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왜 야곱인가?(II)
(창28:1~9)
28:1 이삭이 야곱을 불러서, 그에게 복을 빌어 주고 당부하였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아라.
28:2 이제 곧 밧단아람에 계시는 브두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거기에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들 가운데서 네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여라.
28:3 1)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주셔서,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마침내 네가 여러 민족을 낳게 하실 것이다. 히, '엘 샤다이'
28: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도 주셔서, 네가 지금 나그네살이를 하고 있는 이 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네가 유산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28:5 이렇게 복을 빌어 준 뒤에, 이삭은 야곱을 보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다.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며,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오라버니이다.
28:6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에서 아내감을 찾게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면서, 가나안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감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는 것과,
28:7 야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밧단아람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28:8 에서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 가나안 사람의 딸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28:9 이미 결혼하여 아내들이 있는데도,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또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마할랏은 느바욧의 누이이며, 아브라함의 손녀이다.
아주 오래전에 개봉되었다가 흥행에서 실패한 한국 영화중에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한 ‘올드 보이’라든지 마치 우리교회 표어를 도용한 듯한 유행어 ‘너나 잘 하세요’를 국민적 유행어로 만든 ‘친절한 금자 씨’등을 만든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영화를 아주 좋아하고 한 번 본 영화는 거의 기억을 하고 있는 제 기억 속에서 그 영화의 내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걸로 보아서 그 영화는 아마 통속적인 연인들의 사랑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제목과 그 영화의 주제가는 지금도 제가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화의 제목과 그 영화의 주제가 가사가 그 때 당시 제가 정립하고 있던 저의 신앙관과 아주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 주제가의 가사는, 우리는 달 아래에서 그게 전부인양 거기에 꿈을 두고 살지만 결국 그 달은 실체가 아니라 찬란한 해가 떠오르면 사라지는, 해가 꾸는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그런 가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달 아래서 꾸는 꿈은 영원히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가사를 이렇게 저에게 적용을 시켜보았습니다.
‘인간들은 어두운 달 아래에서 마치 그 달의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꿈을 꾸고 야망을 가지며 자신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는 뻥 뚫린 공허를 메워보려고도 하고 만족과 기쁨과 행복에 도달해 보려 애를 쓰지만 그 세상 자체가 영원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찬란한 태양과 같은 실체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게 되면 그 달과 같은 이 세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죄인들이 꿈꾸는 달 아래에서의 완전한 세상은 절대 도래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제가 그 노래 가사를 보며 제게 적용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를 쓴 사람이 바로 저 뒤에 앉아 있는 제 친구 이상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덜렁거리기나 하는 천방지축같이 보이지만 이런 훌륭한 노래 가사를 아주 많이 쓴 유명한 작사가면서 제작자였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듣고 저 친구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 친구가 제가 말씀드린 그런 의미로 그 노래의 가사를 쓴 것이 아니라는 걸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냥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애절하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과 지양해야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왜 야곱인가?’의 후속편으로 성도에게는 왜 이 세상이 장주지몽과 같은, 아니 해가 꾸는 꿈에 불과한 달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면 왜 하나님께서 야비하고 거짓투성이의 삶을 살았던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나마 남자답고 씩씩하고 효심마저 끔찍했던 에서를 끝까지 유기시켜 버리셨는지에 관해 조금 더 깊이 이해를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꿈에 불과한 세상 속에서의 행위로는 절대 인간을 악하게 만들 수도 없고 선하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야곱과 같은 치사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들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 앞에 선으로 카운트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근거로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여기에서 알매니언주의와 개혁주의가 갈리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출발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왜 야곱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효성도 지극하고 남자답고 씩씩한 에서가 아닌 야곱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유와 그 과정을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류입니다. 그들이 이 달 같은 세상에 잠시 내려와서 죄 된 육신의 몸을 입고 죄와 그 증상들의 험악함과 추악함과 더러움과 어두움을 경험하면서 태양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배우고 그 나라를 진정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로 회귀하는 전 과정이 바로 구속사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껍데기에 불과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열심히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작은 예수를 밖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신인류 이외의 다른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가기위해 태어난 것인가? 그들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선한 일에 매진을 한다 해도 자신의 선함에 전혀 기여를 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엄밀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표현을 좀 달리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가기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타락을 하여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에 죄인으로 역할을 배정받아 열심히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짓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 어떤 피조물도 티끌에 불과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들을 빈 것으로,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자를 만들어서 죄를 조성하시고 조장하시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힙니다.
(약1:13-16)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공동번역)(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유혹 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렇지요?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자기 욕심에 이끌려 그렇게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전9:3)
3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공동번역)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쳐 얼빠진 생각을 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잠19:3)
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이렇게 인간들은 미친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이며 스스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잠시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성경에서의 선과 악은 절대 유교식으로 윤리적이나 도덕적, 사회법적으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기독교에서의 선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분의 뜻에 어긋나는 사고와 행위를 하는 것을 악이라 하고 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은 단 한 순간도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가 선한 행위인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선을 행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령하셨을 때 살인을 하는 것이 선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라고 하실 때 거짓말 하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팔아먹으라 하시면 기생 라합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선이란 말입니다. 그걸 확실하게 기억하고 계셔야 해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선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편에서 악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을 충만히 받고 있을 때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 버리셨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의 모든 행위는 그게 아무리 선해 보인다 할지라도 ‘악’인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아무리 일생을 바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위가 될 수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완강히 부인한 신 신학의 아버지였으니까요. 간디가 아무리 인도의 빈민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할지라도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말하는 것이므로 불신자가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 해도 그 모든 일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옳은 것을 옳다 주장하기 위해 배타적이 되고 독선적이 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맞장을 뜰 수있을만한 대단한 존재라는 아담적 사고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실체를 너무나 모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은 그저 먼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누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섬기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외에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떠나가 버린 그 어떤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선’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롬3:12)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게 바로 타락한 인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 간혹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억지로 죄를 짓게 강요하시는 듯한 표현들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9장 17절과 18절입니다. 거기부터 해결을 해 보지요.
(롬9:17~18)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 이로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고 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 바로를 직접 세우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바로를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쓰시기 위해 그를 강퍅케 만드셨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바로는 그냥 하나님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어버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17절의 ‘너를 세웠다’라는 표현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직접 세우신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래놓고 바로를 심판한다는 건 언어도단이지요. 그러나 헬라어 원어로 보면 거기에서 ‘세우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허용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당신의 목적을 위해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창조의 개념이 전혀 없다) 이미 불신자로 존재하던 바로를 제거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도록 허용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18절의 강퍅케 하셨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거기서 ‘강퍅하다’라고 번역이 된 ‘스클레뤼노’라는 단어는 ‘완고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바로에게 악한 역을 맡기시기 위해 그렇게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짓게 만드신 것은 사실이란 말입니까? 출애굽기 4장으로 가면 그 심증이 더욱 굳어집니다.
(출4:21)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당신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9장으로 가서 한 군데만 더 찾아볼까요?
(출9:12)
12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여기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8장으로 가면 성경의 진술이 조금 다릅니다.
(출8:31~32)
31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서 몰수이 떠나게 하시니라
32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 하였더라
여기에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입니다.
이렇게 화해가 불가능할 것 같은 구절들을 대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이해해야 합니까?
창세기의 요셉의 이야기도 같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분명 요셉은 악한 형들에 의해 팔려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결코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곳에서 요셉을 판 것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창45:7-8)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형들이 요셉을 판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다는 것입니까?
시편으로 한 번 가볼까요?
(시105:24~25)
24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당신이 시키셨으면서 왜 애굽 사람들을 홍해에다 넣어서 몰살을 시키십니까?
이번에는 신약으로 가 보겠습니다.
(요12:39~40)
39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한이 사람들이 표적을 보거나 복음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으로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지 못하게 하셔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그럼 당신이 직접 못 알아듣게 만들어 놓고서 나중에 안 믿었다고 심판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로마서에도 역시 같은 내용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11:8)
8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지요? 설상가상으로 유다서에 보면 불신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기로 오래전에 기록이 되어 있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유4)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정해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놓고 심판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른 말로 아주 뛰어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도덕적 피조물이라고는 천사와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 도덕적 피조물들이 얼마나 뛰어난 존재로 창조가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능력을겨루어 보고 싶어 할 정도로 뛰어나게 창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친구로, 자녀로, 다른 말로 한 곳에서 함께 사는 같은 속성을 가진 한 가족으로 만드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뛰어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인간들이 타락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총명과 지혜와 능력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 그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요. 아무튼 인간은 하나님의 친구로, 가족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하나님과 당신의 가족들을 섬기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들 또한 아주 뛰어난 능력과 힘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을 해 버린 것입니다. 천사가 먼저 타락을 하였고 그 타락한 천사가 인간을 유혹하여 똑같은 반란에 참여시켜 버린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럼 처음부터 타락을 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는가?’하고 질문을 합니다.
만일 인간이 처음부터 타락을 할 수없는 로봇 같은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그건 하나님의 친구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우 리의 짧은 소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 잘 듣는 로봇처럼 인간을 만드셨다면 이런 복잡한 구속사의 과정이 없이 처음부터 아주 평온한 천국이 완성이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셨나 하고 의문이 들지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나온 권위의 법칙에서 기인한 질문인 것입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 힘의 원리에 흠뻑 젖은 젊은 남자들이 결혼을 하면서 자기 아내가 될 사람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여자입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해도 반대하지 않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 해주는 그런 여자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한동안 말을 안 할 때가 있었어요. 그 때 제 아내가 밥 차려주고 빨래 해주고 옷 다려주고 하는 일은 그대로 다 하면서 제가 하는 일에 일체 무관심하고 아무 말도 안했었습니다. 뭐든지 ‘네 맘대로 해’였습니다. 그런데 제 결혼 생활 중에 그 때가 제일 고통스러웠습니다. 뭐든지 하라는 대로 다 해주고 시키는 건 다 하는데 저에게 관심이 없는 거예요. 밥을 차려줘도 거기에 사랑이 하나도 들어가 있는 것 같지 않고 빨래를 해 줘도 그저 의무감에 그렇게 해 주는 것 같으니까 옷을 입으면서도 아주 힘들더라고요. 하나님은 그런 친구, 그런 가족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친구나 자녀, 가족이라 하면 자유로운 인격과 이성과 성품을 가지고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창세전에 당신의 친구들과 자녀들, 가족들을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서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과 교제가 나올 수 있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잠시 차단시켜 버린 어떤 모델들을 당신의 작정 속에 넣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천사,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뛰어난 도덕적 피조물들의 발악과 그들의 열매와 그들의 결국,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잃게 되는 총명과 지혜와 능력과 힘, 쉬 운 말로 그들의 무능력함 등을 창세전에 택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험케 하시고 교육하셔서 우리 하나님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드셔서 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못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하 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은혜를 저버린 역사를 통과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지옥을 경험케 하시고 또 영원한 지옥을 천국과 함께 존속시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이 다시는 그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끔 그들의 인격과 이성에 각인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천국과 함께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 악인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십니다.
아주 뛰어난 만물의 영장인 도덕적 피조물로 창조하실 뿐입니다. 그리고는 어떤 자들의 삶 속에서 당신의 특별 은총을 거두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죄와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이 죄이며 악이니까요. 따라서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얼토당토 한 누명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뛰어난 도덕적 피조물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악들을 때로는 강화시켜 당신의 계획과 뜻에 사용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전혀 죄를 지을 마음이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죄를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죄인으로서 악을 밥 먹듯이 행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악을 당신의 뜻에 맞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악한 것을 조금 더 강화시켜 악하게 만드는 것은 죄의 조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악한 것을 허용하시며 사용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바로가 스스로를 강퍅케 했다고도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강퍅케 했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둘 다 맞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어떤 한 무리가 죄인들의 역사 속에 죄의 육신을 입고 죄 된 몸을 통과하여 들어오긴 하는데 이들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생명력,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회복시키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복을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의 복이 그의 평생을 좇으면서 침 삼킬 동안도 가만 놔두시지 않고 그들의 실체 확인, 즉 창세전에 확정된 그들의 원래의 신분으로의 회귀를 독려하십니다. 껍질을 벗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 때부터 자기 부인의 혹독한 훈련장으로 내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기간 동안에는 불신자들과 똑같은 과정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그의 인생 속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그의 심장 속으로 쑤셔 넣으십니다. 사람들은 그 때에 자신의 인생에 성령이 오셨고, 그 때에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것이고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태(胎)속에서부터 성령의 장중에 꼭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당신의 백성을 이 역사 속에 한동안 아무렇게나 놔두셨다가 중간에 황급히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욥7:17~20)
17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 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 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아니 창세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있었던 그 때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일분일초를 간섭하시며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죄와 악을 저지르지 않는 자로 성숙되어져가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와 악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스스로가 그러한 것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함을 자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죄와 악과 전혀 상관없는 자로 새롭게 창조가 되게 되었는지를 배우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더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죄에서 먼 삶을 간구하는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격과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면서도 아주 종종 죄인들과 방불한 그런 나약한 모습과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그것을 폭로 당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죄의 파괴력과 더러움,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는 지옥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 더러운 죄에 치를 떨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배움입니다. 그게 성숙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꺼풀 죄의 몸을 벗게 되는 것이고 한 걸음 더, 완성된 새로운 창조물로서의 우리의 실체로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죄에 대한 연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죄와 포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다시 그 죄가 뿌리는 지옥을 경험하며 다시 한 꺼풀 죄의 몸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옛 사람의 껍질이 벗겨지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실체, 즉 작은 예수의 삶이 겉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베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후에도 그렇게 험악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딸이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자식들이 서로 다투고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슬픔 등을 겪으면서 이 세상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야곱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반드시 이스라엘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자폭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안의 우리의 실체로 한 발 한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막7:18)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예수님께서 ‘왜 손도 안 씻고 밥을 먹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던지신 답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렘17:9)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는 건 단지 먹을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나오는 죄의 행위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서 우리에게서 그러한 것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하고 죄인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은 더러운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더러움과 상관없는 새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겔18:31)
31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심피 부패한 더러운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죽는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새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새로운 인류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겔36:26~28)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인류를 이 땅에 내어 보내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마음을 소유하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심장을 도려내고 건강하고 활기찬 새로운 심장으로 갈아 끼우는 수술을 받은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새 사람들이 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더러운 마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자기들이 소유한 새로운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새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셨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오는 죄의 모습들이나 악한 행위들을 직면하게 될 때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여러분을 더럽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새로운 마음을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짓는 죄는 여러분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파워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 십자가 안에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기각되고 폐기되어 이제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받을 수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 된 모습을 경험하고 직면하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나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았다면 난 영원히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이렇게 당신 자녀 삼아주셨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쏘냐?’ 하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발 한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속에 자기를 훈련하고 교육하기 위해 남겨둔 죄가 짓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롬7:19~20)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렇다고 지금 제가 무 율법주의(antinomianism)나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절대 그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로의 추구와 분투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올바르고 선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열심과 노력과 추구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만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밖에서 들어오는 선한 것이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선하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는 그러한 열심과 노력과 추구를 통하여 끊임없이 죄의 실체와 그로부터 말미암는 더러움과 고통과 지옥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 실존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의 옛 자아가 부인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로나 요셉의 형들이나 애굽 사람들 같은 이 역사의 엑스트라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죄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러한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시라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단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로운 인류로 창조하셨으며 종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셨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하고 찬송을 하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이 야곱이라는 옛 사람을 거치면서 수많은 죄, 사기와 권모술수와 시기와 미움 등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되찾는 모습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성품과 환경을 타고 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 속에서는 선한 행위가 많이 나올 거예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성품과 환경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 속에서는 선하고 바른 삶이 조금 더디게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다양한 성품과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다 걸작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그렇지만 그 걸작의 자리로 가는 그 길에 완전하고 성공적인 일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실수와 수많은 실패가 우리를 좌절케 할 것이고 우리를 절망케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좀 꼭 잡아주세요.’그렇게 우리의 약함이 고백될 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약함과 넘어짐을 보게 될 때도 우리는 똑같이 죄의 파괴력과 인간의 무력함을 보는 것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충만히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한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노력해서 얻어내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이미 내려주신 삶인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씩 찾아서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천국에서 모두에게 완성되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자신의 삶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가 잘 이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시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술을 끊지 못하시고 결국 길에서 넘어지셔서 횡사를 하신 우리 교회 교인 정 선생님을 기억하시지요? 그 때 저는 그 분의 장례식에 설교를 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고 계실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저에게 ‘죽는 날까지 술도 못 끊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따지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함께 하셨다면 반드시 술을 끊게 만드셨을 것이라는 거지요.
그걸 성화라고 합니까? 술 마시던 사람이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는 것을 성화라 하나요?
크게 오해하셨습니다. 성화는 ‘하나님 저 하나님 없이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고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어요.’를 가슴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옷소매를 꼭 붙들고 목숨 걸고 그 분께 매달리게 되는 전 과정을 성화라 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절정은 온전한 자기부인의 자리입니다.
그 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한 삶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그 강도가 평생을 강도짓과 살인만을 일삼으며 살았음에도 결국에는 그 모든 시도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삶이 진짜 강한 삶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결국 그날 저녁 낙원에 간 것을 잊지 마세요. 그게 바로 성화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절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의 양으로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나 신앙의 깊이를 재서는 안 됩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매일같이 술을 드셨지만 한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두 시간씩을 걸어서 그 새벽에 새벽기도를 나오셨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목사님 이제 복음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하나님이 저 같은 것도 구원하셨다는 것이 기적 같아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비록 죽는 날까지 술을 끊지 못하셨지만 길바닥에서 넘어져 죽어가면서 그렇게 술 하나 끊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비록 이렇게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니 이제부터는 알코올 중독도 없고 그러한 중독자들을 비웃고 손가락질도 하지 않는 그러한 천국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하고 가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그래도 넌 술 하나도 못 끊었으니 천국에 못 들어온다.’하셨을까요?
술, 담배가 죄입니까? 왜 죄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해치는 것이라 죄입니까?
그런 논리라면 운동 안하고, 맵고 짠 음식 많이 먹고, 고기 많이 먹는 것도 똑같은 죄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죄를 충분히 덮고도 남음이 있는 크고 넓고 깊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를 그런 것들과 하등의 상관없는 자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소망하고 기대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런 육신의 행위들을 가지고 시기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심판까지 해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여러분, 우리가 성도가 맞다 면 다른 사람들의 죄나 실수를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어?’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러한 실수나 죄로부터 한 걸음 빠져나와 있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가 조금 빨리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 뿐이지 나의 잘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미성숙하고 어린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측은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고 세워 주셔야지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목매지 마시고 본질을 파고드세요. 본질을 이해하십시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세전에 택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실과 직장과 가족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훈련 과정을 잘 이수하고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시고 과학자들은 최선을 다해 연구를 하세요.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시고 사업가들은 최선을 다해 돈을 버세요. 다만 그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지는 마시라는 것입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일 뿐입니다. 해가 뜨면 그 달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허황된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달을 통과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하늘의 삶을 배우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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