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 6 : 8- 11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오늘은 본문 강해라기보다는 기초다지기 기초 다지기 작업을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충분히 이해하시게 되면 지난 설교나 앞으로의 설교를 들으시는 데에 아주 수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요즘 라틴어하고 아람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헬라어 가지고는 사실 성경을 해석하기 좀 부족해요.
그래서 라틴어, 아람어를 좀 공부를 하는데 그걸 보면서 고서적들을 좀 찾아보니까 맞아요,
성경은 절대 법이 아녜요.
제가 이것을 다 공부하게 되면 수메르어까지 공부를 해서 여러분들에게 진짜, 하도 시비 거는 놈들이 많으니까 증거를 계속 대줄 거예요.
나이 오십이 되도록 고 3처럼 공부해야하는 이 팔자는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러니까 여러분들 자꾸 저하고 밥 먹자고 하지 마세요. 자꾸 친해지려고, 신비주의니 뭐니 해가며 ‘ 우리 목사는 설교만 하고 싹 도망간다. 고 목사랑 친해져서 뭐하려고 그래요? 여러분은 제가 밖에 나와 있으면 자꾸 사무실로 집어넣어야 돼요.
가서 공부하라고. 왜 나와 있냐고. 특별한 일 아니면 심방 같은 것도 부르지 마시고요.
여러분과 제가 말씀이 아닌 인간적으로 자꾸 친해지다 보면 여러분은 저와의 관계에 따라 말씀과의 관계를 맺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저에게 혹시 실망을 하거나 아니면 제가 여러분에게 별로 친하게 안 대해주잖아요? 그럼 말씀하고도 멀어지게 돼요.
왜 그런 일을 자초하시려고 해요. 예수님하고 친해지세요.
논어 수리 편에 보면요 수리불작, 이라는 말이 나와요.
진리를 말하되 네 말로 창작하지 마라, 는 뜻이에요. 진리만 말하라, 라는 거죠.
그런데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하나님입니다.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들을 귀가 없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말하면 짜증을 내요.
왜 나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진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나의 인격, 나의 행위, 나의 가치, 나의 성숙, 나의 변화 뭐 이런 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그건 보이니까.
그래서 진리만을 전해야 하는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인간들의 구미에 맞는 창작에 돌입하죠?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엉뚱한 스승을 모신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울이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재밌는 예화나 웃기는 이야기나 이슈가 되는 사건들이나 감동적인 간증.
또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선동적 연설 등등, 진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나열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러한 창작 열의에 감동합니다. 박수를 보내요. 눈물을 훔치면서 결단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러한 감동과 박수와 결단은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거예요.
불교 설법을 들어도 두 주먹 불끈 쥐는 결단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 이 세상에 물들지 말자. 이거 불교인들도 다 하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정작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은 진리 이외에 다른 말에 관심이 없어요.
뉴스를 봐도 나오고 도덕책을 봐도 나오고 교양 영화에도 나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불쾌해 합니다.
이런 귀한 시간을 그런 잡다한 세상 이야기 듣는 것으로 때우는 것이 못내 아쉬워요.
진리를 알고 나서 TV나 신문 나도 안 보는데 목사는 자꾸 그 얘기를 해주면 어떡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를 하다보면 회중이 정확하게 두 부류로 갈라지는 걸 감지할 수 있어요.
분명히 진리이신 예수를 이야기하는데 다른 반응이 나와요.
예수의 이야기도 나의 유익에 나의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사람들과
그냥 그 예수 이야기로 나는 됐습니다, 라는 두부류로 갈라져요.
왜 그런 분리가 생기는가 하면
한 쪽은 아직도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 너의 상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 예수와 하나가 되어서 그 존재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거는요.
이건 사활을 걸만큼 중요한 사안 이예요.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여전히 종교인으로 머무느냐 성도로 변화하느냐 이건 이 문제에 달린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죠?
사도 바울도 우리라는 말을 자주 써요.
우리는 나와 네가 함께 모여서 우리가 되는 거 아녜요.
우리라는 말은
그 자체가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전부 나여야 돼요. 나. 나. 나. 나.
나와 상대, 대척점에 있는 네가 우리로 그 안에 같이 있으면 우리로 묶이지가 않아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지금도 너의 자리에 두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와 연합 상태가 아닌 거예요. 중요한 얘기예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집요하게 우리와 예수를 함께 묶어 버리죠?
예수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가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난 거예요? 여러분 살아나셨어요?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셨죠? 그러니까 뭐로 살아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살아났다면? 예수로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었다고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건데 생명은?
하늘 생명은
오직 어디에만 있다고 해요?
요한복음에서.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 밖은 다 죽음이에요. 사망이에요.
그러니까
그 예수의 생명을 우리가 지금 공유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어떤 존재의 지체가 된 거예요.
그러면 그도 바로 그리스도로 살아난 거예요.
그 그리스도란 말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여러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성령의 기름. 그게 그리스도란 뜻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됐다니까요.
지금.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가 됐어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인.
그게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이 땅에서 하게 된다는 얘기예요. 그게 뭐예요?
진리가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가 진리라고 했으니까.
내가 진리가 되어 진리를 전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우리가 하게 돼요.
단순히 전도나 선교의 이야기가 아녜요. 이거는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와 나가 연합이 되어서 새로운 나가 된 거예요.
그 안에는 예수와 내가 같이 들어있어요.
이걸 세 번째 성전이라 그래요.
너희들이 이 성전을 헐어라,
두 번째 성전.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럼 내가 사흘 만에, 그거는 세 번째라는 뜻이라고 했죠?
그래서 사흘 걸려야 되는 거예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그랬단 말에요. 그게 예수와 연합된 나란 말에요. 그게 요. 그리스도인.
이제는 예수와 내가 나와 너의 상태로 존재하면 안 돼요.
그게 뭐라 그랬어요?
수요일에 제가 목이 터져라 얘기했는데. 그게 이혼이라 그랬죠? 나와 너로 존재하면.
여자가 신랑의 갈비뼈로 그 안에 함몰 되어 있을 때 그게 사람인데
여기서 빠져나가 독립적 존재가 되면 그게 이혼이요, 간음이라 그랬잖아요.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누림의 단초가 돼야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예수님 섬기지 말라는 얘긴가?
이런 말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를 여전히 너의 자리에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섬김의 대상으로만 삼는 이들이 태반이에요.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도 여전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죠?
나와는 상관없는 예수가 진 십자가예요, 그거는.
그래서 패션어브 더 크라이스트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면서 우는 거예요.
고난주간을 이렇게 그냥 힘들게 보내는 거예요.
그게 내 일이 아니거든요.
내 밖의 어떤 존재가 한 일이고 나는 그걸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보고 앉아 있는 거예요.
거기가 자기가 죽은 자리라는 걸 안 믿는 거예요. 아니, 못 믿는 거예요. 눈과 귀가 안 열려서. 그들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는 예수만의 십자가예요. 내 십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십자가가 슬프고 무섭고 그런 거예요. 십자가는 스타로스, 언약이란 말이라 그랬죠? 기둥이란 말이에요, 그것은요. 다른 말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작품, 창세전 언약의 결과물이니까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그 말은 예수님이 당신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손수 죽여 버리신 거예요. 하나님이. 그 안에 우리 성도가 들어있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죽어야 진짜 생명이 온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거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나가 들어있다는 걸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면 결국, 그 안에 나 있으니까? 나를 섬기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그 안에 나 있다며 요? 그런데 그 분을 섬기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나를 섬기는 거란 말에요. 그게.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예수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 세상에 와서 어떤 일을 행하고 돌아간,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일을 행한 ‘이’ 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 오해된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성경은 나와 상관없는 내 밖의 책이 되죠? 왜?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에 관한 책이니까. 내 책이 아니란 말에요. 그러면. 그런데 이 성경을 생명책이라고들 해요. 생명을 주는 책이거든요. 이것이. 그러면 이게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의 이야기라면 나는 그 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전체를 ‘나’로 읽어야 돼요. 우리의 이야기예요. 교회의 이야기예요.
그렇게 진리는 나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로 즉시 살려내는 힘이 있어요.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떨어져서 시간을 두고 차례차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곧, 부활이에요. 살아나는 거예요. 죽는 게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의 그 존재의 죽음, 그 처음자리로의 회귀죠? 왜? 모든 것이 없음, 죽음의 상태였거든요. 그래야 거기서 창조가 일어나는데 이것들이 살아있는 척하니까 창조가 드러나지를 않는 거예요. 영광을 못 받는 거예요. 이 창조의 능력이. 죽음과 부활은 하나에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에요. 육신이 죽으면 묵시 속에서 즉시 사는 것처럼 무덤 안에서 여러분 잠자고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시간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긴 시간과 상관없는 영원이기 때문에 거기는 기다림이 없어요. 따라서 죽으면 사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도 진리에 의해 죽은 사람은 그 즉시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산거예요. 성도의 무덤이 곧 천국 문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무덤 열고 들어갔더니 그 안에 천사들이 있었죠? 천국은 무덤문 밖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평생 하나님에게 끌려 다니다가 결국 무덤하나 건지고 죽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 보여요? 아니요, 천국 문 열고 간 거예요. 그게 다예요. 성도는. 거기에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은 누구? 믿음의 조상이니까 성도들이 다 묻히는 거예요. 그 무덤에. 왜? 천국 들어가려고요. 그게 교회라니까요.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창세기 21장으로 가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주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율법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 그 은혜의 아들을 희롱하는 그림이 나오죠? 은혜는 항상 율법에게 희롱 당하게 되어 있다는 그런 역사 속 성도들의 현실을 잘 그려 놓은 거예요. 복음은 항상 율법에게 조롱의 대상이 돼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율법주의자들이 훨씬 멋있어 보이고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에. 자 그리고는 율법인 이스마엘이 하나님에 의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죠? 하나님이 쫓아내라 그래요. 결국에는 율법이 은혜에 의해 축출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밑에 붙어있는 이야기가 좀 어색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아브라함과 이방인인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이 나왔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 장이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는 모리아 산의 사건이 이어진단 말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여기에 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 그리고 거기를 브엘세바라고 이름 짓잖아요? 그게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광야의 우물은 생명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광야의 우물, 광야의 물, 이건 종종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가 되는 거예요. 그죠?
제가 지난 수요예배 때 레마와 로고스의 개념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레마는 어떻게 말로 설명하거나 그려낼 수 없는 그 진리 자체, 그걸 이야기한다면 로고스는 그걸 성문화하여 담은 그릇에 비유해드렸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레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로고스, 표피적으로 받아들여 그걸 법으로 읽게 되는 거란 말에요. 거기서 레마의 동사형인 레오가 말하다, 라는 표피적 뜻도 있지만 그건 흐르다, 라는 뜻이에요. 레마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비, 왜 은혜의 비라고 그러느냐하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흐르는 물, 진리의 말씀에 씻기지 않으면 부정한 자다, 그러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부정한 건 다 어디에 씻으라고 해요? 물에 씻으라고 해요. 무슨 물? 흐르는 물에 씻으라고 해요. 그게 ‘레오’ 예요 ‘레마’ 예요.
말씀에 씻지 않으면 다 부정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고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씻는 거예요. 요단강에 들어가서, 요르단이 흐르다, 라는 뜻이에요. 그 아래의 물 이 바다는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지만 위에 물 아래로 흘러내리는 위의 물, 창세기 두 번째 날 물이 위 아래로 갈라졌잖아요. 위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이야기한단 말에요. 아래 물은 정확하게 위의 물을 흉내 내는 물이에요. 그러나 그 물, 아래의 바다는 다시 있지 않은 상태로 이제 멸해지죠? 계시록에 가면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 유리바다만 천상에 남아 있어요. 유리로 된 바다라는 얘기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만 남는 거예요. 물,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물을 뿜어서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는 장면이 바로 아래의 물, 비진리, 엉터리 말씀 이런 걸로 여자를 죽이려하는 마귀의 행사를 가리키는 거란 말에요. 아래의 물. 아모스서를 보면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 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말은 이 세상에 말씀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각 교회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 만 편이 나와요. 정작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수가 없더라, 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엉터리 말의 홍수는 곧 기근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그것이. 거기에 다 떠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엘리야 때 기근이 일어납니다. 얼마 동안? 삼년 반. 삼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에요. 로고스로 오신 예수. 그분이 말씀을 홍수처럼 쏟아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기근이에요. 그것이. 그런데 그분이 가신 다음에 성령의 비가 내리자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나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엘리야의 이야기는요. 그래서 삼년 반 있다가 비가 오는 거예요.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아, 그게 그런 말이었구나, 라고 알았다.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성경에. 성령이 생수처럼 단비로 부어지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진리를 이해하더라는 거예요. 이해하고 나자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죠? 교회가 그 말을 받아 뿌리니까 첫 번째 시내 산에서 죽었던 삼천 명이 살아 올라오는 거예요. 삼천 명이. 오순절 날. 따라서 성령, 생수, 비, 말씀 등은 같은 걸 가리키는 거예요. 진리예요. 그것이요.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잖아요. 요한복음에서. 내 말씀이. 진리의 말이 성령이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반 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은혜의 비, 성령 말씀을 내려주신 사건이었음을 엘리야의 이야기가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이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 말은 위에서 흘려보낸 물이 없는 자가 곧 귀신이라는 거예요. 그 귀신이란 단어 자체가 프뉴마 다이모니온이거든요. 프뉴마가 뭐예요? 성령이에요. 그런데 영이 뭐라 그랬어요? 말, 말씀. 다이모니온은? 악한 말. 이걸 귀신이라고 번역 한다니까요. 귀신 들린 건 거품 물로 쓰러지고, 이런 거 아니에요. 이건 뭐 정신병원에 보내면 돼요. 귀신 들린 걸, 악한 말을 악한 말인지 모르고 받아 담고 있는 게 귀신 들린 거예요. Demon Possession, 말씀의 모양은 가지고 있는데 아래 말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지는 율법의 말. 이게 귀신 들린 거예요. 그건 성경이 그냥 소리라고 해요. 에코, 에코는 뭐냐 하면 우리가 노래방 가서 웡웡웡 울리는 게 에코가 아니라 앵무새의 말. 의미 없는 말이란 뜻이에요. 앵무새가 막 따라한다고 그거 뜻 알고 얘기해요? 몰라요. 그러니까 주인한테 욕지거리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성경이 귀신이라 그래요. 프뉴마 다이모니온.
그런데 이제 이 땅에 성령이 오셨어요. 우리는 이 광야 교회에서 말씀의 비를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이고 더하면 몇? 삼년 반. 마흔 두 달의 기간이고. 이걸 나누면 삼년 반. 천 이백 육십일의 기간이고. 삼년 반의 기간인 거예요. 계시록에 그렇게 나누어 나오지만 다 똑같은 거예요. 말씀이 떨어지는데 그 말씀이 다 곡해가 되어서 기근인 상태. 그런데 그 중에 레마로 알아듣는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의 그 기근의 이야기 중간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과부는 밀가루 한 줌을 가진 완전히 텅 비어진, 털린 여자예요. 그 이제 밀가루 한 줌 이거 먹고 죽어요. 자기는 이거 먹고 죽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죽는구나. 이제. 내 존재라는 게 이거구나, 라고 알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랬더니 그 기근의 와중에 그녀의 집에만 음식이 차고 넘치죠? 기름과 밀가루가. 흉년과 풍년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 거예요. 세상 모두가 다 흉년, 기근인데 어떤 집에만 풍년이 임해요. 열왕기상 17장 14절 보세요.
왕상 17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가, 완료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제 은혜로 가득 차게 되는 그 나라 오기 전에도 이미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의 비로 살아나는 이가 있다, 라는 그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돼요? 마지막 갖고 있던 밀가루를 뺏겨야 돼요. 하나님 앞에. 그건 죽음이에요. 이거 먹고 나면 난 죽습니다, 라는데 그걸 뺏으면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그것이요. 네가 죽어야 풍년이 온다는 뜻이에요. 엘리야가 무슨 밀가루 떡에 환장을 해서 그걸 뺏어 먹은 게 아니라니까요. 죽음인 거예요. 죽음. 성도는 예수에 의해 살아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의 생명의 근원은 다 뺏겨야 되는 거예요. 이게 너 살려주는 거 아니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밀가루 한 줌을 뺏어버린 다니까요. 그래서 그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십자가죠.
그 진리의 현실을 그 여자가 정확하게 깨달아 알게 돼요. 왕상 17장 14절,
왕상 17 :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아노라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는 거 아셨어요? 진리의 말씀의 이야기란 말에요. 이건요. 아, 이게, 이 모든 게, 나에게 일어난 이 상황, 이 그림이 다 요게 진리의 말씀. 복음.요게 십자가군요. 알았다는 거예요. 이 여자가. 그렇게 위의 물, 은혜의 비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켜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막 한가운데서 그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언약의 우물이죠. 그러니까 그거는. 언약의 우물이니까 살리는 물이란 말에요. 그게. 상징적인 거예요. 물론. 그리고는 거기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짓는데 브엘세바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일곱 우물이에요. 쉐바가 7이니까. 그런데 잘 보시면요 그 이야기 속에 우물이 하나밖에 안 나와요. 7개 우물을 ( )하는 게 아니라, 우물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쉐바를 7로 해석하면 안 돼요. 아라비아 숫자가 없던 때였다니까요. 그 쉐바라는 단어에 7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건 그 훨씬 다음이란 말에요. 따라서 우리는 브엘쉐바라는 의미를 7우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돼요. 거기서 7이라 번역이 된 쉐바는 약속, 언약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7을 언약의 수. 안식의 수, 진리의 수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브엘쉐바는 의역을 하면 언약의 말씀. 진리의 말씀, 언약의 우물, 진리의 우물을 상징하는 개념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창조 사건 때 몇 번 말씀 하세요? 일곱 번 말씀 하시죠? 진리란 뜻이에요. 언약의 말씀이란 뜻이에요. 창조사건은 언약의 성취란 말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교회를 완성하시면서 몇 번 말해요? 가상 칠언, 일곱 번 말하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일곱 날 돌고 무너지는 거예요. 나아만이 일곱 번 흐르는 물에 들어가서 언약으로 문둥병이 낫는 거란 말에요. 일곱 번 들어가면 낫는 게 아니라. 여섯 번 들어가면 안 낫게 해줘요? 그거? 그런 말 아니란 말에요. 계시록에도 칠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죠? 다 언약의 숫자인 거예요. 안식의 숫자라는 말에요.
아브라함이 그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한 그 장소를 브엘쉐바라고 이름 지었다는 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마엘, 그게 은혜와 율법이잖아요.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그 은혜와 율법 사건을 통과하고 나니까 아,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를 그리기 위해 거기에 브엘쉐바ㅡ 언약의 개념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후손을 약속 하실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의 후손을 언약 하실 때 일곱 번 하세요. 세어보시면. 언약의 말이란 말에요.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물을 파서 하늘로부터 흘려주는 거지 인간이 그 물을 창작하거나 추론해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악한 말, 프뉴마다이모니온 이예요. 그리고 그러한 말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말을 곡해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는 걸 하나님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너 왜 우리 우물 뺏어 갔니? 이런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정작 내가 언제 뺏어갔어? 난 금시초문이야 그래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 믿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 해가는 건데 그런데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다고 우기고 있는 거죠. 그게 우물, 하늘로부터 흘려준 언약의 말을 빼앗는 건데.
그 때, 아브라함이 일곱 어린 양을 언약의 장소에 등장 시켜요. 일곱은? 쉐바, 언약이라 그랬죠? 그럼 일곱 어린 양은 뭐예요? 언약의 어린 양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 라고 말을 해요. 하나님의 우물, 진리의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어린 양으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 라고 하고는 어린 양, 언약의 양을 거기에다 갖다 들이대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물을 도둑질 했던 아비멜렉에게 어떤 언약이 주어져요?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그러죠?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 한 자가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랬을 때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하여 나, 너 안 버려. 복음의 이야기란 말에요. 이게. 괜히 그 이야기가 거기 들어간 게 아니라. 그게 브엘쉐바의 아비멜렉의 이야기예요. 창세기 21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33절.
창 21 : 33- 아브라함은 브엘쉐바의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영생하시는 (이건 영생이라는 이예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여기서 부르다, 라고 번역이 된 카라는 받아들이다, 초청하다, 라는 뜻이고 이름이라고 번역 된 쉠은 셈, 함, 야벳의 그 셈. 쉠이예요. 그게. 그 쉠은 빛, 말씀,( 함이 어둠이거든요) 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33절은 아브라함이 영생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초청했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무방한 거예요. 율법과 은혜의 사건, 이삭과 이스마엘의 사건을 통과하여 진리를 그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재밌는 건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라는 말로 21장이 끝나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계속 벧엘로 몰아가요. 벧엘에서 나가지 마, 나가지 마. 벧엘이 뭐예요? 베들레헴이 떡집이듯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예요. 그러나 상징적인 거죠.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옛 성전, 율법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진리를 알고 진리가 되자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아, 약속의 후손은 이렇게 오는 거고 그 아들에 의해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 알게 되자. 그가 진리가 되었으므로 그가 있는 곳이 벧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에서 머물게 놔둬버리는 거예요. 벧엘에서 드디어 자유롭게 풀려나요. 옛 성전에서. 그게 아브라함의 죽음이에요. 사실은. 이스마엘이라는 큰 아들, 율법에 묶여 있다가 은혜의 아들, 약속의 후손, 예수를 모형 하는 이삭에 의해 살아나는 거예요. 그건 이스마엘 밑에 갇혀있던 아브라함의 죽음이자, 아들 안에서 살아나는 부활인 거란 말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율법과 종의 이야기로 설명을 하고 사라와 이삭을 자유 하는 자유자, 자유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자유.
그렇다면 그렇게 어린 양을 핵심으로 한 그 언약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진리를 알고 죽었다는 말인데 그가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죽는 이야기를 22장에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이기도 하지만 예수이기도 하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언약된 후손이니까. 그게 요. 그러니까 그 이삭은 예수의 모형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를 낳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이 마른 장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낳아요? 이삭을 낳았는데, 약속의 후손을 낳았는데 그런데 그게 누구라고 했어요? 예수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여자, 교회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들, 예수를 낳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구의 모형? 믿음의 조상이니까. 우리의 모형! 예수는 누구의 아들? 여러분의 아들이라니까요.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또?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면서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제가 전에 자세히 설명해드렸으니까. 그러면 그 예수는 누구의 아들이에요? 여러분의 아들이에요. 교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22장에서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라! 그런다니까요. 잘 키워서 네가 사용해 먹어라, 그러지 않아요. 죽여라! 그래요. 여러분 그 죽음이라는 말, 히브리어 죽음이란 말, 무트 타무트. 무트라고 했죠? 그걸 파자를 하면 진리, 이루었다, 완성.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진리가 이루어지면 죽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이게 죽음이란 단어에요. 그리고 죽으시는 거예요. 무트, 다 이루었다. 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죽으시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게 곧 사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시는 거예요. 그게 영생이란 말에요.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바로 다음 장인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거예요. 아들을 죽이는 거예요. 아들 안에서 아브라함이 죽는 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고 통곡할 게 아니라 아, 거기서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구나. 아니,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거구나. (무슨 말인지 조금 있으면 이해하실 거예요.) 그걸 아셔야지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이가 죽은 그걸 보고 슬퍼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자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그 언약 성취의 조력자로 나서려했던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 내려놔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약속의 후손을 주신다고 했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가진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마누라까지 말아 먹고 정말 파렴치한 모습, 이런 걸 보이면서, 그거 하나님 도우려고 한 거예요. 사람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이제는 이 아들이 죽으면 언약의 후손, 약속의 후손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어떻게 많아지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를 죽인다고 하는 건 이건 내가 도울 일이 아니구나. 바로 전 장에서 아, 그런 은혜로 완료되는구나, 를 알자. 그 약속의 후손을 죽이는 거예요. 서슴없이.
내가 섬기던 예수가 나와 함께 죽고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역사 속 나가 내어놓아야 하는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어요. 예수가 내 밖의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들은 그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다니까요. 내가 섬김의 대상에게 뭔가를 내놓아야 돼요. 그걸 섬김이라고 하잖아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 죄인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내가 죽여야 하는 존재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아니란 말에요. 조금 어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뭐라 그랬어요? 모세가 하나님께 누가 너를 보냈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모세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뭐라 그랬죠? “나” 그랬어요. I am who I am 이건 나는 “나”야. 그랬어요.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나”라고 자주 말씀하시죠? “에고 에이미”, “나” “나” 그런데 모세 당시 에는요 나라는 단어나 개념이 없었어요. 굳이 나를 가리킬 땐 ‘이 사람’이라고 썼단 말에요. ‘나‘라는 단어가 없었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라는 단어로 모세의 상식을 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모세가 그랬겠죠? 나? 나가 뭐야? 지금 하나님은 새로운 ‘나’를 제시하시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모세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말씀을 담은 그릇으로 애굽으로 갔어요. 하나님의 말을 전하러. 진리의 말씀을 담고 진리로 간 거예요. 모세는. 그들이 물었습니다.
너 누가 보내서 왔어?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나’ 그랬단 말에요. 그런데 그 ‘나’ 가 누구였어요?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뭐라 그랬겠어요? 그럼 네가 하나님이냐? 이런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출될 게 뻔 한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가고 싶었겠냐고요? 거기를.
그런데 하나님은 기어코 ‘나’라는 이름을 주어서 모세를 보내요. 잘 보세요. ㄴ‘나’ 라는 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그 연합의 상태를 진짜 ‘나’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채워진 상태가 진짜 ‘나’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이후의 성도는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의 새로운 ‘나’란 말에요. 성도는.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그리스도라는 ‘나’ 속으로 끌어들인 찬송의 대상이란 말에요. 찬송은 누림이라니까요. 그건. 자유란 말에요. 찬송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찬송, 자유. 얽어매는 것이 없는 상태. 반면에 섬김이라는 건 행위를 요구하게 되고, 짐이 되며, 부담스럽고 무서워요. 그 섬김의 대상. 종교행위의 대상이 되는 그 예수를 죽여라, 가 모리아산 22장의 이야기예요. 요한복음 16장16절 보세요.
요 16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앞의 나는 십자가 이전의 예수예요. 그 예수는 죽어요. 아니, 죽어야 돼요. 그래서 레마로 인식하지 못하게 놔두시고, 그들이 직접 그 예수를 죽이게 놔두시는 거예요. 그 ‘나’는 죽어야 돼요.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베드로에게 ‘넌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라고 말씀하신지 아세요?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6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 세상사람 다 주님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거야’ 그래요. 그게 디프로몬트 동산데 중간 디프거든요. 그게 강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아니요, 저는 목숨 걸고 지킬거예요. 또 다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전에 예수님이 분명히 그 말을 하는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그랬단 말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끝까지 사탄의 노릇을 하는 거예요. 마귀, 악한 말이에요. 그게 오해된 말이라니까요. 나는 예수님을 섬길 거예요. 붙들 거예요. 죽으면 안 돼요,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너는 반드시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그래야 살아!’ 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가 한 번 부인 했는데 또 다시 일을 만들어서 또 부인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부인하게끔 만드시는 거예요. 상황을. 그래야 얘가, 교회의 기초가 살아나야 되거든요. 얘가요. 반석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기 때문에 얘는 그 예수를 부인하고 부정해야, 옛 성전에서 재판 받고 있는 율법인 예수를 부정해야, 섬김의 대상인 그 예수를 부정해야, 죽여야 살아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굳이 베드로를 그리고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성전 안으로.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그리고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자 그를 바라보시고 ‘그래 내 새끼 그래야 네가 사는 거야’. 여러분, 이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렇게 십자가 이전의 예수인 나는 죽어야 돼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타나는 또 다른 나가 있잖아요. 그때는 본다고 그러죠? 왜? 성령이 내려오시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았고 예수와 내가 한 지체로 연합이 되었다는 걸 말씀이, 진리의 영이 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가 보이는 거예요. 레마로. 이게 그 이야기예요. 조금 있으면 나 죽을 거니까 날 못 볼 거고 조금 있으면 나 도로 살아날 거다. 이 말 아니라니까요. ‘나’ ‘나’.
지금 여러분 안에 함께 그 ‘나’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닌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1절 보세요.
요 8 : 31-3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 말씀. 진리) 참 내 제자가 되고
8 :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 :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8 :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8 :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영원히, 아들은 영원히 거해요. 어디서? 아들 안에서)
8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 조금아까 위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죠? 여기서는 아들이 자유케 한다! 그래요. 그럼 아들은? 진리인 거예요. 말씀인 거예요. 그게 이해되면 돼요. 여러분은 산거예요. 그러면 아들이 어디 있어? 내 안에 예수가 어디 있어? 자꾸 거기서 그거 찾지 말아요. 그 말씀 진리가 이해되어지면 여러분 안에 그 생명이 있는 거고 그 아들이 있는 거예요.)
8 :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8: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이런 걸 잘 보셔야 되는 거예요. 진리는 말을 하지만 마귀새끼들은 로고스를 듣고 행한다니까요. 그길로 먼저 뛰어야 돼요.)
8 : 39-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8 :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지금 아브라함이 뭘 했는지 봤잖아요. 아들 안에서 죽었다니까요. 그 약속의 후손으로 준 아들을 죽였다고요. 아브라함이. 그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걸아는 게 그 아들을 죽인 거란 말에요. 창세기 22장이 그 이야기잖아요. 모리아 산 이야기.
자 이렇게 주님은 여기에서 말하다와 행하 다를 호라오, 랄레오, 포이에오 이런 단어들을 대 조하여 사용하고 계세요. 여기서 나는 ‘본 것’을 말한다, 에서 ‘ 보다’, 이 호라오는 진리로 깨닫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거라기보다는. 진리로 깨닫는 거예요. 진리로 깨닫는 자는 진리를 말하다, ‘라레오’는 이렇게 전파하다. 당연히 진리가 된 자는 이게 향기가 되어서 향기를 막는다고 이게 막히지를 않잖아요. 이거는요. 전파, ‘라레요’, 진리의 전파자가 되고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그러죠? 여기에서. 너희 아비는 누구? 마귀, 마귀의 말. 다이모니온, 악한 말은 행하느니라. 그 마귀가 행하게 하는 그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란 뜻도 있어요. 마귀의 말은 인간을 창조주의 자리로 부추겨 올린다는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처럼의 자리 선악과의 자리로 밀어 올린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 행사예요. 그런 자들은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죽여 버리려고 하지요?
‘나’라는 육을 품고 있는 그 율법의 예수를 죽여야 ‘참 나’로 살아날 수 있는 건데 그 ‘나’를 죽이지 못하면 절대로 여호와이레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40절이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거 죽였어, 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는 그걸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건 뭐예요? 그렇게 해서 ‘나’가 되는 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죽이려 한다 이거예요. 그것이. 그게 예수님 도륙사건이라 그랬잖아요. 그게 살인하지 말라. 의 진의라 그랬잖아요. 아브라함은 육적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안의 ‘나’를 도륙하는 그런 행위 안 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21장에서 진리와 연합된 ‘나’가 되어서 율법을 타고 앉은 ‘나’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말이에요. 그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 개는 개다워야 되는 거고, 소는 소다워야 되는 거예요. 개가 개처럼 산다고 감옥에 보냅니까? 여러분 개가 전봇대에다가 오줌 쌌다고 야, 너는 인마 도덕과 윤리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길가 전봇대에다가 함부로 소변을 보고 그러니? 적어도 다리는 올리지 말아야지. 그건 굉장히 음란한 행위란다. 뭐 이렇게 가르쳐야 돼요? 개한테? 개가 개답지 못하고 옷 챙겨 입고 구두 신고 주인의 밥상에 앉아서 겸상하면 그건 호로무비죠? 소를 남의 배추 밭에 묶어 놓으면 그 소가 그 배춧잎 안 뜯어 먹을까요? 소이기 때문에 뜯어 먹어요. 그런데 그 소에게 너 어떻게 남의 것을 그렇게 함부로 먹니? 소니까 먹는다니까요. 그거 뜯어 먹었다고 감옥 보냅니까? 지옥 보내요?
여러분, 개나 소보고 사람다워지라고 하는 거 그것과 사람에게 너 사람처럼 살지 말고, 없음처럼 살지 말고 신처럼 살아라, 율법 지켜라 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율법은 단순히 그 표피적 세목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 생명의 이야기란 말에요. 그거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창조주의 창조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연합의 언어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설명해 준거란 말에요.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그걸 지키라고 하는 건 인간에게 신을 흉내 내라는 거 아니에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 되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게? 그게 뱀의 소리라니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선과 악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 구조로 정의해 놓은 선과 악과 많이 달라요. 하나님이 다말에게 너 시아버지한테 창녀로 변장하고 가서 시아버지랑 자라. 그리고 애도 낳아. 이거는 여러분 정말 무슨 19금, 삼류영화 소재로도 못 쓰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그걸 의라 그래요. 하나님이. 아말렉에 가서 그 애기까지 씨를 다 말려버려, 다 죽여 버려, 그건 살인 교사인데 성경은 그걸 선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한 분, 이라는 개념은 그 분 자체가 분리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분이란 뜻이에요. 유독 인간만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판단을 하죠. 왜? 선. 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정확하게 둘러 나누어져 있는데 그 내용물을 살펴보면, 선. 악 이예요. 딱 이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어요. 그래서 할까? 말까? 맞나? 틀리나? 이걸로 항상 선택하잖아요. 여러분도.
이게 선악과 먹은 마음이라니까요. 그래서 항상 그걸 규명해야 돼. 이 사람들은요. 둘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걸 죄와 악이라고 해요. 그래서 호세아도 두 마음을 품은 게 죄라 그러잖아요. 10장인가? 거기서요. 그죠? 야고보도 그러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잖아요. 그게 선악이라는 그 선악구조 속에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인간들의 마음에 생래적으로 담겨 있는 그 선,악 이라는 그 마음. 그게 죄예요. 악이에요. 그렇다면 선악과라는 게 뭔가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창세기 2장 9절로 가볼게요.
창 2: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자칼, (신랑이, 여긴 이시, 이솨, 남자, 여자라고 하지 않고)자칼, 네케바 다른 단어를 써요 여러분. 그 남자와 여자를. 남자에게서 여자 만들 때. 그 때는 신랑, 남편, 신부 이런 뜻이거든요. 그 사람, 그러니까 남자, 신랑안의 신부. 함몰되어 사람이 된 그건 하나예요. 하나. 그래서 사람이란 단어를 단수로 쓴단 말에요.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사람! 그래요. 단수로 써요. 하나라니까요. 그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주세요. 그리고는 거기에다가 나무를 하나 심으세요.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 라고 했을 때. 그 나무가 단수예요. 한 나무라니까요. 나무들이 아니란 말에요. 나무예요. 한 나무! 그런데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면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이기도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이기도 해요. 먹기에 좋다는 건 먹어야 선이 되는 나무, 먹어야 생명이 되는 나무, 이런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한 나무가 두 나무처럼 묘사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런데 그 나무는 어떤 나무에게는 생명나무가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 나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기도 하지만, 생명의 말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말씀이 되기도 한단 말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혼인서약서 이기도 한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이혼 증서가 되기도 한다니까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 보세요.
고후 2: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으로 흐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똑같이 진리가 전해지는 거예요. 뭘 섞지 않고 진리를 전했어요. 말씀을 전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죽이는 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살리는 말이 되더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 열매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나무 열매가 되더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거는 먹고 이거는 먹지 마, 라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에 의해 어떤 놈은 살아나는데 어떤 놈은 죽더라는 거예요. 그런데요, 성경을 보면 생명나무 실과는 성소에서 흐르는, 넘쳐나는 물에 의해 나중에 맺혀요.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죠. 그걸 먹어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생명나무 열매란 말에요, 구리고 선지서나 구약에 보면 열매가 익을 때 따먹어라 그러죠?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그 한 나무에 선악과 열매는 분명히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따 먹었으니까. 생명나무 열매는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안 보였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인간은 보이는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이 땅에서 율법으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는 없었어요. 안 보였어요. 없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열렸다니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그 선악과 열매는 절대 따먹지 말라 그러시고 아직 열리지도 않은 생명나무 실과는 반드시 먹어라 그래요. 그러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예요. 창세기 2장 16절 보세요.
창 2 :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 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
16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칼, 먹다 는 단어가 절대 형으로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반드시 먹어라 예요. 이게. 먹어라. 먹어라. 절대 형으로 두 번 반복해서. 그리고 여기 각종이라고 번역된 칼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여러 가지 종류의 이런 뜻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보세요. 앞에서 나무가 단수 하나로 나왔는데 무슨 각종 나무 겠냐고요. 반드시 먹어라. 생명을 주는 열매는 반드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생명을 주는 열매는 아직 익지도 않았어요. 첫 열매가 익어서 추수될 때 까지는 아무도 못 먹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선악과 열매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보기에도 아름답네요. 당연히 먹습니다. 그건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리고 어디 숨어요? 나무는 하나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나무 뒤에 숨었어요. 선악과 뒤에 숨어요.
인간은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율법 뒤에 숨어요. 반드시. 하나님이 거리로 찾아가셔서 창세기 3장 15절부터 얘야, 그 선악과가 뭔지 아니? 하고 가르쳐주시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아, 이게 선악과에요? 이게 죄예요? 알게 되면 이게 바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예요. 그래서 산악과를 먹어야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를 먹기 위해선 반드시 선악과 열매를 먹어야 되는 거예요. 의는 다른 게 아녜요.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 아는 걸 의라고 해요. 선악과를 따먹고 그 선악과가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만드는지를 알고 예수와 함께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와 연합된 나, 그 아들을 죽여 버리고 하나님이 살리는 아들로 창조되는 거란 말에요. 따라서 생명나무 열매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는 때려 죽여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바꿔 말해서 여러분이 죄를 모르면 절대 생명이 뭔지, 의가 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죄라는 행위를 하고 안 하고 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것들을 통해 진짜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고 하는 거예요. 알아야 생명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영생을 뭐라 그래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이에요. 그걸 아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라니까요. 그게. 여러분 그걸 알았죠?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예요. 그거 언제 먹나? 기다리지 마세요. 그게 산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관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그냥 표피적 문자로만 이해하려고 하니까 도대체 무슨 얘긴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도대체 그놈의 선악과 왜 만들어가지고 그리고 그놈은 왜 따먹어? 아니, 그놈이 아니었지 처음에는?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죄를 짓게 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을 받은 사람도 죄 아래 놔두시는 거예요. 그게 옳다는 게 아녜요. 그걸 통하여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를 알게 해주세요. 그때 여러분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생명의 열매라는 건 진리의 말씀인 거예요. 그걸 알아먹으면 생명의 열매를 먹은 거란 말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보고 사람다움을 성취하는 도구로 보게 되면 그는 선악과를 먹고 무트 타무트의 세계, 정녕 죽으리라, 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자인 거고 그 말씀을 법으로 따먹고서는 모든 인간은 육을 입고 오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던지면. 누구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도 여전히 시시때때로 그걸 법으로 받아들이고 불안해 할 때가 있다니까요. 죽는 날까지 해결되는 게 아녜요. 그거는요. 법으로 받아들이고, 따먹고는 이내, 이건 아니구나, 이건 내가 도구로 삼아서 내 존재를 구축하고 함양하라고 준 게 아니라, 우리는 말씀을 주면 그걸로 나를 어떻게 하면 근사한 존재로 만들까 여기에 사용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적용을 이야기 해달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뭘 어떻게 살아요? 여기서 천 년 만 년 살 거면 뭘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겠죠. 그런데 이건 멸해버린다는데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걸 왜 가르쳐 주겠느냐고요 하나님이? 그런데 전부 그걸 물어요. 마음속으로.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아니 살아났다니까요.
그렇게 이건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허락하신 거구나. 하고 그렇게 육의 죽음의 자리로 가는 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 것,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는 거예요. 안 보이는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는 안 보였다니까요. 얘기를 하면서도 이걸 이해하라고 얘길 하는 건지, 교회를 나가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귀 있는 이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하나였단 말에요. 그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도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는 하나인 거예요.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나무 실과는 선악과를 통과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란 말에요. 그때 진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니까요.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자에게 이제 진리가 됐으니까, 아, 이거구나. 이게 자유로구나, 이게 복음이로구나. 했을 때, 그에게서 그 진리의 말( 이게 열매란 단어랑 똑같은 단어예요) 말이 나오겠죠? 이게 성도가 맺는 열매에요. 그것이.
뭐 도덕의 열매, 윤리의 열매 선행의 열매 이게 아니라. 그 진리의 말이 나와 누가 듣고 오, 그거야? 그게 복음이야? 우리는 죽고, 그렇게 예수 안에서 은혜로 사는 거야? 라고 누군가가 살아날 때 내 입에서 생명나무 실과가 그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열매가 열려 그에게 전해지는 거예요. 그걸 전도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열매로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랬잖아요? 여러분이 생명나무 실과, 그 말을 맺으면 말이 열매라고 했으니까, 여러분은 예수라는 생명나무예요. 그런데 다이모니온, 푸뉴마 다이모니온, 귀신의 말, 이걸 내 놓고 있다면 여러분은 선악과에요 그냥. 거기서 선악의 구조 속에 갇혀서 여전히 선악과 열매만 맺는 죽은 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가짜 열매 맺는 자.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연합되어서 I am who I am ‘나’가 되어 계세요? 아니면 여전히 불안해서 좀처럼 뭘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너희로 머물고 계십니까? 주님은 분명히 둘로 갈랐어요. ‘너희’ 그게 이혼한 자들이에요. 여러분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의 예수. 그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죠? 그리스도예요. 여러분은. 기름부음 받은 자, 성령 받은 자. 생명나무 실과를 주렁주렁 맺어 다른 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진리가 된 자!
그걸 아는 사람들이 막 산다고요? 데리고 오세요. 그 사람 좀 제발. 그래, 그럼 이제 막 살까? 이게 진짜 깨달은 거냐고요? 여러분 이 지구의 생명은 태양에 달려있죠? 태양에 의해 지구는 끌려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태양이 1초에 400만 톤씩 죽어가는 거 아세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태양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1초에 400만 톤씩 태양은 죽어요. 폭발한다고요. 그런데 태양은 융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갈수록 커져요. 400만 톤 씩 커지는 거예요. 죽으면 죽을수록. 그러면 여러분, 이 태양이 지금 죽어간다는 건 그 태양이 생명을 쥐고 있는 지구는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죠? 태양이 그렇게 지어졌다니까요. 1초에 어김없이 400만 톤씩 죽어가요. 그런데 점점 커져. 그러면 이 태양이 점, 점, 점 커지면서 지구와 가까워지면 여기는 어떻게 된다? 불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로 멸망한다고 하는데. 이 메카니즘을 보시란 말에요.
빛이신 하나님이 죽어요. 자기를 비워 우리를 살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살리느냐하면 태양이 점점점점 커지면서 이것들을 먹어서 태양화 시키는 거예요. 이것을요. 그런데 태양은 죽어가는 건데 그 안에 죽어서 들어간 자들이 태양으로 사는 이 메카니즘이란 말에요. 이것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기 위해선 하나님의 죽음을 그분이 자기를 비워 나를 살렸다는 걸 믿는 그 믿음의 성도는 그 하나님의 죽음이 나를 삼켜야 내가 하나님으로 산다, 라는 걸아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힘드냐하면 태양이 지구를 불태우는 것만큼 뜨거워요. 그래서 불같은 시련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빛, 태양으로 함몰되어 가는 건 뜨거운 거예요.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거예요. 죽어야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신 이 삶이 옳은 거예요. 힘들죠? 어렵지 않습니까? 아, 난 행복해 죽겠어. 막 이런 사람 있어요? 여기서? 예수를 믿고 나니까 행복해 미칠 거 같아. 단 한순간도 슬퍼진 적이 없어, 우울한 적이 없어 본 사람. 개인적으로 찾아오세요. 그 사람들은 집중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힘들어요.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 차라리 날 좀 떠나주세요. 너무 뜨겁습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 입에서 나와야 돼요. 아니면 여러분은 복음을 삶으로 사는 분이 아니에요. 아, 우리 예수님도 앗 뜨거워 그러고 가셨는데 우리가 뭔데 날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이 세상을 살아요?
예수님이 앗 뜨거 ~ 그러고 갔다니까요. 십자가 위에서. 그게 무트예요!!진리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질수록 여러분은 점점 고립될 것이고 점점 공격을 받을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길이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까지의 삶이 눈 한 번 꿈쩍했더니 여기 왔죠? 한 번 더 꿈쩍하면 가는 거예요. 그렇게 길지 않아요. 잘 견디십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죽어야 산다는 이 역설을 어찌 세상이 이해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와 반대방향으로 가는 이 기독교를
누가 옳다 인정하겠습니까?
하지만 귀가 열린 자들이 있고
눈이 열린 자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길을 가게 될지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씀을 해 놓으셨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위로하옵소서.
진리로 복음으로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063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이다) (로마 6.8-11)
※ 이 녹취본은 연님이 오랜기간 손으로 필사한 자료를 지서모 맴버들이 옮겨 적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 나누겠습니다 로마서 63번째 시간입니다 결국 모든 건 하나이다 로마서 6장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함께 봉독하시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아멘 자 오늘은 본문 강해라기보다는 기초다지기 작업을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충분히 이해하시게 되면 아 지난 설교나 앞으로의 설교를 들으시는 데에 아주 수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요즘 라틴어하고 아람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헬라어 가지고는 사실 성경을 어 해석하기가 좀 부족해요 그래서 라틴어 아람어를 좀 공부를 하는데 그걸 보면서 고서적들을 찾아보니까 맞아요 성경은 절대 법이 아녜요 제가 이거를 다 공부하게 되면 수메르어까지 공부를 해서 여러분들에게 진짜 하하하 하도 시비 거는 놈들이 많으니까 증거를 계속 대줄 거예요 응 나이 오십이 되도록 이렇게 고 3처럼 공부해야 하는 이 팔자는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러니까 여러분들 자꾸 뭐 저하고 뭐 밥 먹자 뭐 이런거 그런거 하지 마세요 응 자꾸 친해지려고 뭐 이 신비주의니 뭐니 자꾸 우리 목사는 설교만 하고 싹 도망간다고 목사랑 친해져서 뭐할라 그래요 여러분은 제가 밖에 나와 있으면 자꾸 사무실로 집어넣어야 돼요 가서 공부하라고 왜 나와 있냐고 응 특별한 일 아니면 심방 같은 것도 부르지 마시고요 여러분과 제가 인간적으로 말씀이 아닌 인간적으로 자꾸 친해지다 보면 여러분은 저와의 관계에 따라 말씀과의 관계를 맺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저에게 혹시 실망을 하거나 아니면은 제가 여러분에게 그 별로 친하게 안 대해주잖아요 그럼 말씀하고도 멀어지게 돼요 왜 그런 일을 자초하실라 그래요 예수님하고 친해지세요 논어 수리 편에 보면요 수리불작 이라는 말이 나와요 진리를 말하되 니 말로 창작하지 말아라 라는 이런 뜻이에요 진리만 말하라 라는 거죠 그런데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하나님입니다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들을 귀가 없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말하면 짜증을 내요 왜 나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진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냐는 거죠 그러니까 나의 인격 나의 행위 나의 가치 나의 성숙 나의 변화 뭐 이런 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그건 보이니까 그래서 진리만을 전해야 하는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인간들의 구미에 맞는 창작에 돌입하죠 왜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엉뚱한 스승을 모신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울이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예화나 웃기는 이야기나 이슈가 되는 사건들이나 감동적인 간증 또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선동적 연설 등등 진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나열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러한 창작 열의에 감동합니다 박수를 보내요 눈물을 훔치면서 결단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러한 감동과 박수와 결단은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거예요 불교 설법을 들어도 두 주먹 불끈 쥐는 결단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 이 세상에 눈두지 말자 이거 불교인들도 다 하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정작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은 진리 이외에 다른 말에 관심이 없어요 뉴스를 봐도 나오고 도덕책을 봐도 나오고 교양 영화에도 나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불쾌해 합니다 이런 귀한 시간을 그런 잡다한 세상 이야기 듣는 것으로 때우는 것이 못내 아쉬워요 진리를 알고 나서 TV나 신문 나도 안 보는데 목사는 자꾸 그 얘기를 해주면 어떻게 되는 거냐구요 그래서 설교를 하다보면 회중이 정확하게 두 부류로 갈라지는 걸 감지할 수 있어요 분명히 진리이신 예수를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 반응이 나와요 예수의 이야기도 나의 유익에 나의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사람들과 그냥 그 예수 이야기로 나는 됐습니다 라는 두부류로 갈라져요 왜 그런 분리가 생기는가 하면 한 쪽은 아직도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 너의 상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 예수와 하나가 되어서 그 존재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거는요 이거는요 이건 사활을 걸만큼 중요한 사안이예요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여전히 종교인으로 머무느냐 성도로 변화하느냐 이건 이 문제에 달린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죠 사도 바울도 우리라는 말을 자주 써요 우리는 나와 너가 함께 모여서 우리가 되는 거 아녜요 우리라는 말은 그 자체가 그 안에 있는 자들이 전부 나여야 돼요 나 나 나 나 나와 상대 대척점에 있는 너와 내가 그 안에 들어 있으면 이거는 우리로 묶이지가 않아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지금도 너의 자리에 두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와 연합 상태가 아닌 거예요 중요한 얘기예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집요하게 우리와 예수를 함께 묶어 버리죠 예수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가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살아났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난 거예요 여러분 살아나셨어요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셨죠 그러니까 뭐로 살아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살아났다면 예수로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었다고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건데 생명은 하늘 생명은 오직 어디에만 있다고 그래요 요한복음에서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 밖은 다 죽음이에요 사망이에요 그러니까 그 예수의 생명을 우리가 지금 공유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어떤 존재의 지체가 된 거예요 그러면 그도 바로 그리스도로 살아난 거예요 그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여러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죠 성령의 기름 그게 그리스도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됐다니까요 지금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가 됐어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인 그게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이 땅에서 하게 된다는 얘기 말이에요 그게 뭐예요 진리가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가 진리라고 했으니까 내가 진리가 되어 진리를 전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우리가 하게 되는 거에요 단순히 전도나 선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거는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와 나가 연합이 되어서 새로운 나가 된 거예요 그 안에는 예수와 내가 같이 들어있어요 이걸 세 번째 성전이라 그래요 니들이 이 성전을 헐어라 두 번째 성전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럼 내가 사흘 만에 그거는 세 번째라는 뜻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사흘 걸려야 되는 거예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그랬단 말에요 그게 예수와 연합된 나란 말에요 그게 요 그리스도인 이제는 예수와 내가 나와 너의 상태로 존재하면 안 돼요 그게 뭐라 그랬어요 수요일날 제가 목이 터지게 얘기했는데 그게 이혼이라 그랬죠 나와 너로 존재하면 여자가 신랑의 갈비뼈 이 안에 함몰 되어 있을 때 그게 사람인데 여기서 빠져나가 독립적 존재가 되면 그게 이혼이요 간음이라 그랬잖아요 예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누림의 단초가 돼야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예수님 섬기지 말라는 얘긴가 이런 말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를 여전히 너의 자리에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섬김의 대상으로만 삼는 이들이 태반이에요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도 여전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죠 나와는 상관없는 예수가 진 십자가예요 그거는 그래서 패션 어브 더 크라이스트 이런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면서 우는 거예요 고난주간을 이렇게 그냥 힘들게 보내는 거예요 그게 내 일이 아니거든요 내 밖의 어떤 존재가 한 일이고 나는 그걸 그냥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보고 앉아 있는 거예요 거기가 자기가 죽은 자리라는 걸 안 믿는 거예요 아니 못 믿는 거예요 눈과 귀가 안 열려서 그들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는 예수만의 십자가예요 내 십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십자가가 슬프고 무섭고 그런 거예요 십자가는 스타우로스 언약이라는 말이라 그랬죠 기둥이란 말이에요 그게요 다른 말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작품 창세전 언약의 결과물이니까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그 말은 예수님은 당신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손수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그 안에 우리 성도가 들어있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죽어야 진짜 생명이 온다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거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나가 들어있다라는 걸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면 결국 그 안에 나 있으니까 나를 섬기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율법주의래는 거예요 그 안에 나 있다매요 그런데 그 분을 섬기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나를 섬기는 거란 말에요 그게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예수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 세상에 와서 어떤 일을 행하고 돌아간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일을 행한 이 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 오해된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성경은 나와 상관이 없는 내 밖의 책이 되죠 왜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에 관한 책이니까 내 책이 아니란 말에요 그러면 그런데 이 성경을 생명책이라고도 해요 생명을 주는 책이거든요 이것이 그러면 이게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의 이야기면 나는 그 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전체를 나 로 읽어야 돼요 우리의 이야기예요 교회의 이야기예요 그렇게 진리는 나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로 즉시 살려내는 힘이 있어요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떨어져서 시간을 두고 차례차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곧 부활이에요 살아나는 거예요 죽는 게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의 그 존재의 죽음 그 처음자리로의 회귀죠 왜 모든 것이 없음 죽음의 상태였거든요 그래야 거기서 창조가 일어나는데 이것들이 살아있는 척하니까 창조가 드러나지를 않는 거예요 영광을 못 받는 거예요 이 창조의 능력이 죽음과 부활은 하나에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에요 육신이 죽으면 묵시 속에서 즉시 사는 것처럼 무덤 안에서 여러분 잠자고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시간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긴 시간과 상관없는 영원이기 때문에 거기는 기다림이 없어요 따라서 죽으면 사는 거예요 여러분은요 이 역사 속에서도 진리에 의해 죽은 사람은 그 즉시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산거예요 성도의 무덤이 곧 천국 문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무덤 열고 들어갔더니 그 안에 천사들이 있었죠 천국은 무덤문 밖에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평생 하나님에게 끌려 다니다가 결국 무덤하나 건지고 죽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 보여요 아니요 천국 문 열고 간 거예요 그게 다예요 성도는 거기에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은 누구 믿음의 조상이니까 성도들이 다 묻히는 거예요 그 무덤에 왜 천국 들어가려고요 그게 교회라니까요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창세기 21장으로 가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주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율법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 그 은혜의 아들을 희롱하는 그림이 나오죠 은혜는 항상 율법에게 희롱 당하게 되어 있다라는 그런 역사 속 성도들의 현실을 잘 그려 놓은 거예요 복음은 항상 율법에게 조롱의 대상이 돼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율법주의자들이 훨씬 멋있어 보이고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에 자 그리고는 율법인 이스마엘이 하나님에 의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죠 하나님이 쫓아내라 그래요 결국에는 율법이 은혜에 의해 축출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밑에 붙어있는 이야기가 좀 어색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아브라함과 이방인인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는 그 다음 장이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는 모리아 산의 사건이 이어진단 말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관계가 있길래 여기에 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 그리고 거기를 브엘세바라고 이름 짓잖아요 그게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광야의 우물은 생명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광야의 물 광야의 우물 이건 종종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가 되는 거예요 그죠 제가 지난 수요예배 때 레마와 로고스의 개념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레마는 어떻게 말로 설명하거나 그려낼 수 없는 그 진리 자체 그걸 이야기한다면 로고스는 그걸 성문화하여 담은 그릇에 비유해드렸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레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고스 그냥 표피적으로 받아들여 그걸 법으로 읽게 되는 거란 말에요 거기서 레마의 동사형인 레오가 말하다 라는 표피적 뜻도 있지만 그건 흐르다 라는 뜻이에요 레마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비 왜 은혜의 비라고 그러느냐하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흐르는 물 진리의 말씀에 씻겨기지 않으면 부정한 자다 그러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부정한 건 다 어디에 씻으라고 그래요 물에 씻으라고 그러는데 무슨 물 흐르는 물에 씻으라 그래요 그게 레오 예요 레마 예요 말씀에 씻지 않으면 다 부정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고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씻는 거예요 요단강이라는 말이 요르단이 흐르다 라는 뜻이에요 그 아래의 물 이 바다는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지만 위에 물 아래로 흘러내리는 위의 물 창세기 두 번째 날 물이 위 아래로 갈라졌잖아요 위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아래 물은 정확하게 위의 물을 흉내 내는 물이에요 그러나 그 물 아래의 바다는 다시 있지 않은 상태로 이제 멸해지죠 계시록에 가면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 그리고 유리바다만 천상에 남아 있어요. 유리로 된 바다라는 얘기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만 남는 거예요 물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물을 뿜어서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는 장면이 바로 아래의 물 비진리 엉터리 말씀 이런 걸로 여자를 죽이려하는 마귀의 행사를 가리키는 거란 말에요 아래의 물 아모스서를 보면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 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말은 이 세상에 말씀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각 교회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인터넷만 들어가면 수 만 편이 나와요 정작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수가 없더라 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엉터리 말의 홍수는 곧 기근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그게 거기에 다 떠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엘리야 때 기근이 일어납니다 얼마 동안 삼년 반 삼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에요 로고스로 오신 예수 그분이 말씀을 홍수처럼 쏟아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기근이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그분이 가신 다음에 성령의 비가 내리자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나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엘리야의 이야기는요 그래서 삼년 반 있다가 비가 오는 거예요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아 그게 그런 말이었구나 라고 알았다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성경에 성령이 생수처럼 단비로 부어지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진리를 이해하더라는 거예요 이해하고 나자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죠 교회가 그 말을 받아 뿌리니까 첫 번째 시내 산에서 죽었던 삼천 명이 살아 올라오는 거예요 삼천 명이 오순절 날 따라서 성령 생수 비 말씀 등은 같은 걸 가리키는 거예요 진리예요 그것이요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잖아요 요한복음에 내 말씀이 진리의 말이 성령이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반 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은혜의 비 성령 말씀을 내려주신 사건이었음을 엘리야의 이야기가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이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 말은 위에서 흘려보내준 물이 없는 자가 곧 귀신이라는 말이에요 그 귀신이란 단어 자체가 프뉴마 다이모니온이거든요 프뉴마 프뉴마가 뭐예요 성령이에요 그런데 영이 뭐라 그랬어요 말 말씀 다이모니온은 악한 말 이걸 귀신이라고 번역 한다니까요 그래 귀신 들린 건 그냥 뭐 거품 물로 쓰러지고 이런 거 아니에요 이건 뭐 정신병원에 보내면 돼요 귀신 들린 걸 악한 말을 악한 말인지 모르고 받아 담고 있는 게 귀신 들린 거예요 Demon Possession 말씀의 모양은 가지고 있는데 아래에 말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지는 율법의 말 이게 귀신 들린 거예요 그건 성경이 그냥 소리라고 해요 에코 에코는 뭐냐 하면 우리가 노래방 가서 웡웡웡 울리는 게 에코가 아니라 앵무새의 말 의미 없는 말이란 뜻이에요 앵무새가 막 따라한다고 그거 뜻 알고 얘기해요 몰라요 그러니까 주인한테 욕지거리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성경이 귀신이라 그래요 프뉴마 다이모니온 그런데 이제 이 땅에 성령이 오셨어요 우리는 이 광야 교회 교회에서 말씀의 비를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이고 더하면 몇 삼년 반 마흔 두 달의 기간이고. 이걸 나누면 삼년 반 천 이백 육십일의 기간이고. 삼년 반의 기간인 거예요 계시록에 그렇게 나누어 나오지만 다 똑같은 거예요 말씀이 떨어지는데 그 말씀이 다 곡해가 되어서 기근인 상태 그런데 그 중에 레마로 알아듣는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의 그 기근의 이야기 중간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과부는 밀가루 한 줌을 가진 완전히 텅 비어진 털린 여자예요 그 이제 그 밀가루 한 줌 이거 먹고 죽어요. 자기는 이거 먹고 죽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죽는구나. 이제. 내 존재라는 게 이거구나, 라고 알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랬더니 그 기근의 와중에 그녀의 집에만 음식이 차고 넘치죠 기름과 밀가루가 흉년과 풍년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 거예요 세상 모두가 다 흉년 기근인데 어떤 집에만 풍년이 임해요 열왕기상 17장 14절 보세요 왕상 17장 14절 보세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가 완료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제 은혜로 가득 차게 되는 그 나라 오기 전에도 이미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의 비로 살아나는 이가 있다 라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돼요 마지막 갖고 있던 밀가루를 뺏겨야 돼요 하나님 한태 그건 죽음이에요 이거 먹고 나면 난 죽습니다 라는데 그걸 뺏으면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죽이는 거예요 그것이요 네가 죽어야 풍년이 온다는 뜻이에요. 엘리야가 무슨 밀가루 떡에 환장을 해서 그걸 뺏어 먹은 게 아니라니까요 죽음인 거예요 죽음 성도는 예수에 의해 살아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의 생명의 근원은 다 뺏겨야 되는 거예요 이게 너 살려주는 거 아니야 를 가르쳐주기 위해 밀가루 한 줌을 뺏어버린 다니까요. 그래서 그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십자가죠.그 진리의 현실을 그 여자가 정확하게 깨달아 알게 돼요. 왕상 17장 24절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리인 줄 아노라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는 거 아셨어요 진리의 말씀의 이야기란 말에요 이건요 아 이게 이 모든 게 나에게 일어난 이 상황 이 그림이 다 요게 진리의 말씀 복음 요게 십자가군요 알았다는 거예요 이 여자가요 그렇게 위의 물 은혜의 비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켜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막 한가운데서 그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언약의 우물이죠 그러니까 그거는 언약의 우물이니까 살리는 물이란 말에요 그게 상징적인 거예요 물론 그리고는 거기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짓는데 브엘세바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일곱 우물이에요 쉐바가 7이니까 그런데 잘 보시면요 그 이야기 속에 우물이 하나밖에 안 나와요. 7개 우물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분석을 하는 게 아니라 우물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쉐바를 7로 해석하면 안 돼요. 아라비아 숫자가 없던 때였다니까요. 그 쉐바라는 단어에 7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건 그 훨씬 다음이란 말에요. 따라서 우리는 브엘쉐바라는 의미를 7우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돼요 거기서 7이라 번역이 된 쉐바는 약속 언약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7을 언약의 수 안식의 수 진리의 수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브엘쉐바는 의역을 하면 언약의 말씀 진리의 말씀 언약의 우물 진리의 우물을 상징하는 개념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창조 사건 때 몇 번 말씀 하세요 일곱 번 말씀 하시죠 진리란 뜻이에요 언약의 말씀이에요 창조사건은 언약의 성취란 말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교회를 완성하시면서 몇 번 말해요 가상 칠언 일곱 번 말하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일곱 날 돌고 무너지는 거예요 나아만이 일곱 번 흐르는 물에 들어가서 언약으로 문둥병이 낫는 거란 말에요 일곱 번 들어가면 낫는 게 아니라 여섯 번 들어가면 안 낫게 해줘요 그거 그런 말 아니란 말이에요 계시록에도 칠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죠 다 언약의 숫자인 거예요 그거는요 안식의 숫자란 말에요 아브라함이 그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한 그 장소를 브엘쉐바라고 이름 지었다는 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이 그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게 은혜와 율법이잖아요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그 은혜와 그 율법 사건을 통과하고 나니까 아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를 그리기 위해 거기에 브엘쉐바 언약의 개념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후손을 약속 하실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의 후손을 언약 하실 때 일곱 번 하세요 세어보시면 언약의 말이란 말에요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물을 파 하늘로부터 흘려주는 거지 인간이 그 물을 창작하거나 추론해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악한 말 프뉴마다이모니온 이예요 그리고 그러한 말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말을 곡해를 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는 걸 하나님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너 왜 우리 우물 뺏어 갔니 이런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정작 내가 언제 뺏어갔어 난 금시초문이야 그래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 믿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 해가는 건데 그런데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다고 우기고 있는 거죠. 그게 우물, 하늘로부터 흘려준 언약의 말을 빼앗는 건데 그 때 아브라함이 일곱 어린 양을 언약의 장소에 등장 시켜요 일곱은 쉐바 언약이라 그랬죠 그럼 일곱 어린 양은 뭐예요 언약의 어린 양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어린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 라고 말을 해요 하나님의 우물 진리의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어린 양으로만 증거될 수 있다라는 거예요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라고 하고는 어린 양 언약의 양을 거기에다 갖다 들이대는 거란 말입니다 거기에서 우물을 도둑질 했던 아비멜렉에게 어떤 언약이 주어져요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그러죠 하나님의 말을 도둑질 한 자가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랬을 때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하여 나 너 안 버려 복음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게요 괜히 그 이야기가 거기 들어간 게 아니라 그게 브엘쉐바의 아비멜렉의 이야기예요 창세기 21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쉐바의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영생하시는 이건 영생이라는 이예요 영생 이라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여기서 부르다 라고 번역이 된 카라는 받아들이다 초청하다 라는 뜻이고 이름이라고 번역 된 쉠은 셈 함 야벳의 그 셈 쉠이예요 그게 그 쉠은 빛 말씀 그 함이 어둠이거든요 빛 말씀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33절은 아브라함이 영생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초청했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무방한 거예요 율법과 은혜의 사건 이삭과 이스마엘의 사건을 통과하여 진리를 그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라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재밌는 건 아브라함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라는 말로 21장이 끝나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계속 벧엘로 몰아가요 벧엘에서 나가지 마 나가지 마 벧엘이 뭐예요 베들레헴이 떡집이듯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예요 그러나 상징적인 거죠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옛 성전 율법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진리를 알고 진리가 되자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아 약속의 후손은 이렇게 오는 거고 그 아들에 의해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 알게 되자 그가 진리가 되었으므로 그가 있는 곳이 벧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에서 머물게 놔둬버리는 거예요 벧엘에서 드디어 자유롭게 풀려나는 거에요 옛 성전에서 그게 아브라함의 죽음이에요 여러분 사실은 이스마엘이라는 큰 아들 율법에 묶여 있다가 은혜의 아들 약속의 후손 예수를 모형 하는 이삭에 의해 살아나는 거예요 그건 이스마엘 밑에 갇혀있던 아브라함의 죽음이자 아들 안에서 살아나는 아브라함에 부활인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율법과 종의 이야기로 설명을 하고 사라와 이삭을 자유하는 자유자 자유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자유 그렇다면 그렇게 어린 양을 핵심으로 한 그 언약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진리를 알고 죽었다는 말인데 그가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죽는 이야기를 22장에서 이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이기도 하지만 예수이기도 하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언약된 후손이니까 그게 요 그러니까 그 이삭은 예수의 모형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를 낳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이 마른 장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낳아요 이삭을 낳았는데 약속의 후손을 낳았는데 그런데 그게 누구라고 했어요 예수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여자 교회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들 예수를 낳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구의 모형 믿음의 조상이니까 우리의 모형 예수는 누구의 아들 여러분의 아들이라니까요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또 속으로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면서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제가 전에 자세히 설명해 드렸으니까 그러면 그 예수는 누구의 아들이에요 여러분의 아들이에요 교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22장에서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라 그런다니까요 잘 키워서 네가 사용해 먹어라 그러지 않아요 죽여라 그래요 여러분 그 죽음이라는 말 히브리어 죽음이란 말 무트 타무트 무트라 그랬죠 무트 그걸 파자를 하면 진리 이루었다 완성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진리가 이루어지면 죽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이게 죽음이란 단어에요 그리고 죽으시는 거예요 무트 다 이루었다 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죽으시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게 곧 사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시는 거예요 그게 영생이란 말에요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바로 다음 장인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거예요 아들을 죽이는 거예요 아들 안에서 아브라함이 죽는 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고 통곡할 게 아니라 아 거기서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구나 아니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거구나 무슨 말인지 조금 있으면 이해하실 거예요 그걸 아셔야지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이가 죽은 그걸 보고 슬퍼하는 게 아니란 말에요 자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제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그 언약 성취의 조력자로 나서려했던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 내려놔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약속의 후손을 주신다고 했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가진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마누라까지 팔아 먹고 정말 파렴치한 모습 이런 걸 보이면서 그거 하나님 도우려고 한 거예요 사람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이제는 이 아들이 죽으면 언약의 후손 약속의 후손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어떻게 많아지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를 죽인다고 하는 건 이건 내가 도울 일이 아니구나 바로 전 장에서 아이 그런 은혜로 완료되는구나 를 알자 그 약속의 후손을 죽이는 거예요 서슴없이 내가 섬기던 예수가 나와 함께 죽고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나는 거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역사 속 나가 내어놓아야 하는 행위에 묶일 수 밖에 없어요 예수가 내 밖의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들은 그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대니까요 내가 섬김의 대상에게 뭔가를 내놓아야 돼요 그걸 섬김이라고 하잖아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 죄인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내가 죽여야 하는 존재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아니란 말에요 조금 어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뭐라 그랬어요 모세가 하나님께 누가 너를 보냈냐 라고 사람들이 물으면 내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뭐라 그랬죠 나 그랬어요 I am who I am 이건 나는 나 야 나는 나야 그랬어요 나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나 라고 자주 말씀하시죠 에고 에이미 나 나 그건 그런데 모세 당시에는요 나라는 단어나 개념이 없었어요 굳이 나를 가리킬 땐 이 사람 이라고 썼단 말에요 나 라는 단어가 없었대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라는 단어로 모세의 상식을 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모세가 그랬겠죠 나 나가 뭐야 나 지금 하나님은 새로운 나를 제시하시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모세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말씀을 담은 그릇으로 애굽으로 갔어요 하나님의 말을 전하러 진리의 말씀을 담고 진리로 간 거예요 모세는 그들이 물었습니다 너 누가 보내서 왔어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나 그랬단 말에요 그런데 그 나 가 누구였어요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뭐라 그랬겠어요 그럼 니가 하나님이냐 이런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출될 게 뻔 한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가고 싶었겠냐고요 거기를 그런데 하나님은 기어코 나 라는 이름을 주어서 모세를 보내요 잘 보세요 나 라는 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그 연합의 상태를 진짜 나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채워진 상태가 진짜 나 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이후의 성도는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의 새로운 나 란 말이에요 성도는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그 나 속으로 예수라는 그리스도라는 나 속으로 끌어들인 찬송의 대상이란 말이에요 찬송은 누림이라니까요 그건 자유란 말에요 찬송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찬송 자유 얽어매는 것이 없는 상태 반면에 섬김이라는 건 행위를 요구하게 되고 짐이 되며 부담스럽고 무서워요 그 섬김의 대상 종교행위의 대상이 되는 그 예수를 죽여라 가 모리아산 22장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요한복음 16장 16절 보세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앞의 나는 십자가 이전의 예수예요 그 예수는 죽어요 아니 죽어야 돼요 그래서 레마로 인식하지 못하게 놔두시고 그들이 직접 그 예수를 죽이게 놔두시는 거예요 그 나 는 죽어야 돼요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베드로에게 넌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 세상사람 다 버려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거야 그래요 그게 디퍼논트 동사인데 중간 디포거든요 그게 재귀적 의미에요 강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아니요 저는 목숨 걸고 지킬거예요 라고 또 다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전에 예수님이 분명히 그 말을 하는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그랬단 말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끝까지 사탄의 노릇을 하는 거예요 마귀 악한 말이에요 그게 오해된 말이라니까요 나는 예수님을 섬길 거예요 붙들을 거예요 죽으면 안 돼요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너는 반드시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그래야 살아 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가 한 번 부인 했는데 또 다시 일을 만들어서 또 부인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부인하게끔 만드시는 거예요 상황을요 그래야 얘가 교회의 기초가 살아나야 되거든요 얘가요 반석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기 때문에 얘는 그 예수를 부인하고 부정해야 옛 성전에서 재판 받고 있는 율법인 예수를 부정해야 섬김의 대상인 그 예수를 부정해야 죽여야 살아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굳이 베드로를 그리고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성전 안으로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그리고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자 그를 바라보신 거에요 그래 내 새끼 그래야 니가 사는 거야 여러분 이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렇게 십자가 이전의 예수인 나는 죽어야 돼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타나는 또 다른 나가 있잖아요 그때는 본다고 그러죠 왜 성령이 내려오시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았고 예수와 내가 한 지체로 연합이 되었다라는 걸 말씀이 진리의 영이 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가 보이는 거예요 레마로 이게 그 이야기예요 조금 있으면 나 죽을 거니까 못 볼 거고 조금 있으면 나 도로 살아날 거다 이 말 아니라니까요 나 나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함께 여러분과 있는 그 나 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닌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1절 보세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말씀 진리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영원히 아들은 영원히 거해요 어디서 아들 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조금 아까 위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죠 여기서는 아들이 자유케 한다 그래요 그럼 아들 이코올 진리인 거예요 말씀인 거예요 그게 이해되어지면 돼요 여러분은 산거예요 그러면은 아들이 어디 있어 내 안에 예수가 어디 있어 자꾸 거기서 그거 찾지 말아요 그 말씀 진리가 이해되어지면 여러분 안에 그 생명이 있는 거고 그 아들이 있는 거예요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이런 걸 잘 보셔야 되는 거예요 진리는 말을 하지만 마귀새끼들은 로고스를 듣고 행한다니까요 그리로 먼저 뛰어야 돼요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지금 아브라함이 뭘 했는지 봤잖아요 아들 안에서 죽었대니까요 그 약속의 후손으로 준 아들을 죽였다고요 아브라함이 그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라는 것을 안게 그 아들을 죽인 거란 말에요 창세기 22장이 그 이야기잖아요 모리아 산 이야기 자 이렇게 주님은 여기에서 말하다와 행하다 호라오 랄레오 포이에오 이런 단어들을 대조하여 사용하고 계세요 여기서 나는 본 것을 말한다 에서 보다 이 호라오는 진리로 깨닫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거라기 보다는 진리로 깨닫는 거예요 진리로 깨닫는 자는 진리를 말하다 랄레오는 이렇게 전파하다에요 당연히 진리가 된 자는 이게 향기가 되어서 향기를 막는다고 이게 막히지를 않잖아요 이거는요 전파 랄레요 전파 진리의 전파자가 되고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그러죠 여기에서 너희 아비는 누구 마귀 마귀의 말 다이모니온 악한 말은 행하느니라 그래요 그 마귀가 행하게 하는 그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란 뜻도 있어요 마귀의 말은 인간을 창조주의 자리로 부추겨 올린다는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처럼의 자리 선악과의 자리로 밀어 올린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 행사예요 그런 자들은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죽여 버리려고 하지요 나 라는 육을 품고 있는 그 율법의 예수를 죽여야 참 나로 살아날 수 있는 건데 그 나 를 죽이지 못하면 절대로 여호와이레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40절이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거 죽였어 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는 그 그걸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뭐예요 그렇게 해서 나 가 되는 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죽이려 한다라는 거에요 그것이 그게 예수님 도륙사건이라 그랬잖아요 그게 살인하지 말라의 진의라 그랬잖아요 아브라함은 육적 나 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안의 나 를 도륙하는 그런 행위 안 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21장에서 진리와 연합된 나 가 되어서 율법을 타고 앉은 나 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말이에요 그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 개는 개다워야 되는 거고 소는 소다워야 되는 거예요 개가 개처럼 산다고 감옥에 보냅니까 여러분 개가 전봇대에다가 오줌 쌌다고 야 너는 인마 도덕과 윤리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길가 전봇대에다가 함부로 소변을 보고 그러니 아 적어도 다리는 올리지 말아야지 그건 굉장히 음란한 행위란다 뭐 이렇게 가르쳐야 돼요 개한테 개가 개답지 못하고 옷 챙겨 입고 구두 신고 주인의 밥상에 앉아서 겸상하면 그건 호로무비되는 거에요 소를 남의 배추 밭에 묶어 놓으면 그 소가 그 배추잎 안 뜯어 먹을까요 소기 때문에 뜯어 먹어요 그런데 그 소에게 너 어떻게 남의 거를 그렇게 함부로 먹니 소니까 먹는다니까요 그거 뜯어 먹었다고 감옥 보냅니까 지옥 보내요 여러분 개나 소보고 사람다워지라고 하는 거 그것과 사람에게 너 사람처럼 살지 말고 없음처럼 살지 말고 신처럼 살아라 율법 지켜라 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율법은 단순히 그 표피적 세목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 생명의 이야기란 말에요 그거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창조주의 창조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연합의 언어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설명해 준거란 말이에요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래니까요 그런데 그걸 지키라고 하는 건 인간에게 신을 흉내 내라는 거 아니에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 되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게 그게 뱀의 소리라니까요 허 답답해 여러분 하나님의 선과 악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 구조로 정의해 놓은 선과 악과 많이 달라요 하나님이 다말에게 너 시아버지한테 창녀로 변장하고 가서 시아버지랑 자라 그리고 애도 낳아 이거는 여러분 정말 무슨 19금 19금 삼류영화 소재로도 못 쓰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그걸 의라 그래요 하나님이 아말렉한테 가서 그 애기까지 씨를 다 말려버려 다 죽여 버려 그건 살인 교사인데 성경은 그걸 선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한 분 이라는 개념은 그 분 자체가 분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란 뜻이에요 유독 인간만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판단을 하죠 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마음은 정확하게 둘러 나누어져 있는데 그 내용물을 살펴보면 선 악 이예요 딱 요렇게 반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그래서 할까 말까 맞나 틀리나 이걸로 항상 선택하잖아요 여러분도 요게 선악과 먹은 마음이라니까요 그래서 항상 그걸 규명해야 돼 이 사람들은요 둘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걸 죄와 악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호세아도 두 마음을 품은 게 죄다 그러잖아요 10장 인가 거기서요 그죠 야고보도 그러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잖아요 그게 선악이라는 고 선악구조 속에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인간들의 마음에 생래적으로 담겨 있는 그 선 악이라는 고 마음 그게 죄예요 악이에요 그렇다면 선악과라는 게 뭔가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창세기 2장 9절로 가볼게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자칼 이게 신랑이에요 여긴 이시 이사 남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자칼 네케바 다른 단어를 써요 여러분 고 남자와 여자를 남자에게서 여자 만들 때 고 때는 요거는 신랑 남편 신부 요런 뜻이거든요 그 사람 그러니까 남자 자칼 신랑 안의 신부 함몰되어 사람이 된 고건 하나예요 하나 그래서 사람이란 단어를 단수로 쓴단 말이에요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사람 그래요 단수로 써요 하나라니까요 고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주세요 그리고는 거기다가 나무를 하나 심으세요 하나님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 라고 했을 때 고 나무가 단수예요 한 나무래니깐요 나무들이 아니란 말에요 나무예요 한 나무 그런데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면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이기도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이기도 해요 먹기에 좋다는 건 먹어야 선이 되는 나무 먹어야 생명이 되는 나무 이런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거죠 한 나무가 두 나무처럼 묘사가 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런데 그 나무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나무가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 나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이 말씀이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기도 하지만 생명의 말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말씀이 되기도 하단 말이에요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혼인서약서 이기도 한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이혼증서가 된대니깐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 보세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으로 흐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똑같이 진리가 전해지는 거예요 뭘 섞지 않고 진리를 전했어요 말씀을 전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죽이는 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살리는 말이 되더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 열매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나무 열매가 되더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거는 먹고 이거는 먹지 마 라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에 의해 어떤 놈은 살아나는데 어떤 놈은 죽더라는 거예요 그런데요 성경을 보면 생명나무 실과는 성소에서 흐르는 넘쳐나는 물에 의해 나중에 맺혀요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죠 고걸 먹어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생명나무 열매란 말에요 그리구 선지서나 구약에 보면 열매가 익을 때 따먹어라 그러죠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그 한 나무에 선악과 열매는 분명히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따 먹었으니까 생명나무 열매는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안 보였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인간은 보이는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이 땅에서 율법으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는 없었어요 안 보였어요 없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열렸다니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그 선악과 열매는 절대 따먹지 말라 그러시고 아직 열리지도 않은 생명나무 실과는 반드시 먹어라 그래요 그러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예요 창세기 2장 16절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 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 16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칼 먹다 라는 단어가 절대 형으로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반드시 먹어라에요 이게요 먹어라 먹어라 절대 형으로 해서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그리고 여기 각종이라고 번역된 칼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여러 가지 종류의 이런 뜻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아이 보세요 앞에서 나무가 다 단수 하나로 나왔는데 무슨 각종 나무냐구요 반드시 먹어라에요 생명을 주는 열매는 반드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생명을 주는 열매는 아직 익지도 않았어요 첫 열매가 익어서 추수될 때 까지는 아무도 못 먹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선악과 열매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보기에도 아름답네요 당연히 먹습니다 그건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리고 어디 숨어요 나무는 하나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나무 뒤에 숨었어요 선악과 뒤에 숨어요 인간은 지 죄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율법 뒤에 숨어요 반드시 하나님이 거기로 찾아가셔서 창세기 3장 15절부터 얘야 그 선악과가 뭔지 아니 라고 가르쳐주시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아 이게 선악과에요 이게 죄예요 알게 되면 이게 바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산악과를 먹어야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를 먹기 위해선 반드시 선악과 열매를 먹어야 되는 거예요 의는 다른 게 아녜요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 아는 걸 의라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고 그 선악과가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만드는 지를 알고 예수와 함께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와 연합된 나 그 아들을 죽여 버리고 하나님이 살리는 아들로 창조되는 거란 말에요 따라서 생명나무 열매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는 때려 죽여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바꿔 말해서 여러분이 죄를 모르면 절대 생명이 뭔지 의가 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죄라는 행위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것들을 통해 진짜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는 거예요 알아야 생명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영생을 뭐라 그래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이에요 그걸 아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래니까요 그게 여러분 그걸 알았죠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예요 그거 언제 먹나 기다리지 마세요 그게 산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관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그냥 표피적 문자로만 이해하려고 하니까 도대체 무슨 얘긴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도대체 그놈의 선악과 왜 만들어가지고 그리고 그놈은 왜 따먹어서 아니 그놈이 아니었죠 처음에는 응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죄를 짓게 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을 받은 사람도 죄 아래 놔두시는 거예요 그게 옳다는 게 아녜요 그걸 통하여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를 알게 해주세요 그때 여러분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생명의 열매라는 건 진리의 말씀인 거예요 그걸 알아먹으면 생명의 열매를 먹은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보고 사람다움을 성취하는 도구로 보게 되면 그는 선악과를 먹고 무트 타무트의 세계 정녕 죽으리라에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자인 거고 그 말씀을 법으로 따먹고서는 모든 인간은 육을 입고 오기 때문에 처음엔 다 법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던지면 누구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도 여전히 시시 때때로 그걸 법으로 받아들이고 불안해 할 때가 있대니깐요 죽는 날까지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요 법으로 받아들이고 따먹고는 이내 이건 아니구나 이건 내가 도구로 삼아서 내 존재를 구축하고 함양하라고 준 게 아니라 우리는 말씀을 주면 그걸로 나를 어떻게 하면 근사한 존재로 만들을까 여기에 사용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적용을 이야기 해달라고 그러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뭘 어떻게 살아요 여기서 천 년 만 년 살 거면 뭘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겠죠 그런데 이건 멸해버린다는데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걸 왜 가르쳐 주겠느냐고요 하나님이 그런데 전부 그걸 물어요 마음속으로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아니 살아났다니까요 그렇게 이건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허락하신 거구나 하고 그렇게 육의 죽음의 자리로 가는 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 것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는 거예요 안 보이는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는 안 보였다니까요 뭐 얘기를 하면서도 이걸 이해하라고 얘길 하는 건지 교회를 나가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귀 있는 이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하나였단 말이에요 그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도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는 하나인 거예요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나무 실과는 선악과를 통과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때 진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대니까요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자에게 이제 진리가 됐으니까 아 이거구나 이게 자유구나 이게 복음이구나 했을 때 그에게서 그 진리의 말 이게 열매란 단어랑 똑같은 단어예요 말이 나오겠죠 이게 성도가 맺는 열매에요 그것이 뭐 도덕의 열매 윤리의 열매 선행의 열매 이게 아니라 그 진리의 말이 나와 누가 듣고 오 그거야 그게 복음이야 우리는 죽고 예수 안에서 그렇게 은혜로 산 거야 라고 누군가가 살아날 때 내 입에서 생명나무 실과가 그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열매가 열려 그에게 전해지는 거예요 그걸 전도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열매로 그가 무슨 나무인지 안다 그랬잖아요 여러분이 생명나무 실과 그 말을 맺으면 말이 열매라고 했으니까 여러분은 예수라는 생명나무예요 그런데 다이모니온 푸뉴마 다이모니온 귀신의 말 이걸 내놓고 있다면 여러분은 선악과에요 그냥 거기서 선악의 구조 속에 갇혀서 여전히 선악과 열매만 맺는 죽은 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가짜 열매 맺는 자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연합되어서 I am who I am 나 가 되어 계세요 아니면 여전히 불안해서 좀처럼 뭘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하는 너희로 머물고 계십니까 주님은 분명히 둘로 갈랐어요 너희 그게 이혼한 자들이에요 여러분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의 예수 그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죠 그리스도예요 여러분이 기름부음 받은 자 성령 받은 자 생명나무 실과를 주렁주렁 맺어 다른 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진리가 된 자 그걸 아는 사람들이 막 산다고요 데리고 오세요 그 사람 좀 제발 그래 그럼 이제 막 살까 이게 진짜 깨달은 거겠냐구요 여러분 이 지구의 생명은 태양에 달려있죠 태양에 의해 지구는 끌려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태양이 1초에 400만 톤씩 죽어가는 거 아세요 어느 순간부터 뭐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태양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1초에 400만 톤씩 태양은 죽어요 폭발한다고요 그런데 태양은 융합을 하는 거기 때문에 존재기 때문에 죽어갈수록 커져요 400만 톤 씩 커지는 거예요 죽으면 죽을수록 그러면 여러분 이 태양이 지금 죽어간다는 건 그 태양이 생명을 쥐고 있는 지구는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죠 태양이 그렇게 지어졌다니까요 1초에 어김없이 400만 톤씩 죽어가요 그런데 점점 커져 그러면 이 태양이 점점점점 커지면서 지구와 가까워지면 여기는 어떻게 된다 불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로 멸망한다고 하는데 이 메카니즘을 보시란 말에요 빛이신 하나님이 죽어요 자기를 비워 우리를 살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살리냐하면 태양이 점점점점 커지면서 이것들을 먹어서 태양화 시키는 거예요 이건요 그런데 태양은 죽어가는 건데 그 안에 죽어서 들어간 자들이 태양으로 사는 이 메카니즘이란 말에요 이것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기 위해선 하나님의 죽음을 그분이 자기를 비워 나를 살렸다는 걸 믿는 그 믿음의 성도는 그 하나님의 죽음이 나를 삼켜야 내가 하나님으로 산다 라는 걸 아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힘드냐 하면 태양이 지구를 불태우는 것만큼 뜨거워요 그래서 불같은 시련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빛 태양으로 함몰되어 가는 건 뜨거운 거예요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거예요 죽어야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신 이 삶이 옳은 거예요 힘들죠 어렵지 않습니까 아 난 행복해 죽겠어 막 이런 사람 있어요 여기서 예수를 믿고 나니까 막 어 행복해 미칠 거 같해 허허허 단 한순간도 슬퍼진 적이 없어 우울한 적이 없어 이런 사람 개인적으로 교무실로 오세요 그 사람은요 허허허 집중관리가 필요한 사람 그렇지 않아요 힘들어요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 차라리 날 좀 떠나주세요 너무 뜨겁습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 입에서 나와야 돼요 아니면 여러분을 여러분은 복음을 삶으로 사는 분이 아니에요 아 우리 예수님도 앗 뜨거워 그러고 가셨는데 우리가 뭔데 날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이 세상을 사냐구 예수님이 앗 뜨거 그러고 갔다니까요 십자가 위에서 그게 무트예요 진리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질수록 여러분은 점점 고립될 것이고 점점 공격을 받을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길이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까지의 삶이 눈 한 번 꿈쩍했더니 여기 왔죠 한 번 더 꿈쩍하면 가는 거예요 그렇게 길지 않아요 잘 견디십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죽어야 산다라는 이 역설을 어찌 세상이 이해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와 반대방향으로 가는 이 기독교를 누가 옳다 인정하겠습니까 하지만 귀가 열린 자들이 있고 눈이 열린 자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길을 가게 될지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구구절절이 말씀을 해 놓으셨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위로하옵소서 진리로 복음으로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063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이다 (완)|작성자 은혜받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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