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56 찬송을 하기 전에 먼저 애가를 부르라 롬 5:10-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31. 20:11


롬 5장 10-12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몇 세기 지나지 않았을 때에 전 세계 기독교 교리를 양분하는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은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평생 탈선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뭐 그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정도를 걸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목사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린 나이에 거리의 창녀들과 어울리다가 열 일곱 살 연상의 여자와 동거를 해서 사생아까지 낳았고 서른두 살까지 마니교에 심취해서 인생을 탕진하다가 서른두 살에 암부로스 주교를 만나서 늦깎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훌륭한 교육에 훌륭한 평판, 깨끗한 삶을 살았던 그 전자의 목사님이 펠라기우스였고 젊은 날을 창녀들과 보내면서 골수 마니교 신자로 살았던 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동시대 사람이죠. 그렇게 훌륭한 삶을 몸소 살아냈던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행함 중심으로 풀어낸 사람이에요. 신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도 거기에 반응해서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성취해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열심히 부족한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중도탈락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죠? 그의 사상은 알미니우스에게 전해져서 알미니언주의가 탄생이 되었고 그 알미니언주의가 요한 웨슬레에게 흘러서 오늘날까지 율법주의, 인본주의 신앙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이한건 율법주의의 수장들이었던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훌륭하고 깨끗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고, 정말 허벅지를 찔러가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부리던 사람들이었어요. 웨슬레 같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기도하고 하루종일 성경 읽고 전도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죠? 홀리 클럽 같은 걸 만들어서 거룩한 삶을 전파하고, 경건한 삶을 독려하고 그런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반면에 율법주의의 대척점에서 오직 은혜, 오직 예수만을 외쳤던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선언하는 삶을 살았더라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삶의 열매의 측면이나 세상이 매겨낸 점수로 봐서는 율법주의를 숭앙했던 이들이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사회에 훌륭한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좀 더 밝고 깨끗하고 공평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멋지게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란 말예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아요. 요한 웨슬레를 성도라 부르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또 감리교에서 오신 분들 오해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들의 삶의 열매나 세상에의 기여도에 의해서 평가되는 사람들이 아니다는 그런 말이예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사람인가로 평가되는 사람들이 성도란 말예요. 쉬운 말로 예수를 믿고 예수께 자신의 삶과 존재를 투신하는 자가 성도인 것이지 예수를 능력으로 삼아서  나의 변화, 나의 성숙, 나의 발전, 나의 순결, 나의 거룩 등을 세상에 증명해내는 게 성도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여전히 경건치 않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구원이 완료되었다'  그때 에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가 구원이 완료되었다니까. 구원이 완료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거예요. 구원은 펠라기우스나 알마니우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하게 성장했을 때 완료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건 모든 인간에게 다 뿌려놓고 거기에 도달하는 자만 구원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그때에 선택된 자들에게 완료되어 주어지는 거란 말예요.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인간답고 싶다는 인간 보편의 꿈과 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절망이 먼저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인생들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그 배제당하는 꼴을 절대로 인정하거나 감내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목숨을 던져서라도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내 버리고 마는 거예요. 인간의 자존심을 자기 목숨보다 더 기치 있게 여기는 게 아담들인 거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되는 거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라는 이건 치기 어린 고백을 하는 자로 성숙되는 게 아니란 말예요. '나는 적어도 쟤네들하고는 달랐을 텐데', 라는 요 성숙의 자리로 달려가는 게 신앙생활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막아서면서 ‘절대로 죽으시면 안됩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고 했던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마귀야 하고 불렀던 걸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런 인간 보편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 전체를 한방에 부정해버리시는 거였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서 살게 되는 거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으로 절대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 선언해 버린 거란 말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의지를 발동하여 목숨까지 걸어 십자가를 막는 게 우리의 본무가 아니라, 십자가를 의지하여 살아나는 거란 말에요, 성도는요.


인간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을 조금이라도 의지하게 하는 게 바로 마귀 라는 걸 선언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모두가  날 버릴 거다.'  제가 이번 주 수요일에 그 열둘, 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할 거예요. 예수님이 왜 열두 살에 성전에 올라갔는지, 왜 열 두 지파인지. 왜 열두 사도인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완료가 되는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에는 왜 열두 지파,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설명해 드릴 텐데. 그 열두 제자는 교회예요 . 그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교회.


즉 그 교회가 예수를 배신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대열에 이미 합류되어 있는 자들임을 고지하신 거예요. 너희들 다 나를 배반할 거야, 다 나 버릴 거야. 쟤네들은 다 나를 버리는데, 쟤네들은 다 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데 너희들은 걔네들과 뭐가 달라서 내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도 똑같이 다 나를 버릴 거야, 다 나를 배신할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이 너희에게 입혀진 것뿐이란다, 이 말씀 하신 거거든요. 마태복음 26장 31절 보세요.


마26:31—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 하니라


모든 제자가 나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랬다고요. 목숨 걸어 십자가를 막아서겠다는 거죠?  교회의 기초인 베드로, 그러니까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의지가 대단해요. 자기는 절대로 예수를 떠나지 않을 거고 예수 편에서 목숨 걸고 투쟁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제자들이 다 똑같이 이야기 했다 그러죠?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됐어요? 모두가 다 예수를 버리고 떠났어요. 저주하며 부정하고 떠났다니까요. 배신 한 거죠. 누구의 모습이죠? 가롯 유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제자들 열 두 명 중에 제일 악마 같은 나쁜 놈, 모자란 놈이 아니라 열둘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 예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오죠? 그것도 제가 수요일에 설명해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우리의 대표인 거지 우리가 손가락질하면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은 삼십에 예수 안 팔았다, 이럴 대상이 아니라니까.  내가 마귀입니다.  내가 옛 뱀입니다.  내가 유다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해야 하는 자들이란 말에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유한은 절대 무한의 편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도 물어요. 목사님은 진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예전에는 거침없이 대답했어요.  그럼요,  그러니까 제가 모든 걸 다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목회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은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은 ‘가만있어, 하나님이 누구야? ‘ 여기서부터 출발해요.  ‘내가 진짜 하나님을 아나?’ 그런데 그 보이지 않은 그 하나님을 진짜 내가 사랑한다고?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거지'


여러분, 진짜 우리가 무한의 편을 들 수가 있어요? 창조주의 편을 피조물이 들 수 있느냐고요. 창조주가 피조물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성경에는 치사랑은 없어요. 내리사랑만 있어요. 무한의 권세가 유한을 덮는 걸 은혜라고 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창조예요.  그냥 은혜로 덮어내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독사의 새끼들임을 먼저 알아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발뒤꿈치를 물어서 예수의 피를 빨지 않으면 절대 존재일 수도 없는 자, 그게 우리잖아요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뱀이지 뭐예요 우리가.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어요.  구원에서부터 시작해버린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은혜롭게 서로 주고받는.  당신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나도 그런데.  내가 뱀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자각과 인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바라보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0절 보세요.


마26: 20—저물 때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걸 찍어서 주는 자가 마귀다 그랬어요, 마귀야)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제자들과 유다가 똑같은 단어로 똑같은 말을 하죠?  ‘내니이까?’ 무슨 말이냐 하면 ‘혹시 납니까?’ 이렇게 의심나서 물어본 게 아니라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예요. 아주 단호하게 나는 아니죠? 확실해요.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들이 오늘 다 나를 배반할 거라고 했고 이 중의 하나가 나를 판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판 거예요. 어떻게 알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날 그날까지 제자들이 뭘 갖고 싸웠어요? 누가 영의정 할거고 누가 좌의정, 우의정 할 거야? 그거 갖고 싸웠잖아요. 그럼 그게 뭐예요? 예수 팔아 내 유익 챙기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예수 판 거지 뭐예요? 그리고 배신했잖아요. 유다랑 그들이 뭐가 달라요? 다를 거 하나도 없단 말예요.


그런데 이 유다를 비롯한 나머지 열한 제자가 전부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나는 아닙니다, 확실해요, 나는 아니죠! 선생님?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요게 유다가 뱀이라고 했으니까, 마귀라고 했으니까, 마귀들의 속성이에요. 나는 아니에요, 내가 왜 예수를 팔아요? 난 예수를 위해 목숨 바칠 사람이에요.  요게 마귀란 말이어요.  우리는 요 자리로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자리로 올라가는 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이다, 이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한테 마귀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어요. 발뺌해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쟤는 어떨지 몰라도, 이렇게 다름과 차이를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뱀이에요. 이게 마귀란 말이어요. 성도는 그러한 말씀의 진술 앞에서 예, 제가 예수 배신하고 예수 팔아버린 마귀 맞습니다. 그래서 제게 십자가의 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는 자신의 처음 자리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고백을 건너뛰고 아예 생각도 안 해요. 왜? 여기서 얘기를 안 해줬거든요.  피차 불편한 이야기를 뭐 하려 하고, 듣느냐구요. 당신은 구원받았어요. 행복하죠? 찬송하세요. 여기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생략돼버렸다니까요. 그리고는 이제 ‘나는’ 아니지요? 라는 이 다름과 차이를 증명하는 걸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편이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 가 서로에게 죄를 전가했던 동일한 모습인 거예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에요. 얘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예요. 결국, 어디까지 올라가요? 하나님이 만들어낸 저 여자 때문이에요. 하나님까지 탄핵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그게 마귀란 말입니다. 왜 그렇게 내 자존심을 챙겨야 해요? 내가 선악과 먹고 어떻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 됐거든요.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마귀 새끼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을 하느냐고요. 난 하나님 됐다니까요. 선악과 먹고. 요게 율법주의 아래의 아담들이라는 거예요.


심지어 자신의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투신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살도 불사하는 것이 마귀의 실체예요. 마귀인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죠. 거기에 어떤 단어가 씌어있는지 아세요? 메타노이아, 회개라는 단어가 씌어있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했을까요? 그런데 왜 성경이 거리에다가 ‘메나노이아’, 회개란 단어를 썼을까요? 교회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잘못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회개는 정말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아는 자의 삶 속에서 은혜에 의존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의 고백이 나오는 게 회개라고 하는 건데, 그게 회개의 목적지거든요.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가 자기가 한 일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게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얼 근거로 가롯 유다가 죄를 모르고 엉터리로 회개 했다 고 얘기를 하는가?


여러분 죄는요, 인간의 목숨을 바쳐서 상쇄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목숨 일 억 개 갖다 줘도 상쇄 안 돼요.  그말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생명이라는 건 인간의 최선의 노력으로도 생산해 내거나 쟁취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그런 말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열심과 노력이 뭐예요? 목숨 바치는 거예요. 그거 이상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가롯 유다가 이거 바치면 그 죄 상쇄 되겠죠 하고 바친 거거든요. 그건 죄가 뭔지 모르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우리도 이 신앙의 절정, 이걸 순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롯 유다식의 순교를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많아요. 그런데 그건 다른 종교에도 많아요. 그런 순교는요.


마귀는 끝까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기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일을 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를 했다면 제가 예수님 판 자 맞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갔어야지, 내 죄는 내가 목숨 끊어서 책임질 게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말예요. 그래서 그 회개가 가짜 회개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 자신의 존재를 투신해야 하는 거예요. 마귀는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투신해요. 그건 순교 아니에요. 그건 죄예요. 제사장들은 어땠습니까? 그들도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절대 만지지 않았어요. 부정한 거라고 성전고에다가 다시 안 넣었어요. 안 만졌어요. 도로 가져가! 너무너무 값어치 없게 취급했죠? 야, 이거 나그네의 밭이나 사라.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밭이나 사라. 이렇게 가치 없게 여긴 거예요. 그 핏값을.


그리고 우리가 이걸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내가 관계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돈을 안 만진 거예요. 부정한 돈이라고. 이게 ‘ 난 아니죠?’ 에요.  난 아닙니다 . 절대 아닙니다. 나 예수 안 죽였어요! 쟤네들이랑 다르거든요. 그게 마귀란 말에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 마귀라는 뜻이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야.  그리고 독사의 새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 그래요? 네가 마귀다, 그러죠?  예수님 보고.  네가 바알세불의 권능을 힘입어 이적을 한다 그러잖아요. 서로 마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마귀로 여겨요. 진짜 하나님을 마귀로 보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거 아닌가요? 나의 천국, 나의 구원, 나의 보람, 나의 가치, 나의 변화, 조금 저급한 사람은 질병 치유, 일취월장, 성공, 번역, 귀신 쫓아냄, 문제 해결. 이런 거 위해 예수 믿죠? 그러면 예수 팔아 나의 유익 챙긴 유다, 뱀 새끼와 우리가 지금 뭐가 다르냐고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위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그거 위해서 우리 예수 믿잖아요. 여전히 우리는 올바른 신앙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뱀 새끼 같은 삶을 살고 있단 말이어요. 지금요. 그런데 그게 올바른 신앙이라고 너무 많이 들어왔고 세뇌되어서 이게 그냥 옳은 건 줄 알고 가는 것뿐이라니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그게 뱀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맞습니다, 제가 뱀입니다.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절대 만지지 않았어요. 부정한 거라고 성전고에다가 다시 안 넣었어요. 안 만졌어요. 도로 가져가! 너무너무 값어치 없게 취급했죠?  야, 이거 나그네의 밭이나 사라.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밭이나 사라. 이렇게 가치 없게 여긴 거예요. 그 핏값을.


그리고 우리가 이걸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내가 관계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돈을 안 만진 거예요. 부정한 돈이라고. 이게 ‘난 아니죠?’ 에요. 난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 예수 안 죽였어요. 쟤네들이랑 다르거든요. 그게 마귀란 말에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 마귀라는 뜻이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야. 그리고 독사의 새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 그래요? 네가 마귀다, 그러죠? 예수님 보고. 네가 바알세불의 권능을 힘입어 이적을 한다 그러잖아요. 서로 마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마귀로 여겨요. 진짜 하나님을 마귀로 보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조상이 신 포도 먹었다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의 이를 시게 만드세요?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러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읍소하느냐 하면 하나님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요.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조상이 죄를 지었으면 조상에게 죄를 물으셔야지 왜 우리에게 죄를 물으세요? 난 아니죠?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너희는 너희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말씀하시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주세요. 18장 5절 보세요.


겔 18: 5---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매일 성경인지 뭔지 큐티 책의 성경본문이 아마 요즘 에스겔서였던 모양이에요. 많은 분이 이 에스겔서 18장의 내용을 들이밀면서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당신은 왜 이거 아니라고 얘기하느냐고 많이 물어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이걸 택한 거거든요. 여러분 보시면 어떠세요? 똑바로 살아 그럼 살려줄게, 그 말처럼 보이죠? 잘 살아, 착하게 잘 살아, 똑바로 살아 그럼 살려줄게. 이 말은 그렇게 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공평공평하는데  그 공평에으로 살려면 이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너희 지금 내 앞에서 공평 공평 하는데 이게 내가 원하는 수준이거든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의인이 낳은 아이의 이야기를 또 들려주세요. 바로 밑에 보세요. 10절.


겔18: 10-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버지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아들이 자동으로 그 의로움을 상속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내적 치유니 이런 건 다 개소리예요, 그죠? 이게 공평이에요. 악인도 자신의 죄로, 의인도 자신의 의로 죽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공평이에요. 하나님의 공평. 이게 바로 너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내 앞에서 공평을 이야기 하느냐? 이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죄인이 또 아들을 낳아요.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반복하여 이랬다저랬다 하나님이 비유를 들어주세요.  


겔 18: 14—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19-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동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의인인 아비의 의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 거고 죄인인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유전 안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보낸 바벨론에서 그걸 확실히 인정하고 하나님,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바벨론에서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저는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바벨론에 보낸 거란 말예요. 그런데 거기에 간 하나님의 백성, 인간들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적어도 그 패악한 그 조상들과 우리는 다르단 말이어요. 그런데 왜 우리를 그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세요? 왜 그들의 죄를 우리에게 대물림하세요?  이렇게. 억지를 부린 거예요.


이것이 현재 바벨론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일차적으로 이 바벨론에서, 이 세상,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교회안에 있어요  바벨론은' 바벨론에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 이걸 실제화하여 살아가면서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취급받아 마땅합니다.  왜? 제가 뱀이거든요. 저는 몰랐는데요, 진짜 제 신앙생활은 저를 위해서 한 게 맞았어요. 예수님이 그런 유다를 보고 마귀라고 했는데 내가 유다와 다른 게 뭐 있어요? 이거 고백하고 가는 게 성도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아니에요. 쟤랑은 다르잖아요?  이렇게 열심히 했잖아요. 이렇게 헌금 열심히 했고 이렇게 주일 성수했고 이렇게 선교 열심히 다녔는데 왜 나에게 하나님, 복을 주셔야지 왜 이런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허락하세요? 하나님 참 원망스럽네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자본주의가 뭡니까? 내가 해낸 만큼 보상을 주는 게 자본주의 아녜요? 이게 인본주의 아녜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이게 우리의 고백아닙니까? 그게 펠라기우스고 알미니우스 잖아요?


어디서 줏어 들은 건 있어서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는 이단이야 그래놓고 자기들이 똑같이 그렇게 산다니까요.  성도의 삶이 그래서 이렇게 고단한 바벨론 포로의 삶으로 점철되는 거예요.  뺏기고 수탈당하고 쫓기고 쪽팔리고 부끄럽고, 이게 포로의 삶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취급당해야 맞습니다. 그래야 해요.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제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성도예요. 그런데 전부 다 나는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적어도 난 아닙니다. 난 목숨 걸고 예수님 편에 설 거예요. 이걸 증명해 내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어요 교회안에서.  전부 눈이 충혈돼서는. 열심히 살으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노하세요. 24절 보세요.


겔 18: 24—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들을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거 아니니?  나는 공평해.  지금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 포로로 보낸 건 너희의 죄 때문에 보낸거야. 너희의 불가능함과 나약함 그거 깨달으라고 보낸 거야. 그런데 내 앞에서 감히 공평을 이야기 하느냐? 너희 이 공평이 뭔 줄 알아? 물어보시잖아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바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에요. 여기가 지금 바벨론이라 그랬어요.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인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여러분 아세요?


말씀이 곡해 되고 오해되는 예배당 안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안, 교회는 묵시 속에 보이지 않는 교회와,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지역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하기 위해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계속 또 오네요,  이렇게. 원래 여기는 깨지고 쪼개지면서 하늘의 교회가 이게 진짜 교회 구나를 배우는 게 이게 교회거든요.  우리는 이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요. 이 안에 있는 가라지들이 그 말씀을 뭐로 받아들이냐하면 윤리, 도덕, 규례, 규범, 처세 이런 걸로 받아들여요. 한 마디로 역사 속에서 나에게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나의 보람을 증대시키는 도구요 방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죠? 요게 바벨론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뱀 새끼 맞는구나! 그 말씀이, 빛이신 예수가 어둠 앞에 섰을 때 어둠이 폭로됐단 말이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자기를 감추지 못했단 말이어요. 성도는 그 말씀을 제대로 받고 그걸 예수로 받아들여요. 그리고는 내 안에 있는 그 예수, 그 예수가 증거되기 위한 껍데기가 깨져야 한단 말이어요. 그런데 가라지들은 이 껍데기를 강화하고 껍데기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 말씀을 사용한단 말이어요. 그게 바벨론 이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시록 17장 4절 보세요.


계17:4---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이 자주빛과 붉은 빛 옷은 왕의 옷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선에 금잔을 가졌는데 (이게 다 왕 거에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이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인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또 내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제가 지난주에 큰 성, 산 위에 있는 마을, 이게 폴리스라 그랬죠? 그 단어란 말이어요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마을이 뭐였어요? 여성 단수, 산 위에 있는 마을 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여성 단수로 지칭하던 건 시온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밖에 없었다. 그랬어요, 옛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단어가 여기 쓰였다고요. 큰 성, 구약, 율법주의, 옛 성전, 요걸 바벨론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바벨론이 누굴 다스리느냐 하면 땅의 왕들을 다스린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선악과 먹고 임금 되기 위해 하나님 되기 위해 달리는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게 옛 성전,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 포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당한다니까요! 그들이요. 그러면서 그들이 무얼 깨달아야 하느냐 하면 예, 우리는 이렇게 이 바벨론에게 당해야 하는 자들이 맞습니다, 를 깨닫고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이 빼주셔야 하겠네요. 여기서 우리 힘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애쓰는 게 율법주의, 바벨론이잖아요. 열심히 목숨 걸어서 여기서 나가보겠다는 게. 그게 아니라 예, 제가 마귀 맞습니다. 난 아니지요? 가 아니에요. 난 아니지요, 가 뱀들이에요. 마귀들이라고. 가라지란 말이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네, 맞아요. 내가 이렇게 포로로 이렇게 고통당해야 맞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하고 가야 하는 거예요.


그 바벨론이 누구와 싸운다고 해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러죠? 어린 양은 누구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나왔죠? 그 말은 이들은 거기서 나올 그 어떤 자격과 근거와 조건과 열심 이런 게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벨론이 뭐와 싸운다 그래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래요. 은혜와 싸우는 거죠? 은혜와 싸우는 건 뭐겠어요? 하나님의 은혜, 어린 양, 예수와 싸우는 거? 부처? 마호메트? 율법주의 교회 안에 있는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우스 펠라기우스의, 율법주의란 말이어요. 그게 바벨론 이라는 말이어요. 어린 양과 싸운다니까요. 그래서 18절에서 그 여자 바벨론을 큰 성, 폴리스, 산 위의 동네라고 폴리스.


예수님께서 구약의 총화인 옛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라고 하셨죠? 에스겔서 17장에 가면요 바벨론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장사하는 땅이라고 불러요. 성경은 빈틈이 없어요. 장사라는 건 인간들이 자기들의 수고와 열심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 수입과 열매를 챙기는 행위를 장사라고 해요. 그게 장사하는 곳이에요. 옛 성전, 바벨론이요. 그게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서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 바벨론이라는 장사하는 집에서 어떤 것들이 거래되는지 보자고요. 인간들이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 거래돼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가 하나가 붙는데 그게 뭔지 한번 보세요. 계시록  18장 10절


계18:10---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 바벨론이여 (옛 성전)이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예수님이 옛 성전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일시간에, 영단 번에 무너져 버리죠? ) 땅의 상고들이 ( 장사치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해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붉은 옷감이요 ( 이거 조금 아까 바벨론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다) 각종 향나무와 각종 상아 기명이요 ( 이거 왕실에 다 있는 거예요) 값진 나무와 향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에서 사람의 영혼들이 팔리는 거예요. 그게 맞는 것 같아. 거기에 막 팔려가. 인간들의 가치, 자존심, 행위 힘. 이거 얻는 게 신앙생활 아냐? 말씀이 그거 아냐? 이렇게 다 팔려가요. 왕 되기 위한 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왕이 갖춰야 할 것들을 끌어모으면서 말씀까지도 그렇게 방법과 수단으로 끌어모으는 거죠. 거기에서 영혼이 팔리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거래되는지 계시록 16장 13절 보세요.


계16:13 –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 세 더러운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 내는 성령, 푸뉴마가 아니라 더러운 푸뉴마, 제가 누가복음에서 이 더러운 푸뉴마가 뭐로 번역됐는지 말씀드렸죠? 귀신 들린 자요. 더러운 푸뉴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귀신이에요, 마귀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 동격인데, 다~)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 거짓 선지자는 절에 있다? 교회에 있다? 교회에 있죠. 선지자가 왜 절에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말씀을 이야기하는데, 엉뚱한 말씀, 왜곡된 말씀, 더러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이걸 더러운 영, 더러운 푸뉴마 라고 하고, 내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으니까 그 영, 더러운 푸뉴마가 더러운 말씀이라고요. 그 더러운 말씀이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말 나와요. 여기가 바벨론이예요 여기가. 교회죠. )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취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누구에게 가서? 온천 하의 왕들, 임금 되고 싶어하는 놈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아담들을 찾아가서 이 더러운 말이, 말씀이 왜곡된 말씀이 그들을 끌어모으더니 누구와 전쟁을 하려고 해요? 어린 양, 예수와 전쟁을 하려는 게 교회란 말이어요.  그걸 아마겟돈 전쟁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나중에, 세대주의 자들의 해석처럼 나중에 어떤 시점에 저 중국의 어떤 평야에서 몇억 명이 모여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 예배당 안에서 여러분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쟁인 거예요. 은혜와 행위의 싸움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싸움, 알메니우스와 칼빈의 싸움.


계 16: 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누구를? 왕들을 모으더라. 왕들이 와서 무슨 전쟁을 해요? 세상의 왕들, 여러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왕 되고 싶어하는 자들. 그들을 모아서 은혜와 전쟁하는 게 교회예요. 그런데 대부분 팔려 간다 그래요. 대부분 팔려간다고. 왜냐하면, 그게 좋거든요. 그 바벨론에서 세상 왕들이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인간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가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난 마귀 아니에요. 난 절대 예수 안 팔아요. 내가 왜 예수 팔아요? 이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옷을 지켜라.  계시록에서 그 옷은 뭐라 그러죠? 예수의, 어린 양의 피에 빤 은혜의 옷이죠? 어니 양의 피에 빤 옷을 그들이 입었다 그러잖아요. 은혜 지키라는 거예요. 왜? 더러운 영, 더러운 말씀은 항상 그들의 열심을 독려하여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로 바꿔 입히려고 한단 말이어요. 그걸 바꿔 입히려고 하니까 이 은혜의 옷 꼭 지켜! 그러는 거예요. 꼭 지켜. 그 전쟁에서 지지 마! 꼭 지켜. 그 바벨론 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겠어요? 그들이 자기 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실제화 하여 살면서 이게 다 우리 죄 때문에 온 거고 이러한 고통의 삶이 극대화되어서 영원히 지속하는 게 지옥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지옥의 백신을 맞고 있는 거예요. 바벨론에서. 몸살의 백신은 몸살균이니까. 지옥의 백신은 지옥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서 너무 행복하고 평안하고 그러면 안 돼요. 지옥의 백신이에요. 이 삶을 살면서 이게 극대화 돼야, 이 정도가 아니라 이게 극대화된 것이 내가 처할 종국이었는데 어떻게 내가 거기를 벗어났지? 어떻게 내가 이 큰 성 바벨론의 자리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성경 전체가 이 두 성의 싸움이잖아요. 어떻게 내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그걸 갈라디아서가 뭐라 그래요? ‘사라’ 은혜의 어미. 어떻게 은혜가 나를 낳았지? 이거 고백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 옷을 지키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에 의하면 우리가 바벨론에서 마귀들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면서 고통받아 죽는 게 맞아요. 고멜처럼, 걸레가 돼서 죽잖아요. 그 자리에 신랑이 찾아가죠? 걸레를 찾아가는 거예요. 성숙한, 허벅지를 찔러가며, 은장도로 찔러가며 정절을 지킨 여자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끌려다니다가 걸레가 된 여자를 신랑이 찾아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호세아, ‘예수’예요. 호세아가.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와 창녀 고멜, 우리의 이야기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 고멜이 그렇게 만천하에 드러난 자기의 실체를, 이미 다 드러나 버렸는데, 신랑한테도 드러나고 세상에도 드러났는데 뭘 어떻게 속이겠어요? 나 사실 그렇게 안 살았어. 이게 돼요? 그 자리로 끌려 가는 게 성도란 말이어요. 여러분. 그게 성도의 첫 번째 실존 자각이에요. 내가 고멜 맞아요, 내가 뱀이에요, 내가 마귀에요, 이거.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저를 신부로 삼아주세요? 이 더러운걸? 이게 우리의 고백이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당신의 공평을 깨지 않기 위해 우리가 먹어버린 신 포도로 우리의 이가 시어야 하는데 그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십자가라는 걸 설명해주는 게 에스겔서 18장이에요. 그러니까 똑바로 살아, 가 아니라 너희를 공평하게, 내가 너희를 대했으면 너희는 다 죽어야 해. 그런데 내가 너희가 먹은 신포도주로 말미암아 내가 내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 너희를 건진 거야 그래서 17장 19장이 전부 예수만 설명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합니까? 라고 항의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낳았죠? 에스겔서 18장에서 의인이 죄인을 낳죠? 역사 속에다가 선악과 입에다가 물려서 죄인으로 내려보내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아, 나는 이런, 원래 내 처음 자리가 이건데 내 이가 시어야 하는데 예수의 이가 시게 되므로 말미암아 내가 산 거구나 하고 예수를 낳는 걸 의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가, 의인이 죄인을 낳고, 죄인이 의인을 낳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지. 너희를 이렇게 살면 다 죽고, 이렇게 살면 살아, 이거를 가르치려고 교훈하려고 그런 거 써놓은 거 아니란 말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냥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이걸 그냥 거의 몇십 명이 저한테 이메일로 보내 갖고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아이 정말 .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몇 세기 지나지 않았을 때에 전 세계 기독교 교리를 양분하는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은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평생 탈선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뭐 그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정도를 걸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목사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린 나이에 거리의 창녀들과 어울리다가 열일곱 살 연상의 여자와 동거를 해서 사생아까지 낳았고 서른두 살까지 마니교에 심취해서 인생을 탕진하다가 서른두 살에 암부로쇼스 주교를 만나서 늦깎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훌륭한 교육에 훌륭한 평판, 깨끗한 삶을 살았던 그 전자의 목사님이 펠라기우스였고 젊은 날을 창녀들과 보내면서 골수 마니교 신자로 살았던 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동시대 사람이죠. 그렇게 훌륭한 삶을 몸소 살아냈던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행함 중심으로 풀어낸 사람이에요. 신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도 거기에 반응해서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성취해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열심히 부족한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중도 탈락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죠? 그의 사상은 알미니우스에게 전해져서 알미니언주의가 탄생이 되었고 그 알미니언주의가 요한 웨슬레에게 흘러서 오늘날까지 율법주의, 인본주의 신앙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이 한건 율법주의의 수장들이었던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훌륭하고 깨끗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고, 정말 허벅지를 찔러가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부리던 사람들이었어요. 웨슬레 같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기도하고 하루 종일 성경 읽고 전도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죠? 홀리 클럽 같은 걸 만들어서 거룩한 삶을 전파하고, 경건한 삶을 독려하고 그런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반면에 율법주의의 대척점에서 오직 은혜, 오직 예수만을 외쳤던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선언하는 삶을 살았더라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삶의 열매의 측면이나 세상이 매겨낸 점수로 봐서는 율법주의를 숭앙했던 이들이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사회에 훌륭한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좀 더 밝고 깨끗하고 공평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멋지게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란 말예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아요. 요한 웨슬레를 성도라 부르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또 감리교에서 오신 분들 오해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들의 삶의 열매나 세상에의 기여도에 의해서 평가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그런 말 이예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사람인가로 평가되는 사람들이 성도란 말예요. 쉬운 말로 예수를 믿고 예수께 자신의 삶과 존재를 투신하는 자가 성도인 것이지 예수를 능력으로 삼아서 나의 변화, 나의 성숙, 나의 발전, 나의 순결, 나의 거룩 등을 세상에 증명해내는 게 성도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여전히 경건치 않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구원이 완료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가 구원이 완료되었다니까. 구원이 완료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거예요. 구원은 펠라기우스나 알마니우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하게 성장했을 때 완료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건 모든 인간에게 다 뿌려놓고 거기에 도달하는 자만 구원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그때에 선택된 자들에게 완료되어 주어지는 거란 말예요.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인간답고 싶다는 인간 보편의 꿈과 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절망이 먼저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인생들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그 배제당하는 꼴을 절대로 인정하거나 감내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목숨을 던져서라도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내 버리고 마는 거예요. 인간의 자존심을 자기 목숨보다 더 기치 있게 여기는 게 아담들인 거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되는 거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라는 이건 치기 어린 고백을 하는 자로 성숙되는 게 아니란 말예요. 나는 적어도 쟤네들하고는 달랐을 텐데, 라는 요 성숙의 자리로 달려가는 게 신앙생활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막아서면서 절대로 죽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던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마귀야 하고 불렀던 걸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런 인간 보편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 전체를 한방에 부정해버리시는 거였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서 살게 되는 거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으로 절대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 선언해 버린 거란 말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의지를 발동하여 목숨까지 걸어 십자가를 막는 게 우리의 본무가 아니라, 십자가를 의지하여 살아나는 거란 말에요, 성도는요.

 


인간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을 조금이라도 의지하게 하는 게 바로 마귀라는 걸 선언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모두가 날 버릴 거다. 제가 이번 주 수요일에 그 열둘, 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할 거예요. 예수님이 왜 열두 살에 성전에 올라갔는지, 왜 열 두 지파인지. 왜 열두 사도인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완료가 되는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에는 왜 열두 지파,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설명해 드릴 텐데. 그 열두 제자는 교회예요 . 그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교회.

 

즉 그 교회가 예수를 배신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대열에 이미 합류되어 있는 자들임을 고지하신 거예요. 너희들 다 나를 배반할 거야, 다 나 버릴 거야. 쟤네들은 다 나를 버리는데, 쟤네들은 다 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데 너희들은 걔네들과 뭐가 달라서 내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도 똑같이 다 나를 버릴 거야, 다 나를 배신할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이 너희에게 입혀진 것뿐이란다, 이 말씀 하신 거거든요. 마태복음 2631절 보세요.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

 


모든 제자가 나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랬다고요. 목숨 걸어 십자가를 막아서겠다는 거죠? 교회의 기초인 베드로 그러니까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의지가 대단해요. 자기는 절대로 예수를 떠나지 않을 거고 예수 편에서 목숨 걸고 투쟁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제자들이 다 똑같이 이야기 했다 그러죠?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됐어요? 모두가 다 예수를 버리고 떠났어요. 저주하며 부정하고 떠났다니까요. 배신 한 거죠. 누구의 모습이죠? 가롯 유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제자들 열 두 명 중에 제일 악마 같은 나쁜 놈, 모자란 놈이 아니라 열둘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 예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오죠? 그것도 제가 수요일에 설명해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우리의 대표인 거지 우리가 손가락질하면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은 삼십에 예수 안 팔았다, 이럴 대상이 아니라니까. 내가 마귀입니다. 내가 옛 뱀입니다. 내가 유다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해야 하는 자들이란 말에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유한은 절대 무한의 편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도 물어요. 목사님은 진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예전에는 거침없이 대답했어요. 그럼요, 그러니까 제가 모든 걸 다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목회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은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은 가만있어, 하나님이 누구야? 여기서부터 출발해요. 내가 진짜 하나님을 아나? 그런데 그 보이지 않은 그 하나님을 진짜 내가 사랑한다고?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거지.

 


여러분, 진짜 우리가 무한의 편을 들 수가 있어요? 창조주의 편을 피조물이 들 수 있느냐고요. 창조주가 피조물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성경에는 치사랑은 없어요. 내리사랑만 있어요. 무한의 권세가 유한을 덮는 걸 은혜라고 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창조예요. 그냥 은혜로 덮어내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독사의 새끼들임을 먼저 알아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발뒤꿈치를 물어서 예수의 피를 빨지 않으면 절대 존재일 수도 없는 자, 그게 우리잖아요.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뱀이지 뭐예요 우리가.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어요. 구원에서부터 시작해버린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은혜롭게 서로 주고받는. 당신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나도 그런데. 내가 뱀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자각과 인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바라보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620절 보세요.

 


26: 20—저물 때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걸 찍어서 주는 자가 마귀다 그랬어요, 마귀야)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제자들과 유다가 똑같은 단어로 똑같은 말을 하죠? 내니이까? 무슨 말이냐 하면 혹시 납니까? 이렇게 의심나서 물어본 게 아니라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에요. 아주 단호하게 나는 아니죠? 확실해요.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들이 오늘 다 나를 배반할 거라고 했고 이 중의 하나가 나를 판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판 거예요. 어떻게 알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날 그날까지 제자들이 뭘 갖고 싸웠어요? 누가 영의정 할 거고 누가 좌의정, 우의정 할 거야? 그거 갖고 싸웠잖아요. 그럼 그게 뭐예요? 예수 팔아 내 유익 챙기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예수 판 거지 뭐예요? 그리고 배신했잖아요. 유다랑 그들이 뭐가 달라요? 다를 거 하나도 없단 말예요.

 


그런데 이 유다를 비롯한 나머지 열한 제자가 전부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나는 아닙니다, 확실해요, 나는 아니죠! 선생님?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요게 유다가 뱀이라고 했으니까, 마귀라고 했으니까, 마귀들의 속성이에요. 나는 아니에요, 내가 왜 예수를 팔아요? 난 예수를 위해 목숨 바칠 사람이에요. 요게 마귀란 말이어요. 우리는 요 자리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자리로 올라가는 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이다, 이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한테 마귀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발뺌해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쟤는 어떨지 몰라도, 이렇게 다름과 차이를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뱀이에요. 이게 마귀란 말이어요.

 


성도는 그러한 말씀의 진술 앞에서 예, 제가 예수 배신하고 예수 팔아버린 마귀 맞습니다. 그래서 제게 십자가의 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는 자신의 처음 자리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고백을 건너뛰고 아예 생각도 안 해요. ? 여기서 얘기를 안 해줬거든요. 피차 불편한 이야기를 뭐 하려 하고, 듣느냐고요. 당신은 구원받았어요. 행복하죠? 찬송하세요. 여기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생략돼버렸다니까요. 그리고는 이제 나는 아니지요? 라는 이 다름과 차이를 증명하는 걸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편이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 가 서로에게 죄를 전가했던 동일한 모습인 거예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에요. 얘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에요. 결국, 어디까지 올라가요? 하나님이 만들어낸 저 여자 때문이에요. 하나님까지 탄핵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그게 마귀란 말입니다. 왜 그렇게 내 자존심을 챙겨야 해요? 내가 선악과 먹고 어떻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 됐거든요.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마귀 새끼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을 하느냐고요. 난 하나님 됐다니까요. 선악과 먹고. 요게 율법주의 아래의 아담들이라는 거예요.

 


심지어 자신의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투신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살도 불사하는 것이 마귀의 실체예요. 마귀인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죠. 거기에 어떤 단어가 씌어있는지 아세요? 메타노이아, 회개라는 단어가 씌어있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했을까요? 그런데 왜 성경이 거리에다가 메나노이아, 회개란 단어를 썼을까요? 교회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잘못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회개는 정말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아는 자의 삶 속에서 은혜에 의존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의 고백이 나오는 게 회개라고 하는 건데, 그게 회개의 목적지거든요.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가 자기가 한 일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게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얼 근거로 가롯 유다가 죄를 모르고 엉터리로 회개 했다 고 얘기를 하는가?

 


여러분 죄는요 인간의 목숨을 바쳐서 상쇄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목숨 일 억 개 갖다 줘도 상쇄 안 돼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생명이라는 건 인간의 최선의 노력으로도 생산해 내거나 쟁취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그런 말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열심과 노력이 뭐예요? 목숨 바치는 거예요. 그거 이상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가롯 유다가 이거 바치면 그 죄 상쇄 되겠죠 하고 바친 거거든요. 그건 죄가 뭔지 모르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우리도 이 신앙의 절정, 이걸 순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롯 유다식의 순교를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많아요. 그런데 그건 다른 종교에도 많아요. 그런 순교는요.

 


마귀는 끝까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기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일을 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를 했다면 제가 예수님 판 자 맞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갔어야지, 내 죄는 내가 목숨 끊어서 책임질 게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말예요. 그래서 그 회개가 가짜 회개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 자신의 존재를 투신해야 하는 거예요. 마귀는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투신해요. 그건 순교 아니에요. 그건 죄예요. 제사장들은 어땠습니까? 그들도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절대 만지지 않았어요. 부정한 거라고 성전 고 에다가 다시 안 넣었어요. 안 만졌어요. 도로 가져가! 너무너무 값어치 없게 취급했죠? , 이거 나그네의 밭이나 사라.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밭이나 사라. 이렇게 가치 없게 여긴 거예요. 그 핏 값을.

 


그리고 우리가 이걸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내가 관계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돈을 안 만진 거예요. 부정한 돈이라고. 이게 난 아니죠? 에요. 난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 예수 안 죽였어요. 쟤네들이랑 다르거든요. 그게 마귀란 말에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 마귀라는 뜻이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야. 그리고 독사의 새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 그래요? 네가 마귀다, 그러죠? 예수님 보고. 네가 바알세불의 권능을 힘입어 이적을 한다 그러잖아요. 서로 마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마귀로 여겨요. 진짜 하나님을 마귀로 보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거 아닌가요? 나의 천국, 나의 구원, 나의 보람, 나의 가치, 나의 변화, 조금 저급한 사람은 질병 치유, 일취월장, 성공, 번역, 귀신 쫓아냄, 문제 해결. 이런 거위해 예수 믿죠? 그러면 예수 팔아 나의 유익 챙긴 유다, 뱀 새끼와 우리가 지금 뭐가 다르냐고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위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그거 위해서 우리 예수 믿잖아요. 여전히 우리는 올바른 신앙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뱀 새끼 같은 삶을 살고 있단 말이어요. 지금요.

 

그런데 그게 올바른 신앙이라고 너무 많이 들어왔고 세뇌되어서 이게 그냥 옳은 건 줄 알고 가는 것뿐이라니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그게 뱀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맞습니다, 제가 뱀입니다.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절대 만지지 않았어요. 부정한 거라고 성전 고에다가 다시 안 넣었어요. 안 만졌어요. 도로 가져가! 너무너무 값어치 없게 취급했죠? , 이거 나그네의 밭이나 사라.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밭이나 사라. 이렇게 가치 없게 여긴 거예요. 그 핏 값을.

 


그리고 우리가 이걸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내가 관계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돈을 안 만진 거예요. 부정한 돈이라고. 이게 난 아니죠? 에요. 난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 예수 안 죽였어요. 쟤네들이랑 다르거든요. 그게 마귀란 말에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 마귀라는 뜻이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야. 그리고 독사의 새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 그래요? 네가 마귀다, 그러죠? 예수님 보고. 네가 바알세불의 권능을 힘입어 이적을 한다. 그러잖아요. 서로 마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마귀로 여겨요. 진짜 하나님을 마귀로 보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거 아닌가요? 나의 천국, 나의 구원, 나의 보람, 나의 가치, 나의 변화, 조금 저급한 사람은 질병 치유, 일취월장, 성공, 번역, 귀신 쫓아냄, 문제 해결. 이런 거위해 예수 믿죠? 그러면 예수 팔아 나의 유익 챙긴 유다, 뱀 새끼와 우리가 지금 뭐가 다르냐고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위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그거 위해서 우리 예수 믿잖아요. 여전히 우리는 올바른 신앙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뱀 새끼 같은 삶을 살고 있단 말에요 지금요. 그런데 그게 올바른 신앙이라고 너무 많이 들어왔고 세뇌되어서 이게 그냥 옳은 건 줄 알고 가는 것뿐이라니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그게 뱀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맞습니다, 제가 뱀 입니다 난 아니에요, 우리 조상이 신 포도 먹었다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의 이를 시게 만드세요?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러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읍소하느냐 하면 하나님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요.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조상이 죄를 지었으면 조상에게 죄를 물으셔야지 왜 우리에게 죄를 물으세요? 난 아니죠?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너희는 너희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말씀하시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주세요. 185절 보세요.

 


18: 5---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매일 성경인지 뭔지 큐티 책의 성경본문이 아마 요즘 에스겔서였던 모양이에요. 많은 분이 이 에스겔서 18장의 내용을 들이밀면서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당신은 왜 이거 아니라고 얘기하느냐고 많이 물어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이걸 택한 거거든요. 여러분 보시면 어떠세요? 똑바로 살아 그럼 살려줄게, 그 말처럼 보이죠? 잘 살아, 착하게 잘 살아, 똑바로 살아 그럼 살려줄게. 이 말은 그렇게 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공평 공평하는데 그 공평으로 살려면 이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너희 지금 내 앞에서 공평, 공평하는데 이게 내가 원하는 수준이거든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의인이 낳은 아이의 이야기를 또 들려주세요. 바로 밑에 보세요. 10.

 


18: 10-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둔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버지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아들이 자동으로 그 의로움을 상속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내적 치유니 이런 건 다 개소리예요, 그죠? 이게 공평이에요. 악인도 자신의 죄로, 의인도 자신의 의로 죽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공평이에요. 하나님의 공평. 이게 바로 너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내 앞에서 공평을 이야기 하느냐? 이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죄인이 또 아들을 낳아요.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반복하여 이랬다저랬다 하나님이 비유를 들어주세요.

 


18: 14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19-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법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동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의인인 아비의 의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 거고 죄인인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유전 안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보낸 바벨론에서 그걸 확실히 인정하고 하나님,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바벨론에서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저는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바벨론에 보낸 거란 말예요. 그런데 거기에 간 하나님의 백성, 인간들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적어도 그 패악한 그 조상들과 우리는 다르단 말이어요. 그런데 왜 우리를 그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세요? 왜 그들의 죄를 우리에게 대물림하세요? 이렇게. 억지를 부린 거예요.

 


이것이 현재 바벨론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일차적으로 이 바벨론에서, 이 세상,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교회 안에 있어요. 바벨론은. 바벨론에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 이걸 실제화 하여 살아가면서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취급받아 마땅합니다. ? 제가 뱀이거든요. 저는 몰랐는데요, 진짜 제 신앙생활은 저를 위해서 한 게 맞았어요. 예수님이 그런 유다를 보고 마귀라고 했는데 내가 유다와 다른 게 뭐 있어요? 이거 고백하고 가는 게 성도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아니에요. 쟤랑은 다르잖아요? 이렇게 열심히 했잖아요. 이렇게 헌금 열심히 했고 이렇게 주일 성수했고 이렇게 선교 열심히 다녔는데 왜 나에게 하나님, 복을 주셔야지 왜 이런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허락하세요? 하나님 참 원망스럽네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자본주의가 뭡니까? 내가 해낸 만큼 보상을 주는 게 자본주의 아녜요? 이게 인본주의 아녜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이게 우리의 고백 아닙니까? 그게 펠라기우스고 알미니우스 잖아요?

 


어디서 줏어들은 건 있어서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는 이단이야 그래놓고 자기들이 똑같이 그렇게 산다니까요. 성도의 삶이 그래서 이렇게 고단한 바벨론 포로의 삶으로 점철되는 거예요. 뺏기고 수탈당하고 쫓기고 쪽팔리고 부끄럽고, 이게 포로의 삶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취급당해야 맞습니다. 그래야 해요.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제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성도예요. 그런데 전부 다 나는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적어도 난 아닙니다. 난 목숨 걸고 예수님 편에 설 거예요. 이걸 증명해 내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어요, 교회 안에서. 전부 눈이 충혈 돼서는. 열심히 살으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노하세요. 24절 보세요.

 


18: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들을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거 아니니? 나는 공평해. 지금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 포로로 보낸 건 너희의 죄 때문에 보낸 거야. 너희의 불가능함과 나약함 그거 깨달으라고 보낸 거야. 그런데 내 앞에서 감히 공평을 이야기 하느냐? 너희 이 공평이 뭔 줄 알아? 물어보시잖아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바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에요. 여기가 지금 바벨론이라 그랬어요.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인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여러분 아세요?

 


말씀이 곡해, 되고 오해되는 예배당 안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안, 교회는 묵시 속에 보이지 않는 교회와,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지역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하기 위해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계속 또 오네요, 이렇게. 원래 여기는 깨지고 쪼개지면서 하늘의 교회가 이게 진짜 교회 구나를 배우는 게 이게 교회거든요. 우리는 이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요. 이 안에 있는 가라지들이 그 말씀을 뭐로 받아들이느냐하면 윤리, 도덕, 규례, 규범, 처세 이런 걸로 받아들여요. 한 마디로 역사 속에서 나에게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나의 보람을 증대시키는 도구요 방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죠? 요게 바벨론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뱀 새끼 맞는구나! 그 말씀이, 빛이신 예수가 어둠 앞에 섰을 때 어둠이 폭로됐단 말이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자기를 감추지 못했단 말이어요. 성도는 그 말씀을 제대로 받고 그걸 예수로 받아들여요. 그리고는 내 안에 있는 그 예수, 그이 예수가 증거 되기 위한 껍데기가 깨져야 한단 말이어요. 그런데 가라지들은 이 껍데기를 강화하고 껍데기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 말씀을 사용한단 말이어요. 그게 바벨론 이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시록 174절 보세요.

 


17:4---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이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은 왕의 옷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선에 금잔을 가졌는데 (이게 다 왕 거예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이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인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또 내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제가 지난주에 큰 성, 산 위에 있는 마을, 이게 폴리스라 그랬죠? 그 단어란 말이어요.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마을이 뭐였어요? 여성 단수, 산 위에 있는 마을 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여성 단수로 지칭하던 건 시온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밖에 없었다. 그랬어요, 옛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단어가 여기 쓰였다고요. 큰 성, 구약, 율법주의, 옛 성전, 요걸 바벨론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바벨론이 누굴 다스리느냐 하면 땅의 왕들을 다스린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선악과 먹고 임금 되기 위해 하나님 되기 위해 달리는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게 옛 성전,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 포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당한다니까요! 그들이요. 그러면서 그들이 무얼 깨달아야 하느냐 하면 예, 우리는 이렇게 이 바벨론에게 당해야 하는 자들이 맞습니다, 를 깨닫고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이 빼주셔야 하겠네요. 여기서 우리 힘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애쓰는 게 율법주의, 바벨론이잖아요. 열심히 목숨 걸어서 여기서 나가보겠다는 게. 그게 아니라 예, 제가 마귀 맞습니다. 난 아니지요? 가 아니에요. 난 아니지요, 가 뱀들이에요. 마귀들이라고. 가라지란 말이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 맞아요. 내가 이렇게 포로로 이렇게 고통당해야 맞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하고 가야 하는 거예요.

 


그 바벨론이 누구와 싸운다고 해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러죠? 어린 양은 누구예요? 애급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나왔죠? 그 말은 이들은 거기서 나올 그 어떤 자격과 근거와 조건과 열심 이런 게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벨론이 뭐와 싸운다. 그래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래요. 은혜와 싸우는 거죠? 은혜와 싸우는 건 뭐겠어요? 하나님의 은혜, 어린 양, 예수와 싸우는 거? 부처? 마호메트? 율법주의 교회 안에 있는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우스 펠라기우스의, 율법주의란 말이어요. 그게 바벨론 이라는 말이어요. 어린 양과 싸운다니까요. 그래서 18절에서 그 여자 바벨론을 큰 성, 폴리스, 산 위의 동네라고 폴리스.

 


예수님께서 구약의 총화인 옛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라고 하셨죠? 에스겔서 17장에 가면요 바벨론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장사하는 땅이라고 불러요. 성경은 빈틈이 없어요. 장사라는 건 인간들이 자기들의 수고와 열심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 수입과 열매를 챙기는 행위를 장사라고 해요. 그게 장사하는 곳이에요. 옛 성전, 바벨론이요. 그게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서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 바벨론이라는 장사하는 집에서 어떤 것들이 거래되는지 보자고요. 인간들이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 거래돼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가 하나가 붙는데 그게 뭔지 한번 보세요. 계시록 1810

 


18: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 바벨론이여 (옛 성전)이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예수님이 옛 성전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일 시간에, 영단 번에 무너져 버리죠? ) 땅의 상고들이 ( 장사치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해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붉은 옷감이요 ( 이거 조금 아까 바벨론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다) 각종 향나무와 각종 상아 기명이요 ( 이거 왕실에 다 있는 거예요) 값진 나무와 향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에서 사람의 영혼들이 팔리는 거예요. 그게 맞는 것 같아. 거기에 막 팔려가. 인간들의 가치, 자존심, 행위 힘. 이거 얻는 게 신앙생활 아냐? 말씀이 그거 아냐? 이렇게 다 팔려가요. 왕 되기 위한 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왕이 갖춰야 할 것들을 끌어 모으면서 말씀까지도 그렇게 방법과 수단으로 끌어 모으는 거죠. 거기에서 영혼이 팔리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거래되는지 계시록 1613절 보세요.

 


16:13 –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 세 더러운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 내는 성령, 푸뉴마가 아니라 더러운 푸뉴마, 제가 누가복음에서 이 더러운 푸뉴마가 뭐로 번역됐는지 말씀드렸죠? 귀신 들린 자요. 더러운 푸뉴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귀신이에요, 마귀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 동격인데, ~)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 거짓 선지자는 절에 있다? 교회에 있다? 교회에 있죠. 선지자가 왜 절에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말씀을 이야기하는데, 엉뚱한 말씀, 왜곡된 말씀, 더러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이걸 더러운 영, 더러운 푸뉴마 라고 하고, 내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으니까 그 영, 더러운 푸뉴마가 더러운 말씀이라고요. 그 더러운 말씀이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말 나와요. 여기가 바벨론 이예요 여기가. 교회죠. )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취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누구에게 가서? 온천 하의 왕들, 임금 되고 싶어 하는 놈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아담들을 찾아가서 이 더러운 말이, 말씀이 왜곡된 말씀이 그들을 끌어 모으더니 누구와 전쟁을 하려고 해요? 어린 양, 예수와 전쟁을 하려는 게 교회란 말이어요. 그걸 아마겟돈 전쟁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나중에, 세대주의 자들의 해석처럼 나중에 어떤 시점에 저 중국의 어떤 평야에서 몇 억 명이 모여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 예배당 안에서 여러분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쟁인 거예요. 은혜와 행위의 싸움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싸움, 알메니우스와 칼빈의 싸움.

 


16: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누구를? 왕들을 모으더라. 왕들이 와서 무슨 전쟁을 해요? 세상의 왕들, 여러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왕 되고 싶어 하는 자들. 그들을 모아서 은혜와 전쟁하는 게 교회예요. 그런데 대부분 팔려 간다 그래요. 대부분 팔려간다고. 왜냐하면, 그게 좋거든요. 그 바벨론에서 세상 왕들이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인간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가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난 마귀 아니에요. 난 절대 예수 안 팔아요. 내가 왜 예수 팔아요? 이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옷을 지켜라. 계시록에서 그 옷은 뭐라 그러죠? 예수의, 어린 양의 피에 빤 은혜의 옷이죠? 어니 양의 피에 빤 옷을 그들이 입었다 그러잖아요. 은혜 지키라는 거예요. ? 더러운 영, 더러운 말씀은 항상 그들의 열심을 독려하여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로 바꿔 입히려고 한단 말이어요. 그걸 바꿔 입히려고 하니까 이 은혜의 옷 꼭 지켜! 그러는 거예요. 꼭 지켜. 그 전쟁에서 지지 마! 꼭 지켜. 그 바벨론 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겠어요? 그들이 자기 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실제화 하여 살면서 이게 다 우리 죄 때문에 온 거고 이러한 고통의 삶이 극대화되어서 영원히 지속하는 게 지옥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지옥의 백신을 맞고 있는 거예요. 바벨론에서. 몸살의 백신은 몸살 균이니까. 지옥의 백신은 지옥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서 너무 행복하고 평안하고 그러면 안 돼요. 지옥의 백신이에요. 이 삶을 살면서 이게 극대화 돼야, 이 정도가 아니라 이게 극대화된 것이 내가 처할 종국이었는데 어떻게 내가 거기를 벗어났지? 어떻게 내가 이 큰 성 바벨론의 자리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성경 전체가 이 두 성의 싸움이잖아요. 어떻게 내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그걸 갈라디아서가 뭐라 그래요? 사라 은혜의 어미. 어떻게 은혜가 나를 낳았지? 이거 고백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 옷을 지키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에 의하면 우리가 바벨론에서 마귀들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면서 고통 받아 죽는 게 맞아요. 고멜처럼, 걸레가 돼서 죽잖아요. 그 자리에 신랑이 찾아가죠? 걸레를 찾아가는 거예요. 성숙한, 허벅지를 찔러가며, 은장도로 찔러가며 정절을 지킨 여자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끌려 다니다가 걸레가 된 여자를 신랑이 찾아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호세아, 예수예요. 호세아가.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와 창녀 고멜, 우리의 이야기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 고멜이 그렇게 만천하에 드러난 자기의 실체를, 이미 다 드러나 버렸는데, 신랑한테도 드러나고 세상에도 드러났는데 뭘 어떻게 속이겠어요? 나 사실 그렇게 안 살았어. 이게 돼요? 그 자리로 끌려가는 게 성도란 말이어요. 여러분. 그게 성도의 첫 번째 실존 자각이에요. 내가 고멜 맞아요, 내가 뱀이에요, 내가 마귀에요, 이거.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저를 신부로 삼아주세요? 이 더러운걸? 이게 우리의 고백이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당신의 공평을 깨지 않기 위해 우리가 먹어버린 신 포도로 우리의 이가시어야 하는데 그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십자가라는 걸 설명해주는 게 에스겔서 18장이에요. 그러니까 똑바로 살아, 가 아니라 너희를 공평하게, 내가 너희를 대했으면 너희는 다 죽어야 해. 그런데 내가 너희가 먹은 신포도주로 말미암아 내가 내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 너희를 건진 거야 그래서 1719장이 전부 예수만 설명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합니까? 라고 항의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낳았죠? 에스겔서 18장에서 의인이 죄인을 낳죠? 역사 속에다가 선악과 입에다가 물려서 죄인으로 내려 보내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아, 나는 이런, 원래 내 처음 자리가 이건데 내 이가 시어야 하는데 예수의 이가 시게 되므로 말미암아 내가 산 거구나 하고 예수를 낳는 걸 의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가, 의인이 죄인을 낳고, 죄인이 의인을 낳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지. 너희를 이렇게 살면 다 죽고, 이렇게 살면 살아, 이거를 가르치려고 교훈하려고 그런 거 써놓은 거 아니란 말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냥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이걸 그냥 거의 몇 십 명이 저한테 이메일로 보내 갖고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아이 정말 .

 


여러분 원래 이 우리의 고난과 슬픔과 해체와 부정의 삶은 원래 우리 거 맞아요. 이게 원래 우리 거예요. 그런데 그 지옥을 예수가 다 가져가신 거예요. 이 지옥을 예수가 다 가져가셔서 예수의 이가 시리게 된 거예요. 이게 십자가라니까요. 어디서 공평을 이야기해요? 공평을 이야기 하면 다 죽어요. 내가 행한 만큼 상 주세요? 이거 공평하게 대해 달라는 거죠? 다 죽어요. 우리는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챙기려 해서는 안 돼요. 종교행위나 선하고 착한 일들로 자신의 마귀 됨을 가려버리고 난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데 왜 날 이렇게 대우해요? 아니라고요. 지금 우리는 전부 우리 자신의 번영과 성공과 보람과 가치를 위해 신앙생활 해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애들도 그냥 좋은 교육환경, ?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후진 교육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시키겠어? 그러니까 그냥 교육 시설을 잘해 놔야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식이 생겨 버린 거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기보다는 교육부를 잘 만들어야 해. 애들을 다 구슬려서 부모를 붙들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이 성공신학, 번영의 신학 요걸 그대로 자기 마음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알량한 비루한 적선의 윤리, 뭐하나 ! 그냥 살짝 던져 주고 착한 일 조금 해 놓고 그 전체를 그냥 가려버리려고 하는,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우리의 실체를 위장하려고 하거나 은닉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리자는 거예요. 그런 거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하세요. 열심히 하시고 새벽마다 나가서 홈리스들에게 빵도 나눠 주고 그러세요. 나에게 만날 받아먹던 거지가 저 옆에서 받아먹으면 배 아프고 이런 것도 경험해 보시고. 왜 나한테 얻어먹다가 너는 왜 옆으로 가니? 요즘 교회들이 그거 갖고 싸운다면서요? 나 그거 듣고 깜짝 놀랐어요. 왜 내 거지 뺏어 가느냐고. 실적을 올려야 하는데 아, 거지들이 맛있는 쪽에 가서 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왕 흉내를 내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예수 앞에 항복하는 자여야 하는 거예요. 난 아니죠? 가 아니라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저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아니, 지금 내 삶이 이게 죽은 시체의 삶 맞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대 살아날 수 없는 자 맞습니다. 이 고백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18장 바로 다음, 뭐예요? 19. 1절에서 너희는 장송곡을 불러야 해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가를 지어서 불러야 한다고. 너희는 다 죽은 거 맞아, 이런다고요. 에스겔서 191절 보세요.

 


19: 1---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내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그 새끼 하나를 키우면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급 땅으로 간지라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 왕래하며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음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를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이방이 둘려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갈고리로 꿰고 철롱에 넣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서 그 소리로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네 피의 어미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 분노 중에 밟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실과는 동풍에 마르고 그 견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삼킨바 되고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서 그 실과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 만한 견강한 가지가 없도다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뭐가 애가래요? 사자 새끼들, 포도나무의 가지들, 이거 전부 쓸모없는 것이더라,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도다. 이게 애가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애가라고 번역이 된 단어 티나가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이라고요. 너희는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뭐 공평? 너희는 시체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공평? 애가를 만들어 불러라 그래요. 그리고는 비유를 드시는데 그 비유에 두 사자, 암사자, 포도나무, 홀이라는 게 등장하죠? 어디서 보셨어요?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유다에게, 유다에게 준 유언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여기에 등장하죠? 지금 창세기 49장의 그 이야기를 여기서 그냥 그대로 풀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거를 알면 창세기 49장이 풀리고 49장이 풀리면 요게 풀리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 같죠? 이 비유 하나도 어려운 거 아니에요.

 


첫 번째 사자가 애급으로 끌려가고 두 번째 사자가 바벨론으로 끌려가죠? 그리고 마지막 포도나무 가지, 견강한 가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작살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요 바벨론의 시점에서 이게 어떻게 풀리는지 금방 알아요. 애급에 잡혀간 암사자 누구? 열왕기상에 나오잖아요. 여호아하스, 바벨론에 잡혀간 암사자 누구? 여호야긴, 그럼 마지막 포도나무 가지로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한 왕 누구? 시드기야. 이들이 다 권세, 홀을 가진 왕이죠? 이 홀을 가진 왕이란 말이어요. 그런데 이들이 다 뭐로 끝났어요? 하나님이 바벨론에 내게로 돌아와라, 은혜로 돌아오라고 보냈더니 애급에 가서 원군 청해, 임기응변, 권모술수, 우리들의 힘으로 한 번 여기서 빠져나가 보자 그랬던 왕들이잖아요 이게. 그게 다 눈알이 뽑히고 다 죽어요. 이 왕들은 아니죠? 이 홀들은 아닌 거예요 그죠? 권세 자의 지팡이가 홀이니까. 이것들은 아닌 거지요? 그러면 진짜 홀을 가진 진짜 왕이 와야 하잖아요. 그래야 이 왕들, 세상 왕들이 다 부정되고 진짜 왕이 당신의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왕의

 

자리로 끌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내는 거란 말이어요. 그럼 보자고요. 창세기 49장 보세요. 8.

 


49: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7*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야곱이 예언해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온다. 전부 유다가 되어 마귀 새끼가 되어 죽어야 하는 그 자리에 메시아가 온다고, 아들이 거기에서 낳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메시아가 사자라고 그러죠? 그리고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와 연합시켜서 이게 메시아다 그래요.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홀이, 이 왕의 흉내를 내는 가짜 왕들이 언제까지 계속 온다. 그래요 실로가 오기까지. 이 실로라는 단어는 원래 지명이었지만 원래 그것이 속한 자란 뜻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진짜 왕권을 가진 그 진짜 왕이란 뜻이에요.

 


그게 실로예요. 그래서 메시아예요. 그 진짜 왕이 오기까지 홀을 가진 자들을 계속 보내겠다는 거예요. 뭐의 모습으로? 포도나무 가지의 모습으로, 사자의 모습으로 계속 보낼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서 19장에서 그들이 다 실패한 왕으로 드러나잖아요. 그죠? 그럼, 실패한 왕으로 드러나면 이 진짜 사자, 진짜 홀을 가진 그 실로, 진짜 포도나무 가지, 이 분이 와서 그들을 다 부정해 내버려야 하는 거예요. 이게 에스겔서 17, 18, 19장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서 1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 왕이에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서 1719장에서 이 이야기를 갖다 대는 거예요. 17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독수리의 비유가 나오잖아요. 그 독수리의 비유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그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이 순을 하나 떼어다가 바벨론에다가 하나씩, 하나는 또 유대의 땅에다가 심고했는데 이것들이 다 실패해요. 그게 누구죠? 바벨론에 심은 건 여호야긴 유대에다가 심은 건 시드기야란 말이어요. 마지막 왕들이란 말이어요. 아니에요. 실패로 끝났어요. 그래서 맨 꼭대기에 있는 백향목이 뭣이냐 하면, 백향목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왕궁을 짓던 나무란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다윗의 왕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왕조의 꼭대기 맨 끝이니까 이제.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끝이니까. 끝에 것을 잘라서 바벨론에 하나 심고 유대에 심었더니 이것들이 전부 애굽 찾아가고 딴 놈들 찾아가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마치 시몬 베드로가 어, 이거 뭐야? 짖어진 그물이네 그랬을 때 예수에게 안 가고 옆에 있는 장사하는 배에게 다시스의 배에게, , 우리 좀 도와줘 그래서 물에 가라 앉은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럼 게네들은 안되니까 이제 진짜 연한 맨 마지막 맨 끝, 꼭대기가 가장 연하니까 그 연한 순을 뽑아다가 심었더니 그게 겨자씨가 되어서 오든 열방의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더라 이걸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에 갖다가 쓴 거란 말이어요. 에스겔서 17장을. 그러니까 진짜 연한 순이 와서 이 왕들을 다 부정해 내는 게 17. 18장은 아니, 우리가 왕인데요?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라는 이스라엘의 주장. 19장은 또다시, , 암사자 새끼, 포도나무 가지 그거 다 가짜잖아 그럼 누가 와야 해요? 진짜 사자가 와야 하잖아요. 너희는 다 아니야 그래서 진짜 왕이 온단다. 어떤 ? 너희가 먹은 신포도주로 대신 이가 시릴 왕이 오는 거야를 설명하는 17,18,19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진짜 사자가 어디에 등장하는지 요한계시록 5 5절로 가서 보세요.

 


5: 5—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 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진짜 사자가 누구예요? 창세기 49장에서 나온 그 사자는 요한 계시록의 이 사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역사 속에서 모든 인간이 왕 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사자다 .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슨 사자? 가짜 사자. 세상 왕들아, 너희는 아니야. 진짜 왕에게 엎드려라.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예요. 에스겔서 21장으로 가보세요. 25.

 


21:25—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 ,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왕들아! 왕 되고 싶어 하는 놈들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곧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 지어다 ( 홀딱 벗긴다는 거예요. 이제. 홀딱 벗긴다.)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요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아, 왕들아 공평 이야기하고 난 아니지요? 이거 증명하려고 사는 왕들아 너희는 낮아 질 거야. 예수님이 이것을 인용 해다가 쓴 거예요.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려드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거니와 마땅히 얻을 자가 오면

 

 (마땅히 얻을 자가 뭐라 그랬어요? 아까. 원래 그것이 속한 자, 실로, 실로가 오면)

 

-- 그에게 주리라

 

세상 왕들의 면류관을 몽땅 벗겨 버리고 그 왕들을 계속 죽여 버리시겠다는 거예요. 이게 마지막인데 이걸 우리가 역사와 인생 속에서 미리 선험 하여 사는 거예요. 이게 지옥이거든요. 이 지옥을 미리 사는 거예요. 그래서 만날 벗겨지는 거예요. 뭘 해도 보람도 못 챙기고 칭찬도 못 받고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보상도 안 오는 것 같고 그런 거, 그게 잘 가는 거란 말이어요. 여러분. 이게 바로 역사와 인생이 증명해 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종합하면 무슨 얘기가 되는 거예요? 너희는 이 세상에서 장송곡을 부르면서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죽은 시체가 맞습니다. 이게 애가잖아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올바른 자 인식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과 역사의 힘을 의지하여 그 사망의 상태에서 빠져나오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고 실로로 오시는 하늘의 진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해야 할 바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부정하는 게 쉬워요? 애가예요. 그래서 애통이에요. 그래서 복 있는 자여 너는 애통해 하는 자니라. 그게 애가예요. 나 죽었네요. 이거. 마태복음 5 4.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애가 먼저 부르는 거예요. 내가 원수 맞아요. 내가 마귀 맞습니다. 내가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이 애가. 죽어 마땅합니다. 이거 먼저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자들을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계시록 21 4

 


21: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

 

어느 자리예요 이게? 하나님 나라가 이제  완성되어 가시적으로 열리는 자리 그럼 그 자리까지 뭐가 있다는 거예요? 눈물, 애통해하는 것, 곡하는 것이 그 때까지 있다는 뜻이에요.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만 하나님이 닦아 준다고요.그 애통이 있냐고요? 아니면 서로 나는 아니죠? 이걸 증명하기 위해 사냐고요? 그리고 서로,  , 우리는 아니지? 그러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이러고 살고 있냐고요?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애가를 부르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이 애가 먼저 부르지 못하면 절대 찬송 못 해요. 그러니까 헛된 찬송이 예배당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는 거예요. 난 왕이에요~. 난 잘났어요. 난 이렇게 종교행위를 열심히 한답니다. 나 신앙생활 이렇게 열심히 한답니다. 난 아니죠? 이걸 찬양인 줄 알아요. 간증도 전부 그거예요. 나는 이렇게 다르게 대우받았다는 거죠. ? 열심히 했으니까.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먼저 해야 할 건 올바른 자아 인식과 인정이에요. 나는 마귀 맞아요. 난 뱀 맞습니다. 예수님 뒤꿈치에서 피 빨아 먹지 않으면 절대 살 수 없는 뱀 맞습니다. 이 인식이 먼저인 거고 그로 말미암는 애통인 거고 거기에서 예수로의, 은혜로의 투신과 예수 안으로의 함몰, 그 긍휼의 자궁 안으로의 함몰,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인 거지 우리의 왕 됨을 수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나는 아닙니다, 를 외치는 그런 자들이 돼서는 안 됩니다. 애가가 빠진 찬송은 절대 진짜 찬송이 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진짜 찬송하고 싶으시면 먼저 애가를 부르세요. 애통해하세요. 많이 우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눈물은 지옥의 백신이에요. 아파도 견디셔야 해요. 그런데 그거 우리 예수님이 다 빼앗아 갔어요, 이미. 그래서 그냥 소망이라는 걸 잠깐잠깐 붙들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는 건 우리가 길을 열심히 닦아서 예수께 가는 게 아녜요.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가 자라나는 게 아녜요. 제가 얼마 전에 프랑스 영화를 하나 봤는데 거기서 어떤 사기꾼이 한마을 사람들을 다 속여서 고속도로를 짓는대요. 이 길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중간에 큰 사막에다가 이만큼만 그냥 뚝 만들어 놨어요. 나중에 보더니 이것을 그런데 어디다 써먹어야 돼? 이게 어디로 이어져야 해요? 그런데 이어질 데가 없는 거예요. 족구장으로도 못 쓰는 거예요. 이거는.

 


길을 열심히 만들어 놨는데 이게 예수께로 안 가네? 길은 예수가 천국에서부터 뚫고 우리에게로 오는 거예요. 내가 길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길이 중간에 가시, 담 이런 것들이 마구, 마구, 걸림돌이 될 만한 게 많이 있는 거예요. 그 때 우리가 이 예수라는 길을 따라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그 길을 따라 흘러가면서 돌에도 부딪히고 담에도 막히고 가시에도 찔리면서 마땅합니다, 제가 예수께로 가는 길에 이런 길이 있는 게 마땅합니다, 라고 순응하는 자가 되는 거지 예수를 믿어 그런 것을 제거하는 게 신앙생활이 아녜요. 우리가 길을 더더군다나 준설해 가는 것도 신앙생활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끌려가는 게 맞고 종국의 지점에서 우리 예수님 만난다면, 오늘 이 삶, 살아보겠습니다.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살아 있으면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로마서 056 (찬송을 하기 전에 먼저 애가를 부르라) (로마 5.10-11)

 

※ 이 녹취본은 연님이 오랜기간 손으로 필사한 자료를 지서모 맴버들이 옮겨 적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자 로마서 56번째 

로마서 5장 10절에서 11절까지 말씀 우리 함께 봉독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몇 세기 지나지 않았을 때에 전 세계 기독교 교리를 양분하는 두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평생 탈선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뭐 그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정도를 걸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목사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린 나이에 거리의 창녀들과 어울리다가 열 일곱 살 연상의 여자와 동거를 해서 사생아까지 낳았고 서른 두 살까지 마니교에 심취해서 인생을 탕진하다가 서른두 살에 암부로쇼스 주교를 만나서 늦깎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훌륭한 교육에 훌륭한 평판 깨끗한 삶을 살았던 그 전자의 목사님이 펠라기우스였고

 젊은 날을 창녀들과 보내면서 골수 마니교 신자로 살았던 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동시대 사람이죠 그렇게 훌륭한 삶을 몸소 살아냈던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행함 중심으로 풀어낸 사람이에요 신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도 거기에 반응해서 신인협력으로 구원을 성취해가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열심이 부족한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중도탈락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죠 

그의 사상은 알미니우스에게 전해져서 알미니언주의가 탄생이 되었고 그 알미니언주의가 요한 웨슬레에게로 흘러서 오늘날까지 율법주의 인본주의 신앙의 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이한건 율법주의의 수장들이었던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훌륭하고 깨끗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고 정말 허벅지를 찔러가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부리던 사람들이었어요 웨슬레 같은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기도하고 하루 종일 성경읽고 전도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죠 그리고 홀리 클럽 같은 걸 만들어서 거룩한 삶을 전파하고 경건한 삶을 독려하고 그런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반면에 

그 율법주의의 대척점에서 오직 은혜 오직 예수만을 외쳤던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선험하는 삶을 살았더라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삶의 열매의 측면이나 세상이 매겨낸 점수로 봐서는 율법주의를 숭앙했던 이들이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사회에 훌륭한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좀 더 밝고 깨끗하고 공평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데에 멋지게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란 말예요 그 사람들이요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아요 

요한 웨슬레를 성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또 감리교에서 오신 분들 오해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들의 삶의 열매나 세상에의 기여도에 의해서 평가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그런 말이예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사람인가로 평가되는 사람들이 성도란 말예요 

쉬운 말로 예수를 믿고 예수께 자신의 삶과 존재를 투신하는 자가 성도인 것이지 

예수를 능력으로 삼아서  나의 변화 나의 성숙 나의 발전 나의 순결 나의 거룩 등을 세상에 증명해내는 게 성도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여전히 경건치 않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구원이 완료됐다 

그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가 구원이 완료됐다는 거니까 

구원이 완료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거예요 

구원은 펠라기우스나 알마니우스의 주장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하게 성장했을 때 완료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걸 모든 인간들에게 다 뿌려놓고 거기에 도달하는 자만 구원해 내는게 아니라 

우리가 원수되었을 그때에 

선택된 자들에게 완료되어 주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인간답고 싶다는 인간 보편의 꿈과 포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절망이 먼저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처럼의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인생들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그 배제당하는 꼴을 절대로 인정하거나 감내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목숨을 던져서라도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챙겨내 버리고 마는 거예요 

인간의 자존심을 자기 목숨보다 더 기치 있게 여기는 게 아담들인 거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먼저 해야 되는 거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도록 했을 텐데 라는 이런 치기 어린 고백을 하는 자로 성숙되는 게 아니란 말예요 

나는 적어도 쟤네들하고는 달랐을 텐데 요 성숙의 자리로 달려가는 게 신앙생활의 본무가 아니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막아서면서 절대로 죽으시면 안됩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던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마귀야  라고 불렀던걸 잊으시면 안 돼요 

그런 인간 보편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 전체를 한방에 부정해 버리시는 거였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서 살게 되는 거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으로 

절대 예수님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 선언해 버린 거란 말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의지를 발동하여 목숨까지 걸어 십자가를 막는 게 우리의 본무가 아니라 

십자가를 의지하여 살아나는 거란 말에요 성도는요 

인간의 의지나 결심이나 능력을 조금이라도 의지하게 하는 게 바로 마귀다 라는 걸 선언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모두가  날 버릴 거다 

제가 이번 주 수요일날 그 열둘 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왜 열두 살에 성전에 올라갔는지 

왜 열 두 지파인지 왜 열두 사도인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완료가 되는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에는 왜 열두 지파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설명해 드릴 텐데 그 열두 제자는 교회예요 그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교회 즉 


그 교회가 예수를 배신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대열에 이미 합류해 있는 자들임을 고지하신 거예요 

너희들 다 나를 배반할 거야 다 나 버릴 거야 쟤네들은 다 나를 버리는데 쟤네들은 다 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데 

니네들은 걔네들과 뭐가 달라서 구원한게 아니라 니네들도 똑같이 다 나를 버릴거야 다 나를 배신할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이 너희에게 입혀진것 뿐이란다 이 말씀 하신 거거든요 


마태복음 26장 31절 보세요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니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 하니라 


모든 제자가 나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랬다고요 .목숨 걸어 십자가를 막아서겠대는 거죠. 교회의 기초인 베드로 

그러니까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의지가 대단해요 자기는 절대로 예수를 떠나지 않을 거고 예수 편에서 목숨 걸고 투쟁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제자들이 다 똑같이 이야기 했다 그러죠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됐어요 모두가 다 예수를 버리고 떠났어요 저주하며 부정하고 떠났다니까요 

배신 한 거죠 누구의 모습이죠 가롯 유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제자 열 두 명 중에 제일 악마 같은 나쁜 놈 모자란 놈이 아니라 열둘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다 예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오죠 

그것도 제가 주일 아니 수요일날 설명해드릴께요 가롯 유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우리의 대표인 거지 

우리가 손가락질하면서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은 삼십에 예수 안 팔았다 이럴 대상이 아니래니깐요 

내가 마귀입니다 내가 옛뱀입니다 내가 유다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해야 하는 자들이란 말에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유한은 절대 무한의 편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도 물어요 목사님은 진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세요 예전에는 거침없이 대답했어요 그럼요 그러니까 제가 모든 걸 다 이렇게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목회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은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가만있어봐 하나님이 누구야 여기서부터 출발해요 내가 진짜 하나님을 아나 그런데 그 보이지 않은 그 영이신 하나님을 진짜 내가 사랑한다고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거지 여러분 진짜 우리가 무한의 편을 들 수가 있어요 창조주의 편을 피조물이 들 수 있느냐구요 창조주가 피조물의 편을 들어줘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는 치사랑은 없어요 내리 사랑만 있어요 무한의 권세가 유한을 덮는 걸 은혜라 그러고 거기서 발생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창조예요 그냥 은혜로 덮어내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되요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독사의 새끼들임을 먼저 알아야 되는 거란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발뒤꿈치를 물어서 예수의 피를 빨지 않으면 절대 존재일수도 없는 자 그 우리잖아요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우리는 존재할 수도 없는거예요 그러니까 뱀이지 뭐예요 우리가 근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어요 그냥 구원에서부터 시작을 해버린다 말이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은혜롭게 서로 주고 받는 거에요 당신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나도그런데 내가 뱀이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자각과 인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0절 보세요 저물 때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걸 찍어서 주는 자가 마귀다 그랬죠 그죠 마귀야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제자들과 유다가 똑같은 단어로 똑같은 말을 하죠 내니이까 메티 에고 에이미 랍비 그러죠 이게 무슨 말이냐면 혹시 납니까 이렇게 의심나서 물어본 게 아니라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그 뜻이예요 아주 단호하게 나는 아니죠 확실해요 나는 아닙니다 선생님 이 뜻이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니들이 오늘 다 나를 배반할 거라고 그랬고 이 중의 하나가 다 나를 판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판 거예요 어떻게 알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날 그날까지 제자들이 뭘 갖고 싸웠어요 누가 영의정 할거고 누가 좌의정 누가 우의정 할 거야 이거 갖고 싸웠잖아요 그럼 그게 뭐예요 예수 팔아 내 유익 챙기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예수 판 거지 뭐예요 그리고 배신했잖아요 유다랑 그들이 뭐가 달라요 다를 거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를 비롯한 나머지 열한 제자가 전부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는 아닙니다 확실해요 나는 아니죠 선생님 이렇게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요게 유다가 뱀이라 그랬으니까 마귀라고 했으니까 마귀들의 속성이에요 나는 아니에요 내가 왜 예수를 팔아요 난 예수를 위해 목숨 바칠 사람이에요 요게 마귀라는 거에요 우리는 요 자리로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자리로 올라가는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이다 이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한테 마귀다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어요 발뺌을 해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쟤는 어떨지 몰라도 이렇게 다름과 차이를 주장하는 거 요게 뱀 요게 마귀라는 거에요 성도는 그러한 말씀의 진술 앞에서 예 제가 예수 배신하고 예수 팔아버린 마귀 맞습니다 그래서 제게 십자가의 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자신의 처음 자리의 고백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고백을 건너뛰고 아예 생각도 안 해요 왜 여기서 얘기를 안 해줬거든요 피차 불편한 이야기를 뭐 하려 하고 듣느냐구요 당신은 구원받았어요 행복하죠 찬송하세요 여기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생략돼버렸다니까요 그리고는 이제 나는 아니지요 라는 이 다름과 차이를 증명하는 걸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달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편이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죄를 전가했던 동일한 모습인 거예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에요 얘는 난 아니에요 쟤 때문이예요 결국 어디까지 올라가요 하나님이 만들어낸 저 여자 때문이에요 하나님까지 탄핵하는 거죠 나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고게 마귀란 말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내 자존심을 챙겨야 되요 내가 선악과 먹고 어떻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 됐거든요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마귀 새끼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 하냐고요 난 하나님 됐다니까요 선악과 먹고 요게 율법주의 아래의 아담들이란 말이에요 심지어 자신의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투신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살도 불사하는 것이 마귀의 실체인 거에요 마귀인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을 알았죠 거기에 어떤 단어가 씌어 있는지 아세요 메타노이아 회개라는 단어가 씌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했을까요 그런데 왜 성경이 거리에 메나노이아 회개란 단어를 썼을까요 교회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잘못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회개는 정말 진짜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의 삶 속에서 은혜에 의존하는 그러한 하나님 절대 의존의 고백이 나오는걸 회개라고 하는데 그게 회개의 목적지거든요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가 자기가 한 일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게 회개가 아니란 말이에요 무얼 근거로 가롯 유다가 죄를 모르고 엉터리로 회개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여러분 죄는요 인간의 목숨을 바쳐서 상쇄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목숨 일 억 개 갖다 줘도 상쇄 안 돼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생명이라는건 인간의 최선의 노력으로도 생산해 내거나 쟁취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그런 말이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열심과 노력이 뭐예요 목숨 바치는 거예요 그거 이상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가롯 유다가 이거 바치면 그 죄 상쇄 되겠죠 하고 바친 거거든요 그건 죄가 뭔지 모르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우리도 이 신앙의 절정 이걸 순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롯 유다식의 순교를 한 사람들이 기독교에 많아요 그런데 그건 다른 종교에도 많아요 그런 순교는요 마귀는 끝까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기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일을 해요 가롯 유다가 진짜 회개를 했다면 제가 예수님 판 자 맞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갔어야지 내 죄는 내가 내 목숨 끊어서 책임질 게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회개가 가짜 회개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 자신의 존재를 투신해야 되는 거예요 마귀는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투신해요 그건 순교 아니에요 그건 죄예요 제사장들은 어땠습니까 그들도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을 절대 만지지 않았어요 부정한 거라고 성전고에다가 다시 안 넣었어요 안 만졌어요 도로 가져가 그랬어요 너무너무 값어치 없게 취급했죠 야 이거 나그네의 밭이나 사 스가랴서에 나오는 거에요 밭이나 사 이렇게 가치 없게 여긴 거예요 그 핏값을 그리고 우리가 이걸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내가 관계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관계없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돈을 안 만진 거예요 부정한 돈이라고 이게 난 아니죠 에요 난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 예수 안 죽였어요 쟤네들이랑 다르거든요 그게 마귀란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고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 마귀라는 뜻이에요 너희 아비 마귀야 그리고 독사의 새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 그래요 네가 마귀다 그러죠 예수님 보고 네가 바알세불의 권능을 힘입어 이적을 행한다 그러잖아요 서로 마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마귀로 여겨요 진짜 하나님을 마귀로 보고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거 아닌가요 나의 천국 나의 구원 나의 보람 나의 가치 나의 변화 조금 저급한 사람은 질병 치유 일취월장 성공 번영 귀신 쫓아냄 문제 해결 이런 거 위해 예수 믿죠 그러면 예수 팔아 나의 유익 챙긴 유다 뱀 새끼와 우리가 지금 뭐가 다르냐고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위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그거 위해서 우리 예수 믿잖아요 여전히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뱀새끼 같은 삶을 살고 있단 말이어요  지금요 그런데 그게 올바른 신앙이라고 너무 많이 들어왔고 세뇌되어서 이게 그냥 옳은 건 줄 알고 가는 것뿐이라니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그게 뱀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맞습니다 제가 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은혜 배풀어 주세요로 가야 되는데 이 다름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줄을 알고 그걸 많이 만들어 낸 사람을 훌륭한 롤모델로 삼아 그걸 쫓아갈려고 하는 거에요 그거 신앙생활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존심 챙기기라는 마귀적 행태는 인간 역사의 이 실체이며 실존인 거에요 그게 그러니까 진짜 왕이 와서 이 왕들을 지 자존심 이걸 목숨을 버려서까지라고 지키려고 하는게 세상 왕이란 말이에요 진짜 왕이와서 이 왕을 박살내버리고 폭로시켜서 인정시키고 수긍시킨 다음에 이걸 박살내버리고 진짜 하늘 왕에 자리로 끌어내버리는게 이 역사라며 신앙생활이란 말이에요 에스겔서 18장 1절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또 네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이 어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하나님 앞에서 패역을 행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은혜에 붙들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죠 에스겔서 보면은 하나님이 보내셨다 그래요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자기들에 힘이나 다른 이들에 힘을 얻어서 거기서 빠져 나오면 죄에요 히얀하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바벨론으로 보내시는 분이세요 세상으로 포로로 보내시는 분이래니깐요 역사속에서는 그런데 그렇게 포로로 보냈더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팽게를 댔냐면 작금에 자기들에 상황은 자기들에 죄 때문이 아니라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오늘날 심리학이 요걸 그대로 인용을 해다가 사람들 치유하죠 그죠 정신병원이나 상담하러가면은 여러분 뭐부터 끌어내야 되요 과거에 내가 남으로부터 학대받은거 그리고 우리 조상에 어머니때나 할머니때에 무슨 악한 일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내라 그래요 최면까지 걸어서 그리고는 거기다 전가시켜 버리는 거에요 그리고는 거기서 풀려난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마귀들에 그 자기 자존심 챙기기가 여기에서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거에요 난 아니에요 우리 조상이 신포도 먹었대니깐요 그런데 왜 우리의 이를 시게 만드세요 이렇게 따진거에요 이스라엘이 그러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읍소하냐면 하나님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요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조상이 죄를 지었으면 조상에게 죄를 물으셔야지 왜 우리에게 죄를 물으세요 난 아니죠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너희는 너희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 죄 때문에 이렇게된 거야 말씀하시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주세요 18장 5절 보세요 18장 5절 보세요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돌려 주며 억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내 율례를 쫓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매일 성경인지 뭔지 그 큐티 책의 그 성경 본문이 아마 요즘 에스겔서였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이 에스겔서 18장의 내용을 저에게 디밀면서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당신은 왜 이거 아니라고 하냐라고 많이 물어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요 본문을 택한 거거든요 여러분 보시면 어떠세요 똑바로 살아 그러면 살려줄게 그 말처럼 보이죠 잘 살아 착하게 잘 살아 똑바로 살아 그럼 살려줄게 이 말은 그렇게 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니들이 지금 공평 공평하는데 그 공평에 의해서 살려면 이 수준이 되야 되는데 니들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니들이 지금 내 앞에서 공평 공평 하는데 이게 내가 원하는 수준이거든 이 수준이 되니 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의인이 낳은 아이의 이야기를 또 들려주세요 바로 밑에 보세요 10절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돌로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을 위하여 꾸이거나 이식을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 즉 정녕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버지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아들이 자동으로 그 의로움을 상속 못한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내적 치유니 이런 건 개소리예요 그죠 이게 공평이에요 악인도 자신의 죄로 의인도 자신의 의로 죽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공평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공평 이게 바로 너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내 앞에서 공평을 이야기 하냐 이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죄인이 또 아들을 낳아요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계속 반복하여 이랬다 저랬다 이랬다 저랬다 하나님이 비유를 들어주세요 14절 보세요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전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억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를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그 아비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억탈하고 민간의 불손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아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만 돌아가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평이에요 그러니까 의인인 아비의 의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 거고 죄인인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유전 안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보낸 바벨론에서 그걸 확실히 인정하고 하나님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바벨론에서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저는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바벨론에 보낸 거란 말예요 그런데 거기에 간 하나님의 백성 인간들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공평하게 대해 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적어도 그 패역한 그 조상들과 우리는 다르단 말이어요 근데 왜 우리를 그들과 동일하게 취급하세요 왜 그들의 죄를 우리에게 대물림하세요 이렇게 억지를 부린거예요 이것이 현재 바벨론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도는 일차적으로 이 바벨론에서 이 세상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교회안에 있어요 그 바벨론은 바벨론에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 이걸 실제화하여 살아가면서 맞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취급받아 마땅합니다 왜 제가 뱀이거든요 저는 몰랐는데요 진짜 제 신앙생활은 저를 위해서 한 게 맞았어요 예수님이 그런 유다를 보고 마귀라고 했는데 내가 유다와 다른게 뭐 있어요 이거 고백하고 가는 게 성도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아니에요 쟤랑은 다르잖아요 이렇게 열심히 했잖아요 이렇게 헌금 열심히 했고 이렇게 주일성수했고 이렇게 선교 열심히 다녔는데 왜 나에게 하나님 복을 주셔야지 왜 이런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허락하세요 하나님 참 원망스럽네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자본주의가 뭡니까 내가 해낸 만큼 보상을 주는 게 자본주의 아녜요 이게 인본주의 아녜요 아이 공평하게 좀 대해주세요 이게 우리의 고백아닙니까 그게 펠라기우스고 알미니우스 잖아요 어디서 줏어 들은 건 있어갖고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는 이단이야 그래놓고 자기들이 똑같이 그렇게 산대니깐요 성도의 삶이 그래서 이렇게 고단한 바벨론 포로의 삶으로 점철되는 거예요 뺏기고 수탈당하고 쪽팔리고 부끄럽고 이게 포로의 삶이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취급당해야 맞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에 은혜가 없으면 제가 어떻게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야 되는 거에요 성도는요 그런데 전부 다 나는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적어도 아닙니다 난 목숨 걸고 예수님 편에 설 거예요 이걸 증명해 낼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어요 교회안에서도 전부 눈이 충혈되갖고 열심히 살라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노하세요 24절 보세요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들을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거 아니니 나는 공평해 지금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 포로로 보낸 건 너희의 죄 때문에 보낸거야 너희의 불가능함과 나약함 그거 깨달으라고 보낸 거야 그런데 내 앞에서 감히 공평을 이야기 하냐 너희 이 공평이 뭔 줄 알아 물어보시잖아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바로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에요 여기가 지금 바벨론이라 그랬어요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인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여러분 아세요 말씀이 곡해되어지고 오해되어지는 예배당 안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 교회는 묵시 속에 보이지 않는 교회와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지역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하기 위해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또 사람들이 계속 또 오네요 이렇게 원래 여기는 깨지고 쪼개지면서 하늘의 교회가 이게 진짜 교회구나를 배우는 게 이 교회거든요 우리는 이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요 이 안에 있는 가라지들이 그 말씀을 뭐로 받아들이냐하면 윤리 도덕 규례 규범 처세 이런 걸로 받아들여요 한 마디로 역사 속에서 나에게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나의 보람을 증대시키는 도구요 방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죠 요게 바벨론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뱀 새끼 맞구나 그 말씀이 빛이신 예수가 어둠 앞에 섰을 때 어둠이 폭로됐단 말이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자기를 감추지 못했단 말이어요 성도는 그 말씀을 제대로 받고 그걸 예수로 받아들여요 그리고는 내 안에 있는그 예수 그 이 예수가 증거되기 위한 이 껍데기가 깨져야 된단 말이어요 그런데 가라지들은 이 껍데기를 강화하고 껍데기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 말씀을 사용한단 말이어요 그게 바벨론 이에요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계시록 17장 4절 보세요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이 자주빛과 붉은 빛 옷은 왕의 옷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이게 다 왕 거에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이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또 내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이거 제가 지난주에 큰 성 산 위에 있는 마을 이게 폴리스라 그랬죠 그 단어란 말이어요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마을이 뭐였어요 여성 단수 산 위에 있는 마을 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여성 단수로 지칭하던 건 시온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밖에 없었다 그랬어요 옛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단어가 여기 쓰였다고요 큰 성 구약 율법주의 옛 성전 요걸 바벨론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바벨론이 누굴 다스리느냐 하면 땅의 왕들을 다스린다고 그래요 이 세상에서 선악과 먹고 임금 되기 위해 하나님 되기 위해 달리는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게 옛 성전 큰 성 바벨론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바벨론에 포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당한다니깐요 그들이요 그러면서 그들이 무얼 깨달아야 되느냐하면예 우리는 이렇게 이 바벨론에게 당해야되는 자들이 맞습니다를 깨닫고 그러니 하나님 하나님이 빼주셔야 되겠네요 여기서 우리 힘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애쓰는 게 율법주의 바벨론이잖아요 열심히 목숨 걸어서 여기서 나가보겠다라는게 그게 아니라 예 제가 마귀 맞습니다 난 아니지요가 아니에요 난 아니지요가 뱀들이에요 마귀들이라고 가라지란 말이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네 맞아요 내가 이렇게 포로로 이렇게 고통당해야 맞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살려주세요로 가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 바벨론이 누구와 싸운다고 그래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러죠 어린 양은 뭐에요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나왔죠 그 말은 이들은 거기서 나올 그 어떤 자격과 근거와 조건과 열심 이런 게 없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벨론이 뭐와 싸운다 그래요 어린 양과 싸운다 그래요 은혜와 싸우는 거죠 그러면 은혜와 싸우는 건 뭐겠어요 하나님의 은혜 어린 양 예수와 싸우는 거 부처 마호메트 율법주의 교회 안에 있는 행위를 강조하는 알매니우스 펠라기우스의 율법주의란 말이어요 고게 바벨론이란 말이어요 어린 양과 싸운대니깐요 그래서 18절에서 그 여자 바벨론을 큰 성 폴리스라고 하는 거에요 산 위의 동네 폴리스 예수님께서 구약의 총화인 옛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라고 하셨죠 에스겔서 17장에 가면요 요 바벨론을 뭐라 그러냐면 장사하는 땅이라고 불러요 성경은 빈틈이 없어요 장사라는 건 인간들이 자기들의 수고와 열심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에 수입과 열매를 챙기는 행위를 장사라고 그래요 그게 장사하는 집이에요 옛 성전 바벨론이란 말이에요 그게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서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 바벨론이라는 장사하는 집에서 어떤 것들이 거래되는지 보자고요 인간들이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 거래돼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가 하나가 붙는데 그게 뭔지 한번 보세요 계시록 18장 10절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성 바벨론이여 옛 성전 바벨론이여 이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예수님이 옛 성전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일 시간에 영단 번에 무너져 버리죠 땅의 상고들이 장사치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해하는 건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이거 조금 아까 바벨론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다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 이거 왕실에 다 있는 거예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에서 사람의 영혼들이 막 팔리는 거예요 그게 맞는 것 같애 거기에 다 팔려가 인간들의 가치 자존심 행위 힘 이거 얻는 게 신앙생활 아냐 말씀이 그거 아냐 이렇게 다 팔려가요 왕 되기 위한 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왕이 갖춰야 할 것들을 끌어모으면서 그 말씀까지도 그렇게 방법과 수단으로 끌어모으는 거죠 거기에서 영혼이 팔리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거래되는지 계시록 16장 13절 보세요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세 더러운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 내는 성령 푸뉴마가 아니라 더러운 푸뉴마에요 이거 제가 누가복음에서 이 더러운 푸뉴마가 뭘로 번역됐는지 말씀드렸죠 귀신 들린자라고 번역됐잖아요 더러운 푸뉴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귀신이에요 마귀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이거 동격인데 다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거짓 선지자는 절에 있다 교회에 있다 교회에 있죠 선지자가 왜 절에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말씀을 이야기를 하는데 엉뚱한 말씀 왜곡된 말씀 더러운 말씀을 전하는 거 이걸 더러운 영 더러운 푸뉴마 라고 하고 내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했으니까 그 영 더러운 푸뉴마가 더러운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 더러운 말씀이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막 나와요 여기가 바벨론이예요 여기가 교회죠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누구에게 가서 온 천하의 왕들 임금 되고 싶어하는 놈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아담들을 찾아가서 이 더러운 말이 말씀이 왜곡된 말씀이 그들을 끌어모으더니 누구와 전쟁을 할려고 그래요 어린 양 예수와 전쟁을 하는게 교회란 말이에요 그걸 아마겟돈 전쟁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나중에 세대주의 자들의 해석처럼 나중에 어떤 시점에 저 중국의 어떤 평야에서 몇억 명이 모여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 예배당 안에서 여러분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쟁인 거예요 은혜와 행위의 싸움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싸움 알메니우스와 칼빈의 싸움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누구를 왕들을 모으더라 왕들이 와서 무슨 전쟁을 해요 세상의 왕들 여러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왕 되고 싶어하는 자들 그들을 모아서 은혜와 전쟁하는 게 교회예요 그런데 대부분 팔려 간다 그래요 대부분 팔려간다고 왜냐하면 그게 좋거든요 그 바벨론에서 세상 왕들이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인간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가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난 아닙니다 난 마귀 아니에요 난 절대 예수 안 팔아요 내가 왜 예수 팔아요 이거 그 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옷을 지켜라 계시록에서 그 옷은 뭐라 그러죠 예수의 어린 양의 피에 빤 은혜의 옷이죠 어니 양의 피에 빤 옷을 그들이 입었다 그러잖아요 은혜 지키라는 거예요 왜 더러운 영 더러운 말씀은 항상 그들의 열심을 독려하여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로 바꿔 입힐려고 한다구요 그걸 그걸 바꿔입히려고 하니까 이 은혜의 옷 꼭 지켜 그러는 거예요 꼭 지켜 그 전쟁에서 지지마 꼭 지켜 그 바벨론 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겠어요 그들이 자기 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실제화하여 살면서 이게 다 우리 죄 때문에 온거고 이러한 고통의 삶이 극대화되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게 지옥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지옥의 백신을 맞고 있는 거예요 바벨론에서 몸살의 백신은 몸살균이니까 지옥의 백신은 지옥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서 너무 행복하고 평안하고 그러면 안 돼요 지옥의 백신이여야 되요 이걸 삶을 살면서 맞어 이게 극대화 되어 이 정도가 아니라 이게 극대화된 것이 내가 처해질 종국이었는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벗어나지 어떻게 내가 이 큰 성 바벨론의 자리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성경 전체가 이 두 성의 싸움이잖아요 어떻게 내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된 거야 그걸 갈라디아서가 뭐라 그래요 사라 은혜의 어미 어떻게 은혜가 나를 낳았지 이거 고백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 옷을 지키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에 의하면 우리가 바벨론에서 마귀들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면서 고통받아 죽는게 맞아요 고멜처럼 걸레가 돼서 죽잖아요 그 자리에 신랑이 찾아가죠 걸레를 찾아가는 거예요 정숙한 허벅지를 찔러가며 은장도로 찔러가며 정절을 지킨 여자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 남자 저 남자한테 굴러다니다가 걸레가 된 여자를 신랑이 찾아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호세아 예수예요 호세아가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와 창녀 고멜 우리의 이야기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 고멜이 그렇게 만천하에 드러난 자기의 이 실체를 이미 다 드러나 버렸는데 신랑한테도 드러나고 세상에게도 드러났는데 뭘 어떻게 속이겠어요 나 사실 그렇게 안 살았어 이거 돼요 그 자리로 끌려 가는 게 성도란 말이어요 여러분 그게 성도의 첫 번째 실존 자각이에요 내가 고멜 맞아요 내가 뱀이에요 하나님 내가 마귀에요 이거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저를 신부로 삼아주세요 이런 더러운 걸 이게 우리의 고백이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당신의 공평을 깨지 않기 위해 우리가 먹어버린 신포도로 우리의 이가 시어야 하는데 그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버린거 그게 십자가라는걸 설명해주는 게 에스겔서 18장이에요 그렇게 똑바로 살어가 아니라 니들 공평하게 내가 니를을 대했으면 니들 다 죽어야 돼 그런데 내가 니들이 먹은 신포도로 말미암아 내가 내 아들의 이를 시게 만들어 니들을 건진 거야 그래서 17장 19장이 전부 예수만 설명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합니까 라고 항의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낳았죠 에스겔서 18장에서 의인이 죄인을 낳죠 역사 속에다가 선악과 입에다가 물려서 죄인으로 내려보내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돼냐 하면 아 나는 이런 원래 내 처음 자리가 이건데 내 이가 시어야 되는데 예수의 이가 시게 되므로 말미암아 내가 산 거구나 하고 예수를 낳는 걸 의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가 의인이 죄인을 낳고 죄인이 의인을 낳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지 너희를 이렇게 살면 다 죽고 이렇게 살면 살어 이거를 가르칠려고 교훈하려고 그런 거 써놓은 거 아니란 말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냥 궁지에 몰아넣을려고 이걸 그냥 거의 몇십 명이 저한테 이메일로 보내 갖고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아이 정말 씨 여러분 원래 우리의 이 고난과 슬픔과 해체와 부정의 삶이 원래 우리 게 맞아요 이게 원래 우리 거예요 그런데 그 지옥을 예수가 다 가져가신 거예요 이 지옥을 예수가 다 가져가셔서 예수의 이가 시리게 된 거예요 이게 십자가라니까요 어디서 공평을 이야기해요 공평을 이야기 하면 다 죽어요 내가 행한 만큼 상 주세요 이거 공평하게 대해 달라는 거죠 다 죽어요 우리는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챙기려 해서는 안 돼요 종교행위나 선하고 착한 일들로 자신의 마귀됨을 가려버리고 난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데 왜 날 이렇게 대우해요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 우리는 전부 우리 자신의 번영과 성공과 보람과 가치를 위해 신앙생활 해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애들도 그냥 좋은 교육환경 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후진 교육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시키겠어 그러니까 그냥 교육 시설을 잘해놔야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식이 생겨 버린 거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거에 주력하기 보다는 교육부를 잘 만들어야 돼 애들을 다 구슬려서 부모를 붙들어야 돼는 거야 이렇게 이 성공신학 번영의 신학 요걸 그대로 자기 마음에 감추고 있으면서 그 알량한 비루한 적선의 윤리 뭐하나 그냥 살짝 던져 주고 착한 일 조금 해 놓고 그 전체를 그냥 가려버릴라고 하는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우리의 실체를 위장하려고 하거나 은닉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리재는 거예요 그런거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하세요 열심히 하시고 새벽마다 나가서 홈리스들 빵도 나눠 주시고 그러세요 나에게 맨날 받아먹던 거지가 저 옆에서 받아먹으면 배 아프고 이런 것도 경험해 보시고 왜 나한테 얻어먹다가 넌 옆 요즘 교회들이 그거 갖고 싸운다면서요 난 깜짝 놀랐어요 왜 내 그지 뺏어 가냐고 실적을 올려야 돼는데 거지들이 맛있는 쪽에 가서 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왕 흉내를 내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예수 앞에 항복하는 자여야 하는 거예요 난 아니죠가 아니라 내가 예수 죽인 마귀 맞습니다 저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아니 지금 내 삶이 이게 죽은 시체의 삶 맞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대 살아날 수 없는 자 맞습니다 이 고백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18장 바로 다음 뭐예요 19장 1절에서 너희는 장송곡을 불러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가를 지어서 부르게 하는 거에요 니네는 다 죽은 거 맞어 이렇게 19장 1절 보세요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내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그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땅으로 간지라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 왕래하며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음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를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이방이 둘려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갈고리로 꿰고 철롱에 넣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서 그 소리로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네 피의 어미는 물 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실과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 분노 중에 봅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실과는 동풍에 마르고 그 견강한 가지들은 꺽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삼긴바 되고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서 그 실과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 견강한 가지가 없도다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뭐가 애가래요 사자 새끼들 포도나무의 가지들 이거 전부 쓸모없는 것이더라 쓸만한 게 하나도 없도다 이게 애가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애가라고 번역이 된 단어 키나가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 이야기하는 거에요 니넨 다 죽었다라는 뜻이에요 뭐 공평 니넨 시체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공평 애가를 만들어 불러라는 거에요 그리고는 비유를 주시는데 그 비유에 두 사자 암사자 포도나무 홀이라는 게 등장하죠 어디서 보셨어요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유다에게 유다에게 준 유언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여기에 등장하죠 지금 창세기 49장의 그 이야기를 여기서 그냥 고대로 풀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거를 알면 창세기 49장이 풀리고 49장이 풀리면 요게 풀리는 거죠 어려운 거 같죠 이 비유 하나도 어려운 거 아니에요 첫 번째 사자가 애굽으로 끌려가고 두 번째 사자가 바벨론으로 끌려가죠 그리고 마지막 포도나무 가지 견강한 가지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작살 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요 바벨론의 시점에서 요게 어떻게 풀리는지 금방 알아요 애굽에 잡혀간 암사자 누구 열왕기상에 나오잖아요 여호아하스 바벨론에 잡혀간 암사자 누구 여호야긴 그럼 마지막 포도나무 가지로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한 왕 누구 시드기야 이들이 다 권세 홀을 가진 왕이죠 이 홀을 가진 왕이란 말이어요 그런데 이들이 다 뭘로 끝났어요 하나님이 바벨론에 내게로 돌아와라 은혜로 돌아오라고 보냈더니 애굽에 가서 원군 청해 임기응변 권모술수 우리들의 힘으로 한 번 여기서 빠져나가 보자 그랬던 왕들이잖아요 이게 그게 다 눈알이 뽑히고 다 죽어요 이 왕들은 아니죠 이 홀들은 아닌 거예요 그죠 권세자의 지팡이가 홀이니까 요것들은 아닌 거죠 그러면 진짜 홀을 가진 진짜 왕이 와야 되잖아요 그래야 이 왕들 세상 왕들이 다 부정되고 진짜 왕이 당신의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왕의 자리로 끌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내는 거란 말이어요 그럼 보자말이에요 창세기 49장으로 가보세요 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야곱이 예언을 해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오는건 전부 유다가 되어 마귀 새끼가 되어 죽어야 되는 그 자리에 메시아가 오는 거에요 아들이 거기에서 낳아지는 것을 의미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메시아가 사자라 그러죠 그리고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와 연합시켜서 이게 메시아다 그래요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홀이 이 왕의 흉내를 내는 가짜 왕들이 언제까지 계속 온다 그래요 실로가 오기까지 이 실로라는 단어는 원래 지명이었지만 원래 그것이 속한 자란 뜻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진짜 왕권을 가진 그 진짜 왕이란 뜻이에요 그게 실로예요 그래서 메시아예요 그 진짜 왕이 오기까지 홀을 가진 자들을 계속 보내겠다는 거예요 뭐의 모습으로 포도나무 가지의 모습으로 사자의 모습으로 계속 보낼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서 19장에서 그들이 다 실패한 왕으로 드러나잖아요 그죠 그럼 실패한 왕으로 드러나면 이 진짜 사자 진짜 홀을 가진 그 실로 진짜 포도나무 가지 이 분이 와서 그들을 다 부정해 내버려야 되는 거예요 이게 에스겔서 17장 18장 19장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서 1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 그러냐 하면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나 왕이에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서 17장 19장에서 이 이야기를 갖다 대는 거예요 17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독수리의 비유가 나오잖아요 그 독수리의 비유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그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이 순을 하나 떼어다가 바벨론에다가 하나 심고 하나를 또 유대의 땅에다가 심고 했는데 이것들이 다 실패해요 그게누구죠 바벨론에 심은 건 여호야긴 유대에다가 심은 건 시드기야란 말이어요 마지막 왕들이란 말이어요 아니에요 실패로 끝났어요 그래서 맨 꼭대기에 있는 백향목이 뭐냐하면 백향목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왕궁을 짓던 나무란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다윗의 왕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왕조의 꼭대기 맨 끝이니까 인제 여호야긴 시드기야 끝이니까 끝에 것을 잘라서 바벨론에 하나 심고 유대에 심었더니 이것들이 전부 애굽 찾아가고 딴 놈들 찾아가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마치 시몬 베드로가 어 이거 뭐야 찢어진 그물이네 그랬을 때 예수에게 안 가고 옆에 있는 장사하는 배에게 다시스의 배에게 야 우리 좀 도와줘 그래서 물에 가라 앉은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럼 게네들은 안되니까 이제 진짜 연한 맨 마지막맨 맨 끝 꼭대기가 가장 연하니까 그 연한 순을 뽑아다가 심었더니 그게 겨자씨가 되어서 오든 열방의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더라 이걸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에 갖다 쓴거란 말이어요 에스겔서 17장을 그러니까 진짜 연한 순이 와서 이 왕들을 다 부정하는게 17장 18장은 아니 우리가 왕인데요 공평하게 대해주세요 라는 이스라엘의 주장 19장은 또 다시 야 암사자 새끼 포도나무 가지 그거 다 가짜잖아 그럼 누가 와야 돼요 진짜 사자가 와야 되잖아요 니들은 다 아니야 그래서 진짜 왕이 온단다 어떤 왕 니들이 먹은 신포도로 대신 이가 시릴 그 왕이 오는 거야를 설명하는 게 17장 18장 19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진짜 사자가 어디에 등장하는지 한 번 요한계시록 5장 5절로 가서 한번 보죠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데시리라 하더라 진짜 사자가 누구예요 창세기 49장에서 나온 그 사자는 요한 계시록의 이 사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역사 속에서 모든 인간이 왕 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사자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슨 사자 가짜 사자 가짜사자 세상 왕들아 너희는 아니야 진짜 왕에게 엎드려라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예요 에스겔서 21장으로 가보세요 25절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왕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왕들아 왕 되고 싶어하는 놈들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곧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 지어다 홀딱 벗긴다는 거예요 이제. 홀딱 벗긴다는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높아질려고 하는 자들아 왕들아 공평 이야기하고 난 아니지요 요거 증명하려고 사는 왕들아 니들은 낮아 질 거야 예수님이 요것 인용해다가 쓴 거예요 내가 엎드려뜨리고 엎드려뜨리고 엎드려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며 마땅히 얻을 자가 뭐라 그랬어요 아까 원래 그것이 속한 자 실로 실로가 오면 그에게 주리라 요 이야기에요 세상 왕들의 면류관을 몽땅 벗겨 버리고 그 왕들을 계속 죽여버리시겠다는 거예요 이게 마지막인데 이걸 우리가 역사와 인생 속에서 미리 선험하여 사는 거예요 이게 지옥이거든요 이 지옥을 미리 사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뱃겨지는 거예요 뭘 해도 보람도 못 챙기고 칭찬도 못 받고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보상도 안 오는 것 같고 그런 거 그게 잘 가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역사와 인생이 증명해 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종합하면 무슨 얘기가 되는 거예요 너희는 이 세상에서 장송곡을 부르면서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죽은 시체가 맞습니다 이게 애가잖아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올바른 자인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과 역사의 힘을 의지하여 그 사망의 상태에서 빠져나오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고 실로로 오시는 하늘의 진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해야 할 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부정하는 게 쉬워요 애가예요 그래서 애통이에요 그래서 복 있는 자여 너는 애통하는 자니라 그게 애가예요 나 죽었네요 이거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애가 먼저 부르는 거예요 내가 원수 맞아요 내가 마귀 맞습니다 내가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이 애가 죽어 마땅합니다 이거 먼저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자들을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 어느 자리예요 이게요 하나님 나라가 이제  완성되어 가시적으로 열리는 자리 그럼 그 자리까지 뭐가 있다는 거예요 눈물 애통해하는 것 곡하는 것이 그 때까지 있다는 뜻이에요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만 하나님이 닦아 준다는 거에요 그 애통이 있냐고요 아니면 서로 나는 아니지요 이걸 증명하기 위해 사냐고요 그리고 서로 야 우리는 아니지 그러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이러고 살고 있냐고요 여러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애가를 부르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이 애가 먼저 부르지 못하면 절대 찬송 못 불러요 그러니까 헛된 찬송이 예배당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는 거예요 난 왕이에요 난 잘났어요 난 이렇게 종교행위 열심히 한답니다 나 신앙생활 이렇게 열심히 한답니다 난 아니죠 이걸 찬양인 줄 알아요 간증도 전부 그거구 나는 이렇게 다르게 대우받았대는 거죠 왜 열심히 해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먼저 해야 할 건 올바른 자아 인식과 인정이에요 나 마귀 맞아요 난 뱀 맞습니다 예수님 뒤꿈치에서 피 빨아 먹지 않으면 절대 살 수 없는 뱀 맞습니다 이 인식이 먼저인 거고 그로 말미암는 애통인 거고 거기에서 예수로에 은혜로에 투신과 예수 안으로의 함몰 그 긍휼의 자궁 안으로의 함몰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인 거지 우리의 왕 됨을 수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나는 아닙니다 를 외치는 그런 자들이 돼서는 안 되는 거에요 애가가 빠진 찬송은 절대 진짜 찬송이 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진짜 찬송하고 싶으시면 먼저 애가를 부르세요 애통해하세요 많이 우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눈물은 지옥의 백신이에요 아파도 견디셔야 해요 그런데 그거 우리 예수님이 다 뻿아 갔어요 이미 그래서 그냥 소망이라는 걸 잠깐잠깐 붙들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요 예수 믿는 건 우리가 길을 열심히 닦아서 예수께 가는 게 아녜요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가 자라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제가 얼마 전에 프랑스 영화를 하나 봤는데 거기서 어떤 사기꾼이 한마을 사람들을 다 속여 갖고 고속도로를 짓는대요 이 길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중간에 큰 사막에다가 이만큼만 그냥 뚝 만들어 놨어요 나중에 이렇게 보더니 이거를 그런데 어디다 써먹어야 돼요 이게 어디로 이어져야 돼요 그런데 이어질 데가 없는 거예요 족구장으로도 못 쓰는 거예요 이거는 길을 열심히 만들어 놨는데 이게 예수께로 안 가네 길은 예수가 천국에서부터 뚫고 우리에게로 오는 거예요 내가 길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길이 중간에 가시 담이런 것들이 마구마구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게 많이 있는 거예요 그 때 우리가 이 예수라는 길을 따라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그 길을 따라 흘러가면서 돌에도 부딪히고 담에도 막히고 가시에도 찔리면서 마땅합니다 제가 예수께로 가는 길에 이런 게 있는 게 마땅합니다 라고 순응하는 자가 되는 거지 예수를 믿어 그런 것을 제거하는 게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우리가 길을 더더군다나 준설해 가는 것도 신앙생활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이렇게 끌려가는 게 맞고 종국의 지점에서 우리 예수님 만난다면 오늘 이 삶 살아보겠습니다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살아 있으면 돼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