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73 일상에 순종하지 않는 자의 험악한 삶 (창27:24~29, 창47:8~9)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0

73 일상에 순종하지 않는 자의 험악한 삶

 

 

(창27:24~29, 창47:8~9)

27:24 이삭은 다짐하였다. "네가 정말로 나의 아들 에서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27:25 이삭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네가 사냥하여 온 것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서, 너에게 마음껏 복을 빌어 주겠다." 야곱이 이삭에게 그 요리한 것을 가져다가 주니, 이삭이 그것을 먹었다. 야곱이 또 포도주를 가져다가 따르니, 이삭이 그것을 마셨다.

27: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이리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

27:27 야곱이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삭이 야곱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서,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나의 아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주님께 복받은 밭의 냄새로구나.

27:28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너에게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27:29 여러 민족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는 너의 친척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마다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

47:8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47:9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상을 공(空), 혹은 허(虛)로 봅니다. 그래서 일상에 집착하지 말고 깨달음을 얻어 일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교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도가 사상의 창시자이기도 한 장자(莊子)는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자기가 되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는 호접몽을 이야기합니다. 이것과 저것, 선과 악, 삶과 죽음 등의 구별을 버리고 만물과 자아가 일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끌어 온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도가에서는 일상을 무욕(無欲)·허(虛)·무(無) 등 부정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연에 순응하는 것으로 봅니다.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일상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일상이 전부이고 일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일상이 자기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거나 더 이상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지 못할 때 좌절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멀미나는 일상에서 탈출을 하고자 자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상은 좀 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근한 일상(日常)과 관계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으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의 성숙과 완성에 기여하여 결국에는 선(善)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을 수긍하고, 일상에 만족해야 하며, 일상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일상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 꽃향기’에는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몰라 배회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고독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삶에 멀미를 느낀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 위에 서서 그는 어느 한편으로 넘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는 마치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을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도무지 그의 일상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사내는 마음의 정처를 정하지 못해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정말 자기의 삶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생을 청산할 만큼 모질지도 못합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죽음에 혹은 삶에 입회해주기를 소망합니다. 수면제를 먹고 체리나무 옆 구덩이에 몸을 눕힌 후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누군가가 와서 자기 시신 위에 흙 한 줌 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의 죽음에 입회해 달라는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노인만이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자기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그 노인의 이야기가 이러합니다.

 

"결혼한 직후 내게는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난 미아네를 향해 출발했어요. 그때가 1960년이었습니다. 난 뽕나무 농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어요.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그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어요.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습니다.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어요. 전 행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그때까지도 자고 있더군요. 잠에서 깨어나 그녀도 체리를 먹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난 자살을 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체리 덕분에 생명을 구한 거죠. 체리가 내 생명을 구했어요."

 

그 노인은 삶을 강변하지 않습니다. 심드렁하게,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사내가 삶의 멀미에서 벗어납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거기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일상의 소중함이었습니다. 쉬운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화에는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은유가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맛보는 체리, 그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갖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이제 곧 목을 매달아 죽을 사람이 체리를 따서 먹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는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상을 진지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리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따 먹을 수 있는 흔한 것이었고 그리 소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흔하고 일상인 체리는 삶이 보내는 눈짓이었고, 아이들과의 소통의 통로였으며, 아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매개해주는 육체적 고리였습니다.

그 노인은 그 흔한 일상인 체리를 매개로 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관계 속으로 복귀를 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그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나의 일상의 체리는 이렇게 소중한 역할과 내용을 담고 있던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사내가 자신의 일상도 멀미나고,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이 아닌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비근(卑近)한 일상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멀미를 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지옥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비근한 일상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일상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과 관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멀미나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소중하고 멋진 것으로 재확인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그냥저냥 우연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들로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바다에서 멀미를 하게 되고 그 일상에 치어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도무지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더 나은 무언가로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만큼 일상이 따라오지 못할 때 인간들은 좌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이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도무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도무지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유서를 씁니다. 그것은 ‘난 지금 당장 죽을 거야’하고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의 삶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이제 다시는 나의 일상 속으로 복귀할 수 없고, 다시는 나를 멀미나게 했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 항상 저는 저의 일상과 저에게 허락하신 제 주변의 사람들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깨닫습니다.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 목사 노릇, 사람 노릇, 평소에 그토록 지겹던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들이었는지 저는 제가 쓰는 유서 앞에서 재확인 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상은 우리의 거룩함의 완성에 꼭 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계획을 알게 된 이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일상을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니다. 그 삶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 부르며 그러한 삶을 가리켜 순종하는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배를 우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목표로 삼아 사는 이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일상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혜와 꾀, 사기와 권모술수까지도 동원하여 일상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길 원합니다.

 

바로 야곱의 삶이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이름까지도 ‘속이는 자’입니다. 그 야곱이라는 사람 안에는 구원받기 전의 우리 모두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옛사람에 대한 연정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며 사는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프쉬키코스)까지도 그 야곱이라는 인물은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배를 위하여 세상의 힘을 우상으로 삼아 일상에 순복하지 못하고 세상의 힘과 인기를 추구하는 이들의 삶을 성경은 ‘험악한 삶’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야곱의 삶이 험악한 삶으로 축약이 되는 것입니다.

(창47:9)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잘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복’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언약에 대한 것을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 축복의 언약을 받은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았느냐는 것을 규명하려 합니다. 험악한 삶, 그게 복입니까? 아니라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꼴이 되지요?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험악한 인생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까요?

 

성경은 그러한 험악한 삶을 통하여 맺어지게 되는 열매를 ‘복’이라 하지, 목적도 없는 형통과 번영을 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약속하시는 복은 영적인 것이지 절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은 자들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보면 이러합니다.

 

 

(창27:28-29)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야곱은 결국 알거지가 되어서 애굽으로 쫓겨 가는 꼴이 되었고 세상의 왕이라 하는 바로 앞에서 거지꼴로 그를 축복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승승장구하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일상에 순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혜와 꾀,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자기를 숭배하던 자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이 주신 일상에 만족하는 자로 성숙이 되어지는 것을 ‘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야 곱에게 약속된 기름진 땅은 하늘의 풍성한 땅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에게 열국이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그가 세상의 왕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거지꼴로 이 세상을 마치게 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애굽 왕 바로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를 축복할 수 있는 자로 설 수 있게 된다는 영적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복을 추구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왕이 되고 이 세상의 힘을 쌓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할 복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꾀, 그리고 자신의 욕심과 야망에 이끌려 세상의 힘의 원리가 정해 놓은 세상 적 가치를 좇는 자들을 우상 숭배자라 부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세상 가치의 소유에 둡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축내는 그 어떤 것도 용납을 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재산이나 인기 축적에 도움이 안 되면 가차 없이 쫓아내는 것이 세상의 힘을 좇는 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러한 욕심이 자기 뜻대로 채워지지 않을 때 삶의 멀미 속에서 좌절하고 자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소유를 모으고 지켜내는,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당시에는 자신에게 유익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을 자해하는 것임을 성경은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무언가를 구하면서 자해를 한 사건이 있었지요?

 

 

(왕상18:26~29) 26그들은 가져 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27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라.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느냐!"

28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29한낮이 지나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엘리야와 우상을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 오십 명이 갈멜 산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전쟁의 결과를 잘 아시지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대표로 갈멜 산에 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 오십 명은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다가 결국에는 참수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좇는 자들의 실존이며 결국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을 잘 기억해 두세요. 왜 야곱의 이야기를 공부하는데 열왕기서의 내용을 찾아보아야 하는지를 여러분은 곧 아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곳 한 곳을 더 보겠습니다.

 

 

(사65:1~5) 1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2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3 이 백성은 동산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며, 벽돌 제단 위에 분향하여, 내 앞에서 늘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백성이다. 4 그들은 밤마다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들에게 물어 본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이방 제삿 상에 올랐던 고기 국물을 마신다. 5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멀찍이 서 있어라, 우리는 거룩하니, 너희가 우리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고 말하는 백성이다.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여기도 보시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인 이스라엘이 무덤 사이로 다니며(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삶이 죽은 자의 삶과 방불한 것을 상징), 죽은 자들의 영에게 점을 치며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돼지고기는 하나님께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돼지고기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머릿속에 잘 새겨 보세요. 신약의 어딘가에 이 두 이야기를 합해놓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그게 어디일까요?

 

 

(막5:1~17)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 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17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 하더라

 

마치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이사야서와 열왕기 서를 합쳐 놓은 것 같지요? 귀신 들린 사람이 자기의 몸을 해하고 있고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추구하는 부정함의 상징인 돼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멜 산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귀신들린 돼지 떼들이 바다에 빠져 몰살당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인 야곱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열왕기서, 이사야서를 거쳐 신약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까지 연결을 하는 것은 이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바로 야곱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야곱은 그의 평생을 험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말은 그의 삶이 자신을 자해하는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 나님께서 부정한 것이라 말씀하신 돼지로 상징되는 우상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 온갖 사기와 권모술수로 그의 삶을 점철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치 무덤 사이에서 사는 것처럼 죽음과 방불한 힘겨운 삶을 살았으며 자신을 자해하는 자처럼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벌거벗고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그 귀신들린 사람처럼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알지도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얍복 강가에서 옛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체 과정이 이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2절을 보시면 성경이 그 광인을 가리켜 ‘엔 프뉴마티 아카따르토, 귀신 들린 자’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귀신의 다스림 안에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단어를 잘 풀어 놓은 곳이 있는데 그 곳이 에베소서 2장입니다.

 

 

(엡2:1-2)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성경은 이렇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가리켜 ‘귀신 들린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거라사에서 즉음을 상징하는 무덤 사이로 다니다가 주님 앞에 나타난 귀신 들린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배 만을 위해 사는 모든 죄인들을 총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서신으로 가면 조금 더 분명해 집니다.

 

 

(요일3:8)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은 죄인들을 가리켜 마귀에게 속한 자, 즉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무덤 사이에 거하는 광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이사야서에서도 보았지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무덤 사이에서 행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귀신들린 자들을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힘인 우상을 상징하는 돼지 떼와 함께 저주의 바다에 넣어 몰살을 시키시고 그를 그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는 구속의 이야기가 바로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이며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죽고 그들이 그 귀신에게서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로 다시 가보시면 그 광인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이 예수님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요구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죄인들도 똑같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막5:17)

17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 하더라

 

귀신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이 똑같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귀신에게 속하여 귀신의 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체가 다 마귀의 세력인 것입니다. 그 마귀의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엄청난 힘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도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총칭하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이 ‘군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세상 권세 잡은 마귀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 세상의 힘을 제시하며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행복에 이르게 할 메시아다’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충분히 매력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힘인 우상들을 바다에 쳐 넣어 몰살을 시켜버린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무덤 사이에서 벌거벗고 괴상한 짓을 행하던 괴력의 사나이가 귀신이 들렸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멀쩡하게 새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앉아있는 그 사람을 보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주님의 권능 또한 확인한 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 자기 마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돼지 떼에 들어간 귀신들이 돼지들을 물에 넣어 몰살을 시키고는 거기에서 나와 그 마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물에 빠진다고 죽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에게 떠나달라고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그 귀신들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을 해야 맞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은 주님에게 자기 마을을 떠나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귀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기 소유가 축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귀신과 함께 살지언정 자기들의 소유를 지키겠다는 것이지요. 귀신과 함께 마을에서 살 때는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자기들 소유에 아무런 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 귀신을 쫓아내자 자기들의 재산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 자기들이 목숨처럼 여기던 세상의 힘과 가치를 부정하고 기각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하나님을 쫓아 버립니다. 그런 게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그런 예수는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국 맘몬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게 번영의 신학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세상의 힘인 돼지 떼와 아무 상관없이 그 분을 좇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복음의 내용인 담긴 것입니다.

여러분, 막강한 군대가 모두 물에 빠져 몰살이 되는 장면하면 어느 장면이 기억나세요? 출애굽 홍해 사건이 기억나시지요? 거기에서 세상과 우상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서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뒤쫓던 애굽 군대가 모두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모세에게 속하여 그 물에 빠져 죽고 그들은 새 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전10:1-2)

1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사건과 거라사 광인의 사건을 비교해 보세요. 그 둘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거라사 광인이 물에 빠져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살려내시고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세상의 우상들을 함께 싸잡아 몰살을 시켜 버리시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과 한가지로 모두다 홍해에 빠져 죽었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 안에 넣으셔서 모세를 죽이시고 그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고린도 전서 10장의 세례의 이야기입니다. 그 현실은 자연스럽게 골고다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귀신 들려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을 해치며 무덤가에서 살던 자들이었고 결국에는 저주의 불바다에 모두 빠져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를 주님 안에 넣어서 주님을 죽이시고 다시 살려 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려내신 것이고 그러한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마귀의 세력이 모두 몰살이 된 것입니다. 물론 마귀의 세력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를 미혹하고 세상을 죄와 허물로 죽여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력의 결국은 이미 십자가에서 정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 마귀의 세력은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모든 우상들과 함께 불바다에 빠져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D-day는 왔고 우리는 종국의 V-day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지 떼의 죽음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마셔야 할 것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기적 앞에는 항상 십자가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뜰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갈 때, 열 두해 혈루 증 앓던 여인의 병이 나을 때, 삼십 팔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 걸을 때, 주님은 자신이 그들이 갖고 있던 사망의 증상들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기적 앞에 십자가가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망과 싸우시는 여호와의 전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귀의 세력과 이 세상의 우상들과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전쟁이 바로 구속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출14:13-14)’하시고는 홀로 애굽을 바다에 넣어 몰살 시키신 것처럼, 갈멜 산에서 우상을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 오십 명을 모두 몰살시키신 것이며, 그처럼 귀신의 떼를 돼지 떼에 넣어 바다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생애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이 있었지요? 어딥니까?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사기꾼 야곱과 전쟁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환도 뼈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인(全人), 인간의 전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신 그 순간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을 목적지로 하여 그의 옛사람인 야곱을 죽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잔재는 끊임없이 반항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여전히 우리를 미혹하는 옛사람을 죽이시는 전쟁을 하시는데 그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참으로 힘이 든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서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다른 말로 일상에 순종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힘을 쌓아 자신의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려 하는 모든 이들이 험악한 전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 안에서 그와 전쟁을 하셨던 것이고 결국은 그를 얍복 강가에서 완전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 것은 죽어야 할 야곱 대신에 누군가가 대신 그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 사기꾼 야곱을 붙들고 있는 마귀의 세력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왕으로 살아나게 되는 사건이 바로 야곱의 얍복 강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를 품고 있는 것이며, 여전히 우상에 관심을 두고 사는 미성숙한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아울러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무덤 사이에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죽은 자들처럼 사는 자들이며 그러한 삶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드는 해가되는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야곱의 본문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 사건과 갈멜 산의 전쟁과 거라사 광인의 구원 사건과 십자가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건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며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바로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41:14)

14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택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자기의 배만을 위해 속이고, 사기치고,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가슴 속으로 뚫고 들어가심으로 그 안에서 여호와의 전쟁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결국은 우리가 의지하던 이 세상의 모든 힘이 기각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로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출발이 처음부터 이렇게 삐걱 거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마는 그런 이기적인 야곱을 얍복 강가의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여호와의 전쟁, 다른 말로 당신의 백성들을 자신의 배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고자 자신들의 일상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는 전쟁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갈멜 산에서, 거라사에서 귀신들과 우상들을 모조리 몰살시키심으로 해서 그들의 무력함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진짜 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교회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힘들만을 추구하며 고지 꼭대기를 향해서 전진하시겠습니까? 그것들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41:21~25)

21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한 증거를 보이라 22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23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25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

 

여러분, 이렇게 야곱이 평생을 좇았던 이 세상의 힘들은 신기루처럼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험악하게 만드는 우상이며 자해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상의 힘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잡혀 옳은 곳에 잘 쓰이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보다 우위에 앉아 있다면 그 때는 사정이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할수록 위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아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그러한 세상의 힘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게 일상에 순종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세요. 그리고 그 일상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저는 작년과 올해 코스타에서 좋은 영적 동지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고지론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목사님과 또 그 분을 지지하는 많은 강사님들,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앉아있는 강당에서 그 분들의 설교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알 수없는 어떤 강사들이 나와서는 서슴없이 그 고지 론의 허구를 질타했습니다. 서로의 설교를 그렇게 들은 저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식당 앞에서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때부터 교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을 하기도 하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만들어 놓은 자료들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수시로 전화를 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심지어는 서로의 설교 원고를 미리 바꾸어서 점검을 해 주는 사이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소 힘들고 어려운 저의 설교 원고가 그 분들의 조언으로 조금은 쉽게 변할 수 있었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치밀한 논리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담아내는 설교로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하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조직신학적 성경해석에 아주 뛰어나십니다. 조직신학적 설교는 회중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깔끔하고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들은 저의 설교 원고를 보시고는 조직신학적 성경 해석을 첨가해서 윤활유를 뿌려주시기도 하고 본인들이 설교에 인용을 했던 여러 가지 예화들을 추천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한 저는 그 분들의 설교 원고에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들을 연결시키는 성경 신학적 해석을 첨가해서 적어 넣어 다시 보내드리곤 합니다.

 

그 중 어떤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고 계시고 어떤 목사님은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계십니다. 그 책들은 이미 제가 강해를 끝낸 것들이기 때문에 제 설교 원고를 그대로 다 보내드리고 거기에다 지금 제가 다시 그 책을 강해한다면 이러저러한 관점을 보태고 싶다는 첨언까지 해서 보내드립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분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제 설교와 흡사한 부분들이 많이 나오고 저의 설교에서도 그 분들의 예화가 쓰여 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희들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저는 오늘 설교할 이 설교원고를 거의 다 작성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중 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단순한 안부전화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제가 개인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한동안 말이 없으셨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중에는 엉엉하고 통곡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후배가 자기가 지나온 힘든 길을 지나고 있는 것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우신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우시다가 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그 장애를 고쳐달라고 떼를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서 떠나 큰 교회로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기 일쑤이셨다고 하셨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늘 자신의 삶에 불만이셨고 늘 뭔가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서야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모든 현실과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 일상이 자신의 거룩에 꼭 필요한 과정이요 방법임을 깨닫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일상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는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인정하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300불을 보내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큰 도움은 안 될 테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요. 마치 하나님께서 저의 설교원고에 확인도장을 찍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서 눈을 돌려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야곱처럼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많은 것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그 인생이 험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삶이고 그게 귀신의 삶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세요.

 

신기루에 불과한 이 세상 우상들에게 속아 정작 중요한 여러분의 소중한 일상을 불만과 고통과 슬픔으로 칠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지배하던 그 귀신의 세력과 그들이 미끼로 내어놓는 세상의 우상들을 저주의 물속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