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74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27:1~4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1

74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27:1~40)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못하노니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27:5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27:6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27: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27:9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27:10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27: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27: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27: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27:15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27: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27: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27: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27: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7: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7: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7: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7: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7: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7: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27: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7:32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27: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27:35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27:36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27: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것이며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이런 이야기가 꼭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내용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차남이 장남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면, 장남은 자기 동생이 가로챈 아버지의 축복은 무효라며 다시 자신에게 축복을 하라고 방성대곡을 하는, 마치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과연 그렇게 속여서 받은 축복도 효과가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저는 혼자서 답을 내리길 그렇게 도득(盜得)한 축복은 하나님도 무효로 처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속여서 가로챈 그 축복으로 꽤 험악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이 보여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을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험악하게 끝나면 안 되는 것이잖아요?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서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간 것이라면 왜 이삭은 야곱에게 한 축복을 무효라 선언하고 장자인 에서에게 다시 축복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두려워했을까?’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번 입 밖으로 내 뱉어 지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한 것인가요? 사실 성경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항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러한 작은 질문들은 아주 쉽게 해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그리고 교회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가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나있던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시당했을 때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고픈 인간들은 가장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라는 말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는 복음을 인간들에게 제시하셨을 때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처럼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당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 증명에 혈안이 된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어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 해다 주는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하는 이삭이고, 역시 쌍둥이가 복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음에도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동원하여 장자권을 도득(盜得)하도록 시킨 리브가이며, 그 어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광분하는 에서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렇게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오늘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옵니다.(27-29) 잘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은 땅에 관한 축복과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은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당신의 언약을 이삭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15:18~21)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

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창17:1~8)

1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2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지라

5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 이니라

6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22:17~18)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을 약속하고 계시고 그와 그 후손이 그 땅에서 승리자로서, 왕 노릇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언약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이 점진적 형태로 지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로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작정 그가 머물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목적지를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셔서 어떤 땅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인류 최초의 갈대아 문명은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만들어낸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문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진짜 복된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최초의 계시로 주어졌을 때에는 아주 모호하게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시지 않은 채 그를 끌어내시고는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 ‘여기가 그 땅이니라’하고 그 땅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오늘 본문에서는 기름지고 풍요한 땅으로 좀 더 명확하게 계시되는 것이고, 그렇게 점점 밝히 계시가 되어지다가 요한 계시록에 이르러서는 그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땅은 기름진 땅이며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한 땅이라 하십니다. 출애굽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창세기의 어떤 부분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대 반전의 모습입니다.



(창3:17~19)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통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땅이 아닌 기름지고 복된 땅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구이언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침투해 들어오게 될 것임이 미리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받은 땅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저주받은 땅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땅으로 창세전에 택해진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옮기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을 성경이 점진적으로 계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땅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중에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에 관한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담 안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결국 열국의 왕으로, 통치자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것이 지금 야곱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언약인 것입니다. 그 약속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미리 힌트 되어있습니다.



(창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승리는 바로 교회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백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계승되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자체가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가 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저주와 사망의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죄의 머리를 밟게 하시고 하늘의 풍요가 충만히 넘치는 약속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이 탈취하여 도득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과 축복의 수혜자는 그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장자인 에서가 아닌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 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야곱이 도둑질해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유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자칫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사기를 쳐서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프래그머티즘이나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구절로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거기에 대한 오해를 더하는 에피소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마을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한 중풍병자와 그를 침상에 들고 온 그의 친구들이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침상을 아래로 내립니다. 그 때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기다리건 말건 새치기를 하거나, 남의 집 지붕을 마음대로 뜯어내도 괜찮다는 식의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앞에 온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사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말을 참람하다고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가 사해졌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쉬우냐?’고 반문하시면서 ‘내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도덕과 질서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온 것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난 그런 것 해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죄를 사해주러 온 하나님이다’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풍병자는 남의 집 지붕을 뜯으면서까지 열심을 부려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이미 들어 있던 사람이었기에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롬9:11~13)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도 그 축복이 유효 한가 아닌가?’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기특한 집념’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될 수 없으며 그 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좀 더 점진적 그림으로 보여 집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탈취하여 취한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거쳐 예수에게로, 또 예수에게서 나와 교회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축복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이 되는지 까지 연결을 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시작이 되었지요?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삶을 살다가 그 복을 아래로 흘려보냈던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삶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가나안 방백들을 모두 몰아내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부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도록,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역시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 왕 때에 만개합니다. 다윗 왕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일경이 모두 이스라엘의 땅이 되고 그 땅에는 은과 금이 길에 구르는 돌처럼 흔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서 모두 성취가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수시로 가나안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몽땅 내몰기도 하셨습니다. 


마치 야곱의 험악한 삶과 방불하지요?

그러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의 인생과 역사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삼하7:12-15)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후손’에 관한 예언이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그 후손에게서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이라는 약속의 후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다른 어떤 후손에게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말씀 중에 특이한 것은 그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계시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처음 등장한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한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나타난 그 후손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3:16)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시고 가르치시면서 기필코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삼으시겠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하신 분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그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사무엘서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사람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셔서 아들을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킴과 동시에 또 다른 어떤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지요?



(롬4:16~17)

16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는 후손이 누구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교회를 ‘후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되어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아들을 삼으셔서 죄를 밟아 뭉개고 하늘을 통치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생애가 담고 있는 내용이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도득한 축복의 내용인 것이며, 창세기 3장 15절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계21:7)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명확하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후손’ 즉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 분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승리’라는 이름을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그 ‘승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어졌지요? 하나님이 죽어야 할 야곱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승리, 이김’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마치 주말 드라마의 내용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 내용은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과 구원의 과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하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후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받은 교회가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십니까?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그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한 그들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로 택해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신7:7) 마찬가지로 교회의 선택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지만 결국 빈손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재산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풍성한 소산과 기름진 땅은커녕 아예 고향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약속된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은 이 땅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수시로 가나안 땅을 비워주어야 했고 수시로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고자 했던 땅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소산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야곱의 공로가 전무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심과 죽으심의 은혜만이 유효했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자손들에게로 계승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유익을 이렇게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롬9:4-5)

4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과 율법과 제사 제도와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부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졌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유효한 것처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10:5~6)

5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5:22~26)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는 복음의 적용 대상이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이 됩니다.



(행1:8)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율법으로 구원을 받던 세대와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세대가 분리되어 존재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는 복음의 통로, 즉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개인을 지칭할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서 탄생하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는 이 땅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승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야곱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승리로 끝내는지를 보면 되겠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의 ‘승리’가 어떻게 야곱의 인생의 ‘승리’로 이어지는지 보세요.

오늘 본문 창세기 27장은 창세기 48장에서 결론이 납니다.



(창48:17-20)

17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 세웠더라


어떠세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취향과 욕심에 이끌려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8장에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장자인 므낫세를 뒤로 물리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리는 완전히 길들여진 말 잘 듣는 양 같은 야곱이 나옵니다. 그는 그렇게 손자들과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긴 뒤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결국이며, 그게 바로 성도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야곱으로 지어지는 그 과정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장장 스물두 장을 할애하여 기록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과 본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은 야곱처럼 자신의 뜻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기와 권모술수까지도 동원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참 ‘후손’의 삶이 예수님의 삶 속에 확실하게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빌2:5~11)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이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장의 ‘승리’와 오늘 본문의 열 왕이 굴복하는 ‘통치권’이 비로소 예수 안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의 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하늘의 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비결이 뭡니까?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그게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기름진 땅과 하늘의 풍성한 소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목숨 바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바로 그 언약의 상속자이니까요.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자권을 계승하는 당신의 영적 장자들인 교회를 가시와 엉겅퀴의 땅에서 건져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시키실 것을 창세전부터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여러분, 우리 성도의 목적지는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빠져나와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늘의 가치를 참 가치로 삼아 이 세상을 조롱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힘의 원리와 번영의 신학과 고지론 같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이 모으면 그게 장땡입니다. 기복주의든 신비주의든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의 힘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힘을 약속해 주는 이상한 하나님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거짓말을 전합니다.



(딤전4:3-5)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주님은 그 때를 마지막 때라 하셨습니다.


(막13:6,14~19)

6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15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 지어다

17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자신의 사욕을 버리고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멸망의 가증한 것인,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번영의 신학 등이 앉아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이 사냥한 고기의 유혹에 넘어가 초개처럼 여겼던 이삭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어떤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주술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 것들을 받고 신의 복을 빌어주는 무당 짓거리가 약속의 자손 이삭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치욕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 짓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도망가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여러분,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세요. 여러분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겨내라는 하나님의 역설을 몸으로 살아내셔야 하는 성도입니다. 힘을 빼세요. 순종하십시오. 그게 우리의 목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