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7 이삭의 기도 (창25:2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13

67 이삭의 기도




(창25:21)

25:21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약속의 후손 이삭이 마흔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복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무려 20년 동안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육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반드시 자기에게 자녀가 생겨야 하며 또한 생기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에게 오랜 세월 동안 자녀를 주시지 않고 그에게 기도를 시키십니다. 이삭이 기도를 하자 이삭에게 아이가 생깁니다. 


만일 이삭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대답은 ‘예’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끝까지 들으세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으신 후에야 리브가가 잉태를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홀로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을 지렁이나 달팽이처럼 암 수 한 몸으로 만들어서 자가생식과 자가 잉태, 자가 출산을 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즉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둘이 함께 일하게 하시고 함께 협력하여 자녀를 낳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당신의 백성들이 합력하여 일하시어 교회를 탄생케 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임을 힌트하시는 것입니다.


그 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이 계획하시고 당신이 완성하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들 마음속에 소원을 두게 하시고 그 소원을 당신께 아뢰어 기도하게 하시고 그 일에 전도로 선교로 봉사로 섬김으로 참여하게 하여 함께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빌2:13)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고전3:9)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에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회의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올라오라는 요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 일의 파트너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레일을 깔게 하시고 당신의 열차를 달리게 하십니다. 하늘로 떠나시기 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초청을 보십시오.



(요14:12~14)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후에 당신의 행하실 일을 우리 교회에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므로 그 일에 관한한 모든 기도는 응답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라’의 ‘무엇이든지’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다 간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무엇이든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소원이나 문제 해결에 관한 ‘무엇이든지’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무엇이든지’를 기도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거기에 관한한 모든 것을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에 우리 성도의 기도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겔36:32‐37)

32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 지어다

3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34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 지라

35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36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은 당신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완성하십니다. 그 일은 우리의 요구나 간청으로 절대 바뀌어 질 수 없습니다. 36절을 보시면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3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수단으로 인간의 기도를 사용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게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실 것을 이미 약속하신 터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삭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그 일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혹시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것인데 지금 제 말을 들으시면서 ‘아닌데,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후회하시기도 하시고 돌이키시기도 하시는데’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간혹 성경에서 하나님이 당신이 하신 말씀을 돌이켜 행하시는 것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신인동형론 적 표현인 것입니다. 예 를 들어 히스기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신 후 마음을 돌이켜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엄포를 놓으신 것이지 원래는 그를 죽이실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하나님께서 ‘내가 후회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강조하여 표현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결정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한 일에 대해 후회를 하고 수시로 돌이켜야 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믿고 신뢰합니까? 그렇게 우리 하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이루시는 계획하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에게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삭의 기도를 받아내시기 위해 쓰신 방법이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0년 동안 이삭에게 침묵하심으로 그의 기도를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끔 겪게 되는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 그러나 기도를 토해내게 하는 그러한 암울한 상황과 환경은 때때로 성도에게 하늘의 복이 마침내 부어지게 되는 전야제 같은 것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후7:9~11)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 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렇게 성도의 근심은 때때로 기도를 격발해 내고 그 기도는 성도 자신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는, 다른 말로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가 되고 완성이 되는 복중의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리를 잘 이해를 하고 있는 성도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범사에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삭이 나이가 60이 되어 가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약속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복까지 받아놓은 이삭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근심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그러한 근심이 이삭의 기도를 끌어내어 마침내 야곱을 잉태케 하시고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로 성숙시킴과 동시에 이삭을 하나님의 동역 자 역할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었던 에스겔서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요세푸스가 쓴 유다의 역사서들을 읽어보면 유다는 바벨론 유수 이전까지 두 개의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고 그 옆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안 주시는 세상의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다른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었다고 합니다. 제단이 두 개였던 것이지요. 마치 오늘날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의 맘몬을 섬기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바벨론 유수 이후에 그 다른 제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밝혀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칠십년간을 고생고생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신뢰할 분이시오 하나님만이 전능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섬기던 우상의 제단을 허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말했으니 내가 이룰 것이지만 너희가 기도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반드시 기도하는 자들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이지 그들의 자발적인 기도를 근거로 그들을 해방시키시겠다는 말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어코 기도를 받아내시고는 그들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때때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복을 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성도의 기도를 격발해 내는 그러한 근심의 시간, 어두움의 시간은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 성경 공부 때 히스기야의 기도를 공부했지요? 거기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이사야서 38장에서 죽이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남 유다가 앗수르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여 백성들이 인분을 먹고 마시고 있었을 때에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해서 그의 수명이 15년이 연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히스기야의 수명은 연장된 것이 아니라 원래 54세이었습니다. 왜 냐하면 히스기야가 서른아홉에 죽을병에서 회복되어 마흔 둘에 아들 므낫세를 낳았는데 그가 죽을병에 걸렸을 무렵인 서른아홉에 죽었다면 그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모두 무효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래 히스기야는 므낫세가 태어나기 전에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런데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죽을병을 허락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사건으로 마치 메시아와 같은 평가를 받고 있던 그의 무력함과 보잘것없음을 직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존재케 하고 성숙시키며 완성케 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의 기도를 유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그의 교만을 들어서 이사야서 39장에서 드디어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39:6‐7)

6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

7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우리는 이미 수요 성경 공부 때 레위기 26장 등을 통해 유다는 가나안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겨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그 때 안식년을 지키지 않음으로 쉬지 못했던 땅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백성들의 패역을 아셨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저분한 부분들을 쳐 내시기 위해 바벨론 유수를 당신의 작정 속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히스기야의 교만으로 인해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무슨 일이 있어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 죽을병을 허락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온 그의 교만을 들어 유다를 바벨론 포로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바벨론에서 시온을 그리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헐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만드셔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복귀시키시는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보세요. 히스기야는 원래 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죽을병을 주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를 고쳐주십니다. 남 유다의 바벨론 유수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들의 회복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도 유다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내십니다.


그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기도가 격발되기까지의 암울한 고통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의 모난 부분이나 더러운 부분들을 쳐 내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힘으로는 전혀 할 수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전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풀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지요? 노력을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이유는 나중에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아, 하나님께서 다 하셨구나.’ 라는 것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실 때에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임신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당신의 종으로 쓰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헌신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한나에게 브닌나라는 못된 동서를 주어서 핍박을 받게 하시고 한나의 태를 오랫동안 닫아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절대 순종의 자리로 그녀를 인도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한나의 입에서 사무엘을 바치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들어내시고 아이를 주십사하는 간구를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종 사무엘이 이 땅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무엘이 한나에게서 태어나기 까지 한나가 경험한 암울한 고통과 시련과 비웃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 한나의 기도가 격발이 되고 한나는 하나님의 동역 자가 된 것이며 한나 자신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뢰하는 자로 성숙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는 자로 그의 성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헌신이 사무엘 서에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처럼.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서 하나님이 다 계획하시고 이루실 일에 우리가 아무 공로 없이 밥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기도를 소중하게 사용하시고 우리를 동역자로 대우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드릴까요?



(막11:23~25)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참 기대가 되면서도 암담한 내용의 구절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시면서 심지어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들어가라 하면 산이 바다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절들을 들어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안 들어지는 것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합니다.

정경이 완성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산을 바다에 던지려는 시도를 해 왔을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기도원에 가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 기도를 하면 굴러 떨어진다는 흔들바위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그 바위를 굴리기 위해 알게 모르게 그 바위 주변에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런 심정으로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지려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한 번도 어떤 산이 아침에 일어나니 바다로 빠졌더라는 보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정도의 일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가능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마17:20)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에 겨자씨만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요?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십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믿음을 가리켜 ‘한 믿음’(엡4:5)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온전하게 주어진 한 믿음을 얼마만큼 주관적 믿음으로 발휘해 내느냐를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은 우리가 노력하고 학습하고 훈련해서 쌓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전하게 하나로 들어온 그 믿음을 주관적 믿음으로 발휘해 내는 분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겨자씨 정도가 아닌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산이 옮겨지지 않습니까?

산은커녕 볼펜 한 자루도 옮기기가 힘이 듭니다.


여기에서의 ‘이 산’은 예수님이 서계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 예루살렘 근처에는 감람산밖에 없었는데 감람산의 경우는 통상 성경에서 ‘감람산’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의 ‘이 산(This mountain)’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시고 내려오시는 길에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죽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의 파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힘과 지혜를 사용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사용하여 세상 것들을 쌓고 모아서 참 행복에 이르려 하는 모든 시도들을 율법과 성전이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시도를 이파리만 풍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행위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파괴하시고 무화과나무까지 저주하여 죽여 버리시고는 그것을 그 옛 성전과 이파리만 풍성한 무화과나무가 서 있었던 시온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옛 성전을 기각하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죽이신 것은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참 행복에 이르려 하는 모든 행위를 부인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그러한 모든 인간들의 시도를 한 번에 부인하셨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구원의 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두다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율법의 산이 바다로 던져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지요.



(사40:4‐5)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렇게 주님께서 십자가로 율법의 산인 ‘이 산’ 시온 산을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여 그 율법의 산을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도하라 내가 다 들어 주마’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 들어주시겠다는 기도는 무슨 기도이겠습니까? 율법의 산을 바다로 던지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이미 온전한 믿음이 있는데 왜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던져버릴 수 있는 산을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느냐?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버리라는 율법의 산, 형식의 산은 오늘날의 언어로 환언하면 교회를 좀 먹고 있는 물질만능주의와 능력지상주의, 고지론, 기복주의, 신비주의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행복에 도달하려하는 모든 시도들이 바로 율법의 산인 시온 산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그 산을 바다에 던지셨지만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그 율법의 산, 형식의 산을 바다에 던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고지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전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세상의 고지에서, 그 율법의 산에서 내려와 그 산을 바다에 던져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전부 그 산을 올라가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긍정적 사고를 통해 행복에 이르고 번영과 부를 이룩하라 합니다. 기적과 신비를 좇아 그러한 현상들을 통해 짜릿한 감동을 받으라고 합니다. 씨앗 헌금이라도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몇 배의 배상금을 받아 챙기라고 합니다. 전부 이 세상의 것으로 행복에 도달하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바다에 던져야 할 율법의 산, 시온 산인 것입니다.

그 산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바다에 던져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여지없이 바다로 던져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산을 던지라고 해 놓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당신께서 모두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이루어 가라고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모두가 이 세상의 힘을 기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앞에서 산을 던지라 말씀하시며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내가 다 주리라 하신 말씀과 우리가 수요 성경공부 때 살펴 본 황금 율을 들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내가 다 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모두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이고 그 기도는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셨지요?


히스기야의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히 스기야가 기도하여 목숨을 연장 받은 것은 그의 후손이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거기서 실패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므낫세라는 자손을 허락하심으로 해서 기필코 그의 후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유치하게 통곡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목숨도 연장시켜 주신다는 그런 식의 해석은 버리세요.


기도의 사람 야베스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가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여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여 기필코 당신의 자녀로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복이 자기에게 임하여 지경,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 속에서 풍성하게 확장되어지도록 구하여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 야베스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를 ‘그 어미가 수고로이 낳은자’라고 단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고로이 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야베스의 기도를 하게 될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홀로 계획하시고, 하나님 홀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임으로 반드시 그 나라는 완성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주 긴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항상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기도하되 더디 온다고 낙망치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만져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지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이성 속에서 우리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9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이스라엘은 진심에서 우러난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들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슬퍼하며 참회했고 조상들의 죄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순종의 삶을 살겠다는, 만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종으로 보내시라는 그런 결단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그들의 우상 제단을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여 조상들의 죄까지도 가슴 아파하며 참회를 하게 하였습니다.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게 하였고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며 방패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어떤 기적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마세요.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가 눈에 보이지 않아 열심히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주님께서 열두제자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고 돌아와서 자랑을 하는데

귀신이 나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칫 눈에 보이는 현상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놓치는 수가 있으니 기적 같은 것으로 기뻐하기 전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감도 나지 않지만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권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 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거룩을 경주하며 살아가는 참 신앙인들 앞에 암이 떨어져 나간다든지 귀신이 나간다든지 은으로 된 이가 금으로 바뀐다든지 하는 기적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살던 그 신앙인의 삶이 그 기적 앞에서 무력해 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현상이 나타나고 보이니까요. 그런 면에 있어서 기적은 참 신앙인들을 무력하게 하고 엉뚱한 현상을 좇게 만드는 아주 사악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낙망치 않는 기다림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20년을 초조해 하며 자식을 기다렸던 그 시간은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이 이삭을 만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이삭의 기도를 격발해 낸 소중한 시간 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눈에 보이는 기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력해 하거나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마세요. 


그 때 기도 하십시오. ‘하나님, 어서어서 제 삶에 남아 있는 율법의 산, 형식의 산을 바다로 던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내가 대접받기 전에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대접하는 사람으로 성숙되어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 죄와 악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어서어서 완성이 되어 슬픔과 눈물과 억지와 더러움과 추악함과 분쟁과 시기와 질투가 사라진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세요.

그 기도는 반드시 속히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게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