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I)
(창26:1~13)
26:1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26: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26: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26: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26: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26:6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26:7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6:8 이삭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지 꽤 오래 된 어느 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는 것을 우연히 창으로 보게 되었다.
26:9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들여서 나무랐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내인데, 어쩌려고 당신은 그를 누이라고 말하였소?" 이삭이 대답하였다. "저 여자 때문에 제가 혹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6:10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어쩌려고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하마터면, 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인가가 당신의 아내를 건드릴 뻔하지 않았소?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될 뻔하였소."
26:11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경고를 내렸다.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26: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랄에서 거부가 되는 상징적 그림을 통하여 우리 성도의 본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성 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야망과 비전을 성취하여 이 땅의 번영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지어져 가다가 종국에는 하늘의 모든 풍요를 상속받게 되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잘 살다가 가야 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이삭이 거부(巨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짜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이 되는 때는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순종과 의뢰의 제사를 드렸을 때임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왜 하나님께서 어차피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이삭의 삶에 흉년과 여러 가지 시험들을 허락하셔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시고 그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폭로하시는가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날 혹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를 믿으면 그런 일이 모두 사라지고 만사형통의 삶이 찾아 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의 삶에 흉년을 허락하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두실까요?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창26:1,7-9)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7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 이었더라
8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 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 이로라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어 약속의 자손 이삭에게도 흉년을 허락하셨는가?’이고 두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어 세상 앞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폭로하시는가?’입니다.
요즘 이 미국도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 교인 중에서도 인생의 흉년을 겪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을 제가 압니다. 하나님이 이런 때에 다른 사람은 다 힘들어도 우리 성도들은 그 흉년에서 좀 건져주시면 안 되나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도 이렇게 지독한 흉년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그러한 흉년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담대하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성도들이 그러한 고난 속에서 아주 자주 하릴없이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흉년을 피해 하나님의 언약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건 정말 신앙이 없는 불신앙의 행위일까요?
뿐만 아니라 이삭은 자기 아버지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마침내 그랄 왕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하나님 백성의 대 망신입니다. 오늘 날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야단을 맞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야단맞을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다 가짜인가요?
성경은 그가 복 받은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 흉년과 시험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독자인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 있겠지요?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허락하시는 삶의 흉년들과 그들의 연약함을 폭로하시는 시험들은 그들이 온전히 복을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데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도의 성숙과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데에 세상의 힘인 권력과 강함과 번영 등을 사용하시지 않고 성도의 고난과 나약함과 비굴함 등을 들어서 쓰시고 아울러 그들에게 자신들의 무력함을 경험케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시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최종 목적입니까? 아니면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구원받기위해 삽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자로서 어떤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사야서 43장7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사43:7)
7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에스겔서 36장 22절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너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더럽힌 나의 이름을 위해 너희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성도의 최종 목적지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도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분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목적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이 가시적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것과 하늘의 것이 피조물에게서 밝히 보여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독사’ ‘영광’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자명하게 밝혀지지요?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사는 것, 다른 말로 하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의 손해와 상함과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하며, 인내하며, 온유를 발하며,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그러한 천국의 삶을 사는 자로 지어지고 완성되어지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렇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살아내며 거기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천국의 삶을 미리 살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이 땅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맞게 삶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1번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에 대한 대답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기고 누리는 것’인 것입니다. 그건 절대 이 세상의 힘을 얻고 쌓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뚜렷한 목적도 없이 이 세상 힘을 쌓는 것은 그만큼 공허를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롬3:23)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 가지는 생각과 행위 그 모든 것을 죄라 합니다. 따라서 그 죄에 빠진 존재들은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수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직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요12:43)
43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 하였더라
(요7:18)
18스스로 말하는 자(죄인)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예수, 성도) 는 참되니 그 속에불의가 없느니라
이게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이 세상의 힘을 쌓고 남을 밟아서라도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자신만이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그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제일 먼저 깨어져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힘은 절대로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절대 영광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흉년이며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경험케 하는 여러 가지 시험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순종의 제사를 드림으로 참 복을 받은 자가 되는 과정 속에 흉년과 그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는 시험이 차례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닥치는 고난과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세상을 포기하게 하는 시험들이 성도를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완성해 내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흉년을 맞아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세상의 물질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결코 안전할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물질이 부족한 지경에 처하자마자 냉큼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애굽으로 향하는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연 하나님께 복을 받은 언약의 후손이 맞나?’하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랄 왕 앞에서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리브가를 너무도 쉽게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가 맞는가?’하고 괴로워했을 것이고,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도 그랄의 목자들과 아비멜렉에게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자기가 파놓은 우물까지 빼앗기는 그런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나의 힘과 방패는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바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경험이 그의 삶 속에서 브엘세바에서의 순종의 제사를 격발해 낸 것입니다. 이게 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인생 동안에 겪어야 할 흉년이요 시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직시해야 하며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배워서 자기와 이 세상을 부인하고 하늘의 풍요를 그리워하며, 하늘의 부요를 소망하는 삶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인 영생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때때로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폭로되는 고난과 시험이 허락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영광을 취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는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인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세상의 영광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 고린도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자랑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는 ‘자랑하다’ ‘카우카오마이’라는 단어가 무려 열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의 힘과 풍요와 번영을 자랑거리로 삼았던 고린도 교회에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계속 자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아주 잘못된 자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그 ‘카우카오마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였는가 하면 당시 로마의 문화가 자랑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레이스게스타이’라는 자기 이력서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업적이나 장점, 훌륭한 경력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한 로마의 문화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힘으로 자기를 자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신앙을 그러한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 시켜버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던지는 사도의 일갈이 고린도서의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면 당시 고린도 교회가 자기들의 자랑으로 삼았던 것이 무엇인지 고린도 전서 4장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4:7~13,16)(표준 새 번역)
7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8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9그러나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미말)가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하나님께서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신 것 같습니다.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11우리는 오늘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13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16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보시다시피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배가 불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얻어 유명하고 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교회의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세상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세상의 왕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강함과 자기들의 영광을 자랑하며 그게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인 양 살았습니다. 오늘날 조엘 오스틴 식의 번영의 신학( theology of prosperity, health &wealth gospel)과 너무 흡사하지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마치 사형수처럼, 찌꺼기처럼, 쓰레기처럼 살았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고 얻어맞기도 하고 아주 보잘것없이 살았습니다. 본인이 자기와 다른 전도자들의 삶을 가리켜 쓰레기, 찌꺼기, 구경거리라고 거침없이 말하면서 너희들이 자랑하는 것과 우리들이 자랑하는 것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이 힘과 부와 번영과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며 그것을 누리고 살았던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렇게 쓰레기 같고 찌꺼기 같은 자기의 삶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샘이 나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자기는 고생고생하고 있는데 자기가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이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로 그들에게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서 사도는 본격적으로 바로 그러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고후11:18,23-30)
18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는 지금 자신의 치부를 몽땅 드러내 놓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0절에서 ‘부득불’이라고 번역이 된 ‘데이’라는 동사는 ‘must'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반드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반대지요? 12장으로 가면 더 가관입니다.
(고후12:1-10)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세 째 하늘에 불려 올라갔던 것을 자랑하는듯하더니 결론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사단의 가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없애달라고 한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고통스러운 가시를 허락하신 것이 자신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7절에 나오는 ‘자고하다, 휘페라이로마이’라는 단어와 ‘자랑하다, 카우카오마이’는 ‘높이다, 올라가다’라는 뜻의 ‘아이로’라는 동사를 같은 어근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를 의역을 해보면 ‘엉뚱한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처럼 엉뚱한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사단의 가시를 그의 몸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처사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게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유일한 목적임을 사도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자기의 몸을 뚫고 들어온 사단의 가시가 선용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단의 가시라는 어구에서 ‘가시’라고 번역이 된 ‘스콜롭스’는 전쟁에서 쓰이는 고문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사로잡은 적군을 사슬로 묶고 1미터가 넘는 뾰족한 꼬챙이로 한 쪽 옆구리에서 찔러 다른 쪽 옆구리로 관통을 시켜 아군 진영으로 끌고 다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꼬챙이가 ‘스콜롭스’입니다. 바울이 몸에 지닌 사단의 가시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스콜롭스’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엉뚱한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는 삶을 살까봐 우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날카롭고 거대한 꼬챙이를 내 육신에 찔러 넣으셨다. 그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므로 나는 이 꼬챙이를 자랑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상태에 의해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으로 가면 그게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전1:24~31)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세상의 모든 힘을 다 모아도 하나님의 약함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너희들의 위로를 삼으려 하느냐는 것이지요. 왜 부자가 되어서, 혹은 높은 벼슬을 얻어서 하나님의 일을 도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은 연약하고, 미련하고, 학벌도 별로 안 좋은 그런 약한 자들을 택하여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어 보이는 방법으로 일을 하신 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명기되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우리의 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에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을 ‘약할 때 강함 되심’이라 합니다.
(고후12:9-10)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하나님) 능력이 (우리의)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내가 나의 인생 속에서 겪는 흉년과 수시로 나를 절망시키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통해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야심과 비전의 허망함을 직시하며 나의 지혜와 명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놓지 않으시고 성숙시키시며 완성시키시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 그것이 자기 부인이며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핵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부인이 되면 그 안에 살아계신 예수가 비로소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나를 자랑하는 삶에서 빠져나와, 다른 말로 자아중심 적 자아를 죽이고 내 안에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 자꾸 실망하고 절망해야 하는 것이며 아울러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고도 ‘저 사람 원래 저런 인간이었어?’라는 반응보다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어 자기를 부인시키고 세상을 포기 시키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힘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한 것인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만들고 쌓은 이 세상의 힘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가시들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잘 참으세요.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안에 여러분의 가시도 포함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 가시는 여러분의 최종적 선을 위해 잠시 동안 허락된 것일 뿐입니다. 그 가시를 통하여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어두움과 처절한 무력함을 배우세요.
그런데 그 모든 인생의 가시들을 다 모아서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머리에 쓰시고 결국에는 그 모든 가시들을 다 도말해 버리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 여러분에게 약속된 영생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가시들이 다 사라지고, 저주받은 이 땅이 토해내는 모든 가시와 엉겅퀴가 다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와 행복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참으세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가시를 경험하며 그 가시가 모두 사라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지 이 땅에서 가시를 빼내어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고픈 욕망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을 뚜렷이 확인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 때 가장 행복하게 지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으면 현재의 흉년과 시험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입니다.
강수진씨의 인생의 목적이 발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그 아름다운 발을 자랑하는 것이었다면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훈련과 연습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이 저렇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연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허락하시는 흉년과 시험들을 이겨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이 여인의 발처럼 만신창이가 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넉넉히 견딜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니까요. 잘 이겨 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의 한 구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롬8:37)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김성수 목사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 이삭의 언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창26:2-5,24-25) (0) | 2013.10.22 |
---|---|
71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II) (창26:1~13) (0) | 2013.10.22 |
69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복을 주리라 (창26:1~13) (0) | 2013.10.22 |
68 - 보이는 팥죽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창25:28~34) (0) | 2013.10.22 |
67 이삭의 기도 (창25:21) (0) | 2013.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