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6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되냐고 묻는 자들에게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3

로마서 61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되냐고 묻는 자들에게

 

본문: 6 : 1- 11

 

6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함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되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에 관한 설교를 오래 계속 하다보면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니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요, 라는 이런 무식한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래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죠?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헬라어 라는 불변 사를 사용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어요. 5장에서 한 사람의 행함과 한 사람의 순종함과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전적인 하나님에서의 구원의 메카니즘을 설명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왜 그럼 은혜에 거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네, 라는 질문을 끌어다 쓰고 있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선생이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그 질문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전도자가, 설교자가 올바로 설교를 하면,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나와야 하는 질문이 그럼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는 반응이 나와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만일 그런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 설교는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거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그런 반응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명심하셔야 됩니다. 거기가 끝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과정이란 말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그럴 수 없느니라. 로 시작해서 6장과 7장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 성도의 행함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정말 이 로마서 6장과 7장이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황에 관한 장인지 한 번 잘 들어 보세요. 먼저 힌트를 조금 드리자면 만일 이 로마서 6장과 7장이 기존의 주석서들이나 강해서들, 그리고 대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화에 대한 강조라고 한다면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의 문맥이 갑자기 엉키게 되는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로마서의 네러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선물인 그 의에 의해서만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그 은혜의 복음을 집중하여 설명하고 있었단 말에요. 그런데 갑자기 거기에 보태서 너희의 할 일도 남아 있다, 라는 식의 이야기가 붙어 버리면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내용이 멀겋게 희석이 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도 바울이 지금 성도가 해내야 할 죄와의 투쟁과 승리에로의 독려에 초점을 만춘 거라면 이 6장의 내용이 7장에서 갑자기 이렇게 바뀌면 안 돼요. 7장 한 번 가 볼게요. 15.

 

7 :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것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수시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보세요. 6장과 7장의 내용이 성도의 행함의 내용을 강력하게 독려하는 거라면 7장에서의 이 문맥은 그래서 나도 열심히 싸워서 죄를 안 짓는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까 너희도 열심히 해서 꼭 이겨야 돼. 이렇게 가야 되는데 7 장에서 그 네러티브가 이렇게 끝난다니까요. 심지어 바울은 자기 자신의 그 존재를, 정체성 인식을 사망의 몸이라 그래요. 사망의 몸이 뭐라 그랬어요? 살인자가 죽인 시체를 그 살인자와 꽁꽁 묶는 게 고대 시대의 벌이라 그랬죠? 그래서 얘가 살인한 사람하고 같이 썩는 거예요. 시체가. 요 붙어 있는 더러운 시체를 사망의 몸이라 그래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을 바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니까요.

 

죄와 싸워서 난 이렇게 거룩해졌다, 가 아니라 나는 사망의 몸이다, 이런 자 인식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것은 성도의 죄 짓기에 대한 강한 부정의 말 정도가 아니라 더 웅숭깊은 내용을 함의하는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이런 힌트를 먼저 잘 숙지하시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과 7장에 담아내고 있는 그럴 수 없느니라. 의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한절한절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본문 1절로 갑니다.

 

6 :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세서 행하게 하여 함이니라

 

언뜻 보면, 표피적으로 보면 너희 죄 지으면 절대 안 돼, 라고 강력하게 독려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이런 것을 곡해해서 구원파의 어떤 무리들은 자기들은 죽어도 죄 안 짓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있어요. LA에 있는 구원파 목사 한 사람도 제가 직접 만나서 얘기 했는데 자기는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대요. 나 헤수스 그럴 뻔 했어요. 예수님인줄 알고. 어떻게 죄를 한 번도 안 졌다는 말을 저렇게 확신 있게 사람이 하는지. 자기는 안 지었대요. 죄를. 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보시는 것처럼 5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한 사도 바울이 61절에서 지금까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이해했다면 너희는 반드시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 건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라, 고 지금 바울이 스스로 질문자가 되어서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예요. 어떤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대답을 목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아닌, 어떤 내용을 강화하고 확증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을 수사학적 질문이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5장까지에서 자기가 설명한 내용을 지금 강화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지 몰라서 뭘 묻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단호하게 부정을 한 사도 바울이 그 뒤에 어떤 이야기를 붙여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죄에 거하겠느냐 그러죠? 바울은 그 질문과 대답 속에 너희들은 정말 죄가 뭔지 알기는 아니? 라는 질문과 함께 은혜의 왕 노릇 하에 있는 자들은 이미 죄책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다를 함께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자연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개념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관점에서 판단된 그 행위에 국한 되지요? 행위와 되어 나온 어떤 법, 거기에 국한되어 죄를 정의한단 말에요. 자연인들은. 인간 보편이 합의하고 정의한 도덕과 윤리와 양심에 근고한 선과 악의 구별에 의해 죄와 선이 판단 돼요. 자연인들 사이에서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러한 행위나 사유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아요. 그게 죄가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존재의 근본을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존재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선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독자적 존재의 상태를 악이라고 해요. 물론 그런 존재는 있을 수가 없지만 선과 악을 설명하기 위해 의를, 불의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상정해 놓고 우리에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마귀, 마귀의 세력, 마귀의 세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설정하시는 거란 말에요. 이 세상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그 생명력, 창조의 능력 그 밖에서 존재가 될 수 있는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악이라고 하고 그렇게 추구해나가는 그 경향성마저도 악이고 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 거예요. 방향을, 과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질문하는 자들은 죄가 뭔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없는 얼치기들인 거예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 선악 체계 하에 있는 얼치기들이예요. 그런데 그 얼치기들 중에 귀가 열린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될 그들에게 설명을 해주시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바로 그러한 죄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더욱더 강화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거란 말에요. 잘 생각해보십쇼.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질문 속에는 자신의 그 행함이 대단한 가치가 있음이 이미 전제로 들어가 있는 거죠? 자신의 행함에 의해 어떤 결과가 도축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그 속에 들어 있잖아요. 그걸 인과율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게 세상의 법칙이에요. 항상 원인이 있어야 그 원인에 의해 결과가 오는 것,

 

그런데 구원이라는 건 뭐예요? 우리 측에서의 원인이 없는데 구원이라는 결과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하고 자존심 상해서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는 거란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는 인과율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론 원인은 있죠. 그런데 원인 제공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란 말에요. , 그렇게 자신의 행함에 의해 어떠한 결과가 도축될 것이다, 라는 그 신념, 그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생래적, 내적, 체계인 선악 체계인 거예요. 그게 배제되어 있단 말에요. 이미. 그 선악 체계 속에서는 반드시 원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권선과 징악이 진리예요. 그래서 기도한 만큼 복 받고 금식한 날만큼 복 받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는. 그 선악 체계 속에서는 은혜가 이해가 되어지지 않아요. 거기에서는 권선과 징악이 진리예요. 그리고 내가 한 만큼 결과가 주어진다, 가 진리란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선악 체계가 구분해 놓은 선과 악에 대한 권면과 징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의 진리는. 그 구분에 의한 성에 대한 권면과 악에 대한 경고와 그 징계를 하는 것 자체, 선악 구분의,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사는 그 모든 행위를 하나님이 뭐가 그랬어요? 저주해버렸으니까. 죄라고 한단 말에요. 그건요. 선악을 아는 일에 주체가 되는 건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을 일이란 말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반드시 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렇게 율법 지킴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여러분 도덕과 윤리는 항상 상대성을 갖고 있는 거 아세요? 수시로 변합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요 손님이 찾아오면 자기 아내를 갈 때까지 내 줘야 돼요. 그게 선이예요. 진리라는 건 어디세서든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어디서는 이게 악이고 어디서는 선 인거? 어느 나라에서는 뚱뚱한 게 예쁜 거고 어느 나라에서는 마른 게 예쁜 거. 진리 아니란 말에요. 이거는요. 옛날 중세의 미인도 같은 거 보세요. 요즘은 욕먹어요. 그거요. 그런데 그 땐 미인이었다니까요.

 

보세요, 인간이 정의한 아름다움, , 착함 이런 건 시대에 따라 변한다니까요. 그건 진리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을 선하다, 악하다, 가치 있다, 가치 없다고 판단하는 거, 이게 선악 체계이고 선악 구조란 말입니다. 그거 아녜요. 성경은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를 그들의 행위로 구분하지 않고 영역으로 구분을 해요. 그 존재가 어떤 영역에 소개 있으며 누가 그를 장악하고 있는가, 로 구분하고 나누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손에 장악된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린 아기까지 도륙해서 난자하여 죽어도 그게 선이었던 거예요. 오히려 그거 안 하면 하나님이 죽여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두 나라를 대조해가며 설명하는데 그 한쪽이 마귀의 나라이며 다른 한쪽이 아들의 나라인 거예요.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 흑암의 나라에 먼저 속해 있다가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그게 없음의 자리에서, 티끌에서 있음의 자리로 가게 되는 창조의 메카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흑암의 나라로 먼저 오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에 설명해 드렸죠? 왜 우리가 간음한 자로 먼저 오게 되는지. 그렇게 됨으로써 구원이 뭔지, 영생이 뭔지, 죄가 뭔지, 의가 뭔지를 배우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 과정 전체를 양육이라 그래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자가 철장을 가진 아들을 낳고 천 이백 육십일 동안 양육 받는다. 그러죠? 천 이백 육십일은? 한 때, 두 때, 반 때, 세달 반, 뭐예요? 역사예요. 인생. 우리의 이 역사와 인생은 바로 그런 양육의 과정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걸 배워가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 우리의 처음 자리는 이렇게 티끌이었구나, 이렇게 알아 가는 거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 그 능력 뒤로 자꾸 이렇게 숨어들어가게 되는 걸 성화라고 해요. 그건요. 그게 진짜 Sanctification 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십자가 뒤로 이제 숨어서, 작아지다 못해 거기에 이렇게 함몰되어 버리는 상태를 Union Christ, 연합이라고 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113절 보십쇼.

 

1: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는 장면이 나오죠? 그건 뭔 얘기예요? 도대체가. 아들이 하나님께 나라를 바쳐요. 그러면 그 아들은 뭐냐고요? 하나님 나라는 아들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그 나라라는 건 아들과 관련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라 취급 안 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아들이 나라를 바치는 거예요. 내가 나라 못 바친단 말에요. 그럼 보세요. 옮기셨다. 이 메세트테세는 메디스타미의 직설법 과거시제예요. 여러분은 이미 옮겨졌어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단 말에요.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을 성도라고 하고 그들의 상태를 거룩이라 그래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의와 거룩이, 구원이 되셨다, 그러지 너희들이 거룩을 성취해 가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거룩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 일은 아버지께서 홀로 하신 일이예요. 우리가 애써서 그 나라에 들어간 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옮기셨다 그러잖아요. 우리가 옮겨 간 거 아니란 말에요. 옮기셨다, 그래요. 그런데 광야는 우리 발로 걸어가야 돼. 하나님이 옮기시는데.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에요.

 

그런데 애굽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부추, , 마늘 이런 거. 정력제, 고기 이런 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그 왕에게 순종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나란데 가나안은 내가 먹고 싶은 걸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것만 먹는 곳이란 말에요. 그러니 이게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감지가 될 때 쉽겠느냐고요, 이게. 어려워도. 고난이란 말에요. 그게. 고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까지 설명한 게 바로 그 내용이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다. 이게 5장까지의 내용이잖아요. 예수님의 의,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의. 계속 그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에스겔서나 요한 계시록 등에서 확인한 것처럼 아들의 나라는 아들에게서 나오는 생명수에 의해 열두 가지 실과, 열둘 이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숫자예요.

 

그 실과가 아들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에 의해서,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도 그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 그러잖아요. 그 생명에 의해서 사는 자들. 그들이 사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한단 말에요. 아들의 나라라고 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만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영생이고 거기에는 사망이 없는 거죠? 그럼, 사망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사망은 죄의 삯이니까. 죄가 없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면서요? 그럼 분은 사망과 죄와 관계가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다!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 구원 받았다며? 너희는 또 무슨 행위를 근거로 하여, 또 어떻게 너희 행위의 가치를 부여하여 죄를 지어도 되냐, 말아도 되냐 이따위 얘기를 하느냐? 라고 물어주는 거예요. 대신. 잘 새겨들으세요.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녜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아들의 피로 가려서 안 본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게 진짜 감사한 사람이 그럼 이제 맘대로 죄 지어야지. 이렇게 나오겠냐는 거예요. 진짜 아는 사람이면. 여태까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 있고 정말 하고 싶은 거 허벅지 찔러 가며 참고 있었다는 거죠 그거? 감사해서 한 게 아니라.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이 지금. 진짜 너희 복음에 의해 그일 하고 있는 거야? 얘기를 계속 묻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자기를 향해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우리도 죄 짓는단 말에요. 나를 사랑하는 게 죄예요.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거. 그런데 보이지도 않은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합니까?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만 사랑해요. 내 자식? 그것도 나예요. 내 부모? 그것도 나라니까요. 내 존재의 확장. 나만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가 역사 속에서 사망을 통과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이 죄를 안 짓는다면, LA에 있는 그 목사님처럼 죄를 안 짓잖아요? 지금부터? 그럼 안 죽어야 돼요. 사망은 죄의 삯이거든요. 다 죽는단 말에요. 그건 인간이 죽는 날까지 죄만 짓다 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그 안에 예수가 살아있는 자, 그들만 하나님에게 살아나는 거예요. 예수로. 예수의 지체로만. 다시 말해서 사도는 지금 너희가 어떻게 죄를 더 짓겠다는 말을 할 수 있냐? 고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 어떻게 죄와 관계가 있겠느냐 라고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는 거예요. 너희는 지금 죄라는 것을 고작 인간들의 선악체계가 구분해 놓은 착한 일에 반대되는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 라는 거예요. 죄라는 건 행위화 되어서 표면으로 나타난 것 정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해도 되요? 말아야 되요? 해야 해요? 안 해야 해요? 이런 걸 물어보고 있다는 얘기예요. 지금.

 

죄는 생명과 관계가 된 거고 너희들이 열심과 노력을 보태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 양심적인 삶, 선한 삶도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만큼 죄는 무서운 거란 말입니다. 죽음이라니까요. 없음이라니까요. 그 자체가. 거기에서 내가 내 안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과 지혜와 힘을 갖고, 업적을 갖고 내가 존재가 되어 보겠다, 라고 하는 그걸 죄와 의, 이런 걸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주이다, 이걸 죄라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지금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죄는 생명과 관계된 단어라니까요. 몇 가지 하고 안 하고 가 문제가 아니란 말에요. 제가 수요일에 말씀 드렸잖아요. 아니, 어떤 처녀 데려다가 강간하고 280토막으로 죽인 그 놈이나 나나 똑같이 살인한 자란 말에요. 하나님은 둘을 똑같은 존재로 취급하신다니까요. 예수가 없으면.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홀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되는 거예요. 없음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또 죄 운운 하는 건 그 죄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아주 잘못된 것이 아니냐? 라는 그런 지적인 거예요. 아들 안에서 구원에 이른 성도는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거다, 라고 선언하는 거죠. 그래서 죽음과 세례의 이야기로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거예요. 다시 본문 2절로 갑니다.

 

6 :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합하여, 합하여, 합하여 계속 나오죠? 연합 이예요. 이게. 연합. 우리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죄가 왕 노릇하여 사망으로 끌고 가는 그 흑암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거예요. 죄라는 왕이 마음대로 부리던 종이 있었어요. 죄가, 마귀가 권세 잡은 곳이 어디예요? 여기예요. 여기. 이 세상. 거기서 마귀가 맘대로 부리던 이 세간들이, 종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종이 죽었네? 마귀가 어떻게 해요? 갖다 버려야 돼요 그건요. 그래서 여러분을 세상에서 죽이는 거예요. ?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리려고.

 

죄는 그렇게 난 살았다, 라고 펄펄 뛰면서 기고만장한 자들만을 자기의 세간으로 활용한단 말에요. , 인간이 왜 죽어? 왜 인간이 없음이야? 우리도 능력 있어. 할 수 있다니까? 이게 살은 거잖아요. 죄가 걔는 쓸 수 있다니까요. 살았기 때문에. 왜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는 지 아시겠죠? 바벨론에서 죽어요. 성도는. 그렇게 죄가 내다버린 시체를 은혜가 덮어서 살려내는 게 구원이란 말에요. 그래서 은혜가 더 큰 거란 말에요. 그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걸 동원하시는 거예요. 잠시.

 

사도는 그걸 세례라고 하고 세례의 개념을 합하여, 즉 연합으로 풀고 있는 거예요. 5절에 보면 연합하여라. 는 말도 두 번이나 나와요. 같은 말이에요. 연합이에요.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죽고 산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요. 그리고 살아날 수도 없어요. 존재를 몰수당하는 거라니까요. 성도는요. 우린 그렇게 예수 안에서 죄와 아무 상관없는 자로 죽어버렸어요. 죽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와 연합하여 장사 됐어요. 장사라는 건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거나 수장을 하거나 완전히 죽여 버리는 걸 장사라고 하죠. 세례라는 말 자체가 물에 장사지내다 예요. 그래서 물에다가 푹 담가버리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예요, 여러분. 왜 머리 위에다 뿌리는지 아세요? 네 머리 위까지 물에 잠겼다는 예식이란 말에요. 하나의 모형이란 말에요.

 

본문에 나오는 장사라는 말은 완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완전히 죽은 놈들이 무슨 죄를 짓고 안 짓고 이런 말을 어떻게 하느냐? 이런 거예요. 죽였다며?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장사된 지 사흘만 이라고 장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고 소요리 문답. 대요리 문답에도 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설명이 되고 있는 거예요. 장사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에 장사되시죠? 이사야서 539절 보세요.

5 :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무덤이,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의 무덤에 부자와 함께 장사되신다. 그러죠? 연합이에요. 함께. 보시다시피 이사야는 그 부자를 악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성경에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라는 건 못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돈이 많다, 라고 했을 때 얼마가 있어야 많은 거예요? 인간들은 나 돈 많아, 라고 이렇게 만족할만한 그 많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녜요. 그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그걸 부자라고 하지 않아요.

 

부자는 나 있음’, ‘나는 존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백성들, 하늘나라의 이 존재들은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없음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없는 거야? 나도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됐는데 나도 능력 있고 지혜 있고 할 수 있어, 라는 이 사람들. 이걸 부자라고 그래요. 나는 가진 게 있다니까. 이걸 부자라고 해요. 나도 율법 지켜서 착하게 살아서 그 구원에 이르는데 일조할 수 있다니까 이걸 부자라고 해요. 그걸 악인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게 여러분과 저라니까요. 그럼 그 낙타가 부자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건가요? 있습니다. 낙타가 다이어트 하면 돼요. 영적 다이어트. 그게 뭔지 아세요? 자기부인, 십자가, 라는 거예요. 그렇게 부인되고, 부인되다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양식을 안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삐쩍 마르다가 결국 먼지가 되어 바늘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게 쉽겠어요? 열흘 금식만 해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스트레스 받아요. 그러면 하지를 말지.

 

여러분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부정시켜 가세요. 부인시켜 가세요. , 아니라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예배당에 두각을 나타내고 잘난 인간들이 점점 많아지는 교회는 잘못 가는 교회인 거예요. 점점 감춰지고 숨겨지는 이들이 많이 나와야 돼요. 할 말이 없어져야 돼요. 그런데요,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실제로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죠? 부자예요. 권세가 있는 사람이에요. 산헤드린 공회는 옛 성전 안에 있습니다. 옛 성전, 못된 그 옛 성전을 대표하는 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산헤드린 공회예요. 그 안에 속해 있는 자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어요. 그런데 그의 무덤으로 예수님이 들어가세요. 그런데 이사야서와 연결시키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예수님이 함께 들어가는 거죠? 마가복음 1543절 보십쇼.

 

15 :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여러분, 빌라도가 예수님 죽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와서 그거 달라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도 빌라도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 숨어버렸어요. 제자들 까지. 근데 이 사람이 거길 간 거예요. 이 부자가. 마태복음 2759절 보세요.

 

27 :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틈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어

( 기의 새 무덤이죠? 자기가 묻힐 새 무덤을 미리 준비할 정도로 부자였어요. 이 사람이)

--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 이게 장사지내는 거예요, 매장 하는 거예요

--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 주변에는 마리아란 이름만 나오는지 제가 설명해드렸죠? 마리아는 마라. 쓴 물에서 나오는 단어예요. 이게 나오미예요 진짜 기쁨. 단물이 되는 거. 거기에 그런데 뭐가 던져져요? 나뭇가지, 십자가가 던져져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쓴물들이 단물이 되는 거. 그래서 마리아만 그렇게 있는 거예요. 여기도 보세요. 막달라 마리아 (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 또 다른 마리아, 잉태치 못하던 여자. 이거 다 마귀의 모형 이예요. 여러분. 일곱 귀신 들어갔었다는 것은 귀신이 일곱 마리가 들어갔었다는 게 아니라 완전수, 완전한 마귀란 뜻이에요. 그런데 그 무덤에 예수가 들어가셔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장사지내지는 건데 사흘 만에 예수님이 살아나셨네요? 그럼 함께 살아나야 되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예요. 함께 죽고, 합하여 죽고 합하여 살아났다, 라는 말이 그 말이란 말에요.

 

그러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무덤을 준비했어요. 나는 죽을 거다, 를 이미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의 무덤에서, 무덤은 죽은 자를 가두는 곳이니까. 무덤에서 산 자가 되어 나왔네요. 예수님의 부활에 합하여. 그럼 그 무덤은 파기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무덤은 없어지는 거예요. 어디서? 예수 안에서. 그게 장사지낸 거예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대신에. 그래서 이렇게 이제 거의 죽은 것처럼 흐물흐물한데 때린 데 또 때리고 계속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장사 지내버리려고. 완전히 죽이려고 그냥. 그래서 왜 복음을 아는 이들을 변태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걸 넉넉히 이긴다니까요. 아니, 넉넉히 이기는 건 좀 그렇고 살아있다니까요. 그래도. 다른 삶 같으면 목매달아 확 죽어버릴 것 같은데 살아있어요.. 그걸 넉넉히 이긴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은 역사 속에서도 죽어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사지내 드리고 산헤드린 공회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가 유대인들의 그 유대교에서 출교 안당하고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 소경의 부모, 자기자식인데도 불구하고 난 몰라요, 그랬잖아요. 출교 당할까봐. 자식인데도. 그건 무서운 거예요. 아예 그 사람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와 함께 장사 지냄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도 죽는 거예요. 다른 세계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다른 나라, 아들의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내가 악인이고 내가 부잡니다. 그래서 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라고 이 역사 속에서 없음의 자리로 죽는 자만 산다!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연합의 이야기란 말에요. 여러분 그 마리아들이 나중에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뭘 봐요? 천사들을 보죠? 우리의 이 역사 속 무덤이 바로 천국의 통로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천국이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내가 문이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늘로 가는 문이다. 그런데 양의 문이에요. 양의 문은 성전에 제물들이, 양들이 총총총총 걸어 들어가던 문이었어요. 죽으러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거. 예수라는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바로 그 양의 문을 통과해야 돼요. 그건 죽음이란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 역사 속삶은 무덤으로의 행진이어야 맞는 거예요. 그 무덤을 거쳐야 천국 문이 열리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이 천국 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그렇게 죄의 몸이 예수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어야 생명이 부어지는 게 창조의 메카니즘이에요. 창조는 없음의 상태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 창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왕 노릇 안에 들어가 있는 후자의 사람들이 정말 막살게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어떤 사형수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사형수의 죄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같이 사람을 죽인 죄였어요. 당연히 사형이죠? 죽어야 돼요. 그거는요. 자기도 알아요.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인간인지 그래서 그냥 수긍하고 인정하고 사형날짜를, 집행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 살인을 저지른 자는 죽어야 한다, 라 는 법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는 죽어야 돼요. 법 아래에 있는 자. 그런데 요한일서 3장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살인한 자다. 그래요. 3절에서 미워하는이라고 번역 된 그 단어도 조금 사랑하는이예요. 그러니까 형제를 완전히,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모든 자가 다 살인이래요. 성경이.

 

여러분은 매일매일 살인하세요? 하루라도 건너뛰는 날 있어요? 혹시? 매일 살인하죠? 그럼 여러분도 사형수 맞아요. 그 자각이 그 감옥에서 진짜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좀 흐릴 뿐이지 우리는 똑같은 인간들이란 말에요. 성경이 판단하는 그 죄의 관점에서 보면요. 그죠? 우리도 사형수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가리켜서 처음부터 살인한 자 라고 하는 거예요. 살인한 자는 다 돌로 쳐서 죽여야 되는 게 율법이거든요.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돼요. 다 죽어야 돼요. 그 사형수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감옥 안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봉사도 하고, 사고도 안치고 착하게 살았어요. 자격증도 막 20개씩 따고.

그래도 그가 법 아래에 있으면 죽어야 되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이, 법 집행의 최고 권위자예요. 대통령이, 부통령도 아니고 대통령이 재는 살려줘라, 그랬어요. 대통령이 걔가 감옥에서 뭘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살려줘라 그랬어요. 이제 그는 법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법 위에, 그 법 집행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그 높은 권위자가 은혜로 덮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를 묶고 있던 포승을 그가 풀 때도 아무도 말리면 안 돼요, 이제는요. 그리고 그가 자기를 가두던 감옥에서 걸어 나올 때 누구도 그건 막을 수 없어요. 법이 이제 못 막아요. 사면 됐거든요. 요걸 은혜라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사형수들이요 사형 집행 날짜가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어떤 꿈을 꾸는지 아세요? 어떤 꿈을 제일 많이 꾸는지 아세요? 내가 저지른 그 죄, 그걸로 말미암아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그 죄. 그 죄 짓기 바로 이전으로만, 제발 한 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요 꿈을 제일 많이 꾼다고요. 그만큼 사망이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 오죽하면 731부대에서 엄마들의 모성을 실험하기 위해 뜨거운 방에다가 갓난 애기를 낳은 엄마와 갓난 애기를 같이 넣고 불을 땠더니 100% 엄마들이 죽음 앞에서는 그 애기를 밟고 올라 갔다잖아요 사망은, 죽음은 그렇게. 사망은, 죽음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에이 그 죽으면 끝이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확 죽어버릴까?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큰일 나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그 감옥에서 나왔어요. 그렇게 아주 처절하게, , 내가 고 죄 짓기 바로 이전으로만 돌아갈 수 있으면 하고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깨보면 또 현실은 나는 사형수야. 그걸 그렇게 처절하게 진짜 인지한 사람이 나가면서, , 이제 그 죄 또 지어야지, 이러고 나가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함부로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나요? 이렇게 물어보느냐면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한 번도 고민을 안 해봤기 때문이에요. 그 원수들은요. 그걸 모르니까 인제 그러면 죄 막 지어도 되겠네? 이따위 소리를 한다니까요. 그걸로 인해,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며 나를 파괴하는 것인지, 그러니까 나는 바로 고 전으로만 돌려주면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 안해야지 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그 사람에게 은혜의 복음이 떨어지면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나요? 찬송을 먼저 하게 되지, 인제 그럼 막 살아도 되나? 이게 무슨 막말이냐고요. 도대체가?

 

제가 은혜와 십자가를 알라고 했지 언제 막 살라고 했습니까? 왜 인터넷에다 도배들을 해 놓는 거예요? 도대체가. 김성수 목사가 막 살라 그랬다고. 아니 이해도 못하는 놈들이 꼭 그냥 설교 중간에 한 토막 정도 떼어다가 어디서 또 베꼈는지 그냥 딱 써놓고선 거기에다가 구구절절이 아주 주석서를 썼더구먼요. 아니 은혜를 아는 이들이 진짜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이고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며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추악하게 만든 그 죄의 실체가 뭔지를 진짜 고민해보고 안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그 죄에 대해서 막 폭로하고 설명한 거 또 하고 계속 하는 거예요. 진짜 아느냐? 이걸.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향한 그 지향성까지 끌어내는 거예요. 다시는 그리로 가지 말아야지. 이렇게. 그게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뭐 어떤 사람들처럼 성도는 구원 받았어도 죽을 때까지 죄인이니까, 죄만 짓다 가니까 헌금도 하지 말고 봉사도 하지 말고, 예배도 가지 말고 차라리 뭐 라디오를 들으라. 이따위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그건 십자가 자체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건. 그건 십자가 복음 아닙니다. 그런 건. 그런데 성도는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아담의 몸을 입고 있는지라 그 은혜 또한 법으로 인식을 하게 돼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생래적, 내적체계로 이미 그의 삶 속에서 공고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선악체계라는 게.

 

그래서 은혜가 자신을 구원해줬으니까 그 은혜가 요구하는 어떤 것을 또 해야 된다. 라고 또 다시 법으로 들어가요. 그건 기특한 게 아녜요. 그 은혜를 또 다른 법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건 모독하는 거예요. 그걸 율법주의라고 그래요. 성도는 그 율법주의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합니다. 아무리 자유, 자유 은혜, 은혜 해도 저도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이렇게 멍하니 있어도 되는 건가? 아니, 멍하니 있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뭔가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불안해 갖고 말이죠. 그럴 때가 많아요.

맨날 이렇게 자유, 십자가, 은혜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도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요, 우리는. 그 자리에 계속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부으세요. 하나님께서는 하늘 백성들에게 당신이 은혜를 쏟아 붓지 않으시면 그들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라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해주는 동시에 믿음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언약의 현실을 동시에 이해시켜 가세요. 그리고는 결국 그들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는 거, 그게 은혜의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미국 조지아세서 1800 년경에 노예시장이 있었잖아요. 저도 필라델피아 집회에 가서 실지로 노예시장을 가봤더니 참 처참하더구먼요. 짐승대접도 못 받았어요. 그런데 어떤 농장을 하는 부잣집 주인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예, 험악한 노예 하나를 비싼 값을 주고 샀대요. 당시 에는요 노예가 시장에 나왔는데 이게 시장에 가도 팔리지 않고 쓸모없다고 판단이 되면 바다에 빠트려서 죽였어요. ? 얘가 먹는 밥이 아까워서. 그러니까 그 노예는 곧 죽을 노예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더니 아주 비싼 값에 자기를 사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살아난 거 아녜요? 그 사람 때문에. 그런데 살아났는데 금방 이 사람이, 감사함을 금방 잊어버리고 인간이 그렇다니까요. 나는 아프리카에서 추장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저사람 집에 가서 노예로 살아야 된다, 라는 그 생각이 엄습해오자 자기를 비싼 값에 사서 농장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그 주인의 마차 뒤에서 악을, 악을 쓰면서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는 거예요. 나는 절대 네 말 안들을 거야, 절대 네 말 안들을 거야. 그런데 그 주인이 농장에 가자마자 이 노예를 풀어줬어요. 자유롭게 가라. 뜨악했겠죠? ?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풀어주는 거냐고? 그 주인이 그랬대요. 실화예요.

나는 너를 내 노예로 부리려고 사온 게 아니라 조금 있으면 네가 그렇게 노예상인에 의해 바다에 빠트려져 죽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설려내려고 너를 산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 노예상인들이 없는 곳으로 왔으니까 이제 가! 네 마음대로 가. 그랬대요. 여러분 당시는 흑인 노예들은 짐승 취급도 못 받았다고 그랬죠? 이 사람은 거기서 자유롭게 나가봐야 다른 백인들의 눈에 띄면 곧 사냥감이 되든지 아니면 또 노예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쓸모없는 노예니까 죽였겠죠. 그 때 이 노예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뭐예요? 아니, 나 같은 걸 위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 같은 걸 위해 자기의 그 비싼 소유를 털어서 나를 산 사랑의 주인이라면 요기에 붙어 있어야지.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죽는 거예요. 여기에 붙어 있어야지. 죽을 때까지 그 주인을 섬겼다 그래요.

 

 

구원은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무서워서, 이거 안 해도 되겠네? 이거는 무서워서 했다는 거 아녜요? 무서워서 그분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도대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왜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가에 감격하여 기쁘게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어떤 힘든 일을 할 때 기쁘잖아요? 저희가 일 년에 한 번씩 꼭 중국에 할빈에 선교를 갔는데 거기 가면은 정말 불편해요. 화장실도 문도 없고, 홈을 그냥 쪽 파 놓고 그냥 거기에 일렬로 앉아서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그게 쓸려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쌓여 있어. 거기에. 앞 사람이 먹은 거 다 확인할 수 있어요. 뒤에 앉아 가지고. 그러니까 화장실도 못 가, 잠자리도 불편해. 애들, 조선족 아이들 기숙사에서 자니까. 그런데도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거기서는. 그런 거예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분이 나에게 행하신 걸 알게 되면 뭐가 힘드냐고요? 섬기는 게 즐겁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잖아요. 비유에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라 그래요. 그게 하늘의 다스림이에요. 그래서 하늘 왕이 섬겨주는 거예요. 우리를. 그걸 우리가 조금씩 배워가는 것입니다. 법 아래에서의 순종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서의 자발적 순종의 자리. 이걸 항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큰일 나는 거로구나 이거. 성도에게서 서서히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가 뭔지 죄가 뭔지 자신의 처음자리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걸 막지 않으시는 거예요. 놔두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사람들 앞에서 쇼하지 마세요. 나는 죄 하나도 안 지어, 나는 너무 경건해, 나는 너무 홀리해. 너는 왜 그 모양이야? 이런 연극좀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다들 집에 돌아갈 때 그냥 우울해 갖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그냥 잘들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나? 집에 가면 다 똑같아요. 그 과정 속에서 예수를 아는 거예요. 은혜를 배우면 되는 거예요. 죄 지어봐라, 그리고 그게 진짜 너희들을 기쁘게 해주는지. 그게 진짜 너희들에게 유익을 주는지 한 번 해 봐. 경험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실수 하고 실패 하고 이 과정을 겪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가 밀고 가는 사망의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똑똑히 경험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그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들이 여전히 있는 거예요. 예수 믿자마자 그냥 죽는 날까지 너무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기쁘고, 병원에 한 번 가보셔야 돼. 신경체계 어딘가 하나가 고장 난거예요.

 

그런 와중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지되는 그 언약, 이해되는 그 언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쏟아부어주는 그 은혜, 이걸 우리가 열린 눈으로 듣다 보면 찬송을 안 할 수 없게 되는 거. 이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며 사는 것을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도덕과 윤리 잘 지키며 사는 게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그 생명, 예수 안에서 사는 걸 새 생명 안에서 산다. 라고 하는 거예요. 본문 4절 보세요.

 

6 :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도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죽음과 관계없는, 상관없는 영적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건 그 사망의 근거가 되는 죄와 무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은혜로. 왜 그렇게 은혜로 살려내셔야 한다. 그래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게 뭔지를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218

 

2 :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법으로 다시 돌아가면 너희는 그게 죄 짓는 거야. 이야기하는 거죠)

 

2 :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2 :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새 생명을 가진 자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

 

2 : 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다.

 

그걸 믿는 걸 새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단 말에요. 어떤 행위를 내놓는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그걸 믿으면 돼요. 그래서 그 믿는 걸 영생이라고도 하잖아요. 하나님이. 성도는 그렇게 예수가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이예요. 그게 생 생명 가운데 행하는 거예요. 더 이상 자기의 행위로 평가 받는 이들이 아니란 말에요. 그런데 무슨 상을 받으려고 뭘 하겠다고,, 그 자체가 아직 나는 상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자입니다, 라는 자리에서 못 내려온 거예요. 신자의 새 생명은 오르고 올라야 할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정상의 선물인 거예요. 성도는 이미 새 생명이라는 정상에 올라서 그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자들인 것이지 어떻게 그 새 생명이라는 고지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들이 아닌 거예요.

 

소요리 문답 1 번 질문 뭐죠? 인생의 목적 답,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기고 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게 인생의 목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상에 올라가 있는 자로서 그걸 누리다 보면 그렇게 세상 사람들, 율법주의 적 관점에서 보면 열심을 부리는 사람보다 더 수월하고 행복하고 기쁘게 그들보다 더 낫게 살 수 있단 말에요. 그런데 성경을 자꾸 법으로 보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쾌하고,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미 산 정상에 올라가 있는 분들은 그 산 정상에서의 모습은 각기 다를 수 있어요. 어떤 분들은 기뻐 뛰면서 야, 저기 좀 봐, 저 경치 좀 봐, 이 바람 좀 봐, 이러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어떤 분들은 아, 이제 다 왔구나. 힘들다 하고 누워서 낮잠 잠깐 자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야, 이제 올라왔으니까 막걸리 한잔 먹고 또 내려가야지 그러고 막걸리 한잔 먹는 분도 있고, 정상에서. 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그들은 정상을 누리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들이 내가 어떻게 여기를 올라와 있는지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금씩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 나는 내 힘으로 여기 올라온 게 아니라 나를 여기에 올려준 그분, 그분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하는 자구나, 요런 행위로 이렇게 수렴이 되어가는 거지. 여러분이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다고 해서 여기서 전부 예수처럼 성자처럼 그렇게 동일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 정상에 올라와 있기에 그게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여 그 감격스러운 삶을 사는 거예요. 그렇게 지향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얼마나 기쁜 삶인지 경험하고. ,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이렇게 살게 된단 말이야? 소망을 갖게 되고. 그러는 거란 말입니다. 뭐 대단한 거 없단 말에요.

 

은혜의 복음을 들은 후에 아, 저 사람은 지금 우리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는 걸 정상으로 힘을 내어 기어 올라가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그러나 하면 행복해지니까 그렇게 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존재 양식이니까 이제 앞으로 너희들은 그렇게 살게 될 거야. 그래서 성경에 그 많은 하라, 하지 말 라의 명령들이 나오는 거지 그걸로 차곡차곡 계산해서 얘는 개털 모자, 얘는 은 면류관, 얘는 금 면류관 이거 아니란 말에요. 어디서 그런 무식한 소리가 있어요? 구원은 예수 안에서 사는 거예요. 믿음 안에서 사는 거예요. 거기서 반드시 찬송이 격발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원의 현실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어때요? 그 구원을 홀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경외감이 들죠? 그래서 그걸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거예요.

 

이루라는 건 누리라는 말이지 하나님이 한 90% 해 놨으니까 10%는 너희들이 해라, 이 말이 아녜요. 구원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두려워요, 우리는요. 떨린다니까요. 그 능력이 너무 엄청나서. 불가능한 거잖아요. 성도는 그걸 알아요. 내가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방불한 자로 살게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성도는 알아요. ?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이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런데 언약은 이루어 졌다니까 야,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성하셨단다. 언약에서. 그러니까 그런 깨달음과 이해가 두렵고 떨림으로 내게 먼저 주어진, 완성되어 주어진 구원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는 거니까 구원을 이룬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지 이루어 가라는 게 아니란 말에요. 빌립보서 212절 보세요.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누구?) 하나님

(하님이 행하신다며 뭘 이루래요?)

자기의 깊으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이미 행하셨고 우리를 끌고 함께 멍에를 지고, (히브리사람들의 멍에는 항상 두 마리가 같이 지는 거라고 했죠) 예수와 함께 십자가라는 멍에를 지고 광야를 같이 걸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은 절대 나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절대 나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가는 거. 신앙생활 이예요. 거기서 나오는 진짜 찬송. 진짜 예배, 진짜 헌금, 진짜 봉사, 진짜 섬김 이런 거 하자는 말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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