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스펄전 시편 강해 143편1-12절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8:30

스펄전 시편 강해 143편1-12절

 

 

[개 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시편은 다윗의 다른 시편과 아주 흡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이 다윗의 시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다윗의 인생 행로가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한편, 이 시에는 다윗의 영혼이 스며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을 일곱 개의 참회 시편 중의 하나로 간주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시가 다윗의 죄악에 대한 참회라기보다 그의 순전성을 변호하고, 악담하는 자들에 대한 의분의 기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조차도 참회하는 상한 심령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참회 시라기보다 담대한 기도의 시이며, 죄악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시라기보다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간구의 시에 가깝다. 우리가 추측하는 바로는, 교회의 랍비들이 이 시편을 포함한 일곱 편의 시편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본시편은 예배 때 낭독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 시편은 마치 잠수부가 채취한 해산물을 가득 담고 있는 망태기처럼 복합적인 시풍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달콤할 뿐 아니라 쓰라리기도 하고, 신랄하기도 하고, 보배롭기도 하다. 다윗은 너무 혹독한 고통을 당한 나머지 조용히 기도하지 못했다. 고통에 압도당한 그의 영혼은 부르짖음으로써 기도했다. 이 시는 바로 이 같이 부르짖는 기도인 것이다. 다윗의 영혼은 참혹한 고난을 슬퍼하면서 심연의 나락으로 계속 떨어졌다. 그러나 그 영혼은 항상 최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시인은 잠깐 애통해 한다. 은혜를 구하는 그 기도자는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부르짖음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허리에는 날카로운 칼을 차고 기도한다. 본시가 끝날 즈음, 그 칼은 칼집에 고이 꽂힌다.

구성-이 시편은 "셀라"라는 용어를 통해 구분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자연스러운 구분법을 따르고자 한다. 따라서 이것 이외의 다른 어떤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이 시편의 깊은 내적 의미를 알려 주시기를 간구할 따름이다.

[강 해]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3.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1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시142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시를 시작했다. 이 시에서도 다윗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간구한다. 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간구, 곧 아무리 미약하고 비탄에 잠긴 간구라 할지라도 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두 가지 형태로 자신의 간구를 은혜로운 청취자 되신 하나님께 드린다. 즉 "들으시며", "귀를 기울이시고"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간구를 드리고 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열납되는 기도를 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청하는 간구를 반복해서 드린다. 이곳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권념해 주시기를 열망한다. 그러므로 그는 "들으시며"라고 한 다음에 "귀를 기울이시고"라고 부르짖는다. 우리 자신도 엄청난 고난에 빠졌을 때, 이처럼 특별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 이곳에서 다윗은 대적들을 향한 자신의 소송을 의로운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소망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고소당한 다윗의 사정을 들어주신다면, 다윗은 의기양양하게 석방될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확신했다. 가끔, 다윗도 세상 왕의 법정에 소송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소송을 기도라는 형태로 전환했으며, 그것을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 드렸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소송을 들어주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내 기도를 들으시며"라고 부르짖는다. 사실, 다윗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전 인생이 소송에 걸리지 않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가 소송에 걸릴 경우 무죄로 석방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이 일생동안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간구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간구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본문에서처럼 "간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성도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들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공의를 변호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길 원한다. 우리가 감히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간청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축복이다. 우리는 복음의 원리에 근거해서 이 같은 간구를 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라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가장 엄정하신 하나님의 성품까지도 자신을 의뢰하는 겸손한 사람의 편을 든다. 그분은 기도하는 사람을 신뢰하신다. 우리의 관심이 집중된 기도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 융화될 때,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우리 안전의 징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은 우리편이다. 우리는 좌우로 그분의 보호하심을 입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실제적인 것으로서 올바른 모든 기도에 온전히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지 않는 간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기도는 불의할 뿐만 아니라 약속되지 않은 일들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다윗은 속죄소에서 자신의 청취자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는 심판의 자리에 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결백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완전함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는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종이 이같이 겸손하게 간구했을진데, 하물며 죄인된 우리들은 더 더욱 겸손히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눈은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분은 아무리 작은 범죄라도 분별하시고 판단하신다. 모든 영혼의 비밀을 익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어떤 거짓과 속임수도 숨겨질 수 없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율법을 통한 만인 정죄설(모든 인간이 율법 아래서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교리-역자 주)을 주장한다. 후일 사도 바울도 이와 동일한 진리를 선포했다. 다윗 당시에 선포된 이 교리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게 보전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어떤 사람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자신을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시험대에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거짓된 시대는 인간이 육체적으로 완전하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함으로써 교만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헛된 영광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도 율법 아래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들도 인간일 따름이며, 더욱이 가련한 인간의 표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죄인으로 정죄될 것이다. 생전에 그들은 겸손한 죄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선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서는 그들보다 더 큰 죄인으로 정죄되는 것이다.

3절.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원수는 나를 끈질기게 추격한다. 그는 종종 마치 내가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처럼 나를 협박한다. 이처럼 원수의 공격이 시편 기자의 영혼과 삶 한가운데 집중되었다. 우리의 원수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에게 가장 나쁜 짓을 저지른다. 그들의 공격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보화 같은 성도의 삶을 노략질한다.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다윗은 잔인한 대적들 때문에 슬픔에 빠졌다. 그는 내동댕이쳐져서 땅에 엎어진 사람 같았다. 그는 공격자들로부터 짓밟혔다. 악담은 그의 영혼에 아주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파괴하는 폭행과 같았다. 그의 영혼은 마치 주먹에 난타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대적은 다윗의 인생을 땅에 엎어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을 더 깊은 곳, 심지어 무덤 속에까지 집어넣었다. 이것보다 더 낮은 곳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악인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를 지옥의 어두운 곳에 가두려고 한다. 다윗은 대적 사울 때문에 불안한 영혼처럼 이 동굴 저 동굴로 쫓겨다녀야 했다. 그는 밤에도 돌아다녀야 했고, 낮에도 불안한 영혼이 되어 자신을 숨겨야 했다. 그의 영혼은 편안한 죽음을 맞는 일까지도 오랫동안 거부당했다. 의인조차도 그를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윗을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망각했다. 악인은 가엾은 다윗의 얼굴에 조롱을 퍼부었다. 그들은 다윗의 얼굴을 산 자의 것이 아닌 무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둠 그 자체로 여겼다. 가엾은 다윗!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 자신이 죽은 자와 똑같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만일 우리가 이 같은 상황에 빠진다 해도,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서 죽은 자들이 거하는 흑암에 우리를 거하게 하실지라도 그것은 잠깐일 뿐 결국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동거하게 하실 것이다.

4절.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다윗은 목석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추방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의 인격에 가해지는 잔혹한 공격 때문에 속이 상했다. 그는 당혹감과 낭패감, 그리고 고독과 슬픔을 느꼈다. 그 역시 이성과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박해자들이 가하는 부당하고 근거 없는 적대감 때문에 영혼과 육체에 고통을 느꼈다. 특히 무서운 고독감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는 잠시나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영혼은 너무 곤핍한 나머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혹독한 고통을 당하사 본절과 흡사한 고백을 하셨다. 즉 그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5절.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우리가 자신을 격려할 만한 새로운 어떤 것을 찾지 못할 때, 과거의 일을 상기해 보자. 한때, 우리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구원과 감사와 기쁨의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러한 나날들이 다시 오지 않겠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수세기 전에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그렇다면 그 같은 구원을 다시 베풀지 않으시겠는가? 우리는 회상할 많은 과거를 소유하고 있다. 그 기억들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만족스러운 것이다. 이 같은 기억들은 벌들이 찾아가는 꽃과 같다. 즉 신앙인들은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들로부터 현재 필요한 꿀을 얻는다.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구원을 얻기 위한 나의 인간적인 모든 수고는 나를 상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주님께서 베푸신 일들은 나를 소생시키십니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의 행위가 그대에게 격려가 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묵상해 보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의 역사를 반추하고 상고해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보다 폭넓고 심오한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일들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하나하나는 가치 있는 경건한 묵상거리다.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다윗은 이미 이전에 이 같은 묵상을 했다. 심지어 그는 최악의 시련 가운데서도 그렇게 했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 세계는 곧 하나님이 지으신 성경책과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창조 세계라는 책 안에서 주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을 발견했다. 그는 그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계속해서 정독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공교한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싸매는 향유와 근심을 덜어 주는 따뜻한 위로를 얻었다. 우리 자신의 손으로 성취한 일들이 우리를 슬프게 할 때, 주의 손으로 만드신 일들을 바라보라. 본절에 나타난 "기억", "묵상", "생각"은 마치 하나로 연합되는 세 가지 은혜와 같다. 즉 그것은 질병에 걸린 절망적인 영혼을 추스려 주는 은혜다. 다윗은 수금을 연주해서 악한 영을 사울에게서 쫓아 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교를 통해서 자기 영혼의 절망을 쫓아 내고 있다.

6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갈망으로 불타올랐다. 이 같은 갈망이 결국 그의 내적인 소망을 강하게 표출시키는 요인이었다. 발이 묶인 죄수라 할지라도 그가 자유를 갈망한다면 손을 내밀어 구원을 호소할 것이다. 본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하고 있다.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갈라지고, 쪼개진 대지가 입을 벌리며 무언의 호소를 하듯, 시편 기자의 영혼은 주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산산이 갈라졌다. 하늘에서 내리시는 단비가 그를 성소에서 소생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섭리에서 그를 제외시킨다면, 다윗의 영혼은 바싹바싹 타들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 영혼이 주를 향하니이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외에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도 열었다. 그는 진실로 여호와를 갈망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어둠 속에 거하거나 그 어둠에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만사는 평강과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다.

"셀라." 이제 휴식할 시간이 됐다. 왜냐하면 다윗이 드린 기도가 마침내 고통의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수금 줄과 다윗의 심령의 줄 모두는 지금까지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후반부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 두 가지 모두를 조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8.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9.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2.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7절.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만일 주의 응답이 연기된다면, 내가 구원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때늦은 구원이 될 것입니다. 곤경에 처한 기도자는 현재 피곤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다. 그의 생명이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으며, 일분 일초가 중요하다. 이토록 짧은 시간이 그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그 어떤 호소도 본절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응답을 강력하게 재촉하지 못한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달려가 돕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극도의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발에 날개를 달고 내려온다. 우리의 영혼이 곤핍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우신다. 그분은 바람 날개를 타고 길을 재촉하사 우리에게 임하신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신실한 심령의 소유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그에게 죽음과 완전한 멸망이나 같다. 하나님께서 교제를 거부하시면 우리의 심령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영혼의 모든 힘도 사라진다. 특히 그분이 모습을 감추시면 대적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자신의 뜻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므로 핍박당하고 있는 다윗은 자신이 마치 멸망당할 것 같은 상태에 있다고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등을 돌려 버리시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수고에 은총을 내려 주시면 우리는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돌리시면 모든 수고는 헛될 뿐이다.

8절.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여호와여, 나는 슬픔 때문에 귀머거리가 될 지경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들을 수 있게 하소서. 나를 기쁘게 하는 목소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하심을 듣게 하옵소서. 나는 지금 즉시 그 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아침, 곧 여명의 첫 시간에 그 음악을 듣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영혼의 이슬이요 여명과 같다. 그것을 깨달을 때, 절규의 밤이 지나가고 기쁨의 아침이 시작된다. 우리의 귀에서 근심의 소음을 제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사랑의 증표로 우리 귀를 기쁘게 해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하고 견고한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의 귀를 만드신 분이 또한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실 것이다. 사랑 그 자체이신 그분이 은혜로써 우리의 심령에 인자를 베푸실 것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위대한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실 뿐 아니라 알게 하신다. 우리의 영적 지식은 여호와께 있으며, 신령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서 온다. 우리는 어느 곳으로 다녀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계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겠는가? 계명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옳은 길을 쫓을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자기의 영혼을 일깨워 일어서고 있다. 신앙은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은 결국 일어설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소망이 사그라드는 것을 방치하면 안 된다. 도리어 매일매일의 슬픔으로부터 빠져 나와 일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참 지혜다. 다윗은 인생의 여정에서 어떤 고난을 만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했고,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만일, 영혼 그 자체 안에 소생할 힘이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소생시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도의 참된 원리이다. 영혼을 소생시켜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애쓸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모범적인 신앙 행위에 주목하자. 우리의 심령이 낙심될 때, 그것을 소생시키기 위해 진실된 노력을 기울이자. 우리의 영혼이 안일함에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자.

9절.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면 여호와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다. 기도라는 무기는 우리에게 창과 방패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다윗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 박해를 통해 이같이 선한 믿음의 행위를 배웠다. 악한 바람이 불어 올 때 우리는 여호와께 피한다. 그러나 결국 그 바람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날라다 준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은 결코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참으로 거룩한 용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숨겨 주신다. 심지어 악이 보이지 않는 곳에 우리를 숨겨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은신처가 되신다.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게 예수님께로 피하는 것이 좋다. 성도들은 주님의 구속 역사로 완성된 진홍빛 덮개 밑으로 온전히 피할 수 있다. 그곳에 거하며 안식을 맛볼지어다. 시인은 7절에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를 숨겨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한편, 시인이 "주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으며,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갈 것이다. 설령 그 자신이 하나님께 퇴짜를 맞는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을 갈망하는 영혼을 만족시켜 주지 않고 버리시겠는가? 여호와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10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누가 주님처럼 나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저에게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도 주실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주님을 소유하고 있다면, 어찌 주의 완전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진실하게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 복종하는 사람, 곧 전심으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나를 가르치소서!' 이 얼마나 순수한 기도인가! "나를 가르쳐······행케 하소서!" 이 얼마나 실제적인 기도인가!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이 얼마나 완전한 복종의 기도인가? 여호와의 모든 뜻을 행하려 하오니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뜻은 가장 훌륭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그 교훈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진실로 신실하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피해서 자신의 보호자 되시는 그분의 뜻을 배우며 안락한 삶을 보내게 된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려는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오랫동안 버림당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신이 선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영이시며 완전한 선이시다. 그분의 본질은 선함과 인자함과 거룩함이므로 그분은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라는 기도보다 훨씬 더 큰 선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다윗은 의인의 회중에 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즉 자신을 추방시킨 땅이 아닌 다른 어떤 땅에 거하기를 원했다. 그는 은혜의 평지, 평화의 대지, 친교의 옥토에 거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곳에 당도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에 의해 인도받아야 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선한 땅으로 가장 잘 인도하실 수 있다. 언약의 땅이요, 완전한 땅이요, 약속의 땅에서 얻는 분깃에 비교될 수 있는 유산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가르치시는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셔서, 자신이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그 길은 멀고 가파르므로 신령한 인도자 없이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여행 중에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즐겁게 여행할 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넘어지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더 밝은 빛과 더 풍성한 생명을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가르치시고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으며, 느림보 순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여호와께서는 생명의 주요, 생명의 수여자이시다. 오직 그분에게서 나오는 생명만이 우리를 소생시키고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오직 그분만 바라고 있다. 하나님의 종도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주재이신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종종 죽음과 흡사한 상황에 처한다. 그럴 때 "나를 살리시고"라고 적절하게 부르짖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을 만한 무슨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가? 전혀 없다. 정말로 전혀 없다. 우리는 단지 이것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간구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생시키는 것은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 속에 그 얼마나 복된 찬양들이 서로 조화되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한 가지 사실, 곧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고백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의 삶을 영적으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신다면 그분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우리들도 더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여호와께서 오른편에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백성이 징이 박힌 신발을 신은 악인에게 짓밟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믿음의 공로를 잊어버리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다. 도리어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다윗은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 근심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 또한 근심에 사로잡혀 깊은 바다 같은 근심에 함몰되었고, 감옥 같은 근심에 갇혔다.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근심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내실 수 있었으며, 특히 그의 영혼과 심령을 시궁창으로부터 끌어내셔서 소생시킬 수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며, 간구하는 자는 담대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실 때 우리의 근심은 속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12절.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다윗은 본절의 간구가 성취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본절과 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다. 본절의 기도는 공표하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공표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양심상, 본절과 같은 기도는 사실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약의 가르침에 비쳐 볼 때, 이 같은 기도의 취지는 율법에 부합된다. 이 기도는 공의로운 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사랑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다. 다윗은 지극히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절에 나타난 내용이 문자 그대로 사울에게 임하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그러므로 나의 대주재이신 여호와여, 내게 역사하사 나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대적들과 싸울 때, 내게 승리를 주소서. 이것은 용사의 기도이며, 전쟁터의 연기와 먼지가 자욱한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 같은 기도는 헛된 간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것보다 더 나은 기도의 길이 보장되어 있다.

[주해와 설명들]

시 143편 전체. 다윗의 이 시편은 전편과 잘 조화된다. 다윗은 시 142편에서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했다(1절). 그런데 이곳에서도 그는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라고 반복해서 부르짖는다. 또 시 142편에서 다윗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3절)라고 했는데 본시편에서 그는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4절)라고 말한다. -존 메이어.

시 143편 전체. 시 138편에서 시 145편까지 고루 언급되는 예언은 사무엘하 7:12 등에 나오는 예언과 똑같다. "네 수한이 차서······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징계하려니와 내가······내 은총을······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2-16). 이 시편과 이스라엘 역사를 연관시켜 주는 단서는 자주 등장하는(즉, 본시편과 삼하 7:12 이하의 성경 구절-역자 주) "주의(여호와의) 종"이라는 단어다. 본시편 2, 12절에서 보듯, 시간이 흐른 다음 다윗은 자신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다윗에 대한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삼하 7:5)이라고 하셨다. 다윗은 이것에 의지해서 계속 간구한다(삼하 7:5; 9-21; 25-29).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2절). 이 같은 다윗의 고백은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6절). 이 부르짖음은 시편 63:1에 나타나는 다윗의 고백과 통한다. 그 당시,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요단 접경 지역에 있는 유다 광야에 머물렀었다. 그는 이때,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시 63:1)라고 고백했다. 이스라엘 역사상의 사건이 다시 한번 이 시편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삼하 16:14)하였으나 시바가 가져온 과일을 먹고 힘을 얻었다(삼하 16:2). 사무엘하 17:2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시 143편에 나타나는 '갈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시편 63:1과 사무엘하 16:14에 나타나는 "곤비(하다)"와 의미가 같다. 이 말은 똑같이 '숨이 차다', '곤하다', '갈망하다'는 뜻이다. -앤드류 로버트 포셋(Studies in the CL. Psalms, 1876).

시 143편 전체. 이 시를 지을 때, 다윗은 어떤 절망적인 위기 가운데 있었던 것 같다(이 같은 추측은 거의 확실하다). 전편에서 보듯, 그가 사울을 피해 동굴로 피신했는지, 아니면 압살롬을 피해 동굴로 숨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시에서 다윗은 원수들의 악행을 하나님께 절실하게 기도하고 그 기도를 들어달라고 소망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문에 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또 자신을 회복시키고 성령으로 자신을 주관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만일 이 같은 간구가 응답되면 그는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거룩하게 헌신할 것이다. 소중한 이 시편에는 다음의 세 가지 교훈이 들어 있다. 첫째, 자기 죄에 대한 고백. 둘째, 자신의 고통에 대한 간구. 셋째, 구원과 영적인 은혜를 구하는 기도.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시 143편 전체. 이 시에서 저자의 헌신적인 마음이 영적인 문제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현실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어떻게 자유롭게 전환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다음 은총을 구한다. 대적들을 묘사한 다음, 구원을 간구한다. 자신의 암담한 현실을 한탄한 다음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와 지혜와 총명을 구한다. 그런 다음, 다시 그의 영혼은 원수들에 대한 생각으로 압도된다. 그는 보호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피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0절). 이것은 특별히 중요한 기도다. 다윗은 이미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제 그 길 안에서 걷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존 포셋(John Fawcett, 1769-1851).

시 143편 전체. 이 시는 재의 수요일(사순절의 첫 날-역자 주)에 교회에서 읽혀졌다. 그리고 일곱 편의 참회 시편 중 제일 마지막에 해당한다. 종종 일곱 편의 참회 시는 '특별한 시편들'로 불렸다. 이것들은 가장 완벽하고 신령한 참회를 담고 있는 시로 인정되어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이 시들은 종종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악을 정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시 6편은 분노, 시 32편은 교만, 시 38편은 탐심, 시 51편은 부정, 시 102편은 탐욕, 시 130편은 질투, 그리고 본시편은 무관심 또는 부주의를 각각 정죄하고 있다. -버건.

1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오 주여, 만일 주님이 듣지 않으신다면 나는 기도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듣기만 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라고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시면 내 기도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면 주님이 이미 들으셨던 기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온전히 들어주소서. 제가 간구할 때, 온전히 귀를 기울여 주소서. 간구는 보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다. 그러므로 보다 큰 관심이 필요하다.

본절에 나타난 용어는 얼마나 기교 있게 사용되어 있는가? "들으시며"와 "귀를 기울이시고"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종종 듣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로 취급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로는, 가나안 여인이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즉시 들어 주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의 부르짖음이 다음 단계, 곧 간구의 형태가 되기 전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무엇을 들으시든 간에 그분이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신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응답하시지 않고 다만 귀만 기울이신다면 그것 역시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오 주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내 소망이 이루어집니까? 내 기도는 단지 씨앗일 뿐입니다. 그 씨앗에서 열매를 내고 추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만일 아무 응답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어떤 것도 추수하지 못합니다. 만일 주께서 "의로" 응답하지 않으면 나는 쭉정이밖에 추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내게 응답하여 주시되, "주의······의로" 응답해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응답을 하시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응답은 의로운 것이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는 약속도 하나님의 의로운 응답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강도에게 하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말씀도 의로운 응답이었다. 그러므로 주여 내게도 의로운 응답을 내려 주소서. 그리하면 나의 소망의 열매가 요셉이 예언했던 7년간의 풍년 때처럼 풍성할 것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내게 응답하소서." 이곳에서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세 번에 걸쳐 간절히 간구한다. 그는 시 5편에서 이와 동일한 기도를 들어 달라고 네 번에 걸쳐 간구했다. 그가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거듭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장 신속하고 신중하게 자신의 기도에 귀기울이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자기 영혼을 신속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원한다. 천사가 백부장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 것처럼 말이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행 10:4). -아치볼드 심슨.

1절.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께서 약속을 지키신 이유는 그분의 의로우심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장차 약속을 지키시는 까닭은 그분의 진실하심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께서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어떻게 제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시지 않아도 주는 여전히 의로우십니다. 설령 내게 응답하지 않아도 주는 여전히 진실하십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분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과 조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다. 이 같은 용서의 은총이 그분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인 예수님께 공의롭게 부여되었다. 주님은 죄인의 모든 의무를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이것은 너무나 소중한 진리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이 같은 진리를 기뻐하고 의지한다. 이 진리를 절실히 깨달은, 착하고 겸손하게 살아 온 나이든 여자 성도가 있었다.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역자 한 사람이 임종을 앞둔 그녀에게 영생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너무나도 침착하게 "나는 여호와의 공의를 의지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그 공의는 내게 있는 공의가 아니라 내가 의지하는 대속자에게 있는 공의입니다."-로버트 맥도날드(Robert Macdonald, From Day to Day; or, Helpful Words for Christian Life, 1879).

2절. "주의 종." 원래 종은 다른 사람의 뜻에 복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종이 되는 길은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면서부터 종이 되거나, 팔려서 종이 되거나, 전쟁에 져서 종이 되거나, 자원해서 종이 되는 경우다. 어떤 사람은 이 방법으로, 다른 사람은 저 방법으로 종이 되었다. 주인집에서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종이 된 사람이 있는 반면, 주인이 돈으로 산 종도 있었다. 주인의 칼과 활에 정복당해 포로가 됨으로써 종으로 전락한 자도 있었고, 일을 얻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사람도 있었다. 신자는 아주 독특하고 특징적인 방법으로 종이 되었다. 즉 신자는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서 더 온전한 종이 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정복당함으로써 종이 된다. 그렇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다시 언약을 체결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과 같은 네 가지 방법 중의 어느 한 가지를 통해서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방법 모두를 통해 종이 된다. -앤드류 그레이(Andrew Gray, Gospel Contrasts and Parallels, 1805-1861).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다윗은 이미 1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촉구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갑자기 그 항소인(다윗-역자 주)은 공의를 행치 말라고 간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구절은 분명 욥기에 나타난 역설적인 말을 요약하고 있다(욥 4:17; 9:2, 32; 14:3; 15:14; 22:4 등 참조). 종종 욥은 자신의 무죄를 강하게 변호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자신의 말씀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또한 자신이 처한 시련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다. 의인은 종종 자신의 인격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한다. 또 그는 의로운 재판관이신 여호와 앞에서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즉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서 나온 공로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 효과가 없다.

-아글렌.

2절. 다윗은 무조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라는 간구를 드리고 있지 않다. 만약 그가 이 같은 간구를 했다면 이것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넘보는 죄였을 것이다. 여기서 다윗이 심판을 행치 말라고 간구하는 이유는 아직도 자신이 행해야 할 의무와 본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무와 복종을 다 이행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우리는 공의롭게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해야 한다. -존 오웬.

2절. 다윗은 '대적, 반역자, 배반자,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주의 종에게"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의 종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거룩하게 섬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온전하게' 주를 실제적으로 섬기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다윗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여, 가장 거룩하고, 순결하며,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리고 여호와께 간구할 때,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토머스 라이(Thomas Lye, The Morning Exercises, 1621-1684).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미 심판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이는 당신의 종(다윗-역자 주)이 그(예수 그리스도-역자 주)와 함께 심판을 받았으니 이제 심판하지 마시라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매튜 헨리.

2절. 가장 교만한 이방 철학자나 가장 엄격한 바리새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없다. 과거의 모든 성도들보다 더 거룩한 사람조차도 심판의 잣대 앞에 의롭게 설 수 없다. 하나님은 심판석에 있는 문에 못질을 하셨다. 율법의 의를 통해서 생명과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통해 천국으로 가는 길은 마치 북극을 통해 인도 제국으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해 반드시 얼어죽을 것이다. -윌리엄 거놀.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몇 해 전, 나는 폐병으로 죽어 가는 젊은 여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우리 동네에 이사온 지 몇 주일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소녀 시절, 그녀는 우리 교회의 주일 학교에 다니기도 했었다. 그녀를 방문해서 느낀 것은 그녀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계곡에서도 희망과 위안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주일 학교 때 배운 시편 한 구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손을 모아 쥐고 그것을 반복해서 외우는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으며, 하얀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오, 주여.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죄인은 결코 여호와의 목전에 설 수 없습니다. -제임스 콤퍼 그레이(James Comper Gray, The Biblical Museum, 1879).

2절.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한 경건한 독일인이 있었는데, 그는 죽을 때가 되자 심한 공포와 근심에 사로잡혔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그렇게 봉사도 많이 하고, 신실하게 살았는데 왜 두려워합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오, 사람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은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존 트랩.

2절. "심판을 행치 마소서."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해 완벽한 자로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 같은 기도를 했다. 본절은 그들이 추구해온 신앙 노선에서 따온 문학적 비유인 것이다(욥 22:4, 5과 비교).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우리들도 죄악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니엘 크레스웰.

2절. 이 구절은 일생 동안 다윗에게 붙어 다닌 그의 중대한 과오나 범죄 행위를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윌리엄 월포드.

2절. 가장 무거운 나의 죄악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한 나의 선행조차도 나 자신이 아담의 후손임을 증거해 준다.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

2절. 나는 내 죄를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의로움조차도 내세우지 못한다.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1-1153).

2절. 한 청년이 내게 "저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자네의 어머니나 형제가 그대의 모든 것, 심지어 말과 생각과 행위와 마음속의 욕망까지도 알기를 원하는가?" 잠시 후에 그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생각을 아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존 거프(John B. Gough, Sunlight and Shadow, 1881).

3절. "원수가." 우리는 근심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근심은 기도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다윗이 당한 고통은 더 더욱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았겠는가?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이 같은 고통은 기도하게 하는 가장 적절한 사유가 아닌가? "원수"가 내게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인가? 그는 모든 사람의 원수가 아니다. 단지 나 혼자만을 지목해서 대적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모든 군대가 대적하지 못하는 그를 나 혼자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 나를 대적하는 원수다. 여호와여! 주의 종들이 핍박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계십니까? 주의 섭리가 방해받고 있는데 보고만 계십니까? 주의 종들을 보호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주는 나를 버리십니까? 그들이 행하는 악이 하찮은 것이라면 아무 불평 없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께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세 가지 커다란 고통을 가져옵니다. 즉 엄청난 박해와 파괴, 그리고 추격을 가져옵니다. 내 영혼에 가해지는 핍박보다 더 괴로운 핍박이 어디 있습니까? 원수는 다름 아닌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습니다. 종종 내 육체를 핍박하기도 합니다. 재물을 손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입니다. 원수는 영혼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내 영혼을 정복할 수만 있다면 나의 육체나 재물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헛된 안전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원수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하지 않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영혼을 핍박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원수는 곤궁에 처했을 때뿐 아니라 번성하고 있을 때에도 핍박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응용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나를 또 다른 욥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는 아첨이나 가벼운 핍박이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제 싸우고 때리는 것으로 방법을 바꾼다. 그의 타격은 결코 경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내 생명을 땅에 엎을" 정도로 때리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막지 않으시면 나는 더 낮은 곳까지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는 나를 천국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가능한 아랫쪽으로 멀리 내려칠 것이다. 이제 그는 낮은 곳에 내동댕이쳐진 나의 모습을 본다. 그는 그곳에서도 내게 쉼을 주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흑암의 제왕으로 행세하며 나를 사로잡고 어둠 속에 가둔다. 나는 여관에 머무는 사람처럼 하루 이틀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도리어 집에 거주하는 사람처럼 오랜 기간 그곳에 붙잡혀 지낸다. 그가 나를 거하게 한 곳은 보통 흑암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거하는 흑암, 죽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 거하는 최악의 장소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종종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은 마치 세상에 생존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완전히 잊혀진다. 아, 아! 나는 정말 이 같은 곳에 있다! 나는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오랫동안 흑암에 갇혀 있다. 나를 찾으려는 사람은 차라리 무덤이나 비석으로 가야 할 것이다. 흑암 가운데 사는 것은 죽음의 장소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종종 밝은 햇빛을 원한다. 빛이 없으면 촛불로 대신할 수 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완전한 흑암에 갇혀 있다. 그곳에는 복음의 빛도 희미한 호롱불도 없다. 나는 한때,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시 18:28)라고 확신 있게 고백했다. 그러나 이제 그 같은 고백을 할 수 없다. 죽은 자의 몸이 차갑고 딱딱해져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은 죄악 속에서 서서히 굳어지고 뻣뻣해진다. 따라서 내 영혼이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지 오래된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리처드 베이커.

3절.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나는 산 채로 매장된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다시 행복해지기를 꿈꾸는 것은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을 꿈꾸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다윗은 광야의 이름 모를 곳과 동굴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구했다(삼하 17:16). -토머스 펜턴.

4절.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용감한 장수였다. 그런 그도 종종 극심한 곤경에 빠져서 거의 실족할 뻔했다. 그는 전나무처럼 부르짖었고, 삼나무처럼 떨었다. -매튜 헨리.

4절 중반절. "내······속에서." 직역하면, '나의 중심에'이다. 이 말은 다윗의 심령에 큰 고통이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 암시해 준다.

"참담하니이다." 이것보다는 다음과 같은 히브리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 '혼절하다'라는 번역이 더 낫다(사 59:16; 63:5; 단 8:27). 갈대아역, 70인역, 불가타역, 아람어역, 시리아역 등은 이 말을 '충동되다'로 번역하고 있다. -앤드류 로버트 포셋.

4절. "참담하니이다." 이것보다는 '너무 놀라서', 곧 문자 그대로 '놀라움 그 자체'라는 표현이 더 좋다. 다윗의 마음은 자신이 고통당하는 이유를 알려고 애쓰다가 참담해졌다. 그는 당혹한 마음으로 고통 그 자체를 숙고해 보기도 했다. 이 같은 다윗의 행동은 자신의 신앙을 반성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스튜어트 퍼론.

4, 5절. 위안만을 바라고 산다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 다윗조차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목격한다. 그의 영혼은 상했고, 마음은 참담했다. 거룩하신 예수님도 이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던가? 그분이 당하신 고통이 무겁지 않았던가? 그분의 영혼은 거의 죽을 정도로 극심한 슬픔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부의 뜻에 대한 구세주의 믿음과 복종이 이 같은 흑암의 시간 속에서보다 더 밝게 빛난 적은 없었다. 다윗의 믿음도 이 같은 때에 가장 빛났다. 그의 시련이 큰 만큼 그의 믿음도 위대했다. 찬양의 높은 산에 오르고, 시온 산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그래서 그가 가장 훌륭한 인물로 비춰진 때는 이 같은 고통 속에서 분투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는 어딜 가나 고통받았지만 동요되거나 당황하지 않았으며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다. 핍박받았으나 버림당하지 않았다. 내동댕이쳐졌으나 멸망당하지 않았다. 그는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무기를 전혀 가지지 못했고, 자신의 소망을 지탱시켜 줄 만한 것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순전함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을 주목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라고 고백한다. -존 포셋.

5절.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묵상하며." 이 같은 묵상이 상한 내 영혼에 안식을 준다. 비참한 내 마음에 위로를 준다. 나는 종종 요나를 생각한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져 물고기에게 삼키웠고, 그러다 결국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종종 요셉을 생각한다. 줄에 묶여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결국 살아났던 그를 생각한다. 그런 다음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제한되는가? 하나님께서 최악의 고통에 빠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현재 내가 처한 고통에서 나를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리처드 베이커.

5절.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더 큰 열심으로 장차 하나님을 바라자. 포도원과 과수원과 추수하는 들판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아름다운 새의 깃털과 만발한 과일 나무의 꽃들과 아름답고 보드라운 꽃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무성한 나무 잎사귀들과 황무지에 듬성듬성 핀 히스(보라색 또는 분홍색의 꽃이 피는 화초-역자 주)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기름진 옥토의 풍요로움과 영원히 존재할 험준한 언덕의 장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졸졸 춤추며 흐르는 개울물과 바다의 장엄한 조류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무지개의 화려한 색깔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의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부드럽게 내리비치는 달빛과 찬란한 일몰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맑고 푸른 하늘과 기묘하고 화려하게 떠다니는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눈 덮인 겨울 풍경과 한 여름 정오의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처녀처럼 사랑스러운 봄과 우수에 깃든 조락의 가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자. 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바라자. 피곤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응시하자. 하나님은 능력이실 뿐만 아니라 지혜이시며, 권능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시며, 영광이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모메리(A. W. Momerie, The Origin of Evil, and other Sermons, 1881).

5, 6절. "내가······생각하고", "손을 펴고." 묵상은 기도를 돕는 시종과 같다. 묵상은 간구를 하기 전이나 간구한 후에 시중을 든다. 이것은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가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기도할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 그리고 이것은 씨를 뿌린 다음 써레질을 해서 씨를 덮는 것과 같다. 농부가 거름으로 곡식을 키우듯, 묵상은 우리의 심령을 기도로 채운다. -윌리엄 거널.

6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거지가 동냥을 하듯 손을 내민다는 의미다. 이곳에서 말하는 동냥은 손쉽거나 하찮은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보다 힘들고 값진 행위이다. -존 트랩.

6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주의 손으로 나를 잡아 주께 이끄소서. 이것이 주를 향한 나의 소망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6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찾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영혼의 본질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은 영혼을 보살피는 분이시며, 오랜 옛날부터 심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같은 진리를 전파해 왔다. 히브리 시에도 이 같은 탁월한 진리가 숨어 있어서 우리가 히브리 시를 음미할 때, 이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진실된 시는 하나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과학적인 표현을 통해 위대한 종교적인 진리를 나타냈다. 시편에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통찰력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표현을 가리켜 절제된 영감을 통해 자연을 가장 현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위에 사용된 시어들은 자연적인 비유를 통해 영적인 진실과 자연계의 법칙을 얼마나 세련되게 나타내 주는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인간은 자기 영혼의 시냇물을 찾는다. 시냇물은 물이 부족한 쪽으로 흘러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갈급한 사람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히브리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매우 자연스럽고 경건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불경스런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마치 제비가 둥우리를 찾아가듯, 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시적 상상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자신 내면의 자아와 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같은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모든 뜨거운 소망 속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다. 그들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갈망했다. 그들이 정말 피곤을 느꼈을 때는 자신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을 때였다.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영혼의 소유자, 아니 조금의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부러워할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찾는 일을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얼마나 소박하게 기도했던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로 덮어 달라고, 주의 은밀한 처소에 숨겨 달라고, 약속하신 땅에서 지켜 달라고, 영원하신 팔로 안아 달라고 얼마나 진실하게 기도했던가! 이들이야말로 자연과 진정으로 교감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나무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한여름의 석양에 노니는 하루살이처럼 기쁘게 자기 삶을 살았다. 그들은 삶의 애환을 서로 나누고, 이것을 통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더 가까이 가고 더 온전히 헌신하길 원했다. 즉 "주는······나의 분깃이시라"(시 142:5)는 고백을 하길 원했다. 이상과 같은 모든 진실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부터 스베덴보리까지, 어거스틴으로부터 슐라이어마허에 이르기까지 계속 전파되었다. 히브리 시인들도 인간의 모든 필요를 완전히 채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계속했다.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가장 탁월한 덕목도 이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시 46:1)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덜 세련되고, 노련미가 부족한 초기 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선언처럼 고상한 표현이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헨리 드루먼드(Henry Drummond,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1884).

6절.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이같이 갈급한 심령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세상적으로 갈급한 사람은 많다. 술에 갈급한 사람(신 29:19), 세속적인 것에 갈급한 사람(합 2:5), 쾌락에 갈급한 사람, 곧 자신의 배가 우상인 사람(빌 3:19), 명예에 갈급한 사람(요삼 9절), 악에 갈급한 사람, 곧 피에 갈급한 사람(시 5:6) 등이 있다. 이 같은 것을 갈망하면 은혜를 갈망하지 못하게 된다.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없으면 우리는 지옥의 음침한 갈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눅 16:24). 만일 거룩한 갈급함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은혜받을 만한 장소와 은혜받을 만한 길에 자주 드나들게 될 것이다(잠 8:34). 갈증을 느낀 야수는 우리를 뚫고 뛰쳐 나간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갈망하는 영혼은 모든 역경을 헤치고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나간다. -토머스 피어슨(Thomas Pierson, 1570-1633).

6절.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다윗은 매우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오랜 여름 가뭄을 겪은 땅에 비유한다. 그 땅은 오랜 가뭄 때문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비를 기다린다. 이 같은 비유는 다윗에게 어떤 근원적인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께 다가가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위로부터 구한다. 다윗은 지금까지의 모든 곤경 속에서도 위를 바라보았으므로 지금도 위를 바라보며 위로부터 도움과 위로를 구한다. 비록 우리가 파탄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위를 바라본다면 여전히 소망이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하늘에는 우리를 새롭게 해줄 생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갈급해 하는 사람은 만족을 얻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의 은혜와 신령하고 진실한 위로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어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목이 말라 부르짖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우물을 열어 주셨다(창 21:17, 19). 그분이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버리시겠는가? '목이 말라 죽겠나이다'(삿 15:18 참조)라고 부르짖은 삼손에게 하나님은 샘물을 솟게 해서 곤경에 빠진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셨다(삿 15:19). 만일 우리가 진실하게 원한다면, 하나님이 비탄에 빠진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아치볼드 심슨.

6절.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존 차딘(Sir John Chardin)은 자신이 쓴 마소라 사본 주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양의 토지는 혹심한 가뭄을 겪으면 갈라진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마른 땅의 갈라진 틈은 너무 깊이 파인 나머지 그 끝이 어딘지 볼 수도 없다. 이러한 풍경은 다른 곳보다 비가 내리기 직전의 인도 제국의 땅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땅이 딱딱하고 비옥한 곳이면 어디든 이 같은 일이 발생한다." -하머(Harmer, Observations).

6, 7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축 늘어졌던 손을 다시 펴서 들어올릴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손을 펴고 달리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의 상한 심령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말씀하신 그분의 은혜를 소망하고 기다릴 것이다. 말라 비틀어진 들판과 시들어가는 풀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 줄 시원한 소나기를 원하듯, 우리는 구원을 원할 것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은 자신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속히 들어주시길 원한다. 만일 응답이 늦어지면 그의 신앙은 곤핍해질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용서의 미소를 거두어 가신다면, 그의 영혼은 병에 걸려 짓눌리고 죽음의 무게에 압박을 받을 것이다. -버건.

7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곤경에 빠진 다윗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한다. 기도는 곤경에 빠진 의인이 취할 수 있는 능력의 처방이다. 슬픔에 빠진 성도는 위로와 치료를 받기 위해 기도와 간구라는 도피처로 피신한다. 천국은 모든 물건이 구비되어 있는 상점이다. 이곳에는 축복과 은혜가 저장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곤경에 처했을 때 이곳으로 날아가 거룩한 성소로부터 도움을 간구한다.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시 77:2). 삶의 고통이 우리를 슬프게 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같은 도움은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기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가? "속히."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속히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를 들으소서 속히 나를 들으소서"(KJV 직역-역자 주). 이 말은 '응답하소서, 속히 응답하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이 곤경에 처한 사람의 심정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은 속히 구원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고통과 환난에 빠진 사람은 구원이 날개를 달고 온다 할지라도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연약함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지금 그 도움을 받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토머스 캘버트(Thomas Calvert, 1647).

7절.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첫째 요인이었다. 그의 영혼은 오랫동안 도움을 원한 나머지 상했고 애통해 했다. 이 같은 다윗의 비참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종종 어떤 형편에 처하는지 알 수 있다.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종까지도 오랫동안 영혼의 평강과 안식을 기다려야 했다. 그 결과 그의 영혼은 거의 핍절한 상태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다윗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다가 심령이 상하고 무기력해지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 3:19). 이것은 인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저주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과 내면의 위로와 확신과 성령의 기쁨을 맛보기를 간구하면서 얼굴에 많은 땀을 흘릴 뿐 아니라 심령의 한탄과 고통을 경험한다. 교회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면 병상에 누울 수밖에 없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애 1:16). 사도들의 영혼은 풍랑을 만나 곤핍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사도들을 마치 버린 것처럼 행동하셨다. 그분은 사도들의 고통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위로자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유일한 친구이신 그분이 도리어 우리의 원수처럼 보일 때, 어찌 절망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절망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동기를 만들어 주시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 영혼을 구원하려 하신다. 따라서 영혼의 절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좋은 기회이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므로 자신의 자녀가 극심한 고통에 빠져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곤비한 영혼에게 긍휼을 베푸는 영이시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사 57:16).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끝없는 진노와 영원한 불을 받아야 될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 여호와께서는 인간의 영혼, 특히 곤비한 영혼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도우실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도움을 받지 못해 멸망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겠는가?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았다. 그 성품은 그로 하여금 속히 기도하게 하고, 이곳과 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한 근거였다. 긍휼히 여기시는 성부께서는 그 자녀의 영혼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의 영혼이 곤비한 것은 주님이 역사하실 기회다. 주님은 모든 도움이 실패로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강하게 의지하고 그분과 연합하면 그분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기름 항아리에 기름이 말라서 한방울도 떨어지지 않을 때,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시간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과 지혜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닷가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셨다. 그분은 고난의 산 속에서 자신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토머스 캘버트의 글에서 요약함.

7절. 이전에 나타난 기도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기도는 더 더욱 신령하고 뜨거워진다. 6절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는 더 강한 갈망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조금도 연기되면 안 된다고 기도한다. 이 시의 첫머리에서 다윗은 "내 기도를 들으시며"(1절)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이것은 참을성이 없는 악한 말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속히 임하기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선한 태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되, 신속한 응답을 바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내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든 신속한 응답을 원할 수 있다. 그 소망이 늦게 성취되면 슬퍼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소망과 슬픔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다윗은 '신속한' 위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며,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속히 보여 달라고 자주 간구한다. 다윗은 종종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라고 기도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속히 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의 소망이 간절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만일 그의 심령 속에서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응답이 지연되는 것을 통해 아무 인내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인내는 우리의 소망과 반비례한다. 즉 소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그 소망이 연기되는 것을 참아 내기 어렵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잠 13:12). 그러므로 다윗은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라는 말을 첨가한다. 다윗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볼 것이라고 분명히 소망했다. 이 소망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피곤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간절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으나 그 축복은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의 앞에서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같은 축복을 너무 오랫동안 연기시키시지는 않을까, 하나님이 숨어 버리시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믿음과 소망도 이제 더 이상 그를 지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또 그는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고 말씀하신 여호와께 자신의 영혼이 곤비하다고 호소한다. -존 포셋.

7, 8, 10, 11절. 이곳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인도하심과 거룩게 하심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이 같은 기도는 참으로 합당하다. 우리는 순종과 기도에 있어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위로를 받기 위해 거룩을 간구하기보다 거룩해지기 위해 위로를 간구해야 한다. -존 포셋.

8절. "주의 인자를 듣게 하소서."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구한다. 여호와의 은혜는 생명이요, 재물이요, 은총이며 모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할 수 있었는가? 그는 인자를 '들음으로써' 여호와의 은혜를 확신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시 51편에 나와 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시 51:8). 그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믿음을 통해서 말씀을 이해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시험에 빠진 영혼에게라도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교황 절대주의자(교황을 하나님의 무오한 대리인으로 믿는 사람-역자 주)나 무신론자들이 아무 위안과 기쁨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수단, 곧 자신을 소생시켜 주는 성경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해 죽음에 빠질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그릇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위로는 그 그릇을 통해 온다. 자,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강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이 같은 두번째 간구는 첫번째 간구 다음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같은 배치는 아주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스스로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다고 자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은 선을 행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요인이다. 그리고 칭의는 성화에 이르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얼마나 은혜로운 결과를 만드시는지 주목하라. 고난은 인생의 외적인 면을 파괴하고 절망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은 고난을 통해 승화되고 연단된다. 그렇다. 우리가 더 많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승화된다. 사탄의 하수인이 자주 내려와 우리를 대적하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더 큰 열심으로 (바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다(고후 12:8).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상황에 빠질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늘까지 높이 들린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 -아치볼드 심슨.

8절.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나의 아침 인사는 새벽에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나는 마치 음악처럼 그것을 듣는다. 주의 말씀은 나의 근심을 마치 꿈처럼 만들어 버린다. 또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는 말씀이 진실임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아침 중 어느 시간이든 주의 인자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 좋다. -리처드 베이커.

8절.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밤에 악한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아침이 오기 전에 그것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낮에 악한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그것을 잠자리에 가져가지 않을 수 있다. 주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진리를 교훈하셨다. 호화를 누리던 제왕(시바리스 사람 스민드리데스?)은 자신의 대신들과 같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낮에는 하루 종일 골아 떨어졌다. 전하는 바로는 그들은 해가 지고 뜨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우리가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른다면 일출과 일몰도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볼 수 없을 만큼 잠시 동안만 고통당하기를 원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애굽의 야수 같은 인간 바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애굽에 내린 개구리 재앙을 언제 중단시키면 좋겠냐고 모세가 묻자 "내일"(출 8:10)이라고 말했다. 그는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고통스런 단 한 시간이 하루 같고, 하루가 한 달, 한 달이 일 년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음의 두 가지를 버리는 일에 대해 우리의 생각은 정반대가 되며 그 두 가지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1) 죄를 버리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연기하고 지체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나의 목소리를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내일"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한 레위인의 첩의 아버지가 불의한 손님에게 과잉 친절을 베풀며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라"(삿 19:6)고 꼬드기며 죄를 부추긴 것과 비슷하다. 죄를 회개하는 우리의 걸음은 너무 느리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문제에 있어서 결코 서둘지 않는다.

(2) 그러나 고통을 회피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고통이 발을 달고 달아나 주기를 원한다. 또는 고통이 비둘기의 날개라도 달고 우리 곁을 떠나 주기를 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안식을 원한다. 어떤 죄수가 빨리 석방되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부드러운 자유의 손이 다가와서 수갑을 풀어 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어떤 선원이 폭풍이 오래 가기를 바라겠는가? 어떤 종이 가혹한 노예 제도가 오래 존속되기를 바라겠는가? 입술에서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올 때, "당신은 더 이상 그 고통의 잔을 마시지 못합니다" 하고 어떤 사람이 말하는데 도리어 "아닙니다. 이 고통의 잔이 결코 내게서 지나갈 수 없습니다. 나는 고통의 쓴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인자, 곧 축복받은 여인의 거룩한 씨였던 예수님도 소유하고 계셨다.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엄청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속히 건져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 번뿐만 아니라 자주 그렇게 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마 26:39).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자 예수님은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부르짖었다. 주님이 이렇게 절규하신 이유는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다. 고통을 당한 것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육체였지 그분의 신령한 영혼이 아니었다. 물론 그분의 영혼까지도 우리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친히 감당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토머스 캘버트.

8절.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이것은 짤막하고 감미로운 아침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침 일찍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으로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얼굴의 미소, 온화한 목소리, 그분의 손이 베푸시는 은사들, 이것이 우리의 아침을 축복하며, 하루 전체를 축복해 준다. 이 사실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 같은 경험을 들어보지 않았던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로 소중하고 즐겁다.

"인자"는 매우 은혜로운 표현이며, 이 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인자라는 말은 성경의 다른 어떤 곳보다 시편에 많이 등장한다. 인자는 자비를 베풀어주는 사랑이다. 이것은 자비라는 광선을 비추는 사랑의 태양이다. 사랑의 강물은 자비의 시내를 통해 흐른다. 자비로운 말을 하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며, 자비로운 선물을 주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이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이 듣고 싶었다. 이 음성은 천국의 음악이요 환희에 찬 복음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희년의 안식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인자라는 아름답고, 달콤하며 충만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한편, 다윗은 '용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용서는 자비의 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용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를 구해서 얻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다윗은 '평화'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로다"(KJV직역. 시 29:11). 소중한 평화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결과다. 또한 하나님의 평화의 목소리는 '기쁨'을 준다. 평화는 기쁨의 유일하고 완전한 원천이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Puritan05/7156/pag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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