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창37:1~11)
1. |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창36:7 |
2. |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
3.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
4. |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
5. |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
6.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
7. |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
8. |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9. |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
10. |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35:18 |
11. |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눅2:19, 행7:9 |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요셉의 꿈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만큼 오해가 많은 구절도 드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의 비전과 꿈을 부추기는 설교의 본문으로 자주 사용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아주 유명하면서도 인기가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적어도 열 편 이상은 들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성도가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노라면 결국에는 그 꿈이 성취가 되고야 만다는 그런 얼토당토 한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이 요셉의 이야기는 그와 정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비전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며,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매진하라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꿈(언약, 계획)이 성도의 꿈을 박살내시면서 성도의 삶 속에 성취되어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을 자세하게 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본문 2절 앞부분을 보시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 하니라’는 어구가 있지요? 그 어구는 히브리어 ‘엘레 톨레도트 야아코브’를 번역한 말인데, ‘엘레 톨레도트’는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흔히 쓰는 관용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창세기 기자는 야곱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야곱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목하세요.’하고 다시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야곱의 약전이 이러 하니라’라는 그 어구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요셉의 꿈 이야기를 푸는 중요한 열쇠인 것입니다.
왜 성경이 야곱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 놓고는 요셉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과 축복이 그의 자손인 요셉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야기가 이러합니다.’하고는 요셉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잘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창27:28~29)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게 바로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요셉의 삶에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시면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할 것이라’고 하지요? 야곱의 형제라고는 에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복수를 썼을까요? 그 축복은 야곱에게서 성취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은 요셉의 꿈에서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다시 한 번 반복이 됩니다.
(창37:6-10)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 하더이다
8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 하니라
10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지금 이 모습은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게 된다’는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축복이 요셉의 때에 온전히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형들이 요셉 앞에 굴복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그저 모형으로서의 성취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은 뒤로 가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으로 가면 야곱이 유다에게 하는 유언에 그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창49:8~10)
8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 하리로다
9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에 보면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과 요셉의 꿈이 그대로 반복이 되면서 나중에 ‘실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실로’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 ‘실로’가 오시면 만민이 그 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받은 축복과 요셉의 꿈은 실은 야곱의 것도 아니었고 요셉의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축복과 요셉의 꿈, 그리고 유다에게 주어진 유언은 모두 진정한 약속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어질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왕과 그 분께 온전한 순종의 삶을 드리게 될 그 분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기의 꿈이 아닌 메시아에 관한 꿈을 꾼 것이고 그 꿈 때문에 메시아가 당할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모형으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언약들은 언약 당사자에게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서 또는 다른 희생자의 희생에 의해 완성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후손의 끝에 메시아이신 진정한 약속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구약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갈3:16)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확실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이 요셉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성도들이 언약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그 언약의 완성 지점으로 들어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를 낳는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진정한 언약의 후손이 언약을 받은 교회를 위해 희생을 함으로 해서 언약을 받은 여자, 즉 교회에게 주어진 축복을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언약을 받은 우리 모든 성도의 대표로 서 있는 것이고 요셉은 그 언약을 성취해 내는 예수의 모형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의 이야기는 무죄한 자가 형제들에게 은 20냥에 팔려서 배신을 당하고, 모함을 당하며, 옥에 갇히기도 하는, 수난을 통과하여 결국 자기를 판 자 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되는 예수의 이야기인 것이지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요셉이 꿈을 꾼 뒤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그 꿈을 향한 집념을 버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성취를 해냈다는 그런 비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대 드릴까요? 그들은 요셉이 자기가 꾼 꿈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언젠가는 꼭 이루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2장에 가면 요셉이 자기가 꾼 꿈을 잊고 있었음이 확실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42:9)
9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여기에서 ‘생각하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자카르’라는 단어는 ‘기억을 되살리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성취하기 위해 그 꿈을 가슴에 품고 꿈을 향해 달린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 훗날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자기 앞에 엎드리자 그 때서야 그 꿈을 기억해 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가지고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식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해석인 것입니다. 굳이 그런 충동을 하지 않아도, 굳이 그런 선동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야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죄인들은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야 말겠다.’는 아담 적 죄 성에서 비롯된 사악한 꿈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또 무슨 꿈을 더 가지라고 부추긴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교회는 그 아담 적 꿈과 야망과 비전을 버리라고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접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지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절을 보시면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채색 옷은 색동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권을 가진 맏아들이 입는 팔을 덮는 긴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가 열일곱이고 장자인 르우벤의 나이가 스물여섯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이 맏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지요?
우리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통간을 함으로 해서 장자 권을 상실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은 그 장자 권을 요셉에게 줘 버린 것입니다.
(대상5:1-2)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요셉이 형제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신 하늘의 장자 예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은 30냥에 팔려 결국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육신적 형제들이었습니다. 한 민족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형제들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한 아들을 은 30냥에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법적 맏아들 요셉을 시기하여 은 20냥에 팔아서 죽이려고 했던 요셉의 형제들과 요셉의 삶이 정확하게 그 예수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으려 하는 아담 적 죄 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칠게 반항을 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형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맏아들인 요셉에게 절을 하는 그 꿈은 하나님의 양자인 성도들이 그들의 공동 상속자인 진정한 장자, 하나님 아버지의 맏아들이신 주님의 은혜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때에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복음의 계시를 이야기 한 자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삶이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적 맏아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그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건 정확하게 예수를 배신하고 그 분을 로마에 팔아버린 예수의 민족적 형제들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고한 수난을 통과한 요셉이 애굽의 치리 자가 되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버린 형제들을 아사(餓死) 직전에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들에게 팔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만물의 주로 등극하여 자기를 판 자 들을 살려내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장인 50장 말미에 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
아비인 야곱이 죽고 형제들이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요셉이 아버지를 봐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기들을 혹시 벌하지 않을까하여 노심초사하며 요셉의 마음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창50:20~21)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당신과 당신 자녀들을 내가 기르고 보호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들과 그의 후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을 요셉이 그림자로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맨 마지막 장에 기록된 창세기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 노아 시절의 교만, 바벨탑의 치기, 아브라함의 실수, 이삭의 불순종, 야곱의 꾀 등으로 폭로 되었던 인간의 죄를 무죄한 하나님의 맏아들이 수난을 받고 죽으심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는 위대한 십자가 복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요셉이라는, 형제들의 주가 된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한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들의 주가 되신 진정한 하늘의 왕은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원수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기르고, 지키고, 보호하는 ‘섬김의 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채색 옷을 입은 장자인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리고, 모함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며,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꿈이 성취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의 후손이 수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그들 대신 희생을 당하는 예수의 모형이기도 하면서 언약 당사자들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일어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사는 성도의 모형을 함께 함의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성도는 진정한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지만 그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작은 예수가 되어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그 작은 예수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창세기의 결론이 이미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그 언약의 당사자들은 반드시 예수의 십자가 삶을 이 땅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서 요셉의 채색 옷을 입은 하늘의 장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12:23)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보세요. 성경이 교회를 가리켜 ‘장자들’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와 연합되어 하늘의 장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늘의 장자들은 요셉처럼, 예수처럼 이 땅에서 세상에게 배신당하고, 그들에 의해 팔려가고, 모함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 거리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계11:7~11)
7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여기에서 두 증인, 두 선지자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 바벨론 성에서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는 자로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그 바벨론 성에서 그들에게 맞아 큰 성 길에 시체처럼 눕게 됩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찔리지 않으세요? 우리는 지금 이 세상과 너무나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자기들을 괴롭게 했던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도 지내주지 않고, 서로 예물을 보내며 축하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언제까지 그렇게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가 하면 삼일 반 동안입니다.
삼일 반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 한 때, 두 때, 반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시점에서부터 재림 때까지의 말세 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 전체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 기간은 곧 이 우주의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기간입니다. 제가 전에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를 설명하면서 반 이레인 삼일 반의 의미를 설명해 드렸지요? 그러니까 교회는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줄곧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영원 속에서 가장 처음 하나님 아버지와 언약을 맺었던(히9) 진정한 하늘의 장자 예수가 그 아버지와의 언약에 이끌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부인하며 그 하나님 아버지와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수난과 죽음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요셉에게 꾸어진 꿈이 그의 전 인생을 이끌고 간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꿈에 의해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우리의 꿈과 비전은 기각이 되고 하나님의 꿈이 오롯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잠16:1)
1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이 구절을 직역을 하면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께서 하신다.’입니다. 이 구절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꿈의 성취를 위해 자신의 꿈과 비전이 묵사발이 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서 참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지요? 게다가 피가 펄펄 끓는 새파란 젊은이가 젊은 장관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상을 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투옥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아 관장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고 석방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나가서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가도 역시 자신의 거처는 습기가 가득하고 지저분한 감옥입니다. 요셉은 적어도 13년을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요셉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꿈을 꾼 요셉,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언약의 계시를 받은 요셉의 꿈을 그렇게 산산 조각 내 버리셨을까요? 요셉은 그렇게 긴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꿈을 분별하여 좇는 자로 성숙되어져 간 것입니다.
(시105:17~19)
17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18절의 ‘쇠사슬에 매였다’라는 어구는 ‘네페쉬 보 바르젤’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인데 그 말은 ‘영혼이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뚫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요셉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시편 기자가 그렇게 표현을 했겠습니까? 언약의 후손 요셉의 삶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에 요셉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금같이 단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삶을 가리켜 만사형통이라 합니다.
(창39:23)
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분명 시편 기자는 요셉의 감옥 생활이 족쇄에 묶이고 쇠꼬챙이로 영혼이 뚫어지는 그러한 삶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창세기 기자인 모세는 그 삶이 만사형통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만사형통은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주어지게 되는, 고난을 포함한 모든 삶을 가리켜 만사형통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난이 여러분의 거룩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면 가난이 바로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병이 여러분의 하나님 자녀다움을 완성하고 있다면 그 질병이 바로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과 비전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만사형통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 꿈이 무산되고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꿈을 좇아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하셨고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꿈과 비전과 소원과 욕심은 모두 내려놓고 아버지의 계획, 즉 아버지의 꿈의 성취를 위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사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꿈과 언약이 이끄는 대로만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을 받은 성도의 삶이란 자신의 꿈과 비전과 야망을 성취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꿈,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는 그 하나님의 꿈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그 아버지의 꿈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삶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입니다. 이 중에 누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꿈을 꿀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 언약에 의해 우리의 인생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나도 요셉처럼 이 땅에서 총리가 되어 떵떵 거리며 살아 볼 수 있겠지’라는 허황된 꿈을 꾸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지금 어서 버리십시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의 주가 되어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 형제들의 자녀까지 보살피고 섬기는 그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 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절대로 이 땅에서 주어지게 될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결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결론인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요셉의 13년의 삶, 즉 바벨론 도성에서 그 성 거민들에게 맞아 죽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5:7~9)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세상 모든 언약의 원형인 그 영원속에서의 언약의 당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그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이 땅에서 겪으신 고난으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과 경외심을 가지고 사셔야 했습니다. 8절의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배우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어근 ‘마드’와 ‘고난 받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어근‘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 관용구로 함께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예수님은 순종을 하는 과정 속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메시아로서의 완전함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꿈에 의해 이끌려 가는 언약의 당사자들의 삶이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 전제 되어야 하고 그 순종의 삶은 고난을 출산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 인내가 바로 이김이며 승리인 것입니다.
(약1:12)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참는다고 하는 것은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의 삶에는 끝까지 견디어 내어야 할 시험들이 끊임없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고난을 잘 견뎌 내는 이들은 하나님에게 ‘옳다’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옳다, 네가 바로 나의 꿈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사람이 맞구나’하는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언가를 열심히 참고 인내하고 있는 사람이 ‘너는 내 아들이 맞아’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그 복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절대 이 땅에서의 총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영생’
2008년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러브 상을 모두 휩쓴 ‘Slum dog Millionair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 평론가가 ‘당신이 오늘 밤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이 영화를 먼저 보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요셉의 삶이 떠 올랐습니다.
그 영화는 인도의 슬럼가에서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자말이라는 한 소년이 백만장자 퀴즈 쇼에 나가 당당히 1등을 해서 백만장자가 되고 첫 사랑도 찾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소년은 인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지폐에 누구 사진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소년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백만장자 퀴즈쇼에서 1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그는 부정행위를 의심받고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놓고 경찰에 잡혀가서 엄청난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그 문제들을 맞출 수 있었는지가 밝혀집니다. 슬럼가에서의 그의 고단하고 지저분한 삶의 경험이 그 문제들의 해답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함께 붙들려서 갇혀 지내던 눈이 먼 앵벌이 친구에게, 엉터리 여행 가이드를 하며 고생고생 해서 번 미국 돈 100달러짜리를 전해 주면서 그 지폐에 그려진 사람이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문제가 나옵니다. 그 사건은 그 소년의 인생에서 정말 가슴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 100불짜리 미국 지폐에 그려진 사람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픈 경험들과 기억들이 결국 그가 백만장자가 되는 데에 열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영화에 나오는 그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우연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끌려 가는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백만장자 퀴즈쇼에 앉아있던 인도소년 자말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 그 때 그 사건은 이런 유익이 있었군요. 그 때 그 고난은 이런 의미였군요.’하며 무릎을 칠 날이 올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 위해 형제들의 배신과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쳐야 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단련과 성숙의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 도의 슬럼가에서의 경험이 백만장자 퀴즈쇼의 우승자 자말을 만들어 내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반드시 여러분을 영광의 자리에 앉히는 거름으로 쓰여 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잘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로또 한 방 같은 횡재가 찾아 올 거라는 허황된 꿈은 버리십시오. ‘예수 잘 믿고 열심히 기다렸더니 여전히 이 모양이네’라는 결론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결론은 ‘꽝’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의 결론은 왕 노릇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견디시고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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