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 금관의 예수
(창42:24~38)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 하셨는고 하고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30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 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대학 시절에 저는 ‘탈 반’이라는 동아리에 가입을 해 활동을 했었습니다. ‘탈 반’이라는 동아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탈춤을 배우고 그 탈춤사위에 배어있는 서민들의 애환과 노고에 대해 토론도하고 공부도 하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그 ‘탈 반’이라는 동아리에 가입을 한 것은 원래 제가 탈춤을 좋아해서도 아니었고 민족 문화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탈춤에 쓰이는 탈바가지도 한번 못 본 상태에서 그 동아리에 가입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탈 반’ 동아리의 대 선배 중에 영화감독 장선우 선배와 시인 김지하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영화와 시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특히 김지하 선배는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그 분의 시집 들을 거의 달달 외우고 있었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은 직접 노래로도 만들어서 불렀을 정도입니다. 그분의 작품 중에서 대학 입학 당시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은 그 분이 지명 수배자가 되어 도망을 다니시면서 쓴 희곡 ‘금관의 예수’였습니다.
특히 그 희곡의 첫 부분에 나오는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시에, 역시 미학과 선배인 김민기 선배님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는 동아리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늘 빠지지 않고 불러 제끼는 저의 십팔번이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금관의 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끝없는 겨울, 밑 모를 어둠, 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 못 견디겠네 못 견디겠네
이 기나긴 가난, 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 더는 못 견디겠네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은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그 때는 이 노래와 시와 희곡을 읽으면서 약자들을 외면하시는 듯한, 예수님의 처사에 대해 참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공의와 공평과 정의에 무관심하신 분처럼 이 세상을 운행해 가시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마치 약자에게는 등을 돌리고 계신 듯한, 기회주의 적이고 성공 지상 주의자처럼 느껴지는 예수를 계속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갈등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학 때까지 20년 가까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나, 역사의 존재 이유, 그리고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부자가 되어야 하고,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고,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가족의 출세와 안위가 최고의 지상목표라는 것을 복음이라고 배워 왔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내 팽개쳐 놓은 듯 보이는 가난하고, 약하고, 못 배우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게으름이나 무관심, 혹은 그 분의 몰지각한 기호나, 불공평한 처사의 산물이라 생각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 김지하 선배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가난과 착취와 불공정과
불공평 등의 상황을 직면하게 되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함께 하소서’라는 무지와 불신앙의 목소리를 높였었던 것입니다. 세속적 복음의 잣대 아래에서는 주님이 그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용납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관의 예수라는 연극을 보면, 시멘트 속에 갇혀 버린 예수님의 머리에는 배때기 사장이 헌금을 하여 만든 화려한 금관이 씌어있습니다. 그 밑에서 그 예수의 금관을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배때기 사장이 나이어리고 경험이 많은 잘빠진 창녀를 찾습니다. 그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그 사장을 쫓아가는 장면 뒤에, 그 금관의 예수를 멀뚱히 바라보던 문둥이가, 그가 생각하기에 돈 많고, 깨끗하고, 잘난 이들의 친구인 금관을 쓴 예수를 향해 욕지거리를 하다가 그 아래 오물을 토해내고 쓰러집니다. 얼마 후 그 문둥이의 얼굴 위로 예수님의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그 금관을 쓴 시멘트 예수가 말을 합니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시멘트의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 속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서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받았느니라."
문둥이가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금관의 예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의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으로,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날 가두었다."
물론 이 희곡은 신앙적 관점에서 타락한 교회 상과 올바른 신앙의 본질을 논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기보다는 7,80년대의 군부독재 하에서의 억지와 불평등과 폭압에 대한 빈자의 항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그냥 말없이 묵인하고 있는 신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연극입니다. 사실 그 연극에 등장하는 역사 속에서의 피고는 배때기 사장과 게으른 신부를 포함한 이기적인 사회 전체입니다. 그런데 그 연극의 제목이 ‘금관의 예수’입니다.
예수가 대표로 욕을 먹고 있단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억지와 착취와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한 풀이를 예수에게 하지요? 왜 예수가 그 욕을 다 먹어야 합니까?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촛불을 높이 들고 예수님의 공의의 시행을 촉구하는 사태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 왜 직무유기 하고 있냐고, 왜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 하냐고’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 앞에서 오만불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렇게 오해 되어지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일등 공신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기를,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문제해결이나 소원 성취를 도와주는 그런 분으로 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를 시멘트 안에 가두었나요? 누가 예수의 머리에 가시관 대신 금관을 씌워 놓았습니까? 누가 예수의 십자가를 창과 방패에 새기고 패권주의와 영웅주의와 성공주의의 앞잡이가 되어서 십자가의 진의를 왜곡했습니까?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놓고, 예수를 믿으면 그 금관을 쓴 예수와 어울릴만한, 성공적이고 화려한 삶이 보장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부터 예수는 십자가 대신 금관을 쓰고 시멘트 콘크리트 안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왜 나를 돕지 않느냐’는 빈자들과 약자들의 돌팔매를 받으며 지금까지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를 져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하며, 가난이나, 질병이나, 슬픔이나, 고통까지도 거룩의 완성의 과정으로 통과하며, 감내하며, 수긍해야 한다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본질이 교회 안에서 실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교회의 지상 목표도 이 세상에서의 부와 편안함과 화려함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고, 억지와 불평등과 착취를 눈 감아주는 예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작 자기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지게 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분노가 극에 달하지요.
정말 예수님이 가난하고, 병들고, 못 배운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의 외면과 직무유기 때문에 그런 저주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백성답게 만들어 내십니다. 예 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실상과 그들이 생산해 놓은 열매들을 자각케 하시고 하늘의 삶을 소개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하늘의 백성답게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의 가난과 학대와 착취와 불공평을 해결해 주시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난 속에서, 때로는 질병 속에서, 때로는 카타콤 속에서, 때로는 맹수의 우리 안에서, 때로는 문둥병 속에서, 때로는 공산주의 하에서, 때로는 노예의 자리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양육하시고 성숙 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아래에 놓여 있는 이들이 문둥병을 여전히 앓으면서, 지독한 가난 속에서, 핍박을 피해 도망간 지하 무덤 속에서, 공산당의 총부리 아래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이 실제로 역사 속에 존재함을 증거 하는 자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사랑이며, 예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현실의 상황과 무관하게 여전히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 런데 불편한 환경을 개선해 주지 않고 고단한 상황을 변화시켜 주지 않는 예수는 마치 부자들만의 편을 들어주는 불평등하고 기회주의적인 예수인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본질과 기독교의 지향점이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는 확연한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금관의 예수라는 시가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함께 하소서’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함께 하소서,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생산해 내는 것은 착취와 억압과 분열과 억지와 불평등과 학대 뿐 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순복하는 삶만이 이러한 더러운 역사의 배설물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지향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올바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잠시의 과정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도 분별하지 못한 채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도 하나 해결을 못 하시나? 왜 하나님은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가?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질병 속에 내 팽개쳐 두시는가?’하는 불경한 시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교회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 놓은 금관을 벗겨내는 데에 주력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예수의 금관을 벗겨낼 수 있습니까? 올바른 복음과 올바른 신앙생활의 본질을 가르치고 배워가며 우리 자신이 벗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인기 있고, 명성 있는 자리에 앉는 것을 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의 가난을 해결해 주고, 불평등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평등의 자리로 옮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불가능하며, 얼마나 치사하고, 패역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폭로하시고, 그 더러움 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부으셔서 그 모든 오물들을 덮으시려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의 죄인 됨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출산해 놓은 가난과 질병과 불공평과 억지와 부패 등을 오히려 경험하면서, 그렇게 폭로된 이 세상의 죄악을 올바로 직시하고 인식하며, 자신도 그 더러움과 패역함의 출산에 일조를 한 죄인의 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과 질병과 억지와 부패와 착취를 하나님이 만드셨습니까? 바로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사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 던져졌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이 그러한 쓰레기 같은 역사의 탄생의 주인공임을 깨달아 알면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쏟아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크기를 절절히 체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가난에 몰아넣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질병에 노출되게도 하시며, 때로는 억지와 불공평 속에서도 건져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만 외치고 있다면 그가 바로 불신자입니다.
따라서 성공주의나 물질주의에 물든 기복신앙도 문제이지만, 기독교의 목표 지점을 이 땅에서의 불평등과 억지와 가난과 고통에서의 해방쯤으로 폄훼하는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도 역시 예수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는 옳지 않은 가르침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의 죄가 양산해 놓은 억지와 불공평과 부패 등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의 경향으로, 지향점으로 갖고 있으면서 본인 먼저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어야지 그렇게 십자가를 앞세우고 무력이나 시위를 통하여 싸우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앞세워서 무기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요18:36)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충분히 바리새인들이나 로마와 싸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의 무력에 의한 승리나 이 땅에서의 세상 적 성공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승리입니다.
성경은 노예가 노예의 자리에서 그 주인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도리라 하지 어떻게 해서든지 주인의 세력을 뒤집어엎어서 공평한 세상을 만들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가 살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의 공평한 삶, 부유한 삶, 인기 있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친 베드로의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마26:51~53)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 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우리는 우리의 검을 뽑아 들고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출산해 놓은 것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허무한 것인지 잘 배우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완성해 놓으신 은혜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 속에서도 그 나라를 믿음으로 미리 사는 자로 성숙되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이나 질병이나 억지나 부패나 착취나 더러움 등에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지 마세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유익만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착취를 하고, 사기를 치고, 억지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우리는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게 된다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고통과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발아래에다 가래침을 뱉는 문둥이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당연히,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기근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를 착한 삶, 선한 삶,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건전하고 건강한 삶 등으로 정의하는 것도 옳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도 성공주의와 행동주의의 산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선하고,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분투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 자신이 훈련하고 연습해서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선한 삶을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훈련받고 양육 받은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앞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인간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러한 불가능한 존재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당신의 뜻에 맞게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실수와 넘어짐을 그대로 놔두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것인지 똑똑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면서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불가능한 자신의 실체 확인과 성령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긴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때로는 절망하고, 슬퍼하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가끔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성령의 열매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을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간혹 ‘선한 삶을 열심히 훈련하자, 연습하자, 노력하자’라고 다그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지향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 하나님의 열심에 부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폭로당하며 우리의 위선의 껍질이 하나하나 벗겨져 갈 때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적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의 삶이 우리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선한 삶이며, 진짜 순결한 삶인 것입니다.
왜 아프리카 사람들이 슈바이처를 존경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왜 리빙스턴의 시체가 영국으로 옮겨지던 그날 아프리카 사람들이 ‘슈바이처는 우리를 이용해서 왕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리빙스턴은 진짜 우리의 아버지였다’라고 그 운구행렬을 막아섰는지 아세요?
둘 다 똑같이 아프리카 선교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지만 슈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선교와 구제활동을 했던 사람이고 리빙스턴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알고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선교와 구제활동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입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저 우리가 본을 받아 좇아가야 하는 훌륭한 위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구제와 선교와 섬김과 선행은 자기 의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얼마나 교활한지 경건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자들입니다.(딤전6:5)
고생이 되더라도 선행을 하고, 섬김의 삶을 살고, 구제에 힘을 쓰다보면 인간은 은근히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줍니다. 그리고는 은연중에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자신은 뭔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기가 한 선한 일이 자기에게 점수를 주고, 스스로에게 만족을 가져다주면 그게 슈바이처의 선행인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선행과 섬김의 삶이 나타나게 되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저 잘했지요’가 아니라 ‘하나님,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선한 일을 만들어 내십니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고백입니다.
(눅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보세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토색, 불의, 간음과는 거리가 먼 순결한 삶을 살고 있고, 정의로운 일만 골라하는 바리새인이 멀찌감치 서서 가슴을 치며 ‘저는 죄인입니다’하고 있는 세리를 보며 ‘저는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바리새인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폭로 당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하고 가슴을 치며 고백하는 세리를 의로운 자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세리의 고백이 자기부인의 고백이며 그 자기부인의 자리에서, 자기 자랑과 자기 의와 자기 교만과 자기주장과는 전혀 무관한 진짜 의로운 삶, 진짜 선한 삶, 진짜 착한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러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힘을 빌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요?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착하고 순결하고 고상한 삶을 살고 있어요.’라는 자랑을 할 수 있는 도덕적 완성의 자리도 우리의 목표 지점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정의를 위해 이 한 몸 불살라 공평과 정의가 통용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도 우리 성도의 올바른 지향점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무관하게 행해지는 그 어떤 고귀한 행위도 다 헛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무관하게 얻어진 부와 명예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닫는 것을 제 일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인지를 폭로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나를 완성시켜 가시는 지를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정의가 나오고, 그 속에서 진짜 섬김이 나오며, 그 속에서 진짜 선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다른 모든 종교적 행위나 구제나 선행에 앞서 죄의 처참한 실상과 그것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순결하고 온전한 은혜를 깊이 배우시고 경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어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열심에서 나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를 절감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명 설교나, 근사한 은사나, 엄청난 구제 사업이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사르게 를 위한 분신의 투쟁이나, 산을 옮길만한 멋져 보이는 믿음이나, 지식들까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쓰인 헬라어 ‘우데이스’는 ‘nothing, none’이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 되것도 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사르게 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과시나 엄청난 구제를 행하기 전에, 그리고 것은 하겘진 지식과 학식과 부를 자랑하기 전에, 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형들과 야곱이 ‘앞서 보내어진 요셉’에 의해 그들의 죄와 그들 자신의 실체를 폭로 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셉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추악한 일이었는지를 감옥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잃으면서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베냐민이라는 인물을 가운데 세우고, 그를 빼앗아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 그들을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고,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요셉이 지금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인 자신의 형들 앞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복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거기에 쏟아 부어진 은혜의 분량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가 살려내는 것입니다. 요셉이 단순히 형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떠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마치 야곱이 형제들의 짐 속에 돈을 넣어두고는 ‘너 도둑놈이지?’하고 묻는 것과 같은, 이해할 수 없고 억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마치 요셉의 형제들처럼 ‘왜 나는 이렇게 재수가 없나?’하고 요셉의 감옥에서 한탄한 것과 같은 한심한 상황이 여러분의 삶에 펼쳐지고 있지는 않으세요?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죄인 됨을 폭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폭로와 자괴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하늘의 삶을 조금 씩 조금 씩 끌어내고 계신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십시오.
(고전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천한 것이며, 멸시 받아 마땅한 자이며, 지혜도 없는 자며, 약한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티끌인 나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으신 그 하나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만큼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내 소원을 안 들어주세요?’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건방진 항의가 아닌 ‘하나님, 티끌인 제가 이렇게 살아서 생각하고 움직이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이면 거기가 지하 무덤이든, 맹수의 우리든,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든 기쁨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참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서 터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예수의 머리에 씌워놓은 금관을 벗겨드려야 합니다.
금관을 쓰신 예수와 어울릴 수 있는 자는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마귀 적 가르침에서 빨리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는 금관을,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의 머리에 씌워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서도 어서 벗어나십시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렇게, 저렇게 멋진 삶을 살아냈어요. 저 기특하지요? 저는 저 사람들하고는 다르지요?’라는 바리새인 적인 엉터리 행위주의 적‘ 자기의’를 버리고 ‘하나님, 내가 창녀이고, 내가 문둥병자이며, 내가 세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저의 모습은 그렇게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저를 작은 예수로 보아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하는 참된 신앙고백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그 때 우리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맺으시는 진짜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상담 전화를 몇 통 받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갑자기 mental problem이 생겨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대학생 아들을 두신 아버지의 전화였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어떤 장로님의 부인의 전화였습니다. 또 다른 전화는 치매에 걸린 어머님을 두신 어떤 권사님의 전화였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암에 걸린 딸을 걱정하는 노 전도사님의 전화였습니다. 상황은 다 각각이었지만 그 분들의 질문은 한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던 아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렇게 발작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중간 중간 정신이 들면 성경을 읽기는 하는데 그가 정말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술도 하나 못 끊는 우리 남편이 과연 장로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었으며, 평생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어머님이 치매에 걸리셔서 지금은 사람도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성경책을 발기발기 찢으시기도 하시는데 우리 어머님이 정말 구원을 받으셨겠는가였으며, 암에 걸린 자기 딸이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그 병을 점점 악화되도록 놔두시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 분들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원 받을 수 있다고요.
하나님은 그런 분들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정신병이나 중독이나 치매나 질병 등으로 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나의 은혜의 크기는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임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바로 내가 미친 사람이며, 바로 내가 중독자이며, 바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수시로 잊고 사는 치매 환자이며, 내가 바로 암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사망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자라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우리의 힘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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