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4 - 예수지옥, 김밥천국 (창35:16~29)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31

84 - 예수지옥, 김밥천국

 

 

(창35:16~29)

35:16 그들이 베델을 떠나 에브랏에 아직 채 이르기 전에,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였다.

35:17 아이를 낳느라고 산고에 시달리는데, 산파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셔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

35:18 그러나 산모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산모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4)베노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5)베냐민이라고 하였다. '내 슬픔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또는 '남쪽의 아들'

35:19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35:20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서, 에델 망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장막을 쳤다.

35:22 이스라엘이 바로 그 지역에서 머물 때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하였는데, 이스라엘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다.

35:23 레아에게서 얻은 아들은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다.

35:24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다.

35:25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얻은 아들은 단과 납달리이다.

35:26 레아의 몸종 실바에게서 얻은 아들은 갓과 아셀이다. 이들은 모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얻은 아들들이다.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 근처 마므레로 가서,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헤브론이다.

35:28 이삭의 나이는 백여든 살이었다.

35:29 이삭은 늙고,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다하자, 죽어서 조상들 곁으로 갔다.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

 

 

오늘 본문은 조금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설명용 교보재를 하나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 꼭 들러서 밥을 먹는 식당이 있습니다. 그 식당은 김밥천국이라는 식당입니다. 김밥과 라면과 떡볶이 등을 파는 분식점인데 대규모 체인점이라 어느 동네에 가도 그 김밥천국이라는 식당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값도 아주 싸고 김밥 한 줄과 라면 한 그릇에,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맛을 반추할 수 있어서 저는 한국에 갈 때마다 그 식당을 찾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가 아주 좋아하는 후배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예수지옥, 김밥천국’

 

그 친구도 김밥과 라면을 좋아하는 지라 가끔 동네에 있는 김밥천국이라는 식당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곤 하는데 누군가 테이블에 붙어있는 김밥천국이라는 그 식당 이름 앞에다가 볼펜으로 ‘예수 지옥’이라는 글을 붙여놓았더랍니다. ‘예수지옥, 김밥천국’ 교회는 이렇게 세상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것이 그 친구 글의 요지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예수지옥, 김밥천국’이라는 말은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 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며, 실제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 지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을 아주 명쾌하게 줄여서 기록해 놓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김밥으로 오시는 예수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성공주의에 빠져있는 일련의 어떤 무리들이 원하는 예수는,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고,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는 김밥으로서의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알량한 김밥이 그들의 눈앞에 주어졌을 때 그들은 열광을 하며 ‘이게 바로 행복이며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을 합니다. ‘김밥천국’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우리에게 오셔서 요구하시는, 자기부인과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실제로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자기의 삶 속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이내 그 삶을 ‘지옥’으로 생각합니다. ‘예수지옥’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예수지옥, 김밥천국’이 진리입니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바이며, 그들이 정의하고 있는 신앙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해체를 요구하는 진짜 예수를 거부하고 김밥이나 말아주는 가짜 예수에 열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대주의에 물든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예수지옥, 김밥천국’을 외치는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요한복음 6장을 공부할 때 그런 사람들을 보았지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김밥’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주자 그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그 분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김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밥천국’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일갈 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좇는 것은 김밥을 먹고 배가 부르기 때문이지 내가 너희들에게 주려는 영생을 원해서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떠나 도망가셨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고 하지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 같은 것은 관심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막연한 것이나 약속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김밥을 들고 오시는 예수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들은 절대 ‘예수천국’이라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장해제이며 완전한 항복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갖고 있는 자들에게 그 예수는 지옥과 같은 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지옥, 김밥천국’이라는 그들의 신앙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들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힘인 김밥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예수는 언제든지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릴 기세입니다.

 

그렇게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이 세상에 파송되어,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이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를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형국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피상적으로 보면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의 힘을 기각당하고, 자기를 부인당하는 삶을 통해 하늘로 입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쉬운 말로 김밥을 추구하는 자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천국에 가까워 보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시73:1~14)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4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

12볼 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이 시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자신의 삶과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자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다는 경험담을 시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자기가 아는데 그 하나님의 선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도저히 이해와 용납이 안 되는, 지옥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는 자들은 원하지도 않는데 일이 술술 잘 풀리고 그들의 인생에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습니다. ‘김밥천국’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인생은 온 종일 재앙뿐이고 아침마다 징책입니다. ‘예수지옥’이지요? 그러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삽은 하나님이 어디론가 숨어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그러한 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시73:17~19)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 하였나이다

 

그렇게 일사천리, 만사형통, 부귀영화의 삶을 살던 악인들의 삶이 실상은 저주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의 논리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 종일 재앙이요, 아침마다 징책인 자신의 삶은 축복의 삶이었다는 것을 아삽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삽이 그러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보세요.

 

(시73:24~25)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가 없는 자신의 삶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교훈으로 자신을 인도하시는 삶이었고, 영광으로 영접하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하나님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예수지옥’이 사실은 복이었다고 그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지 이 세상의 힘을 얻고, 이 세상에서 인기를 얻어 떵떵 거리며 사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김밥을 얻어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73:28)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 하리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옛 자아와의 전쟁을 통해 우리를 부인케 하시느라 우리에게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숨 쉬기도 힘들만큼 어려운 일을 겪기도 합니다. 김 밥에 불과한 이 세상의 힘과 하나님마저도 자신들의 인생도우미로 부리려 하는 교만한 우리 옛 아담 적 자아가 얼마나 초라하며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폭로시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아와 이 세상의 보잘것없음을 이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 채 다 겪어내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왜 너의 하나님은 그렇게 숨어서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시22:8) ‘예수지옥’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예수천당’의 언약 속에 들어있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나’를 자랑하고, ‘나’의 힘을 키워 구원에 도달하려 하는 그 아담 적 사고에서 얼른 벗어나라고, 그리고 그러한 힘의 원리가 배태하고 출산해 놓은 이 세상에서 빨리 눈을 돌리라고, 그리하여 참된 안식과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영생을 살라고, 주님은 그렇게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인 ‘예수지옥’의 삶을 살고 계세요? 아니면 고작 김밥이나 말아주러 오신 가짜 예수를 믿는 ‘김밥천국’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이라는 신랑에 의해 선택이 되어져 하나님의 언약의 라인 안으로 들어오게 된 라헬, 즉 언약의 신부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요셉과 베냐민을 낳고 죽어 버리는 이야기와 약속의 후손 이삭이 참으로 험난한 인생을 뒤로하고 역시 죽음을 맞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언약의 후손들의 삶과 그들의 최후가 이렇게 보잘것없고 불쌍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역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라헬과 이삭의 죽음, 특히 라헬의 삶과 죽음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봄으로 해서 성도의 삶의 패러독스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라헬의 삶과 죽음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로 갑니다.

 

(창35:16-19)

16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던 라헬이 하나님의 은혜로 두 번째 잉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아들을 낳을 때 ‘신고’했다고 합니다. 그 단어는 ‘카솨’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말인데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그 아들을 낳는데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산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이를 낳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십니다. 이게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유용한 키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어디에 장사가 되었는가 하면 ‘에브랏’ 곧 ‘베들레헴’입니다. 라헬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아들을 낳고 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 베들레헴은 누가 태어난 곳입니까? 예수가 태어난 곳입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늘의 떡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영생의 떡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떡 집’ 즉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라헬도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낳다 죽은 라헬의 이름이 언급이 되지요? 그러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과 오늘 본문의 라헬의 출산과 죽음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게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잘 들어보세요.

 

라헬이라는 여자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녀가 신실했다던가, 마음이 착했다던가, 하나님을 잘 섬겼다던가 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라헬이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추앙을 받고, 성경에서도 수시로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칭해지는 유일한 근거는 야곱이라는 신랑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그녀는 무서운 질투의 화신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버지 집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보다도 우상을 더 의지했던 여자이며, 그 우상을 도득하기 위해 수십 년간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에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던 여자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라헬이 약속의 후손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질투와 시기와 아귀다툼 속에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공로나 열심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라헬과 이삭의 죽음 사이에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아버지들의 족보가 나열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라헬은 신랑인 야곱의 사랑과 선택에 의해 약속의 후손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룻기를 보면 거기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룻4:10~11)

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11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보아스와 룻의 결혼에 라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유대인들이 개 취급을 했던 이방인입니다. 게다가 남편을 여읜 과부였고 거지와 방불한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보아스라는 유대인 지주를 만나 결혼을 함으로 해서 보아스의 자리로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약속의 후손인 다윗의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의 상징인 이방 여인 룻이 신랑의 선택과 사랑에 의해 떡하니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유대 백성들과 장로들이 룻을 가리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다고 합니다. 라헬과 레아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된 것은 그들이 뭔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닌 야곱이라는 약속의 후손의 선택과 사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룻도 그러한 방식으로 언약의 후손의 라인으로 편입이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라인으로 들어오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들이 신랑이신 어린양 예수의 선택으로 예수와 방불한 어린양의 신부로 격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시는 어린양의 신부들의 자격과 조건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하나님의 열심만을 오롯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약속의 후사들의 탄생 또한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 이 세 여자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불임입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막으셔서 오랫동안 잉태치 못했던 여자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약속의 후손이 나게 되는데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관심과 배려의 산물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약속의 후손들의 신부들의 삶은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죄인이 신랑에 의해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이 세상과 역사를 통과하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입고 있는 옛 아담의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순결한 자녀로 완성이 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그 일은 성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신랑의 선택을 받아 신부가 되었으나 잉태치 못하던 여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잉태를 하고 급기야 약속의 후손을 출산해 내고야 마는 그녀들의 삶이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아이를 낳기 전의 신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라 볼 수 있고 그들이 잉태하여 출산한 약속의 후손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잉태한 그 신부가 점점 후패해지고 결국 그 신부를 먹은 새 생명이 출산케 되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겨우 아들 둘을 낳고 결국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의 백성을 상징하던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로 나누어지지요? 그 북 이스라엘의 대표가 누구입니까? 에브라임입니다. 그 에브라임은 라헬의 첫째 아들 요셉의 아들입니다. 남 유대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이지요? 그러니까 라헬이라는 여인은 전체 이스라엘을 낳은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상징입니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게 되는데 성경에 기록된,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우상을 섬긴 것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스라엘을 잉태하고 출산한 불가능과 무력함의 상징 라헬, 즉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 아담의 옷을 입고 있던 라헬이 이스라엘을 출산하자마자 죽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자가 입고 있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순결한 약속의 후손이 탄생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라헬의 둘째 아들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어린양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심겨진 새 생명을 탄생케 해야 하는 누에고치 같은 운명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동안에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누에고치 같은 옛 사람을 벗고,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씨앗이 ‘으앙’하고 밖으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새 사람과 옛 사람이 한 존재 안에 오버랩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된 것도 우리의 힘이 아니었듯이 우리가 그 생명을 출산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것입니다. 그 렇게 내 안에 심겨진 새 생명이 완성이 되어 탄생이 될 때 마치 찬란한 나비가 고치를 찢어 버리고 밖으로 비상을 하듯이 그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던 우리의 옛 사람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다가 새 생명의 출산의 때에 완전히 죽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게 라헬의 인생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염(macula)의 형태로 우리 안에 남아있는 그 고치 같은 옛 사람의 껍질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벗겨내실까요? 철장으로 벗겨내십니다. 시편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무기인 철장은 이 세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바벨론의 잔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마귀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피조물입니다. 지으신 이가 한 순간에 없애버리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마귀의 세력이 한 순간에 유황 불 못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그들과 전쟁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당신의 백성들 안에 내재하는 세상 바벨론의 잔재인 것입니다. 성도는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 속에서 자신 안에 잔재하고 있는 옛 사람이라는 바벨론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이 내어놓는 열매들의 추악함과 허황됨과 부질없음을 경험하고, 철장을 들고 그것들을 쳐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체험하며 하나님 앞에 정금으로 단련되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의 세력, 바벨론이 한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2편에 보면 그 내용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2:1-3)

1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 하는고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여기에 나오는 열방, 민족들, 세상의 군왕들, 관원들은 모두 이 세상 바벨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바로 ‘나’라는 존재 안에 오염이라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바벨론의 잔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잔재는 끊임없이 나를 해체하려고 하는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나도 김밥이 좋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 땅에서 지옥 같은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하고 대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잔재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아들에게 철장을 주어 그 철장으로 당신의 백성들 속에 남아있는 그 잔재들을 사정없이 공격을 하십니다.

 

(시2:4~9)

4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왜 이렇게 잔인하리만치 우리를 깨뜨리실까요? 바로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시2:10~12)

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게 바로 우리 삶에 찾아오시는 여호와의 전쟁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성도의 삶이 통곡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철장으로 깨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왜요? 바벨론이 주는 김밥 말고 여호와만 의지하라고.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렇게 신랑의 선택을 받은 라헬이 통곡을 하는 여인으로 자주 인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랑의 선택을 받은 옛 사람 라헬이 죽어서 약속의 후손 이스라엘이 탄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라헬은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고 라헬의 통곡과 고통 속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 바로 완성된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머릿속에 잘 챙기시고 예레미야서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렘31:15~17)

1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

17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이 말씀은 제가 전에도 한 번 설명해 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비유로 하여, 이스라엘의 어머니인 라헬이 그것이 가슴 아파 통곡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약속의 후손 이스라엘의 대적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이 세상과 마귀의 세력을 음녀 바벨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아담 안에 속해버린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의 포로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던 것처럼 이 세상과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또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론 유수의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던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 경에 기록된 바벨론 유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살다가 결국 모두 사망으로 떨어져야 할 자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 올라오게 되는지에 관한 웅숭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들로 바꾸어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구원받은 신부 라헬이 이 세상 바벨론에 살면서 도저히 자신이 하나님의 신부로, 즉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으로 완성되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과 자괴감과 허탈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로 언약의 후손을 출산해 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지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이 이 세상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극심한 공허와 무료함과 심심함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충분히 부어질 때에만 행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당신의 생명력을 거두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때까지 필요한 제한적 자원만 그들 속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결핍 속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핍은 곧 공허와 허무와 심심함과 무료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면서부터 열심히 젖을 빨고, 자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싸움을 하고, 일을 하고, 취미 생활을 하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그러한 결핍 속에서 자기들의 힘으로 그것을 채워 보겠다고 헛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다시 받아서 참 행복과 참 만족에 이르지 못하도록 모든 힘을 동원하여 막습니다. 마귀는 죄인들 앞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당근으로 제시를 합니다. 마치 그것만 있으면 참 행복, 즉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근사한 포장을 하여 죄인들 앞에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세상이 내어놓는 그 많은 당근들을 좇으면서도 그 앞에서 여전히 공허한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삶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고 그냥 저냥 선배들이 산 삶을 답습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을 조용히 관조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해 지기 위해서 삶을 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힘으로 행복을 창조하고 덧입고자 하는 삶은 그야말로 고해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그 공허와 심심함과 무료함과 고통스러움이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닌척하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돈, 명예, 인기 그런 것으로 고해 같은 인생이 유리바다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이 그토록 열심히 좇고 있는 김밥이 그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세상의 힘인 김밥만 있으면 자신들의 배가 만족하게 채워질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 엄청난 재산과 인기를 소유한 연예인들이나 재벌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합니까?

그들이 가진 재산과 인기가 그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와 인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술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마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김밥에다가 술과 마약을 보태도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국 최고의 재벌 아들이 이혼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약 일 조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아내 또한 한국 굴지의 재벌 딸입니다. 재산 분할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여자가 요구한 금액이 오 천억 원입니다. 둘 다 한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고 미국 유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쁜 자녀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그 사람들이 자기들은 그 상태가 행복하지 않다고, 더 나은 행복을 찾아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인간은 실은 모두 다 고통 속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들을 포로로 잡고 돈과, 명예와, 여러 가지 재미와, 쾌락으로 그들의 공허와 고통을 어설프게 땜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공격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의 힘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다고 속이면서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공격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지요.

 

(렘6:14)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실상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와서 ‘이거 아무 것도 아니야’하면서 마취제만 열심히 놓아주는 것이 세상의 공격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하늘의 떡을 먹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그들의 공허에 계속해서 김밥만 쳐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매한 인간들이 그 김밥에 눈이 팔려 진짜 생명의 떡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라헬의 자녀들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놓임을 받았는데도 아주 소수의 남은 자만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머지는 바벨론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절대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바벨론이 자신들의 공허와 고통과 탄식을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고 힘들지만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과정에 백마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의 철장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도 모두 바벨론에서 안주해 버릴 것이 뻔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지금도 열심히 외치고 계십니다.

 

(계18:2~4)

2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미혹을 합니다. 음행과 사치와 쾌락과 치부로 우리를 붙들어 놓으려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공격을 너무 유아적으로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 바벨론의 공격을, 예수 믿으면 감옥에 쳐 넣는다든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식을 기름에 튀긴다든지 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절의 박해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그것보다 더 뛰어나고 더 똑똑합니다. 수천 년 간을 어떻게 하면 인간을 멸망의 자리로 끌어내릴 수 있을까만 연구한 존재가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가 그렇게 표 나게 인간을 공격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세상의 풍요를 마구 부어주고, 세상의 힘과 쾌락을 풍성히 제공해서 그것이 행복이고 만족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게 만드는 것이 세상의 무서운 공격인 것입니다. 세상의 공격무기는 철장이 아니라 김밥입니다. 그게 ‘김밥천국’의 실체인 것입니다. 예수 말고 김밥으로 행복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오해하며 살고 있는 죄인들은 좀 더 많은 세상의 힘을 탈취하고 축적하기 위해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전쟁도 불사하며 삽니다. 결국 그게 지옥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힘인 김밥을 추구하고 쟁취해 내는 삶이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바로 지옥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절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통 김밥에 열광하고 있는 세상 가운데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시선을 세상이 열광하는 김밥에서 예수에게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그러한 가시적 힘을 행복의 조건과 근거로 추구하고 있을 때 성도는 외롭게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지옥’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시로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채우려 하는 옛 사람의 습성이 그를 사로잡아, 자꾸 바벨론의 삶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성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라헬의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약속의 후손으로 출산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이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통곡을 합니다. 그렇게 라헬의 통곡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신 예수가 출격을 하여 옛 사람 라헬을 죽여 가십니다. 양수 겹장입니다. 우리는 이래 통곡하고 저래 통곡하고 통곡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백마 타신 예수는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 안의 바벨론과 전쟁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 라헬을 반드시 죽이시고 약속의 후손인 새 생명을 출산케 하시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구속사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추악함과 집요함과 불가능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과 위대하심과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오롯이 의지하는 자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것과 결론을 합하여 최종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의 공허는 그들이 새 사람으로 완전히 회귀 할 때 비로소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의도하신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전히 회귀가 될 때 비로소 그 인간은 고해의 바다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약속의 후손의 탄생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새 생명의 씨를 마음에 선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옛 사람 아담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우며, 악착같고, 집요한지 그 새 생명의 씨앗이 발아하고 열매를 맺어 완전히 출산하게 되기까지, 그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들 또한 통곡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하나님의 징계, 철장을 가진 예수의 출격에 통곡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신랑의 선택에 의해 눈을 떠서 무엇이 행복이고, 어디가 우리의 목적지인지 알게 되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내어놓는 성품과 행위와 언어를 볼 때 도저히 나는 목적지에 도착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자기가 출산해 놓은 자식들이 세상에게 붙들려가서 도저히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마음에 통곡을 했다고 성경이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에 의해 선택은 되었는데 바벨론이라는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나라는 존재가 약속의 후손으로 도저히 완성될 것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으면 도저히 불가능할 뻔 했던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 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출생하시고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을 때에 성경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살아 올 수 없는 존재였던 영적 이스라엘, 그 약속의 후손의 어머니 라헬이, 도저히 그 자식이 살아올 것 같지 않은 절망감에 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 통곡을 해결하기 위해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죄로 말미암아 세상권세에 의해 사망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라헬의 자녀들을 건져서, 아기를 잃고 통곡을 하고 있는 라헬을 위로하기 위해,(내가 반드시 네 아들들을 돌려주겠다, 약속의 후손은 반드시 탄생하고야 만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 죽어 장사된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라헬이 산고 끝에 아이를 낳고 결국 옛 아담의 껍질인 라헬을 묻은 그 상징적인 장소 베들레헴에, 그 일을 실제로 완성하실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통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산고가 커도 그 해산이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도의 출산을 위해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참 행복, 구원에 도달 할 수 없는 그러한 죄인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분주하게 열심을 부리는,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무료함과 자신의 무력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약속의 후손들을 당신의 힘으로 돌아오게 하여 통곡하는 라헬들을 위로하겠다고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거기서 통곡하는 라헬은 죽고 영원한 기쁨의 새로운 라헬, 즉 천상의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간단명료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계12:1~6)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가 이미 요한계시록을 다 공부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교회, 어린양의 신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그 여자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그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는 시편 2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여자인 교회가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 당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을 하여 ‘저에게는 예수가 필요 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성도의 완성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를 낳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고백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바벨론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항복을 받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 자세하게 공부를 했지요? 그런데 세상 바벨론이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왜 너희가 하나님께 항복을 해야 해? 너희도 충분히 능력이 있어. 너희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리고 이 풍성한 김밥을 좀 봐. 왜 너희가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라 생각 해?’하면서 여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결국 여자로 하여금 아이를 출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를 항복시키고야 마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출산을 앞 둔 라헬들인 우리가 광야에서 양육을 받으며 결국 예수를 출산할 수밖에 없는 자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예수지옥, 김밥천국’처럼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복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성도의 삶은 산고 끝에 죽는 라헬의 삶과 같이 ‘예수지옥’의 삶으로 이 땅에서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약속의 후손으로 완성이 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라헬의 죽음 아래에 약속의 후손 이삭의 죽음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 때까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손녀가 강간을 당하고 손자들이 대 살육을 저지르고 손자가 자기 아들의 아내를 강간하는 그 모든 험한 꼴을 다 보고 이삭이 죽는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 이삭이 자기의 후손으로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그 자손들의 삶을 봅니다. 그가 얼마나 탄식을 했겠습니까? 얼마나 통곡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 속에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고 야곱이 그 언약의 라인에 섭니다. 그런데 야곱도 역시 통곡하는 라헬처럼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통곡의 삶, 험악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즉 교회를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은 그렇게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며 통곡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곡의 삶 속에서도 홀로 열심히 나를 완성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의 은혜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요? 성도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성도는 죽어서 그의 삶 속에 살아 계셨던 예수의 이름만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후패해지고 예수가 흥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뭐 해드릴 생각마세요. 여러분은 그냥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항복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인되어지고 기각되어지는 우리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예수천당, 김밥지옥’의 삶임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여 어찌 하오리까’의 탄식을 내어 놓아야 하는 자들이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업적을 내 놓으며 ‘하나님 저 이렇게 잘했어요. 칭찬해 주세요’하고 교만을 떠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