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스펄전 - 시편 97편 강해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8:29

스펄전 - 시편 97편 강해

- 찰스 스펄전 -

 

 

[개 요]

주제-앞의 시편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는 복음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였듯이, 본시편도 오류에 찬 온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고 거짓된 우상들을 쳐 없애는 성령의 막강한 역사를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바다 건너 해변 지역까지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뻐하는 외침 소리가 들리며(1절), 거룩한 불이 내려오고(3절), 번개처럼 복음의 빛이 번쩍이며 퍼져 나간다(4절). 모든 난국들이 타파되고(5절), 열방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다(6절). 우상들은 치욕을 당하고(7절), 교회는 기뻐하며(8절), 주님은 높임을 받으신다(9절). 본시편은 그 뒤에 따르게 될지도 모를 핍박을 거룩하게 굳건히 견디라는 권고로 끝을 맺는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성도들에게 저들의 길이 밝고 상급이 영광스럽고 확실함을 강조하며 기뻐하도록 권면한다.

될 수 있는 한 다윗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현대 비평가들은 본시편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쓰여졌다고 단언한다. 그 근거로는 본시편의 구절들 중 후기 예언서의 구절들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든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컨대 오히려 후기 예언가들이 다윗의 글을 인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더 신빙성이 높다. 오늘날에도 무명 작가가 유명 작가의 글을 인용하는 일은 흔하다. 이 일련의 시편들 가운데 "다윗의 시"라는 제목이 붙은 시편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나머지 시편들도 모두 그와 동일한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믿는다. 사실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몇몇 비평가들에 대해 경고하기 위함이다. 저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일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독자들은 저들의 이러한 행태를 박학다식의 증거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저들이 함부로 만들어내는 이론들은 그 사용하는 종이가 아까울 정도로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

 

구성-본시편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부분은 세 절로 이루어져 있다.

1-3절주님의 강림.

4-6절지구에 미치는 그 결과.

7-9절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

10-12절훈계와 권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도들은 거룩함을 지키며 행복을 일구어 나가도록 권함을 받음.

 

 

[강 해]

1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3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이는 시편 전체의 표어이다-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또한 이는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일 뿐 아니라 복음 왕국의 기초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에게 순종하는 믿음을 바쳐야 마땅하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하여 위안을 얻는 반면,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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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즐거워하며." 거기에는 마땅히 즐거워할 이유가 있다. 다른 자들의 통치는 지금까지 수많은 불법과 압제와 피흘림과 공포를 만들어 왔다. 무한히 은혜로우신 여호와의 통치만이 인류의 소망이다. 그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인류는 비로소 낙원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지구도 그 창조주시요 왕이신 하나님이 친히 임하심을 기뻐할 것이요, 온 인류도 즐거워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기꺼이 따르는 백성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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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다 너머 있는 땅은 모두 섬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섬"이란 배로 닿을 수 있는 모든 육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로 여러 섬에서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승리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영국도 그러한 예이지만,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들과 마다가스카르 왕국이 특히 그러하다. 섬들은 매우 많다. 그 모든 섬들이 다 거룩한 섬, 성도들의 섬이 될 수도 있다. 그때는 저들이 모두 행운의 섬이요 참된 부귀의 섬이 될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바다 덕분에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바다를 통해 격리되지 않았다면, 저들은 벌써 황폐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섬 나라 거민들은 저들을 대륙에서 떨어뜨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바다는 저들에게 있어 놋쇠 성벽보다 더 유용한 방호책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 거민들의 주님이 되기에 합당하시다. 모든 해변을 따라 그의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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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예전에 시내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실 때도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실 때 그의 본질적인 신성(神性)은 가리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과다한 영광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revelation)는 동시에 가리심(obvelation)일 수밖에 없다. 유한한 존재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려면, 그의 무한한 광채가 어느 정도 가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섭리적으로 그렇게 하시기도 한다. 순수한 사랑의 계획을 실천하시는 데 있어, 그의 은총의 목적을 숨기시다가 마지막에 이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시는 것이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잠 25:2).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주변에 박해의 어두운 구름들이 서성이고 있다. 어떤 때는 주님이 거기 계심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어둠의 그늘이 교회를 덮치곤 한다. 짙은 구름에 가려 잠시 밝은 빛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조만간 때가 되면 빛이 터져 나와 복음의 대적들을 혼내 주게 된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체를 엿보려고 꾀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잘못된 짓인지 가르쳐 준다. 인간의 이성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허황된 욕심이며, 지극히 높으신 영원한 분께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행동하시리라 예측하는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교만이다. 지혜는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며, 하나님의 의도를 감추는 자비를 칭찬한다. 우둔함은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멸망하고, 처음에는 눈이 멀었다가 점차 영광의 불꽃에 타서 소멸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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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하나님은 의와 공평 중에 머무신다. 그는 결코 의와 공평을 떠나지 않으시며, 그의 보좌는 영원한 거룩의 반석 위에 견고히 서 있다. 의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공평은 모든 하나님의 행동의 특징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 우리는 다 보거나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우리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그릇된 일을 행하지는 않으시리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통치는 결코 폭군정치가 아니다. 여호와는 왕이시지만 폭군은 아니시다. 결코 실수하지 않고 결코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자의 손 안에 있을 때 절대 권력은 안전하다. 장차 칙령의 두루마리, 즉 섭리의 책이 펼쳐질 때, 모든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한 점의 얼룩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단어도 잘못된 것이 없고, 한 줄도 불공정한 것이 없으며, 한 글자도 불경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만유의 주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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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마치 앞서가는 길라잡이가 길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과 같다. 시온산에서도 그러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하나님의 실체는 능력으로서, 그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소멸하신다. 전능하심은 삼키는 화염으로서, 그 모든 대적들을 살라버리신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일단 심판 자리에 오르시면, 불의한 자들을 가차없이 엄단하실 것이요, 저들은 불 속의 섶과 같이 타버릴 것이다.

이 구절을 예수님의 강림이나 성령 강림과 연관시켜 읽어보면, "불의 혀"(행 2:3)와 복음에 수반된 능력이 생각난다. 이러한 능력은 복음의 대적들을 신속히 제압하였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확신있게 전파되는 곳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 성령의 능력은 거짓과 미신과 불신과 죄와 무관심과 마음의 강퍅함을 불태움으로써 복음의 길을 마련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이 통치하신다. 이로 인해 온 땅은 마땅히 즐거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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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

6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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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번쩍이는 번갯불 아래 온 세상이 환히 드러난다. 심지어 태양빛마저도 번개의 섬광에 비하면 어두운 듯이 보인다. 일상적인 자연광의 경우에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비치면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이 잠시 커튼을 걷으시기만 해도 온 세상은 심히 놀라 그 눈을 감을 수밖에 없고 엄중한 경외심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안에서 진리의 광채를 밝히 비추셨는데, 세상은 이러한 빛을 결코 본 적이 없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사도 시대에 이르러 말씀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이며 비추어졌으니, 지구상의 문명국들 가운데 복음을 접하지 못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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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보고 떨었도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견고한 땅도 흔들리며, 그의 영광으로 인해 놀라고 두려워한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인간들 가운데 그의 왕국을 세우시는 일에 대해서도 이 말씀은 매우 잘 적용될 수 있다. 복음의 선포보다 더 큰 동요를 일으키는 지진은 없으며, 복음의 진행보다 더 장엄한 일은 없다. 복음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산들을 평평하게 만들고 골짜기를 메운다. 예수님은 오셨고, 보셨고, 이기셨다. 성령이 그의 종들 위에 머물러 계시면, 저들이 나아가는 길도 역시 강력한 폭풍우의 진로와 유사하다. 진리가 강력하고 재빠른 번갯불처럼 번쩍이면, 철학자나 승려, 임금과 백성들이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모르고 낙담한다.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믿음은 지금 전세계에 불을 놓고 있으며 열국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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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산들이 여호와의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 생명 없는 피조물들도 그 조물주를 알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를 경배한다. 이 세상에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왕국과 제국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이 다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언덕처럼 오래되고 든든히 뿌리박은 제도나 체계도 하나님이 노하여 바라보시면 곧 스러져 버린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나 또는 그 이후에 이러한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증거되어 왔다. 이교주의는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의 눈길 앞에 항복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통치하던 폭군들도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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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주 앞에서." 그의 통치 영역은 전우주이며, 그의 능력은 모든 곳에 속속들이 미친다. 인간은 산을 움직일 수 없다. 인간은 매우 힘겹게 산을 오르며, 산에 길을 뚫을 때 그 견고함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길이 훤히 뚫린다. 장애물이 사라지고 고속도로가 만들어진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생하시면서 길을 뚫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나타나시기만 해도 그렇게 된다. 그의 한마디 말씀이나 눈길을 통해 크나큰 능력이 나가기 때문이다. 부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임재하사 이런 능력이 나타나길 기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이를 통해 모든 어려움의 산이 물러가고 각종 장애가 사라질 것이다. 오 주님,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 오시면, 주님 앞에서 산들이 도망하리이다.

우리의 본성의 작은 세계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사 그 통치력을 발휘하시면 우리의 욕정은 불에 타 사라지고 우리 영혼은 녹아 주님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의심하곤 한다. 그는 구름으로 자신을 감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환히 비치고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때는 마치 양초가 불 앞에서 녹아내리듯, 우리 마음이 은혜의 따뜻한 온기에 녹아 회개와 순종으로 넘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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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하나님의 의는 마치 하늘에 쓰여진듯이 뚜렷하다. 하늘의 천체들과 지구는 모두 그 광채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영감에 찬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공감하고 있다고 그린다. 실제로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그 아래에는 크나큰 진리가 깔려 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죄로 인해 신음해 왔으니, 이제 후로는 인간 회복의 즐거움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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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영광스런 복음은 너무나 잘 알려지고 널리 전파되어, 마치 모든 별에 의해 선포되고 하늘 그 자체에 의해 공표된 듯이 보일 정도이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들은 이를 잘 알게 되었고, 그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눈부신 영광을 목도하게 되었다. 부디 이제 머지않아 다시 옛 선교 열정이 되살아나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모든 육체가 새삼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 일은 분명히 이뤄지리니, 우리 모두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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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9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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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저들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수치가 저들의 얼굴을 덮으며, 예전에 정신 없이 자랑하던 것들을 생각할 때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새겨진 우상에 경건히 절하고 허무한 비존재에 자신의 신뢰를 맡기는 일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런 부조리에서 돌이켜 회심한 후에 생각해 보면,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인간의 형상을 숭배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상을 자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익한 자랑을 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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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너희 환상의 신들아, 너희 고개를 조아리라. 주피터는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뇌신(雷神) 토르는 십자가 앞에 그의 해머를 내려 놓으며, 크리슈나는 피에 물든 마차를 치우고(인도인들은 크리슈나 신상을 실은 마차에 치어 죽으면 극락에 간다고 믿었다-역자 주) 임마누엘께 길을 양보하라. 거짓 신들도 이처럼 장차 오실 주님을 경배하도록 명령을 받을진데, 하물며 하늘에 있는 신적인 피조물들 곧 천사들이야 얼마나 열렬히 주님을 찬양하겠는가? 바울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천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다. 모든 권세들은 최고의 권세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그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항상 지극히 경건한 자세로 주님의 우월성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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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이방인들이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승리를 얻는다. 저들은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길 지극히 사모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오랫동안 버려졌던 실제 시온이 구원에 동참하고 즐거워할 때 도래할 것이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던 때에 처음 그런 일이 있었고, 곧 다시 그런 선한 날이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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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신자들은 거짓 체계가 무너지고 우상 신들이 넘어지는 것을 볼 때 즐거워한다. 주님의 심판은 신령과 진정으로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제공한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 유대인 신자들은 그리스도 왕국이 이교도들 가운데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비록 잠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유다의 딸들은 사랑스런 아들의 복음을 통해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통치가 널리 퍼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을 때 유다의 여인들이 춤과 노래로 다윗을 맞이하였듯이, 그때도 저들은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승리를 소리 높여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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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들이 넘어지고 온 인류가 그의 보좌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나이다.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하며 다른 이는 있을 수 없으니, 그가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모든 자들 위에 군림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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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니이다." '모든 것'(all)이 없는 것(nothing)을 초월하듯이, 또 완전함이 어리석음을 초월하듯이, 하나님은 모든 거짓 신들 위에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유대 지방에서만 군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땅 위에 군림하신다. 또한 주님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실 뿐 아니라,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신다. 모든 사람이 이 진리를 밝히 깨달을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때는 저들이 모든 영광을 오직 마땅히 받으실 하나님께만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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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1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름을 뿌렸도다

12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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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신다. 그리하여 그의 불이 악을 소멸하며, 그의 번개가 이를 치고, 그의 임재가 악의 거처를 흔들며, 그의 영광이 악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벌을 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순 없다. 우리가 악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무기를 들고 악과 싸워야 하며 마음속으로 악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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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의 편에 선 자들과 전쟁을 선포하는 데 있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도들은 안전을 보장받은 자들이다. 저들은 구원받았으며, 또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법을 지키는 자들을 지켜주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의 사랑이 저희에게 나타나사 대적들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저희가 악을 멀리하는 한, 악이 결코 저희에게 범접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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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친구된 자들을 주께서 대적의 손에 넘기신다면, 이는 그의 영광스런 이름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께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몸을 악인의 손에 남겨두실 수는 있지만 영혼만은 지켜주신다. 영혼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귀중하므로, 주님은 이를 가슴 깊이 안전하게 보존하신다. 이는 교회가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전쟁의 때를 예언하고 있으나, 주님은 기필코 교회를 지키사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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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성도들이 길을 가는 동안 내내 빛의 씨가 뿌려진다. 저들의 밤은 거의 끝나고, 날이 밝아오고 있다. 아침은 이미 장미빛 발걸음과 함께 다가와 세상에 동방의 진주를 흩뿌리고 있다. 온전한 기쁨의 추수는 아직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이미 우리를 위해 씨는 뿌려졌다. 씨가 자라고 있으니, 이제 곧 온전히 자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 의로워진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다른 모든 자들에게는 어두움의 흑암만이 예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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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 기쁨은 특정한 어느 의인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라 정직한 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위하여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한 후에, 즉시로 자신의 말을 정정한다:"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정직한 자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저들에게는 기뻐할 이유가 있고, 결국 기뻐하게 될 것이다. 올바른 마음을 지닌 자들은 기쁜 마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정직은 빛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인격의 밭고랑 사이로 행복의 씨가 뿌려지고, 이는 결국 복락의 추수로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번갯불을 예비하시고, 성도들을 위해 빛을 예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디를 가든지 온 땅에 신자들을 위한 기쁨의 씨를 뿌린다.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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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온 땅에게 기뻐하라고 명하던 시편 기자는 이제 그 땅의 택함받은 자들을 불러 찬송을 인도하도록 권한다. 다른 모든 자들이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경건한 자들은 찬양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저들에게 계시를 주셨으므로 저들을 통해 특별히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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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조화를 이룬 결합체로서, 가장 온전한 그의 성품이다. 이는 악한 자들에게는 공포의 근거요,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감사의 근거이다.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기억할 때, 그의 궁정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 기억은 저들이 하나님 앞에 살 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표가 되기 때문이다. 복음의 승리와 연관해 생각할 때,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의 성화 기능을 기뻐하도록 가르친다. 복음이 들어갈 때 죄는 죽고 덕은 살아난다. 거룩하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영광은 그 거룩함에 있다. 거룩함으로 인해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된다. 인간이 죄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떠한 복락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한다. 주님은 세상을 거룩함과 기쁨으로 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에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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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와 설명들]

시 97편 전체. 앞선 두 시편은 기쁨과 감사의 노래들이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승리하신 주님의 재림을 맞으면서 느끼는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주님은 영광 중에 임하사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그의 왕국을 차지하신다. 본시편에서는 매우 명료한 언어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라는 이 위대한 사건의 결말을 기술하고 있다. 메시아는 그의 보좌에 오르시고, 이제 시편 2:6의 말씀이 성취된다:"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메시아의 첫번째 통치 행위는 심판이다. 성경에서는 이 사건이 데살로니가후서 1:7; 유다서 14절; 이사야 66:15 등에 기술되어 있다. 이 심판의 성격은 본시편에 기록되어 있다. 구름과 흑암이 그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가운데 공의와 자비가 거하고 있다. 주의 대적을 사르는 불길이 주변에 타오르고, 세상 위에는 번개가 번쩍인다. 하나님 앞에서 온 땅이 두려워 떨고, 온 세상의 주님 앞에서 산이 밀랍처럼 녹아내린다. 베드로는 그의 두번째 서신 제 3장에서 장차 올 이 사건에 대해 명료하게 진술하였다. -라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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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여기에 복음, 곧 기쁜 소식이 있다:"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이 소식을 들을 때 찬양과 기쁨과 노래와 축복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이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 진리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우리가 침묵으로 이를 묵살하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면,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 소식은 너무나 감미롭고 평화로우므로, 온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 이를 듣는 모든 귀와 혀와 마음은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지옥 이외에는 어느 것도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악마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복음 앞에서 떨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비천한 자나 가난한 자나 비록 흙과 같은 자라도 모두 그 가운데서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즐거운 고찰을 할 수 있다. (1) 주님의 '통치'와 (2)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의 '통치'가 그것이다.

첫째로, 이제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왕국'은 영원히 지속되는 왕국이다. 이 나라의 행정은 인간의 유약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며,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석한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공의와 애정, 긍휼, 사랑, 평화 등을 숨김없이 보여주실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친히 즉각적으로 처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부가 흔히 보여주는 모든 교만과 야심, 압박과 폭정, 행정적 오류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전한 공의와 공정한 판결이 어김없이 시행될 것이다. 무한한 힘과 능력, 성결, 선과 권위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직접 숨김없이 퍼져나와 모든 인간을 판단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욕심이나 야심에 의해 학대받거나 압제받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부자들의 탐욕에 억눌려 신음하지 않을 것이요, 압제자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땀 흘리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얼굴은 더 이상 완악한 인간들의 마음으로 인해 일그러지지 않으리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왕을 소유하자!"고 외치는데, 이제 곧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 그 왕은 '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둘째로, 이 하나님의 '통치'는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단 7:27). 이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통치되지만,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에 의해, 친구들에 의해, 형제들에 의해 인간미 넘치고 부드럽게 통치될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 위에 계시면서 이 통치를 행하시지만, 동시에 성도들의 부드럽고 자상한 손길을 통해 이를 이루신다:"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이제 그 일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복종하게 될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법만 따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통치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이요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이제 우리는 지상에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몸이 지구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주님은 지금까지 대부분 '종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섬겨 오셨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인간들에게 의식주를 공급하시고 아울러 힘과 지혜와 부귀와 권위를 제공하사 저들로 하여금 번영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왕'이셨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내가 지금까지 너희 죄와 정욕을 받아주며 섬겨왔으나,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섬기지 않고 통치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와 힘을 그 손 안에 두실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인간 아래 계시지 않고 인간 위에 군림하실 것이다. 이제 그가 이렇게 하실 때가 되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있으며, 이 일은 정당하다. 만물은 하나님의 법과 뜻과 통치에 허리를 굽히고 복종해야 한다. 이제는 어떤 사람도 "이것이 나의 뜻이므로 이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마음이나 혀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탄은 세상에서 왕노릇을 해왔다. 그는 우리를 포로로 잡고 비참에 빠뜨리는 법을 만들어 시행해 왔다. 우리는 꼼짝없이 붙들려 그를 섬겼다. 사탄이 우리에게 '화를 내라'고 말하면, 우리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가 '탐욕을 내라'고 말하면, 우리는 탐욕이 가득해졌다. 그가 '어둡게 되라'고 말하면, 우리의 눈은 완전히 멀고 말았다. 그가 '교만하라'고 말하면, 우리는 헛된 자랑에 사로잡혔다. 사탄은 고약한 폭군처럼 세상을 고통에 몰아넣었다. 사탄의 채찍에 붙은 가시가 우리 양심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범한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의 왕국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의 거룩한 뜻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들어올 수도 있지만, 사탄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도 있지만, 사탄이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혜를 얻어 구원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그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어두움의 사슬로 꽁꽁 묶어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켰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고 잔심부름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하고 탄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사악한 통치는 끝이 났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없어지게 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은 갖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있던 것은 없어질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 하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있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빛도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유업은 놀라운 빛이기 때문이다. 공의도 있게 될 것이다. 의로운 상태야말로 진정한 거룩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유와 안정과 든든함과 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동안에는 이런 것들이 항상 우리에게 있게 된다. 왕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실 때, 우리는 우선권과 영예와 부귀와 능력과 권위를 항상 누리게 된다. 우리의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왕국을 취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함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늘 친히 통치해 오셨지만,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와 함께 왕노릇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왕국을 취하셨다고 여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임받기 전까지는 스스로 비천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는 빈곤하시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은 연약하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도 기쁨이 없으시다.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창 49:3). 우리가 강해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 있다. 우리가 빛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 우리가 주님의 가장 귀한 보석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보화는 그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본문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 넘기면 안 된다. 우리는 천사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늘 보고 듣는다. 하늘의 장로와 성도들도 이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며, 우리는 매일 그 소리를 듣는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귀에 늘 '할렐루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노래가 들리니, 실로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보좌에 앉았나니, 나는 위대하다. 나보다 더 큰 자는 없다. 나는 왕이라. 내 손에 홀을 쥐었나니, 나는 강력하다. 나보다 더 힘센 자는 없다." 인간의 모든 세력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다. 인간의 모든 보좌는 그 앞에서 가루로 흩어진다. 인간의 모든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화하며, 인간의 모든 능력은 물처럼 힘없이 녹는다. 세상의 권세와 위엄들이 흩어지고 녹으면서 크게 외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윌리엄 세지윅(William Sedgwick, Some Flashes of Lightnings of the Son of Man,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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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재판관 앞에 선 자, 매와 채찍질을 당한 자, 침 뱉음을 당한 자, 가시관을 쓴 자, 주먹질을 당한 자, 십자가에 달린 자, 나무 위에 달린 채 조롱을 당한 자, 십자가에서 죽은 자,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운 자, 무덤에 묻힌 자, 그가 곧 죽음에서 살아나신 자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열국들이 아무리 분을 낸다 할지라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그분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어거스틴.

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코니우스(Miconius)는 교회의 적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나는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가 되심을 기쁘게 여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에겐 완전히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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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입법적인 면, 섭리적인 면, 중보적인 면, 사법적인 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우주적 기쁨이 되는지 고찰해 보자.

(1) '주께서 입법의 보좌 위에서 통치하시니 온 땅은 즐거워하라.'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로서 우리가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있는 온전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시다. 시민 사회에서 건전한 법률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법에 따라 인간은 행동을 하며, 법에 따라 통치자는 백성들을 다스린다. 이제 우주 최고의 왕께서 도덕 세계의 통치를 위해, 특별히 인간 세계의 통치를 위해 최선의 법을 만들어 공포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보이시니 온 땅은 기뻐해야 할 것이다······아울러 이 법들이 올바른 재가를 거쳐 강력히 시행되니 '온 땅은 즐거워해야 한다.' 그 재가는 마치 우리가 무한한 지혜와 막강한 힘과 헤아릴 수 없는 정의와 흠 없는 성결과 한없는 선과 은총을 지닌 신처럼 되는 것으로, 애초에 불멸의 존재로 창조된 이성적 피조물의 본성에 잘 합치된다. 또한 하나님의 법이 속사람에게까지 미치고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힘을 발휘하니 온 땅은 즐거워해야 한다. 인간의 법은 기껏해야 우리의 외부 행위만을 순화시킬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사악함과 불충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이제 그러한 결점이 하늘 임금의 영적인 법에 의해 제거되었다. 하늘의 법은 우리 마음과 생활의 완전한 일치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 법은 우리를 속속들이 선하게 만들기 위해 지혜롭게 제정된 법이다.

(2) '주께서 섭리를 통해 통치하시니 온 땅은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소요리문답에 잘 기술되어 있다:"섭리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저들의 행위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강력한 역사이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의 지배력과 지혜로운 뜻에 따라 각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관리하신다. 그의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고, 인간의 분노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바꾸실 수 있다.

(3) '주께서 은혜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니 온 땅은 즐거워하라.' 시편 기자가 좀더 역점을 두고 언급하는 것은 메시아의 중보적 통치이다. 온 땅과 그 안에 거하는 죄 많은 거민들이 특히 즐거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주께서는 머잖아 우주적 심판의 보좌 위에서 통치하시리니 온 땅은 즐거워하라.' 이 심판은 만물이 다 한데 모인 자리에서 명백하게 시행될 것이다.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 1724-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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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땅은 즐거워하며." 주님이 통치하시니 땅은 기뻐하라고 부르심받는다. 아마 하나님의 통치가 확대되고 땅이 궁극적으로 악에서 해방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심판의 날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그날은 선과 하나님의 대적들에게는 공포와 파멸의 날이 될 것이다. 그날에는 하나님 앞에서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게"(벧후 3:12)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영광은 모든 사람들 눈에 확실히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며 우상 숭배하던 세속 인간들은 혼비백산하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머리를 들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토머스 찰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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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허다한 섬." 풀(Poole)이 요약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는 본 단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한 눈에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이 단어는 해변 지역이나, 바다 너머 대개 배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장소, 또 바다에 접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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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섬." 비유적으로 섬은 모든 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 왜 섬인가? 주변에서 모든 시험의 파도가 포효하며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아무리 파도가 달려들며 때린다 할지라도, 섬은 결코 부서지지 않으며 오히려 달려드는 파도가 거기에 부딪혀 깨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전세계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교회는 불경한 자들의 수많은 핍박을 받아 왔다. 저들은 사방에서 교회를 향해 무섭게 돌진하지만, 보라, 섬은 든든히 서 있고 결국 바다는 잠잠해진다.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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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섬." 불스트로드 화이트록(Bulstrode Whitelock)이 크롬웰의 대사로 임명받아 1653년 스웨덴으로 출항할 당시, 그는 마음이 몹시 불편하였다. 전날 밤 해리지에서 유숙하는데, 밖에는 심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어려운 나라 걱정에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그때 옆 침대에서 한 충직한 하인이 잠을 자고 있다가 주인이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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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제가 감히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주인님, 주인님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믿고 말고."

"주인님, 주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을 믿으십니까?"

"물론이네."

"그렇다면 주인님, 실례지만 주인님이 세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은 믿지 못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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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화이트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누운 그는 곧 잠이 들었고 이튿날 편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보즈(G. S. Bowes, Illustrative Gatherings,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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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구약 시편에 나오는 비유적 표현들은 역사서에 기록된 사건들 속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다. 구약 시대에 성도들과 선조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본문에 있는 비유의 원형이다. 역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보면, 모두 구름과 흑암이 수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예속의 땅을 떠날 때 여호와의 구름이 저들 앞에서 행하였다. 이 구름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 내내 그들보다 앞서 행하셨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행하셨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으며, 제사장들은 성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다음과 같았다:"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출 19:16, 18, 20). 우리 구주께서 세 제자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에도,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여기서부터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당시에 거기 있던 베드로는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이르기를, 이 음성이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울려나왔다고 하였다(벧후 1:17).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든 상징에는 광채와 어두움 혹은 구름이 함께 섞여 있다. 이는 섭리의 작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혹은 비유적 의미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작용하는 데 있어 늘 구름과 어두움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구름은 가리움의 상징이며, 흑암은 괴로움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며, 이로 인해 인간의 괴로움이 촉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의 보좌에는 늘 의로움과 심판이 거하고 있다. -로버트 홀(Robert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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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신비롭게' 통치하신다. 세상이 신비롭듯이, 하나님의 역사도 신비롭다. 하나님의 일은 "뒤스노에타"dusnohta) 곧 "알기 어려운 것"(벧후 3:16)이라서,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많다:"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8-10).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길을 알지는 못한다. 그의 길은 종종 바다 위에 있으며, 그의 마차는 구름 안에 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 그의 형상뿐 아니라 그가 행하시는 일의 계획과 추이도 그러하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자들도 이해의 눈으로는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의 길을 분별할 수 없으며, 그가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확언한다:"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물론 그 가운데 일부는 명백하고 알기 쉬워서, 첫눈에 만족스러울만큼 이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공평과 자비와 선함과 사랑은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은 밝고 큰 글자로 쓰여져 있어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길은 어둡고도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가 닿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지성적으로 주님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는 곧 길을 잃기 십상이다. 주님의 길은 벨사살의 궁전 벽에 나타난 글씨와 같다. 벨사살의 모사와 술객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읽거나 해석할 수 없었다(단 5:8). 하나님께는 일반인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아르카나 임페리이'(arcana imperii), 즉 '제국의 혹은 통치의 비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해도 된다. 하나님이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 백성들에게 모든 비밀을 다 밝히시고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실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많은 일들을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일단 비밀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일의 목적과 이유에 관해 인정하고 칭송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섭리에 관해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늘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 -사무엘 슬레이터(The Morning Exercises,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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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상적 언어로 이렇다 저렇다 표현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나라는 하늘의 위엄으로 가득차 있다:"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세상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시고 이해의 눈을 열어 주시기 전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 없다:"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데이비드 딕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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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흑암." 본절과 이후 네 절의 내용은 시편 18:8, 9과 68:8에 기술된 하나님의 장엄하고 화려한 행진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이 행하실 때는 무시무시한 자연 현상들이 수반되는데,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화산, 그리고 녹아내리는 양초같이 흐르는 용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정직한 자들에게 있어 이 모습은 크나큰 기쁨과 영광이 된다. 오직 여호와의 대적들, 곧 악인들과 어리석은 우상과 이를 섬기는 사악한 우상 숭배자들만이 심판을 두려워하며 떨게 된다. -존 메이슨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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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의와 공평." '공의로움'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핵심이며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피조물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오직 변할 수 없는 정직에 대한 사랑만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공평'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그 행동을 통괄하시는 데 있어서 의의 원칙을 적용하시는 과정이다. 이는 하나님이 거대한 왕국의 업무를 관할하시는 가운데 그의 정직을 전개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만물에 대한 감찰인데, 이를 통해 만물은 어떤 중요한 목적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된다. 공평은 절제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칙이나 숙고 없이 행해지는 일과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공정하며, 정직에 의해 규제되고,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공평에 의해 이끌림받는다. -로버트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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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의와 공평." 우리는 하늘의 왕께서 지니신 자비와 은총을 이야기할 때, 흔히 맑은 하늘에서 비치는 태양에 비유하곤 한다. 온 세상은 그로부터 따사로운 은택의 빛을 받아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곧 그의 대적들에 대한 징벌과 징계을 언급할 때는, 먹구름 낀 하늘에서 그 이미지를 따오곤 한다. 이때 하나님은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이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번개와 천둥을 발하시며 폭풍과 눈보라를 내시어 사악한 자와 회개치 않는 자들을 두렵게 하시고 혼란케 하신다. -사무엘 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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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완전한 공평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의"를 통하여 선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며 저들에게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주님은 "공평"(혹은 '심판')을 통하여 악인들을 징벌하시고 혼란케 하시며 파멸시키신다. 이 두 가지가 "그 보좌의 기초"이다. 주님의 보좌는 이들을 통해 '올바름과 든든함'을 얻는다. 그의 보좌는 공의로움 속에 세워졌으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시 45:6)이다. 구름은 있을지라도 더러움은 없으며, 흑암은 있을지라도 왜곡됨은 없다(시 92:15). 창세 이후로 만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다. 만약 세상이 다시 시작되어 만사가 다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는 전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것도 수정될 필요가 없다. 섭리의 어둡고 모호한 부분에 대하여 의인들은 놀라고 만민들은 고민하지만, 이러한 그림자를 통하여 섭리자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고 그의 역사가 탁월하게 드러난다. -사무엘 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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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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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피터의 견고한 칙령이 비록 밤에 가려졌으나

어두움 가운데 광채가 새어나와 끊임없이 비치도다.

인간의 운명은 흑암 속에 가려져 있으니

인간의 눈이 이를 꿰뚫지 못하도다.

의로운 자가 고고한 마음의 결심을 행하고

영광스런 결실을 맺도다.

위엄의 보좌 주위로

두꺼운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도다.

하늘의 망루에서 그의 눈이

인간의 뻔뻔스런 가증함을 감찰하도다.

언젠가 그에게서 진노의 복수가 내리리니

그가 모든 신들을 대동하고 징벌에 나서리라.

그의 높고 거룩한 보좌에서부터

무서운 심판을 내려 보내리라.

-이이스큘로스(Æeschy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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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왕 앞에서 호위하며 나아가는 장군 같으며, 혹은 재판관 앞에서 시위하는 투창꾼 같다. 불은 은총의 상징인 동시에 진노의 상징이다(출 3:2; 시 18:9). 하나님은 은총과 심판을 시위하면서 위엄있게 행진하신다. -C. H. S., Poli Synop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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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그리스도는 불을 세상에 던지러 오셨고, 성령은 이 불씨에 불을 댕기셨다. 오순절날, 불의 혀처럼 내려오신 성령은 전세계에 마음대로 불을 놓으시면서, 불신자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즐거이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다. 이에 관하여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39:6).

이 하나님의 불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에 하나님이 임하시기 전에도 나타난다. 그 불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을 불 붙게 하며, 신자 속의 모든 죄를 태워버린다. 이는 마치 신자의 머리 위에 타는 석탄을 올려 놓아 그를 정케하고 순화시키는 것과 같다. 위대한 성자 베르나르는 이렇게 가르친다:"하나님이 임하고자 하시는 모든 영혼에게는 미리 거룩한 소원의 불길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이 불길은 죄의 모든 곰팡이를 태워 없애고 주님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그 불이 붙게 되면, 영혼은 주님이 가까이 계신 줄 깨닫게 된다. 선지자 다윗도 이르기를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나의 혀로 말한다'(시 39:3)고 하였다." -어거스틴, 닐과 리틀데일에 의해 인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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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보다 더 큰 진노가 임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데이비드 딕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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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문스터(Munster)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이 급속하게 확산될 것을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소리가 온 세계에 번개처럼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가랴 9:14에는 이와 유사한 의미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마틴 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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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땅이 보고 떨었도다." 단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땅은 두려워 떨었다(시 77:16). -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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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 미가 1:4에 이와 병행되는 구절이 나온다. 거기서는 언약의 백성에게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다.'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혹독한 심판이 '불경스러운 죄인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벧전 4:7). "산들"은 스스로 높아진 인간의 지성과 부귀와 권세의 교만을 상징한다. -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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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온 땅의 주." 여기에 산들이 양초같이 녹아내리는 이유가 숨어 있다. 지금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분이시다. -마틴 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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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시편 기자는 하늘이 단순히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선포한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의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 의가 드러날 때 저들은 혼비백산하여 넘어질 것이다.

"하늘."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님의 의를 선포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종이요, 그의 의를 드러내는 계시자이다.

"그 의." 시편 기자는 하늘이 '우리'의 의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선포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성도들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증거한다.

"모든 백성." 저 악한 압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주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징벌받는 악인들에게뿐 아니라 다른 인간들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사 저들의 덕을 세우신다.

"그 영광." 이는 단순히 악한 자들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된다. 이와 같이 선지자는 악인들의 멸망을 즐거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한다.

"보았도다." 저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알거나 그에 관해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이는 저들의 눈 앞에 하나님의 의를 강력하고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최종적 계시이다. -무스쿨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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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우상 숭배자들은 헛된 형상을 섬길 뿐 아니라 우상 사용을 합리화하고 그 가운데서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저들의 자랑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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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혹은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아, 그를 경배하라.' 본시편을 읽어 보면, 그 가운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시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그의 장자를 세상에 보내사 그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시려는 계획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그 나라에서는 우상 숭배와 거짓 예배가 완전히 타파될 것이다. 그 나라에 속한 이방인의 섬들은 기뻐 즐거워하라고 부르심받는다. 그 나라는 선포되고 널리 전파되어 세상에 빛과 거룩함을 증진시켜야 하며 땅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본시편에서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따라서 이 말씀은 장자께서 세상에 오신다는 예언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본문의 "신들"이 과연 천사를 의미하는가의 여부이다. 본문의 "칼-엘로힘"(!yhlaAlk)을 제롬은 라틴어로 "옴네스 디이"(omnes dii) 즉 '모든 신들아'로 번역하였으며, KJV도 "all ye gods"로 번역하였다. 이 앞에 나오는 구절에서는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문제의 이 구절이 나온다.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현대의 유대인 학자들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들을 이방인들이 섬기던 저희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여기 나오는 "엘로힘"(!yhla), 즉 '신들'을, 앞에 나오는 "엘리림"(!ylyla) 곧 '헛된 우상'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1) '이방인들의 우상'이란 그 중에 '마귀'도 있고 '죽은 인간'도 포함되며 '생명 없는 일부 피조물들'이 포함되는데, 시편 기자가 저들에게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권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탈굼 기자는 이 해석의 오류를 깨닫고 본문의 단어를 바꾸어 이렇게 해석하였다:"우상을 섬기는 너희 열국들아, 주님 앞에 경배하라."

(2) 지금까지 "엘로힘"이 "엘리림" 곧 '신들', 혹은 '헛된 우상'으로 해석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단어 자체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두 단어는 정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

(3) 참 하나님을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엘로힘"이란 단어가 "신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는 단독으로 나오는 경우가 절대 없고 늘 '그의 신' 혹은 '저희의 신들', '그 백성의 신들' 등으로 한정어와 함께 사용된다. 그런 경우에 70인역은 이를 "에이돌론"(eidwlon, 우상) 혹은 "케이로포이에톤"(ceiropoihton, 손으로 만든 것), "브델뤼그마"(bdelugma, 가증한 것) 등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에는 이러한 한정이나 수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해석을 찾는 편이 더 좋겠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탁월한 형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혹은 업무상 하나님께 매어 있다는 이유로, 몇몇 피조물들이 '신'이라 불리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신'은 분명 그들, 곧 '위정자'와 '천사'들임에 틀림없다.

(1) '위정자들'은 때때로 엘로힘이라 불린다. 이는 그들이 권력 면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으며 아울러 업무상 하나님께 특별한 복종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산헤드린 회원 이외에는 다른 위정자들을 신이라 부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주장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우리의 현재 관심사가 아니다. 어쨌든 일부 위정자들이 신이라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본시편에서 시편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이는 위정자들이 아니다. 시편에서 위정자를 '신'이라 부른 경우는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2) 천사들은 때때로 엘로힘이라고 불린다:"레고메노이 데오이"(Legomenoi qeoi, "신이라 칭하는 자", 고전 8:5). 저들은 신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으며,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자들도 저들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해 온 피조물에게 기뻐하라도 명하고 또 땅에 있는 만물들에게 자신의 권면을 전한 후에, 이제는 섬기는 천사들에게로 돌이켜 저들이 섬기는 왕께 의무를 다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탈굼 기자는 시 96편 시작 부분에서 탈굼 다른 부분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과 분명한 구분을 짓기 위해 헬라어 "앙겔로스"(aggelo")를 사용하면서 '그의 높은 천사들'도 찬양과 경배에 참여해야 함을 명백히 언급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본시편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에 관해 증거하고 있으며, 여기서 그에게 경배하도록 청함받는 자들은 섬기는 천사들임을 알아 보았다. -존 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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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시온이 듣고." 여기서 왜 시편 기자는 시온이 '보고'라 하지 않고 시온이 "듣고"라고 말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겠다. 첫째로, 시편 기자는 종말이 다다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소망 중에 축복을 기대하도록 한 것 같다. 둘째로, 언어적으로 볼 때, 복음의 영광이 아주 먼 지역까지 퍼져, 유대인들은 직접 눈으로 목도하지 못하고 소문으로만 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존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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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유대 지방의 일반적 관습, 즉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처녀들이 합창대를 만들어 환호하는 관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관습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때부터 시작되었다. 애굽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죽고 하나님의 백성은 건너편 해안에 무사히 도착하자, 아론의 누이인 여선지자 미리암은 손에 소고를 들고 노래하였고 다른 여인들도 모두 그 뒤를 따르며 소고를 들고 춤추며 노래하였다:"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도 역시 여인들이 그를 맞았다:"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 18:6, 7). -르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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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할 때, 비로소 우리의 회심이 확고해지는 법이다. 악에 대한 미움이 진실한지 알려면 다음 사항을 확인해 보면 된다. 첫째로, 그 미움이 전반적인지 확인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악을 미워할 때,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 미움이 확고한지 확인한다. 미워하는 것을 자기 곁에서 확실히 제거해야만 분명한 미움이 된다. 셋째로, 그 미움이 분노보다 더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 확인한다. 분노는 곧 사그라질 수도 있다. 모든 종류의 악에 대해 미움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로, 만약 악에 대한 우리의 미움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모든 악을 미워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 보다 우선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두꺼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가슴에 두꺼비가 앉아 있는 것을 제일 싫어할 것이다. 사람들은 유다처럼 다른 자들을 비판하는 데는 혹독하지만(창 38:24)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우가 많다. 다섯째로, 죄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자는 무거운 죄일수록 더 크게 미워한다. 그는 모든 악을 그 비중에 따라 미워한다. 여섯째로, 만약 죄에 대한 책망이나 권고를 달게 받고 화내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진정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책망에 대해 분해하는 사람은 죄를 미워한다고 볼 수 없다.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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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악을 미워하라." 죄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샤나"(anv, '미워하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됨)라 한 것 같다. 죄는 악 중에서 가장 큰 악이다. 죄는 우리를 가장 큰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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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자신을 겸손케 하는 은혜를 받으며, 특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악을 미워하게 된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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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과 마음과 애정 상태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금해야 할 악이 있다면, 마음으로 이를 미워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두려움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때문에 악행을 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신실한 행위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악에 대한 미움이 있는지 알아보자. 만약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에서 왔는지 확인하자. 다윗은 이르기를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고 말했다. 악은 피할 뿐 아니라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이를 미워해야 한다. -리처드 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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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악을 미워하라."

루키아누스:나는 모든 거짓된 외식과 사기와 가장을 가장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진리와 아름다움과 숨김없는 본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합니다.

철학:저들은 이르기를, 사랑과 미움은 하나의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루키아누스:철학이여, 당신은 그런 것만 열심히 연구하십시오. 나의 할 일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권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일만 하겠소. -루키아누스(Lucian, Piscat. c.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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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하나님의 보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보존과 구원. 보존은 우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지키시는 것이다. 반면에 구원은 이미 위험에 빠진 자들을 건지시는 것이다. 목자는 양들이 늑대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킨다. 그러다가 만일 양들이 늑대의 손에 붙잡히게 되면, 목자는 그를 쫓아가 양을 구해낸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뿐 아니라, 만약 저들 손에 빠졌다면 기필코 성도들을 구원해 내신다. -무스쿨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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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빛을 뿌리고." 여기서 "자루아"(arz, 뿌리다)라는 말은 세상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길을 따라서 뿌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의인은 빛 가운데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다. 힛치히(Hitzig)는 새벽빛을 나타내는 "키드나타이"(κιδναται)와 태양빛을 의미하는 "스키드나타이"(σκιδναται)를 비교하고 있다. -프란츠 델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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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빛을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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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벽의 여신 오로라가

그녀의 애인 티토누스의 사프란 침대에서 일어나

온 땅에 이슬 머금은 빛을 뿌린다.

-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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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빛을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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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침이 동녘에서 장미빛 걸음으로

살포시 다가와 동방의 진주를 온 땅에 뿌린다.

-존 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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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지극히 사려깊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의심하고 그 의심을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과 영적 분별력을 증진시켜 나간다. 이러한 방식의 종교적 사고는 개인적 감성을 발전시켜 준다. 그리하여 더욱더 깊은 확신과 신뢰를 갖게 되고, 그 위에 영원에 대한 확실한 기초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명상과 고찰을 통하여 모든 의심이 다 제거된 후에 얻어진다. 주저없이 명랑하게 믿는 대신 어둡고 괴로운 의심의 과정을 통해 하늘의 실체를 찾아가는 것은 설사 참 계시가 아니라 해도 계시의 일종임에는 분명하다. 이는 마치 멀리 떨어진 태양이나 별들의 물리 화학적 구조를 알아내는 데 있어, 스펙트럼의 밝은 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프라운호퍼(Fraunhofer)의 놀라운 검은 선들을 이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스펙트럼을 불연속적으로 끊어주는 검은 공백인 이 선들은 빛이 별에서 나오는 도중에 어떤 금속 기체에 의해 방해를 받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정직한 자들은 그 동기가 순수하고 단순하며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강하므로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셨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빛의 씨가 얼마나 빨리 싹이 트고 과실을 맺는지는 씨가 뿌려진 토양의 성질과 주위 환경에 달려 있다. 어두운 흙 속에 뿌려지는 씨와 같이, 빛의 씨도 처음에는 괴롭고 고통스런 차가운 겨울 한 철을 어두움 속에서 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마음속의 여러 가지 의심과 맞서 싸우며 어두움 속에서 빛을 비추는 동안, 영혼은 많은 위로를 얻는다. 그러다가 살아있는 소망으로 인해 씨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자라서 마침내 천국의 여름을 맞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빛이 점점 크게 비치며 드디어 한낮이 된 것이다. -휴 맥밀런(Hugh Macmillan, The Ministry of Nature,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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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이 빛은 두 가지 밭에 뿌려진다. (1) '하나님의 영원한 칙령의 밭'에 뿌려진다. 즉, 그의 능력과 약속과 은혜와 사랑의 밭에 뿌려지는 것이다. 이것들은 '위쪽 샘'이다. (2) 저희의 '은사와 거룩한 의무의 밭'에 뿌려진다. 이는 '아래쪽 샘'이다. 두 샘물은 하나의 강으로 흘러들며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든다(시 46:4). 이 두 개의 밭은 경건한 자들에게 풍성한 위로의 추수를 제공해 준다. -존 셰필드(John Sheffield, The Rising Sun,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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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뿌리고." 의인의 추수는 은밀하고 신비하다. 이는 마치 땅속에 묻혀 있는 옥수수 씨와 같아서, "저희 생명은 감춰져 있으며"(골 3:3)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요일 3:2).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의인과 관련된 하나님의 비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로, 하나님의 계획이야말로 깊은 비밀이 아니겠는가? 이는 인간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렇게 외치지 않았던가?:"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둘째로,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역시 비밀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육체로 나타나시는 일보다 더 감탄스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천사들마저도 이 비밀을 엿보고 싶어하였다(딤전 3:16; 벧전 1:12; 사 7:14을 보라).

셋째로, 죄인의 회개도 감탄할 만한 비밀이다. 이는 대석학이었던 니고데모조차 알 수 없었던 은밀하고도 고상한 비밀이었다. 자연적 출생도 신비할진대, 우리가 이 거듭남을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넷째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양심의 평화와 기쁨도 쉽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평화와 기쁨을 알지 못한다. 아울러 성령의 열심과 구원의 인치심도 그러하며, 말씀을 통해 얻는 능력과 활력, 감미로움도 마찬가지이다.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도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추수도 역시 비밀이다. 어디서 곡식이 자라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요약하면, 하늘나라의 비밀에는 첫째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있다. 누가 이를 깨달으리오? 둘째는 '그의 말씀'이다. 누가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일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셋째는 '인간 자신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은밀하고 기만적인가? 넷째는 '성령'의 역사이며, 마지막으로는 '심판'이다. 마지막 추수는 대부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그가 나타나실 때에 비로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게 될 것이다. -존 발로(John Bar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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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절.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이 두 절의 말씀은 매우 유익하고도 귀중한 권고의 말씀이다. 오, 주님, 저도 순종 후에 오는 저 계시들을 체험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거룩함의 매력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도 불가불 거룩해야 함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는 거룩함이 하나님의 핵심적인 속성임을 깊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악이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없으며, 세상이 악으로부터 결국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소란하고 황폐해져 있지만, 주님께서 곧 이런 악을 끝내실 것이다. -토머스 찰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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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우리는 고난 속에서 더욱 기뻐해야 한다. 거룩한 통곡은 그 안에 기쁨의 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끝날 때쯤 영혼은 그 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윌리엄 쿠퍼(William Cooper, The Morning Exerc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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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1) 주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지극히 복 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부터 진실되고 신실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이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섭리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주님의 지속적인 보호와 인도와 감화를 깨달을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된다. 아울러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은혜로운 교감을 누리며, 그가 주시는 소망 가운데 지극히 아름답고 영광스런 주님의 임재를 느낄 때 우리는 기쁨에 충만해진다.

(2) 주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느끼는 기쁨이 다른 모든 즐거움보다 뛰어남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없는 기쁨은 우리에게도 아무 유익이나 구원을 주지 못한다.

(3) 우리가 다른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즐거워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시기하거나 악의적인 분이 아니라, 심히 자유롭고 자상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에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신다. 한편,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은 여러 피조물들을 통해 우리 마음에 수많은 기쁨의 시냇물들을 흘려 보내신다. 우리의 육체는 여러 감각 기관을 부여받고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나름대로의 힘과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 몸의 기관 중 어느 하나도 헛되이 창조된 것이 없으며, 쓸데없이 빈둥거리는 부분도 없다. 모든 감각 기관과 사고 기관은 적당한 자극만 주어지면 수많은 일에서 갖가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때에 영혼은 이 기쁨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된다. 이러한 다양한 즐거움 때문에 하나의 무한한 즐거움을 버리면 안 된다. 주님은 그 속에 모든 종류의 참된 즐거움을 지니고 계신 큰 기쁨의 근원이시다. -헨리 그로브(Henry Grove, 1683-17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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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기뻐하며······감사할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시편 기자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일치시키고 있다. 이는 올바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자는 영혼으로부터 진실되게 주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기억과 연관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과 그로부터 받은 축복을 늘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하나님 찬양의 뿌리와 열매를 언급하고 있다. 뿌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며, 열매는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에 대한 기억이다. -무스쿨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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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절. "마음이 정직한 자······의인이여." 어떤 이들은 '의로운 자' 혹은 '정직한 자'라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테지만 그런 자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솔로몬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라고 묻고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고 대답한다. 전혀 즐거워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워하라고 권하는 것은 헛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의인이 아무도 없는데 '의인'들에게 즐거워하라고 권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11절 후반부에서 금방 찾을 수 있다. "의인"이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가리킨다. 이 구절이 첨가된 것은 위선자들을 제외시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본 단어의 엄격성을 다소 완화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이전처럼 본 단어를 엄격한 의미로 사용할 때 거기 해당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단어는 의인의 자격 제한과 범위를 나타내 준다.

(1) 제한:이 기쁨에서 제외되는 자들은 모이기를 꺼리는 자, 거짓 그리스도인, 얄팍한 마음의 위선자, 겉으로만 회개하고 마음은 변하지 않은 자 등이다. 우리 구주께서 이르시기를, 저희는 금식하는 듯이 보이기 위해 얼굴을 초췌하게 만드나 이는 사람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 것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의를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며, 겉 모습이 아니라 속 모습을 보신다.

(2) 범위:이 기쁨은 어디까지 적용되며 어떤 사람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 신실하게 한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완벽한 의로운 자들뿐 아니라 이 세상의 신실한 의로운 자들도 역시 이러한 분깃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가로막는 '빗장'이 되기도 한다. -토머스 가테이커(Thomas Gat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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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힌트]

1절. 하나님의 주권은 여러 측면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기쁨의 주제가 된다. 특히 이것이 은혜의 통치로 나타날 때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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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할 때 수반되는 것. (1) 성령의 불길. (2) 말씀의 빛. (3) 세상의 동요. (4) 장애물의 제거. (5) 하나님의 영광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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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절. (1) 율법 수여에 수반되는 공포:"그의 번개." (2) 그 공포의 이유. ① 인간의 죄악을 드러냄. ②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 ③ 인간을 대신해 율법을 이행할 자의 필요성을 보여줌. -G.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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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 율법 수여에 관한 언급. (1) 율법 수여자의 전령:'죄의식'(4절). (2) 그의 임재의 효과:'양심의 가책'(5절). (3) 율법의 선언:'가르침'(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 등을 통해, 6절). (4) 율법 수여의 효과:하나님의 '나타나심'(6절 하반절). -C.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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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난공불락의 능력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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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우상 숭배로 인해 생기는 마음의 혼란. 물론 이 혼란은 영적 혼란이다. 우상의 타파, 우상에 대한 실망, 우상에 의한 상처, 우상의 제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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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1)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공포에 사로잡힌다. (2) 교회는 그 가운데 즐거워한다.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혹은 (1) 세상이 기뻐할 때 교회는 슬퍼한다. (2) 세상이 슬퍼할 때 교회는 기뻐한다. -G.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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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1)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인격적으로, 최우선적으로, 습관적으로,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라. (2) 우리가 해야 하는 일:"악을 미워하라." 악한 행위, 악한 글, 악한 말, 악한 생각; 악을 거부하고, 악을 제압하며, 악을 대체시키라. -W.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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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1)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짓는 특징:"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2)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적 특징:"악을 미워하라." (3) 그 보상:"영혼을 보전하사", "건지시느니라." -G.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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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절.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의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함. (1) 하나님은 신실함과 선의를 갖고 경건한 자들의 영혼을 지키신다. (2) 하나님은 권세와 위엄을 갖고 대적들로부터 의인들을 구원하신다. (3) 하나님은 지혜와 거룩함을 갖고 의인들을 가르치시고 위로하신다. -르 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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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1) 어디에 뿌려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제목 아래 주어질 수 있다:하나님의 목적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 안에, 성령의 사역 안에, 말씀의 약속 안에, 마음에 이뤄지는 은혜의 역사 안에, 영광 중에, 하늘에서 행해지는 준비 안에.

(2) 추수의 시절은 언제인가? 대답은 이러하다:첫열매의 수확은 현재 삶 속의 특정 시기에 부분적으로 이뤄진다. 좀더 온전한 수확은 죽음의 때에 이루어진다. 가장 온전한 수확은 심판의 때에 시작하여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① 부분적인 추수는 현재 삶의 특정 시기에 이루어진다. 특히,

(가) 환난의 시기는 의인들에게 있어 이미 뿌려진 즐거움을 추수하는 시기가 된다. 이때에 저들은 고난을 당하지만, 늘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놀라움은 적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후에는 그 고생을 모두 잊게 된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깨닫고 큰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치게 하시고, 비가 온 후 하늘에서 맑은 햇살을 내리사 땅에 내린 이슬 방울이 더욱 영롱하게 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끄시지만, 거기서 저들에게 큰 위로를 내리신다.

(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핍박받는 시기는 의인들이 기쁨의 알곡을 거두는 시기이다. 피 흘리기까지 저항하고 죄와 싸울 때, 저들에게는 보통 이상의 위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극렬한 시험 중에서 저들을 능하게 하시고 견고히 붙들어 주신다. 핍박이 지나고 나면, 저들은 예전에 겪지 못했던 큰 격려가 저희에게 허락되었음을 깨닫게 된다(요 16:33).

(다) 하나님이 힘들고 어려운 봉사에 의인들을 부를 때, 이는 저들에게 있어 기쁨의 추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 얼굴 빛을 저희에게 비추시고 사랑을 그윽히 흘리실 때, 저들은 그가 어디로 보내시든 가고 그가 무슨 일을 시키시든 행할 준비가 이루어진다.

(라) 사탄과 쓰라린 투쟁을 벌인 후에, 의인들은 샘 솟는 기쁨을 통해 소생함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도 시험을 당하신 후에 천사들의 위로를 받으셨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격려를 주시기 위해 주님은 요한계시록 2:17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마) 성전에서 하나님을 기다릴 때, 의인들은 그를 만나며 이 가운데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② 좀더 온전한 추수는 죽음의 때에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영혼이 떠나갈 즈음에 기쁨의 추수를 거두지만, 대개는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직후에 거둔다.

③ 의인들이 가장 충만히 기쁨의 추수를 거두는 시기는 마지막 심판날이 될 것이다. 그때는 그리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5&category=94&page=2&document_srl=9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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