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5 나그네의 귀향 (창25:1‐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12

65 나그네의 귀향




(창25:1‐11)

25:1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그두라이다.

25:2 그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가 태어났다.

25: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에게서 앗수르 사람과 르두시 사람과 르움미 사람이 갈라져 나왔다.

25: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인데,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다.

25:5 아브라함은 자기 재산을 모두 이삭에게 물려 주고,

25:6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을 동쪽 곧 동방 땅으로 보내어서, 자기 아들 이삭과 떨어져서 살게 하였다.

25:7 아브라함이 누린 햇수는 모두 백일흔다섯 해이다.

25:8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25:9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안장하였다. 그 굴은 마므레 근처,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다.

25:10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와 합장되었다.

25:11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그 때에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25장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 아브라함의 생애를 공부해 와서 그런지 몰라도 아브라함과의 이별이 담긴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주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과 정이 많이 든 것 같아요. 그 파란만장했던 아브라함의 인생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성경의 등장인물의 숭고한 퇴장을 보며 그에게 혼자 박수를 보낸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냥 그렇게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만족하게 하나님께 떠나는 아브라함이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해서 설교 원고를 쓰다 말고 박수를 쳤습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운이 진하여 죽었다는 어구가 있지요? 그 어구는 사실 직역을 하면 ‘영을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무슨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 등으로 죽기 싫을 때에 억지로 부들부들 떨다가 죽은 것이 아닌 정한 수(壽)를 다 채우고 ‘하나님 이제 세상에서는 이만큼 살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영을 주신 아버지께로 가기를 원합니다.’라는 자발적 사의(死義)가 함의된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기꺼이 하나님께로 떠난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그렇게 오매불망 바라던 본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히11:13~16)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가 여러 번 살펴 본 바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그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이방인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날까지 가나안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고 자기를 위하여 그가 뿌리를 내릴 그 어떤 땅과 건물도 마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아내의 무덤자리로 사놓은 막벨라 굴에 조용히 묻힙니다. 그는 결국 그토록 바라던 소망의 나라, 본향으로, 진짜 고향으로 떠난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늘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꿈에 본 내 고향이라는 노래였습니다. 길 가면서도 흥얼거리고, 잠 잘 때도 흥얼거리고, 공부하다가도 흥얼거리고 할 만큼 너무나 한국이 그리웠습니다. 그 때 제 막내 동생 여자 친구가 대한항공 승무원이었는데 수시로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는 그 아이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꿈에 본 내 고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 온지 몇 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이 차마 못 잊어

저는 이 노래를 구슬프게 부를 때마다 본향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겠는가, 아니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선진들을 자주 고향에서 내 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숨을 거두었고 야곱도 20년 이상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방황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고 모세는 그의 인생 120년 동안 한 번도 그 조상의 고향인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어린 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고향을 그리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 에스라, 에스더, 모르드개 모두 그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고향을 떠난 이민자만큼 나그네 인생, 이방인의 인생, 우거하는 자의 인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이들보다 마음의 공허와 영혼의 갈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참 본향에 대한 열정과 소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자기들의 나온바 본향을 생각 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소망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잘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다 타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재산도 권력도 고향이 채워주는 참 만족과 포만감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참 복 받은 분들입니다.

왜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면 한국에서보다 더 쉽게 교회를 찾는지 아십니까?

그건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처지에 딱히 즐길 거리가 별로 없어서 심심함을 달래려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이미 타국에서 자리를 잡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마음속에 휑하니 자리 잡고 있는 고향 떠난 자들의 공허감 때문인 것입니다. 그 공허감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될 때 우리는 확고한 소망을 붙든 참 신앙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확인한 것처럼 결국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에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면서 수개월을 달려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고 그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도피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팔아먹을 때에도 우리는 그와 함께 사라를 팔았으며 그가 롯과 헤어지면서 롯에게 땅의 선취권을 내어줄 때에도 우리는 그 속에서 함께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도, 그가 온 가족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도, 그가 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을 대접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 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도 우리는 함께 있었으며 그가 자기 아내 사라를 먼저 보내고 통곡을 할 때에도 우리는 그와 함께 통곡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모든 생애는 바로 우리의 신앙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도 역시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죽는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하지요? 그 구절을 직역을 하면 아브라함이 산, 해 들(years)의 날 들(days)이 175년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수명이 한정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인생의 날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도 이 땅에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통과하게 되었을 때에 돌아갈 본향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 시간의 밖에, 오는 세대가 존재함을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롬8:18)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보시면 사도 바울이 ‘현재’ 즉 ‘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가 존재함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정확한 시대 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오는 세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그는 14년 전에 낙원에 올라갔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온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본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당당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현세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오는 세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 세대가 고난으로 점철된 세대라면 오는 세대는 영광으로 가득 찬 세대이다.’

그렇게 그 나라를 이미 본 바울이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빌3:20~21)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창세전에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마25:34)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 나라가 언제 완성되었다고 합니까? 창세로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창세로부터’라고 번역이 된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라는 어구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될 때 이미 준비되어 있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시작된 이 ‘현세’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현세는 각자의 죽음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현세라는 시간을 벗어나게 될 때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이라는 새 세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게 바로 본향을 향한 그리움이며 본향을 향한 소망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본향을 향한 소망이 분명히 있다면 여러분은 넉넉히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소유한 채 영원히 사랑만 하면서 살게 될 그 나라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의 고난쯤이야 넉넉하게 이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건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로기조마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상상해 보건대, 추측해 보건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은 ‘배우고 경험하고 익혀서 내린 결론인데’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그건 치명적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확고한 소망을 품은 이들은 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너무 치열하게 경쟁하거나 이웃과 투쟁하며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표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딛1:2, 2:12‐14)

2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자연인들은 어떻습니까?

(엡2:12)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자연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하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 하는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경쟁자나 적으로 간주하여 치열하게 경쟁을 한다거나 피 튀기는 우위다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불성실하게 살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직업은 모두 성직(聖職)인 것이며 우리는 모두 성직자인 것입니다. 성직자가 자기의 직무에 태만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셔야 합니다. 그 열심 속에서 우리의 거룩이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자체가 여러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즉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는 여러분의 거룩을 훈련하는 훈련장이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는 세대(본향)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연인들이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기 위해 가장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돈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줄 수 있는 안전함(security)과 만족과 평안과 여유와 포만감과 풍요로움을 좋아하는 것이지 돈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인간들이 돈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은행에서 돈 세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요? 그 사람들이 그 사랑하는 돈이 항상 곁에 있다고 행복해 하던가요? 우리는 돈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돈이 만들어 내는 안전함(security)과 만족과 평안과 여유와 포만감과 풍요로움을 다른 것에서 찾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본향을 향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 세상의 힘이 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안전함(security)과 만족과 평안과 여유와 포만감과 풍요로움을 준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어떻겠어요?

절대 다른 것으로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학위 등으로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을 바르게 만난 한 사람을 소개 하고 싶습니다.

(눅9:2‐9)

2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 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여리고의 세리 장이었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세리는 백성들의 피를 짜는 자들로 회자될 만큼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건 당시 세리들이 월급을 받고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둔 만큼의 커미션을 받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이 거둔 만큼 자기의 몫이 많아지는데 세리들이 백성들의 사정을 봐 주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부정하게 세금을 거두어 착복을 함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불러 갔습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세리 장이었습니다.

여리고의 모든 세리들의 대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직책을 이용하여 다른 세리들로부터도 많은 뇌물을 받았을 것이고 그도 역시 백성들의 피를 짜내어 자기의 재산을 불러 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의 공허는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인기가 있었던 유명한 랍비인 예수가 여리고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 위에 까지 올라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랍비는 자기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삭개오의 마음을 아신 주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드디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그는 주님께 자기가 누구의 것을 토색(강탈)한 일이 있으면 4배로 갚을 것이고 현재 자기의 소유를 절반을 뚝 잘라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의 직업상 남의 것을 강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성경이 그가 부자라는 것을 일부러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그만큼 백성들의 것을 많이 강탈하여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가 강탈한 것을 네 배 씩 쳐서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것을 강탈했을 때에 원금과 원금의 25%의 배상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400%의 배상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자기에게 돈을 빼앗긴 사람들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때요? 만일 자기에게 돈을 빼앗긴 사람들이 보상을 요구하면 그냥 파산신고 해 버리겠지요?

게다가 삭개오는 나머지 절반의 재산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난 알거지가 되어도 괜찮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 오는 세대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자들은 그 전까지는 자신의 목숨처럼 여겼던 이 세상의 힘이 초개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적으로 돈을 모으려 하지 않고 치열하게 남을 밟아 부자가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자로 쓰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금 꼬박 꼬박내고 정직하게 수입 보고 하고 해도 돈이 벌립니다.

혹시 제 말을 들으시면서 ‘목사님은 맨 날 사무실에 앉아서 성경이나 보고 있어서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요. 어떻게 세금 꼬박꼬박 다 내고 수입을 제대로 다 보고하고 줄 것 다주고 정직하게 일하면서 돈을 벌어요? 그건 전혀 불가능해요’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불법과 사기와 권모술수와 잔꾀를 동원하지 않고는 절대 돈이 벌리지 않아서 그런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부자로 부르시지 않았는데 억지로 부자가 되려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부자로 부르시지 않았는데 억지로 부자가 된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 과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 곁에서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끝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막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찰나에 불과한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우리에게 준비된 영원한 나라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직하고 깨끗하게 성실하게 잘 살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여도 상관없고 가난해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전도가 뭡니까? 전도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의 삶을보고 ‘저들에게는 무엇이 있기에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돈 많고 벼슬 높은 사람들보다 더 부럽게 행복하지?’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소망을 궁금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전도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돈에 벌벌 떨고 명예 앞에서 굽 신 거리고 여전히 자기 자랑에만 몰두하고 살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하겠습니까? ‘저들도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믿는구나, 그렇다면 그렇게 돈보다도 못한 예수를 뭐 하러 믿겠는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돈 많은 사람들 보다 신앙이 깊은 사람이 더 부럽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어야 하는 구별된 성도들입니다. 돈이 주는 안전감보다 신앙이 주는 안전감이 더 크며, 돈이 주는 만족감보다 신앙이 주는 만족감이 더 크며, 돈이 주는 평안보다 신앙이 주는 평안이 더 크다는 것을 우리가 정말 안다면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돈보다 신앙을 더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돈을 좋아하는 것도 그 것이 주는 안전감과 평안과 포만감을 좋아하는 것이니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 주위의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초대교회 사람들을 바보들이요, 미친 자들이요, 무식한 자들이라 비웃었지만 그들이 서로 모여 유무상통하고 서로 섬기며 기쁨으로 예배하는 삶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단 말입니다.

‘혹시 저들이 진짜고 우리가 가짜인 것을 아닐까?’하고요. 왜 오늘날에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삶 속에서 그러한 여유와 용기와 담대함을 보지 못할까요?

오늘날 교회가 본향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마저 세상의 힘을 추구하느라 세상 사람들과 경쟁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요? 요즘은 미국의 대형교회들이

직접 쇼핑몰도 운영하고 사업체도 운영을 해서 그 수익금을 가지고 교회를 유지하고 구제도 하고 한다는데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요?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다보면 그 일 때문에 정작 주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가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수 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랑과 자기 의와 자기 배만을 위해 종교 행위를 하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12장의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눅12:1)

1그 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리고는 이런 설교를 하십니다.

(눅12:4~5)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자기의 자랑과 유익을 위해 행하는 외식과 위선에 대해 설교를 하고 계신데

뜬금없이 자기 형이 유산을 모두 착복했으니 그 유산을 좀 찾아 달라는 청년이 나섭니다.

(눅12:13‐14)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지금 이 세상의 힘을 좇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죽인 후에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라고 열심히 설교를 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자기 유산을 찾아달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성경이 여기서 고지하고자 하는 바가 뭘까요? 단순히 유산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청년에 대한 질책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산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보통 때에 남편이 ‘여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하고 말을 하면 대부분의 아내들은 ‘어디가 어떻게 아파,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는 등의 걱정과 함께 약을 찾아 줍니다.

그런데 연속극에 푹 빠져서 눈물까지 흘리며 열심히 연속극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여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하고 말을 걸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던가요? 대부분 ‘그래, 그럼 약 찾아 먹어’하고 다시 연속극 속으로 빠져 듭니다. 그렇다고 그 아내가 남편보다 연속극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그 아내가 어떤 것에 몰두해 있거나 심취해 있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이 안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형이 착복을 한 유산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때 그의 귀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이동풍이나 우이독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많은 재산을 쌓아놓고 ‘내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자’하는 그 부자에게 ‘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부자가 잘 못한 것이 뭡니까? 왜 하나님이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을까요? 노후를 위해 열심히 일해서 창고에 저축해 놓은 것이 잘못인가요?

주님께서 그 부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사람이 너무 돈과 노후 걱정에 몰두하다보면 정작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하게 되고 그의 삶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학위나 권세 등을 얻기 위해 몰두할 때 우리는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돈과 명예와 권세와 자식의 입신양명 등의 이 세상의 힘을 얻는 것에서 좌절했을 때 가장 불행함을 느끼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 진 것으로, 혹은 거룩하지 못한 나의 삶으로 인해 불행함을 느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무엇을 우리 삶의 목표로 하여 살았던 것일까요? 때로 우리의 삶에 가난과 질병, 자식에 대한 걱정, 사업의 실패 등이 찾아왔을 때 여러분이 극심한 불행을 느끼셨다면 그 때 우리는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보다 돈을, 자식을, 건강을 더 의지하고 살았구나’하고요. 성도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과 평안과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그네들은 이 세상의 힘에서 안전과 만족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리고 본향을 향한 소망 속에서 안전과 만족과 평안과 포만감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21:4~5)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바로 이 나라를 소망하며 여러분의 안전과 만족을 찾으셔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잘 이루어져서 결국에는 우리 하나님 준비하신 하늘나라에 무사히 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그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죽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수가 높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사베아’는 단순히 장수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는 180세를 산 이삭에게도 쓰였고 70세를 산 다윗에게도 쓰였으며 140세를 산 욥에게도 쓰였고 130세를 산 여호야다 제사장에게도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는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단어는 ‘나이에 만족해서’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으므로 만족한, 다시 말해 완전한 삶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누가 보기에도 완전하고 완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는 실수와 질곡이 참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알리는 창세기 25장이 히브리어 ‘와요쎄프’로 시작을 합니다.

그 단어는 ‘더하다’ ‘다시 행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단어가 빠진 채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단어를 넣어서 25장 1절을 직역하면 이러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다시 행하였다(더하였다) 그는 한 여자를 취하였다.’입니다.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지금 그 성경의 일차 수신자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언약 백성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했던 그와 같은 일을 또 다시 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실수투성이였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했던 존재였음이 그 단어 하나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사람됨이나 그의 인격의 성숙 등과는 상관없이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삶이었기에 그의 죽음을 ‘만족한 죽음, 완전한 죽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망이 있는 자들의 안전함입니다. 실수 속에서도, 넘어짐 속에서도 본향을 향한 그리움과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 그것이 만족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우리의 보배로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끝마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그 시점부터 정확하게 100년(히브리사람들의 완전수)후에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베아’라는 단어와 ‘100’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우리의 꿈, 우리의 비전을 이루어 내는 삶은 아브라함의 삶처럼 ‘사베아’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빌2:13)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히10:9)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요일2:17)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벧전4:1‐3)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 하도다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접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다가 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 하옵소서’라는 기도로 당신의 인생을 어거(馭車)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 속에서 자기의 뜻과 꿈과 소원과 비전이 자꾸 막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새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뒤로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만족하게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 사람의 임종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순간에 ‘아, 아쉽다. 돈을 좀 더 벌었어야 했는데’ 혹은 ‘좀 더 신나게 놀 걸’ 혹은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어야 했는데’하고 죽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대부분 ‘성실하고 착하게 남들 가슴 아프게 하지 말고 잘 살았어야 했는데’하고 후회를 하고 갑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것들은 덧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세요. 본향을 그리워하세요. 꿈에라도 그리워하세요.

 

�려 ��Q4�� � �_��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 세상의 힘인 맘몬을 섬기는 그런 청결치 못한 신앙은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주님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이 다른 대상으로 향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론 남편이나 아내에게 퉁명스러울 수도 있고, 때론 결혼기념일이나 배우자의 생일을 까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용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배우자가 겉으로는 참 잘해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 없이는 못 살아요’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신인 맘몬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서 여전히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질투하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기분이 어떠실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볼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그 마음에 찌끼를 섞지 말라는 것이며 물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돈, 명예, 인기 이런 것들 의지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이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청결한 상태가 되려면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데 우리는 하나님을 못 보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요. 우리 하나님께서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께 붙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 한 눈을 팝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지요. 그게 마음의 청결함입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일곱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복 받은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화평한 삶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평화가 뭡니까? 그저 아무 일 없이 무사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하나요?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 평온한 상태 속에서 전전 긍긍하며 불안해하는 그 삶을 평화라 하나요? 그렇다면 그 삶은 시체의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와 성숙과 진보와 깨어짐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고 성숙함도 없으며 깨어짐과 거듭남 없이 이 땅을 평화롭게 살다가 가게 된다면 그 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고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을 부둥켜안은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될 것이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뭡니까?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을 화평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자 오히려 세상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하던 유대 땅이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 소동을 감수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된 것입니다. 그게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전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이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그들과 평화롭게 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자는 아닙니다. 그건 겁쟁이의 삶이며 시체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느 것이 더 편안한 삶인가가 아닌 어느 것이 화평케 하는 삶인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소란이 일어나고 이웃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과 하나님을 화해케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 산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평화롭게 살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질병이 있어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어 소란이 있으며, 죄가 있어 다툼이 있는 산 아래로 끌고 내려오셨습니다. 성도는 홀로 평화를 누리며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는 상처 주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 상대해 봤자 골치만 아프니 그냥 조용히 숨어서 신앙생활 하겠다.’는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이 겸손하고 욕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화평케 하는 삶에서의 도피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화평한 삶을 살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지긋 지긋한 세상 빨리 끝내시고 저 악한 인간들 다 지옥가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 들이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저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겠습니다.’ ‘저 가정이 아직 주님을 모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라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겠지요. 그게 팔복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에는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첫 창조의 영역인 역사와 인생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paradox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삭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 삶을 문득 문득 맛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 있음도 잊지 마시고 열심히 그 삶을 살아내십시다.

 

pt;fnM� fm � �_�;mso-bidi-font-family:굴림;color:blue; mso-font-kerning:0pt'>물동이를 어깨에서 곧바로 내려놓고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을 마셨습니다. 따님께서는 낙타에게도 물을 주었습니다.

24:47 제가 따님에게 '뉘 댁 따님이시오?' 하고 물었더니, 따님께서는 '아버지는 함자가 브두엘이고, 할아버지는 함자가 나홀이고, 할머니는 함자가 밀가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따님의 코에는 코걸이를 걸어 주고, 팔에는 팔찌를 끼워 주었습니다.

24:48 일이 이쯤 된 것을 보고, 저는 머리를 숙여서 주님께 경배하고, 제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은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하셔서, 주인 동생의 딸을 주인 아들의 신부감으로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24:49 이제 어른들께서 저의 주인에게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보여 주시려거든, 저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해주시고, 그렇게 하지 못하시겠거든, 못하겠다고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야, 저도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4:5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였다. "이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할 수가 없습니다.

24:51 여기에 리브가가 있으니, 데리고 가서, 주님이 지시하신 대로, 주인 아들의 아내로 삼으십시오."

24:52 아브라함의 종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고,

24:53 금은 패물과 옷가지들을 꺼내서 리브가에게 주었다. 그는 또 값나가는 선물을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주었다.

24:54 종과 그 일행은 비로소 먹고 마시고, 그 날 밤을 거기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에 모두 일어났을 때에, 아브라함의 종이 말하였다. "이제 주인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떠나게 해주십시오."

24: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저 애를 다만 며칠이라도, 적어도 열흘만이라도, 우리와 함께 더 있다가 떠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4:56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를 더 붙잡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저의 여행을 형통하게 하셨으니, 제가 여기에서 떠나서, 저의 주인에게로 갈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24:57 그들이 말하였다. "아이를 불러다가 물어 봅시다."

24:58 그들이 리브가를 불러다 놓고서 물었다. "이 어른과 같이 가겠느냐?" 리브가가 대답하였다. ", 가겠습니다."

24:59 그래서 그들은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를 아브라함의 종과 일행에게 딸려보내면서,

24:60 리브가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우리의 누이야, 너는 천만 인의 어머니가 되어라. 너의 씨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24:61 리브가와 몸종들은 준비를 마치고, 낙타에 올라앉아서, 종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24:62 그 때에 이삭은 이미 브엘라해로이에서 떠나서, 남쪽 네겝 지역에 가서 살고 있었다.

24:63 어느 날 저녁에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낙타 행렬이 한 떼 오고 있었다.

24:64 리브가는 고개를 들어서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려서

24:65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맞으러 오는 저 남자가 누굽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얼굴을 가렸다.

24:66 그 종이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이삭에게 다 말하였다.

24:67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오늘 설교 본문과 설교제목을 보시면서 조금 의아해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왜 이삭의 결혼 장을 설교하면서 그 제목을 여호와의 전쟁이라 했을까하고 조금 의아해 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창세기 24장을 본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이라든지 순종하는 아내의 모습 등에 관해 설교를 해 왔고 많은 주석서들도 대부분 성도의 결혼에 관한 메시지로 24장을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창세기 24장을 22장과 연결해서 보고 싶습니다.

 

창세기 22 17절의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구절과 오늘 본문 60절의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 지어다’를 샌드위치의 빵으로 놓고 그 사이의 내용을 샌드위치의 속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한 수미 일치법(inclusio)적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내용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에 관한 내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리기를 성경에서 원수의 성문을 얻는다는 것은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물리치시고 당신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지에 관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과 적용, 즉 하나님 자신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 홀로 완성하신 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22장부터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문맥을 짚어 보고 오늘 본문의 설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그 모리아 산 사건은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어린양의 대신 죽음에 의해 탄생 된다는 십자가 복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테스트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시면서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종국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복의 정체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모리아 산에서 일어난 그 일련의 사건들이 대적의 문을 부수는, 다른 말로 대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쟁취하는 사건이었음을 선포하시면서 창세기 3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는 영적 전쟁의 승리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아브라함의 씨, 즉 교회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서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라는 아주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손이 되어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준비하심(여호와 이레)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러기에 그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공부하면서 보아 왔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쪼개짐, 즉 십자가로 당신의 백성들을 탄생케 하실 것임을 거듭 천명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인간 쪽에서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급기야 하나님은 할례라는 실물 체험 학습을 명하심으로 약속의 후손은 인간의 불가능함(생식기의 쪼개짐)위에서 하나님의 쪼개짐(십자가)으 로만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그 이야기를 모리아 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서 보여주신 것이며 거기에 이어서 나홀의 족보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그 언약은 하나님의 준비로 반드시 필연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임을 사라의 죽음에 앞선 리브가의 출현으로 한 번 더 확인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홀로 준비하시고 계획하시며 홀로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고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굳게 믿고 세상을 상징하는,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가나안 땅에다가 막벨라 굴을 사면서까지 그 언약의 확실성과 최종 성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구원 받은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성도의 삶을 그 안에서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만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불완전함과 여전한 더러움과 여전한 욕정과 여전한 범죄 등의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가난함과 부요함과 성공과 실패, 잘남이나 못남 등의 갖가지 환경 등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의 내용으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여러분이 기대한 만큼 여러분이 거룩하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때때로 예수 믿기 이전과 방불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더 많으십니까? 우리는 성도라 불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많은 실망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중에는 예수를 믿고 더 가난해지셨거나 예수를 믿고 병에 걸리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 혹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하고 좌절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옛 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해 보여도, 여전히 나는 이 세상 것으로 복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내 안에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다는 뻔뻔함을 내어 놓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여전히 ‘내가 육체 가운데 산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이요 신분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 역사 속에서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육체에 갇혀서 자주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로 말미암아 극심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완성하신다 하셨으므로 그 사실을 믿고 절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게 사라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 가나안의 막벨라 굴을 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23장인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의 1세대인 사라가 죽었고 아브라함 자신도 이미 늙고 힘이 빠진 상태에서 아브라함은 충분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상황 속에서도 막벨라 굴을 산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보겠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와 공간 속에서 여전히 더럽고 여전히 후패하고 여전히 죽어가고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성취가 될 것인가 의심이 갈만큼 불안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이 성도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맥을 놓치지 말고 24장을 이해를 하자는 겁니다. 창세기 24장은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것처럼 아버지가 종을 보내어 아들의 신부를 불러오는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아들 성자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부르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러 올려지는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버지의 계획과 아들의 필요와 성령의 적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 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지셔서 당신의 상속자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가실 것이며 반드시 승리로 완성하실 것임이 오늘 본문에 혼인잔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종종 당신을 교회의 신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9:15)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 이니라

(25:1)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3:14)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2장에서부터 미리 힌트 되어졌던 것입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가 탄생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와 같은 살과 피를 소유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했지요?

 

(2:22~24)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러니까 위의 구절들을 연결해 보면 교회는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하여 둘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는 하늘의 공동상속자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1:3)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와서 다시 아담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형국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그분의 백성들이 다시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이야기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실 계획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셨으며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연합시키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삭의 혼인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삭의 아내가 그의 가족에게서 나와야 합니까? 하와가 아담의 살과 피를 담고 태어나 아담과 연합하게 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예수님과 연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친족에게서 이삭의 아내가 나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삭이 태어난 것이 누구의 약속이었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이삭이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삭의 후손으로 열두 지파가 생기고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삭이 반드시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혼인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도로 치러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종이 신부를 간택하러 갔을 때 신부될 자의 대응에 대해 기도를 하는데 리브가가 그대로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부의 반응까지도 주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역사는 그저 향방 없이 이리 저리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his story)라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역사를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끝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알파요 오메가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역사와 인생을 우리의 손에 맡겨 두셨으면 우리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붙드시고 운행을 하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확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란으로 종을 보낼 때에 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 가서 신부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구원을 얻게 될 신부들은 여호와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지는 것이며 그 일은 반드시 실패될 수 없다는 것이 여호와의 사자의 개입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성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너 희도 꽤 괜찮은 존재야’라고 속삭이며 성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막는 마귀의 세력을 격파하고 기필코 하나님 백성들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고야 마시는 여호와의 전쟁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성취하실 것임을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으로 확인도장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호와의 전쟁이 출애굽기에 가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으로 확대되어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영적이스라엘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도, 가나안 전쟁을 지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사자를 미리 앞서 보내십니다. 이삭의 혼인을 주도하시면서 여호와의 사자를 앞서 보내시는 것과 흡사하지요?

 

(3:2)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23:20~21)

20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상황과 처지와 능력에 의기소침하여 자기들은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 자평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스마엘을 내 놓으며 조바심을 떤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 모두 죽습니다. 그게 불신자들의 말로입니다. 하나님은 40년 후에 새 세대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앞서가서 이룰 것이니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해 주실 테니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1:2933)

29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천신만고 끝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입구인 여리고에 이르자 정말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에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5:13~15)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렇게 여호와의 사자가 미리 앞서가서 싸우는 형국으로 여호와의 전쟁은 승리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작은 그림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가 신약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이삭의 신부를 만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물입니다.

구약의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을 어디서 만납니까?

 

(29:1012)

10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를 어디서 만납니까?

 

(2:1517)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이렇게 성경에서 우물은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우물의 이야기는 신약으로 넘어가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여인이 서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 죄인들 속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교회를 상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남편들을 통해, 다른 말로 이 세상의 힘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진짜 남편, 이제 다시는 그녀를 버리지도 않고 실망시키지도 않을 진짜 남편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남편은 그녀가 뭐가 잘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똑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주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원천리 사마리아까지 고단하게 그녀를 찾아가셔서 생수를 부으시고 그녀의 남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목마르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녀의 목마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목마름을 가져가 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시며 목마른 자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그녀는 영원한 해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버림받음을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되셔서 그녀가 영원히 남편에게 버림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버림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그대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인의 상태로 사망에 던져져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을 가득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아브라함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싣고 신부에게로 떠났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24:10)

10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렇게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한 아름 품으시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16:13~15)

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그렇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마치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리브가에게 금은 패물과 의복과 귀 고리와 코 고리를 선물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들을 부어주셨습니다.

 

(벧후1:3)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리 브가가 그 금은 패물과 의복을 선물로 받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기 신랑의 풍요함과 부유함을 미루어 알게 되고 기대한 것처럼 우리 성도 또한 이 땅에서 보증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로 하늘의 풍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의 선물을 부어주신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신랑 예수가 기다리고 계시는 참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인이 계시는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귀환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삭과 이브가의 혼인잔치가 성대하게 치러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고 마침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순결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19:78)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21:9~11)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결국이며 구속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각양의 보석으로 표현하시고 그들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 칭하십니다. 그 말은 이제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주님이 거하실 처소로 거룩하게 완성이 되어 그 무엇보다 찬란하고 존귀한 존재로 완성이 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에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인정하시면 됩니다. 나 는 여전히 육체가운데 살면서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오히려 저항하며 그 하늘의 삶을 막는 존재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의 그 모습을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그 너머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나를 평가해 주신다는 그 뻔뻔함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깊이깊이 젖어 들어 갈 때 우리의 삶은 예수의 삶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24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죄인들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구원의 이야기가 혼인 잔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브두엘과 라반이 그 모든 일의 시작이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24:50)

50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그분이 우리를 동역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치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삭의 신부를 불러오는 일을 시킨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을 불러오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3:2830)

28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후11:2)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 함 이로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종으로 아직도 자기의 신분이 하나님 나라의 왕비들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눈먼 채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리브가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신부라는

복되고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10:14~15)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일하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먼 길 마다않고 열심히 다니며 전하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인의 부요함과 주인집의 풍요함을 잘 알아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주인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지 금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우리 주인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의 풍요를 확신하며 오늘을 희망과 기대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하늘 왕자의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제가 사랑하는 대학부 후배이자 신학교 후배인 한 목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주 영리하고 똑똑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대학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주 특별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오면서부터 그의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은 정신병원에 십 수 년 간 입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오자마자 가진 돈을 모두 사기를 당해서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밤에는 컨테이너로 박스를 옮기는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아내가 대장암과 난소암 판정을 받아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쯤 되면 욥의 아내의 일갈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라’는 원망의 음성이 그 안에서 들려올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 친구가 너무나 힘이 들어서 애리조나 광야에 나가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외쳤답니다.

‘하나님, 저 너무 힘듭니다. 주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힘들게 놔두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때 그 친구 마음속에 신명기 34장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느보산에 세우시고 가나안 땅을 모두 보여주시면서 마치 약 올리시듯이 ‘너는 저 땅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거기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모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모세가 갖은 고생 마다않고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바로 그 가나안 앞에서 죽이십니까? 그 때 모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술합니다. 그 말은 모세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무 말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말은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것으로 아무 것도 주시지 않으시고 심지어 죽을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너 이제 내 곁으로 와라’하고 부르시면 기쁘게 가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란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신명기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하나님 당신께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시고 제가 가진 모든 희망까지도 무너뜨리신다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이 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저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그 사실만으로 기뻐하겠습니다.’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과 처지와 변하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에 낙담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속에서 믿음을 발휘하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서게 되실 것입니다. 그 소망의 자리를 바라보시면서 오늘을 이겨 내십시오.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가? 그 부분은 이번 주 수요 성경공부 때, 심도 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