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왜 야곱인가?(I)
(창28:1~9)
28: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8: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8:5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28: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28: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28: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 환상이 담고 있는 내용과 야곱을 좇아가시며 그를 축복하시어 결국 그를 벧엘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앞부분으로 돌아와 왜 하나님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는가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정론에 관해 여러 차례 공부를 했는데 오늘이 그 예정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 9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택하셨음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롬9:10-13)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확인시키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13절의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에 쓰인 동사 ‘헤가페사, 헤미세사’는 모두 과거형입니다.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미워할 자들이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말라기에서 인용을 해다가 쓴 말입니다.
(말1:1-5)
1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에 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잘 보시면 여기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창세기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에돔이라는 나라의 선택과 유기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이야기였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으로 담고 있던 나라이고 에돔은 하나님 나라 밖의 유기된 자들을 대표하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의 선택과, 하나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죄인들의 유기의 이야기를 상징적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6절 이하로 가면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음이 확실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롬9:6~9)
6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담으시려 했던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 민족 자체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씨도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고 밝힘으로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믿음의 후손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에 확인 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도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구별된 무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선택과 유기에 속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삭과 이스마엘 때부터 예시되어져 왔던 것임을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유기시키시고 이삭을 택한 것과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유기시키신 것, 그리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에돔을 유기시키신 것은 이스라엘이 상징적으로 담고 있던 교회의 선택과 에돔이 상징적으로 담고 있던 세상 죄인들의 유기에 대한 이야기였음이 분명해 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유기시키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교회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작은 그림인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시 한 번 그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인간 측에서의 어떤 자격과 조건, 열심이나 노력 등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되어진 것이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엡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로마서 9장 11절의 이삭의 선택에 쓰인 똑같은 단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야곱과 에서, 이스라엘과 에돔의 선택과 유기의 이야기가 교회와 죄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명확하지요?
그런데 조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구원할 자와 유기될 자들을 예정하셔서 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살게 하시다가 어떤 무리는 천국으로, 어떤 무리는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건 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유기되도록 작정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처음 나면서부터 유기될 자로 예정되어져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지옥에 가야해요. 거기서 백 년이나 천 년 정도가 아닌 영원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그렇게 작정해 놓으시고 그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정당합니까? 거기에 대해 바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9:14~24)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 이로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 하느뇨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점점 더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23절에 보면 교회를 가리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긍휼을 받도록 하나님에 의해 예비 되어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영광을 주시려고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시면 그렇게 당신의 뜻에 따라 구원할 자를 미리 정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강퍅케 만드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강퍅하게 만들어서 자기 목적에 사용만 하고는 지옥에 던져 버린다는 말입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해서만 집중하도록 하지요.
갑자기 하나님이 너무 고집스럽고 독선적이며 표독스러운 영감님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태 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 지옥에 갈 거야’하고 열심히 지옥을 향해 달려간 것도 아닌데 지옥에 가도록 창조가 되어서 엉겁결에 태어났다가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타는 불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과 나면서부터 천국에 가도록 창조가 되어서 살인과 강도짓도 불사하며 악하게 살던 사람이 막판에 예수님과 낙원으로 들어가는 그런 일이 과연 정당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정론을 잘 정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시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는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둘로 갈리는데 타락 전 선택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전에 이미 선택해 놓으셨다는 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타락까지도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타락 후 선택설은 하나님도 인간이 타락할 것을 모르고 계셨다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급히 그 후에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전자인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합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이 성경에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는지 볼까요? 먼저 첫 번째 약속의 후손인 이삭의 탄생을 성경이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창17:17~19)
17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 하나이다
19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 도저히 인간의 생식 방법으로는 자손의 탄생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삭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인간의 태로는 태어날 수없는 지경에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이 생존케 한 자인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모두 태어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 둘 중에 한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는 내 자식이다, 이 아이는 이스마엘 하고는 다르다’하고 결정하신 뒤에 이 땅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 본 것처럼 야곱도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어머니의 복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였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모두 이 땅에 나온 뒤에 그 중에 하나를 고르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이 나중에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을 내다보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걸 예지 예정설이라 하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요한복음 강해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안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제가 언약의 언어로 그 단어를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요한복음 10장 강해 말씀을 다시 들어보세요.
그렇게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지목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같은 뱃속에 있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사람은 유기될 사람으로 이미 결정이 되어진 상태로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땠는지 보겠습니다.
(갈1:15~16)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이 자신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도로, 성도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사도로 쓰기 위해 ‘사도용’으로 만드신 것이지 이리저리 사도로 쓸 사람을 찾다가 자신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기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부여받은 사도직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미 받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열심히 핍박하고 있던 중에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구원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사도가 될 것임이 결정되어져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도로 쓰실 어떤 사람을 미리 하늘에서 준비하여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이지 천방지축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기독교를 핍박하던 그를 중도에 찾아가셔서 회심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땠는지 보겠습니다.
(렘1:4-8)
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 하나이다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예레미야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쓰시려고 이미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때까지 자기가 그렇게 복중에서 선지자로 선택을 받은 사람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깜짝 놀라서 ‘저는 너무 어립니다.’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하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 복중에서부터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사실 너는 내가 쓰려고 창세전에 구별하여 이 세상에 보낸 나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의 사도로 복중에서 택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 보내진 자인지 까맣게 모르고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가 이방의 사도로 쓰려고 창세전에 구별하여 이 땅에 내려 보낸 사람이야’하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는 그때 비로소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서 성도로, 사도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가요? 예수님은 서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지만 그 분은 창세전에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을만한 사람을 이 땅에서 찾다가 예수님을 찾아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사람으로 결정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 태어난 많은 무리 중에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죄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인류로 작정이 되어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중에 어떤 무리를 선택해서 그들을 고쳐서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별개로 이제 절대 타락할 수없는 한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여 영원한 당신의 나라에 들이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게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구속사는 하나님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반란에 하나님께서 허둥지둥 대응하시며 아들을 보내셔서 수습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창조가 될 것인지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담 속에서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유기가 될 모든 인간들 중에서 일부가 선택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는 완전히 별개의 새로운 인류가 사망으로 결론지어질 이 세상에 잠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왔다가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많은 사망의 증상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들에게 교육용으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조성하셨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살인은 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거짓말도 역시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신 것 기억나시지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살 시키도록 집단학살을 명령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말을 듣는 것이 선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것이라면 그 자체가 선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단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 적용이 될 수 없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하여 사망으로 던져질 죄인들과는 태어나기 전부터 완전히 구별된 다른 인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 들어있던 타락한 인류 가운데 살아날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2:17)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인간은 그 말씀을 어겼고 결국 사망이 모든 인류를 덮쳐버린 것입니다.
(롬5:12)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3:10-18)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로 말미암아 첫 번째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게 우리 성도들과 완전히 다른, 사망으로 유기될 인류의 상태이며 운명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모두 죽어야 할 죄인들로 탄생되는 이들이 바로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류로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유기될 자로 선택이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이 들으면 노발대발할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존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티끌이며 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엄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일 때 그러한 것이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먼지일 뿐입니다.
(사40:17)
17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고 빈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인은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의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태어나기 전부터 의인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구원은 죄 속에서 모두 죽어야 할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첫 번째 아담 안에 있는 죽어야 할 인류와 구별된 마지막 아담이라 불리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온 사람 중에 유일한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시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인으로 구별된 새로운 인류가 잠시 죄인의 옷을 입고 이 세상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 말을 들으시고 ‘그럼 우리는 날 때부터 의인인 말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분명 우리는 죄인의 몸을 빌려 죄인으로,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게 원죄입니다. 원죄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다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는 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안고 있는 원죄는 새로운 피조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쓰는 것일 뿐입니다. 원죄의 영향으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며 악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씌워놓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원죄를 입고 태어나, 그 원죄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를 짓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그들은 그 죄와는 상관없는 자로 회복되기로 결정되어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가 죄인들의 본성을 경험해야 하고 그 속에서 태어나야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그 원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로 새롭게 탄생이 되는 새로운 인류라는 것을 인생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 분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상태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와 정 반대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어두움과 패역함과 추악함을 처절하게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어떠한 은혜로 새로운 인류로 창조되게 되었는지를 십자가를 통해 확실히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반문 하실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자존감과 성도의 위상이 많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죄인들 속에서 무작위로 선택이 되어진 것과 처음부터 새로운 인류로 구별이 되어 죄인들의 세상에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왔다가 가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성도는 모두 다 죽어야 할 아담 안의 죄인들 중에 선택되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인류로 창조되기로 작정이 된 완전히 다른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역사 속에 들어와 찰나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이 땅을 잠시 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재벌 회장들이 자기의 유업을 물려줄 아들에게 공사판 일부터 시작하여 단계별로 일을 배우게 하는 경우와 흡사한 것입니다. 공 사판에서 일하는 재벌회장 아들이 공사판에서 일을 할 당시에 겉으로 나타난 그의 신분은 공사판 인부이지만 그의 진짜 신분은 차기 재벌 회장인 것처럼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들은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의 유업을 잘 받기 위해 잠시 입고 있는 가짜 옷이란 말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못 배운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부자의 옷을 입고 있건, 가난한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잘 생긴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못 생긴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옷을 입고 있건 그건 전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울 때까지 잠시 입고 있다가 훌훌 벗어버리고 떠날 가짜 옷들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진짜 실체는 하늘 왕의 왕자, 공주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삶을 배우고 진정으로 그 삶을 소망하게 되는 훈련장이 바로 이 역사와 우주라는 공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엄청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최고 목표를 공사판 십장이 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배울 것 배우고 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아야지요. 그런데 잠시 교육받으러 나온 이 세상에서 대장이 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즉 죄를 지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될 때 그 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건 그야 말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야말로 자폭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통과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붙들고 계시지 않는다면, 다 른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창조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옛 사람처럼 죄 속에서 뒹굴다가 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예정하여 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을 함께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성도는 부활의 육신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 채 문화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각자의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일들이 ‘나’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행복과 만족과 참된 기쁨이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그 죄 된 육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고 새로운 몸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진짜 몸인 그 새로운 몸을 주시기 전에 가짜 몸을 입고 역사를 통과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 올려드리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실체는 우리가 껍질로 입고 있는 이 옛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인 ‘나’의 실체인 것입니다.
(갈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입혀놓으신 가짜 옷, 옛 사람을 한 꺼풀 한 꺼풀 벗어 버리면서 하나님께서 완성해서 우리에게 입혀주실 하나님 백성의 진짜 신분을 깨닫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시간 속에서 볼 때는 우리가 지어져 가고 완성 되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어져 간다, 완성되어져 간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이스라엘로 선택이 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야곱이라는 가짜 옷을 통과하면서 진짜 이스라엘의 신분을 찾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회귀해 가는 길에 가짜 옷을 입고 인생을 통과하며 저지른 모든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도말해 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는 방식을 그 십자가를 통하여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아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에게서 토해 내어지는 모든 죄와 허물들을 예수님이 앞서 가시며 그 모든 것들을 도말해 버리시는 방식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나’됨은 ‘나’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나’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 아기로 오셔서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전 인생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모두 지켜내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새 인류가 입을 진짜 새 옷의 삶을 예수님이 모두 다 살아내셔서 그들에게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게 십자가가 품고 있는 복음이며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시는 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녀들의 탄생의 원리와 존재 방식과 생활원리를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새로운 피조물들의 삶은 우리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전가 받은 예수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것을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십자가의 삶이 예수의 삶이었던 것처럼 천국 백성인 우리 성도의 삶도 영원한 십자가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가 살면서 가끔가다 한 번씩 지는 불편한 짐이 아니라 우리 성도가 영원히 지고 가야 하는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우리의 삶으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는데 그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인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옛 사람의 몸을 통과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이 난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의 결국을 삶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걸 다 경험하고 체험해서 배워야 하니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그 인생 뒤에 약속된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평안과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에서 그걸 찾으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어제 구역장 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집사님께서 ‘목사님, 왜 제 인생은 이렇게 지옥일 때가 많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의 인생이 지옥일 때가 많으세요? 천국일 때가 많으세요. 가짜 옷을 입고 사시는 여러분의 인생이 지옥일 때가 더 많아야 정상입니다. 가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삶이 매일 매일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가 입은 옛 사람의 옷이 가짜 옷이 아니라 진짜 옷임에 틀림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그 가짜 옷의 삶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며 진짜 실체로의 회귀를 소망하는 사람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안식과 평안은 지옥과 방불한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지옥 같은 환경이 바뀌어져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여 다른 이들을 험담하고 공격하고 밟아서 나의 유익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살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보잘 것 없으며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를 경험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내가 이만큼 훌륭하게 성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참된 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죄에 노출 되어 있는 것이고, 수시로 죄를 짓는 것이고, 수시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의 의지는 왜 이렇게 허약한가? 도대체 왜 나는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가? 도대체 왜 나는 이웃을 이토록 미워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실수를 향해 불도우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복음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허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계속 폭로 당해가면서 가짜 옷인 ‘나’, 옛 사람인 ‘나’를 부정하고 부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안에서 살고 계신 예수가 조금씩 드러나며 작은 예수로서의 진짜 ‘나’가 조금씩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실수투성이 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이렇게 죄로 점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잘 참으시고 잘 견디세요.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엄청난 분이신지 몰랐어요.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자이고 공주인데 이 땅에 잠시 내려와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기 위한 교육을 받고 계신 분인지 몰랐어요. 잘 참고 견디다가 우리 아버지 나라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십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이 세상에 잠시 파견된 사람이란 말인가?’하고 깜짝 놀라세요.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니 창세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새로운 인류입니다. 남의 땅에서 대장되려 하지 마시고 잘 배우셔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준비를 하세요. 경기가 어렵다고요? 괜찮습니다. 이 나라는 여러분 나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불경기가 없습니다. 불경기를 통해 여러분이 배울 것만 잘 배우시면 됩니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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