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60 보좌와 제단 (2)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2

로마서 60 

보좌와 제단 (2)

 

본문 롬 518- 21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우 리는 지난주에 성도의 목적지는 단심가를 멋지게 불러내는 용사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하여가만 열심히 불러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음자리의 실존을 잘 깨닫고 우리를 향해 단심가를 애절하게 불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불러주신 거지 우리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님에 우리의 실체가 폭로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확인하며 찬송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우리 성도 안에는 보좌와 제단의 두 현실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성도의 의, 영생, 거룩, 구원, 하나님나라, 안식, 평강, 참 성전 등은 한 사람의 순종하심, 한 사람의 행함, 은혜의 왕 노릇, 그런 것에 의해서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으로Irresistible grace, Unconditional Election, 불가항력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성도 안으로 Intrusion( 뚫고), 관입되어 들어오는 것이지 성도 각각의 열심과 노력의 결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한 몸이에요. 그래서 한 지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한 몸 이라는 건 각 지체의 개별적 자아가 머리를 향해 이렇게 몰수 되는 거예요. 차압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몸이에요. 그래서 지체는 내 개별적 자아를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게 교회란 말에요. 그걸 여러분이 이 땅에서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올바로 인식하고 가는 거란 말에요. 따라서 그 몸에서 떨어져 나와 개별적 자아를 챙기겠다고 나서는 걸 뭐라 그런다고 했어요? , 그거 과녁이 벗어났다. 하마르티아. 그게 죄란 말에요. 그죠? 그걸 죄라고 하고 그렇게 나뉘어서 떨어진 가지들은 모아서 어떻게 된다? 불살라 버린다, 가 지옥이란 말에요. 지난 수요일에 공부한 간음과 이혼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라고 했죠? 신랑과 한 몸이어야 하는 신랑과 신부가, 이 신부가 신랑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내 개별적 자아를 구축하고 바벨탑도 쌓고 선악과 먹고 이게 다 간음이며 이혼인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그 간음과 이혼은 전부 이런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지 뭐, 여기 간음한 사람, 이혼한 사람은 예배당에 절대 오면 안 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에요. 그렇다고 해서 된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수요일, 주일을 제가 일부러 이렇게 연결시켜서 가니까 될 수 있으면 수요일에도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나오셔야 돼요. 여러분이 한국에서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렇게 나와서 함께 예배하는 것과 집에서 아무리 동영상이나 동영상 할아버지를 틀어놓고 예배를 해도 달라요. 그리고 이해가, 이해의 정도가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다른 약속 같은 것들은 다 다른 날로 미루시고 수요일에도 많이들 오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한 몸으로 지어진 신랑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서 개별적 자아를 챙기는 행위가 바로 영적 간음이며 영적 이혼 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한 몸을 지켜야 되는 거죠. 그게 로마서 5장 말미에 한 사람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창조주는 한 분, 하나님이시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거다. 이게 성경과 역사가 증명해야 하는 유일한 진리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성경전체와 역사전체는 창세기 11절을 설명하는 거다, 라고 말씀 드린 거예요.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선악과 따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창조주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너희의 그 처음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하나님 깨만 찬송하는 자가 되어라 그렇게 살아라, 이게 바로 성도가 역사와 인생 속에서 반드시 자각하고 확증하고 가야하는 내용인 거란 말에요.

그렇게 자신의 처음자리를 올바로 인식한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보물이신 하나님의 그 영광이 충만하게 담기는 그런 형국이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 백성인 거고, 우리보고 거룩한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백성인 거고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니까. 성전인 거예요. 다 똑같은 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역사 속 인생은 이미 구원이 완료가 된 묵시 속 현실인 보좌의 그 경험과 (이건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죠?) 그 보좌의 경험과 역사 속 현실인 제단의 그 처절한 경험( 이건 육으로 우리가 감지하는 거기 때문에 그걸 고난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바로 그러한 경험이 공존하는, 쉬운 말로 승리와 부인이 동시에 경험되는 비밀스러운 체험 장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으로 가서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 나라인 그 교회, 역사 속 성도, 그게 교회잖아요. 하나님 나라잖아요. 우리가, 그죠? 그래서 바울이 교회들에게 라고 하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란 말에요. 이 건물이 교회 아니잖아요, 그죠? 그 교회, 역사 속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부터 확인을 하고 연역적 해설 방법으로 제가 그 보좌와 제단의 현실을 설명해볼게요. 계시록 2122절 보십쇼.

 

21: 22- 성안의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1 : 22-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지금 이 장면은 묵시 속에 완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신부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즉 교회, 묵시 속에 완료 되어 있는 천상의 교회를 모형 하는 거죠? 계시록은 천상의 교회와 이 로컬 처치, 지상의 교회가 계속 맞물려서 가잖아요. 그래서 여기는 다 망하고 여기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없다 그러죠? 그 안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시고 어린 양이신 분이래요. 하나님이시며 어린 양이신 분.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데 그 영광을 뿜어내는 등은 역시 어린 양이래요. 그죠?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예요. 그러니까 천상의 교회는 피조물의 영광이나 가치나 자랑이 다 부정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어린 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나라 안 가득 충만하게 채워지는 그런 성전인 거예요. 이렇게 묵시 속 천상의 성전은 어린 양이 주인이고, 어린 양에 의해 완료되며, 어린 양이라는 정체성, 그 하나님 나라, 성전의 정체성 자체가 어린 양이예요. 제물이, 타인을 위해 내가, 죽는 거예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님의 처소란 말에요. 성전이. 그런데 그 성전은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헐림, 부서짐을 통과하여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돼요. 요한복음 219절 보세요.

2 :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 :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넌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 :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참 성전이신 예수가 티끌들의 그 성전 입성을 위해서 먼저 헐리죠? 옛 성전이 되어서 헐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어라. 실지로 그 옛 성전이 헐리지만 예수님이라는 성전도 헐리죠? 예수님이 옛 성전이 되어서 헐리고 다시 새 성전으로 부활하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티끌들에게 예수라는 성전이 헐려서 그 안에서 물과 피가 흘러 그 티끌들과 이기어져서 (수요일에 제가 간단하게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드렸는데), 존재가 되는 거예요. 티끌은 성령, 생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그냥 내피쉬예요.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요. 움직이고 생각한다고 해도 살아있는 게 아녜요. 짐승들이 그래요. 거기에 생기가 부어져야 살아있는 거죠? 그런데 그 생기를 르아흐. 성령이라고 하고 그 성령은 요한복음에서 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물이 부어지지 않으면 티끌은 그냥 티끌. 먼지예요. 더스트, 아파르란 말에요. 그러니까 예수라는 그 성전이 헐리고 거기서 물과 피가 흘러 티끌들과 이겨져야 그들이 성전으로 조물이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지는 창조의 메카니즘 이예요. 이것이요.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없음 들의 존재됨은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바로 그 참석 전이신 어린 양 예수의 그 역사 속삶을, 그 성전이신 예수님의 역사 속삶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여 살아야 돼요. ? 우리가 성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316절 보세요.

고전 3 :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3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건 선언이에요. 명령이 아니라. 너희는 거룩하다, 지 거룩해져라, 가 아니잖아요.

 

3 :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 :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3 ;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가 성전 이예요. 하나님의 집이란 말에요. 우리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으로 이 땅에 오신, 성령을 담고 하나님이 시키는 것만 하셨던 그 예수, 참 성전인 예수가 헐려서 죽어야할 자들을 살려낸 것처럼 여러분이 헐림으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아들중의 어떤 이들이 또 살아나는 것, 이걸 전도라고 하고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고지 론이니 뭐니 이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거죠. 높은 데 올라가서 너희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을 자랑해라? 이건 복음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란 말에요. 그런데 오늘날까지 청년들이 여기에 선동되어서 전부 거기에 광분하다보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예요. 한국교회가. 서로 경쟁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싸움질이나 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가 고지에 올라가겠다는 거죠? ‘.

천만의 말씀, 교회는 선구자의 피를 타고 여기까지 온 거지 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여기까지 이렇게 유지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헐려야할 성전이며 새로 지어지게 될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 분도 역시 성도들처럼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서 성령이 시키는 일만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다 그러죠. 본인이 직접. 하나님만 담은 거예요. 내 존재는 부정됐어요. 어디까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부정됐다니까요. 존재 자체를 몰수해 가버리셨어요.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존재를.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끌려가신 거예요. 참 성전이요. 그런데 그 예수 안의 성령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어요. 이게 성령 받은 성전인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병 걸리고 망하고 애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이런 이야기가 아녜요. 다 누릴 수 있어요. 그런 거. 그런데 그 와중에 여러분의 이 역사 인식,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인식이 그렇게 바뀐다는 뜻이에요. 아니구나, 이거, 여기는 머리 두고 눈 두고 그렇게 살 곳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는 거지 전부 예수 믿으면 망하고 병에 걸리고 뭐 그런다는 얘기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괜히 돈 많고 건강한 사람들이 여기 와갖고 주눅 들어서,, 그러지 마세요. 아니, 돈 있으면 누리면서 사세요.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자랑이 아니라는 거 아시면 되는 거예요. 괜히 좋은 차타고 와서 저기다 대고 그러지 마세요. 남들이 긁고 그러니까 주차장에 대고 타고 다니세요. 괜찮아요. 그리고 그런 거 보고 또 부러워하는 인간은 또 뭐냐고요? 서로 안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갖고 신앙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자꾸 판단하려고 하고 그러는 자체가 아직 너무 어린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그게 뭐예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건요.

 

, 옛 성전이 죽고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새 성전으로의 탄생을 예수님께서 먼저 경험하신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의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그랬죠?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현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늘 존재의 속성 이예요. 그것 자체가. 나라는 존재를 비워서 너를 살려 내고 채워 내는 게 하나님의 속성 이예요. 그게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이거든요. 그래서 하늘 존재는 모두 그렇게 살게 돼요. 하나님 라에서는 모두가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 왕이면, 다 왕관 쓰고 있으면 누가 신하이고 누가 백성이냐고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존재가 자기를 비워서 나를 섬겨주는 곳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다 왕인 거예요. 거기에 불행과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은 이 땅에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게 내가 잘 사는 것 같고 유익인 거 같지만 그래서 지옥인 거예요. 그걸 뒤집어 엎어버리는 게 역창조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반드시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고지꼭대기에 올라가서 영향력을 미치라고 하니,,.

대통령이 장로인데 무슨 영향력을 미쳤습니까? 지금요.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더 욕하고 있잖아요. (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서울까지 와서. 내가 여기가 서울이란 걸 깜빡했네요. 미국에서라면 못 잡으러 오니까,,)

 

,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비워서 너를 살려내고 채워내는 하나님의 그 속성을 십자가가 보여주는 거고 그 십자가라는 하늘 존재의 속성을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모형처럼 그냥 살다 가신 거예요. 나가 부인되고 네가 살아나는데 그 모든 걸 감싸 안고 주관하고 운전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잖아요. 이게 십자가였잖아요. 우리의 힘으로는 때려 죽여도 그 삶 못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 네 삶을 주관하겠다고 하는데 선악과 따먹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걸 죄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건 아니다, 고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역사지 따른 거 없어요. 그래서 묵시 속에는 이미 보좌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제단의 제물로 바쳐지는 그런 경험을 하시는 거고 그런 그림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며요 우리가. 하늘 왕들이 예수 안에서 왕이 된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이요. 하늘 왕들이 이 세상에서, 보좌에 앉은 하늘 왕들이 이 세상에서, 제단에서 어떻게 죽어야 되는지를 우리는 체휼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이 모양인 거예요. 하나님이 마치 나만 미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잘 가는 거예요.

 

그러한 하늘 백성들의 속성과 지나야할 역사 속 과정인 그 보좌와 제단의 이중적 현실은 성경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었어요.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짚어드릴게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하나님나라, 성전이라고 하죠?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에요. 그러면 최초의 성전은 어디일까요? 아무것도 없었던 창세전의 성전? 어디예요? 하나님 자신이에요.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하나님만 계시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그 안에 있어요. 성전은 누구? 하나님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시간과 공간으로 이렇게 관입되어 들어온 걸 천지창조라고 해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와서 창조를 시작하셨단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 성전의 모형으로 이 역사와 공간을, 우주를 창조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우리가 알아먹기 쉽게 또 작은 성전을 하늘의 식양대로 짓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최초의 성육신은 십자가가 아니라 천지창조 때 이미 일어난 거라고 말씀 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시간과, 공간속으로, 우주 안으로, 제한적인 속으로 뚫고 들어와 버렸다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시간을 여시고 이제 창조를 시작하시죠. 그리고는 그 모형으로서의 성전을 보시고, 다른 말로 척량하고 예요. 보시고 감리를 한 다음에 감리 후기를 뭐라 그래요? 좋았더라!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혼돈과 공허는 Formless, 콘텐츠가 없는 것, 그죠? 아예 내용도 없고 FormStructure도 없는 혼돈과 공허위에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성전이 창조가 되고 하나님이 보시고, 감리하시고, 척량하시고 좋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하나님 홀로 완성하신 성전이어야 감리에서 합격하는 거예요. 좋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안 들어가죠? 이게 에스겔서란 말에요. 옛 성전은 다 때려 부수어 버리고 하나님이 치수 주고 식양 주고 고대로 만들어라 하고 척량까지 하신 다음에 영광이 동에서부터 들어가요. 저주의 자리, 가인이 쫓겨난 자리,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자리, 이스라엘이 쫓겨난 자리 저주의 자리가 동쪽이죠? 동쪽으로 쫓겨난 단말에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저주 받아서 간 거예요. 동쪽으로 가서 서쪽에 지성소가 있단 말에요. 서쪽으로 들어가요. 그래서 성전의 문이 다 동쪽으로 나있는 거예요. 동편으로, 에덴의 문도 동쪽에 나있단 말에요.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그 치수대로 지어진 성전으로 거기로만 들어가요. 그런데 그 성전이 누구다? 우리다. 그러니까 지난 주 수요일 설교를 안 듣고 온 분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요.

 

리가 성전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은혜로 지어진 여러분, 그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 맞아, 은혜로 지어지지 않으면 여기에 하나님이 절대 거할 수 없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이 나구나이거 알고 가는 게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여기서 훌륭한 인격, 훌륭한 성품 뭐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 게 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완료된 성전, 이 성전이 왜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씀으로만, 창조의 능력으로만 우리 성전이 지어져야 되는지를 하나하나 깨달아 알아 가는 걸 지어져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성화라니까요. 여러분이 변화되어 가는 게 아니라. 아니, 우리 남편은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나이 들고 힘 빠지면 다 그렇게 변해요. 그러니까 그런 변화는 타 종교인들이 절대 못하는 변화여야 하나님이 준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런 변화는 타 종교인들이 더 잘한단 말에요.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인이라는, 성도라는 사람들의 성화를 그렇게만 정의하느냐고요. 이 바보들은. 불교인들이 더 잘하는 것을. 그걸 Sanctification 이라고 해요? 하나님을 알아야 해요, 은혜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앞에 항복하는 거예요. 선악과 이제 안 먹을게요. 먹지 말라 그러면 안 먹을게요. 먹으라는 것만 먹을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시간을 여시고 창조를 하시는데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감리후기, 결과가 딱 떨어지자마자 안식이 오죠? 칠 일째 안식, 안식이라는 단어 Sabbath 가 뭐라 그랬어요? 존재가 제자리에 앉는 것. 제자리에 앉아서 각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 이게 안식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우를 받는 게 하나님의 안식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자기가 지어진 목적, 찬송이잖아요. 에베소서 1, 하나님을 찬송하는 게 안식이에요. 우리의 안식.

 

그리고 그 상태를 라고 하는 거예요. 그 관계를. ‘’. 그게 깨진 게 불의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 안식으로 딱 끝나는 거죠. 역사는 그렇게 없음에서 있음을 존재하게 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원래 없음이었던 피조물의 정체를 확증함과 동시에 겸허하게 하는 그런 모델하우스에 불과한 거예요. 모델하우스는 실제 건물이 지어지면 헐리는 거예요. 그래서 혼돈과 공허뿐인 없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관입이 되어 창조가 일어나는 거고, 뭐가 있으면 안돼요. 재료가 있으면 안돼요, 그 창조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그런 감리평가를 받게 되는 거고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 능력으로만 지어졌으니까. ’좋다! ‘ ’토브‘. 그렇게 하나님 홀로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은 은혜의 나라에 하나님이 안식으로 거하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천지창조가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 또한 모형이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해도 없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옛 하늘과 옛 하늘에 속한 모든 건 다 사라져요. 다 사라져요.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전척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척량 현장, 감리현장. 이렇게 명명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내가 내 식으로 지은 그 성전에만 내 영광을 둘 거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확증되는 장이 바로 역사란 말에요. 너희가 아무리 멋지게 지어봐라 내가 그 안에 들어가나. 역사 안의 인생들은 독자적인 건축자들이 되어서 열심히 자기들의 성전을 짓고 있고 하나님은 홀로 은혜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성전을 창조하세요. 그리고는 역사 내내 인간들의 그 인본 적 성전을 부정하고 부수세요. 선악과 먹은 선악지식, 선악체계에서 나온 성전이니까. 이걸 부수고 부정하셔야 돼요. 그리고는 결국 그들의 바벨탑을 멸망으로 종결하시고 하나님의 성전만 오롯이 남기는 거예요. 건축자들은 아들이라는 모퉁이 돌을 받아들이지 않고 열심히 포도원 밖으로 집어 던지죠? ? 우리도 할 수 있다, 예요. 선악과 먹은 아담들이니까. 할 수 있다, 왜 우리에게 저 모퉁이 돌이 필요해? 왜 저 돌을 기준으로 해서만 살아야 돼? , 저거 던져! 우리도 할 수 있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예요. 누구? 예수. 그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하나님 홀로 지으시는 게 하나님의 교회란 말에요. 그걸 여러분이 배워가는 거예요. 우매한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감지하지 못해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성전이 다 하나님의 척량에 미달 이예요. 불합격입니다. 하나님의 척량 앞에서는 그 아무리 멋져 보이는 도덕, 윤리, 율법, 선행, 구제, 종교행위 등등의 건축 재료도 다 불량재료예요. 불량 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은 불량 포테이토칩입니다. 다 불량재료예요. 은혜만이 진짜재료예요. 그러한 불량재료들로 지어진 인간의 성전은 하나님의 감리 후에 파괴되어야 하는 불량 건축물일 뿐입니다. 다리를 만들어 놓고 감리했더니 곧 무너질 다리예요. 그럼 부셔야죠. 그게 모래위에 지은 집인 거예요. 사상누각 이예요. 와디에다 지은 건 겉으로 보기엔 멋져 보이죠? 우기가 되면 그리로 빗물이 흐르거든요. 그게 모래예요. ‘와디라는 단어는. 평소에는. 건기 때는 그리로 마차가 다니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물이 흐르던 곳이라 길이 되어 있단 말에요. 그래서 야, 여기 단단하니까 여기에다 집 지을까? 비 오면? 창수가 나면 그리로 물이 흘러서 홀랑 날아가요. 겉으로 보기엔 멋지지만 재료가 달랐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야, 참 좋다! 라는 그러한 평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홀로 지으신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라는 재료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뿐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 영광 이것으로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이 역사라는 인간의 성전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이 바로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성전인 거예요. 그 안에는 여러분의 몸도 들어가 있어요. 그걸 사도 바울이 옛 사람이라고 하죠? 그거예요.

 

그렇게 성도는 묵시 속에 은혜로 완료되어 있는 보좌의 현실을 언약으로 체휼하게 됨과 동시에 제단에서 죽어야 하는 역사 속의 그 제물의 현실을 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면서 그 하늘 백성의 탄생 원리를 자각하고 인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나는 없는 자입니다. 이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어 놓는 모든 역사 속 성전 짓기의 수고와 열심히 부정당하는 그런 축복, 그런 축복 속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해놨더니 공은 딴 사람에게 돌아가, 복 받은 거예요. 그걸 여러분이 챙겨 가지면 여러분은 독배를 마시는 거와 똑같아요. 인간은 쇠하고 하나님의 열심만이 흥하는 그런 삶이 축복받은 삶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그게 성취돼요. 그건 약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반드시, 여러분은 허물어지게 되어있어요.

 

에스겔서 4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며 성전척량을 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지 25년 만에. 그리고 성전척량의 숫자가 전부 2525의 배수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확정되어 변개될 수 없는 약속을 이건 약속한 그 때에 반드시 이루어 질 거야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그 절반의 숫자로 표기를 해요. 그러니까 2550년째에 이루어 질 어떤 약속을 확증하는 숫자죠? 그런데 성전이 25로 도배가 되어있단 말에요. 척량을 해봤더니. 50하면 생각나는 게 뭐가 있어요?

 

희년이에요. 안식년이 7번 지나고 그 다음해에 모든 노예들이 다 풀려나고 모든 노예의 빚이 탕감되는. 자유의 해, 희년. 그게 안식이고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그게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그러나 노예가 열심히 노력해서 희년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그냥 법으로 정해진 때가 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았던 풀려나는 거예요. 나쁜 종, 좋은 종, 많이 빚진 자, 적게 빚진 자 다 풀려나는 게 하나님 나라란 말에요. 그들의 어떤 스펙을 보고 차등 있게 그 나라를 주고 누리게 해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희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건 내가 반드시 이루어낸다. 그게 성전이다. 그래서 25년째에 약속을 주시는 거예요. 환상으로. 그리고는 이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완료되죠? 그리고 거기에서 척량이 다시 한 번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전을 치수대로 만들려고 애쓰고 이러는 것 보면 참,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여기저기 치수 다 달라요. 그럼 그걸 그대로 만들어서 뭘 어떻게 할 거예요?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옛날 모세의 성전에 갖다 놔도 뭔지 못 알아먹어요.

그러지 않아요? 여러분이 유럽 같은데 여행가서 무슨 유적 같은 걸 볼 때, , 경치 좋다. 이러고 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거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르잖아요. 그죠? 치수가 이런 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알고 있는 우리에게나 감동적인 거지. , 25가 그런 거야? 열둘이 그런 거야? 이렇게. 50이 그런 거야?

 

그렇게 성전건축의 치수는 반드시 희년, 50,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이뤄진다. 의 반, 25 여야 돼요. 그래서 에스겔서에서의 성전은 25, 50, 100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완성된 성전은 마치 지성소처럼 정육면체로 그려져 있죠. 왜냐하면 어디를 재도 똑같은 은혜여야 되기 때문에. 여기에 뭐가 보내지면 안 되는 거니까. 비뚤어지니까. 지성소가 왜 정육면체인지 아세요? 다 척량해서 은혜여야 돼요. 하나님 나라니까. 은혜의 보좌. 성전은 은혜, 똑같은 은혜로 지어져야 정육면체예요. 그 은혜의 성전건축, 희년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예수, 아들에 의해서만 지어져야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411절 보세요.

 

4 : 1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 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고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서 61장의 내용이죠? 주의 은혜의 해가 뭐예요? 희년, 그 희년을 내가 완성하러 왔다, 그러죠? 내가 왔으니 그건 이루어 진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죽이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에스겔서의 그 새 성전 척량 숫자가 전부 2550 인거예요. 희년, 아들이 완성하시는 희년, 그건 반드시 이루어진다. 예루살렘아 헌 성전이 무너진 곳에 새 성전이, 이 새 예루살렘이 성자 예수에 의해서 반드시 서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에스겔서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게 될 새 성전인 교회는 예수가 홀로 시작하셔서 홀로 완성하시는 성전이기에 (우리가 수요예배 때 찾아 본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성전은 열둘, 열둘, 열둘, 열둘의 제곱 백 사십사, , , 이렇게 가는 거예요. 제곱은 항상 완성도의 깊이. 정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의 세제곱 천은 더욱더 완벽한 완성이라는 거예요. 십이의 제곱 백 사십사는 반드시 완성될 것. 그리고 이미 완료된 것. 이런 걸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완성될 것, 그리고 이미 완성되어져 있는 것, 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십사만 사천이지 그만큼만 구원 받는다는 게 아녜요. 여러분.

 

그런데 그 은혜라는 식양과 치수와 모양대로 지어지지 않은 인간의 성전에는 절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시지 않아요.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율법의 성전, 옛 성전,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려요. 율법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할 수가 없어요. 떠나가야 돼요. ? 은혜가 거할 것이 없으니까.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 선악과 따먹고 내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겠다, 가 율법이죠? 요건 선한 것, 요건 악한 것, 그러니까 요건 해야 되고, 요건 안 해야 되고. 이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리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에게서.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그런 이야기란 말에요. 시편 13113절 보세요.

131: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 이러라

 

여기서 시온이 바로 여호와의 영광이 거할 성전인 교회를 가리키는 거죠?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우리들이 이른 곳이 어디다? ‘시온’. 장자들의 총회. 교회, 다 같은 말인 거예요. 시온. 시온을 택해서 내 영광을 영원히 거기에다 둘 거야. 이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흘러넘치려면 내 것이 거기에 요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안돼요. 하나님의 영광이 완벽하게 들어가야 하늘 백성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거처를 삼다, 라고 번역이 된 모사브’, 라는 단어가 보좌에 앉다, 라는 단어이고, 14절에 그 쉴 곳’, 이 단어가 안식이라는 뜻 이예요. 창세기에 그 단어들이 복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보좌이며 거처이며 안식인 거예요. 당신의 것을 비워내시면서 백성들에게 생명과 복을 생수처럼 부으시는 그 천상의 십자가 거기가 하나님 나라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피조물은 완전히 없음 이예요. 먼지인데, 하나님의 생명력이, 하나님의 것이 계속 이렇게 부어져서 하나님이 비워지는 거잖아요.

그걸 인간이 이 제한된 이성이 던지는 말로 손해, 라고 하는 거예요. 비워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손해볼 수 없는 분이지만 없음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력이 폭포수처럼 생수로 부어져서 이 없음인 자들이 살아나는 데가 하나님 나라죠? 그걸 십자가가 모형으로 보여준 거라니까요.

 

예수라는, 하나님에게서 물과 피가 계속 부어져서 죽어야 할 이 티끌들이, 하나님을 죽인 원수들이 살아나는 게 하나님 나라다, 는 걸 십자가가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란 말에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의 존재양식인 거예요, 그것이. 우리는 그렇게 될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안식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척량 자가 딱 들이닥칠 때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올 수 있어요? 은혜로 서 있어야 돼요. 그 은혜로 서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이 은혜를 가르치는 데에 실패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의 기를 살려주려고 하다보니까. 그리고 교회의 몸집을 키우려고 하다보니까 은혜를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의 자존심만 높여 주게 된 거죠. 그리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다 울고는 가는데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감동은 받는데 복음에 의해 감동 받는 게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심리학적 기술에 의해 감동 받아요.

 

창세기로 가서 하나님의 척량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한 번 보고 가죠, 창세기 131

1 : 31- 하나님이 그 지은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보다, 척량 이예요.

여섯째 날까지의 모든 창조가 없음의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었어요. 혼돈과 공허예요. 말씀으로 창조되니까 하나님이 그걸 보고, 척량한 거죠. 봤단 말에요. 척량하고 좋다! 그리고 안식으로 끝난단 말에요. 에스겔서에 가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치수와 식양대로 지어진 새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이시는 거예요. 에스겔을 인자야, 인자야 라고 부르죠? 예수의 모형 이예요. 보이시면서 이걸 전하라 그래요. 이거 본 걸 전하라 그래요. 에스겔서 491절 보세요.

 

40 :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이 이 상중에 날러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의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나는 사람 하나가 손에 삼 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 계시록에선 이게 누구예요 예수 예요. 척량하시는 분)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내 마음을 생각할 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려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보다, 보다, 보다! ‘이게 창세기에 보시기에‘,’척량똑같은 단어예요. 보고!, 척량하고! 이걸 그대로 전해라. 이걸 전도라고 해요. 너희는 마른 뼈, 먼지 풀풀 나는 골짜기의 마른 뼈였는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생기를 부어 군대가 된 거지 너희가 뭐가 괜찮은 티끌이어서가 아니야. 그걸 전해라. 여기 와서 이렇게 어려운 거 듣고 앉아있다고 괜찮아서?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셨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내 자 인식은 항상 그렇게 없음의 자리여야 돼요. 그렇게 하나님이 보신 그 은혜의 성전을 성도가 같이 보는 거예요. 그게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아, 이게 은혜의 성전이구나. 그래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간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이 진짜인 거구나. 이걸 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전하는 거예요. , 여러분이 수십년 신앙생활 했는데 지금 여러분의 자인식이 그래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맞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내가 걔 보다는 나으니까 이 정도니. 이렇고 계세요? 출애굽기 3942절 보세요.

 

39 : 42- (성막도 마찬가지예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명하신 대로 지었어요. 은혜로 지어진 거죠?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또 나와요. “”. 똑같은 것. 척량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모세는 누구의 모형이라? In Moses, 모세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모형이잖아요. ‘나와 같은 선지자의 모형이니까. 보고 맞네! 은혜로 지어졌네. 그리고 그거에 복이 부어지고. 그런데 그 성전 척량의 내용이 25, 50, 희년. 열둘, 백 사십사, 아들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성전은 아들에 의해 지어진 아들의 성전. 그리고 그 안에 무조건 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끌어당겨진 은혜의 아들들. 양자들. 그게 하나님 나라 성전의 실체라는 거예요. 그래서 25, 50, 열둘, 백 사십사, , 이런 게 나오는 거예요. 그건 잊어버려도 돼요. 은혜만 기억하시면 돼요.

 

자 그래서 인본주의나 율법주의로 끊임없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그 기독교 속에서 참 복음, 즉 은혜의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이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요 사람들이 기가 사는 게 아니라 그 동안 내가 내 놓고 쌓았던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래서 여기가 통곡의 현장이 되는 거지. 요새는 울고도 자랑하더라고요. 너는 왜 눈물이 안 나오디? 이러면서. 나만 감동받았나봐? 이러면서. 그러니까 설교라는 건 그렇게 하나님이 홀로 완성하신 은혜의 성전 안으로 함몰시키는 것이어야지 듣는 사람들의 기가 더욱더 살아나는 그런 설교여선 안 돼요. 여러분이 나가면서 그래 한 번 싸워볼거야. 이러면 안 돼요. 누구랑 싸울 건데요?

 

하나님이 철장을 들고 공격하는 대상은 나라니까요. 내 안의 그 마귀 적 속성. 엉뚱한데 가서 자꾸 싸우니까 그 진짜 싸우려면 저 이단종파 그런데 다서 한 번 목숨 걸로 싸워보던가요. 박 옥,, 뭐 이거. 아니면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이단. 괜히 엉뚱한 데 가서는 뭐, 서울서머나 교회가 꼭 있어야 돼요? 이런 거 하지 말고. 이단들에게 가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왜 우리 웹싸이트에 들어와서 지랄들을 떠느냐고요? 아이, 거기 가서 먼저 싸우고 오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앞장서서 가겠다는데 왜 우리 보고 뭐라 그러느냐고요? 말을,, 언어 순화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성질이 이렇게 그냥.. 안 죽어요. 인간은 이렇게 불가능 한 거예요. 에스겔서 4310절 보세요.

 

43 : 10- ( 그 은혜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인자야 너는 이 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자기들의 꼬락서니를 볼 수 있게 이것 보여줘라. 그러는 거예요. 반드시 이걸 올바른 눈으로 보는 자들은 자기들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이게 복음 이예요. 여러분. 본론은 지금부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치수로, 하나님의 식양으로 새로 완성하신 새 성전을 척량하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지성소가 있는 그 성전과 번제 단이 정확하게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보좌가 있는 지성소와 제물이 도륙당해 죽는 번제 단이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니까요. 번제 단이 성전의 축소판 이예요. 에스겔서 4047절 보세요.

 

40 :47-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장이 일백 척이요 너비는 일백 척이라 네모반듯하며 제단은 전 앞에 있더라

 

제단과 전이 서로 마주보면서 성전을 완성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에요. 여기에서 뜰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층이라는 단아로도 쓰이는 단어예요. , 뜰 같은 단어예요. 역대하 1장에도 나오는 단어인데 에스겔서 43장에 보면 번제 단을 측량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번제 단이 3층으로 되어 있어요. 번제단도. 성전도 바깥뜰, 안뜰 성전 건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 단 아래층 위층 번제 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전은 동쪽으로부터 계단으로 이어져서 지성소까지 연결이 되는데 번제 단에도 똑같이 그런 계단이 나있어요. 그 층계는 지성소에서 출발해서 바깥으로 내려가는 형국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번제단의 층계도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에요. 그 층계는 인간이 만들던 바벨탑의 모습을 정반대로 그려놓은 거예요. 바벨탑의 층계입니다. 그게 요. 바벨탑이 층계라고요. 바벨탑의 층계는 땅에 뿌리를 두고 여기서부터 위로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누가? 인간이. 이걸 보고 인본주의라 그래요.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그 층계 아니고 사닥다리 말씀하시죠? 요한복음 2장에서. 내 위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내 위로. 땅에 안 닿아요. 그리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층계에요. 그게. 이게 성전의 층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층계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우리가 신을 찾아 가겠다가 다른 종교이고, 하늘에서 계단이 내려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기독교인 거예요. 그래서 성전과 번제 단에 그 층계가 전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만들어져 있는 거란 말입니다. 층계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위로 층계가 나있는 거예요. 번제단 위에서 제물의 피가 흐르죠? 당연하죠. 죽으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흐르고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흥건하게 뿌려져야 돼요. 똑같죠?

 

그 피는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이죠? 물론 모형이에요. 히브리서에 나오죠? 어떻게 죽은 짐승의 피가 하나님을 살리니? 죄를 용서하니? 그건 모형이다. 그러잖아요. 번제 단에 뿌려지는 피도 죄를 사하는 모형으로서의 제물의 피고, 지성소에서 뿌려지는 (민족전체의 죄를 대속하는 거니까 그죠?)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살려내는 생명수로서의 피란 말에요. 그 새 성전에서 흐르게 되는 그 피, 그래서 죽어야할 자들이 소성하여 살아나는 그 피를 에스겔이 어떻게 묘사하는지 한 번 보세요.

 

47 :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성전이에요. 새 성전이에요. 여기. 은혜로 지어진 새 성전. 여호와의 영광이 돌아온 그 성전. 절대 이제 다시는 안 떠나는 그 성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그 성전. 그래서 열면 닫을 자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다. 하나님이 나갔는데 그거 닫아서 못 나가게 못한다는 뜻이에요. 닫으면 열 자가 없다, 하나님이 들어오면 안 나가신다는 말이에요. 그 전.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차있는 그 전. 완성된 묵시 속 하나님 나라. 성전. 그런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흘러요. 저주 받아 죽어야할 곳으로 흐르는 거예요.

 

47 :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47 : 3- 그 사람이 손에 죽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7 : 4- 다시 일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47 : 5- 다시 일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47 :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47 : 7-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47 :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47 : 9- 12-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 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서 모든 만물을 소성시켜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그 나라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 성전이. 그 물이. 계시록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와요.

 

22 :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시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똑같은 내용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생명수가 어디서 흘러나와요? 에스겔서에서는 보좌에서 흘러나왔어요. 문지방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와 죽어야할 자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열두 가지 실과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 아들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우리가 맺어야할 유일한 열매는? 우리 각자의 아들 되기 인 거지 다른 종교인들도 다 추구하는 뭐 선한 일하기, 도덕, 윤리 잘 지키기, 이런 거 아녜요. 그런 것도 열심히 하세요. 하시는데, 진짜 열매 맺기가 뭔지 잘 아시란 말에요. 열매는 이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참 성전에서 쏟아지는 생명수를 가리켜서 뭐라 그래요? 너희가 이 생명수 마셔야 사는데 이 생명수가 뭔 줄 알아? 뭐라 그래요, 요한복음 7장에서? 성령이라 그러잖아요. 수요일에 봤잖아요. 요한복음 7 37절 보세요.

 

7 :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아들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물이 어디서 쏟아졌어요? 이 성령이? 십자가에서. 요한복음 1934.

 

19 :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죽을 죄인을 살리는 피, 만물을 소성케 하는 물. 이것이 예수의 허리에서 나와요. 그래서 아기가 탄생하는 창조의 자리에 여자들이 물과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절 보세요.

 

16 :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떠난다는 것은 십자가지고 죽는다는 얘기에요.)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니까 성령은? 물은? 그 피는?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거죠? 그런데 계시록은 그 십자가를 보좌라고 한단 말에요. 어린 양의 보좌라고 한단 말에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 것이 비워지면서 먼지인 것이 살아나는 게 하나님의 보좌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하나님 나라라 그랬잖아요. 그게 뭐예요? 십자가예요. 십자가는 죽어야할 우리를 살리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좌를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요. 그런데 여러분은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죠? 큰일 난거죠? 계시록 321절 보세요.

 

3 :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 : 4- 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4 :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4 :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과거시제, 앉아 있어요, 하늘에. 그러면 하늘 보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그 하늘 왕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라는 보좌를 통과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함께 보좌에 앉아있는 여러분은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하게 되어있어요. 반드시.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인 그 성전의 축소판인 번제 단이 그대로 모형을 그려내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참 예수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 성전의 수많은 기물들 중 왜 번제단이냐는 말에요. 하필이면. 거기서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우리 같은 거 안 만들어도 돼요. 괜히 우리의 이성으로, 그러면 하나님 안 심심하실까요? 안 심심해요. 완전하신 분이 왜 심심해요?

 

여러분 오늘이 교회력에 의하면 부활주일이에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예루살렘 백성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셔서 거기서 죽으시죠? 번제 단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로 새로 완성된 새 성전, 동편에서 문을 따라 지성소로 가는 길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 아세요?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죽으시러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보좌가 있는 지성소입니다.

 

보좌! 십자가! 십자가가 보좌인 거예요. 예수님의, 하늘 왕이신 예수님의 보좌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았어요. 그리고 그가 첫째, 맏아들이고우리가 둘째, 셋째, 넷째 동생들이라 며요? 우리도 반드시 이 세상에서 참 세상 재미없는 곳이다. 이러한 자각을 할 수 있는 사건들, 경험들이 일어나야 돼요.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거, 이런 것도 그러한 문제들이 없어야 희망이 되죠?

 

돈을 많이 벌었어요. 희망이에요. , 이 돈을 갖고 가족들에게, 그런데 자식이 그 돈 때문에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그 때 그 돈이 그 사람에게 희망이 됩니까? 건강이 희망이었던 사람, 쫄딱 망했어요. 건강하면 뭐하냐? 오래 살면 뭐해? 희망이 없어져야 돼요. 그런 일들이 여러분 삶에 일어나서 기가 꺾여야 돼요. 풀이 죽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 그 나라, 그 나라는 정말 이러한 슬픔과 고통이 없는 그러한 곳 맞지요? 라고 한 발, 한 발, 그 나라로 소망의 눈을 돌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듣고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문제없이 떵떵 거리면서 문제없이 잘 살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느냐고요. 어떻게요?

 

말씀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처세나 삶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아녜요. 어떻게 하면 착한 사람이 돼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책들 200권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성경 말고 200. 아니, 흥부놀부만 읽어봐도 알아요. 그건. 초등학교 1학년 도덕책만 읽어봐도 알아요. 그런데 그런 얘기해주면 야, 우리 인간은 이렇게 위대한 거구나, 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높여줬다고 다들 은혜 받았다고 좋아해요.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처음자리를 이야기하면은, 사람을 뭐로 보고 진짜 씨! 다음 주부터 오나봐라.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고요? 십자가라니까요. 그래서 십자가만 여러분이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번제 단,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를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거예요. 번제 단이란 단어가 아리엘이라는 단어예요. 히브리어로. 그걸 예루살렘을 부를 때도 써요. 그 단어를. 이사야서 291절 보세요.

 

29 : 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이게 번제 단이거든요.)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9 ; 2-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앞에 것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리고 뒤에는 번제단, 내가 너를 번제 단에서 반드시 목을 잘라서 내 신부 삼고 말거다 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울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아리엘아, 아리엘아. 너희는 그래서 죽어야 되는 거야. 어디서? 내 안에서. 그런데 안 죽겠다고 계속 도망만 다니니 어떡하면 좋니? 번제단. 교회. 예루살렘. 같은 말이에요. 예루살렘이 순결하고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번제 단이 점 없고 흠 없는 예수라는 제물로 깨끗해져야 돼요. 그 안에서 구원 받은 여러분이 거기서 하나님께 드려진다고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왜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고 그런지 아세요?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여 남들은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해내라는 말이 아녜요. 하나님은 너희를 제물 삼아 반드시 죽일 건데 그 때 당황하지 마, 이 뜻이에요. 그게 제물이에요. 여러분은 보좌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라는 보좌를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살아내야 돼요. 거기에 앉아야 돼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앉히겠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하기 싫으니까,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묵시 속에서 완료된 현실을 하나하나 알아 가는 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고 하는 거예요. 지금 조금씩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걸 어디에 써먹어요. 그 불량재료를? 아무리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나아지고, 나아지고, 나아지고 죽는 순간에, 뭐 인간이 보기엔 거의 완벽한 재료가 됐다 그래도 그거는 불쏘시개로도 못 써요. 하나님의 집에서는. 은혜로만 지어져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성전으로 이미 창조되어 있는, 은혜의 능력으로 창조되어 있는 여러분의 실존을 하나하나 알아 가는 걸, , 그런 거구나, 이걸 지어져 간다. 그러는 거예요. 거처가 되어져 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뭘 거처가 되어져 가요? 이미 성령이 들어와 있다며? 그건 성령이 보내신 사신 이예요? 성령이 들어와 있다니까요. 그러면 성전이고. 하나님의 거처란 말에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한 사람의 행함, 한 사람의 순종,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나는 영생 얻었습니다. 구원 얻었습니다. 이걸 고백하는 것, 이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그런 이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두 손 두 발 들고 털리는 자들이 여전히 자기의 쾌락만 쫓아서 살게 될까요? 여전히 자기 유익만을 위한 그런 삶의 지향성을 그대로 고수하게 될까요? 천만에요. 반드시 변화가 있어요.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변화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여러분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반드시 변하고 여러분의 그 실체를 바라보며 아프게 되어 있어요. 진절머리가 나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서 나오는 진짜 헌금, 진짜 봉사, 진짜 선교, 진짜 구제 이거 하자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를 털어서라도 힘닿는 대로 뭔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이 악당들이 이제 헌금 안 해도 된대. 여보, 적당히 해. 여보, 뭐 하러 새벽부터 나가서 교회에서 의자 날라? 다 놓고 나면 그 때 가. 이 악당들이 말이죠. 복음까지 이렇게 이용해 먹는다니까요.

 

아니 우리의 구원이 목적지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요. 하나님이 다 하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내 백성을 오게 하라’, 우리의 목적지는 구원이 아니라 영광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자는 그 거저 받은 구원의 그 현실을 갖고, 영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래, 영광을 위해 이제는 내 삶 속에서 좀 뭐 어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나오지, , 인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이런 말이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입니다. 라는 이 고백. 예수님이 성전으로 완성하셨고 나는 그래서 거저 그 영생을 받았습니다. 라는 이 고백이 있는 자를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라 그래요. 나는 반드시 죽어서 부활해야 돼. 그러니까 여기서 착하게 살아야지, 이건 아무것도 아녜요. 이거는. 부활신앙은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내가 이렇게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야. 그분의 공로를 의지해야 되는 거야. 가 부활신앙이지. 나는 죽어서 반드시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나는 착하게 살 거야, 이건 아니에요. 잘못 짚은 거예요. 그러한 이들이 일 년 삼 백육십 오일 매일을 부활절로 사는 거예요.

 

일 년에 한 번 달랑 지켜놓고 부활과 전혀 상관없는 자로 사는 거? 그런 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세요. 계란은 왜 삶아 먹는 거예요? 그 바알과 아세라에서 그 아세라, 그게 이스터라는 말의예요. 그 여신이 달걀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교에서 들어온 걸 교회가 계속 삶아 먹고 있어. 집에 가서 삶아 드세요. 점심 대신해서.

, 한 사람 이야기. 로마서 5장 마지막 절까지 다 공부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 아 예수예요.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한 사람, 인자, 예수에 의해 우리는 이렇게 거저, 불가항력적인 구원을 무조건적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찬송하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불성실하며 어떻게 여전히 더럽고 추악한 쾌락만을 위한 삶일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 복음이 능력이 되는, 말씀이 능력이 되는 서울서머나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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