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6 하나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 (창25:12~34)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12

66 하나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




(창25:12~34)

25:12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사람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다.

25: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태어난 순서를 따라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스마엘의 맏아들은 느바욧이다. 그 아래는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25: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25:15 하닷과 데마와 여두르와 나비스와 게드마가 있다.

25:16 이 열둘은 이스마엘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마을과 부락의 이름이며, 또한 이 사람들이 세운 열두 지파의 통치자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25:17 이스마엘은 모두 백서른일곱 해를 누린 뒤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25:18 그의 자손은 모두 하윌라로부터 수르 지방에 이르는 그 일대에 흩어져서 살았다. 수르는 이집트의 동북쪽 경계 부근 앗시리아로 가는 길에 있다.

25:19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5:20 이삭은 마흔 살 때에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리브가는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인 라반의 누이이다.

25:21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25:22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

25:23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25:24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25:25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1)에서라고 하였다. '털'

25:26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2)야곱이라고 하였다. 리브가가 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예순 살이었다. '발뒤꿈치를 잡다' 즉 '속이다'를 뜻하는 '야아케브'에서 온 말

25:27 두 아이가 자라,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5:29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25:30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에서가 '붉은' 죽을 먹고 싶어 하였다고 해서, 에서를 3)에돔이라고도 한다.

25:31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25:32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25:33 야곱이 말하였다.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그러자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였다.

25:34 야곱이 빵과 팥죽 얼마를 에서에게 주니,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이제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이삭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넘어왔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공부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불가능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이야기도 그의 아내 리브가의 불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로 갑니다.


(창25:21)

21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하나님은 분명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언약의 현장에 이삭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씨가 잉태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확실하게 들었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무려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이삭에게 자손을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역시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후손의 탄생과 번성과 완성은 인간의 불가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진짜 약속의 씨(제라,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탄생될 교회는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공로나 조건이나 열심이나 자격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열심과 그 분의 주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미리 힌트 하는 것입니다.



(갈3:16)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축복하시면서 ‘네 씨, 네 자손, 네 후손’이라 지칭한 이는 다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항상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분의 십자가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요구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서 시작되어 완성된 것처럼 그 예수 안에서 죄 된 몸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출생하게 됨을 성경은 반복적이며 점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지 한 번 볼까요? 오늘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창세기에서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거쳐 로마서와 히브리서까지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조금 지루하실 수도 있을 테지만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재미있으실 거예요. 본문 23절로 가 보지요.



(창25:23)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한사람은 언약의 라인으로 또 한 사람은 유기된 자들의 라인으로 갈려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롬9:10‐18)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선택)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 이로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여기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 있을 때에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달음박질을 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마음대로 택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예정이라 합니다. 심지어 바로는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강퍅하게 놔두셨다 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들겠지요?

‘아니 우리 인간은 무슨 꼭두각시입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지옥엘 가게?’ 그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첫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질문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밑에 붙어 있습니다.

(롬9:19~24)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 하느뇨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 하겠느뇨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귀히 쓸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드는 것처럼 인간을 택하시는 것도 하나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순복하여 살아야 할 피조물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종으로 부리고 싶어 하는 첫째 아담의 허리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복하고 그 분의 하나님 되심과 창조주 되심과 자신들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그 목적지로 하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꾸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주권과 선택과 예정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교회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벧후1:10~11)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 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성숙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얻는답니다.

앞서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 이삭과 리브가에게 작은 자가 선택된 자이고 큰 자가 유기된 자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은 장자권이 작은 아들에게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장자 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요.

아브라함 가정에서의 장자 권은 가나안에 대한 기업의 상속과 부계의 축복에 의한 언약의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약속의 후손에 대한 장자권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가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고 그 언약을 상속받는 자가 하나님의 택한 라인임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장자 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장자권이 이미 두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결정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이삭과 리브가도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을 신실하게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장자 권을 상속하려 했습니다.

(창27:1‐4)

1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3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이삭이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맏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합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이삭이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창25:28)

28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항상 그의 입에 두었다’입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물로 만든 고기를 항상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장자 권을 에서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앞의 별미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바꿔 먹어 버린 에서와 흡사하지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택이 번복 될 수 있나요? 그러한 에서의 불신앙에도 장자 권은 야곱에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리브가는 어떻습니까?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장자 권을 주실 것임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던 간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렸어야지요? 그런데 리브가는 집에서 종용하게 자신을 도와주던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야곱에게 자신의 꾀로 장자 권을 탈취하게 합니다. 본문 28절의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 하였더라’라는 구절은 이삭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서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장자 권을 상속하게 할 것임을 힌트 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리브가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가만히 기다렸어도 그 장자 권은 야곱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이삭과 형에서를 속이게 만듭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의지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온갖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의 선택은 제 길을 찾아갑니다. 야곱은 그 불신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평생을 통해 그 불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말년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자기와 형 에서에게서 일어났던, 하 나님의 선택에 의한 변개할 수 없는 장자 권의 상속의 의미를 믿음 안에서 확실히 깨닫고 순종하여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을 얹고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엇갈려 올려 축복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과 야곱 또한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져 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의한 장자권의 상속은 이제 한 개인에서 하나의 민족과 국가의 차원으로 발전하여 좀 더 큰 그림으로 설명이 됩니다.

(출4:22~23)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자가 되는 데에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었나요?

이스라엘이 이 세상 어떤 민족보다 잘난 민족이기에 그들이 선택되어진 것인가요?

(신7:6‐7)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자격이나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조건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자들을 하나님 마음대로 택하신 것입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정말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수효가 가장 적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을 찾지 않으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장자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의 모형으로 택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어떤 자격이나 공로에 의해 구원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의 선택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면 영적 이스라엘인 진짜 장자들이 나옵니다.

(히12:22~23)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진짜 하나님의 장자들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 등이 설명용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진짜 장자들인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장자가 됩니까? 자기들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아 공짜로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창세기부터 이렇게 알기 쉬운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의 장자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되는지가 아주 명쾌한 그림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장자들이 어떻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장자로 탄생하게 됩니까?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장자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죽어갈 때 하나님의 장자들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그 죽음을 면하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까?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애굽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집의 장자는 거기서 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인방과 문설주에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무리에 중다한 잡 족(출12:38)이 함께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개입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에 의해서만 장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장자들의 정체성은 어린양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에게 죽음의 신을 넘어가게(pass over, 踰越)하는 어린양의 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 역시 애굽의 장자들이 상징하던 세상의 장자들처럼 모두 다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8:44)

44너 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렇게 모두 마귀의 장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귀의 장자들이 하나님의 장자들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어떻게요? 어린양의 피의 공로, 즉 십자가로요.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엡1:3)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 있지요? 우리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아 예정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두 장자라고 하는가? 장자는 아버지의 기업을 모두 상속받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장자인 것입니다. 양자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는 상속에 대한 법적인 구속력을 내포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적자(嫡子)에게는 유산 상속의 의무가 없었지만 양자(養子)에게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산 상속을 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자의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아들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여자분들 많이 섭섭하지 않으셨어요? 그 아들의 개념도 상속의 필연성을 담고 있는 단어인 것이지 딸과 아들 등의 성별을 구분 짓는 단어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풍요와 평안과 안식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롬8:17)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공동 상속자)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되었습니까?

(롬8:29~30)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보세요. 진짜 하나님의 맏아들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에서 우리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했지요? 아브라함의 후손, 씨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연합되어 죽고 다시 태어나 우리가 작은 예수 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로 봐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들이 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거쳐 장자들의 총회인 교회로 이어지는지 연결이 되시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 권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에서가 그 장자 권을 약간의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포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평소에 에서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 권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25:29‐34)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 이었더라

참 어처구니가 없지요?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 권을 팔아버립니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에서의 행동을 ‘망령되다’라고 가혹하게 비난합니다.

(히12:6)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망령된’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베벨로스’는 ‘문지방’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문지방을 짓밟듯 하나님의 언약을 짓밟았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육신의 배를 불리 우는 떡과 팥죽이 하나님의 언약보다 더 소중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에서를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는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배가 고프다고 ‘내가 이제 죽게 되었다’고 엄살을 피우며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언약의 장자 권을 내 팽개친 에서와 우리가 그렇게 많이 다릅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언약과 우리의 성도됨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나요? 혹시 우리도 에서처럼 우리의 신앙과 성도됨을 팥죽보다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여 여전히 세상의 힘과 쾌락을 신앙과 바꿔 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의 유익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쉽게 놓아버리는 그런 삶의 모습이 우리 안에는 없냐는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언약과 우리의 믿음을 문지방을 짓밟듯 밟아버리는 행위, 즉 망령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관해 우리 주님이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막4:16~19)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 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 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염려와 유혹과 욕심과 환난과 핍박 앞에서 언제든지 내 팽개쳐지는 하나님의 언약과 우리의 신앙, 그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아먹은 에서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팥죽만도 못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하늘 소망을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하늘 소망보다는 팥죽을 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팥죽을 약속하는 교회는 모두 크게 부흥을 합니다. 사람들은 하늘 소망보다는 눈에 보이는 팥죽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늘 소망, 즉 장자 권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유와도 바꿀 수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혹시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다 사라진다 해도 나에게 하나님께서 상속하신 장자권이 있기에 나는 행복해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삶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험과 불행과 고난 앞에서도 그 장자 권을 소유한 나의 실체를 잊어버리고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열광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장자권이 있습니다. 기죽지 마세요. 당당하십시오.

그러한 하나님의 장자들은 하나님의 진짜 장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듯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라 이 땅에서 버림받고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이 역사와 인생의 주인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단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지만 결국 그들을 밟고 조롱하던 큰 자들이 어린 자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십자가의 원리를 함의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는 십자가의 원리를 한 편의 드라마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선발대로 애굽으로 보내졌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당한 어린 자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를 버린 큰 자들이 어린 자인 요셉 앞에서 요셉을 섬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 우리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의 인생 속에서도 끊임없이 십자가의 원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 삶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종이 됩니다. 어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주인집의 제반 상황을 주관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역시 어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도 제반 사무를 도맡아 합니다.

그가 바로의 궁에 들어갔을 때에도 애굽의 역사를 좌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의 아비 야곱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대표적 상징인 바로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거지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누가 주입니까? 축복하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셉, 야곱 모두 세상에서 큰 고생과 억지와 불행과 아픔을 겪고 약자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역사는 그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백성들을 주인공 삼아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 주인공들이 맡은 역할은 당해주고 섬겨주고 사랑해주고 용서해주고 안아주는 어린 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땅에서 떵떵 거리며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배를 섬기던 큰 자들이 그 어린 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죽도록 고생을 하던 버려진 막내 요셉을 장자라 하는 것입니다.

(대상5:2)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그게 바로 장자들의 총회에 들어온 하나님의 장자들, 즉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 받은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그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에베소서 1장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의 복은 마귀의 장자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 백성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부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열심과 그분의 능력을 가리켜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정작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삭은 잉태도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쫓겨난 이스마엘의 후예는 열두 방백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는 방대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마엘이 복 받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왜 성경이 ‘복’이라는 단어 아래에 그러한 극명한 대조를 해 놓은 것일까요?

하나님의 복은 이 세상 것을 확장시켜 주시고 확대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어가는 복인 것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그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불림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래서 장자 권을 가진 작은 자 야곱이 큰 자인 에서에게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에서는 400인의 사병을 소유한 부자요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야곱은 평생을 사기나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 결국 절름발이가 되어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는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되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표지점이며 그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아내야 하는 예수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 하나님께 환도 뼈를 맞아 절름발이가 되지요? 그는 평생 다리를 절며 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모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세상에 대한 연정이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하여 하나님도 이길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 절름발이 이스라엘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가 사시기에 그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도우십니다.

(창49:23~24)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우리말 개역 성경 번역이 다소 모호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그로부터’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밋솸’은 ‘무엇 무엇으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미’와 ‘거기, 그 때’등 장소나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솸’이 결합된 단어로서 ‘거기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4절 후반부를 직역을 하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있는 곳으로부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야곱의 전능자의 손으로 말미암아’와 동격의 어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부분을 잘 다듬어 번역을 하면 ‘야곱의 전능자의 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 되신 목자로부터 요셉의 힘이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인내와 사랑과 섬김과 신앙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이스라엘, 즉 교회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만들기의 목적은 장자를 만들어 아버지인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장자를 만들어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쏟아부어주는 게 기독교가 아닙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악한 세력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세상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장자들을 만들어 당신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건지신 장자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레위지파를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민3:11~13)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지파는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자들의 대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으로만 기뻐하고 만족하고 행복함을 누리는 사람, 그 것이 너무 좋아 팥죽이 아니라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는 굳은 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 그것이 참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은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여러분의 고귀한 장자 권을 팔아먹지 마세요. 여러분 앞에 닥친 배고픔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장자 권을 내 팽개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이 다 날아간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장자 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것을 잘 지키시고 누리시고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그게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