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58 한 사람이 살리고 한 사람이 죽이고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23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요즘 들어 제가 부쩍 패닉 어택이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어택이 한번 오면 숨을 잘 못 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엄습하는 공포와 두려움을 겪어 본 사람은 알게 되겠지만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공격 명령이 네 몸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디스 오더가 자꾸 내려지니까 차라리 그 때에는 이 존재가 없어지면 이 공포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죽음 보다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저는 수시로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죠. 왜냐하면 그게 더 크니까요.

제가 이틀 전 설교 준비 중에 심한 패닉 어택으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너무 아파하다가 집에 전화해서 911에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119 구조대를 생각한 것인데 여기 911은 구조가 아니라 거의 연행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러 못 올 뻔하였습니다. 거기서 72시간 온몸을 검사를 받아야 한답니다. 종합검진 받을 뻔 했습니다. 대학 병원의 응급실에서 밤새도록 이런 저런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를 하던 도중에 다시 패닉 어택이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거기에서도 똑같이 공포와 두려움이 찾아 왔어요. 저는 죽음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이 상황이 지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처절한 14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대학병원에 응급실에는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첨단의 의료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의사도, 간호사도, 의료 장비로도 그 지옥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어요. 누가 때리는 것도 아니고 살갗을 누가 태우는 것도 아니고 뼈를 부러뜨리는 것도 아닌데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며 공포입니다. 몸 때리는 것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마음을 때리는 것에 대해서는 황우 장사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체로 겪는 고통 그것도 제가 고문을 당하면서 남들 보다 더한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인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다보면 옆방에서 그런 소리가 납니다. 차라리 날 죽이라고.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은. 진짜 지옥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몸이 불에 활활 타고, 야차들이 우리의 몸을 때리고 하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마음에 고통 그것이 정말 지옥이죠. 팔다리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진 사람들,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람들, 칼에 찔린 사람, 등등 육신의 문제 있는 사람들이 속속 응급실에 들어오는데 그들에게는 금방 진단이 내려지고 처방이 이루어졌어요. 꿰매면 되고 치료해 주면 돼요. 그런데 마음에서 비롯된 지옥은 그 어떤 첨단의 의료도구로 치료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옥 이라는 것은 절대자의 품을 떠난 피조물의 불완전함 두려움 공포 불안함의 총합인 것이고, 그 지옥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기술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마음을 새 것으로 바꾸어주어야 해요. 그 두려운 마음을 원래의 마음, 새 마음으로 바꾸어주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들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을 쉬게 해주겠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스겔서나, 예레미아서에 나오는 새 언약도 새 마음에 관한 것이죠? 내가 마음 바꾸어 줄게.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왜 새 마음을 창조해 주셔야만 하는지를 잘 배우기 위해 헌 마음이 겪어야 하는 처절한 지옥을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언제부터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을 친해지게 된 것이죠? 원래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였어요. 하나님 절대 의존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품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절대 안전해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눈이 아닌 인간의 눈을 개별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부터 두려움과 공포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서늘한 날에 하나님이 강림하시죠? 아담과 하와에게. 르아흐. 심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서늘한 날에 심판을 하러 내려오신 하나님을 피해서 나무 뒤에 숨죠? 그때까지 뭐했어요? 무화가 나무 잎사귀로 치마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국입니다. 역사는 심판 받는 그 날까지 인간들의 행위로, 이 역사의 것들로,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데 급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국 심판하러 내려오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피해 나무 뒤로 숨습니다.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성경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처음 등장해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운전해보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 장악 당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입에 문 상태에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고,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당연히 두렵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도달해야할 수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옥이고 그래서 새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받은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라고 명확히 밝혀요. 물론 천상에서 우리가 받은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이렇게 우리가 받은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이미 완성해 놓은 우리의 실체가, 완료되어 있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완료가 되어 있는, 우리가 묵시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을 아는 이들이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나 됨됨이나 성숙의 정도로 우리를 스스로 평가해서 스스로 두려움과 공포 등을 덮어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직은 우리가 육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까지도,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할 때가 너무나 많아요.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반복하여 회개하고 공포 때문에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죠? 엄밀히 말해서요? 한번 따지고 들어가 보세요. 왜 하나님께 회개하세요? 진짜 하나님께 죄송해서예요? 혹시 벌 받을까봐? 왜 반성하고 뉘우치세요? 우리는 뭔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불신앙이에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죽는 날까지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을  완료하셨다는 것을 못 믿는 존재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와서 너희는 못 믿는 자야라고 하며 폭로시켜 낸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과 이 역사를 두려움과 공포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분들이, 그 두려움과 공포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되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나오는 말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어졌다 이것을 반복하죠? 이것이 한사람이에요. 예수님을 자꾸 한사람이라고 해요. 지난 시간에 아담도 표상이고 예수님도 표상이라고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을 입은 교회의 모형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교회가 어떻게 이 지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부정당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해내는가를 미리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그랬죠?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쎄메이온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보고 표적, 표적은 실체가 아니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예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표적으로써의 삶을 사셨다, 라는 의미에서 쎄메이온, 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뭐라고 불러요? 인자라고 부르죠. 그것을 파자하면 그 사람의 그 아들이예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는 그리스도 예수로 부활하시죠? 예수 그리스도로 부활하십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새 몸을 입은 새 아들, 맏아들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육을 입고 살다가 그것을 십자가에서 전부 부정당하고 맏아들들로 연합되는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씨, 자손, 아들을 그리스도로 낳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를 낳는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예수님이라는 맏아들을 낳는지 보자구요? 그것을 알려면 족보를 보면 가장 편하겠죠? 누가 낳는지를 보려면요? 사람의 아들이라면서요? 인자의 아들?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입니다. 왜 마리아의 아버지가 들어가 있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앞부분을 헬라어로 보면 카이 아우토스 엔호 히에수스 호세이 엣툰 트리아 콘탈, 이 말을 직역하면 그들도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개역 성경에서는 빠져 있어요. 왜 빠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가 마치 30세처럼, 30처럼 시작하신다. 30세이었다가 아닙니다. 30처럼 시작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엔 아르케, 저번 주에 설명한 것처럼시작, 성전의 머리가 시작된다”,  태초에, 엔 아르케, 아르케의 동사형 아르코마이가 여기에 나옵니다. 시작됐다. 예수님께서 30살에 시작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이 30은 어떤 다른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치 30처럼. 30살이었다면 예수님은 30살에 이렇게 해야 하는데, 거기에마치가 들어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그런 면에서 조금 이해가 어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뒤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었다. 카이 아우토스 엔이라고 시작을 해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의한 것이었다고 그럽니다. 이 족보의 맨 위가 하나님입니다. 그 밑에 아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쭉 내려오고, 그 안에 아담으로 비롯한 아담의 후예들, 사람들이 쭉 나열이 되고 그 다음에 사람의 아들, 그 사람의 그 아들이 맨 마지막에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들을 낳는 그런 그림들이 이 누가 복음의 족보란 말입니다. 아담이 버젓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해내셨던 것처럼 그 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삶을 살았고, 그래서 아담 밑으로 쭉 나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삶을 완결판으로 살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완료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이 인자, 예수인 것입니다.

먼저 30하면 떠오르는 구절들이 어떤 것이 있죠? 서른,

창세기 41: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이제 요셉이 구원자로서의 일을 시작하는 나이에요. 요셉은 애굽으로 열한형제들을 살려내기 위해 애굽으로 먼저 팔려간 사람이죠? 요셉이 직접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을 구하려고 하나님이 애굽으로 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애굽에서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다 연결된 것입니다. 요셉의 죽음이 나머지 형제들을 살려내는 구원의 그림이고, 그런데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본격적으로 형들을 구원을 해낼 수 있는 구원자로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이,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그 공생애의 시점이 30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생의 담고, 예수의 인생의 뜻을 요셉이 담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살게 되는 나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세상에 설명하고 증거하는 자들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 낸 것인데 그것을 몇 살에 시작했냐고 하면 30에 시작했다고 합니다.

민수기 4:1  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2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

4:3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레위 자손 중에 세 아들이 있고, 그 중에 고핫 자손이 있는데 그 자손은 다 레위의 자손들이니까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을 세워라, 뽑아라, 그러는데 몇 살 부터요? 30부터라고 그러죠. 어디서 완료돼요. 50, 50은 희년이죠? 30에서 시작해서 희년(50)을 완료해 내는 것이 제사장들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몇 살에? 30에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도 희년을 완성하는 예수의 모형입니다.

 

민수기 4:21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22 게르손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4:23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4:29 너는 므라리 자손도 그 조상의 가문과 종족에 따라 계수하되

4:30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고핫 자손과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 모두 레위의 아들들입니다. 제사장들이예요. 그들이 다 30세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왕은 어땠을까요? 선지자, 예수를 모형하는 이 역사 속에서의 아주 유명한 왕이 다윗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삼하 5: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40년 하면 생각나는 것이 광야에요. , 선지자, 제사장 모두가 30과 관계있죠? 30부터 시작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30부터 시작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 왕, 제사장, 선지자는 항상 기름 부음을 받아야 되는 것이죠? 이 세직분만 그래요. 그렇다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헬라어로 바꾸면 메시아예요. 그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서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할 때에 그가 마치 30처럼 시작했다, 30에 머리로 이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나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30, 메시아의 일을 이제 표상으로, 머리로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람들이 그 표상으로서의 예수와 같이 되더라, 이야기가 눅 3:23절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30, 마치 30처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척하고 왕, 제사장, 선지자를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 족보의 맨 위를 보세요.

 

3: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여기가 족보의 끝이예요. 헬라어로 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한 모든 이름 앞에 정관사가 다 붙어있어요. “그런데 소유격 정관사가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족보는 거꾸로 읽어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 아담의 자손 셋, 셋의 자손 에노스 이렇게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격으로 연결을 해놓았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담, 그 하나님의 셋, 그 셋의 그 에노스, 그런데 족보가 조금 이상하죠? 아벨도 빠져있고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어요. 그것은 성경이 그 이름들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이름들만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여서가 아니라.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셋은 표, 표상입니다. 조금 전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표상, 표적이다, 쎄메이온, 셋이 그 단어입니다. 그리고 에노스가드려지다입니다. 첫 줄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그 하나님이, 그 아담으로, 표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에 이야기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작이 되어 예수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을 비롯하여 예수님 위에 모든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과 동일한 표로 이 땅에 온 것이고, 그들은 모두 자기를 하나님께 받쳐지는 자기부인 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쭉 뭘 낳는데 마지막에 예수가 낳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가면 여자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낳는 족보에 성도들 모두가 낳는 것입니다. 그 족보에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옛적에 선지자들 예수를 가리키며, 예수를 낳는 삶을 사는 자들, 그 예수님의 족보 위에 기록된 모든 자들,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으로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말이고, 말씀입니다. 그것을 선지자라 그래요. 여러분이 선지자입니다. 신사도 운동에서 말하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을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아들이 삶으로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 안에 우리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표인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말씀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말씀이, 생명이 우리를 위해 죽음을 통과하시어 우리를 진리로, 말씀으로, 생명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는지를 몸소 삶으로 체휼하고 가는 것이 아들인 것이고 그  아들을 낳는 또 다른 아들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저로 말미암아 그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그 창조의 이야기를 덧붙인 것입니다.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아들이 역 창조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입니다.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그 분이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의 우편에 앉으셨다 그러죠? 이것이 아들의 완성이죠? 그 이후에는 없어요. 우편에 앉은 것이 아들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완전하신 성자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가 아니면 그 완전함의 자리에 앉지 못하는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머리라고 하고 우리를 지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들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성자 안으로 함몰되어 하나님의 백성인 아들이 완성되는 것.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을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이고, 교회가 아니면 예수님은 충만이 아닌 것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 성자의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드린 것처럼 그 분은 완전하신 분인데 교회가 그 분은 완전하지 않기로 결정해버린 것이 성자의 죽음입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로 설명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보좌 우편에 앉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진짜 아들이 완성된 것이잖아요?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그 예수라는 아들을 낳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인지 제가 구약으로 가서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와 연결해서 많이 들으세요.

 

 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맏아들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맏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단수입니다. 12지파 열둘이 예수라는 맏아들을 품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내 장자야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개판치고 살잖아요? 아들이고, 장자인데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들을 호적에서 파냈다? 아니란 말입니다. 뭘 설명한 것입니다. 스데반이광야 교회라고 하잖아요. 교회는 그렇게 뭘 설명하는 것입니다. 60만 명 다 죽었잖아요. 죽어야 산다,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12지파, 맏아들은 예수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새롭게 창조되는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만 아들로 완료 되는, 아들이 될 수 있는 그 복음의 이야기를 증거하고 설명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이야기를 하면 항상 열둘이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아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그래서 아들하면 열둘이고 열두 아들에서 시작됐습니다. 그것이 아들의 완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율법사들과 토론을 하시는 장면 기억을 하시죠? 몇 살? 12. 왜 혈루병 앓던 여인이 12, 그리고 야이로의 딸이 12살이었는지 제가 예전에 설명해드렸죠? 같이 연결해서 한번 공부해보세요! 열두 해 혈루병 앓던 여자 그 여자의 이야기가, 12살 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아들로 혼인이 하나 되는 것이니까, 아들로 연합되는 그림이란 말입니다.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부모가 도대체 아들을 무엇으로 생각하였길래 12살 먹은 아이인데 하루를 가도록 밥도 안 먹이고 찾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죠? 이것이 아들의 삶입니다. 하루가 가서 찾았는데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가 부모를 떠나 예루살렘에 남아서 율법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사흘 만에 그가 뭐라고 부르는지 보세요? 누구를?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하나님을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이 이렇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12살에 예수님이 속썩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옛 성전에 있는 땅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율법과 싸우는 예수예요. 율법주의와 인본과 싸우는 예수, 새 성전이신 하늘의 예루살렘이 옛 성전인 땅에 예루살렘을 부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지혜로 창조의 지혜로. 잠언에 보면. 그래서 12살인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 완료된 아들이란 의미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발견된 것이 사흘 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이미 여기에서 예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아들을 완성하신 이가 성전의 선생들로 대표되는 그 옛 성전을 부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이 뜬금없이 내 아버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을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 성경은 항상 교회에게 주는 글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교회 만 알아듣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이 부모에게 한 말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들으라고 예수님이 부모에게 엉뚱한 소리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모형하고 있던 신약의 교회도 역시 열둘과 관련이 있어야 하잖아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교회를 모형 하는 것이니까? 교회가 예수와 연합한 장자, 맏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맏아들,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둘 이어야 해요.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새 성전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어요. 사도는 몇 명? 12. 그래서 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12, 12지파,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고, 12실과가 (아들의 생명이라는 의미)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거기에 가면 12가지 실과가 많을 것이다. 거기서도 과일을 먹겠네, 라는 생각을 하시면 안돼요.

계시록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것이 신부예요. 우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21: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결국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완료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열둘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의 아들, 이것이 신부란 말입니다. 우리입니다.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 창세 전에. 이것이 묵시 속에 일이잖아요. 그 아들, 그것을 이 땅에서 설명해 내는 것입니다. 열둘로.

성경은 이렇게 먼지들의 하나님 아들 되기 위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항상 그 열둘 중에 한사람이 죽고 나머지가 다시 열둘로 채워져 아들이 되는 그런 형국으로 열둘이 아들이 돼요. 야곱이 열두 아들 중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죽은 자로 살아요. 아버지는 요셉을 죽은 아들로 여기면서 살아요. 그래서 나중에 나타났을 때에 깜짝 놀란 거예요. 그 기간 동안에 그 아버지가 얼마나 아팠겠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죽은 자예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런데 아들이 돌아오는데 구원자가 되어 돌아오는 거죠. 기근으로 다 죽어야 되는데, 죽은 아들이 구원자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열둘이 채워집니다. 다시 돌아와서.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이 그가 더하실 것이다. 누구로 더해요. 무엇으로 더해요. 예수로 더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죽고 그 대신에 ,다른 무엇으로 대신해 주는데  죽은 아들은 없어지고 구원자가 되어 돌아오는 그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의 죄를 고자질하는 이야기를 했죠? 팔려가기 전에. 율법의 역할입니다. 참소하는 자의 역할입니다. 참소하는 자가 뱀, 마귀란 말입니다. 요셉이 인격이 미성숙하여 형들을 자주 고자질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구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 뱀, 율법, 참소하는 자, 마귀가 되어서 요셉이 죽고 그 나머지들을 구원하는 자로, 그가 참소한 죄에서 구원하는 자로 다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열두지파에 끼지 못 하고 요셉의 두 아들( 요셉이 갖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의 이야기를 설명하죠?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야곱이 갖고 있는 내용이 이것 이였다, 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은 열두지파에 못 들어가고 두 아들이 12지파에 들어가요.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런데 이것이 뒤집어 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열둘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열두 사도들 중에서 누가 빠지죠? 유다가 빠져요. 예수님이 유다 보고 뭐라고 합니까? 마귀라고 하잖아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유다는 이스라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예수님이 유다의 자손으로 와요. 유다지파에서 온다는 말입니다. 뭔가 연관이 있겠죠? 유다가 뱀으로, 마귀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맛디아로 채워집니다. 맛디아는 여기에 외에 한 번도 안 나옵니다. 맛디아는 그냥 열둘을 채우는 그런 역할만 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열둘 나머지 하나의 일을 사도 바울이 라는 인물이 해요. 그래서 열둘이 됩니다. 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떤 지파, 베냐민지파예요.

빌립보서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두 아들이 누구입니까? 베냐민이에요. 베냐민의 이름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성경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오른손의 아들로 열둘이 완성되잖아요. 라헬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하잖아요. 라헬이 낳은 것은 베냐민과 요셉 밖에 없어요. 요셉은 죽는 자,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을 나으면서 여자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둘, 아들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베냐민이라는 단어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 진리의 아들, 보편에 앉음 이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하여 아들이 완성되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우편에 앉으셨죠? 그리고 또 어디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그를 들어올렸다, 그럽니다. 그것이 베냐민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시편의 이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이야기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을 인용해서 우편에 앉으셨다,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에 드셨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아들을 완료하는 베냐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열둘의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베냐민지파의 바울이 그 일을 완료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창세기로 가서 야곱의 그 열두 아들 속에 들어있는 구원의 비밀을 살펴드리겠습니다.

야곱의 열둘이 어떻게 베냐민으로 완성이 되는지 보세요. 르우벤은 아들을 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이 이 열둘 이름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과정이 진행이 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첫 번째 해야할 것이 아들을 보라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아들은 외적 아들입니다. 르우벤은 히브리어라하그 뜻이보다” “깨닫다벤은 벤허 ,그러면 훌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유다 벤허 그러면 훌의 자손입니다. 유다라는 뜻입니다. 아들, 성전, 아래의 것, 이런 뜻입니다. 그 아들, 아래의 것으로 오신 아들 예수를 보라, 여기서부터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로의 행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들으라, 입니다. 아래의 것으로 말씀하시는 그 말을 들으라, 입니다. 그러면 첫째와 연결하면 뭐에요? 아래로 내려오신 아래의 것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를 보고 예수를 들어라. 광야 교회에서 아래의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받은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것, 표라는 말입니다. 10계명은 그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글씨로 주셨을 것 아니에요. 시내산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그림언어 애굽어, 십계명은 애굽 말로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애굽의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에 그들이 산 것은 애굽의 것 가지고 나와서 살았잖아요.

셋째가 레위입니다. 레위는 연합, 하나 됨, 한 멍에 아래 있음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입니다. 예수를 보고 예수를 들어 예수와 연합하는, 하나가 되는. 그런데 그 예수는 누가 진 멍에를 같이 지는 멍에예요. 그것이 레위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멍에는 항상 두 마리가 같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두 마리가 같이요. 그래서 세상과 같은 멍에를 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멍에를 이쪽저쪽으로 못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방향으로 가야해요. 둘이.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멍에라는 것은 내가 지금 멍에를 메고 있으니까 너 이리 와서 같이 나의 멍에를 메라는 뜻이죠? 어디로 끌고 간다는 뜻이죠? 예수님이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로 가요. 그 멍에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데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왜 불안하고, 왜 고통스러워요? 내가 살아있어서 그래요.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와 가자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 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성전을 죽여 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쉼과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베세메스를 올라갔던 젖 나는 두 암소 생각하시면 돼요. 젖 나는 암소라는 것은 새끼를 갓 낳은 암소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새끼를 끊어버리고 말씀을 실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말해요. 누가? 예수와 같이 한 멍에지고요. 그러고는 도달해야하는 장소에 도달하면 어떻게 돼요? 이 암소를 잡아서 태워버려요.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말씀을 싣고 가는 자들은 말씀이 칼이 되어 그것 다 끊어 내로 왔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다 끊기고 젖 나는 암소가 새끼까지 끊어버리고 하나님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도륙 당해 죽습니다. 그것이 도착되면요. 그것이 멍에예요. 그것이 레위입니다.

넷째 유다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말인데 그 단어를 파자해보면 손을 펴서 아랫말로 넘겨주다, 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찬양하다입니다. 그것이 찬양하다예요. 내가 보고 듣고 예수와 연합하여 그 아들을 넘겨주는 것, 터트려버리는 것을 찬양이라고 해요.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찬양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면 찬양을 못해요. 노래를 하는 것이지.

뱀에 불과한 자신 그 유다를 살려내기 위해서 뱀이 되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오른손의 아들 그 아들로 살려내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어디 가서 유다는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 하지 마세요. 유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체를 갖고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우리가 신경 쓸 바 아닙니다.

스불론은 자발에서 나온 단어인데 그 단어는 성전에서 다툼으로 가르치다, 예요. 그렇게 해서 말이 전해져요. 찬양이 막 터져 버리면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율법으로, 은혜로 받아드리게 되고, 이것이 싸움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다툼으로 가르치다.

단은 심판입니다. 우리의 육이 이제 심판을 당해요.

갓은 무거운 짊을 내려놓다, 라는 뜻입니다.

아셀은 복이에요.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납달리는 이김, 승리. 이것이 이김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하나님과 멍에를 지고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십자가로 열심히 가는 것이 이김이고 승리이며, 복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더하다, 다른 것으로 더하다.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요셉은 열두지파에 못 들어갑니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갑니다. 그것이 요셉의 갖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흉년이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림, 흉년, 사막, 광야, 라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풍성한 열매, 풍년입니다. 그런데 역대상 5:5절에 보면 요셉은 장자다 그래요. 요셉은 장자 아닌데 장자라고 그래요. 그 장자가 빠지고, 아들이 빠지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등장하니까 이것이 아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완료하는 것.

베냐민으로 완료가 되지만 결국 구원자가 된 요셉으로 말미암아 열둘이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베냐민은 그 요셉이 갖고 있는 내용을 함유하고 있는,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늘 흉년의 이야기 뒤에 구원의 이야기가 풍년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그 열매가 열두 가지 실과입니다. 생명의 열매를 열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열둘이 바로 생명나무 실과, 아들, 영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생명나무 실과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먹고 말고 할 것이 없어요. 그 생명나무 실과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가지 실과라는 말입니다. 아들만이 생명의 열매요, 생명의 떡이에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해요. 여러분이 입으로 갖고 있는 그 아들을 삶으로 전하는 자가 된다니까요? 그 아들은 결국 어떻게 된다, 십자가 메고 죽어요. 그것이 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 하나가 나오고 마지막에 베냐민이 오른손의 아들로 열둘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그 열두 아들의 이름이 전부 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열두 아들, 예수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길을 가는 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되는 가를 설명하는 것이 열둘입니다. 이렇게 아들은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완료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입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이 두려움과 공포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 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도달하게 돼요. 그래서 무서운 것이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점차 확고하게 깨달아질 때에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요. 평화, 안식, 기쁨, 복 이것이 천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우리가 육을 입고 많이 경험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아들을 완성하시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시죠? 평강을 주시잖아요.

요한복음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주세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역할을 우리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열둘로 완성하십니다. 유다가 빠지고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예수님이 뱀, 마귀, 놋 뱀, 유다가 되셔서 죽으셨잖아요? 근데 구원자가 되어 열둘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 이 장면이요. 유다는 없는 자리란 말입니다. 여기가. 그런데 그 아들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아들에게 무엇을 주냐면 성령을 주세요. 그리고는 평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평강을 받으라가 아니라 평강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평화롭다, 둘이 하나가 되다, 등지고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둘이 꽉 끌어 앉다, 연합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그것 보다 더 깊은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열왕기상 9: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 솔로몬이라는 이름 자체가 샬롬이죠?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을 모형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 또 하나의 평강이 있어요. 평강의 왕이 평강을 완성하는 것인데, 맨 뒤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하죠? 이것은 홀 히스토리란 말이 아니라 성전 짓는 일이 완성됐다, 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가 샤람, 샬롬입니다. 신기하죠? 성전이 완성되는 그 일을 히브리사람들이 샬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평강은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에 평강의 왕에 의해 성전이 완성 되었을 때에, 그 완성에서 오는 자유와 평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샤람, 샬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부으시면서 평강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너희는 성령에 의해 완성이 된 성전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하라. 이것이 평강이다, 그러면서 성령을 확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라에. 완료가 되었으니까. 평강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래요. 그냥 완료되었으니까 하늘로 가자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할 일이 있다고 그럽니다. 평강의 왕인 평강의 완료 자인 내가 한 일을 역사 속에서 너희가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성전 짓기, 창조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7: 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107: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107: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말씀이 오셔서 행하시는 창조의 일을 여기서는 또 구원의 이야기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냈더니 구원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시편 147: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47: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47: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147:18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창조의 사역입니다. 그 말씀이라는 단어는 지혜라는 말로 혼용되어 쓰입니다.

잠언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8: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8: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8: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8: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8: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8: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8: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창조자가 되어 지혜가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물론 성전 짓는 지혜에요. 창조자의 역할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 예수님이 아들이신, 말씀이신, 지혜이신 그분이 그 선악과 따먹은 율법, 선악과를 먹은 지혜가 싸우는데서 거기서 예수님이 지혜로웠다고 말씀하시는 말이 나옵니다. 창조의 지혜를 갖고 있는 자와 선악과 따먹고 지혜로워진 자가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창조의 지혜가 이기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옛 성전을 허무시고 창조 사역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이 자신이 입으신 옛 성전이 허물어지는 십자가 사건을 먼저 겪어내시는 것입니다. 경험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악과의 지혜, 즉 율법이 되어서 죽으시는 것이고, 하늘의 지혜에 능력에 의해서 살아나시는 그림, 주님께서 몸으로 역 창조와 새 창조를 다 살아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그래서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육을 가진 예수로서 처절하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육의 죽으심이라는 말입니다. 처절하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아담의 지혜, 선악과의 지혜,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을 받는 그림입니다. 이렇게 옛 성전으로서의 예수는 처절하게,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고 새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요.

 엄밀히 말하면 예수 안에 존재하던 새 성전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다, 표상이, 표적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으로의 그 과정을 똑같이 겪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뉘 죄를 사하면 그 죄가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를 올바로 깨닫고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되고 입으로 전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편지요, 말씀), 그 때에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듣고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던졌을 때에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이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것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잖아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돼요. 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라고도 하고 하나님을 보좌 우편에 우리를 앉히셨다, 그래요. 우리가 벌써 오른손의 아들 완전한 성전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한사람 예수로 그 사람의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을 반드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외모나 됨됨이나 삶의 열매나 헌신의 모양 등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거나 정죄해서 스스로 두려움과 공포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다 이루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증거 하나 내어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그 사람의 그 아들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그 인자 안에 누구 있다). 나 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고카타 바이노”, 하늘에 다시 올라가는 그들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나바임,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우리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분이 죽은  죽음을 반드시 죽어야 돼요. 놋 뱀의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그랬죠?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거듭나다가 아노덴, 위로부터 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온 자는 반드시 올라가게 되는데 놋 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다, 그러십니다. 위로부터 난, 거듭난 우리가 바로 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됨됨이나, 행위 이런 것 같고 존경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지적할 것도 없어요. 모든 것들은 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각자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이 고백 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지 못 했다면, 진짜 아들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셔야 돼요? 그러는 사람은 구원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공포를 겪어 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지옥이고, 그것을 지옥의 백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완료하실 수밖에 없는 그 하나님 나라를 진심으로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미 하늘에 완료가 되어 있으니 평강하라 평강이다 십자가에서 육을 삭제 당하신 예수께서 평강을 이루시고 우리에게도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니 평강하라 제발 그 육 좀 바라보지마라 그 육신 좀 바라보지마라 평강이다 완료 됐다 성전은 이미 끝났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차압당하고 세상에서 죽어가는 것이 평강으로 가는 길임을 잊지 마시고, 두려움 공포 불안 부끄러움 등에서 자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