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보이는 팥죽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창25:28~34)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5:29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25:30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에서가 '붉은' 죽을 먹고 싶어 하였다고 해서, 에서를 3)에돔이라고도 한다. '붉은'
25:31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25:32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25:33 야곱이 말하였다.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그러자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였다.
25:34 야곱이 빵과 팥죽 얼마를 에서에게 주니,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2주 전에 창세기 25장을 개괄적으로 훑어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는 장자권의 소중함에 대해 충분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계로 흐르는 장자 권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에서는 그 장자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야곱에게 넙죽 넘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에서의 행동을 ‘망령되다’라고 질책을 합니다. 그 ‘망령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베벨로스’는 문지방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라 했지요?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문지방 짓밟듯 밟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야곱이 배가 고파 죽겠다는 에서에게 이 팥죽을 줄 테니 형이 잡아온 곰이나 사슴을 한 마리 달라고 했다면 에서가 바꾸었을까요? 아니면 이 팥죽과 형의 활과 칼을 맞바꾸자고 했다면 에서가 주었을까요? 아마 유약한 동생을 흠씬 패주고 팥죽을 빼앗아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장자 권은 그렇게 쉽게 줘 버렸을까요? 그것은 그 장자 권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경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항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체하라고 미혹하거든요. 사람들은 그러한 마귀의 미혹에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감각적으로 인지가 가능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감지가 안 되니까요.
오늘은 그런 경솔한 에서의 소행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성도가 된 사람이 이 땅에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성경은 믿음과 소망이라 합니다.
(벧전1:21)
21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골1:22~23)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살전5:8)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 자
그렇지요? 우리 성도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세상과 싸울 수 있고, 존재할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유일한 힘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음이 전제된 단어입니다. 먼저 믿음이라는 것을 한 번 보지요.
(히11:1)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요 증거라 합니다. 쉬운 말로 믿음은 지금 감각적으로, 물리적으로 체감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다만 인식을 할 뿐이지 눈에 보이는 것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속 가보지요.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엡2:8)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고 구원을 얻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하늘의 회의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안에다가 우리를 연합시키시고 우리의 죄를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이셨으며, 그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보증으로 죄에 대하여 이미 주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품에 품으신 주님을 다시 부활시키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게 될 것을 믿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실상이요 본체로 받아들이는 소망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격발해 냅니다. 아직 가시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우리 눈앞에 완성체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약속이 된 하나님 나라와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등을 확신 속에서 기대하는 것을 소망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은 사실 뗄 레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소망이 없을 수 없고 다가올 세대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이 믿음을 근거하지 않고 그 소망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소망을 격발해 내고 소망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인 믿음과 소망 둘 다 지금 현재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롬8:24)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고전2:9)
9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지요? 믿음과 소망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군에 간 이등병이 사회에 두고 온 자기 애인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첫 휴가를 기다렸습니다. 첫 휴가 때까지 그에게는 ‘반드시 첫 휴가는 온다. 왜냐하면 군법에 모든 군인은 첫 휴가를 가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 내 사랑하는 순이를 만나야지’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드디어 첫 휴가가 왔습니다. 그의 믿음이 실현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오매불망 보고 싶어 하던 순이를 만났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소망하던 것이 현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말로 소망을 잃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취된 소망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과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우리 눈으로 보고 만지는 그 때까지 믿음과 소망으로 기대하며 고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까지 항상 믿음과 소망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13:12~13)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 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있어야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를 온전히 알게 될 때에 믿음과 소망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바울이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소망으로 기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자꾸 하나님께 이 땅에서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복으로, 기적으로 , 기가 막힌 현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믿음과 소망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때부터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니까 그런 줄 아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게 될 것을 어떻게 소망하시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그렇게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언약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과 소망으로 기대하고 바라고 확신하며 오늘의 현실을 이겨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성숙시키시고 완성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넣어 함께 살 것이라는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계에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었고 그 언약은 장자 권을 타고 상속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가 너무 더디게 보였고 심지어 그 언약의 성취의 기미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서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장자 권을 팥죽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걸 불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믿음과 소망, 그리고 가짜 믿음과 소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어요?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선물로 주시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믿음과 소망이 있다고 우기는 이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내어놓는 믿음과 소망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믿음과 소망은 눈에 보이는 힘이나 쾌락이나 편안함이 없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가짜들이 내어 놓은 가짜 믿음과 소망은 그러한 환난이나 고난이 닥치면 금방 사라집니다.
주님이 그들을 가시떨기, 돌 짝 밭, 길가 밭으로 표현 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짜 믿음과 소망을 소유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는 상관없이 항상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듭니다. 왜냐하면 진짜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의 성취로 우리에게 주어질,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주어질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팥죽이나 떡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기적들이 잘 안 나타나는 것이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힘들이 빠져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언약을 신뢰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기다림이며 인내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으로 가겠습니다.
(롬8:24~25)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보세요. 믿음을 근거로 한 소망을 소유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뭡니까? 참음과 기다림입니다.
여기 ‘참음으로’라는 어구의 ‘으로’라는 전치사 ‘디’는 ‘~으로 말미암아, ~을 방편으로’라는 의미의 전치사입니다. 어떤 행동이 완성을 기하도록 하는 동인(動因)을 지적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참음이라는 것을 방편으로 하지 않는 소망은 진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에는 반드시 참음이라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간을 고난이라고도 표현하고 하나님의 침묵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다른 곳 한 곳만 더 볼까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로마서 5장으로 가보지요.
(롬5:3‐4)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에도 소망을 견고케 하는 요소 중에 참음과 그 참음을 낳게 하는 환난이 있습니다.
(시130:5‐6)
5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6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기보시면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소망을 가진 이들이 그 소망의 끝을 기다리는데 마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고 합니다. 해가 떠야 자기의 임무가 끝나니까요. 기다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파수꾼이 밤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밤과 방불한 삶임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참음입니다. 이렇게 소망은 항상 환난과 인내를 통과하여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참으며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도피주의나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패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음이나 인내의 의미는 아주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딛2:13)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성도는 복스러운 소망이 나타남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열심히 기다린다, 열심히 고대 한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벧후3:12)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여기에서도 기다림의 내용이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망하며 기다리며 참는다는 것은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적극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빌3:10‐14)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는 부활이라는 소망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에 이르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 달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러한 소망의 적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산 소망, 살아 있는 소망(벧전1:3)’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진취적이며, 발전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도는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소망 사이를 화해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적극적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벧후3:13~14)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이들이 이 땅에서 힘써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하나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 기다림의 시간, 참음의 시간동안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거든요.
(엡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이유가 뭡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유일한 목적지는 거룩입니다.
(살전4:3)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된 장면이 등장합니다.
(계14:1‐5)
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 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 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들이더라
어떠세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십 사 만 사천이 하늘에 있는데 그들에게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완성해 내신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그 목적지로 힘써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부활에 이르려고 힘써 행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권고를 합니다.
(요일3:3)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온전한 부활의 몸,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당신의 아들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선물로 주셔서 그 믿음과 소망을 견고케 하심으로 진정으로 소중하고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서 그 소망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의 성숙을 도모하십니다. 거기에는 강압과 폭력과 억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설득하시고, 환경과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눈을 점차 하늘로 옮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현재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체념이나 도피로 내세를 소망하는 소피스트들과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 스위스에서 시계 산업이 발전했는지 아세요? 스위스가 시계의 나라가 된 것은 16세기 제네바에서의 시계산업의 부흥 때부터입니다. 16세기 스위스 제네바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종교개혁을 한 존 칼빈이 살던 도시입니다. 그 때 개혁주의 신학이 정립이 되면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무기력하게 천국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며 진취적으로 자신의 현재를 살아내며 거룩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제네바를 강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현재는 성실과 근면으로 소중하게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 자신의 거룩을 위해서요.
거기에 고난이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현재는 때론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난으로 채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그 고난은 성도에게 반드시 유익이 됩니다. 성도는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조금씩 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영광스러운 하늘 소망으로 가슴을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8:17~18)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삶의 질곡을 통과하여 점점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완성이 될 위의 것으로 자꾸 관심의 초점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골3:1‐2)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런 사람들은 절대 이 세상의 흉흉함이나 어두움을 경험하며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 성도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시112:6‐9)
6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7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9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보세요. 그렇게 하늘 소망을 품은 자들은 이 세상의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들의 공격에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위 엣 것을 열심히 찾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재물을 털어 빈궁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더란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나의 배를 채우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팥죽만도 못한 이 세상의 힘과 바꿔 먹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내 배를 채우는데 유용한 세상의 힘을 털어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6:25~34)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이 강화가 어떤 말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볼까요?
(마6:19~20)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에 헌금 많이 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땅의 배설물 같은 위장된 보물을 좇느라 진짜 하늘의 보물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무엇이 중요한지 잘 분별하여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위엣 것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는 사실 같은 것입니다. ‘의’로 번역이 된 ‘짜다크’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완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 사이가 완전히 회복이 되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상호 온전히 수행하는 상태를 의의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 분께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발산해 내는 하나님 나라와 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먹을 것과 입을 것보다 먼저 구하라는 것은 단순히 행위나 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하 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나중에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보상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먹을 것 입을 것이 조금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나의 상황과 환경과 처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거나 염려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질이나 양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을 좇아갑니까? 어떻게 공중의 새가 먹고 마시는 것이 왕궁의 수라상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새와 백합화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공중의 새와 백합화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걸 영광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는 것과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이 너희가 가진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초라하지만 그게 바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질이나 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 함께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앉아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확인 된 사람은 감옥에 앉아서도 소망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들 조금이라도 염려하면 내가 믿음이 없는 자로 간주하여 벌을 주겠다.’ 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정말 이 땅의 보이는 것들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있다면 너희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므로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랑의 권고 인 것입니다. ‘아들아, 염려마라 내가 있잖아’그게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권고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의 영광, 즉 그들이 지어진 목적은 하늘을 날고 , 먹고 싸며, 화 려한 꽃으로 옷 입는 것에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영광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그 분의 영광을 반사해 내면서 영생을 누리는 것에 있는 것이니까 보이는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바라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길이 너무 힘이 들고 고단하기만 한 길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그 길에 즐거움과 기쁨도 함께 공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 여정은 고난과 탄식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8:22‐23)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렇게 성도는 자기 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까지 탄식과 고통 속에서 적극적인 기다림과 참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주어진다고도 합니다. 그게 소망의 힘입니다.
(롬5:2‐3)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빌4:4)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후6:10)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paradox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반복하여 확인하게 되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불합리와 억지와 불행과 슬픔과 전쟁과 질병 등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대한 실망과 절망, 그리고 탄식과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서 눈을 들어 그러한 모든 악이 사라지고 참된 선과 안식과 행복과 평안이 가득 차있는 소망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망이 다스리는, 힘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이 땅에서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은 하늘 소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의 힘을 축적하여 행복에 이르고, 인기를 얻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려 했던 과거의 야망은 다 내려놓으시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시면서, 우리 몸의 온전한 구속과 부활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 땅의 팥죽과 냉큼 바꿔 먹는 그런 불경하고 경솔한 일에서 떠나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삶을 체념하거나 도피주의에 빠져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니라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정말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나의 거룩에 필요하여 허락하신 삶이며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자들은 절대 ‘이 더러운 세상 얼른 불타버리고 새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식의 소피스트들이나 영지주의 자들,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 소망과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 목숨 바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지 현실에 대한 체념이나 도피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위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난 당신을 위해 내 목숨도 아깝지 않으니까요’하고 사랑고백을 했다면 지금 현재도 그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고백을 해 놓고 지금 현재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무례하고 책임감도 없고 아껴주지도 않는 삶을 살면서 ‘지금은 이렇지만 정말 죽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그 때는 반드시 죽어줄게’한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 고백이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늘 소망과 부활 소망을 소유한 성도들은 그 소망의 종착역을 향해 오늘을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살 그 삶을 오늘, 나의 현재에서 분투하며 연습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하나님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그러니 지금은 이 땅의 팥죽 좀 실컷 먹여달라고 사기 치지 마시고, 정말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면 그 언약을 굳게 붙들고 지금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시고 지금 하나님 나라를 죽도록 고대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 삶이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입니다.
내 상황이 변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변하고 내가 속해 있는 나라가 변하여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기대는 어서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내가 변하여 내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내가 변하여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것이며, 내가 변하여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라가 나의 영향을 받게 사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집시 스미스가 성도들에게 던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할 때 자기 주변에 분필로 원을 그리고 ‘주여 이 원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원안에 있는 모든 것들 안에 부흥이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로 원을 그리고는 전부 그 원 밖에 있는 것들이 변하여 나를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아닙니다. 바꾸세요.
진 정 하나님의 언약을 소망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자기 주변의 인물들이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바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먼저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절대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팥죽 같은 세상의 힘과 그 언약을 바꿔 먹지 않습니다.
ily�OQ�� � �_��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지파는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자들의 대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으로만 기뻐하고 만족하고 행복함을 누리는 사람, 그 것이 너무 좋아 팥죽이 아니라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는 굳은 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 그것이 참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은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여러분의 고귀한 장자 권을 팔아먹지 마세요. 여러분 앞에 닥친 배고픔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장자 권을 내 팽개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이 다 날아간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장자 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것을 잘 지키시고 누리시고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그게 성도입니다.
��다�N/PN � �_lass="바탕글">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 산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평화롭게 살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질병이 있어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어 소란이 있으며, 죄가 있어 다툼이 있는 산 아래로 끌고 내려오셨습니다. 성도는 홀로 평화를 누리며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는 상처 주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 상대해 봤자 골치만 아프니 그냥 조용히 숨어서 신앙생활 하겠다.’는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이 겸손하고 욕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화평케 하는 삶에서의 도피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화평한 삶을 살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지긋 지긋한 세상 빨리 끝내시고 저 악한 인간들 다 지옥가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 들이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저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겠습니다.’ ‘저 가정이 아직 주님을 모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라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겠지요. 그게 팔복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에는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첫 창조의 영역인 역사와 인생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paradox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삭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 삶을 문득 문득 맛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 있음도 잊지 마시고 열심히 그 삶을 살아내십시다.
pt;fnM� fm � �_�;mso-bidi-font-family:굴림;color:blue; mso-font-kerning:0pt'>물동이를 어깨에서 곧바로 내려놓고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을 마셨습니다. 따님께서는 낙타에게도 물을 주었습니다.
24:47 제가 따님에게 '뉘 댁 따님이시오?' 하고 물었더니, 따님께서는 '아버지는 함자가 브두엘이고, 할아버지는 함자가 나홀이고, 할머니는 함자가 밀가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따님의 코에는 코걸이를 걸어 주고, 팔에는 팔찌를 끼워 주었습니다.
24:48 일이 이쯤 된 것을 보고, 저는 머리를 숙여서 주님께 경배하고, 제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은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주인 동생의 딸을 주인 아들의 신부감으로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24:49 이제 어른들께서 저의 주인에게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보여 주시려거든, 저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해주시고, 그렇게 하지 못하시겠거든, 못하겠다고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야, 저도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4:5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였다.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할 수가 없습니다.
24:51 여기에 리브가가 있으니, 데리고 가서, 주님이 지시하신 대로, 주인 아들의 아내로 삼으십시오."
24:52 아브라함의 종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고,
24:53 금은 패물과 옷가지들을 꺼내서 리브가에게 주었다. 그는 또 값나가는 선물을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주었다.
24:54 종과 그 일행은 비로소 먹고 마시고, 그 날 밤을 거기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에 모두 일어났을 때에, 아브라함의 종이 말하였다. "이제 주인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떠나게 해주십시오."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저 애를 다만 며칠이라도, 적어도 열흘만이라도, 우리와 함께 더 있다가 떠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4:56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를 더 붙잡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저의 여행을 형통하게 하셨으니, 제가 여기에서 떠나서, 저의 주인에게로 갈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24:57 그들이 말하였다. "아이를 불러다가 물어 봅시다."
24:58 그들이 리브가를 불러다 놓고서 물었다. "이 어른과 같이 가겠느냐?" 리브가가 대답하였다. "예, 가겠습니다."
24:59 그래서 그들은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를 아브라함의 종과 일행에게 딸려보내면서,
24:60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우리의 누이야, 너는 천만 인의 어머니가 되어라. 너의 씨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24:61 리브가와 몸종들은 준비를 마치고, 낙타에 올라앉아서, 종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24:62 그 때에 이삭은 이미 브엘라해로이에서 떠나서, 남쪽 네겝 지역에 가서 살고 있었다.
24:63 어느 날 저녁에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낙타 행렬이 한 떼 오고 있었다.
24:64 리브가는 고개를 들어서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려서
24:65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맞으러 오는 저 남자가 누굽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얼굴을 가렸다.
24:66 그 종이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이삭에게 다 말하였다.
24:67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오늘 설교 본문과 설교제목을 보시면서 조금 의아해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왜 이삭의 결혼 장을 설교하면서 그 제목을 여호와의 전쟁이라 했을까하고 조금 의아해 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창세기 24장을 본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이라든지 순종하는 아내의 모습 등에 관해 설교를 해 왔고 많은 주석서들도 대부분 성도의 결혼에 관한 메시지로 24장을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창세기 24장을 22장과 연결해서 보고 싶습니다.
창세기 22장 17절의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구절과 오늘 본문 60절의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 지어다’를 샌드위치의 빵으로 놓고 그 사이의 내용을 샌드위치의 속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한 수미 일치법(inclusio)적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내용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에 관한 내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리기를 성경에서 원수의 성문을 얻는다는 것은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물리치시고 당신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지에 관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과 적용, 즉 하나님 자신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 홀로 완성하신 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22장부터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문맥을 짚어 보고 오늘 본문의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그 모리아 산 사건은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어린양의 대신 죽음에 의해 탄생 된다는 십자가 복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테스트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시면서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종국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복의 정체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모리아 산에서 일어난 그 일련의 사건들이 대적의 문을 부수는, 다른 말로 대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건이었음을 선포하시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는 영적 전쟁의 승리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아브라함의 씨, 즉 교회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서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라는 아주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손이 되어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준비하심(여호와 이레)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러기에 그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공부하면서 보아 왔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쪼개짐, 즉 십자가로 당신의 백성들을 탄생케 하실 것임을 거듭 천명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인간 쪽에서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급기야 하나님은 할례라는 실물 체험 학습을 명하심으로 약속의 후손은 인간의 불가능함(생식기의 쪼개짐)위에서 하나님의 쪼개짐(십자가)으 로만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그 이야기를 모리아 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서 보여주신 것이며 거기에 이어서 나홀의 족보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그 언약은 하나님의 준비로 반드시 필연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임을 사라의 죽음에 앞선 리브가의 출현으로 한 번 더 확인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홀로 준비하시고 계획하시며 홀로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고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굳게 믿고 세상을 상징하는,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가나안 땅에다가 막벨라 굴을 사면서까지 그 언약의 확실성과 최종 성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갈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구원 받은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성도의 삶을 그 안에서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만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불완전함과 여전한 더러움과 여전한 욕정과 여전한 범죄 등의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가난함과 부요함과 성공과 실패, 잘남이나 못남 등의 갖가지 환경 등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의 내용으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여러분이 기대한 만큼 여러분이 거룩하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때때로 예수 믿기 이전과 방불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더 많으십니까? 우리는 성도라 불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많은 실망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중에는 예수를 믿고 더 가난해지셨거나 예수를 믿고 병에 걸리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 혹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하고 좌절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옛 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해 보여도, 여전히 나는 이 세상 것으로 복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내 안에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다는 뻔뻔함을 내어 놓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여전히 ‘내가 육체 가운데 산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이요 신분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 역사 속에서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육체에 갇혀서 자주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로 말미암아 극심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완성하신다 하셨으므로 그 사실을 믿고 절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게 사라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 가나안의 막벨라 굴을 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23장인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의 1세대인 사라가 죽었고 아브라함 자신도 이미 늙고 힘이 빠진 상태에서 아브라함은 충분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상황 속에서도 막벨라 굴을 산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보겠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와 공간 속에서 여전히 더럽고 여전히 후패하고 여전히 죽어가고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성취가 될 것인가 의심이 갈만큼 불안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이 성도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맥을 놓치지 말고 24장을 이해를 하자는 겁니다. 창세기 24장은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것처럼 아버지가 종을 보내어 아들의 신부를 불러오는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아들 성자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부르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러 올려지는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버지의 계획과 아들의 필요와 성령의 적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 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지셔서 당신의 상속자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가실 것이며 반드시 승리로 완성하실 것임이 오늘 본문에 혼인잔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종종 당신을 교회의 신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9:15)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 이니라
(마25:1)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렘3:14)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2장에서부터 미리 힌트 되어졌던 것입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가 탄생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와 같은 살과 피를 소유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했지요?
(창2:22~24)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러니까 위의 구절들을 연결해 보면 교회는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하여 둘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는 하늘의 공동상속자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1:3)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와서 다시 아담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형국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그분의 백성들이 다시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이야기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실 계획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셨으며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연합시키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삭의 혼인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삭의 아내가 그의 가족에게서 나와야 합니까? 하와가 아담의 살과 피를 담고 태어나 아담과 연합하게 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예수님과 연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친족에게서 이삭의 아내가 나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삭이 태어난 것이 누구의 약속이었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이삭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삭의 후손으로 열두 지파가 생기고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삭이 반드시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혼인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도로 치러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종이 신부를 간택하러 갔을 때 신부될 자의 대응에 대해 기도를 하는데 리브가가 그대로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부의 반응까지도 주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역사는 그저 향방 없이 이리 저리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his story)라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역사를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끝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알파요 오메가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역사와 인생을 우리의 손에 맡겨 두셨으면 우리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붙드시고 운행을 하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확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란으로 종을 보낼 때에 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 가서 신부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구원을 얻게 될 신부들은 여호와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지는 것이며 그 일은 반드시 실패될 수 없다는 것이 여호와의 사자의 개입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성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너 희도 꽤 괜찮은 존재야’라고 속삭이며 성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막는 마귀의 세력을 격파하고 기필코 하나님 백성들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고야 마시는 여호와의 전쟁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성취하실 것임을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으로 확인도장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호와의 전쟁이 출애굽기에 가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으로 확대되어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영적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도, 가나안 전쟁을 지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사자를 미리 앞서 보내십니다. 이삭의 혼인을 주도하시면서 여호와의 사자를 앞서 보내시는 것과 흡사하지요?
(출3:2)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23:20~21)
20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상황과 처지와 능력에 의기소침하여 자기들은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 자평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스마엘을 내 놓으며 조바심을 떤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 모두 죽습니다. 그게 불신자들의 말로입니다. 하나님은 40년 후에 새 세대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가서 이룰 것이니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해 주실 테니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신1:29‐33)
29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천신만고 끝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입구인 여리고에 이르자 정말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에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수5:13~15)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렇게 여호와의 사자가 미리 앞서가서 싸우는 형국으로 여호와의 전쟁은 승리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작은 그림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신약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이삭의 신부를 만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물입니다.
구약의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을 어디서 만납니까?
(창29:10‐12)
10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를 어디서 만납니까?
(출2:15‐17)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이렇게 성경에서 우물은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우물의 이야기는 신약으로 넘어가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여인이 서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 죄인들 속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교회를 상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남편들을 통해, 다른 말로 이 세상의 힘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진짜 남편, 이제 다시는 그녀를 버리지도 않고 실망시키지도 않을 진짜 남편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남편은 그녀가 뭐가 잘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똑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주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원천리 사마리아까지 고단하게 그녀를 찾아가셔서 생수를 부으시고 그녀의 남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목마르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녀의 목마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목마름을 가져가 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시며 목마른 자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그녀는 영원한 해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버림받음을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되셔서 그녀가 영원히 남편에게 버림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버림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그대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인의 상태로 사망에 던져져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을 가득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아브라함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싣고 신부에게로 떠났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창24:10)
10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렇게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한 아름 품으시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요16:13~15)
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그렇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마치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리브가에게 금은 패물과 의복과 귀 고리와 코 고리를 선물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들을 부어주셨습니다.
(벧후1:3)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리 브가가 그 금은 패물과 의복을 선물로 받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기 신랑의 풍요함과 부유함을 미루어 알게 되고 기대한 것처럼 우리 성도 또한 이 땅에서 보증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로 하늘의 풍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의 선물을 부어주신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신랑 예수가 기다리고 계시는 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인이 계시는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귀환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삭과 이브가의 혼인잔치가 성대하게 치러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고 마침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순결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계19:7‐8)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21:9~11)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결국이며 구속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각양의 보석으로 표현하시고 그들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 칭하십니다. 그 말은 이제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주님이 거하실 처소로 거룩하게 완성이 되어 그 무엇보다 찬란하고 존귀한 존재로 완성이 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에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인정하시면 됩니다. 나 는 여전히 육체가운데 살면서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오히려 저항하며 그 하늘의 삶을 막는 존재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의 그 모습을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그 너머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나를 평가해 주신다는 그 뻔뻔함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깊이깊이 젖어 들어 갈 때 우리의 삶은 예수의 삶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24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죄인들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구원의 이야기가 혼인 잔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브두엘과 라반이 그 모든 일의 시작이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창24:50)
50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그분이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치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삭의 신부를 불러오는 일을 시킨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을 불러오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요3:28‐30)
28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후11:2)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 함 이로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종으로 아직도 자기의 신분이 하나님 나라의 왕비들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눈먼 채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리브가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신부라는
복되고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10:14~15)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일하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먼 길 마다않고 열심히 다니며 전하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인의 부요함과 주인집의 풍요함을 잘 알아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주인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지 금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우리 주인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의 풍요를 확신하며 오늘을 희망과 기대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하늘 왕자의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제가 사랑하는 대학부 후배이자 신학교 후배인 한 목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주 영리하고 똑똑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대학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주 특별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오면서부터 그의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은 정신병원에 십 수 년 간 입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오자마자 가진 돈을 모두 사기를 당해서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밤에는 컨테이너로 박스를 옮기는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아내가 대장암과 난소암 판정을 받아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쯤 되면 욥의 아내의 일갈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라’는 원망의 음성이 그 안에서 들려올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 친구가 너무나 힘이 들어서 애리조나 광야에 나가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외쳤답니다.
‘하나님, 저 너무 힘듭니다. 주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힘들게 놔두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때 그 친구 마음속에 신명기 34장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느보산에 세우시고 가나안 땅을 모두 보여주시면서 마치 약 올리시듯이 ‘너는 저 땅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거기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모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모세가 갖은 고생 마다않고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바로 그 가나안 앞에서 죽이십니까? 그 때 모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술합니다. 그 말은 모세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무 말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말은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것으로 아무 것도 주시지 않으시고 심지어 죽을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너 이제 내 곁으로 와라’하고 부르시면 기쁘게 가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란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신명기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하나님 당신께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시고 제가 가진 모든 희망까지도 무너뜨리신다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이 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저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그 사실만으로 기뻐하겠습니다.’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과 처지와 변하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에 낙담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속에서 믿음을 발휘하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서게 되실 것입니다. 그 소망의 자리를 바라보시면서 오늘을 이겨 내십시오.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가? 그 부분은 이번 주 수요 성경공부 때, 심도 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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