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95 - ‘내가 니 시다바리가?’ (창45:1-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42

95 - ‘내가 니 시다바리가?’

(창45:1-10)

45:1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45:2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45:3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45:4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45:5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45:6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45: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5:8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45:9 이제 곧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하는 말이라고 하시고, 이렇게 말씀을 드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체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45:10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원색적이지요? “내가 니 시다바리가?”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친구>라는 영화에서 장동건이 유오성에게 던진 말로 한동안 유행이 되었던 말입니다. 여기서 ‘시다바리’라는 말은 일본어 ‘시다’에 우리말 접미사 ‘바리’가 붙어서 생긴 합성어입니다. ‘바리’라는 접미사는 어근에 붙어서 ‘그 어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자’라는 뜻의 명사로 만드는 말입니다. '바리'라는 접미사가 붙는 말이 몇 있죠? 잇속을 노리고 약삭빠르게 달라붙는 사람을 이르는 '감바리', 군인을 속되게 이르는 '군바리', 나무기둥을 뜻하는 '동바리', 발발거리고 다닌다 해서 붙여진 '발바리', 악착같다고 해서 '악바리',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던 ‘쪽바리’ 등 입니다.

그리고 '시다'는 지위나 정도가 낮다는 뜻의 'した(下)'라는 일본말입니다. 그 말은 보통 기술자의 아래에서 보조역할을 하며 기술을 배우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는 말입니다.

여기에 '바리'라는 접미사가 붙어 '시다바리'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다바리’라는 말은 주체가 아닌 보조자로서 주체의 일을 곁에서 돕고 배우며 주체가 시키는 일을 순종하여 성취해 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면 ‘바라지’정도가 되겠습니다. '바라지‘라는 단어는 불교 용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불교의식에 죽은 사람의 천도를 위한 '시식(施食)'이 있는데 시식을 주관하는 시식법사가 앉아서 경문을 읽으면 그 다음의 경문을 받아서 읽는 사람 또는 그 시식법사 옆에서 시식을 거들어 주는 사람을 ’바라지‘라 부릅니다. 그 것이 일상용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뒤에서 일을 돌봐 준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옥바라지, 뒷바라지 등의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역시 ’바라지‘라는 단어도 주체가 아닌 객체나 보조자로서 주체의 일을 곁에서 돕고 배우며 주체가 시키는 일을 순종하여 성취해 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주체이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며 그 분의 일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시다바리’ 혹은 ‘바라지’여야 합니다. ‘하나님 바라지’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다바리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오 분 대기조가 되어서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고 계셔야 하고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을 불러서 우리의 뜻을 하달하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외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들 시다바리가?’

제가 조금 자극적으로 극화를 시켜보았지만 작금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뭔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시다바리로 부리며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라지로서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 목숨 걸고 해 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요 본질인 것입니다.

한편의 멋진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카메라맨과 프로듀서, 배우, 현장진행요원인 FD, 의상담당, 미술담당, 음악담당, 소품담당, 장소섭외담당, 식사담당, 작가, 무대세트 짓는 사람 등등 수많은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만 빠져도 영화는 완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자기는 그 역할이 싫으니까 다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도 안 됩니다. 그 전체를 총괄하는 감독이 각자의 특기와 개성에 맞게 역할 분담을 해 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역할이 탐나 보인다 해도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어느 날 식사를 담당하던 사람이 카메라를 잡겠다고 나서고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의상 담당이 음악 감독이 멋있어 보인다고 음악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면 그 영화는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식사를 맡은 사람은 식사를, 카메라를 맡은 사람은 카메라를, 음악을 맡은 사람은 음악을, 미술을 맡은 사람은 미술을, 의상을 맡은 사람은 의상을, 그렇게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 감독이 일을 하기 쉽고 그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역할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중 어떤 부분이라도 공백이 생기면 그 영화는 더 이상 진행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역사라는 드라마의 대본을 쓰시고, 그 대본을 각색하시고, 연출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감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과 상황과 그 극의 진행과정이 별로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역할과 상황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가난한 역할, 병자의 역할, 당해주는 역할, 이런 것이 싫다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 역사의 드라마는 더 이상 진행이 될 수 없습니다. ‘왜 나는 만날 당해주기만 해야 해? 왜 나는 항상 이렇게 가난해야하지? 난 왜 만날 이렇게 아파야 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야 말거야’하며 그 역할들을 놓아버리면 더 이상 극의 전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드라마 총 감독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결정과 뜻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멋진 역사의 드라마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 역할들이 싫증이 나고 불편하고 고생스럽다고 해서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서로서로 이전투구들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인생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 없이 순종과 복종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종처럼 불렀다 놓았다 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서 사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바라지, 시다바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는 한 사람의 영웅이 등장합니다. 다름 아닌 요셉입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일의 성취자로서 살다가 결국 ‘이스라엘의 애굽행’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일조를 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반드시 애굽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창15:12~16)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보세요. 하나님은 이미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이방 나라 애굽으로 보내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게 하시고 4 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요셉이 먼저 종의 신분으로 애굽으로 가게 된 것이고, 기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셔서 요셉의 형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 다른 곳이 아닌 애굽으로 팔려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 나님의 연출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멋진 드라마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요셉이라는 출연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그 역할에서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의 연출 의도를 정확히 아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묵묵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시105:16~26)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 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기근을 부르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발에 착고를 채우시고 그의 몸을 쇠사슬로 묶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애굽 사라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택하여 보내신 분은요? 역시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것을 깨닫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 분에 의해 주관이 되고 있는 것이며, 그 분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으며, 그 역사의 주관자에게 온전히 항복하는 길만이 최선의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절절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수많은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자임도 깨달았습니다. 본문 5절 이하를 보시지요.

 

(창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 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형들이 자신을 팔았지만 그 일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말을 함으로 해서 형들까지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임을 밝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들이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여러 번에 걸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형들의 악함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향한 감정을 이미 정리를 해 버린 것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애굽으로 팔려 왔어야 했다는 것을 요셉이 알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내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작정을 알게 되자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 고난의 수여자라 여겨졌던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형들의 배신, 애굽에서의 종살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 억울한 누명, 바로의 꿈, 세상의 기근,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도구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안 요셉에게 그 모든 사건과 상황과 현실들이 억울함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8절에 보면 요셉이 자신을 가리켜 ‘바로의 아비, 바로의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요셉이 애굽의 ‘주’입니까? 어떻게 요셉이 바로의 ‘아비’가 되지요? 요셉은 지금 아비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을 실제화 시키는 삶을 사는 중이라 했지요?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의 내용을 보면 왜 요셉이 자신을 가리켜 묘사할 때 ‘주, 아비, 치리자’라는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있겠지요?

 

(창27:29)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야곱에게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될 것이라 언약을 하십니다. 요셉은 바로 이 야곱의 축복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요셉이 교만해서 그런 단어들을 쓴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 나오는 그 단어들을 써서, 지금 자신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의 치리자라고 자신을 묘사를 한 것은 창세기 9장의 하나님의 언약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버린 함을 저주하면서 함의 자손들이 셈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바로 함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셈족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이처럼 빈틈없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음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시편 105편 23절에 보면 시편 기자가 요셉의 수난을 이야기 하면서 야곱이 함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애굽은 함 족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도, 세상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것도,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것도 모두 우연이나 우발적인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언약에 참여시키시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고난들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고난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전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한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고 요셉이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내 팽개치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역사를 거스르지 않았던 것처럼 바로 우리 성도들도 그 현실에 순종하며 감사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서 탈출을 하는 자가 아니라 ‘나와 나의 뜻’이라는 자아숭배와 자기주장, 자아성취의 감옥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는 자신의 현실을 바꾸어 달라고, 다른 말로 자신의 현 상황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이나 긍정적 사고를 사용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요셉이 애굽 종살이에서 탈출할 기회가 없었을까요? 마음 독하게 먹고 보디발의 아내의 청을 한 번 들어 준 후에 아버지 집으로 탈출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버스로 여섯 시간 거리입니다. 잰 걸음으로 걸으면 짧게는 사흘, 많이 잡아도 일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탈출을 시도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성도는 현실에서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내 뜻에 맞게 바꾸고야 말겠다는 그 ‘자기주장’이라는 감옥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그 현실에 흡족해 하며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이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나의 상황과 현실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내가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모함이든, 감옥이든, 종살이든 그 어떤 것이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민자들입니다. 한국이 고향이신 분들입니다. 고향이 그리우시지요? 그런데 그 고향에 부모도 일가친척도 다 없어졌어요. 그래도 거기에 가고 싶으세요? 아니지요? 고향은 내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있어야 고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그곳이 초가삼간이어도 괜찮고 천막 같은 한 데여도 괜찮습니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아버지가 함께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걸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여행을 해 본적이 있으시지요? 저는 어려서 아버지와 등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텐트도 치고 개구리도 잡아먹고 잘 씻지도 못해서 불편하기도 했고 화장실도 없어서 노천에서 볼 일을 보곤 했지만 그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여행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바로 그 자리로 끌고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이 역사와 문명 속에서 가슴 깊이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너는 나 하나로 행복할 수 있니?’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바라지로 만들기 위해 이 역사가 운행되고 경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육과 훈련과 양육을 위해 기근이 일어나고, 배신과 모함과 시험들이 들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역사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하시고 양육하시고 교육하시기 위해 하나님 백성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전 세계를 뒤 덮고 있는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등이 다 누구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백성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백성 들 뿐이니까요.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정신 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이러한 재앙과 재난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진행의 동기요, 중심은 성도니까요. 그 재앙들과 고통들을 세상 사람들이 덩달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쌍할 밖에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상 전체가 기근을 겪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애굽 전체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이렇게 역사의 중심이자 동기는 성도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불평등과 억지와 불법과 폭정 같은 것을 대할 때 그러한 것들을 고치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 교회의 회개와 자정을 먼저 선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고쳐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를 하기 전에 하나님 백성들의 하늘 백성다운 삶으로의 회귀가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를 먼저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속에서 누가 누구를 지탄하며 누가 누구의 흠을 질타할 수 있겠습니까? 다 내 잘못인데.

여기 시간으로 그저께 저녁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절 후원자로부터 불법 후원금을 받아 챙겼다는 이유로 검찰에 조사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자살을 택했습니다. 제가 총재 비서실에 근무할 때에 자주 뵙던 분이라 저는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아주 의지가 강하고 강단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자살을 했겠는가를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왜 그 분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 분이 50억의 후원금을 불법으로 받아 챙겼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에서 드러나자 어떤 기독교계 원로이자 정계 원로는 ‘노무현은 자살하라’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온통 그 분의 위선적 행보를 질타하는 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 천 억, 수 조원을 해 먹고 자기 통장에는 29만원 밖에 없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그 전 대통령들의 비리가 밝혀졌을 때는 혹시 무슨 불똥이 튈까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 대통령이 만만한 시대가 되니까 마구 독설을 뿜어내었습니다. 청렴과 정직을 모토로 살던 사람이 얼마나 치욕스러웠겠습니까? 그러한 몰이가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안타까운 것은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거기에 일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치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뉴 라이트니 뭐니 하면서 그 분을 좌익으로 몰아가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분의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기독교가 정치판에까지 끼어들어서 역사를 좌지우지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체제를 바꾸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자신이 먼저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고 나 때문에 불법과 방종이 판을 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50억을 먹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안전하게 더 많이 해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지 대번에 ‘저 나쁜 놈’하며 나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유학 보내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그런데 후원자라는 사람들이 떡고물을 챙기고자 현금으로 돈을 들고 와서 줄을 서 있어요. 그거 안 받으시겠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대하면서 우리 인간의 죄 성을 폭로당하고 회개의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지,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라는 위선과 교만의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그 분이 자살을 했다는 것을 들어서 기독교 네티즌들이 악플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자살을 했으니 지옥 갔을 거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누군가가 우리 주변에서 자살을 했다면 그건 그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고 그가 그러한 궁지로 몰리고 있을 때에 내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을 개탄하며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본무는 나누는 것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 주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야 합니까? 우리 잘못 아닙니까? 미국의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살을 행위자에 대한 판단으로 귀결시키지 말고 공동체로서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보듬어 주는 데 실패 했다는 증거로 보도록 합니다. 회개의 동기로 보아야지 판단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자살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주는데 실패한 나의 죄입니다. 어디다 대고 손가락질을 합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一環)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죄인들의 실체를 배우시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크게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 백성들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여 가는 것이고 작게는 우리의 인생도 그러한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요셉이 아무 죄도 없이 형들에 의해 일면식도 없는 애굽 땅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할 때 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철없고 음란한 여인의 계략에 빠져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억울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죽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 모든 것들을 통과해 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건과 상황들을, 참을 수 없었던 현실들을 통과할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던져 넣으시는 그 자리에서 그 모든 고난을 다 겪어냅니다. 우리가 시편 105편에서 찾아 읽었던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언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언약의 사람으로 단련이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안 놔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꼭 필요한 훈련과정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만들기의 교과과정에는 월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하나 다 겪어 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기 전에는 그 교과과정이 이수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교과과정을 다 이수하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로 하여금 아비와 형제들이 구원을 받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다바리입니다. 하나님을 시다바리 삼아 여러분의 뜻을 이루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시다바리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뜻을 이루어 내는 것이 당시에는 즐겁고 행복하고 자랑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이 세상 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힘을 돈이라고 함축을 하시면서 그 돈을 가리키는 단어로 mammon이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그 맘몬은 신의 이름입니다. 자크 엘룰이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책에서 올바르게 지적을 한 것처럼 돈은 경제적 의미를 넘어서서 신이며 종교인 것입니다. 돈은 단순히 중립적인 교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힘(power)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티브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 즉 나의 비전과 나의 야망이 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세상의 힘이라는 신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바로 돈이라고요. 그런데 그 돈이 우리를 악으로 이끌어 죄를 짓게 하고 그 죄의 삯으로 사망을 주는 것입니다. 맘몬은 우리를 실컷 이용만 하다가 사망으로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천재 전략가인 한신의 힘을 빌어 역발산기개세의 항우를 물리치고는 한신의 존재를 꺼려하여 그를 죽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 신인 맘몬은 우리를 열심히 이용해 먹다가 결국 토사구팽 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마귀를 토사구팽 시키실 것이거든요. 그 때 그 마귀를 좇던 자들이 함께 토사구팽 될 것입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바라지, 하나님의 시다바리의 삶을 잘 살아내십시오.

아브라함 카이퍼의 위대한 아포리즘,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은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명제 앞에 겸허히 머리를 숙이십시오. 저는 거기에다가 하나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과 시간과 사건은 한 치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정의 결론은 이미 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확정된 결론, 하나님 나라의 아들, 딸이라는 확정된 결론을 향하여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길에 찾아오는 고난과 시험들을 잘 이기시고 견디셔서 여러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소풍 마치는 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니 시다바리인 줄 알았나?’하는 일갈을 들으시면 어쩌시려고 들 그러세요. 우리 모두 하나님 바라지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