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8. 고난의 목적지 (창39:20-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37

88. 고난의 목적지






(창39:20-23)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 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공식처럼 적용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남의 것이 나의 것보다 더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죄인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성경에서 죄와 사망의 뿌리라 제시되고 있는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남의 것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특징은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옛 아담 적 속성을 여전히 ‘오염(macula)’이라는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조차 여지없이 적용이 되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런데 그 중 나의 것이 남의 것보다 커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만큼은 이 세상에서 내 것이 제일 커 보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내 옆에 태산에 깔려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나의 손톱 밑에 들어있는 가시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지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요. 안타깝게도 그건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사실(fact)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 반갑지 않고, 버거우며, 지긋지긋한 고난을 필연적 통과의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롬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 이니라


(고전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감당할 시험’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어로 보면 ‘such as is common to man’입니다. ‘누구나 다 겪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나라에 입성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할 통과의례로 고난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공히, 그리고 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유일한 것은 만사형통, 소원성취, 입신양명, 전도양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 그 고난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특히 요즘은 그 고난이라는 단어가 아주 실감이 나지요?

지금 전 세계는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 총체적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라는 거대한 배가 엄청난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그런 위태한 형국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 정도가 아닌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도 위협을 느낄 만큼 힘든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고, 부자들도 투자액의 손실 등으로 참담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 독일의 어떤 갑부는 자기 재산이 1조원으로 줄었다고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고난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제외시켜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지금 그 고난에 동일하게 던져져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 속에서 자기의 생을 마감한 한 성도의 임종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주에 그 분을 심방했을 때,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분노 속에서 내뱉었던 말이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40년 이상 예수를 믿었는데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두 시간여 동안,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했고 예수님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 직전에 저를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서둘러 나갔는데, 제가 도착했을 때 그 분은 이미 코마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이 아직 청각은 살아있으니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자매님, 이제 천국 가셔서 좋으시겠어요, 무섭지 않지요? 제 말을 알아듣고 계시면 손가락을 움직여 보세요.’ 그 분의 검지가 ‘까딱’하고 살짝 제 손바닥을 스쳤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이런 질병도, 아픔도, 슬픔도, 가난도, 억지도, 업신여김도 없는 하나님나라에 가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정말 자매님이 부럽습니다.’했더니 다시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그리고는 숨이 멎었습니다. 어떤 이가 제 손을 잡은 채로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그 영광스러운 상황이 제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 분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 분을 덥석 끌어안으셨을 것입니다. ‘내 자식 고생 많았다, 이제 넌 영원한 나라에 온 거야, 이제 진짜 안식 속에서 편히 쉬어라’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 분과 하나님과의 역사적 상봉 장면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손을 잡고 저도 그냥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요.

그 분은 분명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니 참 좋다’는 말씀을 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이 느끼시기에 그 분의 인생은 고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지금 지병으로 고생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분들의 삶에도 그런 고난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고난을 통하여,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성도의 고난의 목적지가 과연 어디인지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요셉의 고난이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장관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된 요셉은 본격적인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던 자식이 자신의 생사여탈을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준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얼마 안가서 주인의 집 제반 일을 모두 맡아하는 집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외모가 출중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출중한 외모와 성실한 삶이 주인마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주인마님이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 두려워 그 주인마님의 청을 완강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요셉이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범사에 형통’ ‘만사형통’이라는 어구를 마치 결론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시편의 말씀에서 찾아 읽었던 것처럼 요셉의 그런 삶은, 그의 영혼이 쇠꼬챙이로 뚫리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고,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만사형통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시편104편에 요셉의 고난이 담고 있는 만사형통의 의미가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105:17~19)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이렇게 요셉의 고난이 담고 있는 만사형통의 의미는 한마디로 연단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가 그 말씀에 의해 단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만사형통은 한마디로 고난을 통한 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단은 무엇을 위한 연단입니까? 그것은 그가 받은 계시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 계시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에 요셉에게 고난이 온 것이니까요. 요셉이 무슨 계시를 받았습니까?

요셉은 지금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는 자로 서 있음을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요셉이 성취하고 있는 야곱의 언약을 보면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27:29)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자신의 삶으로 성취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그가 만민의 섬김을 받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고난을 통한 연단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그 이야기를 해석하면 시위대장 집에서의 집사생활과 왕의 신하들이 갇혀있는 감옥생활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 등이 그의 총리생활을 향한 준비과정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계시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왕으로, 열국의 지도자로, 모든 이들의 주로 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수난이 필연적이었지요? 그러니까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가 상징으로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하는 13년간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요셉이 예수의 승리와 같은 승리를 얻기 위해 성도가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 예수의 삶이 반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요셉의 삶을 통하여 메시지로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단련이라 부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셉은 요셉 자신의 잘못으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요셉의 감옥생활 또한 자신의 죄가 아닌 세상의 유혹과 모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공격한 상대방의 죄를, 노예의 삶으로, 감옥생활로 대신 대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의 죄는 노예 생활로, 주인마님의 죄는 감옥생활로. 그게 바로 예수의 삶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신 당신을 마치 종처럼 취급하며,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대상이 하나님일 지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악독한 죄인들에게 떨어질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는 ‘수난의 예수’의 모습이 요셉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명명을 하는 것입니다.

 

(골1:24)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서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이 무언가 부족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예수님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지체들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켜, 머리이신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닮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이라는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성도들의 고난 또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삶,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현실 속에서 고난이라는 모양으로 직면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의 완성 즉 ‘선’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나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혹은 세상에게 하실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그러한 고난을 가리켜 ‘시험’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성도가 고난, 즉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선’이라는 완성지점에 도달할 수 없음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이 예수의 부활과 승귀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약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으로 향하는 길에 시험이 있고, 그 시험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으로 닥쳐오는 시험에서 하나님께 옳다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냥 무작정 이를 악물고 참으면 되는 것인가요? 그러면 ‘옳다’인정해 주시나요? 아니면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가 고난을 통과하며 힘든 기색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옳다’인정함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다’라고 번역이 된 ‘도키모스 기노마이’라는 말은 ‘연단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의역을 하면 ‘목적한 연단의 자리에 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난, 즉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이 그 시험 당사자에게 목적하시는 분량만큼의 연단의 성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참는다는 말은 우리가 연단을 받아야 하는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이 끊임없이 쏟아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게 되고 그 연단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방법으로 쓰여 지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연단의 충만한 자리로 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말인데,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통하여 어떠한 연단을 받게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으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연단의 삶이 담고 있는 내용도 모르면서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니까요.

 

먼저 고난이라는 것의 탄생 배경부터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하고 계신 연단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인간은 원래 지어지기를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로 지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즉 하나님은 통치자로서 인간을 다스리시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순종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의로운 관계를 깨 버렸고 그 둘 사이는 ‘불의’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생명과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고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교만’ ‘휘브리스’라 합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원으로 자신들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기로 했다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즉시 당신의 하늘 자원을 인간들에게 공급하는 길을 막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순간부터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제한되고 유한한 자원으로 생존을 해야 했고, 그 유한함은 곧 결핍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풍성하게 채워져야 비로소 안녕과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자기들 안에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행복과 안녕을 취득하려 하다 보니 인간은 극심한 결핍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핍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와 증상들과 상태가 ‘고난’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시간 속에 갇히게 되고 그들에게 부여된 자원이 유한하게 제한되자 그들에게 닥친 것이 늙어짐과 고장 남과 사망입니다. 인간은 제한된 자원이 고갈이 되어 감에 따라 늙고, 고장이 나고, 약해지고 결국 그 자원이 바닥이 나게 되면 죽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연약함과 질병과 사망은 바로 그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고난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자원을 탈취합니다.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살인을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되어 보겠다는 목적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인간들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나’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다른 이들이 목을 매달아 죽건 말건 그저 그들의 것을 탈취해 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의 물질적 소유 뿐 만아니라  명성과 인기와 능력까지도 탈취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도둑질이나 사기나 억지로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방을 모욕하고, 험담을 하고, 모함을 하여 결국 그를 좌초시켜 버립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고난의 재료들입니다. 거기에서 무수한 고난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여러분 혹시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극단적 케이스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언론에서 강호순이나 유영철 등의 살인자들에게 그런 호칭을 붙이곤 하는데 사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이코패스 적 본성을 누구나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은 사람의 뇌에 있는 변연계(lymbic system, 邊緣系)가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연계는 또 해마와 편도체로 나누어지는 데, 해마(hippocampus)는 언어적 기억, 의식적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고, 편도체(amygdala)는 감정적 기억, 무의식적 기억으로 공포나 분노를 담당하는 곳입니다.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기억에 장애가 생겨서 옛날 일은 잘 기억하지만 최근의 일은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편도체에 손상을 입으면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도체를 제거한 쥐는 고양이를 보아도 경직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특히 편도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공포를 느끼게 될 광경을 보아도 불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당연히 죄책감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연케 하는 것은 그렇게 불안과 공포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병적인 사이코패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대방을 살해하고 그 인육까지 씹어 먹을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사이코패스들이, 배양시험관 속의 세균들처럼 번식하고 있는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런 사이코패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몸서리를 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저는 가끔 제 속에서도 사이코패스 적 기질을 발견하곤 합니다. 저는 가끔 당연히 두려워해야 하고, 공포를 느껴야 하며,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며 아연해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변연계가 고장 난 사이코패스 적 기질을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거기서 우리의 죄와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인 것이지 그런 돌연변이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 그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너나할 것 없이 변연계가 고장 난 사이코패스 들입니다. 그 사이코 패스들이 쏟아내는 겁 없는 행태들이 인간들에게 고난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모두 제한된 내재 변원으로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획득해 내고야 말겠다는 결핍 속의 인간들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 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파괴를 합니다. 자연이 소유하고 있는, 자연의 자원을 빼앗아서 자신들의 행복을 채우고자 자연을 마구 훼손합니다. 오존층이 어떻게 되든 말든, 산소를 뿜어내는 숲이 사라지든 말든, 대지를 적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강줄기가 엉뚱한 데로 흐르든 말든 인간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다른 것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지 않으면 마치 피에 굶주린 흡혈귀처럼 존재의 불안 속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행복과 만족만 채워지면 그만입니다. 거기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합니다. 쓰나미가 몰려오고, 허리케인이 인간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계절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열대지방에 눈이 오기 시작합니다. 고난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들이닥친 결핍과 그러한 결핍에서 비롯되는, 가난, 질병, 전쟁, 자연재해, 집착, 중독 등 사망의 여러 증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고난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면서 어떤 연단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통하여 인간들의 죄가 맺어내는 열매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우며, 욕지기나고, 괴로운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그러한 고난을 출산해 낸 죄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아울러 그러한 자각을 통하여 용서와 이해와 화해와 섬김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Barbara johnson 여사의 많은 저서 중에 ‘Stick a geranium in your hat and be happy’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바바라 존슨 여사는 엔지니어인 남편과 네 명의 건장한 아들을 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66년 어느 날 그 부부는 자기 교회 청년부 수련회의 상담자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나중에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했을 무렵 그 수련회장 입구에서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피투성이가 된 그 사람은 그 사고로 뇌의 일부가 밖으로 쏟아져 나올 만큼 큰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먼저 출발한 자기 남편이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 해병에 입대를 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입대를 하자마자 월남전에 투입이 되었고 그로부터 4개월 후에 월남에서 전사를 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때쯤 되어서 첫째 아들이 경찰 대학을 졸업하고 알라스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아들은 알라스카 여행길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을 했고 그 감격이 너무나 커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그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곧 돌아가겠노라고 전화를 끊은 그 큰 아들의 차를 음주 운전 차량이 추돌을 했습니다. 아들은 거기에서 즉사를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어줍지 않은 위로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드님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데려가신 것이라는 둥, 그래도 두 아들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하자라는 둥, 지금 아들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오히려 기뻐하라는 둥, 그런 위로를 하는 주변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마치 자기들은 그런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바바라 존슨 여사는 셋째 아들의 방에 들어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들의 부탁으로 아들의 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찾던 그녀는 아들의 책상 서랍에서 수많은 동성애 서적과 동성애 사진, 그리고 동성애 기구들을 발견합니다. 셋째 아들은 동성애자였던 것입니다. 아들은 엄마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들키게 되자 그 길로 집을 나갔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 이 엄마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세요?

하나님이 정말 그녀의 삶에 동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그녀는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증세로 숨을 쉬기조차 힘든 아주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be happy, 행복 하세요’라는 책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죽기 전에 모 방송사와 인터뷰를 한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그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후 동성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상담사로 일을 하기도 하고, 음주운전 차량에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 그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이들의 위로 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그런 고난의 시간을 허락한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그 모든 사건들과 상황들은 다 우리 인간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라는 아이의 출산의 자리에 바로 내가 몸을 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들은 모두 나와 이 세상의 죄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닥친 모든 고난은 바로 아담 안에 있는 내가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게 되자 하나님 앞에 회개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죄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빌리 선데이가 말한 것처럼, 나의 모든 사지를 모두 다 죄의 공격에 의해 빼앗기고 나에게 잇몸만 남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죄를 잇몸으로라도 물어뜯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게 되자 자기 아들들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은 죄인이라는 숙명적 운명을 타고난, 자기를 포함한 인류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그러한 죄 속에서, 죄가 출산해 내는 더럽고 추악한 토사물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들이 가엽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와 죄의 증상들인 고난이 다 제거가 된 하나님나라가 자기에게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으로 행복해 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한의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세요.’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바바라 존슨이 당한 그 처절한 고난은 그녀에게 죄의 실체를 깨닫게 해 주었고, 용서를 배우게 했으며, 섬김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 더 공고하게 다져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가 고난으로부터 얻은 연단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죄가 출산해 놓은 고난을 직면하면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고난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진노의 산물인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 당신이 쏟아 부으시던 하늘의 복을 거두어 버리신 하나님의 처사가 결핍을 가져오게 된 것이고, 이러한 고난의 현실을 출산하게 된 것이니까요.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절절히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 인간들이 당하고 있는 이 정도의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사망의 고통 속으로 던져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죄인들의 숙명입니다. 지금 모든 인간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에 앉아서 낭떠러지를 향해 내닫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모두다 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을 하여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낭떠러지를 향해 가고 있는 자동차가 중간에 돌부리에 걸려 몇 차례 전복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분명 그건 그 고장 난 자동차의 운전자에게 고난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자동차는 저렇게 아무런 문제없이 낭떠러지로 향해 가는데 내 차만 이렇게 중간에 걸려 넘어져야 해?’하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고난의 사건 현장에서 죽음을 향한 우리의 돌진을 잠시 막아  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자리에서, 잠시 후에 모든 인간들에게 펼쳐지게 될 처참한 진노의 불바다를 미리 맛보아 눈치를 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멈춰 서라는 것입니다. 


그게 연단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 지옥의 맛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부어질 뻔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거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백성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롬8:35)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에 고난의 여러 가지 모양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이런 모든 것이 지금 우리에게 고난으로 들이 닥치고 있는 것들 아닙니까? 우리가 그러한 고난을 직면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과 같은 서운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심지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난 떠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1996년에 지프를 타고 별장으로 가던 열여섯 살 먹은 소년이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에 의해 타고 가던 차와 함께 길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그 소년은 즉사를 했습니다. 그 소년은 예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존 에드워즈(John Edwards) 상원의원과 그 아내 엘리사벳(Elizabeth)의 큰 아들입니다. 그 후에 존 에드워즈가 부통령 후로로 나섰다가 선거에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 즈음에 에드워즈의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곧 치료에 나섰고 오랜 치료 끝에 그녀는 완전히 완쾌가 되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유방암이 재발이 되었고 골반 뼈까지 전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가망이 없는 시한부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녀가 뉴스위크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저는 제 아들을 구해주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웨이드는 부드럽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라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 애는 항상,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열여섯 밖에 안 되었지만, 이 점에서 그 애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그 아이가 하나님께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점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 애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애를 보호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바람이 그 애를 도로 밖으로 내팽개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손이 그 아이를 도로 밖으로 내던진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착한 아이의 죽음에 개입하지 못한 하나님, 아니 그 애를 죽게 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제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저의 하나님은 보호를 약속하지 않으신 하나님이며, 그래서 제 아이를 보호하실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암으로부터 저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녀의 글에 정말 엄청난 분노가 실려 있지요? 작은 꼬투리만 생기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바라 존슨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분께 욕지거리를 해 대고, ‘당신 같은 게 무슨 하나님이냐’고 항변을 하던 그녀가 지금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의 백성들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을 버리고 싶은데 그 분이 날 안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3:20~21)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붙들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과 그 분의 진지한 열심을 배우게 합니다. 연단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하여 세상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서머나 교회의 순교자 폴리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폴리캅은 로마황제를 주라 부르지 않고 예수를 믿고 전하며 민심을 소란케 한다고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당시 서머나 총독이었던 스타티우스는 어려서부터 폴리캅과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폴리캅을 살리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 안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를 한번만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 때 폴리캅이 그 유명한 말을 하지요.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우리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성난 군중들이 폴리캅을 사자의 먹이로 주라고 외쳤습니다. 폴리캅의 친구 스타티우스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죽음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난 군중들이 그를 장작더미 위에라도 올리라고 아우성을 쳐서 결국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폴리캅이 총독에게 ‘너는 지금 잠깐이면 타다가 꺼질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죄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너는 어찌 피하려 하는가?’ 하고 오히려 그 총독을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화형대에다 묶으려고 했을 때 폴리캅이 그들을 저지했습니다. ‘난 괜찮다. 나를 이대로 두어라. 나에게 이 화형을 견딜힘을 주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묶지 않아도 이 장작더미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이제부터 영원히 있을 지어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는 ‘뭘 하고 있는가? 어서 속히 너의 할 일을 하라’ 하고 오히려 서둘러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폴리캅의 화형을 막아주시지 않았고 불에 타서 죽으며 느끼는 그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견뎌낼 힘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면서 ‘도대체 불에 타 죽은 순간에도 찬송을 부르게 하는 저의 하나님이 누구인가?’ 궁금해 했다고 합니다.


르완다 내전 때, 르완다의 선교사님이 그 곳의 성도들과 함께 경험한 일입니다.

당시 르완다의 기독교인들은 반군들의 타겟이 되어 쫓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 반군들에게 발각이 되어 모두 체포가 되었습니다. 반군들은 그들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반군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모두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보기로 그들 앞에서 한 남자의 팔과 다리와 목을 하나하나 잘라서 공포심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반군들은 그 교회를 향해 기관총과 수류탄을 난사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처참한 고난입니다. 그 때 그 상황을 몰래 숨어 지켜보던 선교사님이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상황도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그런데 그와 반대로 그 때 그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며 그 현장에 있던 르완다 반군의 장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저러한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놓지 않는 그들의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은 이 세상의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그의 손에 손수 못을 박았던 로마의 백부장으로부터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들어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고난이 닥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연단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라는 계시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난을 당하고 결국 형제들의 주가 되어 그 형제들을 구원해 낸 삶을 산 것은 바로 우리 성도의 삶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의 완성이라는 성도의 목적지를 향해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연단 과정을 통과하며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로 완성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길에 닥쳐오는 수많은 고난의 현실들을 없애달라고 하는 것은 ‘난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싫어요.’하고 영생을 거부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현장 속에서 그것을 잘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구하며, 그 고난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형제들의 주가 되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을 통해 형제들이 이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고난인 것입니다.

힘드시겠지만 잘 참으시고 잘 견디십시오. 인생은 찰나입니다.

 

곚 h���_@a�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느라 모든 것을 비우시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게 올바른 자기부인 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낳는다는 것은 그 예수의 정신인 순종의 삶, 즉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로 성숙이 되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인 다말이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여자의 후손을 낳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 살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말의 삶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 예수라는 후손을 출산해 내야 하는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을 낳을 여자가 여자의 후손의 삶을 사는 자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유다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말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전가 받게 하시고 그 다말을 부끄럽게 죽여 버리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은 후에도 늘 우리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폭로 당하면서 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으로, 바벨론으로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내십니다.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그런데 그 삶은 이 세상의 종으로 살게 되는 종살이의 삶입니다. 발을 씻기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 이 세상에서의 종으로서의 삶, 발을 씻는 삶으로 인도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수모와 수난을 감수하는 다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되어 결국에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다말의 순종을 하는 자들로 완성이 되어 ‘나’라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의 수모와 수난을 감수하는 참된 다말들이 될 것입니다. 거기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마치 창녀 같은 모멸과 창피함과 부끄러운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것을 손해보고 계십니까? 잘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복된 다말의 삶을 살고 계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