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1 - 얍복 나루터에서의 씨름 (창31:1-3, 32:22~32)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27

81 - 얍복 나루터에서의 씨름

(창31:1-3, 32:22~32)

31:1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31: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

31:3 주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조상의 땅, 너의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32:2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32:23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32: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32:25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32: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32: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32:28 2)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3)이스라엘이다." 히, '그가'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이 겨루시다'

32: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32: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4)브니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얼굴'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32:32 밤에 나타난 그가 야곱의 엉덩이뼈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

2009년 제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제일 많은 부분에 노미네이트가 되고 가장 많은 수상을 한 영화가‘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라는 영화입니다. 한국말로는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브래드 피트가 자기 이름값을 한 영화라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흥행에도 실패를 했고 좀 지루하다 싶을 만치 이야기의 전개가 느린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통해 아주 큰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벤자민 버튼이라는 사람은 날 때부터 노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자라면서 점점 젊어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기가 되어 죽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계가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는데 그의 시계만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거꾸로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데 거꾸로 가는 커다란 시계가 놓여 있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와 그 시계를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 성도들의 시간관이 바로 저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면서 그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전력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미지의 미래로 흐르는 시간과 역사는 자기들의 능력과 지혜와 업적으로 채워야 하며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의 힘과 지혜와 업적에 의해 미래는 자기들의 의도대로 창조되는 것이며 자기들의 지혜와 열심과 노력여하에 따라 이렇게도 변할 수 있고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그 시간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역사관과 시간관은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도의 역사관과 시간관은 확정된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것입니다. 확정된 미래가 과거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종국을 이미 확정 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확정된 것들을 인간들에게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시간이라고 감지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배워가며, 감탄하면서 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이며 성도의 시간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창세전이라는 과거에 확정되어 버린 미래에서, 거 꾸로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완성하면서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며 달려가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확정 시켜 놓으신 결론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종말이 구원과 창조를 앞선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요한계시록의 종말을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도 이미 창세전에 준비되어졌고 심지어 그 예수는 창세전에 죽임을 당했다라고 까지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계13:8, 벧전1:19-20) 그 창세전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성취된 하나님 나라라는 결론에서부터 시간이 ‘태초에(창1:1), 레시트’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미 미래가 결정이 되어졌고 그 결정되고 확정된 미래로부터 시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의 시작 지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종국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이라는 복을 주시기로 이미 창세전에 결정하시고 확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간 속으로 던져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새 옷을 입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서 살기로 결정이 된 사람들이 무언가 필요에 의해서 옛 하늘과 옛 땅에 옛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사람들이 과거라는 곳으로 내려와서 그 확정된 미래로 무언가를 경험하고 배우며 한발 한 발 가고 있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어떤 필요에서 일까요?

그 들은 이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옛 사람의 몸을 입고 그 옛 사람의 한계와 어두움과 추악함을 경험하고 배우면서 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버리며 이미 창세전이라는 과거에 결정이 된 그 결론이 얼마나 엄청나고 감사한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 채, 자발적으로, 다시는 그 옛 세상과 옛 사람이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열매들을 추구하거나 소원하지 않는 자로 회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된 자들이 그들이 한시적으로 입고 있는 옛 사람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면서 창세전의 완성의 자리로 회귀를 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옛 사람과의 씨름이 필연적으로 수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옛 사람이라는 옷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하는 아담 표 옷인데 우리 스스로는 절대 그 옷을 자력으로 벗어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옛 사람 아담은 반드시 전쟁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옛 사람 아담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하나님이 승리를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하시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옛 사람이 패배를 하게 될 때 우리는 참된 승리를 전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완성된 신분이 온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설득하고 졸라서 우리의 뜻과 비전을 관철시키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삶,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면서 그 분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축약해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복중에서, 아니 그가 복중에 지어지기도 전인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창세전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복 받은 자라는 확정된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반드시 그 복 받은 자의 자리로 수렴되고 완성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야곱이라는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과하며 그 옷을 서서히 벗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신분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야곱의 삶을 아주 작은 그림으로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얍복강 사건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유약하고, 비열하며, 사기성 많은 야곱을 안타까우리만치 쫓아가시며 당신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가 뭘 잘해서도 아니고 그가 뭐 대단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신분이, 그의 미래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아들로 확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건 거기에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그가 사기꾼일 수도 있고, 도둑놈일 수도 있으며, 파렴치한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건 결국 그의 옛 사람의 옷을 씨름하여 벗겨 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같이 미련하고, 우매하며, 유약하고, 야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간섭하시며 씨름하셔서 그들의 옷을 벗겨 버리시고 마침내 당신이 확정해 놓으신 복 받은 자들로 회복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옷을 벗기시기 위해 그를 쫓아다니시면서 그가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야곱은 열심히 자기의 꾀를 이용하며 자기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 쫓아가시면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러한 야곱의 삶에 만족하시지도 못하고 만족할 수도 없다는 하나님의 의사표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옛 세상 안에서 야곱이라는 옛 사람의 옷을 입고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안주하시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씨름을 하여 그 옷을 벗겨내시는 분이지 그 야곱이라는 옷에 금장을 둘러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복된 추격이 야곱을 얍복강 나루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와의 본격적인 씨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은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얍복강에서의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 사건은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하나님과의 씨름의 축약이요 모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은 하나님께서 수십 년 동안 야곱을 방치해 두셨다가 어느 날 찾아오셔서 시작된 씨름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울러 그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은 전체 교회의 인생을 단적으로 아주 잘 표현해 놓은 훌륭한 축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야곱이 벗어야 할 그 옷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유산 상속권을 빼앗기 위해 형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장자 권을 사기도 하고, 장자에게 주어지는 아버지의 축복을 도취(盜取)하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을 뒤집어쓰고 아버지를 속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과 흥정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도와주면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하지요? 결국 외삼촌 집으로 쫓겨 간 야곱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기의 꾀만을 의지하여 온갖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많은 재산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삼촌이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안색이 안 좋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자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 외삼촌을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 외삼촌이 양털을 깎으러 나가자 야곱은 자기의 가축들과 식솔들을 모두 챙겨 황급히 도망을 칩니다. 어찌되었든 도망자인 자신을 거두어 주었고 자기에게 두 딸을 준 장인어른입니다. 그런데 인사 한 마디 없이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당시 목축을 하던 사람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일 년의 농사를 추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날 며칠 계획을 잡고 모든 노비들과 가족들을 다 동원하여 해야 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을 모두 챙겨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자기 집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훔쳐서 달아나는 사건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그 드라빔이라는 것은 여자의 모양을 한,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 우상을 말합니다. 그 드라빔은 가족 수호신일 뿐 아니라 재산의 상속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왜 라반이 그 드라빔을 찾기 위해 삼일 밤낮을 달려 야곱을 쫓아왔는지 아시겠지요? 나중에 야곱이 자기의 드라빔을 가지고 와서 자기 재산의 상속권을 주장하면 꼼짝없이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성경이 야곱의 도주 장면에 그의 아내의 허물을 그려 놓았을까요? 그렇게 드라빔을 훔쳐 낸 라헬의 소행은 바로 야곱과 야곱으로 대표된 모든 죄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최초의 부부의 주례를 서시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거기에서의 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의 그 연합이라는 말은 ‘아교로 붙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연합이 떨어지려면 둘 다 큰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성도와의 연합은 절대로 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부부라는 관계가 한시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라헬의 소행은 바로 그녀와 연합된 야곱의 소행인 것이고 그 야곱의 소행은 그가 대표하고 있는 이스라엘, 즉 교회의 소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러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씨름하여 죽여 버려야 할 야곱이라 하는 죄인들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안전과 보호,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는 어떻게 되든 말든 그들의 재산권까지도 훔쳐내고 강탈하여 자신의 힘과 부를 챙기는 그러한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야곱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들과 씨름을 하시면서 그 들의 옷을 벗겨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씨름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철저하게 패배해야 할 야곱의 모습을 계속해서 폭로합니다.

라반은 삼일 만에 야곱의 일행을 따라잡습니다. 이제 야곱은 라반과 그의 군사들에게 요절이 날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저녁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는 협박을 하십니다. 일은 다 야곱이 저질러 놓았는데 하나님이 그 뒤를 쫓아가시면서 해결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야곱이라는 옷을 다 벗기 전에 야곱이 죽으면 안 되거든요.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좇아오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창31:42)

42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 하셨나이다

이런 걸 아전인수 격 해석이라 하지요? 하나님이 자기의 수고를 인정하셔서 외삼촌을 혼내신 것이니까 이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훈계를 합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그를 좇아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벧엘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항상 야곱과 함께 있으며 그를 떠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창32:1~2)

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마치 엘리사와 게하시, 그리고 여호수아가 보았던 것과 같은 여호와의 군대를 보는 장면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손에서 풀려난 야곱이 또 다시 넘어야 할 산은 형, 에서의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앞서가며 너를 지키고 있으니 너는 그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당신의 군대를 야곱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기서 쓰인 ‘만나다, 파가’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부딪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쫓아다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환상이나 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난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들을 직접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앞서 가며 싸우고 있으니 내 약속을 믿고 걱정 말고 따라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지키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서도, 먼저 보낸 사신으로 부터 에서가 400인의 군사를 데리고 자기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야곱이 두려워 떱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기의 꾀를 이용하여 살 궁리를 합니다.

(창32:7~8)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8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참 한심하지요? 그는 하나님께서 외삼촌 라반을 협박해서 자신을 구해주신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도 자기를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천군천사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이렇게 합니다.

(창32:9~12)

9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 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 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들먹이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의 재산과 자기의 가족들이 그의 주 관심사입니다. 이 기도를 마친 후에도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살 궁리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럴듯하게 기도도하고, 예배도 하고, 찬양도 하고, 종교행위도 많이 하는데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소원하는 것은 나의 계획이고, 나의 야망이며, 이 세상에서의 나의 미래에 관한 것들이 아닙니까? 거기에 하나님은 그냥 조력자에 불과한 분 아닌가요? 하나님은 바로 그 야곱의 옷을 향해 씨름을 하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당신의 계획안에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죄인들이 입고 있는 옛 사람과 싸우시며 그들을 정복해 가고 계신 하나님의 씨름을 상징하고 있는 야곱의 삶, 다른 말로 우리 교회의 인생에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신가를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얍복 강 나루터의 씨름이야기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이 얍복강 나루터의 씨름 이야기를 강청기도의 능력을 설명하는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해석인 것입니다. 야곱처럼 끈질기게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도 그 정성에 감동하셔서 결국에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야 만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내 뜻을 관철시키라는 말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그게 왜 터무니없는 해석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호12:1-6)

1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4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 지니라

호세아가 야곱의 얍복 강 나루터의 씨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지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시니까 죽을 각오로 하나님과 씨름하라고 하나요? 호세아는 야곱의 얍복 강 나루터의 씨름 이야기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실패와 패역함을 꾸짖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지적하면서 야곱의 씨름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너희들 왜 하나님께 덤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야곱이 씨름을 한 사건은 야곱이 목적하는 생애와, 소원과, 목표와, 야망 등을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관철을 시키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목적하는 생애와, 소원과, 목표와, 야망 등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 분의 백성에게 목적하시고, 이루시려는 내용과 함께 병행될 수 없어서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위기의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의 꾀와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름을 해서라도 부수어 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강 나루에서 숨어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시비 거시려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 속에 나타난 수많은 갈등과 시비와 다툼은 사실 형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외삼촌 라반과의 싸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싸움은 바로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과 ‘나의 뜻대로 살겠다’는 야곱이 씨름을 하며 충돌해 온 것이 바로 야곱의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이 얍복강 나루터의 씨름 이후의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씨름을 하며 삽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겜에서 머물다가 딸의 강간사건을 겪으면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지요? 그러한 일을 겪은 후에도 그의 가족들이 우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을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그 우상들을 다 묻게 하십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험악한 인생으로 끝이 나지요? 그 말은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 씨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심지어 적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는 삶을 수시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평생에 걸쳐 그들과 씨름하시며 그들의 겉옷을 벗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점철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씨름에서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게 시간과 역사의 존재 목적이며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단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그치지가 않기 때문에 피곤하고 고단하고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복 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옛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하나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어두움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계획과 야망,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씨름하며 죽여 버리려 하는 인간의 더럽고 집요한 죄 성이 가장 극명하게 폭로된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승리의 잔치를 벌인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죄인들과의 씨름에서 그들에게 져 버린 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창세전에 복을 받기로 택해진 어떤 일련의 야곱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사흘 만에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그 분을 죽이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은혜가 닥쳐와서 그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해 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 이외의 죄인들은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최후를 미리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저주받은 자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죄인들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도다 하나님의 지혜여!’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이기려 하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자아 숭배를 자기 아들의 품에 넣어 죽이시는 사건을 오늘 본문은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이겨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했던 야곱의 추악한 고집이 하나님에 의해 꺾이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 뼈라는 것은 전인(全人)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죄인으로서의 야곱의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지 않고 그를 품어 안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로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환도 뼈를 치시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댑니다. ‘야곱, 속이는 자, 강도’입니다. 그게 바로 죄인들의 정체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버지, 형도 속이고 아비의 드라빔까지도 도둑질해서 나오는 지긋지긋한 죄인들의 실체, 그 실체가 하나님 앞에서 폭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 수요 성경 공부 때, 배웠던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는 이 부분이 어떻게 묘사가 되었지요?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풀풀 나는 썩은 시체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폭로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하며 아무것도 아닌(nothingness)자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기로 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하니까 굉장히 영광스럽고 대단한 이름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창32:28)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교회의 이름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건 사실 굉장히 면목 없고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은 뭐 대단하게 잘나고 적당한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 하는 그러한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와 불가항력적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완성해 낸 겸연쩍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생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즉 스스로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짓밟고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자였다는 것을 폭로당하고, 확인하며, 수긍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가 없는 절름발이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김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올바로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 된 실체를 반추하고 기억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분께 의탁한 자로 그 분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어떤 이들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공격으로 그들이 겉에 입고 있던 헌 옷을 난도 질 당하고 그 안에 있는 새 옷을 드러내게 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자기들에게 입혀진 새 옷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그 새 옷을 입게 되었지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세상에게 져서 맞아 죽으시는 방법으로 그 새 옷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야곱의 얍복 강 씨름 이야기가 어떻게 복음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백마를 탄 예수는 바로 우리를 향해 창을 겨누고 돌진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 같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한 복된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쉴 새가 없습니다.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해도 우리만 걸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떼먹어도 꼭 우리한테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직접 징수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하나님 왜 나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혀요?’ ‘하나님, 내 치사해서 이제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쫓아다니면서 방해나 하지 마세요.’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답게 만드셔야 합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이미 결정하고 확정해 놓은 당신 자녀들의 자녀다움을 찾아주시기 위해 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늘 재수 옴 붙은 사람처럼 아주 작은 흠과 티도 발각이 나고 폭로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걸어오시는 씨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된 것입니다. 아니, 원망이 나오면 원망을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셨는가에 감사하고 감격하세요.

우리는 이미 복을 받기로 확정되고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뢰하는 영생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부인해야 할 ‘나’가 나의 피와 살과 뼈 속에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단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성도에게 있어서 필연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야망을 부인하시고 여러분의 욕심을 부인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완성된 미래에서 흘러오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창세전에 확정된 결론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래에다가 자신들이 이루어내서 채울 업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 속에 결정되고 확정된 자신들의 결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 완성된 결론을 얼마만큼 배우고, 알아차리고, 인식하면서 살아 왔는가와 지금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가 개척하고 이루어 내야할 이 세상에서의 미래나 거기에서 뭇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평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거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정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완성된 미래에 안착하기 위해 거기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정말 살아계십니다. 저는 요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실감이 되어서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의 황홀함을 자주 경험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항복하시고 내려놓으세요.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절대 이기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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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점철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씨름에서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게 시간과 역사의 존재 목적이며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단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그치지가 않기 때문에 피곤하고 고단하고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복 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옛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하나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어두움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계획과 야망,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씨름하며 죽여 버리려 하는 인간의 더럽고 집요한 죄 성이 가장 극명하게 폭로된 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승리의 잔치를 벌인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죄인들과의 씨름에서 그들에게 져 버린 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창세전에 복을 받기로 택해진 어떤 일련의 야곱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사흘 만에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그 분을 죽이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은혜가 닥쳐와서 그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해 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 이외의 죄인들은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최후를 미리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저주받은 자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죄인들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도다 하나님의 지혜여!’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이기려 하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자아 숭배를 자기 아들의 품에 넣어 죽이시는 사건을 오늘 본문은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되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이겨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 했던 야곱의 추악한 고집이 하나님에 의해 꺾이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 뼈라는 것은 전인(全人)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죄인으로서의 야곱의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지 않고 그를 품어 안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로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환도 뼈를 치시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댑니다. ‘야곱, 속이는 자, 강도’입니다. 그게 바로 죄인들의 정체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버지, 형도 속이고 아비의 드라빔까지도 도둑질해서 나오는 지긋지긋한 죄인들의 실체, 그 실체가 하나님 앞에서 폭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 수요 성경 공부 때, 배웠던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는 이 부분이 어떻게 묘사가 되었지요?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풀풀 나는 썩은 시체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폭로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하며 아무것도 아닌(nothingness)자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기로 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하니까 굉장히 영광스럽고 대단한 이름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창32:28)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교회의 이름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건 사실 굉장히 면목 없고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은 뭐 대단하게 잘나고 적당한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 하는 그러한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와 불가항력적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완성해 낸 겸연쩍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생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즉 스스로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짓밟고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자였다는 것을 폭로당하고, 확인하며, 수긍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가 없는 절름발이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김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올바로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 된 실체를 반추하고 기억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분께 의탁한 자로 그 분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어떤 이들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공격으로 그들이 겉에 입고 있던 헌 옷을 난도 질 당하고 그 안에 있는 새 옷을 드러내게 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자기들에게 입혀진 새 옷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그 새 옷을 입게 되었지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세상에게 져서 맞아 죽으시는 방법으로 그 새 옷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야곱의 얍복 강 씨름 이야기가 어떻게 복음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백마를 탄 예수는 바로 우리를 향해 창을 겨누고 돌진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 같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한 복된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쉴 새가 없습니다.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해도 우리만 걸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떼먹어도 꼭 우리한테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직접 징수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하나님 왜 나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혀요?’ ‘하나님, 내 치사해서 이제 하나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쫓아다니면서 방해나 하지 마세요.’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답게 만드셔야 합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이미 결정하고 확정해 놓은 당신 자녀들의 자녀다움을 찾아주시기 위해 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늘 재수 옴 붙은 사람처럼 아주 작은 흠과 티도 발각이 나고 폭로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걸어오시는 씨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된 것입니다. 아니, 원망이 나오면 원망을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셨는가에 감사하고 감격하세요.

 

우리는 이미 복을 받기로 확정되고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뢰하는 영생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부인해야 할 ‘나’가 나의 피와 살과 뼈 속에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단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성도에게 있어서 필연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야망을 부인하시고 여러분의 욕심을 부인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지팡이이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완성된 미래에서 흘러오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창세전에 확정된 결론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래에다가 자신들이 이루어내서 채울 업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 속에 결정되고 확정된 자신들의 결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 완성된 결론을 얼마만큼 배우고, 알아차리고, 인식하면서 살아 왔는가와 지금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가 개척하고 이루어 내야할 이 세상에서의 미래나 거기에서 뭇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평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거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정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완성된 미래에 안착하기 위해 거기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정말 살아계십니다. 저는 요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실감이 되어서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의 황홀함을 자주 경험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항복하시고 내려놓으세요.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절대 이기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