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78 신랑과 신부 그리고 우물가 (창29:1~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3

78 신랑과 신부 그리고 우물가





(창29:1~20)

29:1 야곱이 줄곧 길을 걸어서, 드디어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에 이르렀다.

29:2 거기 들에 우물이 있는데, 그 곁에 양 떼 세 무리가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곳은 목자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인데, 그 우물 아귀는 큰 돌로 늘 덮여 있어서,

29:3 양 떼가 다 모이면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그 돌을 굴려내어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다 먹인 다음에 다시 돌을 굴려서 우물 아귀를 덮고는 하였다.

29:4 야곱이 그 목자들에게 물었다. "여보십시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하란에서 오는 길입니다."

29:5 야곱이 그들에게 또 물었다. "나홀이라는 분의 손자인 라반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예, 우리는 그를 잘 압니다."

29:6 야곱이 또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이 평안하게 지내십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잘 삽니다. 아, 마침, 저기 그의 딸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옵니다."

29:7 야곱이 말하였다. "아직 해가 한창인데, 아직은 양 떼가 모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풀을 뜯기러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29:8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양 떼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양 떼가 다 모이면, 우물 아귀의 돌을 굴려내고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29:9 야곱이 목자들과 말하고 있는 사이에, 라헬이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끌고 왔다. 라헬은 양 떼를 치는 목동이다.

29:10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가 치는 외삼촌의 양 떼를 보고,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어, 외삼촌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29:11 그러고 나서,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기쁜 나머지 큰소리로 울면서,

29:12 라헬의 아버지가 자기의 외삼촌이라는 것과, 자기가 리브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라헬에게 말하였다. 라헬이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29:13 라반은 누이의 아들 야곱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그를 만나러 곧장 달려와, 그를 보자마자 껴안고서, 입을 맞추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야곱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라반에게 다 말하였다.

29:14 말을 듣고 난 라반은 야곱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와 한 피붙이이다."

29:15 라반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의 조카이긴 하다만, 나의 일을 거저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에게 어떻게 보수를 주면 좋을지, 너의 말을 좀 들어 보자."

29:16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맏딸의 이름은 레아이고, 둘째 딸의 이름은 라헬이다.

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29:18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가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릴 터이니, 그 때에 가서,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9:19 그러자 라반이 말하였다. "그 아이를 다른 사람과 짝지어 주는 것보다, 너에게 짝지어 주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면 여기서 나와 함께 살자."

29:20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일을 하였지만,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칠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며칠같이 느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왜 야곱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택한 자들의 목표 지점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야곱의 행위나 됨됨이와 전혀 상관없이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구속사의 그림을 함께 찾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동네에 도착하여 우물가에서 그의 신부인 라헬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온 사람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러한 언약의 사람이 우물가에서 신부를 만나는 그림은 이미 앞에서 한 번 본 그림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우물가에서 역시 언약의 후손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지요? 바로 그 창세기24장의 우물가의 그림이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의 후손이 우물가에서 신부를 만나는 장면은 모세에게로 이어집니다.



(출2:15~21)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18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렇지요? 이렇게 언약의 후손들의 신부들은 모두 우물가에서 신랑을 만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그 우물가에 자기의 필요를 채우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하나 그 우물가에서 자신의 신랑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물을 구하러 왔다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약의 후손에게 붙들려 언약 속으로 끌려 들어가 결국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신부들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성경은 참 언약의 후손이시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랑이신 참 생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신부로 택함을 받는 성도의 모습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반복하여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들은 언약이 뭔지도 모르고 생수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생수를 품고 계신 언약의 후손이 세상 힘의 원천을 상징하고 있는 우물가에서 그 우물을 기각하고 생수를 내미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 생명수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공짜 선물로 주어집니다.


세상이 주는 목마름에 찌들어 열심히 걸어서 우물가에 당도한 신부들의 고단함 앞에 공짜로 준비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 생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가 원하지도 않는데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에게 생수를 쏟아 부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그림들이 완성되는 곳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요4:5~14)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

9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1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가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사마리아 땅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다닐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그것도 황급히 서두르셔서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얼마나 행로에 고단하셨는지 주님은 도착하자마자 우물가에 철퍼덕 주저앉으셨습니다. 참 신랑이시며, 참 언약의 후손이 우물가에서 죄인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신부로 맞기 위해 서둘러 먼저 가셔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의 우물가 사건이 어떻게 요한복음 4장으로 이어지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주님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뜬금없이 남편을 데려오라 하십니다. 그 여인은 다섯 번 이혼하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이 세상의 남편들, 즉 이 세상의 힘으로 채우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목마름이 심했으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데도 채워지지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목마름을 온전히 해갈해 줄 진짜 신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남편들과는 완전히 다른 진짜 해갈을 선물해 줄 참 신랑이 세상의 우물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세상의 남편을 상징하는 세상의 우물가에 하늘의 남편인 언약의 후손이 진짜 생명수를 들고 있는 이 극명한 대조를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 명약관화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세상의 우물을 찾는 자들아, 거기에서는 절대 너희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으니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요7:37~38)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런데 오늘날 많은 곳에서는 참 생수를 들고 기다리고 계신 신랑 예수에게 세상의 우물을 파 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참 생수이시며 참 우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12:2-3)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49:10)

10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55:1-2)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우물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돈 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 거저 주어집니까? 가치가 없는 것이라서, 싸구려 라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값비싼 것이어서,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값을 치를 수가 없어서 거저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의 신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살 수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홀대합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수의 근원이 자기 앞에 서 계신데도 세상의 우물을 파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렘2:11~13)

11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 지어다 심히 떨 지어다 두려워할 지어다 여호와의 말 이니라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세상의 우물에서 자기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갈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우물을 파려는 자들, 자기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려 하는 이들은 두려워 떨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심판 받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부들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만 행복해야 하는데 그들이 자꾸 다른 우물물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고, 고지를 점령하여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려 하고, 신비한 현상을 앞 다투어 찾아다닙니다.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우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우물이란 다른 남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지금 내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이 세상의 것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다른 남편을 구해서 거기서 쾌락과 행복과 만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모든 행위를 성경은 간음이라 합니다.



(고전10:8)

8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바울은 지금 민수기 25장 1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인용하여 고린도 교회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지날 때 그 곳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그 이방의 신 바알브올을 섬겼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내리셔서 이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간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아닌 ‘나’를 내 인생의 왕좌에 올려놓고 ‘나’를 위해 사는 모든 행위가 간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의 뿌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 신부인 교회가 결국 참 생명수의 소중함을 깨닫고 성령과 함께 소리 높여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계22:17)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구원은 그렇게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신 우리 신랑의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하고 무저갱 같은 외로움과 공허를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에게 무교병을 먹게 하셨는지 아세요?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룩은 인간 측에서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가 있었는데 그게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에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이 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눅12:1)

1그 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외식이라 하지 않고 ‘성실’이라 하는 것입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다 주며 ‘평안 하시죠?’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16:6~12)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의논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거기에 쓰인 단어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잠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광 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하던 것이었다는 것까지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는 것이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화끈한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요나의 표적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일간 물고기 뱃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에피소드는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어주셨다가 회개를 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해 낼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삼일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뱃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 표현한 것입니다.

(욘2:2~3)

2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그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들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 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깨달아진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 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을 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들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를 하겠느냐?’하고 걱정을 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의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을 하고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그 말은 다른 말로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을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의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 한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을 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양 소란 떨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 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행위까지도 자신들의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 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전6:3-5)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렇지요?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에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기적 경건이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 우리 안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 안에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분쟁과 훼방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것을 버리고 잘라내는 삶에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마23:2~5)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보세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뭡니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나를 자랑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내 손 안에 있는 떡에 눈이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떡이 부족할 때 불안해지고 떡이 많을 때는 교만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반복하여 ‘우리 죽자, 힘 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성도의 인생의 이유이며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세상의 떡을 좇아 세상의 물을 좇아 야곱의 우물가로 향하고 있던 그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우리의 참 신랑이신 언약의 후손 예수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하늘의 생수를 쏟아 부으시고 하늘의 떡인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 된 것이고 영생의 물을 마신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도 거기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리브가와 라헬과 십보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를 이 세상 아비의 집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십니다. 세상의 누룩을 버리고 선한목자이시며 선한 신랑이신 당신의 뒤를 순종으로 좇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빼고 주님이 이끄시는 데로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로 가는 길에 주님이 사랑하라 하시면 사랑하면서,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하면서, 참아라 하시면 참으면서, 섬기라 하시면 섬기면서 가 보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이 이끄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도망을 가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랑은 당신의 목숨을 주고 신부인 우리를 샀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우리를 찾아서 제 길로 끌고 오십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안타까움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물가에 선 언약의 후손에 의해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된 라헬과 레아를 보세요. 그녀들은 곧바로 언약 적 삶을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식 낳기 경쟁을 했던 것 기억하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향하시며, 당신이 기뻐하시는 언약의 후손의 모습으로 다듬어 가시고 만들어 가십니다. 그게 구원의 여정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자각하고 깨달아 나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로 나를 건지셨으며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올바로 인식하고 그 분 앞에 순종하는 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구원의 완성지점을 향해 한시적으로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올인 하시면 안 됩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줍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불멸과 영생의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찾아서 읽었던 마태복음 16장의 바리새인들의 누룩 이야기 바로 앞에 이런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마16:1-4)

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게신 것처럼 인간들이 예측하고 예견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들어맞아 가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들의 예견은 거의 모두 적중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중에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라는 책이 있습니다. Ray Kurzweil이라는 걸출한 미래학자가 쓴 책입니다. 이 중에도 그 Ray Kurzweil이라는 사람을 아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13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토마스 에디슨의 적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무수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었으며 과학 기술을 근거로 한 정확한 미래 예견으로 월 스트리트 저널이나 포브스, PBS등으로부터 미국을 만든 16명의 혁신 가들 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지칠 줄 모르는 천재, 궁극의 사고 기계’등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제 삼의 물결의 앨빈 토플러가 가장 신뢰하고 칭찬하는 미래학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The singularity is near’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 30-40년 후면 인간이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과학 기술의 수준과 발전 속도를 감안해서 볼 때 ‘The singularity’그러니까 기술 변화의 속도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게 되는 어떤 지점이 곧 오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주장은 수확가속의 법칙에 근거한 아주 과학적인 것입니다. 무어의 법칙을 조금 확대 해석을 한 것이지요.


그러한 특이점이 지나고 과학 기술 수준이 상상 할 수없이 깊어지고 그 진보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이제 인간들은 인간의 뇌를 기계에 upload하는 방식으로 뇌 패턴을 보존하고 전승해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만 약에 인간의 육신에 무슨 사고가 생기면 그 인간의 뇌를 기계에 업로드 해서 다른 기계적인 몸으로 환생할 수도 있고 심지어 수십억 개의 보이지 않는 나노 로봇을 인간의 몸속에 집어넣어 인간의 생물학적 노화를 막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아니 튜링 테스트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인식·판단·추론·문제해결 능력 등 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이 등장하여 인간의 지능과 결합하는 사이보그 시대가 곧 올 거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지능과 컴퓨터 지능이 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렇게 되면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폭발적으로 빨라지게 될 것이어서 그 때부터 인간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는 것이고 기술과 정보의 가격대 성능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을 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기술들이 아주 싸져서 빈부의 격차까지도 없어지는 아주 살기 좋고 행복한 지상 낙원이 도래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날이 올까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러 하니라’ 

‘너희들이 비가 올 것이다 하면 비가 오고 심히 더우리라 하면 날씨가 더운 것처럼 너희의 예견은 맞아 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좋으세요? 우리의 뇌가 사이보그처럼 컴퓨터의 지능과 결합하여 무엇이든 척척 풀어내는 그런 지능이 되는 게 좋으세요? 우리의 몸이 수십억 개의 나노 로봇으로 가득 차 생물학적인 나와 기계적인 나가 결합이 되어 인간도 아니고 로봇도 아닌 사이보그가 되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그 때가 되면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몸을 선택하여 취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몸에다가 너무 돈 들이지 마세요. 그런데 그게 좋으세요?


성경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던 얼마나 똑똑하던, 얼마나 강하던 간에 그들을 모두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여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 과학을 인간의 몸에 적용하여 영생 불사의 몸을 만들어 내어 영원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그런 곳을 성경이 무어라 합니까? ‘지옥’이라 합니다.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과 공허함과 무료함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수명이 천년이 되고 이 천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인공지능을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게 지상 낙원이겠습니까? 눈만 뜨면 내 이웃의 것을 탈취해서라도 끝없이 나를 업그레이드 하려는 좀비 같은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와 나의 소유를 노리는 그런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복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이 아닌 인간으로 만드셨는데 우리 인간들 스스로가 천하무적, 영생불사의 로봇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단은 그런 세상이 되면 인간들은 아무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지상 낙원 속에서 살 수 있을 거라 속입니다. 그건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칼 막스가 공산주의 이론을 내 놓았을 때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과연 그러 하니라’하고 거기에 열광했습니다. 지상낙원이 올 것이라고 기뻐 뛰며 광분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무려 1억 명의 희생자를 내고 역사 뒤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단은 끝없이 하나님 이외의 대안을 이 세상에 던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 때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오직 구원은 하나님으로만 말미암는다는 믿음을 발휘해 보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복과 안식과 평안도 거기로 부터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여러분을 미혹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때에 더욱 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신랑을 좇아 그 영생불사를 좇는 세상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물가에서 그 우물물을 부정하시고 하늘의 우물물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의 신랑이 주시는 진짜 생명수를 마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