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96 - 고통과 용서 (창45:1-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43

96 - 고통과 용서

(창45:1-10)

45:1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45:2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45:3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45:4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45:5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45:6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45: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5:8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45:9 이제 곧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하는 말이라고 하시고, 이렇게 말씀을 드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체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45:10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 바라지로 살아간 성도의 전형(典刑)으로서의 요셉의 삶을 공부하면서, 성도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순종하여 그 과정에서 맡겨진 역할이 어떤 역할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살아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바라지로 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바라지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 했지요? 그러한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 현상들과 사건들을 대할 때 우리는 고난까지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요셉의 모습 속에서 바로 그러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본문을 통해 보신 것처럼 요셉이 그간에 자신이 당한 모든 고난의 원인자들인 형들을 용서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이었음을 담담히 고백하는 모습은 자못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성도들 또한 우리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사건들에 호들갑을 떨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하늘의 관점에서 그 상황과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우리에게 가해를 한 이들이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자발적 용서가 나오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고통과 용서입니다. 그 둘은 전혀 화해가 불가능한 단어이면서도 성도 안에서는 반드시 화해가 되어야 하는 그러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저는 아주 황당한 비보를 접했습니다. 멀쩡하던 대학 동창이 폐암 발견 3 주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교회 안수 집사가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목사님이 자기에게 교육부를 맡겨 주셔서 어깨의 짐이 무겁다고 메일을 보내왔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간 친구입니다. 유난히도 깡마른 체구에 수업만 끝나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그 친구에 대해 그나마 조금 알게 된 것이 대학 입학 후 1년이 지나서였으니까 그 친구가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짐작이 가시지요?

그 친구 아버지는 환경 미화원이셨습니다. 그때는 청소부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으셔서 늘 골골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학교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일터로 달려가 청소 리어카를 끌고 쓰레하다가치우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우리 과 친구들 몇 명이 함께  공부그 일을 거들었었는데 일곱 명이 달라붙어서 그 일을 하는데도 벅찰 정도로 그 일은 고된 일이었습니다.

자기 이외의 모두를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정말 머리를 싸매고 공부들을 하는 서울 대학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더러운 쓰레기와 씨름을 하며 공부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자기 학비를 벌기 위해 밤 시간을 이용해서 경비나 과외 같은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했습니다. 참 고생이 많았지요.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업을 하던 그 친구가 완전히 사업을 들어먹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하던 친구라 그의 사업 실패 소식에 많은 친구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후에 그 친구는 가족들 생계를 위해 식당 종업원, 대리운전 기사, 대형 마트의 창고 직원 등을 전전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2,000년 도부터 중국 조선족 선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는 제 아내와 저, 그리고 청년 한 두 명이 전부였습니다. 그 때에 그 친구가 친구 목사가 선교하러 간다고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학용품 등을 몇 박스씩 사서 비행기에 실어주곤 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친구가 그렇게 어려운 고난을 통과하면서 예수를 믿는 기쁨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늘 힘과 활력소가 되는 삶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괴감과 상실감을 들키지 않기 위한 쇼맨십 정도로 여겼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도대체 저 사람이 어떻게 저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가족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이 속속 그 친구가 믿는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정도면 하나님께서 그 친구에게 상을 주셔서 사업도 다시 성공하게 하시고, 승승장구, 일취월장의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예수를 믿던 그 친구에게 폐암을 허락하셨고 3주 만에 당신의 품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참 반갑지 않은 그런 인생이지요?

그런데 그 친구의 삶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참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지리도 복도 없는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이야기합니다. 그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긴 역할을 충실하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을 성공이라 합니다. 결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라고 정해놓고 합의 해 놓은 그런 것들을 많이 얻어내고, 자신들이 원하는 꿈을 성취해 내는 것을 성공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세상적인 성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실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성실입니다. 그리고 그 성실한 삶을 진짜 성공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하무덤 속, 카타콤에서 250년간을 살며,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리고, 호흡기 질환을 비롯한 각종 질병들에 늘 시달리며, 햇빛을 보지 못하고 탁한 공기와 영양 부족 때문에 오는 성장 발육 저하(평균키 130cm)를 감수하며 대대로 무덤 속에서 살았던 그 신앙의 선배들을 승리자라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반면에 그 지하 무덤 위에서 로마의 찬란한 문명과 권세, 풍성한 먹 거리를 누리며 살았던, 너무 배가 부르면 화장실 옆 구토의 방에서 은 손잡이를 이용해 모두 토해내고 다시 처음부터 음식을 먹었던, 무덤 위의 사람들을 실패자라 부르셨습니다. 이 땅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 승리자이고 성공한 자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하나님 이외의 이 땅의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사는 자들을 ‘마귀의 후손’이라 부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어떤 것에 관심을 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마치 하나님을 반창고나 두통약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반창고나 두통약은 그것이 필요 없어지는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두통을 없애서 두통약이 필요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두통약을 먹습니다. 반창고를 붙여서 반창고가 필요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반창고를 붙입니다. 반창고와 두통약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상처와 두통이 사라지면 반창고와 두통약을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효능과 효과와 유익을 위해 그 분을 믿는 것입니까?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 만족하게 주어지면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는 어떤 유익에 착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반창고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배불러야 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능력이나 재물로 배를 불리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배불러야 하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가슴 속을 채우지 못하니까 자꾸 다른 것들이 먹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태국에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배낭하나만 메고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에 밥을 먹는 날보다 밥을 굶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굶주림에 허덕이며 태국의 시장을 구경하는데 시장에서 바퀴벌레 튀김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사흘을 굶고 난 뒤라 그 때에는 그게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다. 태국에 계신 선교사님 댁을 찾아서 정말 배불리 실컷 밥을 얻어먹고 다시 그 시장에 가서 바퀴벌레 튀김을 보는 순간 구역질이 나서 혼이 났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늘의 것으로 배를 불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힘에 침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른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을 보면서 마치 바퀴벌레 튀김을 대하듯 그러한 느낌이 들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진짜 훌륭한 진수성찬을 마음껏 먹고 배부른 사람이 왜 바퀴벌레 튀김 같은 것에 눈을 돌리겠습니까?

 

여러분,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결국 어디에서 아버지를 다시 찾던가요? 돼지우리 속 돼지의 먹이 쥐엄 열매를, 돼지들과 다투며 빼앗아 먹다가 서러워서 아버지를 생각해 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이들은 이 세상이 돼지들의 이전투구장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돼지먹이인 쥐엄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한발 한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덧없음과 허황됨과 한시 성을 깨닫고 그 돼지들의 세상에서 나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돼지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던 동물인 것을 아시지요? 주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그렇게 부정하고 불결한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음으로 그 돼지들의 세상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영지주의 적, 헬라의 이원론적 발상에서 성속을 이원화 시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육신은 전부 악한 것이니까 부정해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이 아니라 변화와 성숙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살면서 그 세상과 반대의 삶의 원리를 견지하며 사는 자로 성숙이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의 세상은 돼지들의 세상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쥐엄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것들을 돼지들의 것으로 인식시켜 주시기 위해 때로 성도의 삶에서 그러한 것들을 빼앗아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괜찮아요, 하나님,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동역자로 잘 쓰임을 받다가 가기로 결심했어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원망하지 않으며 잘 이겨 내겠습니다.’하고 그 상황을 이겨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하늘의 상급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 그들을 믿는 자,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만일 여러분의 삶이 제 친구의 삶처럼 해피엔딩이 아닌 고생으로 점철되다가 하릴없이 끝나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끝나버린다고 했을 때, 그래도 여러분은 아무런 불만 없이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만일 예수를 믿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난 예수 믿는 것 포기하겠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하나님이냐, 세상의 힘이냐의 시험에서, 하늘의 떡이냐, 이 세상의 떡이냐의 시험에서 망설임 없이 하나님과 하늘의 떡을 선택하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는 요셉의 삶 속에서 바로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에 이유 없는 고난과 이유 없는 모함과 이유 없는 옥살이를 허락하시고 그를 애굽의 치리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에 이미 다 나와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요셉이 마지막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들어서, 잘 참아내고 이겨내면 반드시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가게 될 것이라는 그런 결론을 섣불리 내리셔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영적 신분, 즉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의 상급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요셉의 삶에서 그런 공식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땅의 모든 성도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요셉처럼 애굽의 총리 자리가 상징하는 이 세상의 힘을 누리다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 친구의 예처럼, 아니 이 역사를 살다간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의 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으로 결론이 납니다.

성도는 폭풍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폭풍을 밟아 이겨서 승리를 쟁취하는 이들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평안을 잃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승리자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좇아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유대의 율법 선생인 서기관에게 당신은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쫓아버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이어지는 것이 풍랑이 이는 배 속에서 홀로 주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 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거처가 있는데 나는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거처할 당신 소유의 집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은 이 땅의 그 어떤 곳에도 당신의 마음을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우회적으로 표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당신의 머리를 배의 고물에 두시고 주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머리를 두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 두 이야기는 하나로 묶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머리를 두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의 풍랑 속에서 평안을 놓치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자라는 것을 그 두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으면 가는 그런 피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실재하며 가동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땅에서 그 천국을 사는 자들이 이 땅에 마음 두지 않고 살기에 이 땅의 그 어떤 풍랑 속에서도 하늘에 머리를 두고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는 삶을 살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그와 똑같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천국 비유의 하나로 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4장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그 모든 비유가 다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들 끝에 결론으로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풍랑 속에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잘 수 있는, 이 땅의 힘과 가치에 천착하지 않는, 초연한 이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비유가 나열되고 있는 그 곳에 풍랑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풍랑 속에서 주무신 것은, 하늘을 배게 삼아 주무시는 주님의 안식은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랑으로도 깨지지 않는 것임을 여실히 증명해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주님을 깨우지요? 그 때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뭐라 하십니까?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하고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주님이 좀 너무하시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풍랑으로 다 죽게 된 상태에서 스승을 서둘러 깨우는 제자들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몰아붙이십니까? 그것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일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제자들과 교회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 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랑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굳게 잡고 그 속에서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가 그 풍랑 속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예수의 믿음을 그대로 전수받아 참수되기 하루 전에 감옥에서 쿨쿨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 겨우 깨울 정도로 그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현상에 끌려 다니지 않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가 겪는 모든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원대한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가시적 현상들에 목매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풍랑 속에서의 평안을 증명해 보였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지요? 미국의 변호사이자 재력가였던 spafford씨가 시카고 대화재로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네 딸을 유럽으로 보내던 날 그 분은 네 딸을 모두 풍랑 속에서 잃고 말았습니다. 마치 욥과 같은 고난을 겪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 그가 쓴 찬송은 우리를 아연케 합니다. ‘It is well, ‘It is well’ ‘모든 게 다 잘된 거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그게 풍랑 속에서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는 성도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거룩하고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실패, 좌절, 질병, 기쁨, 행복, 평안, 풍요, 가난 등등 우리 삶에 찾아  오는 모든 현상들이 전부 ‘선’ ‘토브’ ‘보시기에 참 좋은 새 창조의 상태’를 목적지로 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선’의 상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다 성취해 내고, 쟁취해 내어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바람이 다 죽고, 다른 말로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만이 우리 안에 오롯이 남아 우리 자신이 그리로 순종하며 이끌려 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상태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풍랑 같은 세상에서 언제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죽음입니다. 맞습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숨을 멈추는 그 순간에 참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씩 죽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안식 주려고. 그런데 왜 죽겠다고 소리를 치세요. 그냥 조금씩 죽으시면 됩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 맞습니다. 그러한 최종적인 ‘선’의 상태, 완전한 승리의 상태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과 모함과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선’의 상태가 요셉의 총리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모든 것’이 요셉의 고난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관점으로 세상사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에게 해 꼬지를 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나의 선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나에게 보내진 사람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참된 용서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인생과 역사의 목적지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복음의 진의를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를 모함하고, 나를 해롭게 한 이들이 오히려 측은하고 불쌍하게 느껴질 수가 있게 됩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 내가 당신들과 당신의 자손들까지 다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 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 속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고난과 모함과 시험들을 대하면서 자꾸 자신을 죽여 가며 그 속에서도 하늘 소망으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말미 그 풍랑을 잠잠 그해 달라고 그 풍랑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를 흔들어 깨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불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기 전에 그 문제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실력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을 없애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잠자는 데에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에 불어 닥치는 풍랑은 성도의 성숙에 유익한 교육용 교보재인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시려 하시는 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시고 그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끌어내십시오. 그 여러분 각자의 상황의 감옥 속에서 쿨쿨 잠을 잘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이렇게 발전을 했는데 전쟁과 시기와 다툼과 모함과 배신과 억지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가 좋아진다고 하는데 자살 율은 점점 높아져 가고, 없는 사람들은 더욱 더 살기가 힘들어 집니다. 범죄는 더욱 흉악해지고 인심은 점점 피폐해져갑니다.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지고 가정집에도 보안 장치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묻지 마 살인’과 ‘묻지 마 불륜’, 아버지가 친 딸을 강간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난자해서 죽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공해로 인해 마실 물이 사라져 가고, 새로운 전염병이나 신종 플루 등이 속속 의학계에 새로이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10%가 아사 직전에 있는데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비만 인이 10억 명인 시대입니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고 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더러운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물을 떠먹으며 자식들의 반을 수인성 전염병으로 먼저 앞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한 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그 살을 떼어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지출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비만이 의료보험으로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억지와 불평등과 불합리와 이기주의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통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인간의 죄 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인간을 정말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죄인들의 세상 속에서 인간의 죄가 뿌려 놓은 고난들을 함께 겪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폐수를 흘려보내면 그 더러운 물을 함께 마셔야 하고, 누군가가 몰래 매연을 뿜어내면 그 오염된 공기를 함께 마셔야 합니다. 내가 먹어야 할 것을 누군가 자기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기에 내가 굶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발전시키고 쌓아놓은 역사와 문명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통과시키시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과정에서 그 언약의 성취에 필요한 도우미로서의 고난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잘 믿는 어머니가 가난과 질병 속에 던져지기도 하고, 부모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애꿎은 자식이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성도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먼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아무 잘못 없는 요셉이 도구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을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애꿎은 요셉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고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 분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그 모진 수난의 삶을 살아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성도에게도 그러한 역할이 맡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찾아왔습니까? 예기치 않게 사업이 어려워 지셨어요? 예기치 않게 자식에게 문제가 생기셨습니까? 그러한 상황들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세요. 여러분이 당해내는 그러한 상황들을 통하여 누군가가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절망에서 벗어나시란 말입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이면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일은 우리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세요. 복음 전파의 용이를 위해 바울을 감옥에 쳐 넣은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안 가시지요?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자 바울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더 신이 나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을 좇던 사람들도 더 열심히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뭡니까? 뭐긴 뭐예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지요. 성도의 고난에는 그러한 국면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성도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하기에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통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이외이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묶여 있습니다. 가시적 발전이나 성공이나 진보나 향상 등이 주어질 때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반면에 퇴보나 실패 등이 주어지게 되면 급 실망하거나 좌절을 하지요. 불행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힘 삼아 사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그 믿음의 위력을 보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욥에게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면 그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마귀의 빈정거림에 ‘그래 내 종 욥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인지 한 번 봐라’하시면서 아무 잘못 없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을 아시지요? 그건 좀 너무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찰나의 시간 동안에 당신의 위대하심을,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통하여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난이 닥칠 때에 여러분은 믿음으로 이겨내셔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이 곧 결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절대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세상에 보여, 우리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만드십시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롬8:24-26)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또한 함께 가는 성도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한 그릇이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극심한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다른 이들의 위로로 삼으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고난 속에서 믿음과 소망으로 그것을 잘 견뎌내고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다른 형제자매 들이 ‘저 사람도 저렇게 잘 견뎌내는데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하는 위로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 업의 실패로 자살을 결심했던 어떤 가장이 어려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송명희 자매가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에게는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주셨다’며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서 믿음과 소망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뇌성마비 환자가 밝게 웃으며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내 게는 이 세상 재물과 건강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믿음이 있으니 왜 행복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그래도 난 이렇게 건강한 몸과 행복한 가정이 있으니 더 힘을 내자’하고 자살 충동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송명희 자매의 고난이 다른 이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됨됨이를 고치시기 위해 징계로서의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히12:6~10)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여기서 징계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이데이아’가 무슨 뜻이라 했지요? ‘자식 만들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식들로 선택이 된 이들을 참 자식으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 가지 고난의 상황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징계의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지요?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케 해 주시기 위해 고난과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삶의 원리로 경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세상과 어긋난 길로 향하게 되고 그것이 마땅치 않은 세상은 성도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경건함이나 순결함이나 의나 선함이 마뜩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 속 이방인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딤후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눅6:26)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요17:14)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고난에 집어넣으시는 이유는, 성도에게 자신들을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아무 죄도 없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배반, 시기, 질투, 모함, 매 맞음, 투옥, 억지 등등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찰나의 인생 동안에 잠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에 고난이 주어지면 잘 감당하세요. 그 길에 잠시 평안을 주시거든 누리십시오. 다시 고난이 오면 또 견디세요. 또 방학을 주시면 잘 누리시고요.

 

인도에 가면 소 경주를 합니다. 힌두교인 들을 제외한 불교인들, 시크교도들, 라마교도들, 이슬람교도 들이 모여 소 경주를 즐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소 경주에 2,000루피(한화 약 5만원)의 상금이 붙으면서부터 그 소 경주가 즐김의 장소가 아닌 피 튀기는 경쟁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소 경주가 단순히 이웃들이 모여서 즐기고 누리는 레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이 가치라고 정해 놓은 돈이라는 것에 목적을 두게 되니까 거기에 더 이상 즐거움이 없고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사기와 모함이 난무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그 소 경주에서 진 사람이 우승자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과 야합을 해서 자기를 낙오시켰다고 살해를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000루피 때문에.

여러분, 세상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이 가치라고 합의해 놓은 그 어떤 것들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그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하나하나 놓아가십시오. 그 때 진짜 행복이 우리를 덮쳐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겨우 2,000루피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5만원. 그 2,000루피 때문에 이웃을 잃고 하나님을 잃으시겠습니까?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빈손에 하나님을 잡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