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85 - 에서의 형통을 조심하라 (창36:31~43)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34

85 - 에서의 형통을 조심하라

 

 

 

(창36:31~43)

36:31 이스라엘에 왕이 아직 없을 때에, 다음과 같은 왕들이 차례로 에돔 땅을 다스렸다.

36:32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다. 그의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이다.

36:33 벨라가 죽으니,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36:34 요밥이 죽으니, 데만 사람의 땅에서 온 후삼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36:35 후삼이 죽으니,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벌판에서 미디안 사람을 친 하닷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그의 도성의 이름은 아윗이다.

36:36 하닷이 죽으니, 마스레가 출신 삼라가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36:37 삼라가 죽으니, 유프라테스 강 가에 살던 르호봇 사람 사울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36:38 사울이 죽으니,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36:39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으니, 그의 뒤를 이어서 4)하닷이 왕이 되었다. 그의 도성의 이름은 바우이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인데, 마드렛의 딸이며, 메사합의 손녀이다. 마소라 사본 가운데 일부와 사마리아 오경과 시리아어역(대상 1:50)을 따름. 대다수의 마소라 사본에는 '하달'

36:40 에서에게서 나온 종족들을 가문과 거주지에 따라서 나누면, 각각 다음과 같다. 그 이름은 딤나와 알와와 여뎃과

36:41 오홀리바마와 엘라와 비논과

36:42 그나스와 데만과 밉살과

36:43 막디엘과 이람이다. 이들이 에돔의 종족들이다. 종족들의 이름이 각 종족들이 살던 거주지의 이름이 되었다. 에돔 사람의 조상은 에서이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소설가 중에 사라마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의 소설 중에서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이었습니다. 그 소설을 보면서 그 사라마구의 날카로운 현실인식에 감탄을 했었습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영화가 원작 소설의 메시지를 제대로 다 전달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 소설은 어떤 도시의 시민들이, 눈이 멀게 되는 바이러스에 하나하나 감염이 되어 도시 전체가 눈이 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유일하게 단 한 여자만 시력을 잃지 않습니다. 소설은 그 여자의 눈을 통해 보여 지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아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을 보살피기 위해 눈이 먼 것처럼 위장을 하고 눈먼 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로 따라들어 갑니다. 그 수용소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럽고, 불결하고, 지저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도 여기저기를 활보하기도 합니다.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도덕과 윤리도 점차 상실되어져 갑니다. 그렇게 바이러스는 점점 퍼지게 되고 그 수용소 뿐 아니라 모든 도시가 전부 눈이 멀게 됩니다. 그렇게 눈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원래부터 눈이 멀어있던 소경입니다. 그 사람은 맹인용 지팡이 하나로 마치 눈을 뜬 사람처럼 그 수용소를 활보합니다. 그는 그 눈먼 자 들의 도시에서 베트 맨이나 수퍼 맨으로 통합니다. 악의 세상에서는 그 악한 세상에 익숙한 자가 유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억지와 폭력으로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그래봐야 정부에서 공급해 주는 음식 상자 몇 개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패물들과 얼마간의 현금 정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서 그가 흘려주는 떡고물을 얻어먹는 한 무리의 소경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패가 되어 아주 만족스러워 하며 자신들의 힘과 부를 자랑하지만 눈을 뜬 사람이 보기에는 여전히 지저분하고 더러운 쓰레기장 속에서의 가난한 풍요일 뿐입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풍요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모두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얼마나 불결하고 더럽고 추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음식으로 연명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점점 둔감해 집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눈을 뜬 그 여자만이 그 참상을 보면서 토악질을 합니다. 그 소설은 모두가 눈이 먼 그 도시에서 제일 처음 눈이 멀었던 한 사람이 희미하게 눈을 뜨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사라마구는 거기에서 아주 실낱같은 희망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을 감은 채로 장님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눈을 뜨고 그 죄악의 참상을 직시하며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나오게 될 것임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힘의 원리가 내어놓은 힘과 풍요,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있노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의 그것과 방불한 것임을 사라마구는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풍요 앞에서의 이 세상의 풍요는 눈먼 자들의 세상이 자랑하는 그런 가난한 풍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절대상위의 존재에게서 나오는 힘 앞에서, 온 세상이 열광하는 이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나 통용이 되는38구경 권총 한 자루와 총알 몇 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썩어가는 음식찌꺼기와, 목표물도 제대로 확인 할 수없는 38구 경 권총 한 정을 가지고 마치 자신은 이 세상의 모든 힘과 풍요를 다 소유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불쌍한 소경들처럼 이 세상의 힘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를 가지고 자신이 마치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제왕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사는 것이 오늘날 세상 아닌가요?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거들먹거림을 올바로 분별하고 직시하며 그들의 무리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성도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을 가리켜 눈을 뜬 자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었던 그 여인처럼 이 세상의 무력함과 지저분함과 잔인함과 어두움을 감지하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떴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눈먼 자들이 열광하는 가난한 풍요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에서의 후손들의 족보가 아주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에서와 그의 후손들의 족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잘 보시면 에서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전부 부자였고 세상 적으로 볼 때 대단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많은 족장들과 왕들이 에서의 후손에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에서와 에서의 후손들은 에돔 땅에 독립 왕국을 세우고 8대에 이어 왕이 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에서는 세일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에서가 아무 때나 동원할 수 있는 가신들이 400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리던 세력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누가 복 받은 자입니까? 우리는 분명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 권을 도득한 것을 보았고, 장자의 축복 또한 야곱이 도취해 내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차지였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과 그의 후손보다 에서와 에서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더 형통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야곱이 어떤 축복을 받았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창27:28~29)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받은 말씀은 뭐였습니까?

 

(창27:38~40)

38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 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 대로라면 야곱이 에서보다 훨씬 잘 살았어야지요. 그런데 왜 이러한 축복의 내용이 그들의 삶 속에서 즉시 적용이 안 되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야곱과 에서의 축복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에서와 그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왕으로 족장으로 살고 야곱과 야곱의 후손들은 종으로 노예로 삽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시편 73편을 훑어보면서 많이 당황했었지요? 악인들은 살이 쪄서 눈이 튀어나올 만큼 형통한 삶을 사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 시를 잘 보면 그렇게 형통한 듯 보이는 악인들의 집이 미끄러운 곳에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들의 집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져 보인다 해도 잠시 후면 멸망의 자리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삽은 그러한 악인들의 삶이 꿈꾸는 것과 같다고도 합니다. 악인들이 이 땅에서 아무리 떵떵거리며 화려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봄철 낮잠 속의 허황된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영화는 아주 잠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시37:1-2)

1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 지어다

2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하박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합1:13)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왜 악인들이 잘되고 선인들이 그들에게 당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시나요?

 

(합2:2-4)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비록 지금은 악인들이 득세를 하는 것 같고 그들이 더 강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들의 종말은 바람처럼 속히 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렇게 악인들이 득세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고 믿는 자들이 보잘것없이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보여 질 때 믿음이라는 것을 발휘하라고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볼 때에는 형편없이 지는 것 같고, 당하는 것 같고, 밟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상황 속에서, 믿음을 발휘하여 복 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하늘의 복을 받은 자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게 보이시고, 또 하박국 시대의 갈대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훈련하는 데에 쓰였던 것처럼 그들 자신을 훈련하고 단련하여 참 복을 받은 자로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서 복과는 정 반대의 상황과 환경을 그들에게 허락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질 하늘의 풍요와 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오히려 에서가 형통한 삶을 살았으니까요. 거기까지는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어떤 무리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그 복과 풍요의 약속은 이 땅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도 경험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경험이 되어질까요? 하나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늘의 복은 이 땅에서의 환경과 처지와 상황을 바꾸어 주거나 업그레이드 해주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누리게 되는 영적인 풍요와 안식으로 경험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한 영적인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풍요와 안식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좀 더 확실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구절이 히브리서 11장 20절입니다.

 

(히11:20)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이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정말 이삭이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에 동의가 됩니까?

이삭은 자기가 좋아하는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리브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엉겁결에 야곱에게 축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삭이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의 주체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 즉 당신의 계획과 소원대로 이삭의 계획을 무산시키시고 이삭을 이끌고 가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해결을 해야 할 부분이 야곱과 에서가 둘 다 축복을 받았다는 부분입니다. 이삭이 믿음으로 야곱에게만 축복했다고 하지 않지요? 에서도 함께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의 내용을 볼 때 그게 축복이라 할 수 있나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올바로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생명력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충만히 부어져서 그들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존재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력을 아무런 저항 없이 충만히 부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순종이 전제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은 완성품으로 부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절대의존의 자리에서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복을 붓고 싶으셔도 못 부으십니다. 인간이 거부를 하고 도망을 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력의 공급이 그들에게서 차단이 되게 되면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피해 도망을 쳐 버린 인간들에게 한시적이며 ‘제한적인 복’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양, 공기, 물, 자연, 수확, 풍요, 기쁨, 평화 등등의 많은 복의 편린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복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복의 견본품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이 될 때까지는 이 세상이 죄의 자폭성과 자해성에 의해 멸망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으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세상을 유지하고 붙들고 있는 것의 실체는 사실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편안함과 포만감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늘의 풍요의 견본품입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풍요와 포만이 온전한 것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맛보기로 우리에게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완전한 것인 줄 알고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자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풍요를 잘 누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풍요 속에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진짜 하늘의 풍요가 있다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늘의 풍요와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살게 될 때 그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지금 하나님의 복을 받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서도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단어가 ‘장래 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을 하기는 했는데 그들의 현재의 일이 아니라 장차 올 일에 대해 축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존재합니다. 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복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온전히 성취가 됩니다. 그 복은 장래에 온전히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와 재림 사이의 기간을 우리가 말세라고 부르는 데 그 말세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참 복을 받은 야곱들이 한시적 복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에서들에게 밟히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런데 야곱들은 이 가시적 세상에서 에서들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너는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에서에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장래에는 그들이 자기들 앞에 완전히 굴복하게 될 것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일이 가시적으로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전에 용이 무저갱에서 잠깐 풀려나는 시기가 있지요? 그건 요한계시록 강해 때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니까 그 설교를 참고 하세요. 그 말은 간단히 말하면 마귀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강한 자로 득세를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아 뭉개는 것처럼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시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약속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에서가 매임을 벗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에서의 멍에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와 보겠습니다. 야곱과 야곱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종으로 노예로 살고 있을 때 에서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복에 의해 이 땅에서 족장들로 왕들로 떵떵거리며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에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나라가 됩니까? 다윗 왕 때입니다.(삼상8:13,14) 다윗 왕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에돔이 솔로몬 왕 말기(왕상11:14)와 유다의 여호람 왕 때(8:20-22) 저항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아하스 왕 때 잠깐 독립을 이루기도 합니다.(왕하16:6) 그러나 힐카누스 때에 완전히 망하고 이스라엘의 속국이 됩니다. 그렇게 망한 에돔 사람 중에 ‘헤롯’이라는 자가 이스라엘의 분봉 왕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에서가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야곱과 에서가 죽은 뒤 800년 뒤에 일어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야곱과 에서에게 내려진 축복은 800년 뒤에 일어날 일임과 동시에 이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과하여 마지막 날에 완성될 일에 대한 계시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바벨론 세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로 완전히 패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발악을 하며 약속의 후손들을 이기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곧, 속히 가시적으로 성취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성품으로서의 복의 수혜자들은 이 땅에서의 처지나 환경이나 상황 등의 견본품으로서의 복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이며 제한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복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참 복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이 땅에서의 견본품들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삶에 풍요와 힘을 허락하시고 야곱의 삶에 핍박과 가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로부터 800년 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하게 성취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한 점도 땅에 떨어짐 없이 모두 다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의 삶도 이 땅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과 상태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힘을 발휘하며 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마음이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당신의 약속을 신뢰하고 있음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공포하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이들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장차 올 일을 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이들이 눈을 뜨게 되면 그들이 누리고 추구하던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한심한 것들이었는지를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먼저 눈을 뜬 우리는 그들과 함께 더러운 똥구덩이에서 뒹구는 그런 눈먼 자들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들의 눈이 멀어있는지도 모르는 영적 소경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감지되는 이 감각적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견본품으로 남겨두신 그러한 복의 편린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복의 완성품인 것처럼 선전을 합니다. 그것을 성경이 다른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갈1:6~9)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고후11:4)

4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 하는구나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있었던 거짓 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다른 복음’은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였습니다. 비단 그 두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는 모두 그러한 다른 복음 때문에 몸살을 앓았습니다. 유대주의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완전하게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을 보태려 했던 사람들에 의해 급속히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신앙의 목적 또한 이 세상의 힘으로 귀결시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귀가 아프게 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영지주의입니다. 학자들은 영지주의의 창시자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마술사 시몬, 시몬 마구로라 합니다만, 영지주의의 경향은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에도 들어 있고, 불교와 힌두교 등의 범신론의 모태이기도 하며,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뉴 에이지 사상에 모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서운 사상입니다. 그것이 2세기경에 하나의 종교적 ‘경향’이요 ‘주의’로 집대성 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올라가서 이 우주의 중심으로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모든 죄의 세력들의 속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성경,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보, 심지어 마귀와 방불한 존재로 격하시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의 세계에서 말썽꾸러기이며, 천덕꾸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과 인간은 최고의 신에 의해 창조가 된 것이 아니라 저급한 창조신인 ‘데미우르게’(foolish creator)와 그를 추종하는 저급한 천사들의 작품이라 하여 이 세상을 악하고 열등한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최고의 신이 그러한 열등한 신인 데미우르게가 만들어 놓은 인간들 안에 ‘spark'라는 것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 ’spark'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들의 악하고 열등한 육신 안에 들어 있는 유일한 신적 요소입니다. 그 ‘spark’와 영지‘gnosis’가 만나면 거기에서 ‘enlightenment’ ‘해탈’ 혹은 ‘득도’의 상태가 되어, 저급하고 악한 육신에 갇혀있는 영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힌두교나 불교의 교리를 그대로 옮겨다 옪은 것 같지요?

 

그런데 그러한 영지‘gnosis’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아주 저급하고 악한 것으로 여기고, 영지를 받지 못한 자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짐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을 소수의 엘리트들인 자신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선택된 소수의 엘리트들의 행위이므로 모두 다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악하고, 영지‘gnosis’를 소유한 자신들만이 고귀한 자라는 인식 때문에 극도의 이기적인 행태를 띄게 됩니다. 내가 최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퇴폐적인 무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나 같이 고귀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추악한 인간들의 쾌락을 좇을 수 있겠는가’하여 극도의 금욕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극도의 선민사상과 이기주의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의 중요한 구원교리가 ‘self fulfillment’와 ‘narcism’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파고 들어와 기독교를 엉뚱하게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퇴폐를 조장했으며, 소수의 엘리트주의를 기반으로 한 성공주의와 선민사상이 기독교를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가현설’ ‘Docetism’(δοκέω‘~처럼 보이다’에서 유래)이 인기를 끌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 영지주의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라는, 인간의 옷을 입고 온 메시아는 얼토당토 한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도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육신은 악하고 열등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될 뿐 아니라 구원의 완성 단계가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처럼, 성도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아와 과부를 배려하거나 돌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부와 힘을 자랑을 하며 성찬과 예배를 오용했고, 심지어 근친상간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도 다 이 영지주의의 영향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오순절 직후의 초대교회는 자기의 모든 세상 적 힘을 교회 앞에 내어 놓고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단 사설들이 들어오면서 교회가 성공을 추구하고, 힘을 자랑하고,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등 아주 웃기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교회 안에 침투한 영지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구절을 몇 개만 찾아볼까요?

 

(고전8:1)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이 경계하라고 하는 지식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기독교인들은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사랑이라는 행위가 빠진 엉뚱한 지식만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전12:3)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교회 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 중에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교회 안에서 예수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 예수는 저주를 받으라고 욕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때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영지주의는 이천년 교회의 역사 내내 기독교에 붙어 있었고 오늘날의 교회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을 하기도 하고, 자기 안에 이미 ‘spark’가 있었고 그리스도는 ‘영지(gnosis)’를 가져와서 자신들에게 부어주신 후에, 인간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바로 직전에 하늘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자기들의 구원의 근거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라는 인간의 삶을 본받아 선한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자유주의 아닙니까?

 

거기다가 영지주의의 핵심 구원사상인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에 의한 성공주의가 기독교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게 다 영지주의의 영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영지주의도 아니고, 어설프게 변질된 영지주의와 유대주의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기독교도 아니고, 유대교도 아니고, 영지주의도 아닌 이상한 잡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과 지혜와 가능성을 주장하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신앙의 목표지점이라 우겨대는 이상한 복음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한 ‘다른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빌1:27~29)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 이니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이 복음을 굳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표기를 한 것은,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좇았던 엉터리 복음이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교회 안에 들어 온 유대주의와 영지주의 등에 의해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세상의 힘을 얻어내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게 만드는 그런 거짓 복음을, 당시 헬라 사람들이 유일한 복음이라 알고 있었던 ‘로마의 복음’과 비교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원래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부터 헬라 사람들이 ‘good news’라는 의미로 아주 흔하게 쓰던 단어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황제가 태어났을 때, 황제가 즉위를 할 때, 황제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때에 그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복음’은 강한 자가 힘의 원리에 의하여 이 세상의 힘을 쟁취해 내었을 때의 그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당시에 유대주의와 영지주의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기독교의 복음을 ‘로마의 복음’화 시켜버린 것에 대해 극심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 ‘생활하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 ‘폴리튜오마이’는 정치적 용어입니다. ‘어떤 나라의 시민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는 어구에서 ‘시민권’이 ‘폴리튜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로마의 시민으로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로마의 복음을 신봉하고, 로마의 시민처럼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절대로 강한 힘으로 약자를 밟아서 자신의 세를 늘리는 로마의 복음으로 사는, 로마의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빌1:29)라고 합니다. 믿음과 고난이 둘 다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복음 아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에서는 고난도 특권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이 세상의 힘을 축적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그런 로마의 복음을 신봉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이라는 특권도 감사함으로 받아낼 수 있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땅에서 ‘믿음’이라는 것을 발휘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러면서 교회가 견지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이렇게 쐐기를 박듯 기술합니다.

 

(빌2:5~13)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 substance까지 똑같은 것)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할파그모스, 전리품)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본체(몰프헤, substance까지 똑같은 것)이셨던 예수님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몰프헤)를 가지신 것처럼 당연히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도 포기 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을 받은 자로서 에서가 누리는 풍요보다 더 큰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것인 그 풍요를 이 땅에서 ‘할파그모스’ 전리품으로 당연하게 누리지 않았던 예수처럼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낮아지고 죽어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모든 것들의 왕으로 높이신 것처럼 그게 바로 승리의 삶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소원하게 하시며, 그들을 성숙시키고 완성시켜 가시는 것이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에게 허락된 신앙의 여정을 힘을 다해 성실하고 열심히 가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성공하고는 나중 문제인 것입니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우리의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설교를 듣다보면 은근히 방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은 악하고 열등한 것이고 언젠가 모두 불타버릴 것이므로 여기서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지주의 적 발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뚫고 들어와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존재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예수가 안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 예수는 우리 안에 성령의 모습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불가능함과 죄 성을 폭로하시면서, 그러한 불가능한 자 속에서 그의 삶을 대신 살아 내시는, 당신의 삶 또한 가끔 우리에게 경험케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자기부인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자기부인 속에서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 안의 예수의 행위는 나의 손과 발을 통해 나오게 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마치 나의 것처럼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나온 예수의 행위를 나의 행위로 카운트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시골에서 살아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논이나 밭을 갈기 위해서는 겨릿소에 쟁기를 지워야 합니다. 보통 두 마리 소에 멍에를 함께 메우는데 쟁기꾼이 보기에 왼쪽에 있는 소를 안소라고 하고 바깥쪽에 있는 소를 마랏소라 부릅니다. 안소는 보통 일에 경험이 많고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소입니다. 그 안소가 거의 모든 일을 합니다. 반면 바깥쪽의 마랏소는 안소 옆에서 안소가 이끄는 대로 쫓아가며 일을 배웁니다.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고 있지만 일은 거의 안소가 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소가 바깥쪽의 마랏소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깥쪽의 마랏소가 경험이 없고 무능력하여 안소의 일에 때론 방해가 되기도 하고 걸기적 거리기도 하지만 마랏소의 동행이 안소에게 위로가 되고 부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적합한 예화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사시는 예수는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고 계시는 안소와 같은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라는 안소는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라는 걸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행보를 그 안소이신 예수의 걸음에 맞추어 가며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멍에는 가볍고 쉽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는 능력도 없고 불가능한 사람이라 더 이상 못가요’하고 엎어져 버리면 우리를 끌고 가시는 안소 되신 예수가 전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주님에게 걸림돌만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예수의 은혜를 안 사람은 비록 자신의 능력이 미천한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인격이라는 것을 알고, 이토록 불가능한 우리를 위해 그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정말 인식한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그 인격이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 분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을 수 있을까요? 죄는 인격에 대한 가해 행위인 것입니다. 죄는 인격에 대한 폭력인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인격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인격 앞에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여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이 어찌 인격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감옥에 넣어 고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도 계속 죄를 지으실 수 있으세요? 여러분이 신호위반을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의 자녀를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을 한다면 여러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신호위반 하실 수 있으세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 하나님의 인격이 고문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인격에 고문을 가하는 일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이세상의 환경이나 처지나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힘의 결핍이나 소외,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부어주실 진짜 복의 견본품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에서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진짜 복을 온전히 받아 누리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에 힘을 쓰세요. 그건 다름 아닌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일에 애를 쓰십시오. 마랏소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하시란 말입니다.

 

���$���_@a�어 완전히 출산하게 되기까지, 그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들 또한 통곡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하나님의 징계, 철장을 가진 예수의 출격에 통곡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신랑의 선택에 의해 눈을 떠서 무엇이 행복이고, 어디가 우리의 목적지인지 알게 되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내어놓는 성품과 행위와 언어를 볼 때 도저히 나는 목적지에 도착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자기가 출산해 놓은 자식들이 세상에게 붙들려가서 도저히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마음에 통곡을 했다고 성경이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에 의해 선택은 되었는데 바벨론이라는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나라는 존재가 약속의 후손으로 도저히 완성될 것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으면 도저히 불가능할 뻔 했던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 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출생하시고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을 때에 성경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살아 올 수 없는 존재였던 영적 이스라엘, 그 약속의 후손의 어머니 라헬이, 도저히 그 자식이 살아올 것 같지 않은 절망감에 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 통곡을 해결하기 위해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죄로 말미암아 세상권세에 의해 사망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라헬의 자녀들을 건져서, 아기를 잃고 통곡을 하고 있는 라헬을 위로하기 위해,(내가 반드시 네 아들들을 돌려주겠다, 약속의 후손은 반드시 탄생하고야 만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이를 낳다 죽어 장사된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라헬이 산고 끝에 아이를 낳고 결국 옛 아담의 껍질인 라헬을 묻은 그 상징적인 장소 베들레헴에, 그 일을 실제로 완성하실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통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산고가 커도 그 해산이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도의 출산을 위해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참 행복, 구원에 도달 할 수 없는 그러한 죄인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분주하게 열심을 부리는,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무료함과 자신의 무력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약속의 후손들을 당신의 힘으로 돌아오게 하여 통곡하는 라헬들을 위로하겠다고 한 아기가 오신 것입니다. 거기서 통곡하는 라헬은 죽고 영원한 기쁨의 새로운 라헬, 즉 천상의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간단명료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계12:1~6)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가 이미 요한계시록을 다 공부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교회, 어린양의 신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그 여자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그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는 시편 2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여자인 교회가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 당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을 하여 ‘저에게는 예수가 필요 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성도의 완성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를 낳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고백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바벨론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항복을 받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 자세하게 공부를 했지요? 그런데 세상 바벨론이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왜 너희가 하나님께 항복을 해야 해? 너희도 충분히 능력이 있어. 너희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리고 이 풍성한 김밥을 좀 봐. 왜 너희가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라 생각 해?’하면서 여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결국 여자로 하여금 아이를 출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를 항복시키고야 마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출산을 앞 둔 라헬들인 우리가 광야에서 양육을 받으며 결국 예수를 출산할 수밖에 없는 자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예수지옥, 김밥천국’처럼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복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성도의 삶은 산고 끝에 죽는 라헬의 삶과 같이 ‘예수지옥’의 삶으로 이 땅에서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약속의 후손으로 완성이 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라헬의 죽음 아래에 약속의 후손 이삭의 죽음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 때까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손녀가 강간을 당하고 손자들이 대 살육을 저지르고 손자가 자기 아들의 아내를 강간하는 그 모든 험한 꼴을 다 보고 이삭이 죽는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 이삭이 자기의 후손으로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그 자손들의 삶을 봅니다. 그가 얼마나 탄식을 했겠습니까? 얼마나 통곡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 속에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고 야곱이 그 언약의 라인에 섭니다. 그런데 야곱도 역시 통곡하는 라헬처럼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통곡의 삶, 험악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즉 교회를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은 그렇게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며 통곡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곡의 삶 속에서도 홀로 열심히 나를 완성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의 은혜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요? 성도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성도는 죽어서 그의 삶 속에 살아 계셨던 예수의 이름만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후패해지고 예수가 흥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뭐 해드릴 생각마세요. 여러분은 그냥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항복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인되어지고 기각되어지는 우리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예수천당, 김밥지옥’의 삶임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여 어찌 하오리까’의 탄식을 내어 놓아야 하는 자들이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업적을 내 놓으며 ‘하나님 저 이렇게 잘했어요. 칭찬해 주세요’하고 교만을 떠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