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2. 얍복강 이후의 성도의 삶 (창33:1~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8

82. 얍복강 이후의 성도의 삶

(창33:1~20)

33:1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33:2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33:3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33:4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33:5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33:6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33:7 다음에는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나와서, 그들도 엎드려 절을 하였다.

33:8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33:9 에서가 말하였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33:10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33:11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

33:12 에서가 말하였다. "자,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 내가 앞장을 서마."

33:13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33:14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33:15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렸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33:16 그 날로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33:17 야곱은 1)숙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야곱은 자기들이 살 집과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 '초막')

33:18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33:19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33:20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2)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는 지난주에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담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강청기도의 능력이라든지 보좌를 흔드는 성도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이겨서 자신의 꿈과 야망을 성취하려하는 이기적 옛 아담의 군상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결국 그들을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사는 절름발이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라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으신 것이고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자신의 이름을 댐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자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남의 발목을 잡를 넘어뜨리는 것도 불사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을 폭로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들을 모두 죽여 없애 버리셔야 하지만 창세전에 아들과 맺으신 그들에 대한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는 대신 당신의 아들의 품에 그들을 모두 집어넣으시고 당신의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셔서 그를 죽임으로 말미암를 당신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당신 백성들의 죄를 모두 벌하셨고 그 예수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그 안에 들어있던 당신의 백성들과 영원토록 화목한 관계를 회복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사는 자들이 되도록 새롭게 창조해 내신 사건이 바로 얍복강에서의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힘으로 승승장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단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무력한 자라는 것을 폭로당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정도를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씨름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 세상과 자기의 재산과 업적, 그리고 자기의 옛 자아에 대해 점차로 매력을 잃게 되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얍복강 사건에서도 힌트가 되어 있지요?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환도 뼈를 맞고 뼈가 위골이 된 야곱은 하나님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노비들과 가축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근거요 수단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환도 뼈를 맞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설 수도 없는 자신의 실체가 폭로되자 그러한 자기의 소유들이 자신의 축복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이 어떤 상태였습니까? 사랑하는 자기의 가족들과 모든 재산을 전부 얍복강 너머로 건너보낸 상태였습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혼자였고 이 세상의 모든 힘을 다 털어버린 벌거벗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하러 오시기 전에 야곱의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소유를 털어낸 빈털터리의 모습인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게 되었을 때 야곱은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환도 뼈마저 위골이 되자 참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야망과 재산과 업적과 가족이 복의 진수가 아님을 눈치 채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도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비전과 야망과 우리가 이루어 놓은 모든 업적들과 재산, 그리고 가족까지도 얍복강 건너로 보내버리고 그러한 한시적인 것들이 모두 다 사라졌을 때, 나의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묵상 끝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121:1-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의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이 지긋지긋한 공허와 허무에서 벗어나 참 만족과 행복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오직 한 길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분과 함께 거하며, 그 분만 의지하며,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유일하며 참 된 복인 것입니다. 지금 시편 기자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까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 것이 바로 우리의 든든함이며 참된 복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힘으로, 내 꾀로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면서 사는 것이 강함이며 복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절름발이가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망도 못가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이 진짜 복인 것입니다.

저는 요즘 24시간 내내 하나님의 임재를 소름끼치도록 실감하여 삽니다.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면서 사사건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실감나게 느껴지는지 몰라요.

그런데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에는 굉장히 사는 게 힘들어졌어요. 심지어 휴지 하나를 길에 못 버리겠어요. 지난주에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껌 종이를 무심코 주차장에 버렸는데 곧바로 하나님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 달려가 그 껌 종이를 주워서 휴지통에 버리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절대 잊지 말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살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겠구나.’ 내 힘으로, 내 다리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내가 세워 놓은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초조해하며 살던 때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요즘하고 저에게 감지되는 자유의 분량은 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살이 쪄서 나오는지 아세요? 거기서는 자기의 목표, 자기의 계획, 자기의 꾀가 안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상관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고, 주는 밥 잘 챙겨 먹고, 운동시켜 주면 운동하고, 하다 보니 세상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일상을 통제하는 그 상관이 중대장, 대대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실 때는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수지맞은 거지요. 그게 바로 복 받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야곱이 그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에게 허락된 코끝의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집요하게 옛 사람을 붙드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야곱이 여전히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창33:1-2)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드디어 자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와 함께 자기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급히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라헬과 요셉을 맨 뒤로 보내고 그 앞에 레아와 그 자식들, 그리고 그 앞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두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가치 없는 것들부터 죽이라는 것이지요. 야곱은 끝까지 자기 생각에 자기에게 소중한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형 에서가 화를 내기는커녕 야곱을 부여잡고 입을 맞추고 울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에서라는 사람은 야곱의 행동여하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목표가 되는 그런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야곱이었을 때에는 에서가 야곱의 대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자 그 에서라는 문제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에서는 굉장한 부자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엄청난 가축을 선물로 주었더니 ‘나도 많으니까 네 것은 그냥 너 가지라’고 사양을 합니다. 에서의 재산에 비하면 야곱의 재산이 보잘 것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는 용병이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318명 데리고 동방 연합군을 좇았었지요? 그러니까 그 수는 아브라함의 것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살고, 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 영적인 안목으로 그의 삶을 보면 그는 야곱이라는 사람을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엑스트라이며 장치에 불과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에서처럼 돈 많은 엑스트라가 좋으세요? 돈은 없더라도 하나님의 목표가 되는 주인공이 좋으세요? 돈 많은 주인공이 좋으시지요? 아닙니다. 우리의 처지나 상황, 그리고 우리의 업적과 재산은 절대 우리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 백성들의 성숙과 훈련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 세트일 뿐이요, 아무리 존경받고 인기 있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 백성들의 성숙과 훈련을 위한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줏대도 없이 야곱을 치러 오다가 갑자기 마음이 약해진 것처럼 보여 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에서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 문제를 바라보며 문제 해결에만 몰두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꾀를 내어 그 문제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요. 그러나 성도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는 사실 그 자신의 거룩에 사용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나 시험에 당면했을 때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시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날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그 문제가 나를 품어 안고 입을 맞추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한 아담 적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한 후 서로에게 책임 전가를 한 것 기억나시지요?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 세상의 왕의 자리에 올라앉아야 하는 자신이 그러한 실수의 당사자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어떤 문제나 시험이 닥치면 그 문제의 원인과 이유를 자기 외부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아닙니다. 모든 문제나 시험은 사실 우리의 거룩을 향한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의 손길인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원인과 이유는 사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문제나 시험이 전부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나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숙과, 완성을 향한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남편,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아내, 확 포기해 버리고 싶은 자식, 말썽만 일으키는 쫓아내 버리고 싶은 교인, 그들에게서 실낱같은 작은 희망도 보이지 않아서 절망에 빠져 계신 분들 계시지요? 변하지 않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시다가 급기야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무능함을 탓해 보신 적 많으시지요? ‘저 인간은 하나님도 못 고쳐, 하나님도 포기하신 자를 어떻게 내가 감당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아직 야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얍복강의 씨름을 통과하고 우리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게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올바로 설 수도 없는 그런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우리의 대적 에서들은 그들의 역할을 끝내고 우리를 부둥켜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에서는 야곱의 성숙에 쓰여 진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잠언 기자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잠16:7)

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어떠세요?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에 관심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 것을 위해 원수까지도 도구로 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도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의 문제가 아닌 다른 이들의 문제까지도 자신의 성숙과 완성에 도구로 쓰게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왕상8:37~39)(표준 새 번역)

37       이 땅에서 기근이 들거나, 역병이 돌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 떼나   누리 떼가 곡식을 갉아먹거나, 적들이 이 땅으로 쳐들어와서 성읍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에워싸거나, 온갖 재앙이 내리거나, 온갖 전염병이 번질 때에,

38       주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혹은 주의 백성 전체가, 재앙이 닥쳤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고, 이 성전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펴고 간절히 기도하거든,

39       주께서는, 주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판단하셔서,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십시오.

       주님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온갖 재앙이 내리거나 온갖 전염병이 번질 때에 누군가가 그 재앙을 깨닫고 기도하거든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닥치는 재앙이나 온역 등은 누군가의 간절한 회개와 참회로 걷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목표하고 계신 누군가의 회개와 참회를 위해 어떤 다수의 무리에게 재앙이 내리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서머나 교회가 모두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오늘날 예배당 안에 편만하게 퍼진 복음의 왜곡과 변질이며, 세상의 힘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그 것만을 추구하는 교회의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대 놓고 비난하기도 하며, 욕지거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회개하고 네가 참회하고 네가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폭격해서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천인공노할 놈들이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인 교회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전 세계 교회가 이슬람 과격파들을 비난했습니다. 성경은 문제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에게 있는 것이니까 너희들이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탓 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참회하며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에서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절대로 다른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타락과 실수까지도 우리의 회개와 참회 거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교만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죄와 악과 실수와 실패가 모두 나 때문이라는 올바른 인식 속에서 그들의 죄와 실수를 자기가 뒤집어쓰는 제사장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말로 해서 될 거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필요가 있으셨겠습니까? 인간들은 참으로 끈질깁니다. 끝까지 자아 숭배 교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소망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옛 자아는 얼른 부인되고 벗어 버려야 할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렇게 에서가 돌변하여 야곱에게 호의를 베풀자 야곱은 이내 얍복강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큰 골칫거리가 하나 해결이 되자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또 다시 자기의 계획과 목표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우리의 모습 같지 않으세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에는 ‘하나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하고 애걸복걸 하다가 막상 그 문제가 해결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우리 죄인들의 속성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에서가 동생에게 자기 집이 있는 세일로 가자고 합니다. 오히려 에서가 더 착합니다. 의리도 있고 사나이답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금방 꾀를 부립니다.

 

(창33:12~14)

12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보시다시피 야곱은 형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자 금방 형을 버립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초개처럼 잊어버립니다. 그가 형에게 세일로 따라 가겠다고 하고 어디로 가는지 보세요.

 

(창33:16~17)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은 형이 세일로 회정을 하자 숙곳으로 도망갑니다. 잠깐 들른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시면 그 숙곳에 집을 짓고 짐승의 우리를 지었다고 하지요? 장막을 친 것이 아니라 집을 지었습니다. 눌러 살기 위해 간 것입니다. 금방 또 형을 배신하고 자기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때 형 에서도 동생 야곱을 포기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야곱과 에서가 만났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딱 한번 이삭의 장례식을 함께 치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야곱과 에서가 영원히 다른 길을 갑니다. 그렇게 숙곳에서 몇 년을 보낸 야곱은 다시 세일도 아니고 벧엘도 아닌 세겜으로 이동합니다.

 

(창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거기서는 아예 땅도 삽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단을 쌓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벧엘에다가 단을 쌓으라 하셨습니다.

 

(창31:13)

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세겜에다 단을 쌓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름도 그럴 듯하게 짓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조력자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못해 야곱을 벧엘로 밀어 올리십니다. 거기에 매개가 된 사건이 바로 야곱의 딸 디나의 강간 사건입니다. 내가 명령한 곳으로 빨리 올라가라는 것이지요.

 

(창34:1~2)

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야곱이 딸 디나를 낳고 하란을 나섰을 때가 디나가 일곱 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 디나가 장성하여 결혼할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녀를 강간한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을 찾아와 결혼을 시켜 달라고 한 것을 보아 디나가 그 때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숙곳과 세겜에서 도대체 몇 년을 허비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동안 자기 형 에서를 찾아갔다는 말도 전혀 없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의 하나님과의 씨름을 경험하고서도 적어도 칠년 이상을 여전히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며,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자기의 아들들이 세겜의 성으로 가서 그들과 전쟁을 하여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그 성 사람들의 것들을 모두 약탈해 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꾀를 내어 하몰과 세겜의 성 남자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게 한 후 가장 고통이 심한 삼일 째 되는 날 쳐들어가서 그들을 살육했습니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세겜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복수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곱은 딸의 순결도 내어주고 자식들의 살인까지 지켜 본 후에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디나의 사건과 세겜과의 전쟁 이후에 즉시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창35: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세겜이 아무리 벧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단을 쌓고 거기에서 땅을 사 머무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비슷해서도 안돼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야곱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배태된 ‘비슷한 신앙’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의 생각과 상식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다시 재단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각색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신앙생활이 아닌 우리 식의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교회’라는 것이 생겨서 각자의 집이나 직장에서 인터넷으로 예배 실황을 보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하고, 성찬식만 일 년에 한번 모여서 하는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남미 코스타의 강사로 브라질의 꾸리찌바라는 도시에 갔더니 거기에는, 몇 사람이 모여서 ‘설교 테이프’나 ‘비디오’를 하나 틀어놓고 자기들끼리 예배를 한 후 오후 시간에는 골프를 치러 간다든지 피크닉을 간다든지 하는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점점 인간들이 편한 방식으로 예배의 형태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드라이브 인 교회(drive in church)가 생겨서 각 가족들이 차를 타고 커다란 운동장에 모여 차 안에서 설교를 듣고 헌금은 들어가며 나오며 요금 통 비슷하게 비치해 놓은 헌금 통에 넣고 나오는 그런 교회도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꼴 보기 싫은 다툼이나 문제들을 보지 않아서 좋고 교회 생활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아서도 좋고, 나머지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유용하게 쓸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속편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겜에 단을 쌓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벧엘로 밀어 올리실 것입니다.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는 일을 보게 하셔서라도 반드시 벧엘로 밀어 올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요.

 

여러분 왜 주님께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을까요?

왜 우리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혼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데 모이기를 힘쓰라 하셨을까요?

그리고 초대교회는 왜 매일매일 모여서 성찬을 행하고 말씀을 나누었을까요?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반드시 그 곳에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 나 혼자 있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떠나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교회의 모임을 강력하게 명령하시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그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하늘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임재 하셔서 그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히 흘러넘치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절절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공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에는 알 수없는 힘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끌려나온 남편이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알 수없는 그 예배의 힘에 압도되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런 간증을 저는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모임에서도 느낄 수없는 그런 힘이 교회의 예배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 그 예배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을 때에 한 해서 말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터넷만 열면 수만 개의 설교를 언제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모임이나 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경홀히 여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세우신 설교자에 의해 인격에서 인격으로 전달되어져야 그 효력이 제대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엡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일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돌아가면서 설교를 한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주 신선하다고 칭찬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중이떠중이 들이 전부 설교도 하고 성경공부도 인도하고 하니까 참 어지러워요. 그들 각자가 내 놓은 ‘내가 복음’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엉켜서 뭐가 진짜인지가 헛갈리는 시대가 되었단 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인격이 그 설교자라는 인격을 감동하시고 깨우치셔서 역시 인격인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시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인격으로 그 전달과정에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테이프로 CD로 비디오로 신앙생활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거기가 바로 세겜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이 예배 시간에 큰 감동을 받았던 설교를 나중에 다시 들어보면 시큰둥한 경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똑같은 설교인데 교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과 임재 속에서 받았던 말씀과 혼자서 테이프로 CD로 듣는 말씀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 세계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중심에 섰었던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를 책으로 내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예배당에서 선포되어진 설교로 나타난 부흥의 결과를 책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마시오. 예배당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에는 천둥과 지진과 햇빛과 무지개와 바람이 들어있지만 그것이 활자로 옮겨지고 나면 천둥과 지진과 햇빛과 무지개와 바람은 박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저희 서머나 교회 CD를 들으시는 자칭 CD교인 몇 분이 방문을 하셨었습니다.

그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CD로 삼 년 이상 서머나 교회 설교를 들어왔기 때문에 CD를 듣는 거나 실제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듣는 거나 그게 그것일 것이라는 생각에 왔는데 실제로 교회가 모인 자리에서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예배를 하니 그 감동이 백배는 더 큰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입니다.

거기에는 천군 천사의 찬양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도의 기도가 있고,

성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마지막이 축도로 끝나지요?

그 것은 지금 우리가 모형으로 경험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절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자라는 그러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의 자각과 그로인한 순종의 삶인 천국의 예배가 이 세상에서도 실제화 되어 이어지게 되는데 거기에 필요한 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너희는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너희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 살아있는 예배로 드리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모임에 나와 그것을 배우고 그 삶에 필요한 힘이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예배입니다.

 

지금 제 말을 들으시면서 ‘그런데 교회에 오면 하늘나라의 풍요와 안식과 기쁨을 경험하기 보다는 시기와 질투와 험담과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의 눈총과 다툼만 보이는데 그래도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적어도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어지고 있는 한 교회의 모임에 빠지지 말고 나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지역교회, 가시적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교회의 모형입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완성지점을 향하여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져 가야 하는, 역사 속에서의 필연적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야곱처럼 여전히 불가능하고 추악하고 야비한 모습을 하나님에 의해 폭로당하고, 스스로 경험하며 완성의 지점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교회도 그러한 과정을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과 실수와 범죄 함과 무능력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투고, 분열하고, 약점을 드러내고, 더러운 음부를 폭로당하면서 이미 영원 속에 완성되어 있는 참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추구하게 되며, 우리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의 능력으로 문제들이 성숙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툼과 분열과 문제만 있는 곳은 시정잡배들의 싸움판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역 교회는 우리 성도 개개인이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러한 것처럼 실패하기 위해서 모이고, 실수하기 위해서 모이며, 싸우기 위해 모이고, 그렇게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면서 그 가능성과 힘을 기각당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이 된 진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점차로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야곱이 벧엘에 가까운 세겜에서 머물며 그 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요?’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꾀를 부린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상식과 우리의 꾀로 우리의 게으름과 불신앙을 합리화 시키려 하는 그런 시도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의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의 열 한 아들이 대 살육을 저지르는 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벧엘 비슷한 곳도 안 됩니다. 벧엘과 가까운 곳도 안 됩니다. 거기는 정확하게 벧엘이어야 합니다. 잘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열심히 가셔야 합니다. 그 길에서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여러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시고 예수라는 지팡이를 붙드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벧엘에 당도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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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도는 평생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즉 스스로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짓밟고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자였다는 것을 폭로당하고, 확인하며, 수긍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가 없는 절름발이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김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올바로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 된 실체를 반추하고 기억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분께 의탁한 자로 그 분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어떤 이들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공격으로 그들이 겉에 입고 있던 헌 옷을 난도 질 당하고 그 안에 있는 새 옷을 드러내게 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자기들에게 입혀진 새 옷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그 새 옷을 입게 되었지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세상에게 져서 맞아 죽으시는 방법으로 그 새 옷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야곱의 얍복 강 씨름 이야기가 어떻게 복음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백마를 탄 예수는 바로 우리를 향해 창을 겨누고 돌진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 같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한 복된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쉴 새가 없습니다.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해도 우리만 걸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떼먹어도 꼭 우리한테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직접 징수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하나님 왜 나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혀요?’ ‘하나님, 내 치사해서 이제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쫓아다니면서 방해나 하지 마세요.’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답게 만드셔야 합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이미 결정하고 확정해 놓은 당신 자녀들의 자녀다움을 찾아주시기 위해 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늘 재수 옴 붙은 사람처럼 아주 작은 흠과 티도 발각이 나고 폭로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걸어오시는 씨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된 것입니다. 아니, 원망이 나오면 원망을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셨는가에 감사하고 감격하세요.

 

우리는 이미 복을 받기로 확정되고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뢰하는 영생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부인해야 할 ‘나’가 나의 피와 살과 뼈 속에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단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성도에게 있어서 필연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야망을 부인하시고 여러분의 욕심을 부인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완성된 미래에서 흘러오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창세전에 확정된 결론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래에다가 자신들이 이루어내서 채울 업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 속에 결정되고 확정된 자신들의 결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 완성된 결론을 얼마만큼 배우고, 알아차리고, 인식하면서 살아 왔는가와 지금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가 개척하고 이루어 내야할 이 세상에서의 미래나 거기에서 뭇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평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거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정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완성된 미래에 안착하기 위해 거기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정말 살아계십니다. 저는 요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실감이 되어서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의 황홀함을 자주 경험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항복하시고 내려놓으세요.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절대 이기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