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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 시편 강해 5편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8:29

스펄젼 시편 강해 5편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다. "관악"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힐로트"(twlyhn)인데 이는 '구멍을 내다'라는 뜻의 다른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피리나 플루트 등 관악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노래는 호른, 트럼펫, 플루트, 코넷과 같은 관악기에 맞추어서 부른 노래인 듯하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 머리말을 해석하는 적합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0인역에서는 이 머리말을 "기업을 얻을 자를 위해서"라고 붙였고, 아벤 에스라(Aben-Ezra)는 이 머리말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에 맞추어 이 시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이 머리말을 해석하는 데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시 1편부터 4편까지의 내용은 의인과 악인의 위치, 특성, 그들의 운명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시에도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기 자신과 그를 대적하는 원수를 대조시킨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시를 읽는 자는 주 예수의 존귀하신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7절 하나님께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간구한다.

 

8-12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강 해]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말로 표현된 기도이고, 두번째는 조용한 묵상과 같이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 깊이 있는 소망이다. 우리의 기도에서 말로 표현된 것은 기도의 핵심이 아니라 기도의 의복과도 같은 것이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마음이 혼란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영혼에 힘을 더하며, 하나님께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할 수 있다. 다윗은 말로, 묵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묵상을 통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1절.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이 말은 지극히 인상적인 표현이다. 오, 주여! 내가 바른 것을 구했다면 이것을 내게 허락하소서. 내가 당연히 구했어야 할 것을 빠뜨렸다면 내 기도에 부족한 것을 채워 주소서.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영광스러운 중보자를 통해 여호와께 드린 기도를 살펴보소서. 당신의 지혜로 살펴보시고, 저울로 달아보시고, 내 간절한 마음을 판단하소서. 내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구했다면, 자비를 베푸사 당신의 시간에 응답하소서!

 

 

기도하는 자가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있다. 아! 그러나 말은 많이 하지만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보다도 기도하는 심령을 가져야 한다. 외양으로는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헌신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기 전부터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무릎을 펴고 일어난 후에도 우리는 기도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2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여기에 나오는 대명사를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분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고 간청하는 핵심과 같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가? 바로 이 구절이 그 핵심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분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잘 아신다. 그분은 우리 나라의 왕이시다. 왕은 그 백성의 소리와 간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이방인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는 백성들이다. 그분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왕이 되신 것이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 다른 시편에는 "내 흐느껴 우는 소리"라고도 표현되었다. 흐느끼는 울음에는 소리가 있다. 이 소리는 듣는 자의 가슴을 녹이고 귀를 울린다. 이 소리는 간청하는 소리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이다. 부르짖는 소리에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유창함이 있다. 이 소리는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흘러간다. 아! 형제 자매들이여, 때로는 우리가 기도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때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부르짖어 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가 부르짖어 우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그 의미를 아신다.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자녀의 울음은 음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소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영역본에서는 "기도하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된 역본도 있으며<NIV, NASB, RSV>, "기도하리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번역된 역본도 있다<KJV>. 히브리어 성경에는 미완료 동사가 사용되었으며, 현재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본 강해는 미래형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했다-역자 주.)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 그분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깨어진 독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 마시게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샘에서 마셔야 한다. "내가 주께 기도하리이다." 다윗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기도할 것이라고 결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그는 결코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3절.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이 구절은 기도라기보다는 시편 기자의 결심을 말한 것이다. 주여, 내가 잠잠하지 않으리이다. 내가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내 마음이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곧 시들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벙어리 귀신 들린 자들은 없다.

 

 

"아침에." 이 시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아침에 한 시간은 저녁에 두 시간과 그 가치가 같다.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영혼에 떨어지게 하라. 매일 아침 시간을, 우리 인생의 아침을 하나님께 드리자. 새벽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열고, 밤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닫자. 새벽별이 뜰 때, 그리고 황혼에 별이 뜰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자.

 

 

3절을 번역본으로 읽으면서 그 뜻을 이해하려면, 활을 쏘는 사수를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라는 구절을 보면서 '기도'의 화살을 활에 먹이고 쏘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바라리이다"라는 표현은 활을 쏜 후에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쳐다보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내 기도를 진열하리니'라는 뜻으로서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제물을 태울 나무를 쌓고 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탁자에 진설병을 놓는 것을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썼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나의 기도를 당신 앞에 진열하리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침이 되면 제사장이 제단에 제물을 놓듯이, 내가 제단에 나의 기도를 진열하리이다. 트랩 선생은 "내 기도를 정렬하리이다"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내가 내 기도를 정렬시켜서 그것들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두고서, 내 힘을 다하여 당신께서 받으시도록 기도하리이다.

 

 

"바라리이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차파"(hpx)라고 하는데, 원문의 뜻을 잘 살려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내가 밖을 보리이다.' 당신의 응답을 보기 위해 밖을 보리이다. 내가 기도한 후, 당신의 축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리이다." 이 단어는 아침을 기다리는 자가 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처럼 당신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바라리이다. 제단에 제물을 쌓듯 내 기도를 당신 앞에 진열하고, 위에 계신 당신을 바라보리이다. 그리고 이 제물을 태울 불이 하늘로서 내릴 것을 바라리이다.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기도하기 전에 조용한 묵상을 하지 않아서 기도의 향기와 효과를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둘째, 기도한 후에 소망을 잃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겸손한 마음이나 별생각 없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둘러 가지는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도 특별한 간구를 하지 않는다면, 간구한 후에도 그 결말을 지켜보지 않는다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마음의 묵상이 끊이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이 묵상은 기도의 물레를 돌리는 물과도 같다. 메마른 강의 수문을 열고서 물레를 돌리고자 한다면 이는 얼마나 게으른 일인가? 열심을 품지 않은 기도는 죽은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는 것과 같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기도하는 것은 눈먼 사냥매를 데리고 매사냥을 나가는 것과도 같다. 기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지만, 그분은 다른 도구를 통해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으나, 이 땅의 흙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성령께서는 기도의 역사를 일으키시나, 그분은 금으로 그릇을 치장하듯 열정적인 영혼의 생각을 도구로 사용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는 찬양과 기도의 불이 타오르게 하자. 그러나 마른 풀이 타듯 조급하며 일시적인 것이 되지 않고, 장작불이 타오르듯 오래오래 타게 하자.

 

우리는 또한 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는가? 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보지 않는다면, 마치 알을 낳고서 돌보지 않는 타조와 같다. 씨를 뿌리고서 추수하지 않는 게으른 자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고서 창문을 열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이 내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분의 은혜의 창문을 열고 축복해 주실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묵상하며 준비하고, 기도한 후에 기대하자. 그리하면 우리의 기도는 진정 더 많은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5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후,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잔인하고 악한 원수를 탄핵한다. 그가 사용하는 논리는 지극히 타당한 논리이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멀리하실 것을 기도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그들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나를 해하려는 자들을 미워하며 기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당신은 악을 미워하시나이다. 주께 간구하옵나니 악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엄숙한 진리를 배우자. 죄악이 어떤 형태로 아름답게 치장된다 할지라도, 그분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악이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여도 그분께는 아무런 매력도 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가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사용했던 비열한 짓은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거룩하신 여호와는 우리와 같으신 분이 아니시다.

 

 

4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악은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없다. 아! 그리스도와 마귀는 이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데, 우리가 그 둘을 모두 손님으로 모시려고 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마음속 일부분이라도 마귀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결코 유하지 않으신다.

 

 

5절.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죄인들은 오만한 자들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이는 오만한 자가 행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하늘의 궁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이 땅의 왕들도 어리석은 자들을 부하로 쓰려 하지 않는다.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을 온전히 구분하여 가까이하지 않으신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조금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온전히, 철저하게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경고해야 할 것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악을 행하는 자뿐만 아니라 악을 말하는 자도 멸망받는다는 것을 유의하라. 거짓말하는 자들은 모두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서 사람의 법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하나님의 법을 피하지는 못한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짧은 날개를 가졌다. 그들이 날아간다 해도 멀리 가지 못하고, 곧 파멸의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은 자신의 피에 취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으로 시작한 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속는 것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옛 속담에도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속이는 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다.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품으신 증오가 얼마나 강력하고 뿌리 깊은지 알 수 있겠는가?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구절과 함께 이 시의 첫째 부분이 끝이 난다. 시편 기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구원을 간구하며, 악인의 특성과 운명을 묘사했다. 이제 그는 이것을 의인의 모습과 대조시킨다.

 

 

7절. "오직 나는······주의 집에 들어가." 나는 멀리 서 있지 않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듯, 나는 당신의 전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전에 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잘한 것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난 죄가 지극히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전에 들어갈 때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들어가겠나이다. 당신의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기에, 이것을 의지하여 당신께 나아가리이다. 당신의 심판은 헤아릴 수 있으나, 당신의 인자는 끝이 없습니다. 당신의 진노는 무게를 달 수 있으나, 당신의 인자는 무게를 달 수 없습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거룩한 성전을 향한다. 당시 성전은 땅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라 회막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눈을 들어 성전을 바라본다. 이 성전에 여호와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하시고, 두 그룹 사이에 거하셨다(출 25:18-22). 다니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자.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이제 이 시의 둘째 부분에 다다랐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논리를 반복해서 전개하며, 왜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한다.

 

 

8절. "여호와여······나를 인도하시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인도를 받듯이, 소경이 친구의 인도를 받듯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실 때 그 길은 안전하고 기쁨이 있다.

 

 

"주의 의로." 내 의로 인도하지 마소서. 내 의는 불완전하오니 주의 의로 인도하소서. 주는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내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성도들이여! 우리가 우리의 길을 포기하고 주의 길을 걷기를 소망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길이 우리 목전에 곧게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크신 인자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의 바다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9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 나오는 악한 사람에 대한 묘사를 다른 성경 구절과 함께 인용하여 로마서 2장에서 모든 사람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는 다윗의 원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 표현은 지독한 표현이다. 열린 무덤은 구역질나는 곳이고, 독기가 서려 있으며, 지독한 병과 죽음이 있는 장소이다. 이 무덤은 "열린" 무덤이다. 이것은 큰 문젯거리다. 이 열린 무덤에서는 무서운 독가스가 솟아 나오고 주위에 죽음과 파멸을 불러온다. 악한 자의 목구멍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 목구멍이 닫혀 있기만 해도 얼마나 큰 자비일까! 악인의 입으로 침묵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닫힌 무덤처럼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 그 결과 가슴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뿜어 댄다. 열린 무덤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여행을 하는 자들은 쉽게 넘어져 이곳으로 빠져들게 되며,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 악한 자를 주의하라. 그가 말하는 것 중에 당신을 파멸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성품을 파괴하고, 그의 악한 목구멍에 있는 무서운 무덤으로 당신을 매장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있다. 부활의 때가 되면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품까지도 부활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학대를 당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큰 위로가 된다. "그때에 의인들은······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세상은 당신을 악하다고 생각하고 당신을 매장시키려 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의롭게 살았다면, 무덤이 열리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그때에 죄인의 열린 무덤도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토해 낼 것이며,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이 구절은 "저희는 기름칠한 혀를 가지고 있나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기름칠한 혀는 악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칠한 혀에 속아 넘어갔다. 동물 중에는 혀로 개미를 잡아먹는 동물이 있다. 기다란 혀에 기름을 칠하고서 개미를 잡아먹는 인간을 상상해 보라. 그는 기름칠한 번지르르한 말로 순진한 사람을 유혹하고 덫에 걸리게 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늑대가 혀로 양을 핥을 때, 그는 양의 피로 이빨을 적시고자 준비하는 것이다.

 

 

10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0절.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다윗은 원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를' 대적한다고 하지 않았다. 오, 주여! 그들이 내 원수였다면 내가 그들을 용서하였으리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원수를 용서할 수 없나이다. 우리는 우리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를 용서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세련된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이 너무 가혹하고 귀에 거슬린다고 한다. 그들은 "아! 이렇게 저주하는 것은 너무 복수심에 끓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한다.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소원이 아니라 예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며 도피처를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나는 이 구절을 읽고서 복수심을 품는 자를 아직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고서 이 구절의 특성을 판단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다. 여기 살인자가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재판관이 살인자에게 준엄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해서 당신도 재판관처럼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시편 기자는 재판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악인을 저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 이처럼 저주할 수는 없다.

 

 

겉으로 축복하면서 속으로 저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로마의 어느 늙은 제사장이 프랑스의 황제를 축복했으나 사실은 저주했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그는 겉으로는 축복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정반대로 행했다. 그는 죄인들에게 임박한 저주를 경고했는데, 이것은 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네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당할 파멸에 대해 경고할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이 심판의 메시지는 땅을 심판하실 재판관이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릴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악인의 운명과 대조적인 의인의 모습에 대해 나타난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시편들과 같은 것이다.

 

 

11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1절. 기쁨과 즐거움은 성도들의 특권이다. 죄인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 우리의 기쁨은 충만할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웃었으나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눈물을 흘리지만, 영원히 즐거워할 것이다.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승리의 소리를 발할 것이며, 그들이 괴로움 가운데 탄식할 때에 우리는 즐거움의 소리를 외칠 것이다. 우리들의 즐거움은 거룩한 즐거움이며, 그 기초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여호와,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우리가 매일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그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에는 음악이 있고, 우리의 마음과 하늘 나라에 음악이 있음은, 여호와 우리 주께서 우리의 힘과 노래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12절.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어떤 것도 그들의 기업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분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며, 선하시고 인자하신 그분은 그들로 만족케 하실 것이다. 이 축복은 현재 우리가 받는 축복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축복은 먼 미래에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이 약속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을 축복에는 어떤 제한도 없으며, 그 귀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성도들이 인생의 전투 현장에서 싸우는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 하나님은 성도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신다. 고대에는 사람을 온전히 둘러쌀 만큼 거대한 방패가 있었다. 다윗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에인즈워스는 이 구절에서 왕의 투구로 관을 쓰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영광과 보호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 여호와여! 이처럼 은혜로운 대관식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1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사람들이 하는 기도 중에서 많은 부분이 그저 헛된 말과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것과 같아서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들으실 가치도 없다.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간절한 마음도 없고 그 결과에 대한 소망도 없는데, 이런 기도는 헛된 말을 나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한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응답받을 것을 확실히 믿으며, 단호하고 지속적으로 간절히 간구를 드리며, 헛된 소망으로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는다. -로버트 레이턴.

 

 

1절. "심사/묵상." "묵상"은 영혼의 간구를 말한다. 묵상이 영혼이란 통에 좋은 술을 담는 것이라면, 기도는 그 통에 호스를 연결하고 술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먼저 묵상을 하고, 이어서 입으로 기도했다:"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시 39:3, 4). 묵상은 기도를 낳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과 부모의 이름을 함께 불렀다:"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묵상이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권총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 창세기에는 이삭의 묵상이 나온다:"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70인역, 제네바역, 트레멜리우스(Tremellius)는 책의 여백에 "기도하다"라는 주를 달아 두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타나그"(gnt)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도하다', 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단어는 매우 가까운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쌍둥이가 한 자궁내에서 자라듯이, 이 두 가지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묵상은 기도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기도는 묵상에 대한 가장 좋은 결론이다.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서 기도했듯이, 성도들은 묵상을 통해 영혼의 창문을 열고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 -조지 스윈녹.

 

 

1, 2절. 다윗은 기도를 "나의 말", "나의 부르짖는 소리"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을 "귀를 기울이사", "통촉하소서", "들으소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다윗의 감정과 간구가 얼마나 급박하고 전심을 다한 것인가를 점증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다윗은 "귀를 기울이사"라고 했다. 이 말은 '내 말을 들으소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말을 단순히 듣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와 "심사/묵상"을 "통촉"하시고 이해하셔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나는 깊은 염려 가운데 말하나 이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통촉하시고 이해하소서.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부르짖나이다. 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이해하소서. 오, 여호와여 나를 이해하신 후에는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사 당신께서 듣고 이해하신 것으로 나를 멸시치 마소서." 그러나 '귀를 기울이시고', '통촉하시고', '들으시는' 행위가 하나님의 각각 다른 행동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전달하는 우리의 감정이 이처럼 변화가 있고 감정의 증가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라고, 이어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나아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무시하시지 말 것을 바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네 영혼도 눈을 뜨게 하라

 

우리의 육신은 영혼의 갈 길을 먼저 가나니

 

꽃이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리듯

 

진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가슴을 펴네

 

눈을 뜨면 맨 처음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분 안에서 잠들기까지 그분은 종일 너와 함께하리라.

 

그러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자지 말아라

 

새벽이 열리면 너는 기도를 드려야 할지니

 

만나는 태양이 떠오르고 나면 좋지 않은 것

 

뜨거운 태양은 꽃을 시들게 하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라

 

세상이 닫혀 있을 때 하늘 문은 열리는 것이라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과 함께 걸어 보라

 

숲속에서 흔들리는 가랑잎 소리를 들어 보라

 

나뭇잎도 아침의 찬양을 드리지 않는가?

 

떡갈나무도 스스로 있는 그분을 아는데

 

네 모든 염려와 걱정을 던져 버리라

 

그리하면 온 종일 주님을 찬양케 되리라.

 

-헨리 본(Henry Vaughan, 1621-1695).

 

 

3절.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헤만(Heman)은 "아침에 당신께 기도드리리"라고 했다. 아침은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영혼은 신선하며, 어떤 잡념도 들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행하는 거룩한 의무는 '아침의 날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에드워드 레이너(Edward Reyner, 1658).

 

 

3절. "아침에." 버넷(Burnet)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우리 조상들의 시대에는 이웃 사람이 아침 일찍 와서 주인을 만나고자 할 때, 종은 '주인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한다."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말은 "내가 기도를 정렬하리라"라는 뜻이다. "내가 야곱처럼 주께 계속 간구하고, 계속 간청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리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수사적인 표현을 모두 제해 버리고 간단히 말한다면 "당신 앞에 내 말을 정돈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단어를 계속 내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말을 잘 정리해서 제시해야 한다.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을 구분하고 잘 정돈해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조셉 캐릴.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다윗이 기도하는 태도이다. 기도하는 태도는 "내가 주께 기도하고"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다. 둘째, 다윗이 기도한 후에 취하는 행동이다. 기도한 후에 취하는 행동은 "바라리이다"에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 군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 다윗이 기도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정렬시켜서 전투에 나가는 것처럼 전투 대형으로 세운다. 히브리어로 "테라크"(^rf)가 쓰였는데, 이 단어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둘째, 다윗이 이처럼 기도한 후에는 보초가 서는 관망대 위에 올라가 정탐꾼처럼 그가 승리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히브리어로 "차파"(hpx)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다윗은 그가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대오를 지어 잘 정돈시킨 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보내시는지 주위를 잘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지 않는 자는 바보이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며, 매우 약한 자이거나 매우 악한 자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많은 화살을 쏘아 대면서도 화살이 어디로 가는지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토머스 브룩스.

 

 

3절. "내가 바라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위를 바라보겠다고 했다. 그는 이 타락한 세상을 내려다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가를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시 85:8). 당신도 이와 같이 결심하라.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 7:7). -윌리엄 그린힐(William Greenhill, 1650).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결심한다. 내가 장사를 하리라. 나의 영적 일용품을 보내어서 이익을 얻으리라. 내가 기도한 후 잊지 않고 그 응답을 바라보리라.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으나,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달리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리라.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갔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신뢰하여 그를 돌아오게 하시리라. 오! 하나님께서 집으로 보내시는 배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까! -조지 스윈녹.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믿음은 기도를 지지하고 붙들어 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내 영혼을 붙들어 은혜로운 응답을 기대하게 한다:"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 곳에나 화살을 쏜다. 그리고 그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그의 기도에 어떤 결과가 오는지 결코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기대감을 심어 준다. 무역하는 상인이 장사를 할 때, 그는 바다에 띄워 보낸 배에 무엇을 실었는지, 현재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계산한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그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리면서 무엇을 보냈으며 아직 응답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미 받은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인지 계산해 본다. 믿음은 기도의 배를 띄워 보내고 아직 그 배가 돌아오기 전 기다리는 시간에, 영혼으로 조용히 안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때로 믿음은 기도의 응답을 얻고서 승리의 함성을 외치게 한다. 이 믿음은 성도의 영혼으로 자비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인자가 임할 것을 알고서 괴로운 생각을 잠재우게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전에 성도들로 찬양을 돌리게 한다······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많은 기도들이 잃어버린 바 된다.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믿는다면, 왜 기대하지 않는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기도할 때 보였던 신뢰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오,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당신이 간구한 것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라······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가를 기대하며 대궐 문에 앉아 있었다. 당신도 이처럼 행하라. -윌리엄 거놀.

 

 

4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사람이 무딘 칼로 종이를 자른다면, 사람은 종이를 자르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잘못 잘라진 것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다. 무딘 칼이 종이로 잘못 잘라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는 소리를 내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불협화음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다.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가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다. 사람이 저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제자리에서 비틀거린다면, 사람이 말로 움직이게 하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비틀거리는 것은 말로 인한 것이다. 사람이 철로 기구를 만들지만 녹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철로 된 기구에 녹이 스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행동이 일어나게 하는 분이시지만, 악한 행동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시다. 악한 행동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불의를 만들지 않으셨다.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4-6절. 하나님께서 악인을 멀리하시는 것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여섯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첫째, 그분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둘째, 그들은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한다. 셋째, 그분은 그들을 던지시고, 그들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넷째, 그분은 그들에게서 마음을 돌리시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 다섯째,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 여섯째,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대적하고 멀어지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 이처럼 악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분명히 임하는 심판이다.

 

"행악자"라는 말은 죄질이 가장 나쁜 죄인들로서 고의로 악한 죄를 짓기로 마음을 굳힌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죄를 열심히 또한 능수능란하게 지으며, 죄를 짓는 데 명성을 얻고자 야망을 가진 자처럼 부단히 죄를 짓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할 일에도 이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이들은 "행악자"들이다. 악명 높은 죄인들은 죄로 사업을 한다. 모든 죄가 악한 일이지만, 죄인들 중에서 별난 자들을 "행악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죄를 짓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자들이다. 거짓을 사랑하여 거짓말하는 자에 대한 구절이 요한계시록 22:15에 나온다. 거짓말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을 진정 좋아해서 거짓말을 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다. 이처럼 죄를 짓는 데 탁월한 자들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도다"(시 58:2). 시편 기자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 악이 있다고 하지 않았고, 악을 행한다고 했다. 마음은 사람의 내면에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죄 지을 것을 연구하고 날조하여 악한 목적을 만들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조셉 캐릴.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 죄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로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과 원수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만 깨끗게 할 수 있다! 성경을 믿는 자들이 이것을 다 알아야 하지만, 죄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라도 죄가 지극히 죄스러운 것임을 조금만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것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토머스 아담(Thomas Adam, Private Thoughts, 1701-1784).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라:신 7:22 잠 6:16 계 2:6, 15.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그분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따라 이러한 죄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죄의 행위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행악자들도 그분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윌리엄 거놀.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미워하신다면, 죄악은 얼마나 미워하시겠는가! 사람이 독성이 있는 동물을 싫어한다면, 그 독은 더욱 싫어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면, 우리도 또한 죄를 미워하고 또 힘을 다해 미워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잠언의 말씀을 들어 보라:"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 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 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6-19). -윌리엄 그린힐.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그분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 행악자를 미워하신다. 이로 인해 멸망당할 것을 알면서도 죄를 떠나지 않는 자, 이처럼 악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치 않으시리라.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당해야 한다:"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7). 여호와께서 분노 중에 찢으신 자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미워하는 자를 찢으신다(참조. 욥 16:9). 이처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머리에 진노를 쌓으니, 진노를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롬 2장)! 그분의 영이 싫어하는 자들을 사랑의 품안에 안으시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파멸을 당해야 한다(잠 21:15). 율법이 그런 자들을 저주하고 복음이 그들을 경계한다면, 이 땅과 지옥의 심판을 받아 그는 멸망할 것이다. 여호와의 강한 손이 그를 친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는 없다(시 68:21)······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멀리하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허용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시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악을 미워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했다(시 45:7)······그리스도께서 악을 미워하시는 것처럼, "행악자"도 미워하신다. 악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과 친밀하게 지내지 말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나 경건을 비웃는 자나 경건의 능력을 방해하는 자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즐거워하지 말라(고후 6:14-18). 당신이 악한 자들과 가까이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나 이런 일을 행하는 자와 교제를 나누지 말라.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B.D., 1621-1686).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주께서는 재미로 하든 진정으로 하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 재미로 거짓말을 하고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진정 지옥으로 갈 것이다. -존 트랩.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를 대적하여 전투를 하던 곳에 상수리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그의 교수대가 되었다. 그가 타고 갔던 말은 그를 교수대에 달아매는 자가 되었고, 그가 자랑하던 긴 머리는 그를 매는 밧줄이 되었다. 악인은 그가 소유한 것들이 어느 땐가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때에 그를 잡는 덫이 될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윌리엄 카우퍼(1612).

 

 

7절. "주를 경외함으로······경배하리이다." 공포심이 생기면 외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품듯이, 주를 향한 경외심은 외부의 잡다한 것들에서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수행해야 할 거룩한 의무에 집중시키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다. 도장으로 밀랍을 찍는다면 도장에 새겨진 조각이 밀랍에 그대로 찍히듯이,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새겨져 있으면 당신이 행하는 모든 행사에 그것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윌리엄 거놀.

 

 

7절.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성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중보자 되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아버지는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솔로몬은 성전을 바라볼 때에 이것을 생각했다.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D.D., 1620-1677).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구절은 참으로 복된 말씀이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소망과 경외심, 이 두 가지를 행사해야 한다. 갈렙이 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듯이(삿 1:15), 이 두 가지는 하나는 위에서,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오는 것이다. 경외심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감미로운 자비를 바라볼 때 소망이 생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마치 맷돌의 윗짝과 아랫짝 사이에 있듯이,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거해야 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위선자들이 행하는 것이며, 그들은 안전과 건방짐이라는 두 가지 모순되는 것들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마르틴 루터.

 

 

9절.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어 있을 때, 영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어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혼의 부분 부분이 이처럼 죽을 병에 걸려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이 영혼을 깨끗게 하고 회복시키신다면, 이는 얼마나 위대한 치료인가! 사람의 폐나 간은 육체의 일부분이다. 이것들이 병들었을 때 이것들을 치료한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영혼은 완전히 썩어 버렸다:"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을 치료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치료인가!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토머스 굿윈.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 구절은 악한 자들의 방탕하고 더러운 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죽은 시체는 썩은 냄새를 풍긴다. 이 시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열린 무덤처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이 사람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이처럼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이다. 무덤에서 나오는 악취로 안에 있는 시체가 썩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죄인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로 그 영혼을 알 수 있다. -로버트 홀데인(Robert Haldane, Expositions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1835).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교훈한다. (1)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는 썩은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무덤에서 악취를 내듯이 악인도 더러운 말을 내기 때문이다. (2) 무덤은 그 안에 놓인 몸을 썩게 하듯이, 악인은 그들의 잔인한 말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한 심연과도 같다. (3) 무덤은 그 안에 있는 몸을 모두 썩힌 다음에도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몸을 썩힐 수 있듯이, 악인은 그들의 말로 다른 사람을 넘어뜨린 후에도, 삼킬 자를 분노 가운데 다시 찾아 나선다.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 1653).

 

 

9절.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마음은 악마의 소굴과도 같다. -존 트랩.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시편 기자의 기도에는 원수들에 대한 저주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로운 자들이 동조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과 같은 일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신 것과도 같다:"이제 나무를 베어 버리소서. 더 이상 그를 중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이 아버지를 배반하였사오니, 그들의 많은 허물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이와 같이 악인들을 저주하면서도 그는 성도들이 그의 결정에 동조할 것을 바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계 18:20).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나무를 찍어 버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도 역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도끼로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

 

아브라함이 소돔을 파괴하던 천사 곁에 섰더라면,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면, 그도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불과 유황이 하늘로서 내려오게 하라!" 그러나 그가 복수하는 심정으로 한다거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들을 저주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시편에서 악인을 저주하는 난해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진정한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언한 후에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선포하게 하는 신명기 27: 15-26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에 동참하는 것이며 요한계시록 19:3에 나오는 것처럼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치며 공의로운 심판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앤드류 보나(1859).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일반적으로 저주의 시를 대할 때 다음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다윗의 시를 묵상할 때마다 시편의 주제를 따라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소서. 그가 죄를 고백하며 당신의 용서를 구할 때면, 내 마음도 겸손하게 하소서. 그가 당신이 베푸셨던 은혜와 앞으로 베푸실 은혜를 인해 찬양을 드릴 때면, 내 영혼도 기쁜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하게 하소서. 그가 원수를 저주할 때면, 내 영혼으로 겸허하게 하소서. 나는 다윗이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할 만큼 의롭지 못하나이다. 내 마음이 나를 속여 내 원수들을 당신의 원수로 착각하지 말게 하소서. 다윗은 진실된 마음으로 당신의 원수를 저주했으나, 나는 악한 마음으로 내 원수를 저주할까 하나이다. 나로 경건을 가장하여 원수를 갚지 말게 하소서.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

 

 

12절.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우리에게 달려와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해도, 만일 하나님께서 방패로 우리를 지키듯이 그분의 인자로 우리를 둘러 지키신다면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공격하는 자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 악행을 제어하시며, 우리 발 아래 엎드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는 너무나 교묘하고 능력이 있고 능수능란하여 우리가 대적할 수 없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그들을 대적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우리 자신의 지혜만 의존하다가 넘어지고 상처를 받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하나님께 겸손히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어느 때고 기꺼이 도와주시지 않았던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 너무도 확실하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 32).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 누구에게 피하겠는가! 숲의 사자가 부르짖으며 우리를 무섭게 하고 괴롭힌다 해도, 잠시 동안 괴롭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슬로 묶으실 때에는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티모시 로저스(Timothy Rogers, 1691).

 

 

12절. "방패로 함같이." 루터가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펼쳤던 주장이 이단의 주장과 같다고 하며 카예타누스(Cajetan) 추기경은 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루터가 그에게 나아갈 때 있었던 일이다. 추기경의 총애를 받던 자가 루터에게 물었다:"작센(Saxony)의 제후가 지금까지 당신을 보호했으나 이제 만일 그가 당신을 버린다면 누구에게서 은신처를 찾겠는가?" 루터는 "하늘의 은신처 아래서 찾지요"라고 답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뒤돌아서서 자기 갈 길을 갔다.

 

 

12절.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다른 방어용 무기는 몸의 어느 일정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방패는 육체의 어느 일정한 부위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투구는 머리를, 흉배는 가슴을, 그리고 다른 무기는 신체의 또 다른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며, 바로 그곳에 붙들어 매져 있다. 그러나 방패는 몸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래서 방패는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몸 전체를 덮으려면 길고 넓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방패가 몸을 모두 덮기에 그리 크지 못하다면, 숙련된 군사는 이 방패를 이리 저리 움직이며 그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나 칼을 막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몸 전체를 방어한다. 믿음을 활용하면 어떤 부위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방패는 몸 전체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군사의 무기까지도 방어한다. 방패는 화살이 머리뿐만 아니라 투구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슴과 흉배를 모두 지킨다. 이처럼 믿음은 무기 중의 무기이고, 다른 모든 은혜를 보존하는 은혜이다. -윌리엄 거놀.