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9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복을 주리라 (창26:1~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15

69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복을 주리라




(창26:1~13)

26:1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26: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26: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26: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26: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26:6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26:7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6:8 이삭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지 꽤 오래 된 어느 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는 것을 우연히 창으로 보게 되었다.

26:9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들여서 나무랐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내인데, 어쩌려고 당신은 그를 누이라고 말하였소?" 이삭이 대답하였다. "저 여자 때문에 제가 혹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6:10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어쩌려고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하마터면, 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인가가 당신의 아내를 건드릴 뻔하지 않았소?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될 뻔하였소."

26:11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경고를 내렸다.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26: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마침내 이삭의 삶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알려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삭의 삶을 통하여 교회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게 이삭의 삶인지 아니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흉년, 애굽행, 그랄 왕 아비멕렉, 아내를 누이라 속인 것, 하나님의 반복적인 축복의 언약 선포 등등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아브라함 때의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아요? 성경이 왜 이런 동일한 인간의 실수를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변함없는 불가능함에 관한 확인도장인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75년을 같은 장막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도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아버지처럼 곧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그리고는 그 도중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자칫하면 자기 아내나 자기 아내를 취하려 하는 다른 이들을 큰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뻔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 아버지와 똑같지요? 성경은 지금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그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우리 교회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시지 않으면 이 땅 위에는 절대 새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전도서 기자는 그러한 피조물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전1:9-10)

9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여전히 불가능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기필코 당신의 복을 부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물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이삭의 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삭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절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경고를 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만류로 그랄에서 머물지요? 그랄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제일 끝 지점입니다. 그러니까 여차하면 넘어갈 뻔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애굽의 초입에서 하나님의 만류로 그랄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듣고 그랄에 머문 이삭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네가 이 땅에서 머물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이 이 대목을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사건과 비교해서 보시면 재미가 있으실 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복을 주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으리라’ 그렇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고 이삭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복을 받습니다. 극명한 대조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들을 접하시면서 ‘그러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무조건 죄인 것이구나.’하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선악과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로 죄가 규정되었던 것처럼 사실 ‘애굽으로 내려가고 안 내려가고’가 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시면 내려가는 것이 선입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마라고 하시면 안 내려가는 것이 선인 것입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와는 달리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시키십니다.(창46:3) 심지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있을 것이니 걱정 말고 내려가라 하십니다. 왜 그래야 했지요? 야곱과 일흔 명의 식솔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큰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으로 회귀를 함으로 해서 조금 더 큰 구원의 그림을 교회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죄이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선이라는 공식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 ‘밥 얻어먹어라’ 하시면 그대로 따라야 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인 것입니다.

이삭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은 언약의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도 그 가나안 땅을 지키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이런 질문이 드시겠지요?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는 그냥 놔두셨을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결국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팔아먹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 애굽왕 바로를 혼내주시고 다시 아내를 찾아 돌려주신 하나님의 크심과 엄위하심을 경험하고는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애굽 행을 만류하지 않으시고 놔두심으로 해서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에 머무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음을 가르치시고는 결국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한 삶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도중에 막으신 것이나 가서 고생 죽도록 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이나 하나님의 목적은 한가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서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그 목적.

하나님은 그렇게 직접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사는 것이 최선의 삶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랄에 머물러 거부가 되는 모습이 성경에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 이 땅에서 이 세상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이삭의 삶이라는 모형을 통해 하늘의 진정한 풍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인간들의 의식 속에서의 풍요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물질적 부(富)’를 들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약속의 자손들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풍요를 힌트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확인해 볼까요? 본문 2절로 가 보겠습니다.

(창26:2-4)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본문 12절입니다.

(창26:12-13)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랄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백배였다고 합니다. 전에도 한 번 설명해 드렸지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배’란 어떤 것과 비교하여 상상할 수도 없이 풍성한 것을 표현할 때 백배라는 단어를 쓴다 했지요? 그 백배라는 단어는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해서 이 땅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없는 하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이 구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을 잘 들으면 이 땅에서 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고 만사형통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객관적 공식을 도출해 내어 사람들을 미혹하곤 합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이삭이 큰 부자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랄 왕과 그랄 목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이리 저리 쫓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물도 빼앗깁니다. 그게 과연 복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일부러 이삭이 거부가 된 후에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쫓겨 다니는 삶을 사는 모습을 그림으로 해서 이 세상의 힘을 얻은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창세기 29절에서 이삭이 진짜 복 받은 사람이 되는 장면을 그려 넣습니다.



(창26:23~25,29)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 지라

25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 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부자가 되긴 했는데 계속해서 그랄 왕과 그랄 목자들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단순히 소 떼와 양 떼가 많아지는 것이 궁극적인 복이 아님을 고지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29절에 와서 이삭이 진짜 복 받은 사람으로 인정이 되는데 그 일은 그가 브엘세바로 쫓겨 가서 거기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때 그랄 사람들이 더 이상 이삭을 괴롭히지 않고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인정을 해 줍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떻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시다가 그의 아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냈던 브엘세바로 몰아넣으시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예배를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삭이 거부가 된 것이 진짜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삭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그 일이 진짜 복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말씀을 듣고 제사를 지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분께 제사를 지내는 이삭의 모습을 보고 그랄 사람들이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본문에서 성경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양떼와 소떼가 많아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그 분께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참 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수1:5-6)

5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 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에서의 강세는 ‘땅을 주리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의 강세는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복된 약속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땅과 부와 힘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 아님을 모세도 알았습니다.



(출33:1-3)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당신께서 직접 가나안 땅에서 그 거민들을 다 쫓아 내 줄 테니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게 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서 땅만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출33:15-16)

15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의 은총, 즉 하나님의 복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서 아무리 좋은 땅과 육축을 우리에게 준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삭의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것이었지 절대 이 세상에서 거부가 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은 요셉이 애굽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감옥에 까지 들어갔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겪은 일들을 형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창39:23)

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이 구절의 강세도 역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형통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왜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인지가 자명해 지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삭이 그랄에 머물며 거부가 된 사건은 하늘의 풍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 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이 땅에서 거부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서 성도의 삶은 어디를 목표지점으로 해야 하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마25:14~19)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자기의 종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난 주인과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금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나면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습니다. 주인이 그러한 명령을 했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 주인의 말에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마25:27)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렇지요? 주인은 종들에게 이익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을 보면 주인이 마치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많은 열매를 맺고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불순종한 것을 들어 비록 적은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은사를 묻어두면 안되고 적은 은사로도 열심히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금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금 달란트와 은 달란트, 동 달란트가 있었는데 금 한 달란트는 평균적인 수입을 가진 노동자가 20년을 일한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따지면 백 만 불에서 이 백 만 불 정도 되는 돈입니다.

이 비유는 비록 적은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열심히 충성 봉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업적을 열매로 내어 놓아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값진 것이니 그 은사가 세상 적으로 보기에 커 보이거나 작아 보이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최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 인이 종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떠나시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가시는 그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한 명령을 받은 우리는 주인이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남기라면 남겨야 하고 묻어두라면 묻어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자기의 생각대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 비유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이 비유가 우리에게 맡겨진 은사로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누가복음 16장에서 밝혀집니다.



(눅16:1~13)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 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절을 보시면 불의한 청지기, 즉 종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소유’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휘파르콘타’는 평판(reputation), 명성, 소유 등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허비’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는 ‘흩어지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는 의역을 하면 ‘종이 주인의 뜻을 거스려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인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고 그 주인이 모으려 의도했던 주인의 소유가 흩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결코 주인의 재산을 종이 허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 보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착복했다거나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취리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그 주인의 의도는 자기가 맡긴 재산으로 자기의 청지기가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허비한 주인의 소유는 주인의 재산이 아니라 주인이 자기의 소유로 삼기 원하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16:9)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게 바로 주인의 의도였습니다. 여기서 ‘친구’는 일차적으로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수 있는 친구는 주인으로 상징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친구’의 이차적 내용은 이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청지기에게 맡긴 재물이나 은사 등으로 다른 이를 친구로 삼는 행위는 바로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그것을 원한 것입니다. 단순히 재산을 잘 운용해서 자기의 재산을 늘려주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잘 보시면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로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는 것이 주인에게 칭찬받는 일인 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다른 이들에게 빌려주면서 고리대금업을 했습니다.



(눅16:6-7)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당시 기름은 일 년에 백 퍼센트의 이자를 내야 했고 밀은 일 년에 이십오 퍼센트의 이자를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오십 말을 빚진 사람은 백말을 빚진 것이 되고 밀 팔십 석을 빚진 사람은 백석을 빚진 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자를 청지기가 착복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웃들에게 고리를 뜯어 주인의 소유를 불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인의 뜻을 간파하고 그 빚진 자들을 불러 이자의 부분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그 종은 그러한 일을 하면서 주인의 재산에 어떤 손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이자를 깎아 주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행동이 주인의 재산에 이익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재산을 오히려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눅16:8)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 이니라


여기서 주인이 종을 칭찬했다고 하는데 그 ‘에파이네오’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찬양하다(praise)’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이 주인이 원래 의도했던 행동을 함으로 주인이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너에게 원했던 것이 바로 그거야’라고 그의 행동을 찬양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5장의 금 달란트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을 부려 당신을 도와주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말에 순종하여 항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가 종에게 맡긴 자신의 것으로 그 종이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 주인의 평판을 올려주고 주인이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 하는 자들을 친구로 모아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삶이 바로 청지기가 주인의 친구가 되는 삶이니까요. 종이 주인의 친구가 되는 길은 종이 주인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행할 때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요15:13~15)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 이니라


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인의 뜻을 잘 헤아려 그 뜻대로 행하는 자가 주인의 친구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에게 맡겨진 삶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한 것입니다. 이웃을 친구로 사귀어 자기의 친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고 주인의 배를 채워주는 것이 충성된 일인 줄 알고 주인의 재물로 사람들을 오히려 괴롭혔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많은 업적과 열매와 결과를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아 아직 우리 주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소유가 되도록 요구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이 주인이 주신 은사와 재물을 가지고 그것을 불리는 데에만 눈이 어두워서 다른 이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주인의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 분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그 분의 친구들을 흩어 버리는 것이므로 그 주인이 종을 해고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뒤늦게 주인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으로 드디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눅16:10-13)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기 보면 극명한 두 종류의 대조가 등장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그리고 남의 것과 너희의 것, 

그리고 이 땅의 재물과 하나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앞의 것은 전부 이 땅의 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전부 하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재물과 은사로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절대 재물을 숭앙하고 이 땅의 것들로 하나님께 무언가 업적을 내 보이려 하는 것은 성도에게 절대 불가한 삶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5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주인은 반드시 종들을 모아 놓고 셈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셈은 얼마나 이익을 많이 남겼는가에 대한 셈이 아니라 얼마나 주인의 말을 잘 들었는가에 관함 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항상 자신이 맡긴 자신의 소유로 종들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유익하게 하여 그들을 친구로 삼는 삶을 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삶이 자기와 친구가 되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계명의 진수인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으로 가면 확실하게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눅12:42~47)

42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 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3절의 ‘이렇게 하는 것’에서의 ‘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 ‘포이에오’는 ‘창조하다,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맡기신 세상의 힘과 은사들을 동원하여 다른 이웃들을 섬기고 나누어 줄 때 치유와 창조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친구들이 이 땅에서 하는 일입니다.


잘 보세요. 진실하고 충성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주인의 종들에게 때를 따라 (on the right time) 잘 나누어 주어 주인의 평판을 높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이 모든 소유를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그건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 즉 말씀 안에 거함으로 하늘의 모든 풍요를 상징하는 부를 움켜쥔 거부가 되는 모습과 겹쳐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잘 살아서 하나님의 친구들을 치유하고 하나님 친구들의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하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소유로 다른 이들을 오히려 주눅 들게 하고, 피해를 주고 하는 것은 참된 종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호되게 때리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거나 높은 명예를 쌓아서 하나님께 자랑이 되겠다는 생각을 어서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금 달란트처럼 정말 엄청난 것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도구로 쓰이지 않으면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진리를 말할 때조차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엡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참된 것이라 번역이 된 단어가 ‘알레듀오’입니다. ‘진리를 말하다, 진실 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게 진리와 진실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 전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기지 않으면 때로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뿐입니다. 사랑하세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자에게 하늘의 풍요가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들으세요. ‘주 너의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게 바로 우리 주인이 멀리로 떠나시며 우리에게 남기신 유일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게 거룩이며, 그게 자기부인이며, 그게 순종이며, 그게 성숙의 삶인 것입니다.



(고전13:1-3)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렇게 모든 일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 행할 때에 우리는 하늘의 풍요를 상속받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사랑합시다.

계속해서 다음 주에는 왜 하나님이 이삭에게 흉년을 허락하시고 아내를 팔아먹는 시험을 허락하시는지에 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