 로마서 9장의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



롬 9 : 11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 안된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긍휼을 부으신 자. 그들만이 영생의 구원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 완성된 교회를 기독교라 부르는 거예요. 서머나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이 그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