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벧엘의 하나님
(창28:10~22)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논리학의 기본법칙은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입니다. ‘A=A, A는 A와 같다’가 동일률이고,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가 모순률입니다. 그리고 중간 지대는 없다, ‘모든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 중의 하나다’가 바로 배중률입니다. 한마디로 ‘모 아니면 도다’가 논리학의 기본입니다.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때 집대성된 이 논리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 를 들어 초대교회 때 예배의 대상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삼위일체 사상도 논리학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고 존 칼빈의 예정론이나 인간의 전적 타락 설 또한 논리학의 도움을 받아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논리학의 잣대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성경에 자꾸 논리만을 들이대면 로만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모숭배 같은 엉뚱한 교리도 도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역사성과 동시에 미래의 구속사 안에서 일어날 어떤 일들을 묵시로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지만 믿음으로 이해되어 져야 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하려하면 도무지 성경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간파하기가 힘이 듭니다. 성경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그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불가능함으로 결론이 나야 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논리의 잣대로만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불가능함을 찾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실 때에 항상 그 속에서 위의 네 가지를 염두에 두시고 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지요.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뒤 형의 복수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알거지가 되어서 도망을 하고 있습니다. 참 처량하지요? ‘젊은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때 야곱의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습니다. 야곱이 바로 왕을 만났을 때가 백 삼십 세였지요? 그 때 요셉의 나이는 서른아홉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서른 살에 총리가 되어서 칠년 풍년을 지냈고 이 년의 흉년을 지났을 때 야곱이 애굽으로 와서 바로를 알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요셉의 나이차를 계산해 보면 야곱이 요셉을 아흔 한 살에 낳은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요셉을 낳은 것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십 사년을 지낸 후이므로 91에서 14를 빼면 77이 되는 것입니다. 일흔 일곱 살이면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미 형 에서는 헷 족속의 딸 유딧과 바스맛이라는 여자들과 혼인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흔 일곱 노구에 홀로 타지로 도망을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에서 추방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일흔 일곱의 나이에 외삼촌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며 수없이 사기를 당하고 20년간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답은 한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영생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 본문 안에 숨어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를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출 가나안을 하고 있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무조건 적인 축복을 하십니다. 그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오늘 본문의 언어로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그를 쫓아가시면서 그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3절로 가서 그 축복의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창28:13-15)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중도에 고단하여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와 그의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며,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야곱을 벧엘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벧엘로 돌아오게 하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만일 그렇게 해 주신다면 자기가 하나님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해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세요.
(창28:20-22)
20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의 서원의 내용을 보면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는 것이고 세 번째가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정말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없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히려 이 야곱의 서원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다 지켜내십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을 곡해하고 있었음이 자명 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러 저러한 것을 해주면 나도 이러 저러한 것으로 보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자손들과 그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늘의 땅을 약속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입을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그 축복의 결과까지도 친절하게 설명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서원은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내실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세요.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명명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그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른 말로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그의 삶속에 간섭하시며 임재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 곳을 벧엘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야곱이 ‘아, 여기에 하나님이 계셨구나’하고 그 곳 이름을 벧엘로 명명합니다.
그러니까 벧엘, 하나님의 집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을 어떻게 곡해했든지 간에 당신의 축복을 기필코 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의 삶에 쉬지 않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는 벧엘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벧엘로 돌아가라는 말은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의 삶에 간섭하시며 임재하시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삶의 긴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깨닫고 그 자리로 돌아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며 성도의 완성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내가 너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이며 그의 삶 속에서 벧엘로의 행진을 촉구하고 채근하시는 것입니다.
(창31:13)
13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꾀를 좇아 외삼촌 집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세상의 힘을 얻어내어 스스로를 자랑하고자 하는 삶에서 돌이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항복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야곱은 그 길로 외삼촌 집을 떠납니다. 야곱이 왜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라반의 집을 떠났을까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열 번이나 속으면서 죽도록 고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창31:41)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그렇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이 세겜에서 머물며 세겜 족장과의 사건을 호되게 치르고 있을 때 그 때 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역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예배를 드리라고 채근하십니다.
(창35:1)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그렇게 창세전에 복을 주어 당신의 백성을 삼으신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와 인생 속에 집어넣으셔서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힘과 꾀로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자들의 고단함과 고통스러움을 경험케 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의 삶을 살도록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호12:1-6)
1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4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 지니라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죄인이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행보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얍복강 사건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간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간을 죽도록 고생하면서 큰 재산을 얻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외삼촌 라반을 사용하셔서 야곱을 열 번이나 속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야곱은 큰 재산과 하인들과 자녀들을 이끌고 벧엘로 향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자였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언제든지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러한 옛 야곱을 죽여 버리시고 새로운 야곱, 즉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축복을 해달라고 조른 것은 그가 이십여 년 간 성취해 낸 부와 풍요가 참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에는 그러한 세상의 힘이 자신의 복인 줄 알았는데 환도 뼈를 맞고 야곱의 자아가 죽게 되자 진짜 복에 대한 갈망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 되자마자 하나님께 매달려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가십니다’하고 졸랐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십니다. 새로운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어 벧엘로 돌아가는 것을 참 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복은 우리의 소유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신분이 새롭게 바뀌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을 통해서도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야곱의 첫 번째 서원이 뭐였지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거였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자기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 불러주겠다는 건방진 서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15:41)
41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밝히시는데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었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야곱의 삶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가 성전을 짓겠다고 했지요? 정말 그렇게 했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심으로 야곱 자신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참 십일조이신 예수를 죽이시고 그분을 받으심으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해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사랑하시기로 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내어 놓으신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그 은혜의 수혜자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을 근거하지 않으시고 순전히 은혜로 당신의 언약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창28:15)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야곱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뭘 잘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꿈으로 그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언약을 받은 야곱 위로 사다리가 내려지고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림은 언약의 당사자는 하늘과 땅의 연결 통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복음 강해를 하면서 이 세상에 주어진 모든 언약의 원형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 맺어진 피의 언약이 바로 모든 언약의 원형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야곱의 사다리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과 땅의 사다리로 말미암아 죄인 야곱과 하늘이 서로 화해를 하고 소통을 하게 될 것임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가서 그 그림이 어떻게 예수님과 이어지는 지볼까요? 오늘 본문이 예수님에 의해 인용이 되는데 거기가 어디지요?
요한복음 1장의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입니다.
(요1:50~51)
5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 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 내용을 오늘 본문 12절과 비교해 보자고요.
(창28:12)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주님은 지금 나다나엘에게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과 땅과의 화해 장면을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것을 설명하시면서 오늘 본문의 야곱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야곱과 벧엘의 이야기를 아주 곡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인 ‘Genesis Rabba’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Genesis Rabba’는 구약의 아람어 번역판 ‘탈굼’의 창세기를 유대인 랍비들이 주석 해놓은 책입니다. 그 주석 집을 보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가 아주 명확하게 나옵니다.
‘Genesis Rabba'가 창세기 28장을 이렇게 주해를 합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쫓겨서 자기 집을 떠나 어미의 고향으로 가는 중에 천사들이 호위한다. 야곱이 벧엘에서 잠이 들자 천사들이 야곱의 잠든 얼굴을 훔쳐보고, 하늘을 열고 올라가서 하나님의 어좌에서 시중들고 있던 다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어좌(御座)에 앉아 있는 야곱의 얼굴을 한번 보려면, 땅에 내려와 벧엘에서 잠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하자 천사들이 줄을 이어 내려와 그의 얼굴을 보고 하늘로 올라갔다’ 지금 이 주석이 의미하는 바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실체는 이미 하나님 어좌(御座)에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 거룩해서 천사들도 쳐다볼 수 없었는데 마침 그 야곱의 모조품 얼굴을 땅 위에서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어좌(御座)에 앉아 있는 진짜 실체의 위대함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신약과 구약의 연결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볼 때 이 주석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석입니다. 헬라철학과 영지주의가 혼합된 아주 엉뚱한 아전인수 격의 해석이지요. 랍비들의 이 주해는 다분히 육적 이스라엘의 자부심을 내포하고 있는 주해인 것입니다.
이 주해는 유대 민족이 자신들의 복음으로 갖고 있었던 언약신학 적 주해입니다. 유대인들은 야곱이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은 그 야곱 자신 안에 내포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이미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랍비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야곱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선민이며 천사들의 섬김과 예배를 받도록 약속 받고 숙명 지워진 민족’이라는 자위적 해석을 했었고 그 해석이 15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신앙화 되어 흘러 내려왔던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다니엘서 7장의 인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곡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단7:13-14)
13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이 사자, 곰, 표범, 그리고 뿔 달린 이상한 짐승 이렇게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그러한 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온 세상을 지배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 살게 굽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환상의 끝에 하나님의 어전 회의 모습을 환상으로 봅니다. ‘어좌(御座)들’이 놓이고 (개역 성경에는 그냥 ‘왕좌’라고 단수로 표기했지만 아람어 원문은 ‘코르쎄’ 복수이다) 옛 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이 좌정 하시고 그 앞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예배하고 섬기는 가운데 심판을 벌여, 짐승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다니엘이 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니엘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즉 인자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은 그 인자가 구름을 타고 왔다고 기술을 함으로 해서 그 인자가 신적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도 공부한 바 있지만 성경에서 구름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구름을 타고 오신 인자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장면은 신약의 어디에서 이어지는 장면일까요?
(행1:9)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구절에서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는 어구를 잘 해석을 해야 합니다.
후반부에 ‘가리워’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휘포람바노’는 ‘아래로부터 가져오다’ ‘받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구름이 저를 아래로부터 데리고 올라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공부했던 것처럼 그 구름은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 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는 구름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구름이 말을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마17:5)
5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덮고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가신 구름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름이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가는 이야기와 다니엘서 7장이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현현하셔서 예수님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화면이 바로 그 인자가 하나님과 함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대권을 위임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서의 그 그림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는 등극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26절과 27절을 보면 동시에 그 권세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인자와 성민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있는 형식입니다. 그 아래 구절들을 보시면 천사가 다니엘에게 그 환상의 뜻을 해석해 줍니다. 그 네 짐승들은 차례로 일어나 세상을 지배할 이방 왕들과 그들의 왕국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무참히 핍박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하나님 우편 어좌에 앉히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Genesis Rabba'의 창세기 28장 주석과 내용이 흡사하지요? 인자가 성민을 품고 인자가 받는 권세를 성민들이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언약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선지자 다니엘이 하나님의 언약 신학에 근거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앗수르나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 왕국들의 통치 가운데 이스라엘이 짓밟히고 있는 현실로 인해 유대인들이 지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분의 약속을 꼭 지키실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 성민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성경의 그 약속들이 선택된 육적 이스라엘인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다니엘서의 내용은 ‘영적 이스라엘’, 다니엘서의 표현을 빌리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성민‘들을 대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성민 들을 품에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대권을 이어받게 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증거를 하나 대 드릴까요?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주님을 데리고 올라간 구름이 그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내려와서 우리를 데려갈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1:11)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계1:7)
7볼 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11:12)
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두 선지자, 즉 교회가 사도행전 1장 9절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인자처럼 구름을 타고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인자로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처럼 하늘의 왕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와 함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성민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야곱의 사다리의 이야기이며 다니엘서의 인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완전히 박살내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의 주해를 다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너희의 조상으로 그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대역으로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이라고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을 잘 보시면 주님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품고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야곱의 자리에 다니엘서의 ‘인자’를 끼워 넣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Genesis Rabba’에서 유대인들이 해석해 놓은 창세기 28장의 주해는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이라는 것이고 그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사다리의 그림은 다니엘서 7장의 결론이 어떻게 말미암게 되는 것인지를 그려놓은 것임을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의 사다리 그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과 땅의 화해를 모형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같이 불가능한 자가 벧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늘과 야곱을 연결하는 사다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예언적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과의 화해의 자리, 그 하나님의 열심 앞에 납작 엎드려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을 예배하는 벧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사다리가 되셔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벧엘로 돌아간 자들은 ‘자기’라는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 파묻습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채근에 의해 벧엘로 돌아가는 야곱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세요.
(창35:2~4)
2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우여 곡절 끝에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로 서게 된 야곱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그동안 하나님 말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소지하고 있던 우상들을 모두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파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벧엘로 돌아오신 분들입니다. 아니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나’라는 우상을 파묻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부인이 될 때,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고, 참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세요. 섬겨주세요.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자리,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리, 벧엘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그 분의 말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십시다. 용서하고, 섬겨주고, 인내하며 벧엘의 삶을 사십시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세요. 그리고 사랑해 주세요.
우리는 자기의 아들을 살해한 살인자를 양자 삼아 결국 제자로 길러낸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에는 감동을 받으면서도 자기에게 돈 몇 푼 빚진 사람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사랑합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일에 감격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사랑의 원자탄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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