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72 이삭의 언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창26:2-5,24-25)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19

72 이삭의 언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창26:2-5,24-25)

26: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26: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26: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26: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26:24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자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

26: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였다. 그는 거기에 장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거기에서도 우물을 팠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언약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언약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언약과 연결이 되며 그 언약이 교회를 상징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어떻게 전달이 되며 그 광야의 언약은 신약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신명기로 신명기에서 로마서로 로마서에서 에베소서까지 연결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선지서 들의 여러 구절들을 찾아서 하나님의 언약의 통전성과 일관성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행위나 자격을 근거로 삼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게 행한 약속과 아브라함의 행위를 근거로 이삭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3절과 5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라고 밝히십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지금 혹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계에 흐르는 복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공식적으로 공인하시는 장면입니까? 아버지가 훌륭한 신앙인이면 아들도 덤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늘의 복은 인간의 자격이나 열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복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 하는 것이지 절대 아버지의 복이 아들에게 유전이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연결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명령도 함께 도출해 내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본문이 어느 시점에서 쓰여진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창세기는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쓴 것입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이끄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하 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손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과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어떤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징계를 받는지를 그림으로 잘 설명해 줌으로 해서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를 종용하는 책이 창세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창세기의 일 차 수신자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성경 본문이 오늘날, 아니 역사 전체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그러한 복의 약속을 하셨는가를 궁금해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 책의 일차 수신자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본문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여러분은 지금부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출애굽을 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책이며, 그 구원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그렇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 때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축복 사건을 접하게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먼저 추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고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읽혀진 것입니다.



(신30:15~20)

15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 이니라

19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여기에 보시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라고 종용합니다. 그러면서 그 법도를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그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면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하고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르지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이삭에게 당신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킨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공로를 근거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지금 읽은 신명기 30장에서는 이삭이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약속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가 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처사는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까?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분명 하나님은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후손들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의 완성이 맞습니다.



(창18:18~19)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 이니라


그렇지요? 따라서 신명기 30장의 하나님의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와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호의를 어떻게 화해를 시켜야 할까요?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18장에서 언약하신 것을 확실하게 지켜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을 당신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자로 만들어 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좌충우돌하며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던 그러한 엉터리 아브라함이 결국에는 모리아 산에서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꽂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킨 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완성이 되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당신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지킴 또한 당신의 열심과 주권행사로 완성하실 것임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약속하시면서 그의 공로나 자격을 거론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근거로 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당신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그렇게 완성시킨 것처럼 이삭도 아브라함처럼 그의 열심과 노력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복을 받은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명기 30장에서 본 하나님의 요구는 어떤 의미로 주어진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구 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나 열심을 근거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설명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지키지 못할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에게 허락하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완전한 삶의 은혜 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모순이 되는 듯한 표현들이 성경에 종종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그 분의 주권에 의한 구원의 완성의 모형을 아브라함의 삶과 그의 순종과 그의 죽음으로 한번 보여주시고 또 다시 그의 아들, 약속의 후손인 이삭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확인시키시고 그 약속의 후손에게 내려지는 복이 어디에서 발원하여 어떻게 전달이 되는가를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래서 이삭에게 복을 약속하시면서 ‘그 복은 너의 열심과 너의 공로를 근거로 주는 복이 아니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있어서 너에게 내리는 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이삭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저질렀던 똑같은 실수가 이삭의 것으로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 브라함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혹은 그의 열심과 노력과 결단에 의해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과 법도를 지킨 자가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삭도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과 법도를 지키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본문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장면은,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홀로 당신의 일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장면이지 절대 아버지의 공로가 아들에게까지 전가되어 그 후손들이 대대로 복을 받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모세로부터 전해 듣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미 모세로부터 그들을 이끄시고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분에 의해 태초에 천지가 어떻게 창조가 되었으며, 어떻게 죄가 들어왔으며, 타락한 인간은 그로부터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에 관해 자세하게 배운 터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것에서부터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 기식하는 것들이 다 멸해진 것, 바벨탑 사건으로 세상의 언어가 갈라지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자기들의 조상을 찾아오셔서 그를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는 갈대아, 즉 바벨론에서 건져내셨으며 그를 인도하셔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세우시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모세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그러한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를 공부한 것처럼 똑같이 배운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실수할 때마다 그의 삶에 치밀하고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모세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에서 멋진 승리의 모습을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으며, 그러한 그에게 어떠한 약속을 해 주셨는지도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오시면서 어떠한 능력과 권세로 자기들을 인도하셨는지, 그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입히시고 먹이시고 마시우게 하셨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리고 이삭에게 언약하신 대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지켜내셔서 지금 이 백만이 넘는 하나의 민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험과 지식과 가르침으로 설득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복과 생명, 사망과 화’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인지를, 어떤 것을 선택해야 진정 행복해 지는 것인지를 설복시켜 가시는 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험과 지식을 통해 설득해 나가고 계시는 과정에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처럼 난 반드시 너희들도 내 목적에 맞는 자로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사망과 화가 아닌 생명과 복을 선택하도록 당신이, 당신의 열심이 만들어 내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공표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그 하나님의 열심이 이 땅에 가시적으로 만개하여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었던 신명기 30장의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을 내가 너희 앞에 두었으니 너희는 선택하라’는 말씀은 이 말씀과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신30:11~14)

11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 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라고 하면서 그 말씀은 충분히 너희가 행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유인 즉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말은 ‘너희가 내 말을 지키고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게 되는 것은 너희가 하늘에 올라가서 끌고 내려온다든가 아니면 바다 밖으로 나가서 주워 온다든가 하는 너희의 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 마음과 입에 새기는 방법으로 할 것이니까 너희는 나의 사랑과 은혜와 섬김을 깨달아 알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 뒤에 ‘너희는 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선명해 졌지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하라’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완성과 성취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인 것이지 지키지도 못할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억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 신명기 30장 말씀이 그대로 인용이 되어 있는 로마서 10장으로 가 보시면 좀 더 확실하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롬10:4-10)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단 종파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접 기도를 따라한다거나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겠다는 입에서 나오는 시인만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보셨던 것처럼 이 구절은 창세기 18장부터 연결하여 읽어야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당신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그 시조로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들을 당신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자로 값없이 만드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여기다가 인용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교회가 율법을 지켜서 교회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셔서 우리가 교회가 된 것이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를 보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5절을 보시면 바울이 우리가 읽었던 모세의 신명기 30장의 요구를 인용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했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구약인 신명기의 요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바로 다음 절이 헬라어 ‘데’ ‘그러나’로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6절의 맨 앞에 적어 넣은 그 단어 하나로 신명기 30장의 하나님의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고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 준수의 요구 앞에서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요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30장 의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오늘 본문의 이삭에게 내린 축복의 내용처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 복음의 선포를 내포하고 있는 명령이 되는 것이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에서 8절까지를 보시면 신명기30장의 말씀이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롬10:6-8)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말씀을 신명기 30장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를 해 보세요.

 

(신30:12-14)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 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로마서에서는 하늘과 음부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신명기에서는 하늘과 바다 밖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 다른 내용은 똑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성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늘이나 음부에 내려가서 애써서 얻어내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 로 거기에 붙어 있는 구절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인 것입니다. 따 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과 입에 새기시는 방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지 단순히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기도를 따라 하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입에 말씀을 새기시는 결과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게 된다는 말인 것이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게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신명기 30장과 로마서 10장 사이에 예레미야 31장을 끼워 넣어보세요.

(렘31:31~33)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 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성막으로 그들 곁에서 그들을 인도하셨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못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과 규례를 그들 마음 판에 직접 새겨버리시는 새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무용성이 증명된 후에 우발적으로 만들어 진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가실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실망시켜서 하나님이 임시적이며 즉흥적으로 또 다른 방편을 마련하신 것을 새 언약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보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복의 수여가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장에 가서야 만들어 진 급조된 언약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성경의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을 은혜라고도 이야기하고 그 새 언약이 성취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등장하는 것이고 그 새 언약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며 그 새 언약이 완전히 성취된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레미야서의 새 언약과 연결이 되는 지 아시겠지요? 이 제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에 당신의 열심으로 개입하셔서 결국 그들을 당신의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잘 지키는 자로 만들어 내시고 끝내는 당신의 풍성한 복을 온전히 다 부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땅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 내 명령 안 지키면 다 죽는다’라는 말씀을 하셨는지를 잘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구원의 본질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시키시기 위해 가나안 땅 앞에 선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지킬 수없는 명령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집요한 고집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만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내용, 즉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를 근거로 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열심으로만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셔서 결국에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자로,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의 말씀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내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으신 그 복과 은혜의 종착점을 이렇게 기술하는 것입니다.

(엡1:3-6,12)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잘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복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8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요? 이 부분을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듣고 지키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작정하시고 계획을 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끊임없이 설득하시고 그들의 인격과 이성에 호소하시며 그들의 손발을 움직여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all dependence and all effort’의 삶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열심과 그 분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발에게 그 일을 경험케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자녀들로 택해진 성도들이 그들의 인격과 이성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항복과 순종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당신의 백성들이 로봇처럼, 앵무새처럼 그런 모양으로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천국에 넣으시는 것에 앞서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분량으로 성숙시키고 완성시키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 아빠가 아이의 걸음마 훈련을 시킬 때 아이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냥 들어서 옮기는 것이 가장 편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적이 아이의 다리 힘을 키우고 아이가 어서 빨리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아버지는 아이가 곧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박수를 치며 이리 오라고 아이를 불러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목적지를 정해주고 아이가 오는 길에 장애물이 있으면 치워 주기도 합니다. 아이 앞에 절벽이나 철조망 같은 위험한 것들이 나타나게 되면 아이의 앞을 막거나 그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들을 치워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편하자고 중간에 아이를 번쩍 들어서 목적지로 옮겨 버리면 아이는 평생 기어 다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혼자 걸을 수 있는 힘을 키워 주기 위해 비록 자주 넘어질지라도 그의 다리로 걷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신앙의 결단과 ‘하라’의 명령들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all dependence and all effort’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 분의 말씀을 잘 듣는 자로 지어져 가는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는 목표지점을 잘못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묵살해 버리고 ‘당신이 내 말 좀 들으시라’는 불경한 요구만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목표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자로 완성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로 향해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고 나 아닌 내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버리고 비우는 삶을 추구하셔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 한국 정부가 종교계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각 종교의 대표적인 인물 두 사람씩을 추천받아 훈장을 주기로 했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오랜 이전투구 끝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의 총회장님과 큰 교회 목사님 두 분이 나가셔서 훈장을 받으셨습니다. 기독교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명목으로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추기경이나 사제가 아닌 외딴 섬에서 빈민 사역을 하고 계신 할머니 수녀님들이 추천되어 올라왔습니다. 그것도 그런 훈장 안 받으신다고 안 오시겠다는 것을 억지로 모시고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봐도 오늘날 기독교가 목표 설정과 방향 설명을 한 참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다른 사람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부터 올바른 방향과 목표지점을 찾아서 열심히 그 곳을 향해 달립시다.


어제는 제가 새벽부터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얼 바인 우림 교회에서 한 시간 반에 걸쳐 새벽 설교를 한 후 집으로 달려와 옷만 갈아입고 하진이 돌잔치에 가서 설교를 한 후 거기서 바로 태종이와 현주의 결혼식장으로 가서 주례를 한 후 다시 얼바인으로 내려가 저녁 설교를 하고 밤 열두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부터 오늘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잠깐 눈을 붙이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중간 중간 실수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실수가 태종이와 현주의 결혼식에 하진이 돌잔치 설교 원고를 가지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제가 하루에 네 번 설교를 해야 했기 때문에 폴더에다가 네 편의 설교원고를 잘 넣어서 차례대로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순서대로 착착 꺼내서 사용할 수 있게끔 그렇게 정리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진이의 돌잔치에서는 설교원고를 미처 꺼낼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그냥 설교를 하고 정작 태종이와 현주 결혼식 때에 그 원고를 꺼내어 강단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도 돌잔치 원고로 결혼식 주례를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 어디를 펴도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과 은혜가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로 키우는 것을 양육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고 결혼식을 통하여 새롭게 탄생한 가정도 그 속에서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며 서로를 향해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을 쏟아 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들로 지어져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돌잔치 설교원고로 주례사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목표지점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그 길을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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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a 때, 그 때 몸에서 날개로 성장 액이 전해져서 날개에 힘이 가게 되고 비로소 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방의 고난을 외부의 힘이 덜어주게 되면 그 나방은 잠시의 고난은 피해갈 수 있을지언정 곧 죽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식들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정말 안쓰러우실 것입니다. 도대체 비상구가 없는 것 같고, 도대체 돌파구가 없는 것 같은 우리의 상황을 보시면서 우리가 갇혀있는 흉년과 고난의 고치를 찢어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훈련시키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흉년과 고난의 고치가 찢어지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성숙되고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겪는 인생의 흉년과 고난과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의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므로 기뻐하며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약1:2-3)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벧전4:12~16)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