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0 - 믿음, 그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 (창30:1~2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5

80 - 믿음, 그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

 

 

 

(창30:1~21)

30:1 라헬은 자기와 야곱 사이에 아이가 없으므로, 언니를 시새우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 좀 낳게 해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30:2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임신할 수 없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30:3 라헬이 말하였다. "나에게 몸종 빌하가 있어요. 빌하와 동침하셔요. 그가 아이를 낳아서 나에게 안겨 주면, 빌하의 몸을 빌려서 나도 당신의 집안을 이어나가겠어요."

30:4 라헬이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하니, 야곱이 빌하와 동침하였다.

30:5 마침내 빌하가 임신을 하여, 야곱과 빌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30:6 라헬은 "하나님이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려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1)단이라고 하였다. '그가 판단하였다'

30:7 라헬의 몸종인 빌하가 또 임신을 하여 야곱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로 아들을 낳았다.

30:8 라헬은 "내가 언니와 크게 2)겨루어서, 마침내 이겼다"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납달리라고 하였다. 히, '닙달'

30:9 레아는, 자기가 다시는 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기의 몸종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30:10 레아의 몸종 실바와 야곱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30:11 레아는 "내가 복을 받았구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3)갓이라고 하였다. '행운'

30:12 레아의 몸종 실바와 야곱 사이에서 두 번째로 아들이 태어났다.

30:13 레아는 "행복하구나, 여인들이 나를 행복하다고 말하리라"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4)아셀이라고 하였다. '행복'

30:14 보리를 거두어들일 때에, 르우벤이 들에 나갔다가, 자귀나무를 발견하여,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다 주니, 라헬이 레아에게 말하였다. "언니,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조금만 나눠 줘요."

30:15 레아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내 남편을 차지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냐? 그래서 내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까지 가져 가려는 것이냐?" 라헬이 말하였다. "좋아요. 그럼, 언니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나에게 주어요. 그 대신에 오늘 밤에는 그이가 언니하고 함께 자도록 하지요."

30:16 그 날 저녁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레아가 그를 맞으러 나가서 말하였다. "당신은 오늘 밤에는 나의 방으로 드셔야 해요. 나의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라헬에게 주고, 그 대신에 당신이 나의 방으로 드시게 하기로 했어요." 그 날 밤에 야곱은 레아와 함께 잤다.

30:17 하나님이 레아의 호소를 들어 주셔서, 레아가 임신을 하였고, 야곱과의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30:18 레아는 "내가 나의 몸종을 나의 남편에게 준 5)값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하였다. 히, '사갈'

30:19 레아가 다시 임신을 하여서, 야곱과의 사이에 여섯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30:20 레아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셨구나. 내가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남편이 나에게 6)잘 해주겠지"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하였다. 히, '자발'

30:21 얼마 뒤에 레아가 딸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디나라고 하였다.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이런 내용이 성경에 꼭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을 많이 낳아서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야곱의 아내들의 경쟁과 암투와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짓는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보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우리가 이런 걸 왜 알아야 하지요? 과연 남의 집 부인들의 지저분한 자식 낳기 싸움이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얼까요?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지저분한 싸움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들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고고하고, 지적이며, 평온하고, 따뜻하고, 은혜로운 배경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차갑고, 치사하며 심지어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암투 속에서 태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그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한 죄인들의 행태와 자격과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홀로 자유롭고 신실하게 이행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야곱으로부터 말미암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들은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지는 하늘의 복과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택해진 아주 훌륭한 모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들의 탄생이 이렇게 지저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그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보면서 바로 우리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야곱의 행동을 한 군데만 찾아보고 가겠습니다.

 

 

(창30:37~43)

37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별짓을 다 하지요?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도록 정해진 사람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이미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어머니한테도 들었을 것이고 베델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에게서도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의 꾀와 지혜를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서 복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동원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가 읽은 이 에피소드 속에서도 야곱은 그야말로 복에 환장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과 계약하기를 야곱이 외삼촌의 일을 돕는 대가로 양과 염소 중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이 나면 그 것들을 품삯으로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 라반이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은 모두 자기 아들들에게 주어서 야곱과 사흘 길, 거리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치는 양과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이 도저히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교배가 안 되니까요. 그런데 야곱은 단풍나무와 신풍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얼룩덜룩하게 만들어서 그 나무를 양떼가 와서 물을 먹는 개천 구유에 세워 두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얼룩덜룩한 나무를 양들과 염소들이 자꾸 보면 아롱지고 점 있는 것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건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축이 수태할 때 어미의 심리상태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양들이 물을 먹는 곳에 그 얼룩덜룩한 나무들을 세워두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양들과 염소들이 물을 먹는 곳에서 물을 마시며 교미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떻게 해서든지 재산을 모으겠다는 야곱의 결연한 의지가 엿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얼룩덜룩한 나무를 보고 물을 먹은 양과 염소들이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을 낳았습니다. 혹자들은 그러한 그림 속에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구나’하는 엉뚱한 교훈을 얻곤 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당신의 약속을 열심히 지키고 계신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반면에 야곱은 자기의 꾀와 판단에 따라 자기 식의 신앙 방법으로 복을 얻어내려 하는 우매한 자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행위에 하나님도 감동하여 복을 붓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는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부어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이 그림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어차피 주어지게 될 복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기 위해 자기들이 생각하는 엉뚱한 복을 목표지점으로 세워 놓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열심히 손발을 움직이는 우매한 어떤 무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그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야곱과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도 어차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그리고 그 분의 언약 속에서 필연적으로 주어지게 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들을 시기와 질투와 암투 속에서, 자기들의 꾀를 동원하여 열심히 낳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시적 관점에서 함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창세전에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조바심을 내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복이 아닌 엉뚱한 복을 자신의 목표지점으로 세워놓고 그 복을 받아내기 위해 하나님을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133:3)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신적 성품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영원한 하늘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의 실체이며 올바른 복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반드시 그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는 재산이 많아지고, 땅이 많아지며, 자녀가 많아지고, 장수하는 것 등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 하늘의 풍요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로 풍요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러니까 우리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믿음을 통하여 알게 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만으로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게 된 반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약속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자꾸 보여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쭉 나열해 놓고 그 다음에 그들이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창세기에서 야곱에게는 양과 염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고 야곱의 아내들에게 자식들이 줄줄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야곱의 이야기와 그의 아들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 어긋난, 하나님의 복의 수여의 행위와 여전히 자기들의 배만을 위해 복을 쟁취하려 하는 인간들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당신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복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쏟아 붓고 계시고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지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차이와 갈등은 결국 얍복강 나루터에 가서야 해결이 됩니다. 야곱은 그 얍복강 나루터에서 환도 뼈를 가격당하고 자기가 추구하던 복이 진짜 복이 아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진짜 복을 구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자유롭고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43:1-2)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께서 ‘야곱아, 이스라엘아’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우리 교회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는 내 것이므로 반드시 내가 너에게 복을 부을 것이다’하고 다짐을 하십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그 야곱과 이스라엘이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놔두시고 불 가운데 행하도록 놔두십니다. 어차피 복을 부어주실 거면 물 가운데 지나고 불 가운데 행할 때 건져 주실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물 가운데로 안 들어가고 불 가운데로도 안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왜 거기에 들어갈 때는 가만히 놔두시고 그 속에 들어가서 허우적거릴 때 구원해 주신다고 하시나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복을 부으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끊임없이 간섭을 하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뜻과 열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자기들의 힘과 꾀를 동원하여 자기들의 복에 이르려 하기 때문에 물속으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당신의 열심으로 그 속에서 건져내시고 당신의 목표지점으로 그 자녀들을 이끌고 가신다는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무력함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잘 그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과 작정 속에서 계획된 그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 열심의 대상들이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해도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시기와 질투와 암투 속에서 이전투구를 하고 있는 야곱과 그의 아내들에게 당신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아들들과 딸을 허락하십니다. 사기와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자기의 배만을 위해 살고 있는 야곱에게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반열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인간 쪽에서 발휘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으시는 것이 맞습니까? 인간들은 계속 실수하고 실패하는데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들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믿음, 객관적 믿음이 결국에는 우리 성도들에게서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 것이지만 그 주관적 믿음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랬다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수시로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고향을 버리고, 믿음으로 고난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흉년이 들었다고 금방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바로나 그랄 왕 앞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팔아먹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해빠지고 불가능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덮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의 코뚜레를 꿰어 모리아 산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믿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전 인생을 이끌어 결국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 하나요? 그렇게 하나님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불가능하고 무력한 사라의 인생에 하나님의 믿음이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마저 비웃었던 사라를 열국의 어미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모세도 믿음의 용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랬나요? 모세는 애굽 군사를 때려죽이고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지 자기의 믿음으로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떨기나무 불로 나타나셔서 당신의 명령을 하달하실 때에도 극구 사양하고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부탁을 하시는 데도 그것을 거부했던 사람이 애굽에서 믿음으로 나왔다고요? 


모세는 광야에서도 수시로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혈기까지 부려 결국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도 어눌하고 혈기 등등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엄습을 하여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들어 내시고 결국 하나님 나라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도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믿음으로 여리고를 돌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자기들의 믿음으로 애굽을 나왔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나요? 그랬다면 며칠이 못가서 그렇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성대곡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연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뚫고 들어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결국 그들의 옛 자아를(출애굽 1세대)모두 죽여 버리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출애굽 2세대)가나안에 넣으시고 마시는 구속의 대하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속으로 굉장히 불쾌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행위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합니까? 그럼 우리는 뭐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먼지에 불과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하니까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가끔 자녀에게 ‘아빠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아빠는 우리 아들이 성실하고 훌륭한 사회인이 되리란 걸 믿는다.’라고 했을 때 그 아빠의 믿음 안에는 내 아들이, 내 딸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자녀를 향한 아빠의 뜻과 아빠의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녀를 향한 어떤 소원을 가진 아빠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omnipotence), 무엇이든지 다 알며(omniscience), 시간과 장소의 구애도 받지 않는(omnipresence) 그런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 아빠의 소원은 곧 현실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성경의 다른 언어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작정, 계획, 언약 등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순복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의 죄인들이 되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당신께 순종하는 당신의 자녀로 완성해 내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시고 확정하시는 것이지 믿음은 절대 우리가 발휘하고 성숙시켜 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자와 후자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에서는 자랑이 나올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결코 자랑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성도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믿음이 아닌 자기의 믿음을 조금이라도 의지하고 자랑을 한다면 그건 곧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약으로 가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마17:14~20)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18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9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지금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겪으신 일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자기 아들에게 들어온 귀신을 쫓아 달라고 합니다. 주님이 변화 산에 올라가 계신동안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별짓을 다했는데도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귀신을 못 쫓아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 ‘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믿음도 없고 기도도 안 한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에게 정말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귀신이 나가지 않을 것일까요? 이미 그 전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열두제자를 파송했을 때에 그들은 병도 고치고 귀신도 제압하여 쫓아내었던 경력이 있었습니다.(마10:1)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경이 우리 교회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지금 믿음과 기도와 금식에 관해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에피소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에피소드가 어디에 붙어 있는 것 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서 모두 이 에피소드를 변화 산 사건 뒤에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사건은 변화 산 사건의 연장인 것입니다. 어떤 산이 등장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그 산에서 내려와 맞닥뜨린 불신앙의 모습하면 떠오르는 곳이 없으세요? 바로 시내 산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잘 보시면 예수님은 홀로 출애굽의 삶을 살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셨다가 거기서 나오신 적이 있었지요?

 

 

(마2:14~15)

14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호세아 11장 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내 아들’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장자’라 하십니다.(출4:22)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장자라는 이름을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와 예수님에게 공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교회와 예수님의 삶, 그리고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모델로 택해졌던 이스라엘의 삶이 은밀히 연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출애굽을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례 요한을 만나 세례를 받습니다. 고린도전서10장에서 세례를 무엇과 비유하여 설명하지요? 홍해를 건넌 사건과 세례를 같은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출애굽을 하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홍해를 홀로 건너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바로 광야로 나가십니다. 거기에서 40일간 금식을 하시고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광야에서 오병 이어로 만나를 먹이시며, 반석의 물이 상징했던 참 생수이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도달한 곳이 변화 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에 등장하는 산과 예수님이 올라가신 변화 산이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미루어 추측 할 수 있겠지요?

 

광야에서 모세가 올라간 산이 어디입니까? 시내 산입니다. 그 산에서 무엇이 주어지지요?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집니다. 변화 산에서는 어떤 명령이 주어지는지 볼까요?

 

 

(마17:5)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저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예수님의 명령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축약하면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 그게 뭡니까? 율법입니다. 변화 산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두 사람 나오는데 그들이 누구지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올랐던 호렙 산이 바로 시내 산입니다. 그들도 모두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들고 내려옵니다.

 

모세가 광야 40년 기간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엘리야도 광야를 40일 걸어서 호렙산에 오릅니다. 예수님도 광야 40일을 보내시고 변화 산에 오르십니다. 거기에서 당신과 똑같은 삶을 모형으로 살았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예수님의 출애굽에 관해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눅9:30~31)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1절에서 ‘별세’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헬라어로 ‘엑소더스’입니다. ‘엑소더스’는 어떤 책의 이름이지요? 출애굽기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출애굽 사건을 홀로 완성하시며 가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바로 우리 ‘교회’를 위해서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렇게 패역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들 대신 누군가가 완벽한 출애굽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혈기를 부리다 광야에서 죽은 모세는 어떻게 변화 산에 나타나 예수님의 별세를 논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모세의 출애굽을 예수님이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이렇게 형편없이 살고 있는데도 우리의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엑소더스’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광야의 시험에서 실패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광야의 시험에서 합격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합격증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 산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광야에서의 시내 산 사건이라면 그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귀신들린 아이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욕을 먹은 제자들과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요? 금송아지 이야기입니다. 이제 조금 실마리가 풀리지요? 왜 주님께서 그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세요? 지금 변화 산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일은 구약의 금송아지 사건처럼 자기들의 힘을 보태어 자기를 뽐내고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자기부인이 안 된, 다른 말로 여전히 자아 숭배 교에 빠진 자들의 행태였던 것입니다.

 

 

(출32:1)

1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보세요.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여호와라고 부른 자들은 모든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그 하나님을 자기들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로 부른 금송아지가 무엇으로 만들어지지요? 그들의 금귀고리로 만들어 집니다. 당시 귀고리는 개인들이 지니고 다니는 부적과 같은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숭배하는 세상의 힘으로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저주받은 아담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변화 산 아래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 산에서 내려오셨는데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서 우리 아이에게 가셔서 귀신을 쫓아주세요.’하고 애걸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다짜고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되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귀신을 쫓아달라고 찾아온 사람이나 그 귀신을 쫓아주겠다고 열심을 부렸던 제자들이나 모두 진짜 믿음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전부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이 과거에 귀신을 쫓아내본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그러한 믿음과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안에 있는 그 믿음을 발휘하여 무언가 능력 있는 일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안에 내재하는 믿음을 근거로 기도도 했고 금식도 했을 것입니다. 내 믿음, 내 기도, 내 금식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아 숭배교에 빠진 자들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제자들이 여전히 자기들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믿음은 우리 아버지의 믿음이 우리를 덮고 있는 형국인 것이지 우리가 생산해 내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에 그 믿음으로부터 격발되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믿음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능력도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게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버지의 뜻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의 믿음과 기도를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했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거기서 ‘이 산’이 어떤 산입니까? 시내 산을 상징하는 변화 산입니다. 거기가 바로 변화 산 아래니까요. 겨자씨라는 것은 당시 히브리인들이 너무 작아서 그것보다 작은 것은 없다는 의미로 쓰던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최소한의 믿음만 있다하더라도 산이 들려 바다로 던져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우리가 생산해내고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믿음은 아예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간혹 나타나고 발휘되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뚫고 들어와 심으시고 스스로 발휘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그 시내 산, 율법의 산을 바다로 던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지요. 우리가 묶여있던 율법의 산, 시내 산, 시온 산을 한 번에 바다로 던져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평평하게 만들어 버리신 그 사건이 바로 산이 바다로 던져진 사건입니다.



(사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그건 우리 주님의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 변화 산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있어서 바다로 던져질 하등의 이유가 없기에 안 던지시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또한 우리의 구원에 전혀 필요가 없는, 산이 바다로 던져진다든지 은 이가 금 이로 바뀐다든지 하는 기적을 못 일으키는 것이고, 우리가 묶여 있던 율법의 산, 즉 우리 옛 자아만을 바다에 던지는 일 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믿음으로 발휘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바로 시내 산을 바다로 던지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아담 적 자아 숭배 교에 빠진 자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사망이 되셔서 그들을 품에 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고 외쳤던 그들에게 믿음을 부으시기 위해 예수께서 행하셔야 할 일이 그 속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시내 산에서는 모세가 중보자로 나서지요?



(출32:11~14)

11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 하시나이까

12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 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하여 우상을 만들어 그를 여호와라 부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모두 죽여 버리시겠다고 모세에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하나님을 막아서서 하나님께 간하기를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고 그들을 심판하지 마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부어지는 것이지 인간들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그 일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출32:31~33)

31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3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하나님은 끝까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범죄 하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격 있는 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화를 받으면 그들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것입니다. 다시 변화 산 아래로 돌아와 보시면 거기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어떻게 구원이 될 것인지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막9:26~27)

26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앞에서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그 ‘일으키다’라는 단어 ‘에게이로’라는 단어는 ‘부활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 똑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있습니다.



(막14:28)

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여기서 ‘살아난 후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게이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 귀신 들린 아이를 통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구원하기 위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 사건 뒤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막9:30-32)

30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그렇지요? 변화 산 아래의 귀신들린 아이의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졌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기만을 위한 신을 생산해 내고 자신의 능력과 힘을 신봉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우리의 믿음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과 같은 전적인 신뢰와 의존과 의뢰와 믿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자신을 살고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뿐입니다.

 

 

(갈2:20)

20 내 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좀 잘 못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어에 맞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끔 여러분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때 자폭하지 마시고 ‘맞아, 나는 그렇게 믿음이 없는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에게 뚫고 들어와 내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하고 기뻐하세요.

 

그리고 가끔 여러분의 믿음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도 하고, 병도 낫고, 아 이도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을 때 ‘내 믿음은 가짜인가 봐’하고 낙담하지 마시고 그렇게 자신의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그 믿음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러한 우리의 무력함 속에 열방의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풍성한 믿음을 소유하신 예수가 내 명의로 그 믿음을 굳게 세워 놓으셨음을 떠 올리며 행복해 하세요. 내 믿음은 능력도 없어 보이고 소원도 안 들어지는데 그 실체는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인 것을 아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믿음은 자꾸 보잘것없이 무력한 것으로 폭로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하는 오만과 방종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자꾸 겨자씨로 폭로되고 우리 주님의 믿음이 오롯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심으로 ‘난 정말 믿음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불가능함을 반복하여 경험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예수의 믿음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정말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율법의 산, 자기 자랑의 산, 교만의 산이 바다로 던져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며 짜릿한 신앙생활을 맛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먼저 죽으세요.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귀신같은 것 쫓아내려 하지 마시고 내가 귀신 들린 자였다는 것부터 먼저 깨달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