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 이유 있는 모함
(창44:30-34)
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챨스 스펄전, 조지 뮬러, 마틴 로이드 존스 등의 목사님들을 배출했고, 그들에 의한 영적 대 각성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으며 한때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영국 교회의 현재 모습은 참으로 암담한 실정입니다. 교회의 예배당은 거의 모두 선술집에 팔려 술주정뱅이들의 잡담과 고성이 오가는 그런 난잡한 곳이 되었고, 어떤 술집은 아직도 첨탑 위의 십자가를 그대로 걸어둔 채 스트립쇼를 하며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던 곳에서 하나님이 모독을 당하고 계신, 적나라한 형국입니다. 게다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에는 설교자가 없어서 신자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해야 하는 그런 지경까지 영국교회는 몰락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세계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중심지였던 영국 웨일즈 지방의 교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 조선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다가 정작 조선에는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대동강 변에 성경책 한권 던지고 그곳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아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도 목회자를 구하지 못해서 신자들끼리 돌아가며 설교를 한지가 꽤 된다고 합니다. 동방의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눈물을 뿌리며 합심하여 기도를 했던 그런 뜨거운 열정의 교회에 설교를 할 목사가 없어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고 지금은 몇 사람이 남아서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 몇 장과 그의 친필 서신 등을 전시해 놓고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을 해 버린 것입니다.
왜 영국의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러한 상황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교회가 언제부터인가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설교가 세속화 되면서부터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말씀 공부보다는 삶의 풍요에 더 관심을 갖고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자 결국 힘을 잃고 비실비실 하다가 망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도와 교회의 지향점이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명기가 되어 있는데 영국의 교회는 세상의 풍요를 좇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기 시작했고 산업혁명을 통한 공업문명사회를 꿈꾸며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힘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와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교회가, 아니 전 세계의 교회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곱씹어 보아야 할 본보기입니다. 지금 전 세계의 교회는 지리멸렬, 망하기 직전의 영국의 교회와 정확하게 같은 모습으로 가고 있습니다. 극심한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에 먹혀 버린 교회의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이제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기복주의와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하니까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목적지와 어긋나는 곳을 향해 가는 교회는 한 두세대 지나지 않아 선술집 정도가 아니라 지옥의 불쏘시개로 전락을 하고 말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도의 목적지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소원 성취가 아니라 완전한 자기부인입니다. 그걸 절대 잊지 마십시오. 완전한 자기부인이야 말로 성도의 완전한 성공인 것입니다. 그 목적지를 헛갈리니까 예배당 안에서도 교만과 자랑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 개혁 교회에서 까지도 기도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하고, 헌금만 하면, 봉사만 하면, 헌신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훨씬 더 수월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무엇을 얻어내고 성취해 내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나’라는 존재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더해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성도의 지향 행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도 시를 한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강>
말이 없이도
천년을 흐르는
저 강물은
제 길을 따라서 간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흘러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다를 만난다
거기서 잠시
흘러온 길을 따라
추억도 그리움도 있겠지만
이내 바다가 되어 길을 떠난다
모든 걸 품어 안고 수평선 너머로
친구도 떠나고 내 사랑도 떠나고
슬픈 맘이 들어, 울 때는 강으로 간다
이 시를 아십니까? 모르시지요? 저만 아는 시니까요. 15년 전에 제가 제 노트에다 끄적여 놓은 글입니다. 후에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강을 참 좋아합니다.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고 언제든지 거기에 있어주는 그 한강이 제겐 친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글을 쓸 때도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강을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강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거의 식별이 안 될 정도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지만 분명 강은 아래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 강이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흘러가다가 결국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해 졌습니다. 답은 금방 나왔습니다. 바다를 만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내 그 엄청난 바다와 한 몸이 되어 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윗자리에 앉혀드리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결국 큰 삶에 연합이 될 수 있는 거구나’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때 위의 글을 써 내려 갔지요. ‘왜 나는 저렇게 큰 바다를 만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올라가려고만 하는가?’하는 자책과 함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서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야 비로소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인생은 아래로 내 몰리는 시험으로 점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위로, 위로 기어 올라가려 하는 존재는 인간 하나 밖에 없습니다. 유독 인간만이 위로 올라가려 애를 씁니다. 모든 것이 아래로 내려갑니다. 심지어 만류인력의 법칙도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들만 하나님 자리로 끊임없이 기어 올라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 했던 요셉의 형제들을 자진해서 종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등장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모함입니다. 특히 다른 모든 형제들의 죄를 자신이 다 뒤집어쓰고 혼자서 종이 되겠다는 유다의 고백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못 뭉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유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왜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셔서, 모함을 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가장 낮은 종의 자리로까지 내 모시는가에 대해 하나의 소재를 택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소재는 바로 ‘금식’이라는 소재입니다.
제가 남미 집회를 떠나기 바로 전주에 신명기 8장의 말씀을 토대로 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도 기근이 찾아오게 되는지에 관해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자인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역사 속에서 폭로시키시기 위함이며,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이 이 세상의 힘인 떡에 의해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행복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은 바로 그 두 가지 시험을 치러내는 시험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 동안에 ‘나’라는 우상을 기각시키고, 이 세상의 힘의 덧없음과 허황됨을 경험으로 깨달아 알도록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요셉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아버지들인 그 형제들에게 그렇게 혹독한 시험을 한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하는 이유는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형들에게 그리고 성경의 독자인 성도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것입니다.
요셉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그들을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인에 의한 종의 자리로의 낮아짐이 요셉의 형들에게 쏟아진 시험의 이유이며 목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동생까지도 죽이려 했던 그 형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직시하게 하고 그들을 종의 자리로 내려 앉히기 위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요셉의 형들은 뇌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창세기 43장 11절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의 말을 듣고 요셉에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의 예물이나 정성을 전혀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습니다. 애굽 총리에게는 그깟 유향 조금, 꿀 조금, 향품과 몰약이 전혀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애굽의 총리로서 모든 것을 소유한 요셉은 형들의 뇌물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회개와 낮아짐이 요셉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뇌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모든 것이 내 것인데 너희들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일갈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기부인과 낮아짐과 십자가의 삶, 즉 자발적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원하시는 것이지 절대 우리의 도움이나, 공로나, 업적이나, 헌금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자발적인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1:11~17)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 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 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 행위나 헌물이나 헌금이 아니라 자기부인에 근거한 이웃사랑과 이웃 섬김, 즉 우리의 됨됨이인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 행위나 헌금이나 헌물, 봉사, 구제는 당연하고 자발적인 열매여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며 그들에게 바랬던 것은 형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하고 그 일을 진심으로 회개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나는 언제든지 종이 되어도 마땅한 자라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동생을 팔아서라도 자신들의 유익과 인기를 챙기려 했던 형들이 자발적으로 종의 자리로 내려가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 우리가 내어놓는 착하고 선한 삶 등을 우리의 인생 속에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부차적인 것입니다. 일차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어떠한 자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 분께 완전히 항복하여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인지하게 하시고 그 자리를 이탈했던 그들의 죄를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그 형제들이 요셉에 의해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요셉의 지위에 편승하여 애굽의 총리 가족으로 화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해결되고 확인 되어야 할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신들의 정체확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신명기 8장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신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2절을 보시면 성도의 광야 시험을 ‘낮추시고 시험하심’이라 하고, 3절에는 ‘낮추시고 주리게 하심’이라 합니다. 성도의 광야는 곧 성도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낮추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시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성도를 대표하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들이 기근을 겪고 감옥엘 들어가고 하는 사건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생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함까지 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회개의 자리로 낮추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 낮아지고, 기근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는 광야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금식과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여기에서 광야 인생을 나타내는 ‘낮추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다’라는 어구에 공통적으로 쓰인 히브리어 ‘아나’라는 단어는 레위기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레16:29~31)
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이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을 지성소로 들여보내어 지성소의 제사를 지내게 함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용서받는 그런 날입니다. 31절의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고 번역이 된 부분이 히브리어 ‘아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속죄일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금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어에서는 ‘아나’라는 단어가 ‘금식’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속죄일의 금식을 ‘아나’라는 단어를 써서 기록을 한 것이고 한글 개역 성경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고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주신 율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사해지는 속죄일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의 금식이 필연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식의 과정, 즉 낮아지고, 시험당하고, 주리게 되는 광야를 꼭 거쳐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금식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 개 나옵니다. 히브리어 ‘촘’이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느9:1)
또 ‘로 아칼 레헴’이라는 단어가 금식이라는 단어로 쓰이는데 이 단어는 ‘떡을 먹지 않았다’라는 금식에 대한 보다 완곡한 표현입니다.(삼상28:20) 세 번째로 ‘케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는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아나’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자신을 괴롭히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왕상21:9)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왓’이라는 단어가 금식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단6:18)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구약 성경에서 쓰이는 금식이라는 단어는 ‘굶주리다, 자신을 괴롭히다, 낮추다, 겸손하게 하다’라는 뜻을 품은 것으로서 성도의 광야 인생을 그 단어 속에 축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신명기에서 낮추게 하고 주리게 하는 것이 광야, 즉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금식=성도의 인생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의 의미를 추적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면, 왜 성도의 삶에 기근이 나타나고, 감옥이 등장하고, 배신과 모함이 등장하게 되는지 잘 알게 되겠지요? 아울러 왜 야곱과 요셉의 형들이 굶주림으로 내 몰리고 왜 요셉이 일부러 형들을 모함하고 옥에 가두는 일을 하는 것인지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금식하라’라고 율법에 명령하신 곳은 단 한 곳 뿐 입니다. 에스더의 금식이라든지 다니엘의 금식 같은 그런 것들은 전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금식을 한 것이지 하나님이 명령을 하신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 한 번의 명령을 하신 게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레위기 16장의 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속죄일이 뭐라고 했지요? 대 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는 그런 날이라 했지요? 그리고 그 날에는 아사셀이라는 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 몰려 죽임을 당하는 그런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광야로 내 몰리는 예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날 하루 이스라엘에게 공식적인 금식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금식이라는 것은 죄와 회개, 그리고 죄로 말미암은 것들에 대한 슬픔,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왜곡된 것들에 대한 회복의 열망에 관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죄 사함을 위해서는 금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풀어보면 하나님 백성들의 완성에는 반드시 광야 인생이 선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다른 말로 광야 인생길에서 기근을 허락하시고, 낮추시고, 시험을 하시면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하나님의 언약만이 행복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모든 일들은, 가나안이라는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필연적 과정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속죄일에 이스라엘에게 금식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금식을 통하여, 밥을 굶는 하루 동안의 ‘기근’을 통하여 죄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고통을 자진해서 당하는 회개의 행위가 속죄의 필연적 전제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주어지는 속죄가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곡기(穀氣)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만 주어지게 됨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굶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식이며 그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금식같은 인생의 기근이 자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금식은 절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밥을 굶으면서 까지 치성을 드리는 무속신앙 적 자해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금식’의 삶이며, 성도는 그 광야의 시험, 즉 자신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고 시험하시는 금식의 삶을 통과하며 자신들의 교만을 내려놓게 되고(자신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행복과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여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금식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풍요의 가나안으로 가는 자들의 필연적 통과 과정인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의 금식, 기근의 삶은 가나안을 약속받은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욜2:15~18, 24~27)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 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16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17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 지어다
18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금식하라’고 해 놓고 바로 그 밑에는 밀이 가득하고 새 포도주와 넘치는 기름의 풍성함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보시다 시피 금식은 이렇게 풍요와 안식으로 가는 필연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이 낮아지고, 기근을 경험하고, 시험을 당하는 사건들을 겪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금식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고 그 금식의 삶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가나안의 풍요와 안식에 다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신명기 8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전체를 금식이라 정의를 했지요? 주리게 하시고 낮추시는 것, 히브리어 ‘아나’가 금식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광야는 무엇을 전제로 한 광야입니까? 가나안을 전제로 한 광야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는 길이 광야니까요. 따라서 광야 인생길, 즉 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시험 과정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과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에게 기근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죄를 폭로시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언어로 바꾸면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삶을 주리게 하고 낮아지게 하는 금식으로 인도하셔서 결국 그들을 자발적인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풍요를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렇게 금식을 하고, 애통해 하고, 고통을 받는 것을 바로 내가 겪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막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 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금식을 이야기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 말은 구약의 금식의 개념을 신약의 부대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그 금식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의 금식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에게 뭐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는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음을 들어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혼인집 손님들이, 직역을 하면 혼인집 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저와 함께 구약을 통하여 확인하신 것처럼, 구약 시대의 금식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요, 과정이었습니다. 바로 그 신랑 예수가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때에는 금식이 아니라 신랑을 영접하여 잔치를 벌여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신랑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여전히 경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하나님 앞에서 월요일과 목요일, 매 주 두 번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꼭 금식을 통과해야만 속죄의 자리, 즉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 할 수 있었던 죄인들이 금식을 하지 않고도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히10:1~5)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속죄일의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속죄일의 속죄 제사와 율법으로 정해 놓은 금식 등이 실제로 죄를 사하는 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속죄일의 속죄 제사와 금식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금식과 예수의 제사가 진짜 제사이고 그 것을 상징적으로 예시하던 것이 율법으로서의 금식과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 율법을 예수님께서 충족시키시고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금식과 속죄가 성취가 된 것입니다.
(마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금식을 대신 다 이루시고 우리를 위한 제사를 완성하셨음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애3:1~11)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금식을 하시고, 감옥에 갇히셨으며, 수난을 당하시고, 온 몸이 찢기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충족이 되고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금식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런가요? 여러분, 지금 제사를 드리세요? 안 드리세요?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까? 제사는 필요 없다고 하십니까?
(롬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세요. 제사는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세요. 그런데 그 제사는 이제 새 부대에 넣을 새 제사예요. 어떤 제사입니까? 우리의 몸을 달라 시는 거예요. 어떻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 백성다운 삶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히13:16)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바로 이것이 신약시대에 요구되는 새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그 속죄제사와 필연적으로 함께 했던 금식은 어떻게 새롭게 변했을까요?
(사58:4~8)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 금식을 누가 하셨어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구약에서 요구하는 금식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죄 사함 받습니다. 예수님의 금식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금식한 것으로 간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가 새로운 제사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금식도 새로운 금식으로 우리에게 요구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의 됨됨이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예수님의 형제로서의 삶,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금식으로, 우리의 광야 인생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금식이었잖아요? 그 예수의 금식을 우리가 이제 이 인생 속에서 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금식은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식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약의 금식, 즉 밥을 굶는 금식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 율법으로서의 금식은 예수님의 수난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건 우리가 당해야 할 금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무시무시한 금식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의 새 부대에 신약의 금식을 담아야 하는데 그 것이 바로 우리의 됨됨이, 자기부인에 근거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바로 그 금식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주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루어 내신 금식과 속죄의 십자가를 우리가 이 땅에서 실제 화하여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고, 시험을 하시고, 모함을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함은 이유 있는 모함입니다. 그 시험은 이유 있는 시험입니다. 그 주림은 이유 있는 주림인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의 그 주림과 모함과 시험과 굶주림, 즉 금식의 삶, 광야의 삶을 통과한 후 애굽 총리의 가족으로서 구별된 고센 땅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복된 하나님 나라가 약속을 통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곳에 넣기 위해서 우리에게 금식을,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참으세요.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분의 굶주림, 여러분의 시험, 여러분의 모함, 여러분의 기근 다 가져 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예수님의 공로로 가나안에 들어와 잠시 시뮬레이션과 같은 과정을 실제화 하여 경험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금식의 인생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러분은 매순간 금식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제는 상징적 율법의 행위였던 밥을 굶는 금식, 그런 거 안 하셔도 돼요.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분의 금식이 되셨고 영적의미에서 여러분은 지금 매 순간 금식을 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의 모함, 하나님의 기근을 통해 매 순간 아래로 내려가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걸 오히려 기뻐하세요. 그 인생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겨우 몇 데나리온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그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구원의 은혜는 일만 달란트, 즉 상상할 수도 없는 크기의 은혜인 반면에 우리가 이 땅에서 손해 볼 수 있는 것의 총액은 겨우 몇 달란트에 불과한 것이라는 비유인 것입니다. 백억 달러를 공짜로 받은 사람이 단 돈 몇 십 불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슬퍼할 수 있습니까? 내 주머니에 백억 달러짜리 수표가 들어 있어요. 그것도 공짜로 받은 겁니다. 그런데 몇 십 불 들어 있던 내 지갑을 어떤 사람이 들고 뛰고 있어요.
여러분, 그 상태에서 그 사람 끝까지 쫓아가서 감옥에 쳐 넣으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금방 공짜로 백억 달러를 받았는데? 그까짓 거 용서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백억 달러 앞에서 몇 십 불에 불과한 이 세상의 손해쯤은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잘 참으세요. 여러분은 이 세상 누구보다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영생을 거저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야말로 대박 난 인생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하세요?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부러워해야지요. 지금 당하는 금식의 삶, 기근의 삶, 시험의 삶, 모함의 삶, 다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고요? 가나안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까 잘 견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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