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64 산 자에게만 들리는 소리 ‘에바다’

은바리라이프 2013. 12. 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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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롬 6 : 10 - 11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아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이게 여격이거든요. 하나님 안에서 산 자,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저에게 산 자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앞서서 나가지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서슬 퍼렇던 5공, 6공 시대에 입에 달고 살던 운동가. 그래서 전 서울대, 이렇게 떠올리면 이 노래 밖에 생각 안 나요. 그 노래 속에서의 산 자는 인간보편의 평등, 평화, 자유, 행복, 공평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행동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이걸 세상이 산 자라고 해요. 사람다운 사람 되기. 그래서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 그러므로 행복한 나라. 이렇게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그런 홍익인간을 향해 달리는 의식 있는 사람들을 이 사회는 산 자라고 불러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 안에서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 그들을 산 자라고 해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가 하늘로 산 자들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간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에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냥 현상들을 통해 진리를 읽어내는 사람들로 살아요. 성경은 그들을 산 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산 자라 부르는 자들을 죽은 자라고 하고, 이 세상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자들을 산 자라고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이 산 자, 산 자에 대해서, 생명이 있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창세기부터 출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 2 : 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서 ‘생령’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하이 네페시 하야’ 예요. 중간에 아담이란 단어가 있지만 하이 네페시 하야 아담, 그게 살아있는 사람. 그걸 산 자라고 그러는 겁니다. 거기에 쓰인 하이라는 단어는 살아있는 이란 뜻도 있지만, 흐르는, 군대. 이런 뜻도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마른 뼈에서 살아난 자들을 군대, 산 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군대라는 말은 이제 살아났으면 어디 가서 열심히 싸워라, 는 그런 말은 아녜요, 그냥 살았다, 라는 말이에요. 주의 군대. 무슨 군대가 이런 오합지졸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하야라는 단어는 동사인데 그 하야 동사의 명사형이 여호와예요. 여호와는 우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세 이름 중 하나예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여호와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구원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여호와예요. 성도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에 이미 암시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산 자의 이름이 하이 네페시 하야예요.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 2잘과 3장에는 여호와 엘로힘, 엘로힘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와요. 그리고 뒤에는 그냥 여호와라는 이름만 나옵니다. 다 달라요. 하나님께서 아파르, 티끌 더스트에 불과한 어떤 존재를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만드실 것이라는 언약이 그 이름들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산 자를 ‘하이 네페쉬 여호와, 하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죄와 구원이라는 그런 도구를 사용해서 설명하시는 게 이 역사이며 성경인 거예요. 그렇다고 그 이름들이 곧 하나님의 실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에게 이름이 왜 필요해요? 이름이라는 건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나를 설명하는 기능을 가진 게 이름이에요. 만일 온 세상의 존재가 나 밖에 없으면 내 이름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나 밖에 없어, 이름이 왜 필요해요? 나는 그냥 나면 돼요. 그런데 창세 이전에는 하나님 홀로 계셨잖아요. 그분의 이름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분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들을 창조하신다는 거고 그 이름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구별을 의도하고 계신다는 거고 또 다른 존재들에게 당신을 ( 이름이라는 게 설명이에요, 말씀이란 뜻이에요. 그 ‘쉠’이란 단어 자체가. 이름) 설명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쉠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진짜 그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설명용으로 제시된 이름일 뿐인 거란 말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주어가 없는 거예요. 창세기 1장 1절로 가보세요.

 

창 1 : 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한글개역성경에는 마치 이 구절의 주어가 하나님, 엘로힘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의 엘로힘은 남성 복수입니다. 그런데 창조하다, 로 번역이 된 바라라는 단어는 단수 동사에요. 그러니까 이 문장의 주어는 단수로 존재하는 어떤 분 인거예요. 엘로힘은 주어가 될 수 없어요. 이 문장을 히브리 원어에 맞게 그대로 직역을 하면 숨어있는 주어, 보이지 않는 어떤 분. 진짜 계신데 유한이 감지할 수 없는 걸 ‘무’라는 글자로 표현한다. 그랬죠? 감지할 수 없는 건 없는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어떤 분, 숨어 있는 주어가 엘로힘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늘들이에요. 거기, 쌍수에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에요. 직역을 하면. 이 말은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몰라요. 그분을. 그 분께서 피조물에게 설명용으로 주어질 엘로힘 하나님으로 하늘과 땅이라는 형태 속에 창조를 하셨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그 분, 없음이라는 그 분은, 무라는 그 분, 그러나 진짜 계신 그분은 유한에게 설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설명용 하나님 엘로힘이 하늘과 땅이라는 것으로, 천지라는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그 말은 하늘과 땅, 천지가 그 하나님을 내용으로 담고 모형으로 창조다 되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을 창조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설명용 하나님이신 엘로힘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으로 시작을 하셨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유한에게는 절대 포착이 안 돼요. 그래서 포착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하늘과 땅으로 주시는 거란 말에요.


태초에라고 번역이 된 그 ‘베레쉬트’, 성경의 첫 단어가 베레쉬트예요. 태초에. 그 베레쉬트는 파자를 하면 히브리에는 원래 자음밖에 없잖아요. ‘베이트’ -집이란 뜻이에요. 성전이란 뜻이에요. 문자에는 다 뜻이 있거든요. 빌딩, 거기서 나온 거예요. 집, 성전. 두 번째 글자에요. 이게. 그리고 ‘레쉬’- 이게 시작. 머리예요. 이 ‘알레프’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 사람, 소. 이런 뜻이거든요. 소를 성경이 많이 재료로 써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쉰- 이게 분석이에요. 되새김, 분석. 그리고 요드- 점처럼 된 거. 이 요드가 편 손. 손으로 펴서 이러게 주다. 그리고 타우- 맨 마지막 자인데 그래서 완성의 표예요. 그래서 히브리어는 알렢부터 타우까지 전부 이렇게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완성으로 끝나요. 글자 자체가.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을 안 믿어요. 히브리어는요 성경을 글자 하나하나 파자를 하잖아요? 고 글자 하나가 다 복음이에요. 은혜. 그리고 고 문장이 복음이고. 성경전체가 또 다 은혜예요. 복음이에요. 그런데 또 이 자연이 그걸 또 그대로 담고 있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어요? 몰라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이 문장을 히브리 원어에 맞게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런 거죠.

보이지 않는 어떤 분께서, 보이지 않는 어떤 분, 그러니까 성전의 시작. 그 머리이신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잘 설명을 하므로 해서 시간안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는 완성의 표. 이게 뭐예요? 성경이잖아요. 이게. 그리고 그게 역사에요. 그래서 천지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를. 그러니까 베레쉬트는 그 자체가 성경이고 그것 자체가 천지이며 역사에요. 그래서 성경이 그 단어로 시작해서 그 단어를 하나하나 풀어주는 게 성경이에요. 


그런데 보이지 않으시는 성전이신 하나님은 이 땅에 보이는 성전을 모형으로 주어서 설명해야 되잖아요. 히브리서에 나오죠? 이거는 다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그 역할을 하늘과 땅이라는 헌상계가 담당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걸 그 안에 설명되어 있는 하나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하는 거고 진짜 그 내용이신 하나님은 몰라요. 이름이 원래 없는 분이니까. 자, 그런 걸 다 축약한 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성막이잖아요. 성전이고.

 

그 땅이라는 단어 ‘에랫츠’도 파자를 하면 하나님 시작, 덫이에요. 덫, 그물.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건지기 위해 그물을 던지기 시작한 곳이 땅이에요. 세상. 여기서 건져 올려 가는 거예요. 그 땅이라는 그물에 모든 존재가 다 걸려 있어요. 그런데 주인이 그 그물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서 나쁜 고기는 타는 불속으로 던지는 거 이게 예수님의 그물 비유입니다. 다 그물에 걸려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그물을 던지면 이 바다, 바다는 항상 위의 물 아랫물 중에서 아랫물을 상징하는 거예요. 바다 속 물고기들은 거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가죠? 난 고기들이 그게 뭔 줄 알고 도망가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 고기들이 그게 뭔지를 알까요? 근데 도망가요. 기가 막히게. 그물을 던지며 는. 아담들은 그 진리의 그물을 그렇게 싫어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죄인들의 속성이에요. 


물고기들의 동력은 꼬리에서 나오는 거 잘 아시죠. 그래서 장어 같은 것도 꼬리를 꼭 그렇게 먹으려고. 이 원수들이 말에요. 바다, 즉 아랫물에 속한 자들은 전부 꼬리의 힘으로 살아요. 그걸 악이라 그래요. 왜? 그 꼬리의 힘이 좋을수록 잘 피해 도망가거든요. 그물을. 진리의 그물을. 반면에 바다 속에서는 물고기의 머리가 별로 쓸모가 없어요. 물고기가 그물을 피해 도망가는데 물고기의 머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냥 맛만 있어요. ‘어두일미’,ㅎ

 

꼬리가 발달하지 않고 머리만 큰 고기는 그물을 던지면 백발백중 다 걸려요. 그러나 그렇게 낚여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는 걸 사람을 낚는다. 그러는 거예요. 거기서 나와야 된다니까요. 아랫물에서. 그걸 빗대어서 성경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 그런 거예요. 뭐 어디 가서 저기 하빠리 이런 거 하지 말라 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니까요. 고지론 주장하는 놈들이 꼭 이거 갖다가 써먹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머리는 누구예요? 예수예요. 예수와 연합된 자가 되어야지. 너희들이 바닷물, 아랫물, 세상에서 너희들의 힘으로 도망 다니다 보면 진리에게 절대 못 걸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아랫물, 땅속의 부정한 물고기들, 이게 다 물고기들이에요. 성경에서 물고기는 다 부정한 거예요. 난 태생. 그건 다산, ‘다그’라는 단어가 다산, 알고 많이 낳는 거. 물고기 알을 얼마나 많이 낳는지 보셨죠? 그거.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완성하시는 건데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인간의 힘을 자랑하겠다고 생육번성 하는 걸 다그라고 해요. 그걸. 그게 죄거든요. 그래서 부정하다 그래요. 난 태생은 다.

 

그런데 모든 짐승들이 다 난 태생이에요, 사실은. 엄마가 아기를 뱃속에 갖고 있다가 양수가 터지죠? 알이 깨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모든 인간을 다 부정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난 태생들은 다시 낳아야 되는 거예요. 부정한 것들은. 그걸 거듭난다, 라고 하는 거라고요. 박혁거세, 주몽, 김수로 얘네만 알에서 낳은 게 아니라 여러분 다 알에서 낳은 거예요. 난 태생이에요. 그건 부정한 거란 말에요. 그런 물고기들, 부정한 것들이 이 바다에서, 저주의 바다에서 꼬리의 힘을 뺏기고 진리의 그물에 걸리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들의 머리가 되어야 꼬리의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한 거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 거예요. 왜? 교회가 완성이 되어야 예수가 머리로 앉을 수 있는데 아직 십자가 이전이니까 예수님이 머리로 앉을 곳이 없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집도 절도 없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여러분 그 당시 에는요 웬만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중산층 이상이었어요. 예수님도 꽤 잘사셨다니까요. 여러분이 괜히 미루어 추측해서. 제자들도 비교적 다들 잘 살았어요. 그래서 부자이야기 할 때 제자들이 그럼 우리도 못 가나? 그런 거예요. 여러분 조그만 조각배에서 그물 던질 수 있어요? 없어요. 그들이 그물을 던졌다는 건 선주였다는 거예요. 그때 당시의 선주는요 굉장한 부자들이었어요. 그런데 그거 버렸다고? 천만의 말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 그랬어요. 그 배 안 버리고 어디에다 장박아 놨다가 그거 다시 가지고 고기 잡으러 간 거라니까. 부자였어요. 그들은요. 뭘 알아야 설교를 하지.

 

그렇게 예수님이 머리예요. 교회의 머리란 말에요. 그리스도 예수로 축약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진리로 머리로 갖고 있는 자만 그 하나님의 그물에 걸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어야 걸리는 거예요. 여기서 말씀이 던져지면 그걸 이해하는 자가 예수를 머리로 갖는 거고 그들이 아들이 되는 거고 진리의 그물에 걸리는 거란 말에요. 그건 구원 받았다, 살았다. 그래요. 


저주의 바다에서는 꼬리로 다니면서 산 것 같지만 그건 죽은 거예요. 왜? 그건 호흡이 안 돼요. 물고기는 기체교환을 하지 호흡을 안 한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에서 산 건 전부 숨을 쉰다. 그래요. 호흡한다. 그래요. 그런데 물고기들 중에 호흡하는 물고기가 있는데 고래, 돌고래 그래서 그걸 포유류라 그러지 물고기라 안 그래요. 어류 아녜요. 그건. 호흡을 하는 건땅의 것이라는 거고. 그걸 숨을 받았다, 생기를 받았다. 성령을 받았다, 말씀을 받았다. 그들이 산 것이다, 바다의 것 아니다, 이런 뜻이라고요.


그렇게 호흡, 생기, 숨, 콧김, 말씀, 진리가 들어가야( 다 똑같은 거)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생령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아랫물인 바다에서 나온 자, 라는 뜻이에요. 거기를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라고도 그러고 세상이라고도 그러고. 거기서 나와야 돼요. 그래야 숨을 쉬어요. 그런데 물고기는 자력으로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기체교화만 하니까 하나님이 누군가가 숨을 줘야 돼요. 이게 천국백성의 창조 메카니즘이라니까요. 그런데 저희들이 저희들 능력으로 살았다 하는 놈들은 뭐냐고요? 도대체.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뭐냐고요? 거기서 못 나온 자들을 그냥 바다의 물고기. 아랫물 속의 부정한 것. 레페쉬, 죽은 자라고 취급을 해요.



에스겔서 37장 9절 보세요.

37 : 9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행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죽은 뼈, 마른 뼈. 더스트. ‘아파르’예요. 가망 없는 것. 거기 네페쉬에 생기, 르와흐, 생기, 호흡, 숨, 바람 ( 다 똑같은 말이에요)그게 들어가니까 그 죽은 뼈가 살아나는데 군대가 돼요. 생령의 그 ‘하야’가 되는 거예요. ‘하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콧김, 생기를 코로 불어넣어주는 그 콧김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

4 : 20 - 우리의 콧김(생기에요) 숨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의 함정에 빠졌으매

 

콧김이 뭐라 그래요? 생기가? 여호아의 기름 부으신 자. 이 단어가 ‘메시아’예요. 이 단어가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 이 콧김은 메시아, 말씀이신 예수, ‘아프 르와흐’예요. 코의 성령. 코의 호흡. 코의 생기. 그거 막으면 죽어요. 그래서 생명은 코에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거죠. 메시아, 그리스도. 그게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는, 그 오미크론 시그마 그게 오에스라는 거기에 붙으면 무조건 어떤 존재거든요. 기름 부음을 받은 어떤 것들인데 그게 존재가 된 게 크리스토스예요.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여러분도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래서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그 숨을 호흡을 불어넣어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바로 그 그리스도, 생기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제자들에게 부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 장 22절

요 20 : 22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 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는데 ‘성령’ 이라고 그러죠? 그래야 사는 거예요. 그게. 이게 오순절날 교회에 성령이 임하는 걸 그 제자에게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거니까, 교회에게 먼저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너희들은, 교회는 살게 될 것이다 를.



요 20 :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자, 생기 성령을 불어 넣으신 다음에 그 호흡을 받아 산 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시는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가서 죄를 사하는 일을 하래요. 용서해 주는 일을 하래요. 생명을 주는 일을 하래요. 숨을 불어넣어 주라는 말이잖아요. 그게. 심지어 예수님은 너희가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할 거라고 했죠? 왜? 그 때는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에는 예수님의 말을, 진리를 아무도 못 알아먹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때에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면 알아듣는 이들이 있다니까요. 그게 더 큰 일이예요. 여기에서 ‘사하다’라고 번역이 된 말이 ‘아피헤미’, 용서하다, 없애버리다, 는 뜻이에요. 없애버리다. 죄를 없애버리는 걸 용서라고 해요.

 

여러분, 죄가 뭡니까? 하나인 진리를 선과 악이라는 걸로 이렇게 쪼개서 이 세상의 것으로 오도하는 걸 죄라 그래요. 한 마디로 말이 없는 상태. 진리가 없는 상태. 이게 ‘나하쉬’, 뱀이라는 단어가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뱀이 나오는 거예요. 진리를 진리로 못 알아먹고 엉뚱한 과녁을 쏘는 상태. 선, 악. 이렇게 엉뚱한 과녁을 쏘는 상태. 이걸 죄라 그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호흡을 받아서, 생명을 받아 산 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산 자. 살아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용서라는 건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어떤 잘못을 사해주라는 말이 아니겠죠?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일을 해요? 용서라는 건 그 죄를 없애버린다는 뜻인데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니까. 그럴 자격도 없고. 용서는 네가 나한테 해코지해서 나 기분 나빠진 거, 이제 기분 안 나빠지도록 노력해볼게, 우리는 이걸 용서라고 생각해요. 속으로는 그냥 꽁하고 있는데 겉으로만 나 기분 안 나빠, 용서 했어. 이런다니까요. 그건 불교인들도, 힌두교인들도, 이슬람교인들도 다 하는 거예요. 꼭 성령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거는.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그것 자체를 없음으로 없애버리는 걸 말해요. 그런데 이미 벌어진 걸 없애버릴 수는 없는 거 아녜요? 방법이 없나요? 있어요. 죄란 법에 의해 규정되는 게 죄예요. 따라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 이미 있던 그것을 아예 없던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거는 이미 벌어졌기 때문에, 법을 없애버리면 돼요. 그러면 죄가 없어져요. 그걸 용서라 그래요. 선과 악의 구조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죄가 사해져요. 그러면 그 죄의 열매인 사망이 물러가죠? 사망은 죄의 삯이니까. 그래서 그걸 산 자라고 부르고 그걸 전해줘서 그를 용서하는 자를 살리는 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콧김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진리가 되면. 그런데 그 일이 언제 일어났어요? 그리스도가 호흡을 성령으로 불어넣자, 말씀을 진리를 불어넣자 그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 영은 뭐라 그랬어요? 요한복음에서?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랬으니까. 거기서 영이 성령이에요. 중성으로 그려져 있잖아요. 말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 그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순간 그는 선과악의 법에서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고 그 즉시 용서를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고것만 하늘에서 인정해 준다는 뜻이에요.


숨, 콧김. 메시아, 그 말씀. 진리에 의해서 선과 악이라는 법에서 벗어나 거기에서 용서를 받고 그 용서를 또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고거, 그것만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용서는 나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은 절대 너를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용서라는 진리를 전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용서받지 못하면. 나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라고 그러죠? 이 말은 일차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 이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살인한 자는 반드시 돌로 때려 죽여야 돼요. 율법에 의하면 그런데 그 구약이 파괴된 게 은혜의 신약시대잖아요. 그 법에 의해 일어났던 심판이 이제는 은혜로 용서되는 시대가 되었다, 라는 선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살인한 자도 은혜로 용서할 수 있어요, 구약에서는 죽여야 돼요. 이게 선이에요. 구약에서는. 율법에 의해 죽여야 된다니까.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그렇게 은혜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용서 받았군요. 이것을 아는 것. 그런데 그 안에는 그 보다 더 깊은 진리가 복선으로 숨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당신을 우리로 묶지요? 예수님이 ‘우리’가 되신 형국이에요.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은 그리스도 예수와 제자들이 우리라는 한 몸으로 묶이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실을 설명하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예수가 성도의 머리로 호흡으로, 생기로, 콧김으로 ‘우리’ 로 연합이 되면 죄인인 육신이 그리스도로 옷 입혀지는 거잖아요.

(그니까 수요일에 빠지지 말고 오시란 말에요. 한 주라도 빠지면 그 다음 주 것을 못 알아듣는다니까요.)

그렇게 소멸되는 거란 말에요. 예수로 우리가 옷 입으면. 그래서 속 옷, 겉 옷,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거란 말에요. 예수님이 겉옷으로 우리에게 입혀줘야. 그래서 속옷을 주면 겉옷,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는 건데 그건 다음에 얘기해 줄게요.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나가 연합이 되면 그를 묶던 법이 사라지고 모든 더러운 것이 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 상태를 용서라고 하는 거예요. 법이 없어진 상태.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그 진리의 현실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어요?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만 이해되기 때문에, 깨달아지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듣는 그 자만이 용서와 관계있는 자가 돼요. 그걸 생기, 호흡, 영 이런 걸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언약도 모르고 우리의 처음자리 인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죽은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복음으로 받아요. 그 전에는 선과 악의 율법 구조 속에서 자신의 행위나 됨됨이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잖아요. 그런데 자기 자신은 자기가 누구보다 잘 알아. 아무리 사람들에게 깨끗한 척, 순결한 척해도 자기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니까요. 그래서 절대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그런데 진리가 깨달아졌어요. 내게서 법이 사라졌구나, 라는 진리가 이해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셨기 때문에 나를 정죄할 법이 없어져 버렸어요. 신호등이 있을 때는 신호위반이 위법이 되지만 신호등 자체가 없어져 버리면 신호위반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이 되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된 거예요. 그 때 나는 과감히 ‘넌 자유야’ 하고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 그 깨달음이 없는 자는 하늘에서 용서한 자가 아니다, 가 이 세상에서 용서해라, 그래야 하늘의 하나님도 너를 사하신다고 얘기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여, 풀어! 하늘에서 푼 자는 이 땅에서 자기를 반드시 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시라니까요. 아니, 용서가 됐다니까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사망과 상관없이 돼버린 나를 용서한 뒤에 그 진리를 다른 이에게 전했을 때, 그 사람이 아! 그런 거야? 그럼 나도 용서 받은 거네? 하고 살아날 때. 죄와 관계없이 되어야 사망과 관계없는 거고, 죄의 삯이니까. 그래야 그를 산 자라로 하니까. 그렇게 살아날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게 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자격이나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론 말씀의 권세는 있지만.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을 용서하고 있는 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런 거지, 뭘 되지도 않는 용서 이런 거 억지로 해보라는 얘기 아니에요. 아니, 모든 것 다 용서해버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금방 지옥 된다니까 여기는. 그런 걸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죄라는 것과 상관이 없어진 사망과 상관없는 성도가 탄생되는 거고 그들이 생명 있는 자, 산 자가 되는 거예요. 그들이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고 있는 산 자들인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이 얘기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작가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아니, 더 나아가서 그들은 살려주는 영, 살려주는 말, 진리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 된 거란 말에요. 우리는 먼지지만,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그것에 감동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걸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세상이 정의해 놓은 죄라는 것과 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이 진리를 알게 됐어요. 악과 선이라는 게 이 진리를 안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거짓과 진실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게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하늘과 땅, 위의 것과 아랫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뭐 그리 가치가 있는 거냐는 말이에요. 선악의 법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는 그게 대단히 큰 거지. 그러나 진리인 하나 안에서 그걸 하나로 묶어내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요. 그래서 진리 안에서는 선과 악이 하나이고, 거짓과 진실이 하나이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하나이고,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한 마디로 진리는 현상계에서 벗어나버리는 힘을 갖고 있단 말에요. 그래서 용서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볼게요. 먼저 여러분에게 여쭤볼게요. 가짜는 뭐고 진짜는 뭐예요? 사람들은 루이비뚱은 가짜고, 루이비똥은 진짜라고 그래요. 그죠? 나이카는 가짜고 나이키는 진짜라고 해요. 그런데 재밌는 거는요. 그 모조인 루이비뚱과 나이카는 진짜인 루이비똥과 나이키를 정확하게 흉내 내고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그냥 다른 상품이지 가짜라고 안 그래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진짜를 그대로 흉내 낸 그걸 가짜라고 하는데 가짜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기에 루이비똥과 나이키는 진짜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까 우리 창세기 1장 1절에서 봤잖아요. 이 세상 모든 보이는 현상계에 있는 것들은 진짜인 그 무로 존재하는 어떤 걸 설명하기 위해 가짜로 모형으로 이 세상에 잠시 생겨난 거란 말에요.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건 다 뭐예요? 가짜! 환상이라고 해요 그래서. 환상이 뭐예요? 잠깐 보였다가 없어지니까 환상이지.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영원한 게 아니라 환상이라 그러는 거예요. 꿈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를.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루이비똥, 나이키도 가짜예요.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요. 보이지 않는 진짜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으로서의 가짜니까. 따라서 이 현상계의 모든 건 다 가짜예요. 심지어 여러분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대고 다니는 성경도 가짜예요. 앞 뒤 다 끊어서 요것만 또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이 진짜예요. 그걸 하나님으로 진리로 못 풀면 그것이 가짜라니까요, 그냥 로고스라니까요 그거는. 그릇이에요. 그것은요. 성경 속에서 진짜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짜를 입고 있는 거고, 가짜를 연구하고 있는 거고, 가짜를 신앙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참과 거짓을 한 번 살펴보죠. 참은 뭐예요? 성경에서 참은 항상 ‘알레떼이아’ 인데 그 단어가 진리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참은 진리밖에 없어요. 진리 아닌 모든 건 다 거짓이에요. 따라서 성경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성경은? 표피적으로만 보는 성경은 전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그 거짓말을 전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라고 하는 거고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말, 진리를 설명하는 자를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거고.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그게 아니라,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게 적그리스도예요. ‘엔타이 크라이스트’. 그러니까 이제 가짜와 거짓은 필요 없는 거예요?

아녜요, 우리는 유한에 있기 때문에 가짜와 거짓이 없으면 진짜를 못 알아먹어요. 그래서 가짜들이 있는 거라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현상계의 가짜와 거짓을 사용하셔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는 거니까.


가짜 성전을 모형으로 주시고 그 안에는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진짜 성전이 메시지로 들어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건 가짜다 그러시고 부수라고 해요. 그런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진리를 읽어 낸 사람들이 있었다니까요. 그들에게 그건 진짜라고요. 생명나무 실과를 설명하기 위해 선악과가 필요하고 진짜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 옛 성전, 율법이라는 성전이 필요한 거고 진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율법, 모세 오경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다고 그게 다 악이며 가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에서 바울의 진술이라고요. 율법이 악하냐? 금방 그전까지는 율법 가지고는 다 죽어! 그래놓고, 율법이 악하냐? 그러잖아요. 그 말이에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걸 성경이 죄라고 하고 악이라고 하지만 그건 진짜 선을 모형하는 그릇이란 말에요. 따라서 그것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그것 자체는 악이 될 수 없는 거란 말에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 밤의 광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달이 있죠? 달. 그런데 그 밤의 광명은 사실 가짜잖아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니까. 달은 해의 빛을 받아서 광명의 행세를 하는 거예요. 흉내 내는 거란 말에요. 밤에 활동하는 가짜 해예요. 그걸 모형이라고 해요. 그렇게 달은 해가 있다는 걸 설명하는 설명용 해란 말에요. 달이 빛나는 걸 보면서 아, 태양이 저렇게 빛나고 있구나, 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달과 해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로 보이는 거예요. 개기일식이나 개기월식 보면 정확하게 달이 해를 가려요. 실지로는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는데 이 땅에서, 일부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주는 거라니까요. 크기가 똑같이 가짜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해를 봐라! 라는 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와 목적이란 말에요.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레프’는 하나님이라는 뜻과 소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랬죠?

그리고 그 문자는 사람이라는 뜻도 가진 문자에요. 거기에는 아주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하나님과 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성경에도 소와 멍에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소는 가짜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이 진짜인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소로만 보면 멸망이다, 를 설명해주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때때로 소로도이야기 하는 거예요.


벳세메스로 법궤, 말씀을 운반하던 두 마리의 소, 하나는 하나님, 하나는 나예요. 교회란 말에요. 말씀을 운반하고 하나님과 함께 제물이 되어 죽어버린. 그리고 말씀만 남는 이야기. 그게 벳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마리 소 이야기한 말에요.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금송아지. 그거 금소예요. 송아지 아녜요. 금 소 이야기.

이런 것들이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소는 하나님을 표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건데 율법주의 하에서는 하나님의 그 표피적인 겉모습인 소로만 보인다는 거예요. 그걸 상징적인 사건으로 그려 놓은 게 금소 사건이에요. 출애굽기 광야에서. 그렇게 그 소라는 모형 안에 담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신을 그저 소로만 인식하는 걸 종교라고 해요. 그래서 고등종교에 소를 그렇게 숭상하는 종교가 많은 거예요.

 

절간의 법당 외벽에 보면 소 그림이 많죠? 심우도예요. 그게. 진리를 찾아가는 열 가지 단계. 소. 진리를 소로 표현한 거예요. 힌두교에서도 소를 숭배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녜요.


지난 수요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진리는 원래 하나님 말씀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 다른 종교들이 표피적으로 이해를 하여, 잘못 오해하여 종교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종교의 경전이 성경과 씽크로율이 아주 높다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그래서 옛 선비들은 소를 타고 유유히 여행하는 기우 행을 즐겨했고 그런 그림이 많은 거예요. 옛날 그림에도. 소타고 다녀요. 말 타고 다니는 그림은 없어요. 노자도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전파하려 하다가 대적들에게 막혀서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소타고 어디로 사라졌습니다. 장자도 항상 제자들에게 소처럼 되라고 무위자연의 도를 설명했어요. 소.


그렇게 고대시대 때부터 사람들은 소와 코끼리가, 인도에서 이게 코끼리가 넘어오면서 소가 되고 이 소와 코끼리는 같은 일을 한다하여 항상 진리를 모형한단 말에요. 그 소와 코끼리를 진리를 설명하는 짐승이라고 생각해서 소와 코끼리를 숭앙하거나 숭배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특히 힌두교에서는 소와 코끼리를 동시에 진리로 섬기면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소와 코끼리의 그림으로 그려 놓기도 해요. 그들의 서책을 보면 이적과 기사를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소들이 하고 다니는 걸로 볼 수 있어요. 요즘도 소에게 기도합니다. 병 고쳐 주세요. 복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모형이었다니까요, 그게.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소로만 보는 인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소 취급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도. 교회가, 99% 이상 다! 법당에 그려진 심우도, 그 수준으로 밖에 이해 안 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을. 힌두교인들보고 저놈들은 어떻게 소를 섬기냐? 이럴 자격 없다니까요. 오늘날 교회가. 상상하다, 라는 말이 코끼리 상자잖아요. 석가모니가 야,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지 마. 다리만 만지면 기둥 같고, 배만 만지면 천장 같고, 꼬리만 만지면 뱀 같고 그건 진리 아니야, 그게 다 모여져야 진리란다. 그래서 상상이란 말을 쓴 거예요. 코끼리를 생각하라. 그런데 진리가 뭔지 모르니까 진짜 엉뚱한 상상만 하는 거라. 소가 뭔지를 생각하라. 그게 성경을 묵상하라는 말이에요. 엉뚱한 거 상상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거. 이런 거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전부 소 같은 하나님 믿고 있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에 세상을 대표하고 상징하던 그 애굽 18왕조의 주신이 하도리라는 암소와 아피스라는 황소였어요. 그 애굽의 주신이.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끄집어내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뭐니? 한 번 만들어봐, 그랬더니 걔네들도 소를 만들어 내더라는 거예요. 애굽과 너희는 똑같은 놈들이 다고 보여준 거예요. 거기서.

애굽도 소, 너희들도 소. 나는 그냥 어디를 가도 음메~, 음메~구나.

 

나를 위한 하나님! 그게 풍요의 신이거든요. 그렇게 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진리이신 하남의 모형이에요. 그건 심판의 대상이며 저주의 대상인 거예요. 그 소는 죽어야 돼요. 그래서 율법의 돌판이 그 앞에서 깨진 거예요.

엘리사가 진리를 쫓아갈 때 소를 태워버리고 먹어버린 거예요. 그처럼 소는 가짜예요. 그러나 진짜의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그릇이에요. 그래서 소도 필요해요. 그러나 그 소는 제물로 죽는 소란 말에요. 그리고 하나님으로 다시 살아야 돼요. 반드시. 진리 안에서. 자 그럼 보잖 말에요. 힌두교인들이 보는 그저 소지만 저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읽습니다. 여러분도 그 소를 보면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읽어요. 진리가 뭔지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는 그 소 속에서 하나님을 상상한단 말에요. 진짜. 그렇다면 그 가짜인 소가 나쁜 겁니까? 아니란 말에요.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이 지금 있는 거예요. 이 가짜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우상이요, 가짜요, 악한 거요, 마귀가 될 수 있지만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일 뿐이에요. 그래서 그 둘은 하나라니까요. 그래서 그걸 용서라고 하는 거예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라니까.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 하는 어떤 것이니까. 그래서 나에게서 선과 악이 다 수용이 되는 거예요. 그게 선악 체계에서 벗어난 거란 말에요. 악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진리 안에서 모든 게 하나로 보일 때, 우리는 가난과 부유, 아름다움과 추함, 어둠과 밝음 이런 것들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어떤 얼굴로 태어나도 괜찮아. 어느 청년이 LA에 있을 때, 목사님, 몇 살 때로 태어나요? 부활하면.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성형수술 전으로 태어나면 큰 일 나는데.ㅎㅎ

후로 부활해야 된대요, 자기는. 그런 게 문제가 안 되는 곳. 거기를 하나님 나라라고 해요.

가슴 철렁 내려앉은 사람 많죠? 지금.

 

그렇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그 둘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하나님 나라’라 그러고, 그게 ‘진리’에요. 그게. 그런데 항상 그렇게 둘로 보는 것. 과녁은 여기 하나만 있는데 항상 둘로 나누어서 이리로 가거나, 선으로 가거나 악으로 가는 걸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르티아’, 그걸 죄라 그래요. 범죄라는 단어도, ‘파라푸토마이’, 옆으로 떨어지다. 옆으로 치우치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씨가 길가 밭에 떨어지면 안 돼요. 길가에 떨어지면 안 돼요. 길에서 치우쳐 떨어졌다는 거죠. 길이라는 진리에 떨어져야 돼요. 아 그런데 씨가 길에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밭에 떨어져야지. 그런데 거기선 그런다니까요. 길가에 떨어지면 안 된다고요. 그 말은 길에 떨어지란 말에요. 그렇게 선이나 악의 한 방향으로 치우쳐 버리는 게 곧 죄예요. 그들이 어떻게 용서를 알 것이며 어떻게 자신을 용서할 것이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어요? 그들이 다 죽은 자들인 거예요.

‘고지 꼭대기’에 돌파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 그거 다 물고기들이에요. 적그리스도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니, 더 욕을 해주고 싶은데 이제는 마음을 잡아 갖고 내가,,

이들이 ‘적그리스도’들이에요.

그렇게 진리는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이 있어요. 그걸 자유라 그러고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하나예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없이 자신들은 존재일 수도 없다는 걸 알아요. ?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래서 우리의 형상, 모양 이런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달이 해라는 실체를 그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처럼 생겼다는 말 아녜요. 무식한 소리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없이 우리는 존재일 수도 없다는 사실도 알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아무 때나 흙으로 버린다 해도, 그게 지옥이잖아요. dl 흙이 흙처럼 그냥 사는 거. 그래서 언제든지 지옥에 흙으로 버리신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진리이신 말씀이 자기에게 들어와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연합시켜 내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도 알아요. 그들 자신이 진리가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그들이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예요. 그래서 진리가 된 성도는 지옥에 안 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자기스스로 지옥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가 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법이 없어졌어요. 느껴져 이게. 자유가 있고 그가 가는 곳에 선악의 법이 사라져요. 그가 가는 곳에 부유와 가난이라는 추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런 이중적, 선과 악의 구분이 없어지고 진리로 모든 게 하나로 아울러 지는데 거기가 왜 안식이 없고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겠냐고요. 우리가 아직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풍성히 못 누려서 그렇지.

 

그러면 그 진리가 된 자가 이제 완성이 되어서 그가 가는 곳이 다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지옥에 갔어요. 거기가 뭐가 돼요? 천국이 된다니까. 그래서 그는 지옥에 못 가는 거예요. 관계없는 자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진리를 못 알아먹고 범에 묶인 상태로 아무리 착한 일 주렁주렁 매달고 가봐야 여러분은 그 법 때문에 흙처럼 살게 되는 거예요. 지옥이에요.여러분이 그렇게 진리로 그 지옥을 깨버리지 못하면 죽어도 천국에 못 가요. 이 땅에서 여러분을 풀어주셔야 돼요. 용서하셔야 돼요. 그게 지옥을 깨버리는 거예요. 땅에서 묶이면 하늘에서도 묶여요. 아니, 이건 뒤집어 말해서 하늘에서 푼 자는 이 땅에서 반드시 자기를 풀어주게 돼 있어요. 자유로 들어가게 돼 있다니까ㅣ요.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 나라로 가라 그러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온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에게로 와야 돼요. 그게 먼저. 어디 저 태양계 밖에 이렇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진리가 깨달아질 때, 그 진리와 함께 성도 안으로 침노해 들어오는 거예요.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건 하나님과 함께 한 멍에를 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멍에는 소가 메는 거라 그랬죠? 소는 누구를 상징한다? 하나님.

 

그 하나님과 히브리 멍에는 항상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지게 돼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 이 멍에는 네가 여리에 끼게 되면 쉽고 가벼워. ?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그래서 쉽고 가볍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곧 나의 이 육적 존재의 가능성을 다 부정하고 멸해버리는 거기 때문에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진 십자가를 멍에라고도 하는 거예요.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게 연합이에요. 그렇게 소가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이렇게 지고 있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단어가 에이레네 라는 단어에요. 원래 문자는 다 상형문자였으니까, 그 단어가 화평, 평화, 평안 이런 뜻이잖아요. 에이레네가.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혼인잔치라 그러고 그 상태를 안식, 화평, 평안이라 그래요. 그래서 내 멍에로 들어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꾸, 내 멍에로 들어와라. 네가 지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들을 용서하는 자라고 하는 거고 화평케 하는 자라고 하는 거고, 하나님과 그들을 중매하는 자라고 하는 거고 마태복음에서 그들을 복 있다고 하는 거예요.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멍에로 여러분을 밀어 넣는 거예요. 저는 지금 자꾸. 그들이 복이 있대요. 그들이 이 땅에서 푸는 자들이에요. 이렇게 분명 진리가 된 성도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어요. 죽는 날까지 죄만 짓고 가는 거? 그건 사기예요. 거짓말. 맡겨진 역할이 있어요. 진리가 되면 진리를 향기로 뿜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살린다니까요. 용서한다니까요. 그렇게 해서 용서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를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하나가 돼요. 성경에도 그 둘의 관계를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요철이 맞는 것처럼 딱 맞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의 신체구조도 그렇게 돼 있는 거예요. 모든 게 진리를 담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사도가 그 진리의 현실을 자신의 말로 반복해서 전달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 1절 보세요.

 

5 : 1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또 다른 멍에가 있어요. 이거 이방인들과 세상 사람들과 같은 멍에지지 말라 이거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못 진다는 뜻이지 그들과 사귀지 말라는 뜻 아닙니다. 여기 종의 멍에가 나와요. 종의 멍에 메지 말라.

 

5 : 2 -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율법이죠)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유익이 없으리라 5 :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 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건. 못 하니까 그건. 할례 받으려거든, 율법을 하나라도 행하려거든 다 지켜야 돼. 다 지켜.)

 

5 : 4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자유가 바로 생명인 거고 그리스도인 거고, 진리인 거고 영인 거고, 말씀인 거고. 따라서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 콧김을, 호흡을 받은 자들이고 생명을 얻은 자들인 것이며 물속에서 나온 자들인 거고, 아랫물에서. 그 말씀을 올바로 전해주는 이들이 화평케 한 자고 용서하는 자들인 거고 매인 것을 푸는 자들인 것이며 영을 전하는 자인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아주 읽기가 쉬워지잖아요. 다 같은 이야기이니까. 그런데 그 말씀의 진리를 소로만 전하게 되면 그게 곧, 말은 말인데 내용은 전달하지 못하고 소리로만 전하는 거니까 그걸 방언이라 그래요. 성경이.

 

어떤 감독이 쓴 방언이라는 책이나 아니면 어떤 목사님이 쓴 방언이란 책이나 다 엉터리에요. 그런 건 다 잊어버리셔도 돼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방언은 그런 게 아니에요. 여기서는 방언이 이런 거라고 해놓고 개혁주의 에서는 아니다, 둘 다 틀렸어요.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잘못된 말. 못 알아듣는 말. 곡해되어진 말. 그걸 설명하기 위해 그건 비진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종교에 방언이 있는 거예요. 중들도 똑같이 방언하고 힌두교인들도 똑같이 방언합니다.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남묘호랑개교도 있어요. 증산교에도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지는 거면 기독교회에만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절에도 방언이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회도 있고 그건 진리가 아닌 모든 것. 기독교도 태반이 진리가 아닌 걸 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거기에도 방언이 있다니까요.

 

못알아듣는 말. 너희들 못 알아듣는구나? 랄랄라. 그런거라니까요. 그래서 기독교에도 방언이 있는 거예요. 그 진리가 아닌 모든 건 다 방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모든 종교에 방언을 심어 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나 그 속엔 진리인 자가 캐치해 낼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방언은 껍데기 뿐인 말. 로고스라고 할 수 있고 예언은 그 방언의 내용인 레마를 예언이고 해요. Fortunetelling 이 아녜요. 앞에 있는 어떤 일을 이렇게 얘기해 주는 거 아니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따라서 모든 방언, 모든 로고스에는 내용이 반드시 담겨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기, 즉 호흡을 줬다는 건 내용을 담은 말, 호흡이 말이라 며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 그랬어요. 호흡, 성령을 줬다는 건 진짜 참 내용인 진리, 말을 줬다는 뜻이잖아요. 말씀을 줬다는 뜻이잖아요. 그 말씀이라는 거 자체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을 유한에게 보이는 걸로 설명하는 게 다 말씀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거지. 말씀이 뭐야? 그런 거 고민하지 마세요. 설명하는 거란 말에요. 하나님을. 우리 수준에 맞게.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래서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니까. 그런데 잘못된 말이 뭐냐고요? 그게 Tongue 글로사, 방언이라고 번역을 한 거라고요 그게. 이 혀에서 말이 나오니까. 모든 소리에는 뜻이 담겨 있어요. 모든 소리에. 지금 애기가 응애 하는데도 뜻이 담겨 있다니까요. 진리로 들어야 돼요. 저거를.ㅎㅎ

 

고린도전서 14 7절 보세요.

 

14 : 7 -( 제 얘기가 아니에요. 성경이 이야기해요) 혹 저나 (피리죠)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겠느냐 14 : 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 하리요14 :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이 혀가 Tongue, 방언이란 단어와 똑같은 단어에요 거기선 방언이라 그러고 여기선 혀라 그러죠?)

 

14 : 9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방언이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로 나오게 되면)그 말하는 걸 어찌 아냐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4 : 10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 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4 :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야만은 외국인이란 뜻이에요, 야만인이 아니에요)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4 :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이 신령한 거를 오늘날 교회는 전부 신비한 어떤 걸로 생각을 해요, 무당들과 뭐가 다르냐고요?) 14 : 12 - 교회에 덕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에 덕 세우라니까 무슨 방언을 하면 덕이 생긴다. 천만의 말씀. 이 덕 세우다. 오이코노마이는 오이코스, 집이죠? 집을 건축하다, 라는 뜻이에요. 교회를 세우는 말을 해야지. 너희가 너희들을 건축하는 말을 하면 안 돼! 가 이 덕이라는 단어로 오역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경이, 이 개역성경이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영어로 번역하고 한자로 번역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국문학자한테 줬다고요. 마지막 감수를 예수도 안 믿는 사람들이 해놨으니까 뭔 말인지 알고 써놨겠냐고요. 그러니까 원어를 연극하지 않으면 성경만 갖고는 진리를 아주 디테일하게 못 알아먹는다니까요.

 

14 : 13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이게 통변하기를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란 말에요. 넌 방언만 하냐? 나는 통변도 하는데. 웃기지들 말라 그러세요. 여러분 참 뜻, 참 뜻이 모든 소리 안에 들어가 있어요. 여기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런데 참 뜻이라는 건, 알레떼이아, 진리라 그랬죠? 그래서 주님도 나는 참 포도나무, 진리 포도나무야, 그랬어요. 예수님이. 진리라고요. 모든 게 진리를 담고 있어요. 심지어 여러분 욕 속에도 진리가 담겨 있어요. 개 자제분,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와 상관없는 이방여인을 향해 개, 라고 불렀죠? 예수님이 욕하셨다니까요. 개라고. 넌 개야. 그렇게 진리와 상관없는 이방의 자식들, 그건 저주받아 마땅한 거예요.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하나님이 은혜로 살리지 않으면 그래서 개 자제분이라는 욕이 있는 거예요. 그건 죽는다, 그래서 욕이에요. 그건 칭찬 아니잖아요.

 

영어에도 많아요. son of the b,,, 뭐 그런 거 있어요. 음녀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음녀의 후손. 우리 계시록에서 봤잖아요. 그건 죽어!

 

성적인 욕들 많죠? Mother 뭐 이런 거. 그게 아비의 침상에 올라간 그 이야기예요. 살인, 간음의 이야기라니까요. 전부 다. 그러니까 욕을 들으면서도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면 그 욕이 나에게 욕이 되겠느냐고요? 그걸 자유라 그래요. 진리를 아는 이들은 그 모슨 소리에서 진리를 읽어내요. 그래서 저는 사실 찬송가 보다는 유행가를 더 많이 불러요. 아니, 찬송가, 요새 새로 나와서 누가 선물해줘서 봤는데 쓰레기들이 더 많이 들어가 있어요. 오히려 사람을 더 미혹하는 차라리 유행가중에 은혜 받는. 진리의 내용을 담은 게 더 많아요.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나그네요 이방인인 나의 삶을 얼마나 잘.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아버지 집을 향해 가는 거잖아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진리를 모르면 하행선으로 가는 거고. 뭐 왜 교인이 뭐 유행가를 불러? 왜 무슨 이상한 영화를 봐? 그런 거 보면서 진리를 깨달으면 뭐가 잘못 됐냐고요? 그런데 단지 믿음 없는 자들이 그냥 그거 갖고 시험에 들까봐 안 하는 거죠. 그래서 바울도 율법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안 해요. ? 그가 진리를 알아들으면 그 다음부터는 아, 내가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우리 선생이 일부러 내 수준에서 그렇게 했구나, 를 알기 때문에 그냥 율법 있는 자처럼 하면 그게 죄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거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유행가 같은 거 안 부르고 그러는 거예요. 저는 미국에서 콘서트를 일 년에 한 번씩 했는데 유행가만 불렀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진의를 못 알아주더라고. 그래서 앞으로 안 하려고 해요. 아이, 어리석은 중생들과 이 땅을 살기가 이렇게 힘드니,,ㅎㅎ 참. 빨리 진리들 되세요. 그럼 자유롭게 좀 뭘 좀 하게. ㅎㅎ

 

그런데 7절을 보면 생명이 없는 어떤 것들이 내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는 피리소리인지, 거문고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를 내는 자가 생명을 가진 자냐? 아닌 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이게요.서리가 중요한 게 아녜요. 그러므로 네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말하는 게 다 허공에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글로싸, 방언. 네 혀가 너의 생명 없음으로 말미암아 방언이라는 어려운 말, 못 알아먹는 말, 생명 없는 말을 하면 그건 열매로 맺혀지지 않고 그건 허공에 던져지는 소리다. 그래서 13장에서도 그러잖아요. 일만 마디 방언을 해도 그건 울리는 괭가리야. 쉬운 말은 그걸 진리로 풀어낸 예언이겠죠? 레마겠죠? 쉬운 말을 하라. 그러는 거예요. 진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방언으로만 말하면 그게 외국어에요. 글로싸가 되는 거죠.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자, 방언이지만 성경을 이야기할 거 아녜요. 로고스를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그걸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통역을 기도하라. 이게 이해되어지고 그 이해된 진리만 전해지게 해주세요, 가 방언하는 자들아, 로고스로 말은 할 줄 아는 자들아. 내용은 모르는 자들아. 이게 네 안에서 통역이 되어 이해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무슨 통변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야 예언을 할 거 아녜요? 그래야 레마를 전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하면 그게 신령한 것이다. 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신령한 것이 뭐예요? 14 1절에도 나오죠? 신령한 것을 구하라. 무슨 성령집회 이런데서 성령을 구하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방언으로 그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통역해서 진리로 받아 들여 그걸 진리로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게 신령한 것을 구하는 거다. 라고 바울이 얘기하잖아요. 여기에. 제 얘기가 아니라. 그걸 근거로 위로 올라가 보세요.

 

고전 14 : 4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덕을 세우다, 이 오이코노미가 건축하다는 뜻이라고 했죠? 방언, 로고스로 말을 전하긴 전해요. 뭐 좋은 이야기는 하는데 그게 레마, 예언이 아닐 때는, 그게 자기는 뭐를 했기 때문에 열매는 안 맺었는데 이게 자기 의로 쌓이게 되면 나를 건축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자기의 덕을 쌓는다, 예요. 내 안에 덕이 쌓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데 그 건축자들은 항상 모퉁이 돌인 예수를 집어 던지는 건축자들이란 말에요. 그건 안 돼는 거죠. 그럼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유익하게 세워진다. 예요. 그게 교회의 덕이 된다는 뜻이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예언으로 통변된 방언. 이것이.

 

성경을, 방언을 소로만 읽고 전하는 자는 자기의 건축물을 세우는 거예요. 엉터리 말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의만 건축하는 꼴이 되고 진리를 전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는 자, 참 성전을 이해하고 참 성전을 설명하는 거니까. , 그게 내가 성전이네요? 이게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란 말에요. 하나하나 벽돌들이 들어오잖아요. 여러분이 육적 성숙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자, 용서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 살리는 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 다음 절에서 난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Better than 예언하기를 원한다. 그러는 거예요. ? 로고스로 말하는 건 다 누구나 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그게 예언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건 네 의로 쌓일 수 있으니까 이게 통역이 되어서 나에게 예언으로 오게 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예언으로, 레마로 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방언하기를 구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어떤 기도원에 가면은 순 개소리들, 왈왈왈 이 소리밖에 안 들리잖아요. 개 소리예요. 그게 뭔 소린지 모르니까. 그게 Tongue 이라니까. 글로싸. 진의를 알고 로고스를 던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 보다 뜻을 알고 전하는 예언 다섯 마디가 낫다고 하는 거예요. 일만 마디 방언도 있어야 되는 거죠. ?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으니까. 성경 안에 진리가 담겨 있으니까. 그러나 그걸 못 알아먹으면 이게 외국어, Tongue 방언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러나 없으면 안 돼요.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 괜찮아. 그러나 그걸 진리로 못 알아먹으면 개 인거예요. 그리고는 그 다음 어구가 이렇게 이어지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통역이 없이 방언만 말하는 자는 예언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고린도서의 이야기는 방언을 해라, 말아라, 이런 얘기에 관심이 없어요. 아예. 진리가 담기지 않은, 뜻도 내용도 모를 외국인의 방언. 그건 말씀도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소리와 글로, 방언으로 로고스를 진리로 전할 때에는 반드시 진리로 통역이 된 상태에서 전해라. 말하는 거예요. 그게 생명 있는 성도니까. ? 그게 생기, 말을 받은 자니까. 그래서 생기, 성령, 말씀, 진리를 받으면 Tongue을 하는 게 아니라 실지로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날 기독교는 거꾸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도 바로 그 방언, 글로싸, 거기도 나와요. 글로싸, 방언 나오죠? 성령이 임하니까 방언이 터졌잖아요. 글로싸와 똑같은 단어가 어디에 나와요? 성령, 불의 혀, Tongue 이 텅이 글로싸에 요. 똑같은 말이에요.

 

인간들의 방언과 진짜 불의 혀, 진짜 하나님의 불에서 나온 그 Tongue 그 말이 대조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 성령이 임했잖아요? 불의 혀처럼. 그렇게 임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요? 15개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이걸 어떻게 번역을 하여 자기가 자기 나라말로 알아듣더라! 바벨론의 저주가, 바벨탑의 저주가 거에서 Tongue으로 갈라졌잖아요? 못 알아듣는 말로. 성령에 의해 거기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저주가 은혜로 회복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구약에서 저주받은 율법, 소로만 읽혀졌던 율법에 의해, 계명에 의해 삼천 명이 소 만들었다가 도륙당한 그 삼천 명이 이 불의 혀, 글로싸, 진짜 글로싸가 와서 이게 통역이 되니까 삼천 명이 살아 올라오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 불의 혀, Tongue을 받아서 예언으로 던졌더니, 설교를 했더니 삼천 명이 살아올라와 교회로, 성전이 건축되더라. 그게 방언의 이야기예요.

 

여러분은 어떤 혀를 갖고 계십니까? 어떤 말을 담고 계세요? 죽이는 혀, 방언입니까? 살리는 혀, 예언, 진리, 영의 말입니까? 야고보서 3 5절 보세요.

 

3 :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이게 방언이란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예요, 글로싸)

 

3 : 5 - 큰 것을 자랑하노라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3 : 6 -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느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는 도다

 

혀는, 말은, 불의 혀여야 되는데 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불의 혀여야 되는데 지옥 불에서 나오는 혀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건 멸망에 쓰이는 거란 말에요. 그건. 예언이 안 된 방언. 로고스, 거기에서만 머물러 있는 거요.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혀를, 말을 표피적 가짜, 소를 진리로 고쳐주는 게 여러 군데 나와요. 마가복음 7 33절 보세요.

 

7 :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귀를 뚫어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에요. 그의 귀가 열리고 허의 맺힌 것이 풀려 곧 말이 분명해지더라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아시겠죠? 말이 분명해지는 게 복이에요. 그게 사는 거란 얘기예요. 이게. 생수이신 예수가 침, 생수를 그의 혀에 대니 묶였던 게 풀리고 말이, 진리가 되어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귀머거리, 벙어리. 그 이야기예요. 진리를 방언으로만 듣는 자들을 귀머거리, 벙어리가 그래요. 못 들으니까 못 말하는 거요. 그걸 예수님이 와서 진리로 고쳐내는 사건이란 말에요. 이것들이 다. 에바다. 열러라! 이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

 

내가 다 통역해서 넣어줄 테니까 제대로 듣고 진리만 말해. 소 이야기 하지 말고 하나님 얘기 해.

 

에바다! 열렸네, 에바다, 눈을 뜨게 하셨네, 가 아니라 귀가 열린 거예요. 무슨 눈을 뜨게 하셨네? 찬양이라고 어디서 다 그냥. 귀가 열리고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법에서 풀려나 나를 용서하소서. 하나님과 이미 같은 멍에를 맨 에이레네, 화평한 상태, 화목제가 이미 드려졌다는 것. 이 자유. 여기서 진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혀, 우리의 말, 우리의 방언을 예언으로 진리로 바꿔주세요. 그것만 복이에요. 분명하게 그 복음만 들으시고 분명하게 그 복음만, 진리만 말하세요. 아직 분명하지 않으면 입 닫고 침묵하세요. 다른 사람 죽이지 말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꼬리를 잘라 버리고 예수라는 머리로 우리를 함몰시켜 냅니다. 하나님, 이것이 복음이고 진리일진대 하나님, 이 세상의 기독교는 나의 꼬리를 더 강화시켜 달라는 그런 엉뚱한 소리를 외쳐대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시대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이 진리의 말씀이 당신이 택한 당신 백성들의 귀에 들려지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당신 백성들의 귀에 오늘도 손가락을 넣어 뚫어주소서. 그래서 그들의 귀에 에바다라는 주님의 외침이 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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