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3 - 실패도 은사다 (창35:1-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30

83 - 실패도 은사다

 

 

(창35:1-15)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

35:2 야곱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35:3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35:4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가져 왔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

35:5 그런 다음에 그들은 길을 떠났다.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35:6 야곱과, 그가 거느린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베델에 이르렀다.

35:7 야곱이 거기에서 제단을 쌓은 뒤에, 그가 형을 피해서 떠날 때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생각하고, 그 곳 이름을 1)엘베델이라고 하였다. '베델의 하나님'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서, 베델 아래쪽 상수리나무 밑에 묻히니, 사람들이 그 나무 이름을 2)알론바굿이라고 하였다. '통곡의 상수리나무'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뒤에,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

35:10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이 야곱이었지만,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35:11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3)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히, '엘 샤다이'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

35:13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시던 곳을 떠나서 올라가셨다.

35:14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을 나누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부어 드리는 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35:15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을 나누시던 곳의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인 벧엘로 올라갑니다.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야곱이 하나님에 의해 벧엘로 밀려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완전히 승리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야곱을 벧엘로 보내시려 하셨던 것일까요? 벧엘이라는 땅에다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묻어 놓으셨던 것일까요? 그 땅은 원래 신령한 땅입니까? 아니면 그 땅은 다른 땅과 비교하여 대단히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라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일 벧엘이 그런 땅이라면 야곱은 죽는 날까지 그 땅을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땅을 떠나 결국 애굽에 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럴 거면 하나님이 뭐 하러 그렇게 야곱을 달달 볶아서 벧엘로 올려 보내셨을까요? 왜 세겜과 숙곳과 하란은 안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과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너를 다시 벧엘로 올라오게 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벧엘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벧엘이어도 상관없고 숙곳이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언약의 목적지로서 벧엘은 그 가치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죄인의 대표로 등장하는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기의 계획과 목표를 우선하여 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그 언약에 반하는 당신의 백성의 옛 자아와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깊숙이 간섭하시며 하나님의 언약에 반하는 야곱의 자아를 꺾는 씨름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움직이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계세요.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하신 언약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언약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의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인들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누구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통제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죄인들의 자아와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연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벧엘이라 설정해 놓으신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올라간 벧엘은 그 하나님의 전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소품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 하나님이 전쟁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은 마귀라고 생각을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떤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세력으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세상의 왕이 되어 살고 싶어 하는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이 바로 마귀의 세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체 세력을 마귀라는 존재가 대표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 안에는 구원 받기 전의 우리의 옛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마귀의 세력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 받은 우리 성도가 그 옛 사람의 옷을 여전히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것을 벗겨내시는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공부할 때 살펴 본 것처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부정 과거 시제로서 이미 완료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새롭게 되어’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그 시제는 현재 시제라 했지요?(엡4:22-24) 그건 계속적이며 반복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이 운명적이고, 신분적이며, 결과론 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그 구원이 실제화 되어 완성되어지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구원의 과거시제와 현제시제, 미래시제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구원의 완성지점인 절대 순종과 절대 의존의 자리는 우리에게 이미 확정적으로 확보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이성과 인격을 가지고 순종과 의존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미’와 ‘아직’, already but not yet의 교리인 것입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야곱을 벧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에게 남아 있는 잔여의 힘과 꾀를 모두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려 합니다. 그래서 숙곳과 세겜과 하란 등을 전전하며 자신의 살 궁리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과 전쟁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형과의 불화, 외삼촌과의 결별, 딸의 강간, 아들들의 살육, 등을 경험하면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께 패배하여 벧엘로 밀려 올라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결과론 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죄인들과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반드시 멸해 버리십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의 전쟁은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다른 모든 마귀의 세력들은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종말에 전부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에 치러질 하나님과 마귀의 세력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에게 임하는 첫 번째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그 종말의 전쟁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성도들이 겪는 두 번째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그 전쟁을 미리 겪으면서 마지막 날에 멸해질 죄의 세력들을 미리 몰아내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성도의 삶 속에서 저주받고 심판받아야 할 자들이 겪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인생과 역사를 통하여 옛 사람의 껍질을 입고 있는 자신의 삶 속에서 나오는, 죄악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배태하고 생산해 놓은 것들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를 향해 씨름하며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면서 그러한 죄의 소산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워서 결국 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옛 사람의 껍질을 온전히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은 다름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사기를 쳐도 꼭 우리만 걸리고,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해도 꼭 우리만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얀 세마포를 입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찬란한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사도 바울의 삶을 한 번 보지요.

 

(고후11:23-27)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도 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저주받은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의 삶은 처절한 실패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쫓겨나는 일을 허다하게 겪었습니다. 사단의 가시라는 질병도 죽는 날까지 가지고 있었고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perils in the city, perils in the wilderness)을 당했고 결국 그는 세상의 힘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그러한 사도 바울의 실패의 삶이 미리 기록이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신28:15-16, 27-29, 31, 33, 37)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perils in the city, perils in the wilderness)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 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잘 보세요. 지금 신명기 28장 15절 이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와 심판의 삶이 사도 바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왜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택한 당신의 사도를 이렇게 저주와 심판의 자리, 실패의 자리로 내 모셨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의 말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보면 참으로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에 보면 ‘디모데야, 모두 다 나를 떠나고 나는 홀로 남았단다. 속히 나에게 와 다오. 오는 길에 가보의 집에 두었던 외투 좀 가져다 주련, 이 감옥 안은 몹시 춥구나. 그리고 내 이곳에서 금방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성경을 좀 가져다 주려무나, 가죽에 쓴 걸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노 사도의 마지막이 이와 같은 철저한 버려짐이었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웠던 교회들은 모두다 문제가 많았고 이단을 받아들였으며 부흥은커녕 지리멸렬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야곱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정말 지지리도 복 없는 사람처럼 살다가 결국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나그네 인생길이요, 험악한 삶이라고 평가를 내릴 만큼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저주받은 죄인들이 배태한 열매들인 실패와 아픔과 외로움과 어두움을 경험케 하실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 백성들에게서 철저한 항복과 순종을 받아내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나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항복하는 겸손의 자리로 끌어내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 백성들이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부인하는 철저한 순종의 자리에 서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선이시오, 완전한 능력이신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부어서 그들에게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그 천국백성의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표본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죽기까지 순종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분이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품어 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인생은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죽어서 비워지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풍요를 마음껏 부으실 수 있는 순종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 세상의 죄가 배태하고 출산하는 사망의 증상들인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배반과 살인을 직접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심으로 이 세상의 추악함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러한 삶이었고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의 속성은 자신들의 실패와 무력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 속에 실패와 실수를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 실패와 실수에 대한 당신의 진노를 경험케 하시면서 그 사람을 겸손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저주받고 심판받는 자들의 삶을 이 땅에서 경험하다가 간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세요. 그 많은 실수와 실패와 오류와 게으름을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함께 받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의 공격까지 받으면서 그야 말로 진퇴양난에 풍전등화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실패와 실수와 세상의 공격 등의 험악한 경험들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꾀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려 했던 야곱이 하나님의 말을 듣는 자로 변한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인생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선한 삶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에서 나오는 섬김이나 사랑이나 구제나 용서 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철저하게 패배한 자들의 자기 부인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들이지 그것이 우리 성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지 못합니까? 왜 우리가 사랑과 용서와 섬김의 삶을 내어놓지 못하지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우상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나’의 손해를 감수하며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자아를 부인당하고 처절한 실패자의 자리로 떨어지는 경험을 함으로써 ‘나’라는 우상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서 ‘나’라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 안에 사시는 예수의 선한 삶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성도의 삶입니다. 구약의 선지 서를 보면 왜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하시는지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1:2-8)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 백성을 두들겨 패셨다고 합니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때렸다는 것입니다. (사9:3) 3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 하도다 역시 마찬가지지요? 한군데만 더 보지요. (사31:6-9) 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7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 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버릴 것이며 8 앗 수르는 칼에 엎더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키울 것이나 여러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전쟁을 하시면서 그들을 때리시는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나옵니다. 7절을 보시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 한 은 우상, 금 우상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때리시는 이유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씨름을 하시며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기를 왕 삼아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묻어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시고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2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창35:2-5)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결국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이 자기 집안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합니까? 그동안 자기 자신들의 이 세상 적 유익을 위해 간직했던 우상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옷을 바꿔 입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내용과 똑같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전쟁의 결론은 ‘나’라는 우상을 땅에다 묻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사람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새 옷을 갈아입고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 버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변의 모든 방해물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마침내 가려던 땅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35:4-5)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자 에서가 변한 것처럼 야곱과 그 일행이 ‘나’라는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자 대적들이 잠잠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씨름에 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벧엘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똑같은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창35:10-12)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곧 바로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고 왕들이 그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확인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에게 주고 그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하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러한 약속이 벧엘에서 반복이 되고 있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신 지점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힘으로 너를 이 언약의 땅 벧엘로 밀어 올린 것처럼 생육과 번성과 정복이라는 나의 명령도 내가 이룰 것이라’는 새 언약의 그림자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약속 안에는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 기어코 벧엘에 입성하게 된 야곱의 전 인생과 하나님 백성들 전체의 인생의 결국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사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창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을 지키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지요? 그런데 잘 보시면 그 둘은 아주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명령은 인간들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려야 합니다. 뭡니까? 율법입니다. 다른 말로 옛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에게 내려진 약속에서는 똑같이 생육과 번성이 언급이 되는데 그것을 인간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새 언약이지요? 이게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인 것입니다. 행위와 믿음의 극명한 대조인 것입니다.

 

그 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언약도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다’이지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도록 네 힘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 힘쓰라’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주리라’이지 ‘네가 하라’가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힘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러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라는 probation을 에덴동산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충만 하려고 했던 아담의 시도가 ‘선악과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내가 한 번 해볼게요.’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나선 것이 아담의 선악과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선악과 사건은 우발적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거인,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가 되려하는 이들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아담의 타락을 당신의 작정 속에 넣어 두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아담처럼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가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도덕적 피조물들의 모든 시도를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고는 절대 거기에 성공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를 폭로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력한 인간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으셔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는 것이 바로 구속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사는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자신들의 욕심을 충족시켜 보려 하는 율법에서 시작하여,(창세기1장 문화명령) 그 율법을 기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시행되고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 받은 이 후에도 여전히 율법, 즉 옛 사람의 잔재 안에 갇혀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의 무력함과 허망함과 더러움과 추악함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힘과 지혜, 율법을 무력화 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실패와 실수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한 실패와 실수의 연속 속에서 자아가 부인되고 겸손을 찾게 되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조화가 이렇게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실패도 은사다, 다른 말로 ‘실패와 실수도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오늘 설교의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살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 창세기가 있고 사사기가 있으며 이사야서가 있고 로마서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선지 서에 가서는 성막과 성전의 모습으로 조금 더 확대되어 그려집니다. 에스겔서 1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겔11:23)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서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뭅니다. 유대인들의 옛 성전에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에스겔이 새로운 성전의 계획표를 받고 옛 성전에서 떠난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겔43:2-5)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 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 하더라

 

이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지금 이 에스겔서의 이야기는 옛 성전, 즉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성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인간 측에서의 모든 가능성이 기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복음서에서 그대로 반복이 됩니다.

 

(막13:1-4)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께서 옛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임을 예고하시고는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십니다. 옛 성전, 율법은 전부 부수어 버리시겠다는 선포였습니다. 감람산은 성전 동편 산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에스겔서 11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기존의 성전에서 나와서 성읍 동편 산, 즉 감람산에 머무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똑같은 그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존의 옛 성전의 파괴, 즉 율법의 파괴를 선언하시고 성읍 동편 산인 감람산에서 그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옛 성전, 즉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로부터 40년 후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너희들 힘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서 43장에서 본 여호와의 영광이 새로운 성전으로 귀환하는 장면은 신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계21:1-4, 9-11, 22-23)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하늘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도 합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아내랍니다. 그렇다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데 3절을 보시면 그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장막, 즉 성막(성전)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22절에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없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새 예루살렘과 진짜 성전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바로 서로를 처소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새 성전인 것입니다.

 

그렇게 에스겔서 43장에서 힌트 된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새 성전은 바로 하나님과 연합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어떤 장소나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22장이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입니다.

 

(계22:1-5)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에덴동산을 그대로 그리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는 선악과만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probation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에덴동산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해 보시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무대 장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형으로서의 에덴동산이 계시록 22장에 원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형의 하나님 나라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허다한 무리’가 되어 있고, 그 하나님의 땅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정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요. 그리고 거기에는 이제 다시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옛 에덴이 무너지고 새 에덴,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자세하게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연관이 있는 지 설명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강이 동산 중앙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동산 밖으로 흘러갑니다. 동산 중앙, 동산, 동산 밖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요?

그 첫 번째 에덴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계신 삼층 천의 모형인 것입니다. 거기에 어둠과 빛이 공존합니다.(창세기 첫째 날)

그런데 그 모형은 구약의 성막과 성전으로 이어집니다. 성전 뜰과 성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별과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 휘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땅을 가르고 있는 궁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 그 성전이 무너져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때가 되면 어둠과 빛이 공존하던 상태에서 완전한 어둠으로 변할 것이라 하십니다.

 

다시 마가복음 1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막13:24-25)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예수님께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가 되는 날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과 별이 빛을 잃을 것이라 하십니다. 어두움이 없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언제 그러한 일이 일어났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제 육시부터 구시까지 해가 검어지고 온통 어두움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그 순간에 성전이 무너집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진 시간이 제 구시인데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그 휘장 앞의 향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성전이 담고 있던 율법과 제사를 그 시간에 부정해 버리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종교행위와 모형으로서의 지성소와 성소를 그들의 눈앞에서 부수고 찢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의해, 인본주의에 의해 움직이던 구약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무너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이 세상의 힘과 옛 하늘과 옛 땅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에덴이 박살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교만의 꼭대기에 앉아있던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는 어두움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첫 창조는 새 창조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율법 아래에서 자기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겨루어 보겠다는 심사로 자기의 힘과 꾀를 의지하여 살던 죄인들의 결국은 그렇게 어두움과 혼돈과 공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게 ‘빛이 있으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짜 성전이 옛 성전을 품어 안으시고 자폭을 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죄인들의 세상은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빛이 있으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벧엘이라는 하나님의 승리의 자리가 등장하는 오늘 본문에 왜 창세기의 문화명령이 반복이 되고 있는지 이해가 가세요?

 

잘 생각해 보세요. 모형으로서의 성전은 직사각형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이 세상, 우주를 상징하는 세 겹의 천으로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직사각형의 성전이 요한계시록에서 정사각형이 됩니다.

 

(계21:16)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옛 성전에서 유일하게 정사각형이었던 곳이 있었지요? 거기가 어디입니까? 지성소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소에 의해 옛 성전이 먹혀버린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들의 가능성과 이 세상의 교만이 먹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바로 야곱과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실제 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불순종을 공격하여 먹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서 우리를 한없이 무력하고 약한 존재로 인정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렇게 나약한 실패자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사시다가 가신 것이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저주와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자의 모습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약한 자로, 겸손한 자로, 순종하는 자로 서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 완성의 자리로 우리를 밀어 올리시기 위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약함과 실패와 실수와 고난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내어놓는 그러한 더럽고 추악하고 어두운 소산들을 경험하며 거기에 치를 떨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옷을 입고는 그러한 더럽고 추한 모습밖에 보일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열심히 우리를 부인케 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옛 자아와 씨름하시며 우리를 벧엘로 밀고 올라가시는 하나님의 열심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은 실패자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실수한 사람을 탈락시키지도 않으십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요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풍랑과 큰 물고기를 사용하셔서 결국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일보다 당신의 백성 하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단순히 당신의 일이 목적이었다면 요나 같은 사람은 바다에다 버리고 다른 사람 데려다 쓰셨어야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벧엘 입성을 위해 그들의 옛 자아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완전히 부수어 버리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새 성전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전쟁을 걸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에 남아 있는 실수와 실패와 상처는 영광스러운 선물인 것이지 절대 치유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우리의 옛 사람과 전쟁을 하고 계신 하나님의 열심 앞에 지금 항복하십시오.

 

�'� �_0B_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투고, 분열하고, 약점을 드러내고, 더러운 음부를 폭로당하면서 이미 영원 속에 완성되어 있는 참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추구하게 되며, 우리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의 능력으로 문제들이 성숙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툼과 분열과 문제만 있는 곳은 시정잡배들의 싸움판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역 교회는 우리 성도 개개인이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러한 것처럼 실패하기 위해서 모이고, 실수하기 위해서 모이며, 싸우기 위해 모이고,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면서 그 가능성과 힘을 기각당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이 된 진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점차로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야곱이 벧엘에 가까운 세겜에서 머물며 그 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요?’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꾀를 부린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상식과 우리의 꾀로 우리의 게으름과 불신앙을 합리화 시키려 하는 그런 시도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의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의 열 한 아들이 대 살육을 저지르는 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벧엘 비슷한 곳도 안 됩니다. 벧엘과 가까운 곳도 안 됩니다. 거기는 정확하게 벧엘이어야 합니다. 잘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열심히 가셔야 합니다. 그 길에서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여러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시고 예수라는 지팡이를 붙드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벧엘에 당도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