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57 예수의 표상인 아담 (5:12~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31. 20:13

로마서 5:12~15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에서 가장 난해하고 가장 어려운 구절에 당도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 3장 앞부분이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부터 공부할 부분이 로마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핵심적이면서도 난해한 구절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4복음서를 거쳐서 요한계시록까지 분명한 구조 파악이 선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직 신학적 분류 안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의 정의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지 않으면 결코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는 원죄의 문제나 창조의 문제의 이야기, 마귀의 실체, 율법의 문제, 그리스도 예수로 완료되는 구원의 이야기 등등의 복음의 핵심 모두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거든요.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절대 이 구절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그 전체를 아우르는 개괄적 설명을 해드리고 다음 주부터 구체적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부터 설교하는 것은 다 숙지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보면 "말미암아"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단어는 헬라어 “"디아"”라는 전치사를 번역한 단어인데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 "말미암아" 라고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 “"디아"” 뒤에 나오는 단어들이 전부 소유격이에요. 헬라어 문법상 전치사 “"디아"” 다음에 여격이나 대격이 오면 trou, by 의 의미로 해석이 되지만 소유격이 오면 방법과 수단, 도구의 의미를 가져요. 헬라어 “"디아"”라는 전치사 뒤에 소유격이 오면 단어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주체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피동적 객체 방법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헬라어 “"디아"”전치사 뒤에 소유격으로 오는 단어들이 한사람, 아담입니다. 아담이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죄, 범죄, 많은 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헬라어 “"디아"” 다음에 소유격으로 붙어 있어요. 여격이나 대격이 아닙니다. 그 만큼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어떤 대상의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법적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세상에 들여온 아담이나 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지배하게 된 죄나 그것을 해결하려온 또 다른 한사람, 인자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모두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뜻입니다. 역사 속 예수까지도. 그리스도 아니고 예수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표, 표상, 형상 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중요한 것은 그 목록 안에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것인데요, 아담이나 역사적 예수도 하나님에 의해 설명용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신성을 한 번도 안 쓴 겁니다. 못 쓴 겁니다. 도구요 방법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에요. 그 말은 에덴에서 선악과 사건이나 골고다에서 십자가 사건 모두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철저하게 작정 속에 계획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뭔가가 설명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라는 것은 이미 완료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계획이 먼저 세워지고 실체가 먼저 완료되고, 그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배우들이 선정이 된 그런 형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디아" 다음에 소유격들이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법이요, 도구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설명용 도구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이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둔 아담이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을 표상하는 분인지 이해가 잘 안가시죠? 개혁 신학자들은 예수가 성도를 대표하여 십자가를 진 것처럼, 아담도 인류를 대표하여 죄를 지은 대표성의 유사 정도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가난한 이해입니다. 


그 표상이라는 단어는 유사정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각기 다른 인물이 정확히 같은 일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그런 말입니다. 서둘러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담에게서 그림자로 보여졌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확하게 완성이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표상이에요. 아담이 저지른 죄를 예수님이 오셔서 무작정 해결해 준 것이 아닌, 둘은 유사성을 갖고 있고 같은 일,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지금부터 보자구요.

 

 성경의 첫 단어는 "베레시트"인데 "베레시트"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의 시작, 장소의 처음, 머리 이런 뜻이거든요. 성경은 현대 히브리 문법이 생겨나기 이전에 히브리 알파벳이 가진 그 원의로 조합된 단어들로 기록이 된 거예요.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이해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파자해 보는 것도 중요해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현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원 시나이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고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현대 히브리어로만 그 깊은 뜻을 다 이해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 "베레시트"라는 단어를 파자해보면 자음 베이트가 성전, 집이라는 뜻입니다. 레쉬 –머리, 시작, 알렙 –하나님,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쉰 –되새김, 분석 이런 의미이고 요오드 –편 손 , 타우- 완성의 표 이런 뜻입니다. 이런 단어들의 합성어예요. "베레시트"라는 것은 성전의 시작 ,성전의 머리, 성전의 실체인 하나님을 잘 분석하고 설명함으로 해서 시간 안에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다가 "베레시트"예요. 그러니까 시간의 시작, 시간이라는 것, 역사라는 자체가 묵시를 잘 분석하고 설명하여 유한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 넘겨주는 것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베레시트"로 성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완료된 무엇인가를 유한의 존재들에게 잘 이해시켜주기 위해 손을 펴 넘겨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주다” 할 때에 그 단어를 씁니다. 넘겨주는 것, 이것이 말씀이며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서 "베레시트"라고 읽습니다.

 

이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은 한마디로 하늘의 그 영원과 하늘의 참 성전,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그 표, 모형으로써의 한시적 현상계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게 성경의 첫 단어인 "베레시트" 한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의 첫 단어는 내가 지금부터 현상계의 것들로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모세가 10계명을 무슨 글자로 받았겠습니까? 애굽어죠. 이스라엘은 히브리어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성전 지을 때에 애굽 것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현상계의 것들로 내가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가 "베레시트"예요. 성경 전체는 하늘을,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란 말입니다. "베레시트"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엔 아르케"예요. 이것이 요한복음의 첫 단어입니다. 


“태초에” 라고 개역 성경이 번역 해 놓았는데 그 "엔 아르케"의 첫 단어 “엔” 이라는 전치사는 히브리어 불분리 접두사 베를 그대로 가져와서 헬라어로 옮긴 거예요. 제가 좀 전에 히브리어 두 번째 단어가 베잇-성전,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그랬죠? 고대 히브리어로 보면 그래요. 아르케-시작 ,히브리어로 바꾸면 레시트예요. 레시트의 어원이 레쉬 –머리 성전 안에 머리가 놓여 있는 모습,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설명해줄게. "엔 아르케"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베레시트"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 성전 안에 머리가 놓인 것이 뭡니까? 교회죠. 참 성전 안에 머리이신 예수가 들어 온 것을 교회라고 하잖아요. 

머리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머리 둘 곳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맞는 소리죠. 십자가 이후에 성전이 되어 예수를 담을 수 있는 교회가 탄생되니까 십자가 이전에는 머리 둘 곳이 있으면 안돼요.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나는 의지할 곳이 없다, 집도 절도 없다는 이런 의미로 쓰신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약 성경의 첫 단어 "베레시트"를 그대로 옮겨다가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 "엔 아르케"이고, 

그 둘의 의미를 종합해 볼 때에 성경 전체와 이 역사는 무한의 하나님께서 유한의 피조물에게 묵시를 설명해 주시는 참 성전 안에 그리스도,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나로 연합이 되는 묵시 속 교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이것이 성전이며, 이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니까, 우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에 완료가 되었는지를 애굽의 것, 즉 세상의 현상계가 설명해 볼게 하는 겁니다. 이게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참 성전이 되는 묵시 속 교회의 실체를 설명하는 설명서가 성경이고, 이 역사 또한 그 말씀을 증거하고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요, 한시적 무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단어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이나 하와나 뱀이나 죄 선악과나 생명나무, 그 역사 속 예수 등은 모두 그 "베레시트"를, 묵시를 현상계의 것들로 설명하여 넘겨주는 "베레시트"하기 위한 도구요 방법이요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아"라는 전치사 뒤에 그 모든 단어들을 소유격으로 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천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모형들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 예수, 마리아의 아들 예수까지도. 하늘의 것, 실체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것, 모형의 불가능한 한계가 증명되고 증거되어야 해요. 설명한 다음에 이것은 실체가 아니다,를 증명하려면 그것이 소멸되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모형은 다 죽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도 죽는 거예요. 


그래야 실체가 설명이 되고, 그 실체의 가치가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이 다 죽는 것입니다. 모형이기 때문에요. 역사 속에 모든 것이 다 죽어요. 다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 예수도 죽고 죄도 죽고 율법도 죽고 이런 단어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모형이기 때문에.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만 남는 것입니다. 아가페, 은혜, 영광, 하나님만 남는 거예요. 이것이 복음이고 성경입니다. 후자를 위해서 전자가 수단과 도구로 사용되어 그 설명을 다 마친 후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 여러분이 성경을 대할 때에 어려운 것 같지만 페러다임의 전환만 되어있으면 절대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므로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택한 자들 너희와 저희로 나눈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이 택한 자들 너희에게만 그 비밀을 열어 두었다, 그러셨죠? 저희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다. 못 알아듣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면서 “말씀 전해! 그래 놓고, 귀 눈 막아라!” 그러는 것입니다. 열어서 설득시키라고 하지 않고 “막아라!” 그랬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귀가 머는 것입니다 왜?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귀를 막아라, 그러는 것입니다. 못 알아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만 알아들어야 돼요.

 

 오늘날 인기 있는 설교라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건 인간 보편이 다 수긍하고 추구하는 선한 사람 되기, 도덕과 윤리의 준수, 사회의 좋은 영향력 미치는 사람 되기, 착한 일 많이 하기, 성도다운 사람 되기, 마음 다스리기 등등 모든 설교가 이 적용으로 끝나잖아요. 그런 좋은 것 보편적 인간들이 합의한 좋은 것에 대한 설교, 인기 있는 설교죠? 그리고 건강한 설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는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어요. 그런 설교 듣고 나면 결연한 의지도 갖게 되고, 감동도 받고, 의지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려요. 누가, 누가 이렇게 살라고 해요, 라는 설교를 절에 가서 똑같이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 이야기만 쏙 빼고 똑같은 내용을 절에 가서 하면 똑같이 감동 받습니다. 똑같이 눈물 흘립니다. 성경은 그것을 설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절, 불교대학원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스님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 박수칩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못 알아듣는다고 하는데 중들은 알아듣고 일어나서 기립박수 치면 누가 맞는 것이냐구요. 여러분이 복음 전한다, 간증한다, 그러면서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에 그들이 감동받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못 알아들어야 돼요.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작금의 기독교는 여러 종교 중에 하나가 되어서 그 종교들이 동일하게 추구하는 어떤 동일한 것, 그런 것을 가르치고 행하려는 그냥 잡교가 된 것이죠.,

 

 설교는 묵시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하고 십자가와 피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못 알아들어요. 절에 가서 예수 십자가 피 이런 것 이야기 해보세요. 어떻게 그들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칩니까? 그렇게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는 예수 이야기, 하나님 아들 이야기, 은혜 이야기 그 안에 말씀이 들어있는 자, 아들을 받은 자들만 이해해요. 제가 지금 한국말로 이야기하는데 여러분이 이해하죠? 여러분 안에 그 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히브리어로 설교하면 여러분이 못 알아들어요. 왜요? 여러분 안에 그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안에 아들이 있는 자는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고, 말씀이 없는 자는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들이 하는 설법 같은 것, 마음을 잘 다스리고요, 평정심을 유지하고 중용의 도를 갖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그러면 다 알아들어요. 설교 아니니까. 


그렇게 이 아들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설교가 떨어지면 어렵고 지루하고 생경하죠. 그런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줘. 어떻게 살아야 가치가 있고, 어떻게 살아야 향기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환란을 조금이라도 피해서 살 수 있는지 그런 말을 좀 해줘. 속으로 그럽니다. 


중들도 할 수 있는 것을. 절에 가면 옛날 고전을 예로 들어서 더 깊이 훌륭하게 설법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보이지 않는 묵시, 보이지 않는 무한의 하나님을 설명하여 "베레시트"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이웃에게 넘겨주는 것, 삶으로 입으로 넘겨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전이. 그러니까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말씀을 받은 자인가? 고민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 역사와 시간과 공간은 전부 하늘의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수단이요 표예요. 그래서 그 모형으로써 역할을 마치면 장렬히 산화해 주어야 돼요. 그래야 원형의 가치가 증명되고 입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형 비행기가 비행기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대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을 타고 태평양 못 건너갑니다. 모형 비행기는 진짜 비행기를 설명한 후 그 진짜 비행기 앞에서 쇠해져야 해요. 원형이 흥하기 위해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용함을 폭로 당해야 진짜 비행기의 가치가 입증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은 목적을 갖고 있다, 라는 뜻이죠? 목적도 없이 막 장난치는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성경에서 역사의 목적지가 뭐라고 그래요. 멸망!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아니라 멸망이라고 그래요. 역사를 축약하면 멸망! 여러분의 인생 끝이 뭡니까? 그 인생의 목적지가 멸망! 그래서 다 죽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그렇죠?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잠깐 보존해 두는 것이 역사이며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죽는 순간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심판의 날입니다. 영원 속에 들어가면 차서나 기다림이 없으니까 바로 심판이에요. 무덤 속에서 기다리고 그런 것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 6:14 하늘은 종이 축이(두루마리)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역사와 우주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실체가 오게 되면 옛 하늘과 옛 땅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려 올라간다, 떠나갔다 그래요. 형상화시켜 그려보세요. 역사가 멸망으로 끝날 때 이 종이 축이 말려서 올라간다는 것은 묵시 속으로 함몰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 묵시를 쭉 펼친 것이 뭐라는 말이에요. 역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묵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려 올라가서 묵시에 함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우발적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묵시를 쭉 펼친 것이니까, 완료된 어떤 것을 펼친 것이니까. 그래야 다시 말려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발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요. 모든 것이 계획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역사가 창조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자구요.


 

에베소서 1:4 곧 창세전에 (이 역사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이미 우리가 있었다고 하죠? 정해진 우리가 있어요. )

5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을 받았으니, 언제? 창세전에요. "베레시트" . "엔 아르케".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라는 것은 너라는 대상이 삭제되는 것입니다. “나” “나” “나” “나”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우리 안에 너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각자가 우리 안에 있는 존재, 각자가 나라는 주체를 차압당해요. 그래야 우리가 돼요. 그것을 일체라고 하고, 연합이라고 해요. 우리가 있어요. 그 우리를 예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셨다, (과거 완료예요) 그래요. 언제? 창세전에 이미 아들이 됐어요.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어 아들들이 되었다고 해요. 이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런데 창세전에 "베레시트" 이전에 이 일이 일어났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겠습니까? 지금 역사 속에서 일어난 그것은 모형이라는 말입니다. 묵시 속에 이미 그 일이 일어났다 그래요. 그렇다면 성경 전체 기록된 복음의 이야기와 에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이 모든 역사의 내용이 이미 하늘에서 완료가 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베레시트"가 되죠. 설명을 해주죠. 완료가 되어있는 것이 있어야.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린 양이 창세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죽은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용일 뿐이지 창세전에 이미 죽었다고 그래요

 

계시록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어구가 헬라어로 보면 '투 아르니오 투 에스타코메누 아 포카타 폴레스무' 직역하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책.'

 

 세상이 생기기 전에 도대체 어린 양이 어떻게 죽느냐 말입니까? 십자가는 이미 묵시 속에 섰다는 말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섰을까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에베소서 1장에서요. 묵시 속에서는 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묵시 속에 성자는, 어린 양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기 전이기 때문에 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피가 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죽습니까? 하나님이 영인데 무슨 피를 흘리냐구요. 창세전에. 어디서? 그리고 거기에 이미 창세전에 죄라는 개념이 나와요. 역사가 생기기도 전에 아담이 태어나기도 전에 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어린 양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 죄는 도대체 뭐냔 말입니까? 피조물이 생기기도 전에 하늘에 있었던 죄라는 그 개념은 무엇이기에 어린 양이 거기서 이미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고 하느냐 구요. "베레시트" 이전에.

 

 우리가 죄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발출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베레시트", "엔 아르케" 이전에 죄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어린양이 죽었대요. 십자가를 졌대요. 하나하나 풀어 보자구요.

 

 오늘 본문은 한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 왔다 그래요. 그건 원죄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임과 동시에 대표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자주 쓰이는 구절들이죠. 개혁주의 신학은 거기서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전가된 거다, 라고 주장해요. 그래서 우리가 원죄 orginal sin을 갖고 있는 것이다, 라고 얘기해요. 그 교리에 의하면 죄는 아담에 의해서 창조된 것처럼 보이죠. 


어찌 되었던 거기서 시작되었으면 그가 창조자예요. 피조물은 죄도 창조 못 해요. 그 어떤 것도 창조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죄라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이 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한사람 아담을 도구로 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래요. 어디에 있다가 들어온 것 이란 거예요? 시작됐다라고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어디에 있다가 들어 왔다 그래요. 아담이 도구가 되어서, 어떠한 사건을 저지름으로 해서 이미 있었던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준비된 그것이 슬그머니 들어왔다는 그건 이미 의도가 되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아담을 도구로 디 안트로푸 에노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아담은 통로였을 뿐이에요. 누군가가 죄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통로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이 도구로 통로로 사용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담만 죽일 놈 그러면 안돼요, 여러분. 통로로 사용된 거예요. 바꾸어 말해서 그들 피조물이 죄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준비해둔 어떤 개념이에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은 아담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의도적으로 죄를 세상에 풀어버린 거예요. 왜요? 바로 다음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사망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죄가 들어왔다, 그래요. 오늘 본문이. 12절에 보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디아)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여기서 죄도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르다 즉 디엘코마이는 삼투, 확 빨려 들어와 뚫고 지나가 죽여 버린 거예요. 사망이 모든 존재를. 그런 뜻인 거죠? 그걸 위해 죽은 자로 드러나기 위해 죄와 아담을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했다가 12절이에요. 그렇다면 왜 죽여야 하는가? 금방 이런 질문을 할 거예요.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을 공부한 분들은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예요?”라고 질문할 거예요. 그러나 유아적 질문이에요. 


창조주에게는 죄라는 것이 적용 안 되는 말이에요. 창조주가 뜻을 두고 행하는 모든 것은 선이예요. 그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들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에 의해서 이건 죄인데 이건 아닌데 하면서 하나님까지도 판단하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누가 그걸 죄라고 그랬느냐구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구요. 우리 왜 씻어야 해요? 더러우면 안 돼요? 그런데 누가 그것을 더럽다고 그랬습니까? 그런데 모든 인류는 그것을 왜 물로 씻어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결정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선악 구조를 통해 죄라는 것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사무엘에게  “너 거짓말 해!” 하신 그런 하나님은 죄인이에요.

너 네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기까지 다 죽여! 하는 하나님은 살인 교사한 죄인이에요. 라합에게 너 나라 팔아 그런 하나님은 죄인인 것이죠. 그거 다 하나님이 시킨 것이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죄와 관계없는 분이라고 해요. 점도 없고 흠도 없다고 그래요. 


하나님이 하는 것은 모두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에요. 따라서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 조장했다 하는 것은 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우매한 자들의 질문이죠? 뭐가 죄인데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고 하는, 그들의 머리의 죄는 고작해야 도둑질, 간음, 살인, 험담 이런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는 소리하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은 너무 착해서 죄와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에요.

 

아담을 도구로 해서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신 처사는 죄의 조성이 아니라 선이라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은 피조물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내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모든 사유와 행위가 다 죄예요.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난 것이죠. 그래서 선악과 먹지마라고 시작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먹은 것 갖고, 뭐 대단히 하나님께 손해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죽이기까지 하겠느냐구요. 그것이 죄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창세 전 묵시 속에서 일어난 언약을, 이미 일어난 그것 설명하기 위해 "베레시트" "엔 아르케" 하시기 위해 아담을 도구로 하여 세상을 죄 속에 하나님이 가두어 버린 거예요.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려 함이라

 

표준 새 번역으로 보세요.

갈3: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려 한 것입니다.

 

인간들 모두 죽은 자로 만들어서 믿음으로만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하나님이 모든 자들을 사망 안에 가두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했던 거예요, 아담이 필요했던 거예요. 도구로.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이나 뱀의 출현 등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를 정 중앙에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어 심어 놓은 거예요. 


그 좋은 생명나무는 어디다가 감추어 두었는지 얘기도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열매가 맺어있다는 말도 없어요. 선악과는 열매가 이미 열려있어요. 생명나무에는 실과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실과거든요. 에덴에서 그게 맺혀있으면 안 돼요. 그래야 완전한 하나님이죠. 자기가 추측도 못하고 예측도 못한 어떤 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서둘러 막는 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불완전한 하나님으로, 미완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니에요.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전지전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의해 착착 진행되어진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도 예측하지 못하는 죄가 세상에 들어와 버려서 그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서 죄를 없이 하려고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죄를 없애 버린 신파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passion of christ나 보고 울고불고 하는 복음을 다 신파로 보아서 그렇죠.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해요? 예수님 보다 더 아프게 죽은 사람 더 많아요. 그것이 그렇게 슬프고 애통할 일인가요? 


어린양은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고 그 피에 의해 아들들이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있어요. 그렇다면 묵시 속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아들들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어요? 성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영원이 에요. 시간 속이 아니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이 영원의 무슨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교회의 머리, 아들들의 맏형이 되셨죠. 어디서? 묵시 속에서요. 그런데 맏형의 동생들은 신이 아니에요. 피조물들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신과 함께 나라를 이루어 신처럼 살기 위해서는 (거기가 묵시 속 영원이니까) 신과 피조물의 연합이 필요하겠죠? 그래야 같이 동거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신과 피조물은 동거가 불가능해요. 돌격하여 실족해 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게 거룩의 개념이란 말입니다. 동거가 안 돼요. 못 들어가는 거예요. 지성소로.

 

그런데 성자가 아들들의 맏형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교회라고 해요, 성경이. 그러면 이 둘이 무한과 유한이 함께 동거하고 공존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해요. 유한 쪽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죠? 없음인데 뭘 해요, 이 인간들이. 그렇다면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해야죠?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돼 들어와야,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하셔야 이 피조물이 무한인 신과 공존하고, 동거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돼 들어가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무소부재와 편재가 안 된다, 말입니다. 이것이 신의 죽음인 것이에요. 이것이 성자의 피란 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자가 육신을 입고 내려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모형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묵시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 성전이 되어있다 라는 뜻이 예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성자가 죽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들의 맏이로 무소부재와 편재를 상실한 육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시는 거예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의 불가능한 처음 자리, 없음의 자리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죄예요.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밖의 모든 것은 다 죽은 거예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 때문에 온다. 다 죄 때문에 온다고 하죠? '생명 밖의 모든 건 죽은 것'이라는 것은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악이며 죄에요. 그런데 그 죄를 죽음, 없음을 생명으로 해결하기 위해 성자가 유한 속으로 관입되어 들어가 성령으로 그들과 연합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 교회의 탄생이기 때문에 성자가 피를 흘렸다라고 하는 우리의 수준으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로 인해 없음에 불과한 먼지들이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있음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아들을, 빛을 성령을 품은 새 성전이 되는 거예요.

 

 무한의 창조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아담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첫 번째 아담이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는 통로 역할을 함으로 해서 묵시의 설명이 시작되는 거예요. 왜? 다 죽은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아담은 죄인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표상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잘 알아야 성경 전체가 일관성 있게 이해가 돼요. 


아담은 하나님께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해 내는데 도구로 쓰인 사람이죠. 아담이 없으면 여자는 없어요. 왜? 아담의 갈비뼈가 꼭 필요하거든요. 교회가 탄생하는 데는 어떤 남자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서 창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다, 라고 해놓고 그것을 단수로 ‘사람’이라고 해요.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은 둘이 객체로 따로 존재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사람의 내용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라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라는 것이죠?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가 탄생됐죠?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함몰되어 들어가서 교회가 탄생됐잖아요, 여자가. 그렇죠? 이것을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고 사람이라고 한단 말이죠.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있을 때 그것을 ‘그리스도’ 라고 해요. 그 이야길 구원이라고 해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의 형상이다”라고 해놓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라고 설명을 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어 여자, 즉 신부와 연합한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십자가 이전에 예수는 아직 교회의 머리가 아니죠? 연합이 안 됐을 때에 밖에서 여자가 홀로 객체로 존재하며 우리도 하나님처럼 존재해야지 하면서 선악과 먹으면 그것이 죄, 사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 남자를 여자가 죽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남편을 죽여 버렸다구요. 아직 머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려와서 성자와 성령 안이라는 새 성전으로 묶어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령 안, 그리스도 안' 하는 이런 글들이 많은 거예요. 성령에 의해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모형한다구요. 아담이 모형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단순히 대표의 원리를, 대표의 원리에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 자체가 어떻게 묵시 속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조되었는지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면, 예수님은 아담처럼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맞죠?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명을 해드린 거예요. '율법의 완전' 이걸 설명하면서) 


그러니까 여자가 탄생할 때에 남자가 잠이 들어요. 잠이라는 것은 항상 죽음을 메타포한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신랑이, 여자의 탄생을 위해서 자기의 존재성을 차압당하는 거예요. 성자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버리는 것, 피를 흘리는 것, 이것이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아들들이 생겨요. 그래야 성자의 신부들, 연합의 개념에서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부들, 아들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려야. 


그래서 아담이 잠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옆구리가 뚫리고 아담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갈비뼈가 하나 적출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의 완전한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거기서 여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과 연합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 속으로 관입해 들어가서 그들의 머리로 연합해 버리는 그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개념입니다.

 

창세기 2장부터 선악과, 죄, 뱀, 아담, 하와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설명되는 것입니다. "베레시트"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로 창조된 남자인 아담이, 여자라는 존재의 불가능함에 의해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리는 것입니다. 하와에 의해 엉뚱한 아담이 무트 타 무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그러한 그림인 것입니다. 

교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가 십자가로 내려가는 그러한 그림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묵시 속에서 없음, 더스트, 아파르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성자가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되어 들어가는 사건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디모데전서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성경에 여자가 꾐에 빠졌다 그러죠? 일부러 여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 때문에 남자가 죄인의 괴수 자리에 뱀의 자리에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여자가 뱀과 연합해 버렸는데 남자가 뱀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죄는 여자가 지었는데 성경에는 전부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는데요. 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유한으로의 관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자가 뒤집어 써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남자가.

 

 아들이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 없음의 자리가 어딥니까? 사망이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 없음의 자리가 원래는 우리의 자리였습니다. 아파르, 먼지의 자리, 없음의 자리에 내려가서 아들의 일부 갈비뼈를 흡수해내는 것, 이것을 거꾸로 그려놓는 것입니다. 여자의 탄생을. 없음의 자리에 내려가서 흡수해 버리는 것입니다.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묵시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 밖에 존재할 때는 항상 뱀과 연합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남자를 공격해요. 왜? 밖에서 혼자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창조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살해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뱀이 여자와 연합하는 거예요. 뱀이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이며, 뱀이 여자와 연합하여 여자가 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뱀이 여자고 여자가 뱀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과 방불한 그 여자를, 뱀이며 마귀인 여자를 성자의 피가 성자의 심장으로 끌어 당겨서 연합해내는 것, 그것이 아담이 잠들고 옆구리가 뚫리고 갈비뼈가 빠지고 여자가 창조되는 그림이 거꾸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창조된 것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함몰된 자를 성도라고 하고, 예수 밖에서도 홀로 독립된 존재로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의 가능성과 힘과 가치를 증명하려하는 그들이 뱀인 것입니다.

 

보세요! 교회 안에 '그 예수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수는 모르면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강대상에서 어떻게든 이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힘으로 사용해 버리려고 헌신과 헌금과 봉사 강요하고 여기서는 또 그렇게 해야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서로 서로 그렇게 악어와 악어새처럼 살고 있지요. 무슨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요. 정말 교회가 예수를 믿고 있느냐구요? 


그렇다면 죄의 원형이라고 하는 뱀은 결국 성자 밖에서 홀로 독립적인 존재로 살고자 하는 모든 피조물의 상태를 통합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죠. 그것이 마귀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뱀이 하와를 뭐라고 미혹했습니까? 

"야! 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만 살라고 그래. 네 손발 움직이고 네 머리 써 이것 먹으면 지혜롭게 된다잖아! 그리고 움직여! 그러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니까?"

이것이 뱀이잖아요. 왜 네가 남자 안에서 갈비뼈로,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 의존적 존재로만 살아야 되니? 혼자 나가서 주체로 살아나가 봐. 뱀이었잖아요. 팔 다리 움직여! 머리 써! 여자가 거기에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란 말입니다. 


피조물의 독립 선언 그렇게 얘가 생명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것이 죽음이잖아요? 그것을 죄라고 한다 말입니다. 빨리 죄를 도덕과 윤리 개념 정의에서 벗어나세요. 생명이신 예수 밖으로 떨어져 나가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고 죽음이잖아요. 그래서 하마르티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와 뱀의 연합.

 

 마귀니 귀신이니 이런 소리 하지 마시고 내 안에 있는 마귀성을 보란 말입니다. 그 귀신은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자신이 잘못해놓고 전부 귀신한테 전가시키니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감기도 귀신, 교만도 귀신, 험담도 귀신.. 자신 다해놓고 전부 다 귀신한테 전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뱀과 연합되어서 남자의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독립을 선언한 여자를 다시 남자의 심장에 끌어 당겨서 연합시켜 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사는 뱀과 연합된 여자가 팔 다리를 움직이고 머리를 움직여서 열심히 달리려고 하는, 신랑 밖에서 달리려고 하는 여자가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새 창조의 현장인 것이죠? 그것을 혼인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야! 남편에게 복종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창세기에 나오는 얘기인데 여자가 창조될 때에 이야기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성경이 얘기하고 있잖아요. 독립을 외치면서, 난 당신의 갈비뼈로 내 존재성을 차압당하면서 살기 싫어요, 하고 뛰쳐나갔던 선악과 입에 문 여자를, 다시 남자 안으로 끌어 들여서 아들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들의 행사가 모두 무가치하며 헛것이라는 것을 폭로해내고 그 팔 다리와 머리 그 오체를 무력화시켜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뱀을 저주할 때에 어떻게 저주하시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뱀과 여자가 연합된 상태에서 여자를 구원해 내겠다는 것은, 이 뱀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해 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럼 뱀에게 내린 저주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어야 돼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흙이 흙 아닌 척 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 그래야 내가 창조주가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는 거야! 이것은 저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뱀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창세기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에게만 목매달지 말고 네 손발을 움직여서 네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뱀의 자아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너 이제 (네 발이 아니라) 배로 기어 다녀” 그러셨습니다. 저주하시면서요. 뱀의 팔다리가 절단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전에는 서서 걸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내 손발 움직여서 내 머리 써서 내 주체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 뱀, 마귀라는 말입니다. 여자라는 말입니다. 넌 이제 내가 팔다리 똑 잘라 버릴 테니까 배로 기어 다녀! 네 머리도 부셔 버릴 거야! 그러면 오체가 다 박살나는 것이죠? 이것이 십자가에요. 머리의 가시 면류관까지. 그래서 놋 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것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이 쉽겠습니까? 오체가 절단되고 머리가 박살나는 그 삶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임해요. 오체가 못 박혀야.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뱀의 사지 절단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지식에까지 팔다리는 물론이고 머리까지 부수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성경이 창세기부터 일관성 있죠? 그렇다면 이 아담이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어떤 면에서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했는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신부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뱀과 한편이 된 여자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내 밖으로 나간 갈비뼈,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 여자를 끌어당기기 위해 이것이 혼인입니다.

 


호세아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 측에서 우리를 찾아와 고멜 같은, 창녀 같은 우리를 찾아와 "너는 내 갈비뼈야 나가서 네가 너의 주체, 널 위해 살게 되면 너는 이 꼴, 걸레 되는 거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호세아서에요. 


하나님이 와서 없음인 그녀에게 가서 장가들겠다고 찾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교훈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무엇을 했다고, 내 앞에서 뭘 한다고 그러는 거니?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베레시트"입니다. "엔 아르케"라니까요. 그러면 장가들겠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로 연합되게 하겠다는 말이 무엇이냔 말입니까? 팔다리 자르고 머리 부수겠다는 뜻이죠. 왜? 그렇게 손발을 움직인 것이 선악과 먹은 것이니까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는 것의 뜻은 잘라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장기가 혼자 자기 발로 움직여서 돌아다니면 어떡하죠? 죽어요. 이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돼요.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것을 자르는 것이에요. 머리까지 박살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랑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랑이 잠들고 옆구리가 뚫리고 항상 출생의 자리에는 피와 물이 쏟아지죠? 

여자들 애 낳을 때에 물과 피가 쏟아지듯이 양수가 터지잖아요. 예수님도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진 겁니다. 

그래서 아담이 오실 자, 예수의 표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그 나쁜 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설명해낸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담이에요. 그 일이 보편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일어난다, 그래서 이름을 아담, 사람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죽음의 자리가 뭐라고 그랬죠? 없음의 자리, 죄의 자리라고 했잖습니까? 그 사망의 자리가 없음의 자리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죄 아래 오셔서 죄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란 말입니다.

 


로마서 3:8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셨다.

 

 예수를 너 죄 있다 선고해 버리는 것, 너 죄 있어! 해버리는 것,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말대로 죄 없는 죄인, 왜? 하나님이 죄인으로 정했으면 죄인 것입니다. 억지로 편들려고 죄인 아니에요, 하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이 죄인이라고 했으면 죄인이에요. 그러나 죄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 것은 죄가 아닌데, 하나님이 뭘 시켰냐면 너 죄인 해! 시켰기 때문에 죄인이고 순응했기 때문에 죄인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고 그분 안에 그리스도 말씀을 갖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말하는 선악의 구조로 판단하는 것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이 질고를 졌다고 하고,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분이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셨다고 하는데, 그래서 허구, 헌 날 아팠어요. 병 걸린 제물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너 죄인 해!" 그랬을 때에 죄인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것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죄인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묵시 속에서 완료해 놓은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서 “너 네 종 해!” 하셨어요. 그들은 그들이 애굽에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 버렸잖아요. 그래 놓고 “애굽의 종 해!” 그러셨잖아요. “애굽의 종 해!” 그러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 속에서 다 용서해 놓으신, 생명으로 창조해 놓은 죄인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 안 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나 죄인 아니야.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생활 전부를 소진하는 것입니다. 그것 증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아담을 그렇게 쓰셨듯이 우리를 사용하여 아담, 사람을 사용하여 예수님도 마지막 아담, 사람, 인자(그 사람의 아들), 사람을 사용하여 묵시를 "베레시트" 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종교란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으세요. 


그렇게 죽어야할 죄 아래에 있는 육신을 갖고 그 안에 있는 말씀, 성령, 그리스도를 담고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십자가의 죄인이 되어 죽고 껍데기가 소멸된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완성해 놓은 새 몸을 그리스도, 성령과 연합된 상태로 살려냈잖아요. 하나님이.

 그 상태로 살아나는 것이 그리스도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예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표로 나타났기 때문에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 분이 그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이 맏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둘째, 셋째 이런 말 안합니다. 다 맏아들이라고 말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내 장자라고 하시죠. 다 장자 그 맏아들의 삶을 살아야 해요. 방법으로 도구로 살아야 돼요. 


"디아" 예수님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율법에 맞아 죽어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이루시고, 그리스도를 보여주심으 말미암아 "베레시트" 했죠? 사랑을 전해주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분이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율법, 두 달란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충성되고 착한 종이 완료하고, 우리에게 하나 한 달란트를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그 삶이 일어나야 돼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랬죠? 내가 네 자손들 아브라함의 자손들 애굽으로 보낼 꺼다. 430년 동안 보낼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양의 피로 건져낼 거야. 뭘 설명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를 애굽으로 보내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인 우리들.

 

성령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요. 그리스도인 우리를 애굽에, 세상에 보내어 죄 아래, 불순종에 가두어 놓고 아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 역사는 설명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뭐 하려고, 뭐 대단한 것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행복한 가정, 좋은 교회, 사회, 나라 다 헛것이에요. 


하늘의 것이 진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형은 반드시 소멸 되어야 한다고 그랬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교회가 진짜 교회네요. 

우리 사도신경에서 고백할 때에 “거룩한 공회와“ 이것이 묵시 속에 교회가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죠? 

그것이 진짜 교회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해요? 깨져야 돼요. 박살이 나야, 거기에 있는 나가 진짜 나예요. 그러면 이 땅에 “나“가 깨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맞아 죽으심으로 뱀들의 팔다리 머리를 절단해 버리고 성령, 콧김, 르와흐, 프뉴마를 받아서 살아난 것입니다. 새로운 몸으로 지식에까지 새로운 몸으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처절한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한 번에 뚝 잘라버리면 좋겠는데 칼이 말을 잘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자른데 또 자르고 조금 남았다고 또 자르고 하는. 


난 뱀 아닌데 하지 말자구요. 적어도 난 천국 소망은 있다. 부활 소망은 있다. 솔직해지자고요.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살기 힘들어서 가고 싶은 거죠?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힘들어서 가고 싶은 거잖아요? 그것을 죄라고 그래요. 자기 편해지려고 자살하는 것을 순교라고 그럽니까? 예수 때문에 자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 때문에는 자살해도. 


그렇다면 우리가 뱀이지 뭡니까? 팔다리 붙은 뱀,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잘라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그것을 십자가라고 그래요. 여러분의 인생은 오체 절단의 삶으로 점철 될 거예요. 그것을 겪으면서 하나님 더 확실히 잘라 주세요! 라고 고백하는 것이 진짜 성도의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