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94 - 유다의 후손들아 네 가슴에 양철북을 울려라 (창44:32~34)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41

94 - 유다의 후손들아 네 가슴에 양철북을 울려라

(창44:32~34)

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작가 귄터그라스의 양철북이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그 양철북이라는 소설이 한 30여 년 전쯤에 독일의 슐뢴 도르프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었지만 영화는 소설 내용의 삼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한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오스카는 세살 때 어른들의 세계로 대표되는 기존체제에 대한 부정과 반항으로 지하실에 떨어져 스스로 성장을 멈추게 합니다. 본 것을 쓰는 데 가차 없는 어린이의 눈과 출생부터 정신 성장이 완결되어서 세상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진 주인공 오스카는 공식적 역사가 보여줄 수 없는 무대 뒤편의 삶, 탁자 밑의 부정한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스카는 자신의 조그만 양철북을 두드려 세상과 사회에 경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괴성으로 허울의 문명을 상징하는 유리와 창에 금이 가게 만들고 깨뜨려 부숩니다.

귄터그라스는 오스카의 눈을 통하여 이 세상의 기만성과 더러움과 불결함과 추악함을 고발합니다. 심지어 오스카는 성당 안에 있는 예수 상의 목에 그 양철북을 걸어놓고 예수 상에게 고함을 치기도 합니다. ‘북을 쳐봐, 북을 쳐봐’ 거기에는 ‘왜 신이라는 이가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와 불결함과 추악함과 부정함을 그대로 보고 있느냐’는 항변이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북을 치지 않는 예수 대신에 자신이 그 예수의 목에 걸려 있는 북을 대신 침으로 해서 신에 대한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오스카는 자신의 할머니, 삼촌, 아버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인간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치를 떨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자신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삶 속에서 계속 폭로가 됩니다.

그 소설은 한 방화범이 밭을 매던 카슈바이 할머니의 네 겹 치마 속에 도망쳐 들어가면서 시작된, 정신병원에 수용된 오스카의 과거 회상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당대 소시민들의 성(性), 부패, 나약함, 속물근성, 어이없는 끔찍한 죽음, 전쟁의 진행 등을 일상 속에서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무기력하고 비굴하며 현실에 안주했던 당시의 소시민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패해 있다는 것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에서 소시민들은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니고 수동적 가담자도 아닌, 자발적인 동참자로, 파시즘의 지지층으로 비판됩니다. 소설 속에서 나치의 군악대 연주나, 무대 밑 오스카의 양철북 리듬이나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는 군중의 모습이 나오지요? 그 장면이 바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주관이나 신념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밖에서 이끄는 어떤 힘을 무작정 좇는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한 소설의 내용 중에서 지금도 제 기억에 제일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스카의 엄마와 오스카의 아버지 마체라트, 그리고 오스카 엄마인 아그네스의 불륜 상대인 사촌오빠가 함께 바닷가에 가서 장어를 잡는 어부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장어 잡이 어부는 말 시체에서 말 머리만을 잘라 밧줄에 묶고는 바다에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 장어들이 그 말의 시체를 양식으로 삼아 말 머리 속에서 기생을 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어부는 그 말 머리를 끌어냅니다. 그리고는 그 말 머리 속 여기 저기에 박혀서 여전히 말 시체를 먹고 있는 장어들을 하나하나 잡아 양동이에 넣습니다. 아그네스는 그러한 장어 잡이를 보고 토악질을 해 댑니다. 시체를 먹고 살던 장어들과 물고기들이 너무 징그러워서 차마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요리사인 남편이 그 장어를 사서 요리를 합니다. 그리고는 아그네스에게 그 장어요리를 먹게 합니다. 아그네스는 그 장어가 어디서 잡힌 것인지를 눈으로 직접 본 터라 입을 앙 다물고 남편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남편은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하며 아내에게 고함을 칩니다. 아그네스는 그것이 너무 서러워서 방으로 들어가 웁니다. 그 더러운 시체를 먹고 자란 장어를 먹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사촌 오빠가 그녀를 달래주러 들어가서는 남편이 밖에서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또 사랑을 나눕니다. 인간의 추악함과 간사함과 기만성과 참을 수없는 속물근성이 거기에서 완전히 폭로가 됩니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다 남편의 장어 요리 앞에 앉은 아그네스가 그 때부터 그 장어를 먹습니다. 그건 귄터 그라스가 아그네스와 시체를 먹고 자란 더러운 장어를 동일시하는 장면입니다. 시체를 먹으며 시체에 기생하는 장어나 그것을 보고 더럽다고 토악질을 해대는 아그네스나 똑같이 더럽고 추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죄 성이 그 장면에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후 아그네스는 실성한 듯 장어나 물고기를 날로 씹어 먹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더러운 불륜 상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신부를 찾아가 고해 성사를 하고 자살을 해 죽습니다.

죄는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귄터 그라스가 예수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본 인간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귄터 그라스의 그러한 지적을 가리켜 일반화의 오류라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모습이 맞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더럽고 불가능한 죄인이 맞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기 전 까지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추악하며 불결하며 불가능한 것인지를 폭로당하고 다시는 그러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룩한 결단을 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속에서도 종종 우리의 죄인 됨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나섰던 아담과 그 속에서 함께 공범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스카의 양철북 소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울려 퍼져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쁜 놈이야, 네가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했어’하고요.

오늘 본문의 유다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가슴 속에 양철북이 울렸고 유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종 됨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요셉이 자기 형들을 모함을 하면서까지 골탕을 먹이는 이유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가 될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본 모습을 폭로당하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성숙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반복해서 그들을 시험했던 것이라 했지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요셉의 형제들은 그러한 요셉의 시험과 모함을 거치면서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바랐던 것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성화의 완성지점이 바로 거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簒奪)하고 왕의 자리에 올라 마치 자기들이 이 세상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 시키시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리로 끌어내리시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이지 착하고 능력 있고 멋진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열매일 뿐입니다. 그걸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성화의 열매들은 자기부인이라는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맺혀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성화의 열매들은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형제들의 대표로 유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열 두 형제의 대표임과 동시에 모든 하나님 백성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자기부인의 모습이 나오지요? 유다는 요셉 앞에서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홀로 종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당시의 종은 주인의 말에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그러한 고백은 자기 생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렇게 요셉 앞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부인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요셉 앞에서요. 그런데 그러한 유다의 고백을 받는 요셉이 어떻게 묘사가 되고 있습니까? 은잔을 가지고 점을 잘 치는 자로 묘사가 되고 있지요? 그건 유다와 다른 형제들 앞에서 요셉이 영적 존재의 상징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요셉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요셉이 은잔으로 점을 치다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을 형제들 앞에서 영적 존재로 차별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신출귀몰 점치는 자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날고 기어도 나는 은잔을 가지고 신기한 점을 쳐서 너희들의 잘못을 짚어내는 자이므로 나에게 변명할 생각을 말라’는 상징적 묘사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실존이니까요.

그러한 영적 존재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로 형제들이 서게 된 것이고 그 형제들의 대표로 유다가 앞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나머지 형제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모습은 바로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격발되어 나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유다의 후손이라고 지칭을 해서 ‘유다의 후손들아, 네 가슴에 양철북을 울려라’라고 설교 제목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굶어 죽어야 할 자기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종이 되어 먼저 그 삶을 산 사람이 누굽니까? 요셉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지금 자신의 생사여탈을 빼앗기고 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형제들의 모든 짐을 대신지고 자신이 홀로 종이 되겠다고 나선 것은 요셉이 죽어야 할 자기 형제들의 대표로 먼저 종이 된 것과 똑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나 유다는 그러한 ‘대신 희생의 삶’의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삶이 어떤 삶인지 잘 알고 있지요? 그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 앞서 먼저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성도가 좇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요구가 되는 삶이 바로 그 십자가의 삶임을 고지하시기 위해 마지막 시험대 앞의 유다에게서 그 삶을 끄집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험대를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와야 할 삶이 바로 그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제를 위하여 종의 삶을 자처하는 그 삶이 패배의 삶처럼 보이고 실패의 삶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야말로 하늘의 왕의 삶인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요셉의 꿈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종이 되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에게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머리 숙여 절을 하는 꿈이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종이 되어 섬기는 모습이 실제로는 하늘 왕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유다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유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종이 되겠다고 자기를 부인한 그에게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지요? 똑같이 세상이 그에게 절을 하는 상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인 것입니다.

 

(창49:7~10)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이 유다에게 예언이 되고 있지요? 오늘 본문인 창세기 44장의 유다의 고백과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은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의 대신 희생의 삶이 예시하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옵니까? 유다지파에서 나옵니다. 왜 오늘 본문에서 유다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고 나섰는지가 더욱 선명해 지지요? 유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과 그 대신 희생에 의한 승리를 작은 그림으로 먼저 보여주고, 유다의 삶과 그를 향한 야곱의 유언을 통하여 조금 더 선명하게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유다지파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 다윗을 통하여 조금 더 선명한 십자가 그림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이 사울에게 핍박을 당하지요?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의 모델로 다윗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대신 희생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대신 희생의 삶을 경험한 이들의 신분이 모두 무엇입니까? 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앞에서 절을 해야 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땅에서 희생하고, 쫓기고, 당하고, 져주고, 섬기는 삶을 살더란 것입니다. 그 삶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요?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니까요.

따라서 요셉과 유다와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산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 성도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목적지는, ‘나’가 아닌 다른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나를 비우고 나를 희생하는 종의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늘 왕의 삶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늘의 왕이 직접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하늘나라의 공동 상속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주인으로 살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자명하지요? 당해주고, 져주고, 세상에게 쫓기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작은 자처럼, 감추어진 자처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감추어진 분으로 살다가 가신 것처럼 우리도 감추어진 자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성도들을 가리켜 ‘빛’이라고도 하고, ‘등불’이라고도 하지요?

 

(마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은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삶을 가리켜 ‘착한 삶’이라 하십니다. 그 착한 삶의 어원은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그 ‘토브’라는 단어가 어디서 처음 쓰였다고 했지요? 창세기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어구에서 처음 쓰였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착함’이라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의 목적에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함’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은 예수의 삶이 바로 착한 삶의 표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등불의 삶인 ‘착한 행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보여 지게 되느냐 말입니다. 예수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연한 순처럼 약한 모습이었고, 감추어지고 숨겨진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모함을 당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을 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똑같은 비유가 기록된 마가복음으로 가면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막4:21~25)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잘 보세요. 주님께서 ‘등불은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22절에서 ‘그 등불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숨겨졌고, 나타내기 위해 감추어졌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중 부정이니까요. 그렇지요?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등불로 살아야 하는 성도가 등불로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방법은, 마태복음의 표현대로 바꾸면, 착한 행실로 살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에 의해 먼저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굉장히 의외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드러나는 등불’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부자가 되고,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을 잘 살아내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등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감추어지고 숨겨져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등불은 높이 들려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등경 위에 선 성도라는 등불의 실체입니다. 이 역설을 이해하세요? 등불이 말 아래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등불이 말 아래 있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는 방법을 제시하시는 데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방식으로 말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밑 절을 보시면 그렇게 감추어지고 숨겨짐으로 해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성도의 삶의 구체적인 적용이 나옵니다.

2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너희의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헤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메트레오’는 ‘측량하다, 되로 재다’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되’라는 말은 바로 윗 절의 ‘말’(모디오스)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 ‘헤아리다’라는 말을 쓰시기 위해 ‘말’이라는 단어가 위에 동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헤아리는 자들은 그 헤아림으로 돌려받을 것이고 더 받을 것’이라고 하시고, 25절에는 ‘있는 자가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헤아림’과 ‘있음’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헤아리는 자가 받을 것이고 있는 자도 받는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이 등불들에게 요구하시는 헤아림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헤아린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으로 판단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주님이 그걸 칭찬하시겠어요?

여러분, 사람들은 항상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여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과 사건을 판단할 때 그 자신만의 세계관이라는 안경에 의해 판단을 합니다. 돈이라는 알이 끼워져 있는 세계관을 소유한 사람은 돈이라는 안경알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명예라는 알이 끼워져 있는 세계관을 소유한 사람은 명예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많고 높은 명예를 지닌 이들이 힘 있는 자이며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발톱의 때로도 안 보입니다. 그게 그들의 헤아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안경알을 통해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돈이 많든 적든, 명예가 있든 없든, 잘났든 못났든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도 못가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자들에게 그 자식은 실패자일 뿐입니다. 그게 그들의 헤아림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일을 통해 자식이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대해 깊이 자각을 하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깊이 배웠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힘을 판단 기준으로 하여 그 자식을 헤아리는 사람은 매일같이 욕지거리나 해 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판단 기준을 가진 사람은 그 자식을 헤아릴 때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헤아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헤아리는 자는 그 하나님 기준의 헤아림으로 남에게서 돌려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똑같이 그렇게 헤아림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 기준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업적이 없어도 되고 대단한 공로가 없어도 됩니다. 단지 그가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는가, 아닌가?’로만 헤아림을 받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아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이 세상의 힘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될 때에는 보잘것없고 나약해 보여도 하나님 기준의 평가에 의해서는 하늘의 왕으로 헤아림을 받게 되는 그런 삶, 그것이 바로 등불인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 중심의 헤아림이 없는 자는 있는 것, 구체적으로 성경적 지식이라든지, 봉사라든지, 헌금이라든지 자신이 종교 행위로 쌓아둔 것들조차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불이 되어서 세상을 비추는 방법이 뭡니까?

감추어지고 숨겨진 삶, 그러니까 이 세상의 힘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는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등불의 삶입니다. 그게 세상을 비추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삶을 살다가 가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그 분이 감추어지고 숨겨지셔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분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 일컬으셨습니다.

빛이 왔는데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세상은 빛을 알아볼 실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빛은 이 세상에서 감추어진 모습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빛은 그런 빛입니다. 감추어짐으로 드러나고 숨겨짐으로 드러나는 그런 빛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빛이라는 사람들이 레이저 광선이 되어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면 그게 온당한 일입니까? 드러나는 빛은 반드시 레이저 광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빛은 사람을 파괴합니다. 아닙니다. 숨겨지세요. 감추어 지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있는 것마저 모두 빼앗기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있음’이라고 내세우는, 하나님과 자기부인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 행위나 선행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없애 버리실 수 있는 그런 ‘있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장하는 있음은 하나님에 의해 기각 당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부인되고 우리에게서 ‘있음’이 아닌, ‘없음’을 발견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서 낮아질 때 우리는 진짜 ‘있음’으로 헤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낮아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유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낮아지고, 섬겨주고, 하는 삶을 살다보면 때로 우리가 낙담을 하거나 낙망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저주받은 삶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는 아주 소원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유다의 후손들, 즉 유다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교회들의 삶이 소망 중에 완성이 될 것임을 역대상 4장에서 한번 짚어주는 것입니다.

 

(대상4:1, 9~10)

1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훌과 소발이라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의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에게만 두 절에 걸친 부연 설명이 붙어 있지요? 바로 야베스입니다. 그건 ‘유다의 후손들의 삶이 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될 모든 교회의 삶이 그러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대표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상 4장의 족보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연대를 측정해 보면 야베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던 시절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지만 완전한 정복을 이룬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한 것으로 보고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땅을 제비뽑아 분할하여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수14:2)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나머지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습니다. 잘 보세요. 여호수아가 아직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미리 나누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땅이므로 그 땅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들은 땅을 모두 손에 넣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소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비를 뽑게 하여 각 지파별로 분할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기를 자기네 지파만큼은 제비를 뽑지 않고 자기들이 거할 땅을 지명할 테니, 그 지명한 땅을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땅이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이었습니다.

 

(수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헤브론 땅이 어떤 땅입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물 때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지요? 그 때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대장부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그 때 온 이스라엘이 울부짖으며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민13:32-14:3)

그러나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 땅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심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그 땅으로 들어가자고 합니다.(민14:6-10) 그 때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의 후손인 갈렙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가 정탐하고 돌아온 땅,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을 주시겠다고 특별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민14:24)

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래서 훗날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기를 자기네 지파는 제비 뽑지 않을 테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산지, 가장 어렵고 난해한 난공불락의 땅을 달라고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갈렙의 유다지파에 야베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야베스는 지금 헤브론 땅을 정복하기 위해 성전을 치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야베스는 유다지파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 땅을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싸워서 지경을 자꾸 넓혀가야 하는 그 시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므로 반드시 주실 것임을 알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렀던 사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그걸 소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의 기도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가 되었습니다.

 

(왕상4:25) 

25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야베스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에 있는 유다 지파에게 환난이 임하여 그 언약의 성취가 지연되거나 실패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저주 ‘정녕 죽으리라, 죽고 죽으리라’(무트 타무트)의 저주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복, ‘바라크 바라크’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복에 복을 더하사’라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가시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고 감추어진 자로, 숨겨진 자로 성실하게 언약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삶,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야베스 시대에는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러나 그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분명하게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시적인 응답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감추어지고 숨겨진 모습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 앞에 그 야베스에 대한 묘사가 ‘존귀한 자, 수고로이 낳은 자’라고 기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존귀한 자인데 수고로이 낳아진 자,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수고로이 낳은 유다의 후손들, 교회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비록 그 약속의 성취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믿음과 소망으로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기대하는, 감추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야베스의 기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대목을 함께 읽어 볼까요

 

(대상4:9-10)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제 야베스의 기도가 무슨 의미인지 다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져주고, 순종하는 종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죽음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한 사람들은 그렇게 감추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자기 내면에 양철북을 울려대면서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며, 그 은혜만이 나의 힘이고 나의 가치임을 인정하는 삶, 그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저는 TV 프로그램 중에 여러 명의 패널들이 나와서 한 사람을 앉혀 놓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충고를 하는 등 난도질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뜨악해 집니다. 자기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삶을 살고 있나? 하는 질문이 생겨요.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나의 더러움에 치를 떨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의 살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에 휘둘리지 마세요. 그런 것이 여러분을 살려내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기죽지도 마시고 교만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 하나님께 무얼 해드리고 반대급부로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어 이 땅에서 떵떵 거리며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살지 마십시오.

 

(롬11:34~35)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보세요. 누가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우리 자신의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기도 하고, 우리의 무력함에 치를 떨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백발백중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오늘을 이기세요. 풍산개가 호랑이보다 힘이 세서 호랑이를 이기는 게 아닙니다. 풍산개는 주인이 뒤에서 지켜 볼 때만 호랑이를 이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그의 돌팔매질이 훌륭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돌맹이 다섯 개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바로 그 아버지가 지키고 계십니다. 뭐가 두려우세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항복하십시오. 나의 티끌 됨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 엎드리세요. 그게 유다의 고백이며 종된 우리 성도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향해 양철북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사람 되지 마시고 자신의 내면에 대고 양철북을 두드리세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