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1. 12:36
http://blog.naver.com/clack891/120208613830
본문 롬 6장 12-14.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놈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아멘.
성경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제 세 아들들이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리고 또 실제로 음악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둘째 아이는 컴퓨터 음악을 벌써 하고 있어요. 그래서 소프트웨어를 깔아서 열심히 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그 아이가 LP로 된 옛날 올드디스크 재즈음반을 꼭 사고 싶다고 그래서 찾고, 찾고 찾다가 청계천 8가에 풍물시장 이라는 데가 있더구먼요. 도깨비 시장이었대요, 옛날에. 거기가 철거되면서 이제 그리로 다 몰려있다, 그래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거기 가는 재미에 아주 그냥 스트레스를 잘 풀고 있습니다. 청계천 5가에 가서 그 시장에서 생선구이집이나 곱창집이나, 돼지껍데기집이나, 닭 한 마리 집. 미국에서 먹던 거 거기에 다 모여 있더구먼요. 먹고 싶었던 거. 그렇게 식사하고 걸어서 거기까지 가면 볼거리가 너무 많아요. 청계천 그거 복개 해놓은 것도 처음 봤어요. 그래서 지난주에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가서 이제 재즈 음반이 뭐 수만 장이 있죠. LP를 요새 안 들으니까 굉장히 많은 중고품이 구비되어 있었어요. 그걸 찾다가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아, 아빠, 아버님 여기에 아버님 음반이 있다는 거예요. 25년 전에 제가 출반했던 음반이 거기에 무려 세장이 있더군요. 그걸 아이가 찾았어요. 25년 만에, 걔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거를. 그것도 중고품 시장에서. 말이 좋아 중고품시장이지 거의 폐품처리장ㅎㅎ
그 중에 하나는 제가 누군가에게 싸인 을 해서 선물로 줬던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거기에다가 갖다가 팔았더군요. 그래서 그거를 아이가 꼭 사야 되겠대요. 자기 음악에 아버님 음악을 넣겠다고. 그런데 더 화나게 하는 건 그 아줌마가 천원에 주겠다는 거예요. ㅎ 그래서, 난 누가 싸게 준다. 그랬을 때 화가 나보기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아줌마한테 그랬어요. ‘아줌마, 값을 제 값을 받아야지 왜 그걸 천원에 주느냐고. 말만 잘하면 세 장을 천원에 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거를 사갖고 왔어요. 사갖고 오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저는 굉장히, 그 음반을 내고,, 제가 작사 작곡을 다 하거든요. 그래서 그 곡을 하나 만들 때, 우리 베이스 치는 우리 형제도 지금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알겠지만, 그건 자기 자식 같은 거예요. 음악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고걸 하나 만들어서(돈도 많이 들어요), 사인을 해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줬을 땐, 야, 내가 이렇게 땀을 흘려서 이렇게 음반하나 만들었어. 잘 들어와. 라고 줬을 텐데 아니, 껍데기도 안 뜯고 그거를, 그러니까 듣지도 않았다는 거죠? 그거를 청계천에 갖다 팔아먹었다는 걸 생각하니까 야, 선물을 이렇게 가치 없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나? 화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복음, 진리를 선물로 주세요. 그런데 이 세상, 인간들은 그걸 너무나 가치 없이 여겨요. 그러니까, 그 말씀이, 선물이 가치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데나 아무런 자기가 어떤 그 형식적인 의무만 행할 수 있는 그런 데에 가서 그런 어떤 의무사항만 행하고 하면 그게 예배이줄 알아요. 그러니까 진지하지도 않고 절실하지도 않은 거죠? 가치 없는 거예요. 언제든지 가치 없이 버릴 수도 있어요. 여러분 진리라는 건 생명입니다. 영은, 말은 생명이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걸 진짜 생명으로 여기는 이들이 그걸 그렇게 소홀히 가치 없이 여길까요? 지금 이 시간에 이 서울시내에,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교회, 또 큰 교회, 시설 잘 되어 있는 교회가 많습니까? 그런데 여기 와서 이렇게 더운데, 무더운데 바닥에 앉아가지고 여러분이 이렇게 이런 절절하게 진리를 사모하는 모습들을 좀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좀 나타내 주셔야 돼요. 이제는 좀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좀 듭니다.
지금부터 한 십 오 년 전에 제가 봤던 영화 중에 열세 번째 전사라는 영화가 있어요. 마이클 크라이튼이 1997년에 발표한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 라는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인데요.
서기 한 10 세기쯤의 바이킹족의 전사들과 진짜 시체들을 먹었던 식인 족 웬돌 족과의 전투를 그린 그런 영화죠.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오마샤리프가 아주 열연을 했던 그런 영화입니다. 바그다드의 아랍의 시인인 아토니오 반데라스가 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이킹 족의 땅으로 유배를 가서 그 바이킹족의 전사가 되어, 열세 번째 전사가 되어 (열세 번째 사도처럼) 웬돌족을 격파하는 그런 액션 영화에요. 그런데 그 영화 속에 아주 뜻깊은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바이킹 족의 전사가 되어서 웬돌 족을 치러가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잠시 쉬면서 땅에다 뭔가를 적어요. 시인이니까 시를 적었겠죠? 뭔가 적는데 바이킹 전사들은 그게 뭔지를 몰라요. 글자가 없었으니까. 쟤가 뭘 하는 거지? 뭘 그리는 거지? 뭘 그리기는 그리는데 뭐 자기들이 그리던 그런 형상이 있는 그런 게 아닌 거예요. 뭘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묻습니다. 이게 뭐하는 거야? 이게 글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바이킹 전사들이 그럽니다. 아니 너는 소리도 그릴 줄 알아? 그래요. 너는 소리도 그릴 줄 알아?
글이라는 거, 문자라는 건. 소리를 그린 거예요.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면 글에서 그림이 되는 거예요. 그 소리가 가진 그 내용을 중심으로 그 그림을 축약하면 ‘글’이 돼요. 단순히 소리만을 그린 걸 표음문자라 그러고, 우리 한글이 표음문자에요 대표적인 소리문자입니다. 그래서 소리문자를 갖고 뜻을 설명하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죠? 그 의미까지 함께 그린 걸 표의문자라 그러죠. 굳이 분류하자면 성경은 표의문자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리가 없으신 분이에요. 소리가 없는 분, 그분의 것을 그리기 위해선 그분의 뜻과 마음을 그려야 되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이걸 소리로 읽어버리면 여러분은 그걸 잘 못 읽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 그 마음 그걸 아가페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해요. 그걸 그려 놓은 게 말씀이라 그래요. 뜻을 기린 것.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문자를 준 게 시내 산, 시내 산 에서에요. 이 세상 모든 문자의 기원이 애급문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애급으로 들여보낸 거예요. 왜? 말을 주려고요. 말씀을 주려고. 문자를 주려고 그 문자가 유일하게 있었던 애급으로 보낸 거예요. 모세는 애급의 왕자로서 그 문자를 알고 있어요. 당시에는 왕족이나 제사장 급에서만 문자를 알았어요. 그러나 그 애급 문자는 상향문자, 신에게 바치는 문자였어요. 그래서 평상 문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문자에요. 한 마디로 형상은 있으되 그걸 알고 익히고 있는 사람도 뜻을 몰랐어요. 그냥 신에게만 바치는 거예요. 글이라는 거, 문자라는 거, 말이라는 거는. 하나님께서 그 문자를 사용하셔서 모세에게 계명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깜짝 놀란 거죠. 모세는 왕궁에서 신에게 드려지는 말, 신에게 드려지는 글만 보아왔는데 신이 자기에게 글을 준 거예요. 말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깜짝 놀란 거죠.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는 그 문자의 형태는 왕궁에서 익혀서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몰랐어요. 하나님은 사십 일간 그를 산 위에 앉혀놓고 그 의미를 가르쳐요. 그럼에도 모세는 그 진의를 다 깨닫지 못해요.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말이 그 안으로 들어와야 돼요. 그게 구약의 새 언약이에요. 말이 들어와야 돼요. 출애굽기 34장 29절 보세요.
출 34 :29 -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의 말씀하셨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하는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서신이 다 곡해되게 되어있어요. 언뜻 보면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처럼 보이죠?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하면 여러분의 얼굴에 이렇게 광채가 나나요? 어떠세요? 똑같은 거예요. 그 하나님이랑 우리가 지금 만나는 하나님이랑 다른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은 기도, 수시로 하나님과 대화한다면서요? 그럼 여러분의 얼굴에 광채가 납니까? 이 구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광채가 나는 건 모세의 얼굴이 아니라 모세가 들고 있는 증거 판이에요. 얼굴 꺼풀이라고 번역이 된 ‘오르’, ‘파님’이라는 그 단어, 그 ‘파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겉으로 나타난 걸 ‘파님’이라 그래요. ‘파님’이라 그러고 ‘오르’가 표면을 나타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나타난 것으로 준 거. 그거를 ‘오르 파님’이라 그래요. 단순히 사람의 얼굴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란 말에요.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얼굴에 사용되는 단어에요. 내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얼굴을 뵈옵나니, 이럴 때 쓰는 말.
하나님이 얼굴이 어디 있어요? 영인데. 그건 하나님의 나타나심, 말씀, 진리의 말씀 그걸 내가 직면했다. 깨달았다. 이런 뜻이지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영은 보이지가 않아요. 소리도 없단 말에요. 거기 등장하는 게 ‘파님’이란 말에요. 그걸 그냥 얼굴이라고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체. 그걸 보이는 것으로 나타낸 거.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이걸 보이는 것으로 나타낸 거. 그게 뭐예요? 계명, 율법, 돌 판이란 말에요. 고걸 ‘오르 파님’이라 그래요. 거기에서 빛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광채가 나다‘라는 단어도 단순히 ’빛이 나다‘라는 단어가 아니라 뿔을 내밀다, 뿔을 건네주다. 라는 의미예요. 뿔은 당연히 제단의 네 뿔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거 잡으면 사는 거죠? 뭐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그 뿔을 말씀, 진리로 설명한단 말에요. 그걸 잡으면 사는 거예요. 진리를 잡으면 사는 거예요. 뿔을 건네주다. 이런 뜻이란 말에요.
모세가 하나님의 그 ‘파님’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증거 판, 그 율법이 뿔을 건네주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진리가 있더라는 뜻이에요. 모세의 얼굴에서 그냥 광채가 막 났다, 이런 뜻이 아니라. 그러나 선악구조 아래에서의 아담들은 그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죠? 그래서 지성소가 막혀있었던 거예요. 못 가요. 못 들어갑니다. 모세도 그 뿔을 감지하지 못했어요. 그 광채를 깨닫지 못했더라, 그래요. 자기 얼굴에 빛이 나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깨닫지 못했더라. ‘야다’라 그래요. 아론과 이스라엘도 그 진리에 가까이 가지 못했어요. 아론은 누구? 제사장. 율법은 가까이 못 가요. 그게 30절이에요. 그런데 모세가 그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한다. 그래요. ‘다바르’에요. ‘다바르’. ‘말하다’, 말을 하자 그들이 진리로 가까이 와요. 보세요. 31절.
출 34 :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초청하다 예요, ‘카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초청할 때 쓰는 단어를 여기에다 쓴단 말에요.) 아론과 모든 회중의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러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이 단어도 사실은 함께 눕다, 하나가 되다, 라는 뜻이에요, 함께 누우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니까 하나가 되더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른 말씀을 다 그들에게 말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진리를 설명해줬을 거 아니에요? 문자를 처음으로 줬으니까. 그걸 사십 일간 설명해준 걸 다 말하고, 그래요. 다 말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죠, 또?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겠어요? 그걸 가린 거예요. 그 말. 그 계명에 적혀있는 걸 가린 거란 말에요. 그게 ‘오르 파님’ 이예요.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니까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냥 얼굴이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자기 얼굴. 얼굴이 뭐예요? ‘얼’, ‘영’ ‘굴’, ‘꼴’ 얼의 꼴, 얼의 나타난 게 얼굴이란 말에요. 원래 얼굴의 뜻이. 이게 아니란 말에요. 이거.
자,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로 전할 때는 계명에서, 율법에서 수건이 걷혀요. 진리가 말해지니까. 그런데 그게 진리로 말해지지 않고 그냥 ‘파님’으로 존재할 때는 수건으로 가려져 있는 거예요.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그 가려진 거를 그대로 보고, 이게 율법이야? 이게 말씀이야? 그 수건이 덮힌 채로 보는 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걸 벗기지 못하고. 이해가 안 가면 여러분, 여러 번 들으셔야 돼요. 이 개념이 확실치 않으면 여러분은 만날 성경을 허투루만 보게 돼요. 곡해하게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
그 율법, 표피적 율법의 개념은 곧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게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는 거예요. 사라질 거니까. 그 율법은 진리로 비견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액면 그대로 수건이 덮여 있는 상태로 인식해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이라는 것 자체가. 따라서 그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할 때는 수건이 벗겨지게 되는 거고, 여러분은 지금 수건이 벗겨진 진리를 받는 거죠. 그 율법 자체로 ’파님‘의 상태로 있을 때는 수건으로 가려진 거예요. 그래서 이거 해, 저거 해,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이렇게 가려진 상태로, 껍데기로만 보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하나님께서 그 돌 판을 덮개 속에 감추어 두라고 하시고는 누구라도 거기 들어가면 다 죽인다! 그랬어요. 만지기만 해, 다 죽인다! 그랬어요. 아니, 줬으면 그걸 열심히 가르쳐서 공부하라고 그래야지 가려 놓고 상자 안에 넣어놓고 만지면 다 죽인다! 그랬단 말에요. 왜? 사람이 하나님이 진리를 주지 않았는데 자기 힘과 노력과 지혜로 그리로 가까이 가게 되면 그게 곧 선악과요 죽음이란 말에요. 가려 놓는 거예요. 그 형국을 바울이 이렇게 설명을 해요. 고린도후서 3장 13절 보세요.
고후 3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장차 없어질 게 뭐예요? 율법이잖아요. 그걸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거기에만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건 아니니까)
13-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보세요. 출애굽기 34잘을 잘못 이해하니까 지금 고린도후서도 이렇게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얼굴을 가린 걸로. 그죠?
고후 3 :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 보세요, 일관성을 갖고 잘 보시란 말에요.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어디에서? 구약에서, 율법에서)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뭐예요? 큐리오스는? 그리스도라고 번역을 해주잖아요. 성경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에서 주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리스도라고 바꿔서 읽으셔야 돼요. 그리스도.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그리스도는? 뭐예요?) 영이시니 ( 영은 뭐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말, 생명, 성령) 주는 (큐리오스, 그리스도는 영, 말, 생명이시니) 주의 말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 보세요. 여기서는 우리의 얼굴을 또 수건이라 그래요. 일관성이 없잖아요. 아니란 말에요. 수건이 벗어진 것으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수건은 휘장이란 단어거든요. 휘장, 세수하고 얼굴 닦는 그런 수건이 아니라 휘장이라는 거예요. 그 휘장이 ‘파님’, ‘프로소폰’, 여기서는 그 얼굴을 프로소폰이라고 했는데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프로소폰이에요. 그 표면 나타난 것. 이걸 휘장이 덮고 있어요. 왜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여기서 ‘장차 없어질’ 이라고 번역이 된 ‘카탈게오’는요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왔는지 아느냐? 라고 했을 때, 그죠? 그걸 사도 바울이 율법은 폐하여지고 라고 얘기할 때 그 단어에요. 율법이 폐하여 지다. 그러니까 장차 페하여 질 것을 고걸 주목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휘장으로 가려 놓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를 선악과를 따 먹은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가려 놓은 거는 은혜라니까요. 그런데 어떤 계명인가 하면 ‘프로소폰’, 얼굴. ‘프로소폰’으로서의 율법이요. 계명이요. 그건 뭐예요? 표피적인 이해. 그 율법. 그냥 문자로서의 율법. 그걸 이야기하는 거죠. 고걸 가리는 거예요. 그건 휘장으로 가려져 있어야 돼요. 선악과가 무엇이지를 알 때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거거든요. 그것이. 선악과 생명나무 실과, 다른 거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나무 하나 서 있어요. 단수로 쓰여 있어요. 계속 단수, 단수, 단수에요. 하나인데 그걸 선악으로 보게 되면 그건 죽음의 나무예요. 먹으면 죽어요. 그런데 아, 이게 뭔지를 알게 되면 그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란 말에요. 그것이. 그것처럼 율법이 뭔지를 알면, 그러니까 그 율법을 그대로,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해서,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이해를 해서 그것에 묶여 버리면 죽음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알게 됐을 때 그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잖아요. 고게 가려져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 그 진리가 진짜 가치잖아요. 그래서 가려놓는 거란 말에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인간들이 가장 먼저 하려고 하는 게 뭐였어요? 손을 뻗어 따 먹는 거. 요걸 탐심이라고 한다. 그랬죠? 그거는 안 돼요. 그래서 가려야 되는 거예요.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수건으로 가려진 율법을 그 가려진 대로만 받더라, 그래요. 사도 바울이. 14절을 보시면 그 휘장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 그래요. 그리고는 그게 구약을 덮고 있다. 구약을 덮고 있다. 그런데 주님께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면, 그게 ‘에피스트래포’라는 단어인데요. 그건 완전히 개종하다, 라는 뜻이에요. 개종하다. 오늘날 기독교는 개종이 필요해요. 수선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개종을 하면 그 휘장이 벗겨지고 지성소의 실체가 훤히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게 16절이에요. 그리고는 17절에서 그 ‘큐리오스’가 영, 말이다. 라고 이제 설명해주는 거예요. 18절을 보시면요 설상가상으로 그 수건이 모세의 얼굴도 아니고 우리의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해요. 아니에요. 제가, 그 18절을 떠 올려주세요. 그걸 헬라어 원어 그대로 한 번 직역을 해드릴게요. 그게 무슨 말인지. 뒤로부터 갑니다.
주의 영은 나타난 것을 영광으로 바꾸어 냅니다. 18절 마지막 부분 보세요.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러죠? 그게 주의 영.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에 의해,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그 나타난 것, 보이지 않는 게 이렇게 겉으로, 특히 하나님께서 겉으로 드러난 걸 ‘독사’ 영광이라고 하잖아요. 그걸 ‘프로소폰’이라 그래요. 겉으로만 나타난, 그것만 보면 그걸 ‘프로소폰’이라 그러고 그게 하나님 것일 때 그걸 영광이라 그래요. ‘독사’ 영광. 주의 영, 말씀은 나타난 것을 영광으로 바꾸어 냅니다. 그건 그 말씀, 말에 의해, 진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난, 반영이 된 이런 뜻이에요. 그리스도의 형상인.
그 ‘카토트리조마이’를 거울이라도 번역을 해가지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게 해놨는데 그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영이 된, 나타나 있는 그 모든 영광, 그 영과 ‘독사’와 그 프로소폰‘이 그 말에 의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 열리다, 해석되다, 깨달아지다는 말이란 말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언젠가는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표피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그 말씀에 의해 그 휘장이 열리게 되면 그 그리스도의 형상, 그 진리를,(진리가 나타난 그 영광, 그 말이 그걸 여는 거기 때문에, 말씀이 여는 거기 때문에)그 영광을, 그리스도의 그 영광이 반영이 된 그 실체로 보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진리가 되면 성경을 덮고 있는 휘장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보이게 된다는 거예요. 활자가 아니가.
여러분이 그 내용을 모르고 그 활자로 큐티 만날 해봐야 아무소용 없어요. 한 자를 읽더라도 그걸 그리스도 예수라는 진리로 해석을 할 때, 그게 여러분 것에요. 그게 진짜 가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수건을 벗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아나칼립토라는 단어는요 아나가 ‘반대’니까 그 칼립토라는 단어에다가 이제 접두어를 붙인 거잖아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제가 찾아 드리면 여러분이 조금 이해가 쉬울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3절 보세요.
고후 4: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요게 칼립토예요. 여기에다가 아나칼립토, 아나를 붙이면 수건을 벗다 예요. 그러니까 수건은 어디를 덮고 있는 거였다? 말씀을 덮고 있는 거예요. 모세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원래 우리 모두에게 다 가려져 있던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를 받은 이들에게만 열려지는 거. 그리고는 그들만 그래, 이거야? 이런 거야? 라고 하고 있고, 그걸 모르는 대다수의 (우리 수요일에 찾아봤죠?) 대부분이, 그것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열려 있는 자들을 가리켜서 야 참, 지들만 예수 믿어? 이렇게 얘기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 점 점 얘기를 안 하게 되는 거죠. 상대를 안 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데나 가서 함부로 말하기도 싫어요. 어차피 이해 못할 거니까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여전히 법으로만 보는 이들은 수건이 덮인 엉뚱한 말씀을 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 수건은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씀으로만 벗겨지는 거예요. 그게 벗겨지면 성경이 절대 법으로 안 보여요. 나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런 것으로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모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문자를 받았어요. 그걸 율법이라 그럽니다. 크게 포괄적으로 성경이라고 해도 돼요. 그런데 그 글자는 아무도 모르는 글자였어요. 모세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 그러느냐 하면 여호수아에게 내가 한 말을 외워 들리라, 그래요. 자꾸 말해줘서 외우게 하라 그래요. 왜? 모르니까 문자를요. 외워 들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자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선악구조속의 인간의 마음에 담길 수 없는 하늘의 진리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 그래요. 여호와라는 그 단어는요 그건 진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건 하야 동사에서 나온 건데 그걸 그냥 파자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쓰자’가 ‘여호와’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는 그 분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면 성립이 안 돼요.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네 말을 통하여 내말, 진리를 설명할거야, 이걸 ‘여호와’라 그래요.
히브리어가요. 그래서 모세에게 나타나면 하나님이 ‘여호와’라 그래요. 자기를.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모세가 그러죠? 난 말이 없는데요. 말이 어눌한데요.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걱정하지 마. 그런 그림이 괜히 나와 있는 게 아니에요. 모세가 말이 굉장히 어눌했었나보다 이런 거를 우리한테 알라고 쓴 게 아니란 말에요.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 밖에 없었다. 그랬죠? 모음의 역할을 하는 자음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나중에 생긴 거예요. 히브리어 모음은 AD 7세기 경 히브리 학자들이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모음을 만들어서 붙인 거예요. 원래 모음이 없어요. 모음이 없으면 문자는 읽을 수가 없어요. 기억, 이것도 역시 모음을 넣어서 우리가 읽는 거죠? 그리고 띄어쓰기가 없었거든요. 그러면 성경이라는 건 원래 처음 주어진 성경이라는 건 처음부터 자음만 다닥, 다닥, 다닥 붙어서 한 덩어리의 자음이었어요. 그러면 읽을 수가 없어요. 모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건 소리로 읽으라고 준 게 아니라 그 하나하나 하나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갖고 나를 알아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불가능이에요. 도저히. 어떻게 알아먹어요, 그거를.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면. 그냥 한 덩어리에요. 띄어쓰기도 없고 모음도 없고 읽을 수도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줬다니까요.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해요?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이게 진리야. 이렇게.
하나님에게는 소리가 없다 그랬습니다. 뜻이 있어요. 마음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그분의 실체 그걸 그려준 게 성경이라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걸 알아먹어야지 이걸 여러분에게 어떤 걸 요구하고 금지하는 그런 법으로 읽으시면 절대 안 돼요. 그리고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방법론을 여기서 찾으려고 해도 안 돼요. 처세술 이런 거 적혀 있는 거 아니라 ‘하나님’이 적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배우셨느냐고요? 여태까지, 교회에서. 그거 배우셨어요? 여태까지? 그런데도 불만이 없어 다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게 휘장으로 감춰뒀다고 하는데 다들 그걸 보고 있다 그래요. 아니야, 난보여. 야, 성전이 저기 저렇게 있는데? 껍데기만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보고 뭐라 그래요?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에요. 너희들 소경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러잖아요. 그게 진짜 소경이야. 그래요. 여러분 그런데 그 휘장이 뭔지 아세요? 뭘로 그걸 가리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휘장이 뭐예요? 히브리서 10장 19절 보세요.
히 10 : 19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그리스도의 육체니라 (아, 대한민국의 교회여! 참, 어디부터 어떻게 가야할지?)
그러면 성경을, 율법을 그리스도의 육체, 예수로 가려놓았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찢겨져야 지성소가 보인대요. 그게 찢겨져야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죠? 그러면 율법, 성경, 진리를 예수로 가려놓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찢겨져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죄가 사해진다, 단순히 그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섬김의 대상인 우리는 어떤 걸주면 금방 그걸 내 섬김의 대상, 우상으로 끌어당기는 재주가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아담들이. 너희들이 갖고 있는 그 우상으로, 하나님이 그러죠?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가 십계명의 일 계명이에요. 나를 우상으로,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나는 나야! I am who I am. 그런데 그 예수를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이신 그 하나님으로 보고 그걸 내 마음에 새기는 게 아니라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런 내 섬김의 대상으로 그리고 감동 받는 대상으로 내가 칭찬하는 대상으로 갖고 있을 때. 여러분은 지성소를 못 본다는 뜻이에요.
그걸 찢었을 때, 그 예수가 죽었을 때 모든 종교인들의 그 종교심이라는 게 찢어질 때 비로소 진리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예수로 가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바울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요, 거기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예수에게 걸려 넘어진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에요. 예수 믿는 거? 진리를 깨닫는 게 쉽지 않아요. 여러분. 그 예수 섬김의 대상인 예수가 찢어져야 비로소 내가 그 진리, 지성소를 볼 수 있다는 걸 내가 알게 되면 그 예수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곧 죽어야 할 대상이 되는 거예요. 빨리 죽으세요. 그래서 향유 옥합 깬 여자가 그 모형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주님, 예수님 당신이 빨리 죽어야 일곱 귀신 들렸던 나, 일곱 귀신 들렸다니까 그 일곱 귀신 들렸던 그 여자가 그 마리아 맞아요? 그러는데 우리가 다 일곱 귀신 들린 사람이었어요. 일곱이란 단어는 완전한 귀신 들린 자. 마리아는 다 그거예요. 마라라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주변에 전부 마리아만 있었던 거예요. 딴 여자는? 이름 안 써요. 그냥 그 여자 그러지. 다 일곱 귀신 들렸던 그 여자, 다 모형들이란 말에요. 그 마라가,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거예요. 쓴 물은 뭐? 나쁜 말. 단 물은? 진리가 되는 거예요. 당신이 빨리 죽어야 마라인 내가 나오미가 되는 겁니다. 그게 향유 옥합 깨서 부은 사건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날 그런 Passion of the Christ 같은 영화 보면서 내가 저기 있었으면 저걸 꼭 막았을 텐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빨리 죽으셔야 돼요. 이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빨리 죽으세요. 가서.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의 자손을 주셨죠? 그게 누구예요? 이삭, 그런데 이삭을 주기 전에 하나님이 약속의 후손을 먼저 약속하셨단 말에요. 그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교회의 대표잖아요. 내가 너를 내 후손, 내 아들, 내 약속의 후손으로 만들 거야, 라는 말이었는데 아브라함이 못 알아먹으니까, 아들? 아들을 주시려나? 그러니까 그래 네 수준으로 내가 설명해줄게 그러면서 약속의 후손을 모형 하는 이삭을 준 거잖아요. 그러면 그 이삭이 의미하는 바가 뭔 줄 알았으면 이 모형은 나에게 소중한 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죽여라! 그랬더니 네, 하고 휘파람 불고 간 거라니까요.
마찬가지에요. 예수, 약속의 후손이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러나 그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그렇게 죽이셨는지 그 내용, 그 진리를 내가 알 때, 그건 필요 없는 거예요. 그 십자가 자체도 야, 어떻게 나를? 나의 죄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 가 아니라, 아, 나라는 존재라는 건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측에서 시작하여 오나성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를 깨달았으면 그거는 가치가 없는 거라니까요. 역사 속 그러는. 그걸 예수를 죽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그 의미도 모르는 채, 십자가를 그냥 붙들고 앉아 있으면서 야~ 어떻게 나를 위해 그런 일이 벌어졌지? 이렇게 되면 그건 내 밖에 있는 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대부분 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동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가면 금방 없어져 그건. 여러분 내 감정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거.
예수님은 율법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율법 아래 주신 말씀이에요.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이신 예수를 끌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율법이라는 껍질로써의 예수이고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오신 그 분이 내용이란 말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라고 편하게 부를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지 십자가 지기 이전의 그 예수, 죽어야 할 예수를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초점을 둬야지 예수를 “믿는” 것에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 는 게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게 뭐냐고요? 왜 성경이 그리스도들,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왜 복수로 자주 그렇게 쓴다고 했어요? 그게 그리스도가 된 교회, 그리스도라는 게 다른 말이 아니에요. 기름부음 받은 자, 기름은 뭐예요? 성경에서? 말씀! 진리를 갖고 있는 자, 품고 있는 자를 기름부음 받았다 그래요. 그걸 그리스도라 그래요. 그 진리를 다른 이에게 전해줘서 그들이 또 그 진리로 살아나는 일을 하는 게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들이라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여야지 예수를 섬기고 믿는 것이, 거기에 그 수준에 멈춰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으니까 그냥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거지에만 몰두하는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제가 이제 율법주의나 유대주의를 부정하는 그 단계에서 이제 한 단계 더 올라간 거예요. 제가 초창기에 에베소서 요한복음 때는 구약으로 설교했어요. 똑바로 사세요, 신앙이라는 건삶입니다. 복 받고 신비한 거 보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의 진행 그 절차대로 설교를 한 거죠. 그랬어요. 왜? 그 때는 LA를 비롯해서 전 세계가 거의 기복주의나 신비주의 실용주의에 다 빠져있었거든요. 그게 무슨 놈의 기독교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니에요. 기독교는 존재의 문제이지 그렇게 내가 뭘 해서 복 받고 이런 거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비유, 창세기, 사도행전에서는 그래 그렇게 사니까 진짜 살아지던가요? 하고 물은 거예요. 그렇게 사니까 진짜 살아져요? 애를 써보긴 써보는데 한 방에 무너지고, 한 방에 무너지고 계속 제자리야. 그러면 이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게 로마서 산상수훈이에요. 이제 그 단계로 제가 지금 올라간 거거든요. 여기가 끝이에요. 어떻게 해야 돼요? 아, 내가 진리가 되어야 돼요. 그게 내 마음에 법이 새겨졌다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4장 1절 보세요.
마24 : 1-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면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이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예수님께서 모형으로서의 옛 성전에서 나오세요. 예수님은 바로 옛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죠? 그래서 나를 부수어라 내가 사흘 만 ( 세 번째 것으로) 일으키리라 그랬어요. 부활하리라. 내가 세 번째 성전,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 두 번째 예수, 세 번째가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를 품은 바로 그게 성전. 그래서 우리를 사도 바울이 너희들은 성령이 거하는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이게 세 번째 성전이거든요.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모습으로 부수어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옛 성전에만 관심이 있어요.
수건이 덮여 있는 그거만 보고 있는 거예요. 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거든요. 율법주의는 항상 번쩍번쩍 빛나요. 사람들이 존경하는 일들을 한단 말에요. 얼마 전에 어떤 스님 나와서 인도에 학교 짓고 뭐 도와주고 이러는 거 나오는데 사람들 다 감동하더라고요. 진리가 없이 그렇게 행하는 걸 옛 성전이라 그래요. 자기 의라 그래요.
주님께서 말씀하세요. 어찌하여 그 진의를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고 있느냐? 2절이에요. 어떻게 이 모든 걸 보지 못하니? 그래요. 보고서 멋지죠? 그러는데 주님은 너희들 어떻게 이 모든 걸 못 보니? 이 모든 게 다 진리인데. 어떻게 이걸 못 봐? 내가 소리가 없어. 나타난 것으로 준 게 성막 성전 아니냐? 그럼 이걸 보고 진리를 깨달아야지. 어떻게 ‘성전’만 보고 있어? 이게 그렇게 멋있다고 할 수 있어? 그러는 거예요. 거기에 ‘불렛보’라는 단어가 쓰여 있어요. 그게 뭐냐면? 보다는 단어가 네 개 있다고 그랬어요. 헬라어에는. 옾타노마이, 그냥 보는 거. 에이돈, 그건 하나님이 뭘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준 거. 그걸 보는 거죠. 안 주면 못 보는 거. 불렛보는 뭐예요? 이게 뭔가 해서 시험해 보는 거. 그러니까 먹어 ‘보다’, 입어 ‘보다’. 왜 거기에 보다는 말이 들어가 있을까요? 이제 뭔가? 하고 보는 거예요. 먹어 ‘보는 거’ 입어 ‘보는 거’ 씹어 ‘보는 거’. 뭐지? 이거. 불렛보에요. 이것이. 그 불렛보 하다보면 어떻게 돼요? 호라오! 하고 깨닫게 되는 거. 이게 네 번째.깨달음이란 말에요. 이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그래요. 어떻게 여전히 불렛보 못하고 있니? 어찌하여 율법이 되어 죽으러 온 나 예수만 보고 있니? 내가 담고 있는, 나는 진리로 왔다고 요한복음 1장에서 얘기 해줬잖아. 나는 말씀이라고 얘기 해줬잖아. 그러면 그 말씀의 진의를 알아야지. 어떻게 너희들은 나만 보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가 죽는다고 했을 때 그렇게 화 낸 거 아냐? 베드로는 꾸짖어 야단 쳤잖아요. 죽지 말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지? 그러면 너희들이 죽어! 왜 나만 보고 있어? 나는 죽어야 되는 거야. 그 안의 진리가 중요한 거지. 내가 중요한 게 아니란다. 그러는 거예요. 3절을 보면요 감람산이라는 장소가 나오죠? 그 감람산이라는 건 단순히 산의 이름이 아니에요. 지금도 그 감람산이라는 데는 없어요. 사람들이 그냥 아무 산이나 찍어서 이렇게 이름 붙여 놓은 거지 관광객 끌어서 관광지로 삼으려고.
그 기름의 그 산 이거든요. 이 호호로스가 뭐라 그랬어요? 성전이라 그랬죠? 성경에서 항상. 거기에 관사가 붙으면. 그 기름의 그 산은 뭐예요? 그 진리로써의 그 산. 진리로써의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 옛 성전 껍데기만 보고 이거 보세요. 멋있지 않아요? 그래요. 그 때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느냐하면 감람산으로 간다. 그러죠? 그건 그 기름의 그 산이라는 거예요. 그 ‘말씀으로써’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어디에 앉으실 때 항상 감람산, 그러는 거지 산꼭대기로 뭐 얘기할 때마다 끌고 올라간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 기름의 그 산. 진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예수님이 성전에 앉으신 거예요. 그 진리의 선포 자리에서 제자들이 물어요. 이 세상의 마지막 징조로 나타나는 일들이 어떤 게 있습니까? 그랬더니 많은 이들이 나는 그리스도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게 마지막 때 징조다. 그래요. 이 말은 어떤 이들이 많이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그리스도다 이런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기서 이 ‘많이’라는 말, 폴로스라는 말은 대부분이라는 뜻이거든요. 대부분 그래요 지금? 아니죠? 몇 명 안 돼요. 문 선명, 박태선, 신천지 이렇게 몇 명 안 된다니까요. 대부분이래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마지막 때의 징조가 뭐냐 하면 대부분이 진리인 그리스도 말고 그 예수, 여기 에고 에이미예요. 그 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다가 아니라 에고 에이미, 나를 그리스도다 하는 자들. 그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지금요. 그죠? 그분을 그냥 섬기려고 하고 그분이 하신 말을 어떻게 하면 순종하려고 하는 거.
나를, 이 예수를, 나는 죽어야 되는 건데. 옛 성전, 지금 옛 성전에서 감람산. 그 기름의 그 산으로 진리로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이, 나를, 무너져야 하는, 무너진 이후에 내가 무너지고 이게 찢겨져야 진리가 보이게 되는데 그 그리스도다, 나를 그리스도다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믿게 될 때 그 때가 마지막 때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를 나 밖의 것으로 그리고, 추억하고 칭찬하고 섬겨야 하는 대상으로 갖고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부를 수밖에 없어요? 내가 그분과 연합되어 진리가 되지 못했을 때 그분을 어떻게 불러요?
주여! 주여! 내 밖에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는 (거기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러는데 그 말이 아니라, 그러면 주여, 주여 하는 자 중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말로 들리잖아요. 원문을 보면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모조리 다, 그 하늘들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이에요. 거기서 천국도 그냥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 하늘들, 복수에요. 하늘들. 호오라노스.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나더러 지금 죽기 전의 예수잖아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왜? 그 주. 그 그리스도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나와 연합되는 존재지 내 밖에 놓아두고 주여, 주여 하는 거 아니란 말에요. 그것도 또 큰 소리로 삼창도 해. 어디 저 멀리 있는 거예요. 그거는. 예? ㅎㅎ. 그들은 어떻게 된다? 마태복음 7장 26절 보세요.
마 7: 26-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직역을 해드리면, 내 안에서 말 하는 모든 자는 절대로 주여, 주여 할 수 없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절대로 그 하늘들의 그 나라로 빨려 들어갈 수 없다 에요. 직역을 하면. 절대로요. 기필코. 절대 못 들어간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을 가진 자는 절대로 주를 밖에서 찾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이래요. 반대로 그 하늘들의 그 나의 아버지, 그 뜻이 되는 자. 하고 끝이에요. 이게 어디로 연결이 되느냐 하면 그래야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그럼 아버지 뜻대로 행하라는 건 뭐냐고요. 신약성경에서 행하라라고 번역이 된 포이에오는 히브리어 아싸 동사를 번역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아싸 동사는요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거, 나타난 것을 잘 가르쳐서 그가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가르치는 거,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를 ‘아싸’라고 해요. 행하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에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창세기의 큰 틀을 네 단어로 요약하면 구약의 큰 틀도 마찬가지에요.‘아마르, 라아, 바달, 카라’ 이런 순으로 틀이 잡혀있어요. ‘아마르’는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이에요. 진리 그 자체인 말. 그걸 ‘다바르’ 어떤 성전이나 이 자연이나 우주, 이런 걸 갖고 그 ‘아마르’를 이야기 할 때 ‘다바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마르, 진리의 말이 있고 고걸 나타난 것으로 이렇게 보여주는 걸 ‘라아’라고 해요. 그래서 그 단어를 보다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거 보다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거죠. 아마르 라아. 그러면 이렇게 보여진 것으로 아 이게 그런 거구나, 라고 깨달을 때, 구별할 때 그걸 바달이라 그래요. 그걸 거룩이라 고도 번역을 하는데, ‘바달’, 아 그거구나! 구별하는 거. 바달. 그리고 그걸 구별해 낸 그 사람을 ‘카라’. 초청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되거든요. 성경 전체가 이 구조예요. 그런데 그 ‘라아’에서 ‘바달’로, 구별하는 거.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오! 이게 그거였어? 보이지 않는 그걸 담고 있는 거구나. 하고 했을 때, 고 ‘바달’의 단계로 넘어갈 때, 그 행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행위를 ‘아싸’, 행하다. 라고 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행하라 라고 하는 건 이런 거예요. 희생 제사를 행하라. ‘아싸’. 희생 제사를 행하라 라고 했을 때 그냥 수건이 덮인 율법으로만 보면 죽어라고 그거 해야 되지요? 해야 되죠? 율법이니까. 희생제사 행하라 라고 했으니까, ‘아싸’. 그러나 이걸 휘장이 벗겨진 상태에서 보는 사람은 아, 영단 번에 드려진 그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릴 희생 제사는 이제 다 없어진 거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희생 제사 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 라고 알아먹었을 때. 그리고 그걸 알아먹게 해주는 그걸 ‘아싸’ 행하다. 그래요. 그걸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번 수요일에 공부할 텐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 그랬지만 어떤 데에서는 맹세 하라! 그랬어요. 거기에서의 하라가 뭐냐 하면 ‘아싸’예요. 맹세가 되어라, 라는 거예요. 내가 무슨 맹세 했어요? 하나님이 무슨 맹세했어요? 먼지에 불과한 너희를 내 영, 호흡, 말을 넣어 하나님과 방불한 그리스도인 만들어 나와 영원으로 살게 하겠다, 가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그게 맹세였잖아요. 난 그렇게 할 거야. 그래서 창세기 에서도 일곱 번 말한 거예요. 난 그렇게 할 거야! 그게 맹세에요. 서원이에요. 하나님의 서원. 그 맹세대로 되어라! 가 행 하다. 예요. ‘아싸’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맹세, 행함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분이 끌고 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끌려가는 그 행함 속에 들어있는 게 우리란 말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라는 그 말을 전부 그냥 그렇게 껍데기로만 보게 되면 여러분 머리 터져서 죽어요. 그래서 다 포기한 거예요. 이렇게. 안 하잖아요. 솔직히. 몇 개만 하고. 못 한다니까요. 그걸.
그런데 여태 이 반대로 배워왔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알아듣는 이가 없어요. 진리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내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는 자가 그 나라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이 ‘네페쉬’, 먼지 티끌, 하나님이 보기에 티끌에 불과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부으시죠? 그게 뭐예요? 생기였잖아요. 그게 뭐예요? ‘르와흐’. 말, 영 이란 말에요. 그게.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뭘 찾겠느냐고요? 내 것 찾는단 말에요. 그래서 히브리 결혼 풍습이 신랑이 신부에게 미리 빙패물을 보내는 거예요.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내가 보낸 그거 갖고 있는 그 여자가 내 신부다. 왜? 한 열 명, 열다섯 명씩 하녀들까지 다 나와 있었거든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 신부인 우리에게 와서 무얼 찾겠느냐고? 내가 준 거, 내 말. 영 그거 찾는 거예요. 그 네페쉬가 뭘 하고 안 하고는 그 신랑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신부는 하나님의 것을 이미 받아갖고 있다니까요. 그 여자를 찾는 거예요. 그 신부를 찾는 거란 말입니다. 그거 안 갖고 있으면 아무리 예쁘고 화려하고 쭉쭉 빠졌어도 신랑의 눈에 안 보여요. 안 보여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다. 그러죠? 말이에요. 영. 그러나 행위는 비슷해요. 다 잤어요. 열 명이 다. 그런데 다른 건 어떤 이들은 그 진리를 갖고 있더라는 거. 진리를 갖고 있다고 전부 무슨 성인군자가 되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똑같아. 다 자고 있어요. 그런데 신랑이 올 때가 됐어요. 마지막 때에요. 잠자다가 벌떡 일어나 보니까 신랑이 올 때가 됐네요. 그 때 되니까 이 기름이 중요한 걸 알게 됐어요. 그 하베스에서 그 부자가 그러잖아요. 아, 내게 중요한 건 그 물이었네요. 손가락에다가 물 조금 찍어서 혀에다가 좀 대주세요. 그랬잖아요. 그래서 기름. 이거 어떻게 해? 기름. 그래서 기름을 가진 사람에게 빌려 달라 그랬어요. 진리가 빌려 줄 수 있는 거예요? 네? 못 빌려줘요. 그래서 못 주는 거예요. 아니, 하나님이 슬기롭다고 칭찬해 준 여자가 그런 것도 안 빌려주면 안 되죠. 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주는 거예요. 그거는요. 그랬더니 슬기로운 여자들이 뭐라 그래요? 장사하는 데 가서 사 와. 그래요. 장사하는 집. 옛 성전이에요. 그랬더니 이 여자들이 또 가네요? 살 수 있는 건 줄 알고. 그래? 장사하는 집에서도 그거 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끝이에요. 그 여자들은. 못 사는 거예요. 장사하는 집에서는 절대 그 진리 못 받아요. 문이 잠겼어요. 와 보니까. 문을 두드립니다.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우리가 여기 있어요. 그 때, 그 신랑이 뭐라 그래요? 마태복음 25장 12절 보세요.
마25 : 12-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진리로 말한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알다, 라고 번역이 된 말이 에이돈이에요. 보다. 어? 난 너희 못 봤는데. 이런 말이에요. 같이 자고 있었잖아요. 신랑이, 오, 난 못 봤는데. 그러는 거예요. 안 보여요. 그럼 하나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진짜 귀중한 존재들일까요? 우리 먼지들이 봤을 때, 이 먼지들이 인본주의니 무슨 뭐 인권이니 하면서 중요하게 보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꼭 인본주의에 빠진 인간들이 요런 얘기하면은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저, 이런다니까요. 아니 그건 자기가 그렇게 귀중한 존재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그죠? 그러니 나와 같이 똑같이 존귀한 저들도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놈이 와서 하나님의 은혜, 믿음 진리가 없으면 쓰레기다, 그러니까 자기한테 하는 소리 갖거든. 진리 없으면 그냥 네페쉬에요. 생명 없는 시체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왜 사랑해야 돼요? 예? 여러분은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이 넓은 우주에 이 우주를 만든 분이 여러분을 찾아내야 돼요? 모르는 척 하는 게 맞아요. 그 분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안다면. 그런데 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은 자기가 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진리를 못 받는 거예요. 그렇게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뭐했어요? 일은 무지하게 많이 했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권능행하고 뭐하고, 뭐하고. 그런데 왜 나를 모른ㄴ다고 하세요? 주님이 뭐라 그래요? 나 안 보여! 나 안 보여.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느니라. 나 못 봤는데. 그러는 거예요. 나 못 봤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니, 여러분이 이 인간세상에서 사니까 인간답게 사세요. 제발. 불교인들보다, 이슬람교인들보다 더 인간답게 사세요. 그러나 그것으로 여러분의 가치를 주장하면 안 돼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 아녜요. 이왕이면 법륜인지 뭔지 그 스님보다 더 열심히 우리 남들 도우면서 삽시다. 왜 그런 걸 안 해요? 하자니까요. 제가 그거 하지 말라 그랬어요? 하자는 말이에요. 착하게 사세요. 제가 하지 말라 그래서 안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자고 이렇게 확 선동을 안 해줘갖고 지금 안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뭐예요? 관심이 없었잖아요. 애초에. 그런데 왜 모든 걸 다 내 잘못으로 돌리느냐고? 내가 하지 말라 그랬다고. 아니라니까요. 하세요. 그러나 구원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따라서 중요한 건, 뭘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하라, 하리 마라의 명령으로 점철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진리를 가졌는가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진리가 없는 몸을 오늘 본문이 죽을 몸이라고 하는 거고 그 죽을 몸들의 열심을 몸의 사역, 에피뚜미아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희생 제사 열심히 드리라는 거예요. 그럼 너희 다 죽는다는 것이죠. 진리를 가지지 않고도 자신의 자원과 노력을 바탕으로 해서 진리의 행세를 하려하는 것, 그리스도 없이도 내 것으로 세상의 존경과 박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욕심 그거 버리라는 거예요. 이왕이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사세요. 뭐 하러 욕먹으면서 살아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그러니 저는 자격이 있죠? 쟤 보다는 좀 낫죠?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희생 제사를 계속 드려야 겨우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수준. 그건 신앙인 아니에요. 청년들 똑바로 들으세요. 공부할 땐 공부하세요. 일 할 땐 일 열심히 하세요. 그거 때려 치고 단기선교지 이런 데 가갖고 어중간 하게 그냥 돌아와서도 할 것도 없고 그런 거 하지 말아요. 그럼 아예 차라리 봉사활동 하러 간다고 가던가. 가서 뭘 전하고 왔냐고요? 예? 괜히 문명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한테 문명 갖고 들어가서 그거 없으면 못 살게 망가트리고 온 거예요. 아니에요? 그건 폭격하고 온 거지 그들에게 생명주고 온 거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 라는 단어는 과녁을 벗어나다는 사전적 뜻을 갖고 있지만 그걸 분석을 해보면 하, 라는 부정 접두어에 마르티오, 증인, 증거라는 뜻이 합쳐진 합성어에요. 그럼 뭐겠어요? 죄라는 게. 말이 안 되는 진리가 안 된 것을 갖고 엉뚱한 과녁 찾아가는 게 죄예요. 말도 안 되는 말.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게 다 진리에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지고 말이라고 우겨? 이런 거. 이심전심인 사람만 웃네요.ㅎㅎ모든 게 다 진리를 담고 있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먹는 거예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갖고 말이에요.
성경은 그렇게 진짜 말과 가짜 말의 전쟁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의 물. 땅의 물. 물론 하늘의 물은 땅의 물을 모형하고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거지만 그걸로 이게 하늘이야 라고 우기게 되면 이게 저주의 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문자를 받은 모세와 애굽의 모세들이 전쟁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 모세라는 이름은 건져낼 자죠. 그런데 원래 모세의 이름은 모세스였어요. 그러면 건져 낸 자예요. 물에서 난 자. 물이 낸 자. 물이 보낸 자. 모세스. 그 이름은 애급의 모든 왕자들이 다 갖고 있는 이름이에요. 애급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은 전부 이름이 모세예요. 거기다가 자기가 진짜 왕이 되면 자기가 섬기는 신 이름을 앞에 붙여서 투투모스 이렇게 이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모세예요. 그래서 그 분도 모세예요. 그런데 이 모세는 물이 보낸 자, 아래물이 보낸 자들, 세상의 왕들이잖아요. 거기에서 건져 내어져 하나님의 물을 받아 다시 이 모세들, 아랫물의 모세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의 물, 말을 받아 애급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게 이 땅의 모세였어요. 이 물들의 싸움이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랫물을, 바다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이거 아니라고. 그리고는 그 물, 하늘의 물을 갖고 있는 모세가 그 사이로 통과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리는 거예요. 파괴해버리는 거. 하늘 물의 승리. 요걸 세례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찢겨진 사건이 바로 이거란 말에요.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요. 땅의 물. 그 모형에 멈춰있으면 안 돼요. 하나님은 그 땅의 물을, 휘장이라 그래요. 휘장을 찢어버리고 껍데기만 보고 엉뚱한 상상하지 말라고 일갈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 휘장 안에 감춰두셨던 진리를 당신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진짜 숨을 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들의 진짜 눈이 뜨이고 그들의 진짜 귀가 열리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람, 이게 르와흐거든요. 동풍을 보냈더니 홍해가 찢어졌잖아요. 그게 찢어지다는 단어거든요. 영, 르와흐가 영이죠. 말, 진리를 보내니까 그게 바다가, 아랫물이 찢어지더라. 이게 모형이란 말에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건 우리 것 중의 최상을 것을 바치는 게 아니라 그분이 준비하신 생명, 영생을 거저 갖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영광을 받으실까요? 아담과 하와, 사람, 둘이 합쳐서 사람이에요, 단수. 사람이 무얼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 에덴의 동산에서. 잠 하루에 세 시간씩 자고 매일 철야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삶을 뒤로 젖혀두고 열심히 과일 열매 따다가 짐승들 구제한다. 둘이 매날 손가락 걸고 착하게 살기로 결단한다. 선악과 안 먹는다. 답은 하나에요. 다른 거 하지 말라고 요구한 적 없어요. 선악과 먹지 마. 이거 안 먹으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거야. 여러분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여러분이 뭘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거짓말 장이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다른 거에 신경 쓰기 이전에 하늘의 물, 열두 가지 실과 그게 아들이라 그랬죠? 열둘이? 열둘이라는 그 아들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물, 진리를 가지는 것에 집중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으로 오시고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함몰되는 다른 그리스도들 기름부음 받은 자들, 성도의 모습인 거예요. 계시록 19장 6 보세요. 마지막으로.
계 19 : 6- 9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항상 많은 물소리, 진리의 소리, 진리의 소리란 뜻이에요. 그런 소리가 나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옮은 행실이로다
(여긴 행실이라는 단어도 아예 없어요. 그냥 성도들의 의다! 그래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다. 성도들의 의는 우리 로마서 앞에서 배웠죠?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리스도라는 의예요. 그 의. 성도들의 의가,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옷이 되어, 신부의 옷이 되어 입혀져 있어요. 이미. 그런데 그들을 뭐라 그래요? 그리스도, 기름, 말씀을 받았으니까. 그들의 이름이 뭐겠어요?)
8-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이것은 이들은 이에요. 이것이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참되신 진리의 말씀이다 신부들 하나하나를 뭐라고 이름 붙이느냐 하면은 이들이 하나님의 참되신 진리의 말씀이야! 그래요. 여러분의 이름은 뭐예요? 그래서? 말씀이에요. 진리라고요 여러분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서 성취가 되고 이루어지는 자로 사는 게 성도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에 일조를 하는 자로 살겠다고 하는 게 성도가 아닌 거예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삶으로 그려내는 자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뭐라 그랬어요? 네페쉬, 먼지에 불과한 거 그들 안에 진짜 중요한 하나님의 숨, 호흡, 르와흐, 푸뉴마, 영을, 말을, 진리를 넣어 그를 하나님과 방불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게 여러분 안에서 그렇게 여러분이 삶으로 그려내야 하는 말, 글이라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돼야 되겠어요? 여러분은 쇠하고 진리가 흥하는 그런 모습으로 삶이 그려져야 돼요. 그게 말씀들의 삶이에요. 이해가 가세요? To be continued.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실종되고 곡해되고 오해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 우리에게 이렇게 진리를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가치 있는 시간인지 우리 마음속에 새겨주셔서 더욱 더 진지한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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