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90 - 복 받은 자의 삶에 찾아오는 기근 (창42:1~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38

90 - 복 받은 자의 삶에 찾아오는 기근






(창42:1~23)

1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십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 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 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었더라

18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 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 하였더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당한 억울한 감옥살이를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인 생 속에서 예수님의 억울함을 그대로 겪어내야 하는 성도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어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과연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오늘 조금 더 자세하게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형들에게 팔려 종살이를 하게 된 요셉의 삶 속에 일어났던 13년간의 ‘형통한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과 상황과 정황을 가리켜 형통이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형통의 삶은 자신의 뜻과 비전과 야망과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통은 죄에서 비롯된 우리의 꿈을 꺾고 당신의 꿈을 우리의 삶에 성취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쉽지 않은 삶이라 했습니다.

 

이제 창세기 42장부터는 기근을 맞은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게 되는 과정과 그 곳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게 된 야곱과 그 가족들의 애굽 이주가 기록이 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대표요 상징으로 창세기에 등장했던 야곱의 죽음으로 50장에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야곱을 장사지내기 위해 가나안으로 야곱을 옮기는 그 행로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이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으로 옮기는 데 굳이 요단 동편으로 가서 곡을 한 뒤에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애굽은 가나안 서편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 동편 끝이 요단강입니다. 따라서 애굽을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굳이 요단 강 동편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요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칠일 동안 애곡을 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 이름이 아벨미스라임입니다.

야곱의 삶이 어떤 삶과 닮아 있습니까? 그로부터 400년 후에 출애굽을 하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과 닮아 있지요? 성경은 나그네 인생길 147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결국 이스라엘로 완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인 가나안에 입성을 하게 되는 야곱의 생과 사의 모든 과정들을 통하여,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이라는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우리 교회의 삶을 상징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2절에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의 인생과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인생과 죽음을 찾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의 인생에 기근이 닥칩니다. 왜 하나님은 복을 받은 사람의 인생에도 기근을 허락하실까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의 애굽 이주라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다른 이들까지 기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린 기근에 야곱을 밀어 넣으신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내린 기근에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고통을 받게 만드신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우리는 로마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사랑하셨다는 진술을 보았습니다.(롬9:13) 그리고 히브리서의 진술을 통해 야곱이 믿음의 사람이었음도 확인을 한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믿음의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 험악하게 진행이 되다가 결국 이방 땅에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믿음’, 그리고 ‘험악한 삶’이라는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조화가 되십니까? 그게 서로 어울리는 조합입니까? 사랑과 믿음이 근거가 되고, 전제가 된 삶이 험악하고 외롭게 진행이 되다가 결국 그렇게 끝이 난다는 것에 쉽게 동의가 되세요? 거기에 동의가 안 된다면 우리는 야곱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과 삶에도 쉽게 동의가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늘 원망과 불평과 아쉬움의 한숨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야곱의 삶에 나타난 기근의 이유를 올바로 이해를 하시고 현실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기근에 대해 올바로 반응을 하시고 대처를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진 야곱의 삶을 잠깐 돌아볼까요?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가족들에게서 도망을 쳐, 외삼촌 집에서 온갖 사기와 권모술수에 치이며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라헬을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라헬을 잃었고,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라헬의 소생 중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의 피 묻은 옷을 부둥켜안고 아들을 잃은 자의 쓰라린 고통을 십 수 년 간 경험해야 했으며, 먹을 것이 없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동냥해야 하는 처참한 처지에 처해지기도 했고,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지팡이를 의지하여 아들들에게 축복을 한 후 이방 땅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이스라엘, 야곱의 삶입니다. 그런 그가 나그네 인생길을 모두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 즉 이스라엘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믿음’의 결론은 영적으로, 혹은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지 이 땅에서 가시적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믿음을 가지게 된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 입성을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 자체가 결론이나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절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험악한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생전에 세상 적 관점에서의 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복이 어디서 만개를 했습니까? 죽어서 들어간 가나안에서 만개를 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러 저러한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기대와 추측을 무참하게 박살내며 돌진해 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점철되어 집니다.

우리는 섣불리 추측하기를 이왕이면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는 에서가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서 온갖 고생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믿음의 사람 야곱이 애굽의 왕 바로에게 양식을 꾸어 주는 자리에 앉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써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뛰어 넘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결국 승리와 영광의 사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 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음에도 기어코 그 잔을 아들의 입에 털어 넣으십니다.

그런데 항상 아버지의 행사가 옳았습니다. 십자가는 누가 봐도 미련하고 허약하기 그지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진짜 승리였고, 참 된 옳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일에 그 어떤 조언도 할 수 없는 미련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11:33~34)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 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당면하게 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을 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정말 위험한 짓입니다.

 

유대교 랍비인 헤롤드 쿠쉬너는 어린 나이의 아들을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나면서부터 빨리 늙어 버리는 조로 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 품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죽어간 아들 아론을 기억하며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자기는 유대교 랍비로서 누가 뭐래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 없는 삶을 살아왔고,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겼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빨리 늙어가는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를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왜 하나님은 착하게 살고, 목숨 걸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척 만 척 지나치시냐는 것입니다.


그의 책 1장을 보면 ‘고통에는 목적이 있다, 고통은 우리를 연단하려는 것이다, 고통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진통이다, 고통에는 교육적 의도가 있다’는 식의 이론은 정말 극한의 고통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조목조목 그 이론들을 반박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너희가 정말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해보고도 그렇게 하나님의 편을 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 그 사람이 반박을 하고 있는 반대쪽 이론들을 설교하는 설교자입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 고통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연단하려는 것입니다, 고통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진통인 것입니다, 고통에는 교육적 의도가 있습니다.’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헤롤드 쿠쉬너의 책을 읽으면서 묘한 쾌감이 들었습니다. 마치 그 때 제 마음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는 그에게 무언의 응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마 만큼 성도가 겪는 고통은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무게는 견뎌내기가 만만치 않은 것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선이며 그 자체가 옳음입니다.

 

CS 루이스가 아내 조이를 암으로 잃고 난 뒤에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그가 아내를 잃고 난 뒤에 적은 일기입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 정말 처절하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CS 루이스는 아주 열심히 아내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죽자 하나님께 삿대질을 해 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나이CS미 60이 넘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몇 년 후 하나님 품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그 일기는 CS 루이스의 말년의 신앙 상태가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나니아 연대기나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등의 책을 쓴 기독교 변증사상가인 CS 루이스의 일기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책은 산만하고, 문맥도 어수선하고, 원망과 독기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까지도 의심해 봅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허락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다른 저서에서 하나님의 선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 어린 충고와 잔소리를 하고, 때로는 그가 올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체벌을 가하기도 하는 사람을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없애셔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것은 오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고통 속에 던져지게 되자 그 모든 자기의 주장과 논리들이 망각되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고통에 대해 달관한 듯했던 그의 말년에 무서운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그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불신앙을 폭로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렇게 극한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열심까지도 의심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에게 당면해 있는 고통과, 하나님의 선까지 의심하고 있는 나의 불경스러운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성도의 고통은 가중이 됩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자신을 부인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만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그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는 골고다의 십자가가 선이고 옳음이었듯이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열심의 산물인 것입니다. 선은 항상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눅18:19) 선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니까요. ‘선’이라는 단어 ‘good’은 ‘god’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말은 선의 존립 기반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납득이 되지 않는 모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별해 내고 인정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헤롤드 쿠쉬너나 CS 루이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해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항복시키시고 부인시켜서 그 고통과 모순의 과정 끝에 마련되어 있는 요단 강 건너의 가나안에 반드시 넣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모든 일상은 하나님 나라 입성에 꼭 필요한 교육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시험’이라고 부릅니다.(신8:1-3) 시험은 단순히 점수를 잘 맞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력을 키우기 위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실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제와 섬김에 열심을 내는 삶일까요?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실력이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좇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 교인 들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실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선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레11:45)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창17:1)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 하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완전,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실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동안에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존재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가 인생이라는 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면 모두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합격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기근이 닥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지점은 완전성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신앙생활을 통해 도달해야 할 진짜 실력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바로 여기입니다.

 

(신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광야의 삶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는 것은 그들이 정말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를 확인시키시기 위함이며,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좇아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도가 신앙생활이라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며 연마해야 할 실력은, 난 도저히 내 힘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함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더러움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폭로가 되고 인정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함이 우리의 비워진 가슴 속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괴리의 공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다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력함이 폭로가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괴리의 공간이 드러나게 될 때 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괴리를 십자가와 보혈이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굳은살이 박혀버린 그 괴리의 공간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의해 메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긍하며 하나님 앞에서 ‘나’를 완전히 비워낼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메워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생존법칙입니다. 거기에 쓰여 지는 것이 광야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광야 시험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이 얼마 전에 자신의 블로그에 ‘나 정말 목사하기 싫어’라는 글을 올려놓으셨는데 그 중 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끔 목사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리고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놀고 싶어서도 아니다. 으레 하는 예배다. 그러다보니 주전자 속의 개구리마냥 매너리즘에 빠진 내가 싫어 그렇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예배와 설교가 식상하고 진부해지면 안 되지 않나? 그러니 한 번만이라도, 더도 말고 딱 한 번이면 족하다, 쉬고 싶다.

 

그러나 내 솔직한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 설교 때문이다. 나의 어려움은 설교의 내용이나 수사와 문장, 그리고 횟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설교와 설교를 하는 나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 때문에 나는 시름한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눈치를 챘는지 몰라도 나는 안다. 설교하는 내내 나는 나와 싸운다. ‘그러는 너는? 그래서 뭐? 너나 잘 하지 그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벗어날 수 없는 설교인지라, 설교하는 동안 ‘넌 사랑 하냐? 사랑이 뭔지 알아? 말은 잘해’라는 조소와 냉소를 떨치지 못한다. 정말 하기 싫다. 그런 내가 싫다.

설교할 때 속으로 그런 생각을 왕왕 하곤 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설교할 자격이나 자신이 없습니다.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했고, 오늘 설교한 대로 저는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설교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선언하고 내려오면 교인들 반응은 어떨까? ‘와! 우리 목사님 정말 정직하고 솔직하시다.’ 아니면 ‘목사님, 미안하지만 우리는 목사님이 원래 그런 줄 다 알아요. 그러니 오늘따라 유다 떨지 마세요.’ 그것도 아니면 ‘예배하러 오긴 왔는데 목사가 설교를 안 하면 어떻게 이 원하지’하며 우왕좌왕 하던지 할 거다. 격려가 나올지, 냉소가 흐를지, 혼란스러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지 모르겠다.

 

난 그런 말을 하고플 때마다 꾹꾹 참는다. 왜? 내 자신을 훑어내는 것이 창피해서? 아니다. 나는 참 나쁜 놈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가망 없는 죄인이다. 그러니 그런 것 밝힌다고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예수님 제자답게 자신을 훑어내는 것이 뭐 그리 부끄럽겠는가? 다만, 내가 끝내 그런 고백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만약 내가 성도들 앞에서 그런 고백을 했다면, 아마 나는 일 년 52주 내내 그렇게 말해야 한다. ‘오늘도 못하겠습니다.’ 그 다음 주에 ‘오늘도 역시 못하겠습니다.’ 그럴 바에는 목사 노릇 그만 두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양치기 소년이 한두 번의 거짓말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니 즐거웠던 것처럼 나도 어쩌면 그걸 즐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은 나의 설교와 나의 속내를 위선이 아닌 긴장으로 봐 주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설교하는 ‘나’와 자기가 하는 설교의 일차 청중으로서의 ‘나’ 사이의 긴장 속에서 나는 오늘도 면목 없이 하나님의 이끌림에 순종할 뿐이다.”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그 분의 글에 제가 조금 첨언을 했습니다. 그 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글을 쓰신 목사님은 책도 여러 권 내셨고 신학적 깊이도 있는 아주 훌륭하신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신에 대해서 거의 절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기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교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난 잘 할 수 있는데 아직 이 모양이다’와 ‘난 원래 이 모양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구나, 그래서 참 죄송하다’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를 율법이라 하는 것이고 후자를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난 잘 할 수 있는데 아직 이 모양이네’라는 자조를 가장한 교만의 자리에서 ‘아니구나, 난 원래 이런 자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완성시켜 가시는 것이구나.’로 옮겨 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이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한편으론 부끄러웠고 한편으론 너무 반가웠습니다. 저의 마음을 그대로 들켜버린 것 같은 부끄러움과 함께, ‘나와 똑같은 목사가 여기도 한명 있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이 동시에 교차했습니다. 아마 이분이나 저나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이 세상 살아가는 날 동안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폭로 당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즈음에는 노년의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는 장탄식을 하며 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 속에서 ‘예수님과 십자가’라는, 나의 공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해답을 붙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광야 시험의 목적지인 자기부인 혹은 전적신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에 주어지는 신명기 8장 2절의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의 시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인생 속에서 소유에 관한 시험도 통과하게 됩니다. 그게 신명기 8장 3절의 시험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떡에 의해 존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시험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부인이라는 커다란 괄호 속에 들어 있는 ‘세상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풍요라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핍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풍요와 결핍이라는 시험을 통과하며 결국에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즉 이 세상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행복의 전제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풍요나 가난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성도를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성도의 광야 시험의 또 다른 목적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만심과 자신감에 펄펄 뛰던 자아가 부인되고,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의 소유가  행복의 근거가 아님을 알게 되는 성도의 광야 시험 속에 고난과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상황들이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만 붙들라고요. 그걸 야곱과 요셉의 삶이 알기 쉬운 그림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애굽이라는 나라에 요셉이라는 인물이 개입하기 전에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풍성한 추수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심음과 거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 여러분의 수입과 지출,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창8:22)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심음과 거둠과 사 계절과 추위와 더위와 낮과 밤까지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시고 100불을 벌든 1,000불을 벌든 그건 모두 창세기 8장 22절의 하나님의 언약과 그 분의 허락하심 하에 주어지는 거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인 양, 아니 자신들의 노력으로 주어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힘들을 쌓고 모아서 자신들이 추구하고 고안해 낸 행복에 도달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성도들의 옛 사람으로 우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숭배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여 그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이끄심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아숭배, 자기주장에서 자기부인으로의 성숙입니다.

 

잘 보세요. 평안하던 삼각주 애굽 땅에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개입을 하게 되자 흉년이 듭니다. 창세기 41장에 애굽 왕 바로의 꿈이 나오지요? 일곱 마리 살찐 소를 일곱 마리 흉악한 소가 잡아먹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애굽의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에 관한 꿈이었습니다.

멀쩡한 애굽 땅에 갑자기 흉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셉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애굽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전 세계의 역사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흉년 기간 동안에 요셉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그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없게 됩니다.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성도의 삶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도의 삶에 예수가 개입을 하시면 평안하던 성도의 삶 속에 여러 가지 모양의 흉년이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흉년은 단순히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 지고, 병이 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흉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흉년이 있습니다. 풍요 속에서의 흉년,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왜 아직도 공허하지?, 이렇게 돈이 많은 데도 자식이 속을 썩이니까 아무런 흥이 나지 않는구나’ 등등의 흉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흉년 속에서의 흉년도 있습니다. ‘가난하니까 무시까지 당하는구나, 돈이 없으니까 몸에 힘도 없어지는구나.’ 등등 여러 가지 흉년이 성도의 삶에 찾아옵니다. 그 때 성도는 흉년을 맞은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 요셉에게 구걸하여 생존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그 분께 항복하는 자가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 안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인생은 반드시 영광으로 끝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풍년을 추구하는 세상은 결국 흉년으로 마감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요셉의 삶은 결국 영광으로 끝이 나게 되지요?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인내하며 시험에 통과한 성도들의 삶은 영광으로 결론이 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두 자녀가 생기게 되는데 그 자녀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41장 50-52에 보면,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이 바로 요셉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처음 아이는 요셉의 힘든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는 그 고난의 결과의 표현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풍년에서 흉년으로 치닫게 되지만 요셉의 운명은, 고난 다음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세상과 거꾸로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고난이라는 광야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과 야곱,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시기 위해 애굽의 왕이 힉소스 왕조로 바뀌기도 하고, 다시 함 족의 왕조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것을 위해 애굽의 왕이 꿈을 꾸기도 하고 그 꿈대로 풍년과 흉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권세 자들이나 정권이나 이데올로기 등이 전부 뭐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하나님 백성들의 시험을 위한 들러리, 엑스트라, 무대 배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대 제국이 존재하는 것이 여러분의 완성에 쓰이는 무대 세트라는 것입니다. 오바마가 오사마 빈 라덴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양육에 잠시 쓰이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성경에 근거하여 세계의 역사와 여러분의 인생을 올바로 해석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바로의 꿈이 요셉에 의해 해석이 됩니다. 바로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하나님의 백성인 요셉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 즉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 역사를 해석합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나, 자연재해, 전쟁, 에이즈 등의 전염병 등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를 해석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타락상을 해석해 냅니다. 바로가 요셉의 꿈 해석에 의해 지배를 받았듯,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고 있다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위의 상위 권세는 없습니다. 성도 위에 존재하는 상위 권세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해석학 적 공동체로서 역사에 지배당하지 않고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여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크기로 칼에 베었다고 해 보자고요. 칼에 손을 벤 두 사람 모두 아픕니다. 그걸 영어로 pain 이라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요리사의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요리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칼을 다루다 손을 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소망을 근거로 고통을 수월하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친구나 가족의 공격에 의해 손을 베었습니다. 나의 측근이 나를 공격하기 위해 내 손을 찌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pain 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걸 suffering 이라 합니다. 그 두 종류의 아픔을 비교해 보세요.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정도로 다쳤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고통의 크기가 줄어들기도 하고 커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통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주관적 아픔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고통, 불쾌한 감각, 정서적 경험 등은 여러분을 해치기 위한 하나님의 공격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대한 하늘의 왕자와 공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집요한 애정표현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pain속에서도 suffer하지 않으실 수 있어야 하고 suffering 속에서도 속히 빠져나올 수 있는 복음의 올바른 이해를 전제한 실력을 키우셔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