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시가서

스펄전 시편강해 - 시편1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8:28

스펄전 시편강해 - 시편1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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