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79 라헬과 레아 그리고 야곱 (창29:21-35)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4

79 라헬과 레아 그리고 야곱





(창29:21-35)

 21.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요2:1
 22.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창30:9-12
 25.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26.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찌니라    삿14:12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창30:3-7
 30.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창29:20
 31.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32.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출3:7, 신26:7
 33.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49:8, 마1:2


오늘은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항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라헬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그 두 여인의 이야기를 보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레아의 이야기 속에 더 많은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는 질투심 많은 두 자매의 자식 낳기 경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이야기를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헬과 레아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지금 야곱의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라헬이라는 여자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 그 다음에 레아가 그의 인생 속에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2:17-18)

17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에 갑자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헬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등과 동시대에 일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남 유다에서 활동을 하면서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남 유다를 향해 ‘항복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라고 오해를 받고 동족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이방의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권면을 했으니 당연히 매국노라는 핍박을 받지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그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울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기 민족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본래의 뜻은 정치적, 군사적 항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바벨론을 들어서 매를 대시는 것이니까 얼른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꾸지람과 매를 순순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항복하고 불순종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0장에서 33장까지를 죽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 앞에 매를 맞기는 하지만 멸망당하지 않고 회복 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2장에서 인용된 예레미야 31장15절은 그 전체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징계와 회복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에서 17절까지를 읽어보면 좀 더 확실해 집니다.



(렘31:15-17)

1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7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그렇지요? 애곡하는 라헬에게 ‘울지 말라, 그들이 돌아온다.’하고 회복의 메시지를 함께 주시고 계십니다. 15절을 보시면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슬퍼하며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남 유대의 처지를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여겨지는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아들을 딱 두 명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요셉입니다. 그 요셉의 두 아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이지요? 북 이스라엘의 중추가 된 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에브라임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두 번째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남 유대의 중추 지파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라헬하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어머니, 즉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통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막내아들 베냐민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에 애굽에 볼모로 잡힐 뻔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은 멀쩡하게 살아서 야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유다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미리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이 애굽으로 팔려간 사실을 생전에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중적 상징을 담아서 마치 라헬이 두 아들이 부모의 품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유다의 바벨론 유수와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서 묻힌 곳입니다.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자식들, 유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여 애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입니다.



(렘40:1)

1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해방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다가 라헬의 무덤이 있는 라마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징계와 회복을 미리 삶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바로 이 상황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오심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땅에 두 살짜리 미만의 아이들이 모두 살육을 당하는 처참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마태가 뜬금없이 라헬이 라마에서 자식들로 인하여 애곡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인용 해다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지금 그 사건을 유다의 바벨론 포로 사건과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이방인인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된 것처럼 에돔 사람인 이방인 왕 헤롯에 의해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살육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죄로 인한 죽음과 바벨론 포로 사건이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런데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 속에서 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죽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로 인한 죽음과 바벨론 유수는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살아나게 될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태가 예레미야 31장의 이야기를 인용 해다가 쓴 것입니다.


라헬이 두 아들이 잡혀가서 울고 있지만 그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죽어야 할 이스라엘, 즉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그 복음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기 위해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롯의 궁으로 인도한 것이고 이방 사람 헤롯이 죄의 권세가 되어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 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나님께 대우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지고 결정되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예수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라헬은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식이 죽은 것을 위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든 시험이 닥치면, 하나님, 빨리 이 문제 해결해서 나를 위로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문제 해결이 정말 우리를 위로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위로는 오직 죽은 자를 살려내신 그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돈으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명예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로 말미암아 슬피 우는 라헬에게 자식들을 살려 보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들이 화목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여러분,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된 자신의 존재와 신분 확인에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지며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라헬이 담고 있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제 레아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1절과 33절을 보면 레아에게 총(寵)이 없었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반해서 그녀를 얻기 위해 외삼촌 집에서 7년간을 종처럼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야곱의 나이가 여든넷이었는데 라헬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 노구를 이끌고 7년을 하루같이 보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기 옆에 누운 여자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뒤늦게 외삼촌에게 속은 것을 알고 7년을 더 일해서 라헬을 얻고야 맙니다. 라헬은 그렇게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여인입니다.

반면에 레아는 곱고 아리따운 라헬에 비해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저 눈매가 선한(안력이 부족)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이 라헬과 부부싸움을 하고 난 후라든지 특별한 때에만 아주 가끔 레아와 잠자리를 같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0장에 가면 야곱과 라헬의 부부싸움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창30:1-2)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이럴 때 가끔 레아의 방을 기웃 거렸을 뿐입니다. 다른 때에는 라헬이 항상 부부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창30:14-16)

14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 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 채를 청구하노라

15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 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 하였더라

분명 야곱의 첫 번째 아내는 레아입니다. 그럼에도 레아는 자기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라헬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임신촉진제인 합환 채 같은 귀한 물건으로 거기에 대한 합당한 보상까지 해야 했습니다. 성경이 왜 레아를 이처럼 철저하게 버림받은 여인으로 그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버림받은 여자, 즉 교회에게서 탄생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레아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싫어 버린바 된 여인에게서 약속의 후손인 메시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역시 레아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사53:2-3)(표준 새 번역)

2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아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마침내 약속의 후손인 ‘교회’를 탄생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창29:31)

31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후손을 탄생케 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전부 총(寵)이 없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가 몇 명 등장합니다. 원래 히브리 사람들의 족보에는 여자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조상들을 기록하면서 여자들을 몇 명 끼워 넣습니다. 


그 첫 번째 여자가 다말입니다. 다말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형사취수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취해서 자손을 이어가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에게 자기 씨를 주기가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 그렇게 되니 유다가 막내아들을 다말에게 주고 싶었겠습니까? 아들 둘을 잡아먹은 며느리에게 막내아들마저 맡겼다간 집안의 대가 끊길 판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며느리 다말을 방치했습니다.

그 때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하고 시 아버지를 유혹합니다. 그리고는 임심을 해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음탕한 며느리 다말에 의한 유다의 봉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인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라인이 이어지는 작은 십자가의 그림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버려지고 구겨진 한 여인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그녀에게서 약속의 후손의 조상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레아의 또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두 번째 여자는 라합입니다. 라합은 기생입니다. 당시의 기생은 몸을 파는 여인들이었으므로 창녀 라합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구한 운명의 이방여인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자 그녀가 조국을 배반하고 소문으로만 들은 여호와를 택합니다. 그리고는 여리고가 진멸될 때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 창녀 라합이 보아스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그 보아스에게서 오벳과 이새와 다윗이 나지 않았습니까? 역시 레아의 또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여인은 룻입니다. 룻도 역시 이방 여자입니다. 그녀는 모압 사람으로 베들레헴에서 이민을 온 나오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어서 그 남편의 동생까지도 죽었고 시 아버지마저 잃었습니다. 그렇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시 어머니 나오미를 좇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베들레헴으로 들어와 거기에서 보아스를 만나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 한 여인이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의 후손을 잉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남편 요셉이 마리아를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 말은 남편인 요셉이 마리아의 불륜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간음을 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요셉이 조용히 관계를 끊어 여자를 살리려 했던 것입니다.


기구한 운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자기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모친이며 내 형제라’고 가슴에 칼을 꽂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약속의 후손인 예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레아의 그림은 이렇게 다말과 룻과 라합을 거쳐 마리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약속의 후손인 예수가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네 여자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전부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천대받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레아는 바로 그 여인들의 원시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여인이 하나님의 총을 받아 약속의 후손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레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겪는 기구한 운명이나, 불쌍한 처지나, 이해 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 등이 복의 내용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예수의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것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가 가진 소유나 인기나 명예 등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기죽을 것도 없고 망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못 배웠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도 없고 약하다고 해서 숨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예수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레아처럼, 다말처럼, 기생 라합처럼, 이방 여인 룻처럼, 기구한 마리아처럼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낳으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게 바로 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낳으셨다는 말은 나로 인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므로 내가 예수를 낳았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12장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예수를 상징하는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그 그림이 바로 총이 없던 레아가 약속의 후손의 라인인 유다를 낳는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레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열조의 무덤에 묻힙니다. 열조의 무덤에 묻힌 것은 사람의 사랑을 받던 라헬이 아니라 총이 없던 레아입니다. 그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한 무덤에 장사됩니다. 그리고 야곱도 마지막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닌 레아와 함께 부여조의 무덤에 묻힙니다.



(창49:29~31)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그렇지요? 성경은 지금 하나님의 복은 인간적인 사랑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나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고 가난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성공신학, 번영의 신학에 속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는 그러한 세상의 힘을 조롱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들이 합의해 놓은 ‘가치’라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돈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아시지요? 사람들은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돈 앞에서 비굴해지고 약해집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자기 휘하에 두고 마음껏 권세를 휘두릅니다. 세상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권세 앞에서 사람들이 비굴해 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즐깁니다.


명예는 어떻습니까?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한 것이라고 순위를 매겨 놓고 상위의 것들을 성취한 자들이 하위의 것들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홀대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즐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순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기업체의 사장님이 최고의 순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의사와 변호사, 검사, 판사 등이 최고 순위에 올라가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방송국 PD가 최고의 순위를 차지하기도 하다가, 어떤 때에는 스포츠 스타가 최상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연예인이 최고의 순위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그 때 그 때 매기는 순위에 따라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 동의하고 좇아갑니다. 세상이 이끄는 대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립니다. 성도는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돈이 여러분 앞에서 권세를 부리려 할 때 여러분은 돈을 조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이 쫄딱 망해서 알거지가 된 사람은 그 돈의 권세 앞에서 자살까지 생각을 합니다. 최고의 힘이라 여겼던 돈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세상 힘이 휘두르는 권세는 엄청난 것입니다. 목숨까지도 요구합니다. 성도는 그러한 때에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겸허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겠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돈의 권세가 성도에게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돈의 권세가 그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고 섰는데 그 사람은 그 권세를 조롱이나 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하면서 또 다시 그의 일상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세상의 권세는 쥐구멍을 찾아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 중 한 아이의 부모님은 열 개가 넘는 코스닥 상장회사를 소유한 큰 그룹의 회장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지금은 생활비마저 쪼들리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 상류층에서 지금은 슈퍼마켓에 갈 돈도 아껴서 써야 하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마 보통사람들 같았으면 그렇게 떵떵 거리며 살다가 완전히 망한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부끄러워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돈의 권세를 조롱이나 하듯이 현재의 당신들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쪼개서 오히려 불쌍한 학생들과 목회자들을 조금씩 돕고 계십니다. 그 분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무력하게 만들려고 했던 돈의 권세가 그 분들의 신앙 앞에서 처참하게 박살이 난 것입니다. 그게 신앙인의 다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놓은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직업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 일에 매진을 하며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명예의 권세가 그 사람 앞에서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성도의 복은 상황이나 처지나 소유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복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가 아닌가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진 은혜 속에서 이 세상을 살면서 육신의 불가능함과 죄의 추악함을 경험하고 목격하고 다시는 그러한 것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하늘의 백성으로 회귀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행위와 상관없이 야곱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를 이스라엘로 회복시키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로 지어져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어떠한 처지에 처해있건 어떠한 상황에 봉착해 있건 복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어 그 세상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권세의 허망함과 포악성을 경험하고 목격함으로 말미암아 그 세상 권세를 기각하고 육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이 세상은 부정되고 부인되어야 할 것들이지 신앙이나 영성이나 복의 유무를 재는 잣대로 쓸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 그리고 야곱의 삶이 내어 놓는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경기가 어렵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생활이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지도 마세요. 왜 나는 이렇게 늘 재수가 없냐고 원망하지도 마세요.

그러한 환경과 처지와 상황과 아무런 관계없이 여러분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하시면서, 비록 내가 세상에게는 총이 없이,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내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고 계시다는 그 복된 소식에 감격하시며 사십시오.

그게 바로 진짜 복 받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세상에게 당하지 마시고 세상의 권세를 조롱하시며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