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54 은혜인가 보상인가?

은바리라이프 2013. 10. 31. 20:11
54. 은혜인가 보상인가?

 복사 http://blog.naver.com/clack891/120208611763 


 
 
롬5장 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제 이쯤 되면 ‘그래 내가 하나님 원수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 속에 들으셔야 돼요, 그죠? 아주 지겹다 이제 정말. 그런데 몇 번 더 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뭐죠?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영생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인간들의 육적 생명을 부정하는 개념이죠? 다른 생명이란 말예요. 인간의 육적 생명과 다른 생명. 그걸 주러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건 인간의 육적 생명은 영생 앞에서는 부정되는 거란 말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오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지옥에서도 오래오래 살아요. 안 죽습니다. 오래오래 사는 게 아니라 신적 생명, 진짜 생명, 하나님나라의 생명을 영생이라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영생을 가리켜서 뭐라 그래요? 제자들이 영생이 뭡니까? 그랬을 때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 그래요. 그건 바꾸어 말해서 천국을,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고는 절대 불가하다는 말씀이죠? 예수 안에 하나님 담겨 있으니까.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성도들이 인지할 수 있는 건 예수 밖에 없단 말예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고는 영생을 못 산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면. 그러니까 조금 더 축약을 해버리면 천국 = 예수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랬어요.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셨단 말예요. 그러니까 예수 =천국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내려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이며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일을 하셨어야만 했는지 도대체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기에 그러한 일이 필요했는지를 아는 게 성도의 역사 속 본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아주 간략하게 간추려져서 기록이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하신 일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것,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세 번째, 그렇다면 왜 꼭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방법으로만 우리와 하나님의 방법이 성취되는 것인가?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였기 때문에 , 원수는 죽어야 되거든요. 하나님의 원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돼요. 그래서 반역자들이 달려 죽는 십자가에 예수가 달려 죽은 거예요. 원수인 우리가 되셔서. 

그러니까 보리떡, 간음한 자들이 드렸던 보리떡, 내가 짐승의 먹이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보리떡을 제물로 드렸다 그랬죠? 보리떡, 그리고 어제 설명해드린 풍요와 다산과 증대만을 목적으로 삼아 살고 있는 물고기, ‘다그’, 보리떡과 물고기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그 예수가 우리에게 양식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주어진 게 십자가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방법으로만 화목이 성취되는 거란 말입니다. 이걸 너무 신파적이고 유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그랬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창조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처음자리 이야기라 그랬죠? 뭐 하나님도 몰랐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런 반역이 일어나고 갑자기 하나님과 어떤 존재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서고, 뭐 이런 식의 어떤 소설적인, 동화적인, 신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혼돈과 공허의 그 처음자리, 피조물의 처음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들이 창조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소품들이란 말 이예요 이것들은 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긍휼의 자궁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야 하는. 자궁이 긍휼이란 단어와 똑같은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 그 안으로 그렇게 함몰되어 들어가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가 되는 거지요. 엄마가 아이를 품고 있을 때 엄마와 아이가 하나죠, 그죠? 그 아이가 홀로 떨어져 나가서 이제 개체성, 자기의 개별적 자아를 주장하면서부터 얘는 골칫거리가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품안의 아기라는 말을 하는 거죠. 품안의 아이. 그러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하나님의 그 긍휼의 자궁 안으로 그렇게 함몰되어 들어가 , 아! 여기가 바로 안식이구나. 이걸 배우는 거지 독립적인 자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고 증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거기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게 포도원 품꾼의 비유예요. 우리가 비유 강해 때 이미 공부한 내용이지만 오늘은 제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 보세요.
 

마20: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 제 구시에 또 나가서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 일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에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기기 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자까지 삯을 주라하니
9-제 십 일시에 온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에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나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이방인들에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기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여러분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십자가로 결론이 난다는 걸 아세요? 십자가로 결론이 나고 있죠?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 앞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 또는 마태복음 19장 이런 것들이 내러티브로 연결이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는데, 하나님 나라, ‘천국은’주인과 같다고 해요. 천국은 주인이다! 천국은 어떤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 이라는 그런 말이에요. 조금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그거요.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좀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 안에 아가페가 담겨 있었단 말예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게 ‘이는 내 아가페 내 아들이다’ 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가페가 아들 안에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 그 하나님의 아가페, 마음, 뜻을 아는 게 아들을 아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의 마음을 아는 이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그런 말 이예요.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걸 누리고 찬송하는 상태란 말이에요.
 
아, 이런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거야? 이런 분이 나를 품어 안고 있는 거야? 절대 안 놓는단 말이야? 이렇게. 그러면 그 주인이 어떤 주인인지 알아보자고요. 그래야 천국을 알고 영생을 알거 아니에요? 구원이 뭔지 알거 아니에요. 그 주인은 자기의 포도원에 품꾼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일을 시키기 위해라고 쓰여 있지 않아요.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라고 이야기를 해요. 들여보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가는 그런 주인이에요. 천국이 나가는 거예요. 사람들을 찾아내러 가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 안으로, 포도원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여러분이 죽어서 가는 어떤 공간적 장소적인 그런 곳이 아니라 천국은 여러분에게 침노해 들어오는 거예요. 천국은 누구? 예수란 말에요. 예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침노해 들어오는지 그걸 배우는 거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주인이 무엇을 하러 이른 아침에 나갔는지 그것을 잘 보세요. ‘포도원에 품꾼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단순히 일을 시켜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 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셔야 된단 말 이예요.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부르러 나가요. 그 주인은 천국이에요. 지금 사람을 부르러 나가는 거예요, 천국이. 당시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른 아침 ,즉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여섯 시였어요. 그걸 히브리 사람들은 영 시라 그래요. 우리 시간과 여섯 시간 차이가 나는 거예요. 새벽 여섯시에 하루의 먹을거리를 위해 긍휼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찾아가서 포도원 주인이 긍휼, 한 데나리온을 선물로 주는 거예요. 고대시대 때 사람들은 잘 사는 중산층이 두 끼를 먹었고 대부분이 한 끼를 먹었어요. 우리도 세 끼 먹은 지가 얼마 안돼요. 그래서 점심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없는 거예요. 점심은 나중에 우리가 세 끼 정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 중국에서 빌려다 쓴 거란 말예요. 그래서 아침저녁은 우리말인데 점심만 중국말 이예요.
 
그만큼 살기가 힘들었단 말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그런 삶을 살았어요.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만일 하루 일을 공치면 온 가족이 굶게 되는 거예요. 그게 품꾼의 삶이거든요. 종의 삶이예요 그것이. 따라서 일을 구하기 위해 나와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인의 부름을 받는 일은 정말 절박한 거죠. 그게 생명이란 말예요. 부름을 받아야 사는 거예요. 주인이 당시의 하루 품삯인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요. 그들은 쾌재를 부르면서 포도원으로 들어갔겠죠? 이제 가족들이 굶지 않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주인의 긍휼로 자기들이 산거예요. 그들에게 있어 한 데나리온은 생명이에요. 그걸로 먹을거리를 살 수 있는 거니까. 생명이란 말예요. 한 데나리온은. 주인이 지금 그들에게, 죽어야 할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그런 형국인 거예요. 주인이 삼시에 또 나갑니다. 왜죠? 일 시키려고 가 아니에요.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예요. 거기에 보면 일꾼이 더 필요해서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가다보니 노는 이들이 있어서 에요. 일손이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니까요.
 
긍휼이 필요한 자를 천국이 찾아다니는 거예요. 주인이 찾아 가는 거예요. 주인의 목적은 굶어 죽어야 하는 자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서 그들이 음식을 살 수 있는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함이에요. 죽을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거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아침 아홉시예요. 이미 세 시간 넘게 포도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 또 다른 품꾼들이 또 포도원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들도 역시 쾌재를 불렀겠죠.
 
그들도 그 한 데나리온이 생명이거든요. 아 이제 우리는 살았어, 이렇게 난 굶지 않아도 돼. 이제 양식을 살 수 있어. 세 시간 전에 포도원에 들어갔던 이들에게 부어졌던 동일한 은혜가 부어지는 거예요. 동일한 은혜. 주인이 육시와 구시에도 나갔고 십일 시 에도 나가서 품꾼을 불러왔다 그래요. 십일 시는 저녁 다섯 시예요. 여섯시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표현이 나오죠? 품꾼들이 놀고 있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건 뭐 재밌게 장난하면서 놀았다는 게 아니라 허탈하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그냥 허탈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주인이 왜 놀고 있어? 그랬더니 뭐라 그래요? 아무도 우리를 불러가지 않습니다. 뭐예요? 쓸모없는 자들이었다는 뜻이죠.
 
여러분 홈(?) 앞에 가면은 수많은 멕시칸들이 그냥 누가 나를 불러서 일을 안 시켜주나 우글우글하지요? 그런데 대낮에 가보면 아주 비리비리 하거나 아니면 술 취한 그런 사람들만 남아 있죠? 쓸모없는 자들. 뭔가 기술이 있거나 기운이 좋거나 이런 사람들은 다 뽑아 간단 말예요. 그런데 저녁 다섯 시가 됐는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주인은 일일 시키기 위함이 아닌 거예요.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게 쓸모없는 자들을 불러 가는 건 효율성이나 그 어떤 뜻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일손이 필요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들을 살려내기 위함이란 말예요. 십일 시에 가서 그들을 불러내요. 그리고는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는 거예요. 그들에게도 역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이 약속이 돼요. 그들은 정말 횡재한 거죠? 이제 다 틀렸다고 이제 나는 굶을 수밖에 없다고 빈손으로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너 이리와! 내가 너와 네 가족의 생명, 한 데나리온 줄게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한 시간 밍기적 거렸더니 그걸 주는 거예요 진짜로. 누가 가장 주인에게 감사했을까요? 이 사람들이예요. 쓸모없는 사람들. 이렇게 영시에 온 사람, 육시에 온 사람, 구시에 온 사람, 십일 시에 온 사람 모두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행복하게 일을 했어요. 그죠? 이른 아침 영시에 온 사람도 행복하게 일 했어요. 왜 ? 그게 하루의 일당이었거든요. 그게 가족들이 살 길이었으니까. 아니면 자기는 그냥 하루 종일 공칠 뻔 했는데 주인이 불러줬으니까 행복하게 일했어요. 구시에 온 사람 마찬가지예요. 육시에 온 사람 마찬가지. 십일 시에 온 사람 더 행복했죠. 이 사람은요. 이게 웬 떡이냐? 한 시간만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준다니까. 다 행복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임금을 계산할 때 발생합니다.
 
주인이 십일 시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주는데 애초에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한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어요. 그건 그와 그 가족들이 생명의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므로 모두에게 흡족하고 합당한 임금이에요. 그거면 살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십일 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그걸 보자 그 보다 먼저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 우매한 기대를 하기 시작해요.
 
갑자기 행복이 깨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자격 없는 자기들의 처음자리, 주인이 불어주지 않았으면 그들은 굶는 거예요. 그런데 불러줘서 행복하게 일했단 말예요. 그런데 그 처음자리를 잊어버려요. 내가 무얼 했는가? 내가 얼마만큼 일을 했는가를 계산 하면서부터 그게 깨져요. 내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죠? 처음에는 자기들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준 주인이 그저 고맙기만 했어요. 그런데 자신이 한 일의 양과 다른 사람의 것을 비교하면서 부터 은혜가 망각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더 많이 일했고. 그 많이 일한 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가치로 환산이 되거든요.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쟤랑 나랑 차등 있게 대우 안 해주냐는 거예요. 왜 상을 안주냐는 거예요 나한테. 왜 똑같이 공평한 은혜로만 대하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부름을 입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입은 자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불러들이기는 했는데 그 은혜를 진짜 이해하는 자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걸 지금 설명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자기는 더 많이 일했고, 더 열심히 일했으므로 상을 더 달라는 거예요. 이게 율법주의 아래에서의 아담들의 모습이죠. 실존 이예요. 그때 주인이 뭐라 그래요? 왜 불평하니? 애초에 내가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하고 너희를 데려오지 않았냐? 그래서 그렇게 주고 있는데 왜 불평해? 다른 이들이 나의 은혜를 받는 게 그렇게도 배가 아프냐?
 
바리새인들이 그랬죠. 저 세리와 창기들이 우리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그런 천국 안 가.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게 배가 아픈 거예요. 왜? 나는 뭐 했거든요. 근사하게 나를 이렇게 치장을 해 놨는데 왜 어디 되지도 않는, 십일 시에 온, 한 시간 밍기적거린 걔네들과 나를 동일하게 취급 하냐는 거예요. 이들이 은혜를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불평과 원망을 하게 돼요.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배가 아파? 그렇다면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마저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면 너희는 어떻게 됐을까? 너희들도 죽는 거야. 제가 조금 의역을 했습니다만 주님은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내가 너희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어떻게 됐을까?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걸 아는 자들은 누가 한 시간을 일하고 뭐 받던 관심이 없어요. 나는 살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인의 은혜로. 그것만 찬송하는 건데 율법주의 안에 갇혀서 내 것을 계산 하고 나의 됨됨이와 성숙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차등이 생기고 차등 상금 론을 주장하게 돼있어요. 저는 요걸 깨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성도는 그의 효용가치나 자격이나 능력을 가지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어요. 모든 인간이 다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로 태어난다니까요. 다 죽은 거예요. 그건요. 그들 각자의 외양과 스팩이 다 달라요. 소유하고 있는 Possession. Spec 외양이 다 다르단 말예요. 그래도 다 죽은 거예요. 그냥 놔두면 죽음의 못으로 그냥 다 들어갈 존재들이란 말예요. 모두가 다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생명책에 적힌 명단을 받아들고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그리고는 그들의 외양과 스펙과 상관없이 그 생명책에 적혀있는 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당신의 품안으로 끌어안으신 게 구원이란 말예요. 그러는 예수님의 품안에서 누가 더 성숙하고 누가 덜 성숙하며 누가 더 헌신했고 누가 더 착한 모양으로 살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게 중요하다고 우긴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일찍, 일찍 와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온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주의는 반드시 인간의 행함과 업적을 계산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계산이 되기 시작하면 인본주의적 공평을 생각하게 되고 그 인본주의적 공평에 의해서 차등 있는 상급을 주장하게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공평하게 취급하셨으면 어떻게 될 뻔했는지는 제가 에스겔서를 갖고 다음 주에 설명해드릴 거예요. 정말 계속 못하네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천국 못 들어간다, 그래요. 마태복음 20장 16절 보세요.
 
마20: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여러분 이 비유에서 먼저 된 자가 누구예요? 자기들이 일을 많이 했으니까 차등 있는 보상을 해달라고 우겼던 일찍 온자들이예요. 누구죠?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왔으니까 우리가 선민이다, 그리고 우리는 열심히 이렇게 깨끗하게 ,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금식하고 이렇게 사는데 저 세리와 창기들이 우리와 같은 대접을 받아? 그거는 안 돼! 그래서 그들을 공평하게 대우하겠다, 라는 예수를 죽여 버린 거거든요.
 
일찍 온자들이요, 율법주의, 인본주의. 그들은 은혜를 인정할 수 없어요. 왜?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공평하게 거저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기들은 지금 자격을 쌓았다고 착각하고 있단 말예요. 나는 자격이 있는데 왜 자격이 없는 자와 공평하게 대접하느냐는 거예요. 많이 이랬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감사거리가 되지 않아요.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그 소유, Possession을 계산 하는 순간 은혜가 감사거리가 되지 않아요. 그들이 나중 된다. 그러죠? 나중 된다는 건 일등, 이등의 차서를 바꾸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 지옥이란 뜻이에요. 그들은 끝장이다!
 
그러면 나중 된 자들은 누구에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누구든 품꾼으로 데려가지 않은 불가능하고 무기력한 자, 세리와 창기 같은 그런 부류겠죠? 그들은 벌써 지옥이에요. 세상에서도 그들을 부를 때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신단 말예요. 그들이 처음 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인이 은혜와 긍휼로 덮어서 그렇게 무기력하고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자들을 포도원으로 불러 들여서 한 데나리온, 생명을 주는 거예요. 그들은 면목이 없어요. 고개도 못 들죠? 고맙고 고마워서 고개도 못 들어요. 여러분 그걸 성도라고 해요. 거기가 하나님 나라인 거예요. 자기들은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어요. 누가 봐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주인을 사랑할 수 있어요.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여러분 보고 그렇게 게으르게 쓸모없는 자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모든 인간의 처음자리가 거기란 말예요. 그런데 아닌 척 하고 사는 거거든요. 성도는 그 처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서. 나는 아무쓸모 없는 자였구나. 한 시간 밍기적거리다가 한 데나리온 받은 그런 면목 없는 자였구나, 이걸 알게 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원하는 건 바로 이거예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라는 거예요. 주인의 긍휼과, 주인의 사랑과, 주인의 배려와 주인의 그 능력을 알라는 거예요. 그걸 아는 자들이 그 주인과 어디에 있던 안전함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존재임에도 나를 이토록 사랑해주신 그 분, 그리고 그렇게 큰 능력이 있는 분, 포도원을 갖고 있는 재력 있는 분. 그분이 내편이다, 그러니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나 다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게 영생이며 천국인 거예요. 우리는 그걸 알자는 거예요. 여기서 무얼 하자, 그래서 스팩을 쌓고 훌륭한 됨됨이를 갖추어 바리새인이 되자? 여러분 그거 개혁주의 아니에요. Reformed,개혁주의는 원래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과 믿음과 성경으로 돌아가자 예요. 은혜, 믿음, 말씀으로만 돌아가자!! 이게 개혁주의잖아요. 지금 그러냐고요? 그래서 제가 간혹 ‘개혁주의’는 잘못됐다는 거지 , 진짜 개혁주의 하잔 말예요 우리는. 은혜, 믿음, 말씀으로 돌아가자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품꾼을 부르는 주인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 주인을 알라는 거예요. 그 주인을 아는 게 영생이다. 그 주인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아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아들이 되는 거.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건 Doing 의 문제가 아니에요. Being의 문제인 거예요. 무엇을 했느냐를 근거삼아서, 구원해서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전혀 쓸모없고 무기력한 자, 이게 혼돈과 공허와 죽은 흙이잖아요. 그들을 있음이라는 존재, Bein, 존재를 바꿔버리는 거예요. 굶어 죽어야 할 각양의 인간들을 포도원으로 그냥 불러들이는 걸 구원이라고 해요.
 
이 비유가 무엇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건 여러분이 잘 아시요? 바로 그 앞에 19장 마지막을 한번 보세요. 19장 27절
 
19: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서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 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들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
 
똑같은 어구가 나오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리고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이어지고 또 다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리고 십자가로 결론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요개 뭔가를 잘 배우셔야 돼요, 여러분. 그래야 19장 20장이 십자가로 어떻게 설명이 되는지를 여러분이 알 수 있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해준 거예요? 부자 청년이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죠? 선한 선생님이여!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인데 왜 나보고 선하다고 그래? 예수님은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이죠? 근데 영생이신 하나님, 생명을 품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그 생명을 못 알아보고 어떤 놈이 오더니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무얼 (Doing) 해야 영생을 내 손으로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엉뚱하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생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선한 ’ 이라는 단어를 끌어다 쓰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 영생의 주인인 하나님인데 너 내가 하나님인 줄 알고 선하다고 이야기 하는 거야? 모르고 지금 영생을 얻는 방법을 나에게 구하고 있는데 너는 내가 하나님인 줄 모르고 있잖아, 지금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존재론적 선악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너 지금 내가 누군 줄 알아? 묻는 거예요.
 
내가 영생의 주인이야, 내가 생명나무 실과야. 이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가 엉터리 질문을 해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켜라,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래, 율법이라는 거 있잖아, 다 ‘해’ 그러는 거예요. 정말 예수님이 그 사람이 그걸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여서 다 ‘해’ 그런 거예요? 무어를 ‘해야’, 난 자신 있거든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만 해주세요. 다 할 테니까.
 
요 사람에게 그래? 정말 그럴까? 그럼 가서 한 번 해봐! 율법? 다 지켜, ‘해’ 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거는 하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해도 영생은 네 힘으로 못 얻어 라는 역설을 말씀 하시는 거예요. ‘해보라’는 거예요. 가능한가.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이 뭐라 그래요? 저는 어려서 부터 ‘다 지켰습니다.. ‘다 했습니다’ 그러죠? 언제부터? 어려서부터. 아침 일찍 온자예요. 어려서부터 다 했습니다. ‘다 했으니까’ 이 사람의 이 사람의 Possession 소유가 엄청 많겠죠? 그죠? ‘ 다 ‘했어요. 그래서 나를 확장시켜 놓았다고요, 나를 구축해 놨단 말예요. ‘다’했어요. 비대해졌어요. 그래서 ‘ 부자’ 예요. 그걸 ‘부자’라고 해요.
 
율법을 ‘다’ 지켰다니 너 참 기특하구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건 너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만 듣고 거기에만 순종한다는 뜻인데 네가 그거 진짜 알고 내가 포기되고 하나님에게 내가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가는 게 말씀대로 사는 거거든요. 예수라는 말씀을 좇아 사는 건 내가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나는 율법 다 지켰다고 한단 말예요. 그래? 네가 말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니까 그럼, 그 진의 가 뭔지 네가 알고 지켰다면 내 말을 들을 거야. 네가 쌓아놓은 Possession, 소유를 다 한번 팔아서 없애버리고 영생의 말씀인 나를 좇아 와 봐라 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말씀 지키는 거잖아요? 말씀만 좇아 사는 거잖아요. 나를 확장하고 나의 구원과 천국을 위해서 이 세상 역사 속의 모든 것을 이렇게 스팩으로 쌓아서 내 Possession 소유로 끌어당기는 게 역사 속 율법 아래의 아담들의 구원을 향한 열정이라면 성도는 이걸 다 부정당하고 빈털터리로 예수를 좇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구원이라 그러잖아요. 이건 다 아니었구나, 이거 알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네가 율법을 지켰다면 알거야. 그러면 그걸 다 소유를 다 없애버리고 , 너 지금 부자잖아, 네가 너를 구축하고 규정하기 위해 많이 쌓아 놓은 거 있잖아. 그거 한번 다 부정해 버리고, 없애버리고 나를 쫓아와 그래요. 그랬더니 근심하죠? 그건 아닌데, 내가 그러려고 이렇게 열심히 율법 지키고 경건하게 살고 세상의 가치 모은 게 아닌데,,,.
 
지금 예수님이 너 예수 믿어! 라고 얘기 했더니 그가 믿는 게 따로 있다는 게 폭로돼요. 나를 따르기 위해 예수를 버려요. ‘나’와 ‘예수’ 사이에서 내가 구축한 그 ‘나’, 그걸 붙들기 위해 예수를 버리는 거예요. 예수와 나 사이에서 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 그 어떤 것들, 어떤 모양의 것들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런 것들을 끌어 모아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나를 확장하려고 하는 그 모든 아담들의 그 욕구와 그 삶의 지향성을 부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다 부자예요. 여러분 부자예요. 부자. 그런데 저주 받을 부자란 말예요, 그게. Possession 이란 말예요, 그게, 돈이 아니고. 소유가 많은 것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돈이 많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내가 나를 구축하기 위해 많이 끌어 모아 놓은 자. 그건 착한 행위일 수도 있고 도덕 윤리 지킴일 수도 있고 제사일 수도 있고 하여튼 나를 증명하고 자랑하게 위해 내 안으로 이렇게 끌어들여 놓은 거 그게 많은 자를 부자라고 한단 말예요.
 
그런데 이 부자청년이 그걸 못 놓겠다고 한 건 그의 율법지킴, 착하게 산 거, 도덕, 윤리적인 삶, 경건한 삶, 이게 다 뭐였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확장하기 위해 나를 구축하고 규정하고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 나라는 존재의 업적 쌓기로 그런 것들을 했다는 거죠? 그게 부자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청년은 열심히 살아서 나라는 존재 구축에 성공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자들이 저주 받은 자예요. 그래서 성경이 그가 소유, possession이 많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부자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이었단 말예요. 유다 보세요. 왜 유다 보고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해요? 그가 돈을 사랑했으면 그 돈궤 갖고 먼저 튀었을 거란 말예요. 돈을 사랑한다, 라는 건, 그까짓 돈, 우리가 갖고 다닐 수 있는 재화의 축약으로서의 그거, 그거가 아니라, 향유 병을 깨트리는 여자에게 유다가 뭐라 그래요? 야 그걸로 착한 일을 해야지 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해? 그러잖아요? 왜 은혜를 설명하려고 해 그걸로? 착한 일을 해야지. 요게 율법주의예요. 요게 마귀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다보고 너는 마귀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주의라는 말입니다. 그게 부자란 말예요. 그게. 인간들의 자존심과 가치를 놓지 못하는 거. 그들은 절대 예수의 은혜 앞에서 엎드리지 못해요. 그래서 바리애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린 거란 말입니다. 내가 해 놓은 게 많으니까. 내가’나’로 구축해 놓은 게 많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적절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세요. 마태복음 19장 23절.
 
마19: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
 
돈이 많으면 천국 못 간다는 뜻이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돈 많은 분들이여. 여기서 부자란 나라는 존재구축을 위해서 이 세상 것들로 비대해진 모든 아담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그 다산과 연합과 증대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다그’ 물고기들, 아담들이예요. 율법아래의 아담들. 주님은 그들을 낙타에 비유하시죠?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이 부리던 가축 중에 제일 큰 게 낙타였어요. 팔레스틴 땅에 코끼리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낙타였어요. 제일 큰 거. 그들이 알고 있는 제일 큰 짐승. 낙타. 율법아래의 아담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거예요.
 
자기의 확장, 인간의 자존심, 자기존재의 구축, 자아 확장, 자아실현. 이것만을 위해 일로매진 하는 자들, 선악과 먹은 아담들. 요게 낙타라는 거예요. 부자라는 거예요, 이게. 비대해진 자, 제일 큰 자. 그런데 천국은 바늘귀예요. 못 들어간다는 얘기죠? 진짜 낙타가 바늘귀에 못 들어갑니까?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없어요? 있습니다. 바늘을 낙타만큼 크게 만들면 돼요. 이건 농담이구요. 낙타가 다이어트 해서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면 돼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 내가 죄인중의 괴수네요. 이게 겨자씨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이게 먼지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잖아요. 내가 죄인중의 괴수니까 더스트이니까.그런 먼지는 바늘귀를 숭숭 들어갔다 나갔다 할 수 있어요. 성도의 삶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나의 존재를 구축하기 위해 쌓아놓은 모든 걸 하나님이 부수어내고 이 낙타들을 다이어트 시켜내는 거요. 다이어트 시켜서 슬림하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이게 자기부인, 자기부정. 그런데 그게 우리의 힘으로 됩니까? 안되죠?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 하셔요. 보세요. 19장 25절.
 
마19: 25—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면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자기부인을 우리 힘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해 주셨어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로마서 6장 6절 보세요.
 
롬6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죄의 몸이 멸하여
 
낙타가 멸해졌다니까요, 없어졌어요, 죽었어요. 십자가에서, 부정됐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십자가를 아는 여러분은 바늘귀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제 없음이 됐거든요. 요걸 알자는 거예요, 우리는요. 죽었다니까요. 몸이 멸해졌어요. 부정됐어요. 하나님이 하셨다고요.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이 부자로 살고 있는, 나만을 위해 나의 존재확장만을 위해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야 이거, 하나님이 그냥 놔두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저 바늘귀를 어떻게 들어갈 뻔했어? 못 들어가는 거예요. 천국에.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나를 죽여 놨다고 하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하는 거예요. 그 자들이 모인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성도를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죽은 자로 만들어 내신 거예요.
 
이렇게 성경은 마태복음 19장,20장 아니, 여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네러티브를 통해서 십자가 예수만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포도원 품꾼의 그 비유가 이 부자청년 , 베드로의 이야기,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십자가로 끝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 네러티브를 끌고 오신 거예요. 역사를 조종하시고 비유를 들어 십자가를 설명해요. 그래서 모든 건 다 십자가예요, 예수 예요. 그래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끌어내는 자, 삶을 통하여 예수만을 붙들게 되는 자를 예수를 낳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계시록에 나오는 여자, 그가 교회라는 거예요. 한 번 더 보죠. 마태복음 20장 16절 보세요.
 
마20: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지, 나는 먼지가 맞습니다 는 이 세리와 창기,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는 이 자들이 천국 간다라고 얘기 해놓고 뭐라 그러냐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 열 두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너희들에게 영생은 요런 방식으로 주어지게 되는 거야. 그런데 아침 일찍 왔다고, 삼시에 왔다고, 구시에 왔다고 상을 더 달라 그래? 요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야, 영생은 십자가로 주어지는 거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아, 율법주의자들아, 인본주의자들아 지금 너희들이 한 일을 갖고 내 앞에서 계산을 해달라는 거니? 공평을 이야기 하는 거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라는 사람이 또 엉뚱한 질문을 하죠? 그러면 선생님, 저는 다 버렸거든요? 그럼 저한테는 무슨 상을 주실 거예요? 그래요 ㅎ, 하여튼 이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이 시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죠? 시몬은 뭐? 시므온, 광야, 사막, 기근, 기갈, 말씀이 없는 상태. 그래서 시몬 베드로란 말예요. 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이 과정이 신앙생활이라 그랬죠? 보세요, 또 뭐라 그러느냐하면 , 선생님 보세요. 나는 다 버렸는데, 쟤는 저렇게 많이 갖고 있어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그러는데 나는 ‘다 버렸잖아요. , 그러면 무슨 상을 줄 거예요 저한테? 그러면, 베드로가 ‘다 버린 건’ 뭘 위해 버렸다는 거예요? 나를 위해 버린 거예요. 나의 천국, 나에게 떨어질 보상을 위해서 .역시 자아 확장을 위해 버리기까지 하더라는 거예요, 이 교활한 인간들은요.
 
자아확장, 자기증명을 위해 무소유까지 끌어다 쓰는 존재들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나를 구축하고, 나를 놓기 싫어서 소유를 다 버리는 짓까지 하는 게 인간이라고요. 그러면 이 베드로 역시 뭐예요? 나를 구축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 버리기까지 한 이 자도 부자인 거예요. 두 부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도 부자란 말예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 비유가 떨어지는 거예요. 그 부자청년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너나 부자청년이나 똑같은 놈이란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보세요.
 
마19: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요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뭐로 보상해 줄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보세요. 19장 28절,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
 
여기 여러 배는 백배예요 이 백 배라는 건 꼭 산술적 백배가 아니라 이전 것보다 다른 종류의 너무너무 상상 할 수도 없이 좋은 것, 이예요. 백 배. 이게 뭐냐면 ‘또’ 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이게 ‘카이’ 예요. 즉, 영생을 상속하리라 영생의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그런데 영생이 어떤 영생이냐 하면 전토, 자식, 부모, 집 이런 걸 다 끊어버리는 거, 이게 뭐예요? 부자청년이 갖고 있던 Possession, 소유 이었단 말예요. 낙타의 살로 갖고 있었던, 부자청년이 갖고 있었던 ‘나’라는 존재 구축의 재료들이었잖아요, 이게. 요게 다 끊어질 때 너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 백 배, 영생이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거라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모아서 나를 증명하고 그걸 산다, 살아있다, 생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예요. 역사를 끌어 모아서. 역사를 똘똘 뭉쳐 생명을 만들려고 하는 게, 인간이라 그랬잖아요.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끊어 내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이렇게 쭉 끌어 들인 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이 모든 것들이 영생의 재료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생명나무 실과인 예수를 먹어야 된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게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걸 다 끊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가 열 두 지파를 심판한다고 그러죠? 이게 언제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 보좌 우편에 앉으시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시잖아요. 자 보세요, 지금 베드로는 역시 부자예요, 지금. 부자예요. 부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지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요런 것들은 다 영생의 재료가 아니구나,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 은혜, 보혈의 피로만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구나, 를 알게 된다는 뜻이죠? 그 때 그러한 은혜를 아는 자들에 의해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어떻게 돼요? 정죄 되고 심판 받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열 두 지파 율법주의가 은혜를 아는 자들에게 심판 당한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그걸 만들어 내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전부 예수 이야기란 말예요. 우리는 낙타가 되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살들을 하나님께 다 뺏기고 예수로만 천국 가는 거구나 그걸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들이 율법주의를 비웃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열두지파, 이스라엘, 율법주의를 심판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아 확장의 재료들을 하나님에게 빼앗기는 거, 낙타 다이어트가 여러분의 인생의 실존이에요. 낙타 다이어트. 이거는 몇 주 완성, 이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단 번에, 영단 번에 완성이 되는 거예요. 낙타 다이어트. 그래서 없음이 되어버렸어요. 죽은 흙이 되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 앞에 없음으로, 그래야 창조의 능력만 오롯이 영광 받으니까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내시는 거란 말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서 반드시 그러한 낙타들의 살들을 끊어내어 기필코 바늘귀로 들여보내시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이 육신의 살을 빼는 것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부인당하고 부정되는, 내가 진짜 없음이 맞구나, 이 과정을 겪는 게 쉽겠어요? 어렵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쌓은 신앙의 스팩들, 세상의 힘과 가치들, 그 모든 것을 다 합해도 영생에 도달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 이름 앞에서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끊어내는 거예요. 버리는 거. 그래서 예수 보다 덜 좋아해야 되는 거예요. 그거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 세상 것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절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죠? 세상 것들을 나 보다 더 미워해야 된다. 그러잖아요. 그게 덜 사랑하다 에요. 안 사랑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자식을 안 사랑해요? 어떻게 돈을 안 사랑해요? 어떻게 나의 이 존재와 나의 이름과 명성을 어떻게 안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러니 이것들이 나에게 영생을 갖다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보상을 얻어낼 수 있는 재료도 아니구나, 아는 거, 이게 덜 사랑하는 거예요. 예수만이 영생의 길이구나, 이걸 아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의 삶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율법주의, 인본주의를 심판하는 삶이 되는 거예요. 복음은 인간들의 그 열심 자체를, 스스로 바벨탑 쌓는 열심 자체를 다 묵살해 버린다는 게 심판이라고요. 인간들은 절대로 자신의 영생에 기여할 수가 없어요. 아니 진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도 없어요. 성령에 의해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거든요. 한 시간 일하고 밍기적 거리다가 한 데나리온 받은 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요구할 수도 없어요. 하나님이 지옥 보내시면 저는 지옥 가는 게 맞아요. 하나님, 이제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아이, 제가 가서 뭘 하겠어요? 하나님이 안 불어주셔도 저는 마땅한 자예요.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안 불러 갔거든요. 이 고백을 하는 거란 말에요. 우리는요. 그런데 어떻게 나의 구원, 나의 천국 이런 얘기를 성도가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변화나 성숙이나 가치나 됨됨이를 근거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확실해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 운운 할 수도 없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은 그런 걸로 오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 만약에 그런 것으로 우리의 구원이 확신 된다면, 우리 그러잖아요. 옛날에, 79년대, 80년대 유행하던 게 뭐에요? 당신 언제 구원받았어?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거죠? 언제 구원받았어? 1978년 8월 15일, 하늘이 열리던 그 때에,, 뭐 이렇게 신파적으로 뭘 만들어 내고 막 이런 우스꽝스런 유행이 있었잖아요. 하도 물어보니까. 헌병이 무슨 검문하듯이 ‘너 언제 구원받았어? ‘ 그러니까 며칠이라고 할까? 뭐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언제 구원받았어? 그러면 ‘창세전에’ 이렇게. ‘창세전에’ 구원받은 거예요, 여러분 언제 구원받으신 줄 알았어요? 그럼?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이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장 자기들의 구원을 확신했던 사람들이 누구예요? 유대인들이예요, 바리새인들. 자기들은 율법 지키고, 제사지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구원받는다, 왜? 너희들이 안 하는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고 착하고 경건하게 살고 금식하고 다 했거든. 구원의 확신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요. 그래서 세리, 창녀들 이런 사람들 보면 은 우스웠던 거예요. 확신이 있어. 그런데 다 지옥 갔어요. 구원의 확신 갖고.
 
누가 천국 갔어요? 아이고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세요. 이 세리 창기들천국 갔어요. 그들이 무슨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나는 아니에요 하나님 잘 못 찾아오셨어요. 이들이 천국 가더라니 까요. 인간들이 자기들의 열심과 됨됨이와 성숙의 정도를 갖고 갖게 되는 구원의 확신은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창조의 주인 예수, 말씀이신 예수, 그분을 죽이는 거라니까요. 왜? 창조는 없음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단어잖아요. 뭐가 있을 때, 이게 바다가 되면 그것도 창조가 아니에요. 원래 요만큼이라도 있었으니까. 없어야 창조란 말예요. 그러니까 창조주 살해 사건은 없음이어야 될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예요. 선악과 입에 물고. 그게 창조주 살해 사건이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보리떡과 물고기가 되셔서 우리 대신에 죽어버린 거예요.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자궁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야 하는 자들인 거예요. 하나님이 열심히 일을 하시기에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를 절대 놓지 않으실 거야, 이게 우리의 확신이어야지 우리가 사유하는 구원의 확신은 없어요. 기도할 때는 구원의 확신 들죠? 이렇게 앉아서, 새해 1월1일인데 여기 모여서 예배드릴 때, 아이 요 때에 예수님 와야 되는데, 요 생각 안 해요? 확실한데 요건. 그거 구원의 확신 아니에요. 그런데 마누라랑 막 싸우고 있을 때, 이때에 예수님 오시면 어떻게 하지? 무슨 면목으로 이거,,,,. 그거 구원의 확신 아니란 말예요 그게. 그러니까 하루에도 열 두 번씩 흔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었던 자들이 아니에요. 그 어머니의 자궁, 긍휼 안으로 쑥 들어가서 한 몸이 되는 거예요. 한 몸. 그래야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긍휼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거.
 
나와서 내 개체성, 개별적 자아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일이 나는 거예요. 그걸 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래요. 네 구원을 위해 나를 쫓는다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그래요. 아니, 우리는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믿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다니까요. 네 구원을 위해 예수 믿는다면 너는 택한 백성 아니다 그래요. 왜? 거기에서의 주인공도 나거든요. 낙타예요 그게. 마가복음 8장 34절 보세요.
 
막 8: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여기 보세요. 낙타 다이어트예요. 바늘귀로 그냥 숭숭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자기부인이 된 사람만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런데
 
막 8: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이 세상 그 어떤 걸로도, 자격과 됨됨이 이런 것들 다 동원해서 나는 구원 받을 수 있어 라고 하는 자는 다 죽는 거예요.
 
막 8: 36--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온 천하가 뭐예요? 인간들이 얻어내어 나를 자랑하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세상 다! 그걸 다 얻어서 세상에서 제일 큰 낙타가 됐어요. 제일 존경 받는 낙타가 됐어요. 그래서 못 들어가요. 온 천하를 얻어도 목숨과, 생명과 못 바꾼다는 거예요. 생명의 값이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걸 다해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 되어도 그걸로 생명과 못 바꾼다는 뜻이에요. 값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영생은 예수거든요. 그래서 예수로만 지불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예수를 올바로 만나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돼요.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신 하나님께 그냥 면목 없이 감사하는 거예요. 감히 어디다 대놓고 나를 구원하세요! 이게 예수님 옆의 구원 못 받은 강도가 한 말이었잖아요. 너 메시야라며? 메시야는 나를 구원하러 온 거 아냐? 나 구해 봐~ 그랬단 말예요. 바른 말이잖아요. 구원자가 메시야니까. 그러니까 나 구해줘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건. 그 옆에 달린 구원받은 강도처럼 난 죄인입니다. 면목 없지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 좀 기억해 주실 수 있으세요?이거. 우리는 죽은 흙이었어요. 혼돈과 공허였단 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신 예수가 내려오셔서 우리를 그 분 안으로 끌어들인 거,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는 주인이 부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무 쓸모없는 품꾼들이었어요. 그런 자들을 포도원으로 불러 들이셔서 풍성한 하늘의 생명을 거저 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분을 찬양하시고 그분을 사랑하세요. 그게 성도의 본무예요. 여러분 예수님 사랑하세요? 예,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세요? 감사하세요? 왜? 자격 있는 나를 사랑해주셔서? 아니죠? 이런 나를 사랑해주신 그분, 당연히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사랑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찬송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경건치 않았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 진정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 아들의 발에 입 맞추는 자, 이게 창녀였잖아요. 입을 맞추는 것, 감사해서. 도대체 내가 뭔데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가 ? 그게 성도입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두 구절 읽어 드릴 텐데 귀 있는 이들만 들으십시오. 고린도 전서 16장 22절.
 
고전 16: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말씀을 잘 지키면, 성숙하면, 경건하게 살면 천국 간다가 아니라 주를 사랑해야 천국 간다.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러분은 그렇게 주를 사랑한 여러분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혹시? 주를 사랑하셔야 돼요. 시편 2편 12절
 
시2: 12—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예배라는 거예요. 아들의 공로만 드러나는 게 예배예요.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훌륭한 사람으로 살까를 적용을 가르쳐 주는 게 설교가 아니라 이 예배는 그 아들이 하신 일만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예배예요. 아들의 발에 입 맞추는 게 예배란 말예요. 엎드리는 것 )
 
시 2: 12---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여러분을 의지하면 안돼요. 낙타된 여러분을 자랑하시면 안돼요, 그게 오히려 저주 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을 자랑하시고 그분을 의지하십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