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 내 백성아, 베냐민을 놓아라
(창43:1~15)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3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6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11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12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5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꿈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로 그 뜻이 풀이가 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잠자는 동안에 생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일’이고, 두 번째가 ‘실현시키고 싶은 바람이나 이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도 마찬가지고 독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에서도 그렇고 불어에서도 그렇습니다. 왜 사람들은 밤에 꾸는 꿈과 실현시키고 싶은 강렬한 소원을 꿈이라는 단어로 혼용을 하여 쓰게 되었을까요?
생시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꿈속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이상과 욕망을 향한 인간의 집념을 꿈이라는 단어 속에 집약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욕망을 향한 인간의 집념은 놀랍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때론 꿈과 생시를 동일한 가치 위에 두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상 실현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꿈은 돈을 주고서라도 삽니다.
통일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내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 문희, 문명부인입니다.
김유신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보희이고 둘째가 문희입니다. 그 중 첫째 동생 보희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용변이 급하여 서라벌 산에 올라가 용변을 보는데 자기의 소변에 온 서라벌이 다 잠기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첫째 누이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자 이지에 밝았던 문희는 얼른 비단으로 언니의 그 꿈을 사 버렸습니다. 그 후 김유신의 집에 김춘추가 놀러왔다가 옷고름이 떨어지는 일이 생겼고 그 옷고름을 달아주기 위해 둘째 동생 문희가 김춘추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둘이 결혼을 하여 첫째 누이 보희의 꿈대로 문희가 온 서라벌을 다스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내가 되어 서라벌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첫째 누이 보희는 두고두고 동생 문희에게 꿈을 판 일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정말 문희가 보희에게 산 꿈의 덕으로 보희 대신 김춘추의 아내가 된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돼지꿈이다 용꿈이다 하는 꿈들을 사고파는 일이 있지요?
얼마 전 한국에서 포커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던 사람들이 그 판돈을 조금 떼에서 공동으로 로또를 산 것이 일 등에 당첨이 되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도박을 하다가 로또를 사도 척척 맞는데 우리 성도의 삶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참 재미없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안 만드시니까요.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그 전날 자기 어머니가 꾼 돼지꿈을 샀다는 것이 또 다른 화제가 되었습니다.
정말 인간의 꿈은 그렇게 위력이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꿈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그 가치 있다고 하는 꿈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욕망과 이상 성취에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인간은 자신의 이상의 가치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꿈 또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꿈과 이상을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성도는 꿈에 대한 관점을 달리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꿈까지 노리면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이루려 그야 말로 혈안이 되어 살지만 성도의 삶은 요셉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꾼 꿈을 목적으로 삼아 그 꿈을 이루어 가고 성취해 가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성취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받아 그 꿈이 그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져 가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성도의 삶을 덮쳐서 성도에게 그 하나님의 꿈의 파도 위로 파도타기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만일 성도가 그 하나님의 꿈을 대적하여 서게 되면 성도는 그 파도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꿈은 집요하고 공격적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꿈의 내용이 뭐라 했지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신이 되어 살고 싶어 하던 옛 사람을 부인 시키고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바로 그 꿈을 요셉이 꾼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죄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진정한 왕 앞에 머리를 숙이고 온전한 순종과 복종의 삶을 살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요셉이 꿈으로 꾼 것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자기 꿈에서 본 것일 뿐이고 그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파도를 타고 갖은 수고와 모함과 수난 끝에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그건 요셉의 꿈과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그 현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430년간 종살이를 시키다가 홍해를 가르고 가나안으로 입성을 시키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그 계획이 실행되어지는 데에 도구로 쓰여진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만개를 합니다. 무죄한 예수의 수난에 의해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 결국 그 수난 받은 진정한 하늘의 왕에게 완전한 복종을 하게 되는 그러한 구속사의 이야기가 요셉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바로 이 모습을 요셉의 꿈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 요셉이 애굽의 절대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자들이 그 요셉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은혜를 구해야만 곡식을 얻어먹을 수 있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 기근이 세상을 덮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죄악 된 세상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대 기근에 빠져 모두 다 사망으로 아사해 가고 있는 지경입니다. 사람들은 과학과 문명과 물질의 매력에 빠져 마치 거기에서도 행복과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은 참 기쁨의 기근, 참 행복의 기근, 참 만족의 기근, 참 평안의 기근 속에서 아사(餓死)해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걸 사망이라 합니다.
죄인들이 거기에서 빠져 나와 진정한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은 요셉이 상징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복하고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셉 시대에 있었던 세상의 기근은 바로 그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꿈까지 사고팔며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행복에 도달하려 애를 씁니다.
늘 뭔가 부족한 결핍에 시달리면서도 ‘아닐 거야,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 내가 요즘 많이 지치고 고단해서 이렇게 우울하고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지, 사실은 이게 행복이 맞아’하며 스스로 자위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아무리 큰 명예와 인기를 얻어도,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인간은 절대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느끼는 결핍과 공허의 자리는 하나님이 빠져 나간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그 하나님의 자리를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려 합니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꿈.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찾아가셔서 그들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전히 붙들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빼앗아 버리시는 방법으로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십니다.
쉬운 말로 인간의 꿈을 박살내시면서 당신의 꿈을 성취해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과 요셉과 베냐민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전 장에서 보신 것처럼 야곱은 지금 아들 시므온까지 애굽의 총리에게 빼앗긴 실정입니다. 게다가 기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손자들까지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빨리 애굽으로 가서 그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니 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 총리의 가족으로서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못 갑니다. 아들 시므온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안 갑니다. 이유가 뭡니까?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요구하기를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 요셉을 이미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이제 라헬의 자손 중에 남은 아들이라고는 베냐민 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그를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을 때도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4절에 보면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나오는데 ‘그 아이에게 재난이 있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럼 다른 아들들은 재난을 당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처럼 야곱은 베냐민을 사랑하고 아꼈던 것입니다. 야곱의 유일한 행복의 근거가 베냐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냐민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와 네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내 놓아야 한다’ 이게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애굽 총리의 요구였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은 그 베냐민을 뺏기 위해 야곱의 삶에 기근을 더하십니다. 그래도 베냐민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유다가 아버지께 간청을 합니다.
(창43:8,13-14)
8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 하리이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베냐민이 가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게 된다는 유다의 말을 듣고 야곱은 비로소 베냐민을 놓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경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베냐민을 포기시키시기 위해 온 세상을 기근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베냐민을 빼앗기 위해 그의 인생에 기근을 더 강하게 부으시자 그가 결국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14절을 보시면 야곱의 신앙이 어느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꼭 다시 돌려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신다 해도 거기에 순종하겠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행복의 근거는 베냐민이었지만 이제 야곱의 행복의 근거가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냐민보다 더 소중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신다 해도 감수하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한 항복의 자리까지 가는 데에 쓰인 것이 뭡니까? 기근입니다. 극심한 기근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을 수 있는 극심한 기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기쁨의 근거를 삼으려 할 때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가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께만 행복의 근거를 두게 만드시고야 마십니다.
재산, 건강, 명예, 자식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성도의 의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험악하기만 한 삶을 살았던 야곱이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의 덕으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게 되는 문턱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베냐민만 놓으면 야곱은 그야말로 당시 세상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애굽 총리의 아버지로 기근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실은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과 함께 최고의 복락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존 대상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상징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야곱의 그 인생을 드라마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다보면 ‘그거 놔, 그것만 놓으면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이 기다리고 있어’하고 자기도 모르게 외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답답해서.
아마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가 지금 붙들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도 없는 평강과 기쁨과 안식을 경험하게 해 주실 텐데 여전히 그걸 꼭 붙들고 있는 당신의 자녀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어요.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그 현실을 적용시켜 볼까요? 내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자녀를 놓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걱정하게 하는 그 자녀가 바로 여러분의 베냐민입니다. 그 자녀를 내가 책임지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겨 버리세요. 야곱처럼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이시는 거지요, 뭐’하고 체념해 버리세요.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내가 조바심 낸다고 해서 그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의 염려와 조바심에서 그 자녀를 놓아버리시고 그 자녀의 문제 말고 그 자녀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위해 기도하세요. 대부분 우리가 자녀습니다. 속을 태우는 것은 내가 기대 그 자만큼 안 되어서 속상한 거지요? 자녀그 곧 나의 존재의 확장(extension)이라 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내 소원을 투사해서 나의 만읱녀그채우려 하는 것은 여전히 나만을 사랑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왜 그 자녀를,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체면을 세우는 도구로 생각하세요. 그 자녀도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을 해야 할 것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 된 사람이면 어떡하나’ 이어야지, ‘왜 저 자식이 내 욕심대로 되어 지지 않나’ 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려놓고 기도 하세요. 그게 우리의 베냐민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재산, 명예,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연연하는 것은 세상의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이 정의하고 규정하고 합의한 이 세상의 힘으로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상대적 행복과 우위(優位)라는 치졸한 만족을 원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한 것이 내게서 빠져나가면 견뎌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어야지 이 세상의 힘과 물질이 성도의 가치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좀 자유로우세요. 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그래서 심지어 나를 의존시키기까지 하는 그런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겠다는 그런 야곱의 고백을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기 위해 거기까지 끌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도득한 야곱에게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보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렘10:3-5,11~16)
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2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 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깃, 목적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어야지 이 세상의 은금으로 만든 우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복을 방해하는 베냐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생기도 없고, 화도 복도 주관하지 못하며, 헛것이요, 망령된 것이요, 하나님이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아, 너는 나를 구하라, 나만 바라보아라, 그래야 내가 진짜 복을 줄 수 있는 거야,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베냐민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고 시므온도 아니고 바로 나 여호와다’라고 집요한 짝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베냐민까지 빼앗아 버리심으로 야곱의 완전한 자기 부인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행복과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손에 쥐고 있는 베냐민만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전히 꼭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여전히 영적인 기근 속에서 사망의 증상들에 당하며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데 솔직히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사라지나요? 아니지요? 잘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염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죽는 겁니다. 그렇게 염려하고 있는 여러분을 죽이세요. 죽은 자는 염려하지 못하니까요. 그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되는가? 아니요. 우리는 그렇게 죽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대신에 예수님을 죽여 버리셨어요. 여러분을 그 분 안에 모두 넣으시고 그 분을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셨어요.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걸 믿으시면 됩니다. ‘난 죽은 자다’ 그게 오롯이 믿겨질 때 우리는 염려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절대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때마다 십자가를 붙드셔야 합니다. 염려하는 나는 이 염려를 주는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수시로 믿음 안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절대로 우리가 세상의 염려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염려하는 여러분 자신은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시체가 무슨 염려를 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 염려하는 그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던 우리의 옛 자아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의 자기에 대한 평가나 인기나 자랑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마치 시체에게 치장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까요. 죽은 자에게 무슨 명예와 재산과 자랑과 인기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완전히 죽은 자라는 것을 믿고 나의 모든 걱정과 염려와 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야곱처럼 ‘죽이시려면 죽이세요. 가져가시려면 가져가세요.’하는 옛 사람과 옛 세상에 대한 체념과 포기가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난 이 세상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니까요.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 때 비로소 하늘의 평안과 안식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의 베냐민을 놓으십시오. 이 세상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여러분의 이름을 놓으세요.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른 이름을 내려 하지 마세요.
그런 의미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격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죽어서 남게 될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살다보니 이 세상이 이렇게 척박하게 변한 것입니다. 돈 700원을 빼앗기 위해 이웃집 할머니를 죽이고,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친구와 함께 목 졸라 살해해서 쓰레기장에 묻어버리기도 하고, 카드빚을 갚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서 저수지에 던져 버리기도 하는 이 세상, 왜 세상이 이렇게 점점 더 악하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나의 유익과 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죄인들의 본성이 이 세상을 이렇게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거기에서 그 부자의 이름이 뭡니까? 부자입니다.
그 사람이 추구하고 매진했던 것이 그 사람의 특징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 그 사람의 특징을 들어 설명을 하지요? ‘왜 있잖아, 머리 크고 다리 짧은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머리 크고, 다리 짧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 돈 많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돈 많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을 갖기 위해, 아니 어떤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세상을 사세요.
돈 많은 사람, 훌륭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키 큰 사람, 높은 사람, 착한 사람, 똑똑한 사람,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 어떤 이름을 위해 오늘을 달리고 계십니까? 세상에게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셔서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달려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라고 하셨습니다.
(사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될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미 기록을 해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바로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10:20)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의해 파송이 되었던 제자들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하는 기적을 경험한 뒤에 기쁨에 겨워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기적과 능력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한 능력과 업적과 평가는 곧 사라질 것이지만(그게 우리가 남기고 싶어 하는 이름) 하나님 나라에 기록된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이름 새기고 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으로만 행복해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의 삶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가난하고,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허락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자기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로 완성되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당신 자녀들의 베냐민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품 기쁨에 속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기쁨입니다. 금방 솟았다가 금방 사라지는 그런 신기루 같은 기쁨입니다. 로또가 맞은 순간의 기쁨이 평생 지속되나요? 아니요. 금방 그 돈이 부족한 듯 느껴집니다. 자식이 하버드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기쁨이 영원히 지속됩니까? 금방 시들해 집니다. 그건 일시적이며, 제한적이고, 유한한 기쁨입니다.
진짜 기쁨,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그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 현실만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현실이니까요. 잠깐 있다가 사라질 그런 것으로 살맛을 삼아 살면 안 됩니다. 인생의 이력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 그런 업적을 세상에 자랑하는 그런 인생의 이력서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부자라는 이름 안 가져도 됩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름 안 가져도 됩니다. 선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이름 안 가져도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가 진짜 부자이고, 그가 진짜 지혜 있는 자이며, 그가 진짜 선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을 모두 진멸 하려 하셨을 때 모세가 그 앞을 막아서며 ‘그들을 죽이시려면 먼저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바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나요? 아니요. 그 모세의 이름, 바울의 이름으로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 바울의 이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준비하시고 그 이름을 십자가에서 지우셨습니다.
위대한 모세의 이름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이름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 지워지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우시는 대가로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행복하지 않으세요? 그것으로 기쁘지 않으십니까?
왜 항상 여러분의 문제와 결핍에만 관심을 두세요. 눈을 들어서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여러분의 나그네 인생길 동안에 여러분이 하셔야 할 유일한 것은 여러분의 베냐민을 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베냐민을 놓을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놓게 만드시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빼앗김과 기근을 절대로 참아낼 수 없는 우리의 실존을 깨닫게 해 주시기도 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서어서 여러분의 베냐민을 놓아 버리시고 하늘의 복을 마음껏 누려 보세요.
일본에서는 ‘KY'라는 단어가 유행이라는데, 그 말은 쿠키가 요메나이空氣が讀めなぃ라는 말의 앞뒤 글자를 영어 알파벳으로 표현한 것으로 ‘공기를 읽는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뜻이라 합니다. 이 말은 소신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맞춰 자기를 길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왜소해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게 인생인가 싶어 슬퍼집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짜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어 그 세상이 제시하는 방향과 길을 좇아가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 방향과 그 길을 벗어나면 왕따가 되는 듯한 박탈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렇다치고 왜 성도라는 사람들까지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힘까지도 동원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의 베냐민을 지키고 수호하는 것에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베냐민을 놓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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